이상문학전집 1 - 시
이승훈 엮음 / 문학사상사 / 198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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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箱-김해경-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만큼 유명한 인물이죠. 하지만, 이상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수수께끼의 인물이죠.

이상을 처음 만난 것은 10대 후반이었습니다. 그후 지금까지 이상은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일제의 식민지 침탈이 가장 극심했을 때, 모더니스트 이상은 그 식민지 내부에서 한 발 쓱 뒤로 빼고 세상을 바라본 것 같습니다.

20년대부터는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사회주의 사상이 급속히 퍼져나갈 때였고, 민족주의와 독립운동이 활발하던 때였음에도 많은 작가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 외면하게 되는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라고 할 수밖에 없을 듯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상 역시 자신의 시대에 대해 무책임한 지식인이었고 성실하지 못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유독 ‘이상’에게는 애정이 있는 걸까요? ‘이상’은 이를테면 ‘문제적 인간’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많은 작가들이 있었고, 그들 가운데는 친일파가 되었거나 해방 후에 북한으로 넘어갔거나-납북된 경우도 있지만-남한에 남아서도 대부분 체제에 순응하는-그들이 식민지 체제에 순응했듯이-인물로 남았지만, ‘이상’은 죽음을 택했다는 것이 그 이유일 것입니다.

‘이상’은 봉두난발에 백구두, 단장을 짚고 기생집에서 ‘창부가’를 잘 부르는 퇴폐적인 부르주아 인텔리의 인물이기도 했고, 애인과 멀리 중국으로 몰래 떠난 어린 동생에게 눈물이 쏙 빠질만큼 감동적이고 애틋한 편지를 쓰던 정 많고 다감했던 오라버니이기도 했고, 두 아버지를 모셔야 했던 장남의 고뇌를 늘 품고 살았던 미리 성숙해버린 어른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시가 난해하다고 하지만, 그의 시에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회의하고 자신과 시대에 대한 관계를 회의하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그의 수필은 지금까지 나온 그 어떤 작가의 글보다 재미있고, 아름답고, ‘맛’이 있는 글임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자신을 일컬어 스스로 ‘박재가 되어 버린 천재’라고 했던 ‘이상’, 안타깝고 애틋한 마음으로 언제나 내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그의 전집은 문학사상사에서 4권으로 정리되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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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 1 (양장) - 제1부 개미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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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에서 나온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를 읽었다. 400쪽에 가까운 책을 반나절이 넘게 쉬지않고 읽으면서 개미의 세계를 넘어 지구와 우주에 대한 신비에 새로운 눈을 뜨는듯 했다. 이 책은 그동안 나온 독특한 소설들 가운데 하나로, 움베르토 에코, 파트리크 쥐스킨트 등과 함께 읽는 즐거움을 주는 소설이다.

소설의 구성도 매우 독특하게 꾸며져 있다. 전혀 관계가 없는 두 개의 이야기가 끝까지 가서는 하나로 만나도록 해놓았다. 추리소설의 기법을 도입한 것도 극적 긴장감을 높이는데 효과를 보이고 있다. 작가는 소설가이기 전에 で개미박사と여서 개미의 생태학적 보고가 매우 정밀하고 풍부하며 뛰어난 상상력과 함께 개미의 삶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전문가가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생물학적 내용들이 문학과 만날 때, 작품은 뼈와 살을 얻는 것이다.

불가사의한 개미의 집단적,사회적 생활이 인간의 삶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으며 또한 오래도록 살아남으리라는 것은 일종의 예언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하지만 지구에서 살다가 사라지는 포유류의 한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개미]는 깨닫게 한다. 인간은 우주라는 무한한 공간에 도전을 하는 능력있는 존재이긴 하지만, 정작 지구의 표면에 가까이 살고 있는 수천억의 곤충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인간만큼이나 다양한 사회성을 가지고 있는 개미를 통해 인간과 대비시키며 공존을 해야하는 당위성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다른 어떤 생물과의 대화를 시도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였지만, [개미]에서처럼 과학적이고 구체적인 대화는 없었다. 인간이 위대하다는 것은, 다른 생물들이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인간이 먼저 생물들을 향해 말을 걸었다는 것이다.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이 시도는 사실 전부터 있어왔다. 돌고래의 음파를 분석해서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지능있는 동물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도 인간이다. 이처럼 인간들은 인간들끼리 나누는 상호소통의 기능을 확대하여 다른 생물들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 소설은 아직은 미래를 가상하고 있지만 어쩌면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개미의 생활은 매우 치밀하고 적확해서 독자가 마치 개미굴에 들어가 살고 있는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고 있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은 그 이후로 나온 책들도 몇 권 읽었지만, 더 이상은 읽지 않게 되었다. [개미]를 능가할 만한 작품이 없었기도 하거니와, 그의 상상력과 작품 수준이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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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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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슈피겔만의 [쥐]는 만화책이다.

‘만화’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쥐]의 주제로 곧바로 들어간다면,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태인이 겪은 비참한 상황을 ‘만화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아트 슈피겔만의 아버지는 폴란드에 살던 유태인으로 그의 가족, 그의 아내와 아내의 가족이 겪은 비극에 대해 구술한다. 수십명의 가족, 친척들이 모두 죽고 결국 극소수의 형제와 부부만 살아남은 가운데 노년을 미국에서 보내는 유태인의 삶에 대해서도 현실을 말하고 있다.

이 만화는 무엇을 주장하려고 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지만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충분하게 전하고 있다.

독일군-나찌-의 잔학함에 대해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공분을 느끼게 하고, 유태인들의 무저항에 대해서도 어리석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문제는, 아트 슈피겔만처럼 별 ‘악의없이’ 자신의 가족사를 그리는 사람마져도 유태인의 전략에 일조를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태인들은 조직적으로 ‘유태인 학살’에 대해 끊임없이 여론을 환기하고 재생산하고 있다. 그 자신이 유태인의 피가 흐르는 스티븐 스필버그는 유태인의 수난사에 대해 흥행에 성공하는 영화를 만듦으로써 돕고 있고,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분야에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제기하는 예술가를 지원하면서 재생산하고 있다.

유태인 학살을 거론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역사는 잊어서는 안된다. 인종을 말살하려는 인종우월주의자가 다시 나타난다면 인류는 존재의 의의마져 상실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해도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뭔가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유태인은 소수라고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실제의 힘은 매우 강력하다. 그것은 그들이 2천년동안 떠돌아 다니면서 배운 지혜의 결과겠지만, 그들의 생존을 위해 예전의 자신들과 같은 다른 민족을 말살하는 행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찌들에 의해 독가스 등으로 학살 당한 유태인의 고통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면서 팔레스타인 민족에게 그보다 더 잔학한 방법으로 살해하는 것은 어떻게 변명할 것인지 궁금하다.

‘유태인’의 문제는 한 종족의 문제가 아닌, 세계 평화와 연결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우익 강경파에 의해 주도되고 있고, 미국의 이해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방향으로 중동의 중심에서 분쟁의 씨앗이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유태인이 자기 스스로를 불쌍하다고 소리지는 것도 이제 귀가 아플 정도가 되었고,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유태인 학살에 대한 고발 장면-영화, 소설, 만화, 다큐멘터리 등-도 신물이 날 지경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촘스키와 같은 동족-유태인-이 이스라엘의 파시즘화를 노골적으로 강도높게 비판하고 있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진정한 지성인이라면 자기 종족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도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것은 단지 ‘유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 내부에서도 ‘친일파’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오히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핍박받은 상황을 충분히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유태인들처럼 집요하면서도 사실적인 증언과 복원의 결과물들이 훨씬 더 많이 나와야 한다.

고통받은 사람들의 증언이 영화, 만화, 소설,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져야 하고, 그런 목소리가 사회에 크게 울려야 한다. 아직도 친일파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반민족행위자들이 출세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소위 진보를 말하는 자들이거나, 양심있는 자들은 ‘유태인’처럼 우리가 당한 수난의 역사를 우물처럼 자꾸 퍼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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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죄와 벌 (상)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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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또스또예프스키에 빠져들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또스또예프스키의 마력은 쉽게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범위도 넓고 깊이도 깊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의 이력도 소설만큼이나 드라마틱하죠. 또스또예프스키는 자신이 직접 처형 직전까지 가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기 때문에 더욱 삶의 냄새가 진하게 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가 도박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설을 썼다는 것도, 나이가 들면서 반체제 인사에서 왕정 옹호주의, 보수주의자로 변신해 가는 것도 충격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 인간에게 완벽함을 기대한다는 것은 부조리한 일이죠. 인간은 끊임없이 변하고, 또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니까요.

그렇더라도, [죄와 벌],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악령] 등 걸작들만을 써낸 작가의 변신-변절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네요-을 보면서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또스또예프스키를 위대한 작가로만 기억할 것인지, 아니면 반체제인사에서 극우주의자로 변신한 것을 두고 나약한 지식인의 전형이라고 비판해야 할 지, 초점을 어디에 두고 평가하느냐에 따라 상당히 달라지겠지만, 안타까운 마음에서 그의 작품만큼은 아끼고 싶은 마음입니다.

뭐, 또스또예프스키와 이문열을 굳이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위대한 작가-또스또예프스키 선생님, 죄송합니다. 이문열이 선생님과 동급이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작가로서 이룬 업적만 보고 단순 비교를 하는 것이니 용서하시길-가 시대의 흐름을 올바르게 읽지 못해서 점차 보수화하고 타락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 뿐입니다.

신경림 선생도 대학 입시공부를 앞두고 그만 또스또예프스키에 빠져서 입시공부는 팽개치고 또스또예프스키 전집만 읽었다고 했지만, 그만큼 마력이 있는 작가의 작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평생 삼국지를 두세번은 읽게 되겠지만, 또스또예프스키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늘 가까이 두고 싶은 책 가운데 하나가 또스또예프스키 전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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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달린다 - 개정판
요쉬카 피셔 지음, 선주성 옮김 / 궁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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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기 직전에 책을 읽는데, 어제는 늦게 잠자리에 들어 그냥 잘까 하다 책장에서 마음내키는대로 책을 꺼내들었다.

새벽 1시부터 읽기 시작해서 책을 다 읽고 말았다. 
요쉬카 피셔의 이야기는 언론에서도 소개한 이야기이므로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은 '달리기'에 관한 책은 아니다.
물론, '달리기'에 관한 정보가 있긴 하지만, 요쉬카 피셔가 하고 싶은 말은, '스스로 근본부터 바뀌어야 하며, 그것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다.
요쉬카 피셔는 젊을 때 운동을 열심히 했고, 싸이클 선수로도 활동할 만큼 운동에 관해서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달리기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이런 기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근본부터 바뀐다'는 말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아직 근본부터 바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듯 하다. 현실에 안주하고, 보수적으로 변해가고, 움직이기 싫어하고, 게을러지고, 나태하고...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합리화하는 것까지.
그래서 요쉬카 피셔가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존경스럽다.

몸이 자꾸 불고 있어서, 나도 운동을 해야 한다. 요쉬카 피셔만큼은 아니어도, 어떻든 몸에 붙은 여분의 '욕망'을 떨궈야 하는 것은 결국 내 '욕망'을 줄이는 것이니, 어찌보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대단한 결심을 할 것도 없이, 그냥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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