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밀하게 말하면, 내가 좋아하는 건 우라사와 나오키가 아니다.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건, 우라사와 나오키의 뒤에 숨어있는 정체 불명의 스토리 작가, 에도가와 케이시이다. 그는 <마스터 키튼>에서는 '카츠시카 호쿠세이'라는 이름을 썼고, <몬스터>에선 아예 자신의 이름조차 드러내질 않았다. <20세기 소년> 역시 진행패턴을 봤을 땐 이 정체불명의 스토리 작가가 뒤에 있을 거라는 게 중론이다.
(사실 에도가와 케이시나 카츠시카 호쿠세이라는 이름조차도, 20세기 초반의 미국 예언가 에드거 케이시와 일본 에도 후기의 우키요에 작가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의 이름에서 딴 필명일 뿐이다) 이처럼 다양한 작품에서 필명으로 활약해온 그는, 전문가 집단이거나 가공의 인물일 거라는 추측과 달리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로 확인된 상태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인 <해피!>나 <야와라!> 같은 작품엔 눈꼽만치도 호감을 갖고 있지 않으니, 결국 우라사와 나오키를 좋아한다고 말하긴 보단 이 정체불명의 스토리 작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이 작가의 최대 강점은 역시 꼼꼼하고도 방대한 자료 조사에 기초한 탄탄한 스토리텔링일 것이다. 아주 작은 단서들만 몇 개 던져주고, 베일 뒤의 진실을 추적하는 박진감 넘치는 구성은 사람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다시 전면에 드러난 작품 <푸른 길>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던 게 사실이나. 그러나 현재 <푸른 길>을 3권까지 읽은 소감은..."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화와 연출 능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결국 이 섀도우 스토리작가도 누구나 빠져드는 원패턴의 함정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일까! <몬스터> <20세기 소년>이 그랬듯, 주인공들은 존재하되 정체를 알 수 없는 범인과 지리한 두뇌싸움을 계속하고 있으며 단서는 이야기책(<몬스터>에선 동화, <20세기 소년>에선 켄지의 시나리오) 속에서, 아니면 가슴아픈 현대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진 섀도우 스토리작가인 에도가와 케이시(또는 카츠시카 호쿠세이)의 능력을 우라사와 나오키보다 높이 샀는데 <푸른 길>로 인해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화와 연출 능력에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푸른 길>의 작화를 맡고 있는 권가야의 연출 능력이 부족하단 얘긴 결코 아니지만, 이렇게 심한 원패턴의 스토리 작가와 세 번이나 작업하고도 매번 두근두근하게 그려내는 건 역시 우라사와 나오키의 능력 아니겠는가.

어쨌거나, 우라사와 나오키라는 이름은 화제의 작가이며 흥행의 보증수표고, 수집의 대상으로 충분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 아니겠는가. 데즈카 프로덕션과 함께 손잡았다는 <플루토 Pluto>는 언제쯤 우리나라에 소개가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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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ila 2004-05-12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롭게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