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진자 1 - 개정판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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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세계 최고의 지성인으로 노엄 촘스키가 뽑혔습니다. 2위는 움베르토 에코였는데, 점수 차이가 무려 두 배나 앞섰다는군요. 역시 노엄 촘스키의 이론과 실천이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움베르토 에코를 만난 것은, 90년대 저의 ‘지적 생활’에 일대 충격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80년대에 마르크스를 만난 것에 버금갈 정도로 대단히 신선한 충격이었죠. 처음 읽은 책이 바로 이 [푸코의 추]였습니다. 위 사진에서 아래쪽에 있는 것이 초판본, 위에 있는 것이 개정본입니다.

그 뒤로 움베르토 에코의 저작이라면 무조건 구입해서 다 읽었습니다. 아, [바우돌리노]는 예외입니다. 이건 읽다가 중간에서 멈춘 상태입니다. 도저히 계속 읽기가 안되는군요.

하여간, 움베르토 에코의 그 박학다식-박학다식일 뿐만 아니라 진보적인 세계관까지도 갖춘-의 미로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느라 한동안 정신을 못차린 것이 사실입니다.

움베르토 에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서양의 언더그라운드 히스토리를 몽땅 그러모아 놓은, 말하자면 잡탕 섞어찌개같은 것이긴 한데, 그것을 요리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비교를 시작으로 온갖 비밀과 암호와 신비가 뒤섞인 역사의 뒷면을 이리저리 꿰맞춰 이야기를 만드는 솜씨가 대단합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기호학을 가르치는 교수여서 특히나 이런 말장난에 도가 튼 것 같습니다.

[푸코의 추]와 [장미의 이름]으로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 멋쟁이 교수님은 서양에서도 군계일학의 존재인 듯 합니다. 그를 흉내낸 많은 아류작들이 국내에도 번역되어 나옵니다만, 읽어보면 전부 ‘조족지혈’입니다. 감히 움베르토 에코를 팔아서 어떻게든 관심을 끌어보겠다는 애처로움이 묻어납니다.

움베르토 에코를 뛰어 넘는 작가가 나오는 날이 오기를 바라지만, 그게 그리 쉽지는 않을 듯 합니다. 하여간, 책을 좀 읽는다 싶은 사람은 [푸코의 진자]를 필독해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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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크리스토 백작 1
알렉상드르 뒤마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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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에 저녁마다 잠자기 전에 읽어서 아직도 기억에 선한 책입니다.

예전에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일본어 중역에, 축약본으로 나와 있어서 읽고 나서 내용이 뭐가 뭔지 도통 알 수 없던 책이었습니다. 이렇게 번듯하게 완역본으로 나온 것을 읽고나니 그 대하 드라마가 감동의 물결로 마음을 적십니다. ^^

에드몽 당테스의 기이한 삶의 궤적은, 역시 당시 프랑스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권력이 출현한 이래, 민중은 늘 권력에 의해 불이익을 당하게 되고,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을 응징한다는 이야기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게 됩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그런 이야기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고 말입니다. 소설에서 많은 우연이 등장하는 것이 좀 극적 긴장을 약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권선징악, 힘없는 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안성맞춤입니다.

또한, 평범한 항해사였던 개인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고난의 과정을 통해 완벽한 한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도 이 소설의 매력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고난을 자초하기는 힘들다고 봅니다. 아주 특별한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결국, 외부의 환경이 개인에게 혹독한 채찍질을 할 때, 개인은 변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원작 소설이 워낙 훌륭하다보니 영화로도 몇 번씩 만들어졌는데, 사실 원작보다 더 나은 영화나 연극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줄거리지만, 실제 읽으면 또 다른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는 대하 드라마, 소설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 광고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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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농민전쟁 1 - 제1부 계명산천은 밝아 오느냐 - 양장본
박태원 지음 / 깊은샘 / 199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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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선생의 대하 소설, 갑오농민전쟁은 소설의 재미도 재미지만, 아름다운 우리말을 진솔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보석같은 책입니다.

더구나, 이 책은 박태원 선생이 말년에 병석에서 직접 손으로 쓸 수 없어서 입으로 부르는 것을 받아 적어서 완성한 소설이라고 하니, 선생의 그 집념이야말로 눈물겹습니다.

‘갑오농민전쟁’은 19세기말, 조선이 내외적으로 격동하던 시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동학난’으로 알려졌던 1894년 갑오농민전쟁을 역사적으로 올바른 평가와 함께 자리매김한 책이기도 한 것이 이 책입니다.

보수 역사가들이 ‘동학난’이라고 부르던 것도 모두 일제 식민지에서 배운 ‘식민사관’의 영향이었던 것을 우리는 80년대까지 그대로 따라 배웠던 것이고, 그 후에 민중 사학자와 재야 사학자들이 ‘갑오농민전쟁’을 다시 조명하면서 역사의 의미와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일찍부터 ‘갑오농민전쟁’을 민중의 권력에 대항하는 봉기로 규정하고 썪어빠진 조선 왕조와 탐관오리, 그들 권력자들이 불러들인 일본과 청나라에 대항한 조선 민중의 가열찬 투쟁이라고 해석한 것은, 북한의 정체성에 걸맞는다 할 수 있습니다.

민중의 삶을 피폐하게 한 것도 지배권력이고, 항거하는 민중의 힘을 두려워해서 외세를 끌어들인 것도 지배계급입니다. 결국 지배계급-권력이란 언제든 민중을 탄압하는 ‘반민중성’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수의 기득권에 연연할 때, 다수는 고통으로 신음하게 된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죠. 이런 경험은 천 년도 더 계속되고 있고, ‘생산 관계’만 달라졌을 뿐, 오늘 날에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역사 속에서 배울 것이 있다면, 민중이 권력과의 싸움에서 지지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입니다. 파리 꼬뮨도 실패했고, 우리는 실패한 역사에서 더 많이 배울 수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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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 세계 역사를 바꾼 스탈린그라드 전투 590일의 기록 서해역사책방 7
안토니 비버 지음, 안종설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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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한 문장을 제목을 한 것은, 단테의 책에서 인용했다기 보다는, 당시 독일군 포로수용소 입구에 써 있는 문장에서 가져온 것일 가능성이 더 높아보인다.

어쨌거나,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가름한-여전히 미국이 승리의 주역이라고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좀 의아해 하겠지만-이 전쟁에 관한 기록은 인상적이다.

히틀러는 우크라이나의 유전을 일찌감치 장악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 생각으로 독-소 협정을 파기하면서까지 소련을 침공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악몽이 고스란히 살아나 히틀러를 괴롭혔다.

파시스트 국가인 독일과 일인 독재권력 국가인 소련이 맞붙어서 결국 소련의 승리로 끝나고, 여기에 연합군과 함께 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고 끝나지만, 전쟁의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수 천 만명의 생명이 사라진 다음이고, 특히 병사가 아닌, 일반 민중이 더 많이 희생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기술하고 있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만 전쟁의 직접 희생자와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상황에서 굶주림, 치료를 못 받는 상황 등으로 사망한 민중들만 1천만명이 넘었다.

전쟁은 어떤 명분으로도 일어나서는 안되며, 전쟁, 그 자체가 악이다. 이 책에서 기술하고 있는 것은 전쟁의 승패가 아니라, 그렇게 싸우다 죽어간 이름없는 병사들의 외침이다. 그리고 이른바 ‘문명사회’에서 비이성적이고 반이성적인 히틀러와 같은 인물이 나온다는 것에 대한 경계이기도 하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일 수도 있다. 인간은 어리석고, 집단은 특히 우매하기 때문에, 여론 조작과 군중 심리 등으로 쉽게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것은 ‘문명’과는 그다지 관계 없을지 모른다.

필연적으로 전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면, 전쟁을 일으키려는 자, 전쟁을 선동하는 자, 전쟁을 일으켜서 이익을 보는 자, 전쟁터로 나가라고 부추기는 자, 이런 전쟁옹호론자들이 가장 먼저 총을 들고 최전선으로 나가길 바란다.

전쟁을 말하는 자야 말로 가장 악랄하고 이기적이며 사악한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야말로 비겁하고, 권력 앞에서는 꼬리를 내리고, 힘 없는 자들에게 군림하려는 파렴치한 놈들이기 때문이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전쟁을 해야 한다고 입에 거품을 무는 자는, ‘자기 파괴’ 밖에는 할 것이 없는 인간 이하의 동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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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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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겸손합니다. 중국에 노신이 있고, 미국에 노엄 촘스키가 있다면, 한국에는 리영희가 있습니다. 리영희 선생님이 노엄 촘스키와 비교 당하는 걸 기분 나빠하시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인텔리의 분류도 옛날 리영희 선생님의 글에서 읽은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인텔레에는 두 가지, 지식인과 지성인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지식인’은 많지만(아마도 99%쯤) ‘지성인’은 반비례해서 희귀한 존재입니다.

그 희귀한 지성인 가운데서 단연 군계일학인 분이 바로 리영희 선생님입니다. 이건 지나친 과장도 아니고 헛말도 아닙니다. 리영희 선생님 본인께서는 이런 말에 동의하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만, 저 역시 리영희의 ‘사상적 제자’를 자처하고, 그 분의 책을 읽으면서 ‘의식화’되었기 때문에 진심으로 리영희 선생님의 존재에 감사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깊습니다.

그간 발표하신 여러 저작과 글을 읽으면서, ‘실천하는 지식인’ 즉 ‘지성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나 주위 사람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가져오는가를 여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지성인이 호의호식하는 사회란, 일찍이 예가 없었습니다. 모든 권력이 곧 폭력이듯이 시대의 지성인은 ‘반체제’일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지성인’입니다.

이 책은 리영희 선생님의 자서전이어서, 선생님의 저서에서는 알 수 없었던 개인 기록들도 많이 나옵니다.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내용도 많아서 선생님의 삶을 이해하는데 퍽 도움이 되었습니다.

가끔씩 임헌영 선생님이 민망한 경우를 당하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물론, 격의없이 말씀하셔서 그런 분위기는 아니겠지만, 자서전을 대화 형식으로-선생님의 건강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하신 것도 퍽 신선한 시도였습니다.

리영희 선생님께서도 노신 선생님을 존경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지성의 계보라는 것은 역사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가 봅니다. 그것은 인종, 계급, 언어를 초월하여 인간의 보편성에 호소하는 ‘지성’의 힘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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