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딜런 자서전 - 바람만이 아는 대답
밥 딜런 지음, 양은모 옮김 / 문학세계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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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들이 많았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테러와 사고 때문에, 세계 여행조차 쉽게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란 현실과 맞닥뜨렸다.  유투브에선 언제든 전쟁의 참혹한 실황을 찾아볼 수 있다.  게임의 한 장면처럼 인명이 살상되는 자극적인 화면들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웬만한 영화의 특수효과 따위에는 감흥도 없다. 하여, 영화 업계에 일하는 사람들은 좀더 자극적인 화면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다.  세계가 더 나아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을 때, 기억해야 할 노래가 있다.  밥 딜런이 1962년 발표한 곡 "Blowin` In the wind 바람에 실려서"다. 


올해 일흔 다섯의 나이로 여전히 미국 포크 록의 대명사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가수 밥 딜런.  그가 파격으로 2016년 한림원의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심리적 지진동을 느꼈다. 올해, 사람들은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상을 점쳤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노벨상이 제 3세계 국가의 어느 시인, 작가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예측했을 것이다.  한림원은 놀랍게도,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고 결코 출판업자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인물이었던 밥 딜런에게 이 상을 건네주었다.  한국의 독자들도 당황했을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책을 사보지 않던 사람들도, 10월 한림원의 노벨문학상 발표에 맞춰, 수상자의 책 한 권쯤은 사볼 계획을 세우곤 하기 때문이다.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을 자격이 있나? 라는 문제로 뉴스의 초점과 사람들의 물음표가 옮겨갔다.  한림원은 이를 예측이라도 한 듯,"밥 딜런은 귀를 위한 시를 쓰는 사람이라고 치켜세웠고, 2천 5백년 전 호메로스와 사포의 시가 지금 읽히듯, 시의 전통을 이어가는 `위대한 시인'이라고 호칭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그거야 립 서비스 수준의 미사여구 아닌가.  밥 딜런의 노래조차 익숙하지 않은 국내 독자들에겐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미국문화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밥 딜런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결코 작지 않음을 알 것이다.  IT 천재였던 스티브 잡스에게도 이 포크송 가수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잡스의 자서전을 읽은 이들은 알게 될 것이다.


잡스의 젊은 시절을 지배한 두가지를 고르자면,  마약의 일종이었던`LSD'와 밥 딜런의 노래였다.  LSD는 불법이었고 철이 들면서 멀어졌다면, 일생 그의 영혼에 영향을 미친 것은 마약같은 밥 딜런의 노래였음을 그는 자서전에서 고백한다. 밥 딜런을 잘 모르더라도, 여러 가수에 의해 리메이크된 딜런의 대표곡들은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그를 1960년대 미국 민권운동사의 대표주자로 착각하게 만든 노래, "블로잉 인 더 윈드'의 가사를 보면, 한림원의 립서비스가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게 된다.  1960년대 미국은 베트남 전쟁과 흑인들의 차별철폐 운동이 가속화 된 시기다.  소련과 미국의 G2가 체제 경쟁을 가열화 시키면서, 수천개의 핵무기를 무기공장에서 제조하던 시기도 그때다 


언제든, 인류가 지구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던 일촉즉발의 냉전속에서 피비린내 진동하는 베트남 전장속으로 미국 젊은이들이 징집되어 끌려가던 때이기도 했다.  그들은 반전과 평화를 외치며, 주류에 반발하는 히피들로 신분을 세탁했다.  그 와중에 밥 딜런은 "블로잉 인 더 윈드"를 통해, 이 세계의 실상을 폭로하며 질문을 던진다.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봐야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전쟁의 포화가 얼마나 많이 휩쓸고 나서야 영원한 평화가 찾아오게 될까, 얼마나 많이 죽고나서야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을 깨닫게 될까,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다네"  밥 딜런  "Blowin` In the wind 中


하지만, 밥 딜런의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Chronicles: Volume One>(문학세계사, 2010)을 보면 사람들은 그가 전혀 다른 면모를 지닌 인물임을 깨닫게 된다. 2004년 출판돼 뉴욕타임스 논픽션 부문에서 19주간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딜런의 처음이자 마지막 자서전인 이 책은, 훗날 출판업계를 살린 희귀한 운명을 맞는다.  노벨문학상을 가수에게 줘버린 한림원을 탓하던 와중, 그가 자신의 내밀한 목소리를 전한 자서전이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 아니고 뭔가. 더군다나 이 자서전의 특색있는 집필방식과 목소리 톤은 수상소식을 전해듣고도, 2주간이나 침묵하며 한림원을 머쓱하게 했던, 밥 딜런에게 오해를 풀 기밀서류 같은 느낌을 전해줄 것이다.


아무리 직업적인 문필가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독자를 고려하지 않는 불친절한 자서전은 당혹스럽다.  맥락도, 서두도, 모두 생략하고, 독자에게 예의를 전혀 갖추지 못한 이 자서전은 마치 눈먼 작가의 목소리를 구술로 받아적은 듯한 문체를 유지한다. 꼭 단점만이 보이는 건 아니다. 어떤 화려한 꾸밈도, 기획도 없는 그의 글속에서 독자들은 딜런의 개성과 담박한 인생과 조우할 수 있다. 


"나는 일리노이에서 왔다고 했고 그는 그것을 받아적었다.  다른 일을 한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 나는 열 가지도 넘는 직업을 가졌었고 한때는 제과점 트럭을 몰았다고 말했다.  그는 그것도 적었고 그밖에 또 다른 일을 했는지 물었다. 건축공사장에서 일을 했다는 말에 그는 어디냐고 물었다. `디트로이트요', `여행을 다녔군요?' `예', 그는 가족에 관한 일과 가족이 사는 곳을 물었다. 나는 오래 전에 가족을 떠났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가정생활은 어땠습니까?' 나는 쫓겨났다고 말했다."  13-14쪽,  <바람만이 아는 대답>


딜런은 10살 때 처음 시를 썼다.  가수로 성공하고 난 후엔, 그림을 그렸고 모터사이클을 탔다.  그는 가수이자 시인이었고 화가라는 호칭을 들었다.  그는 결코 평범하지 않는 예술가였지만 일생 평범하게 보지 않는 타인들의 시선을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다.  1959년 미네소타 대학에 입학했으나 2년만에 중퇴했고, 전기기술자였던 아버지와 불화도 그때부터 시작된 듯하다. 아버지는 그가 기술자가 되길 원했으나, 딜런은 집을 나와 자신의 우상이었던 포크가수 우디 거스리의 밑으로 들어간다.  빈민가였던 그리니치 빌리지 주변 클럽을 배회하며, 연주하고 노래했고 훗날 유명 음반 제작가 존 하몬드에게 캐스팅 돼 콜롬비아 레코드를 통해 데뷔한다.


첫 앨범 `더 프리윌 밥 딜런(1963)에 들어있는 `블로잉 인 더 윈드'가 히트를 치며, 단박에 사회 저항 운동의 대표 음악가로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자서전에서 딜런은 자신을 규정하는 모든 언론과 대중의 호칭에 거부감을 표한다.  "나라는 사람은 어느때나 그 누구에게 속해본적이 없으며, 자신은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노래하고 있을 뿐"이라고 일갈한 것이다. 이 말을 실천에 옮기기라도 하듯, 저항적인 어쿠스틱 포크 가수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일렉트릭 사운드로 전환을 시도했다. 그 이후, 그는 배신자 소리를 들었지만 한치의 흔들림 없이 자신의 음악세계를 구축해갔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밥 딜런의 대략적인 음악 인생의 여정이었다.


아직 젊은 시절 쓴 자서전이기에 미완성 느낌이 강하게 드는 자서전을 읽으며, 그의 모든 것을 포착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딜런이 대중들의 분노를 뒤로하고 음악적인 변신에 거침없었던 이유와 마찬가지로, 그는 삶을 정해진 것으로 규정하는 것에 저항했다.  유대계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지만, 인생과 음악을 대하는 시선은 차라리 낙관론자도, 염세주의자도 아니고 불가지론자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앞에는 번개를 가진 검은 구름이 잔뜩 낀 이상한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오해하고 생각을 바꾸지 않았으나 나는 곧장 그리로 갔고 그 안은 활짝 열려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세계는 신이 주관하지도 않았지만 악마가 주관하는 것도 아니었다."  311쪽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그가 언론이 조작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일생 평범한 일상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고, 그것에 가치를 두는 인생을 살아왔다는 점이다. 자신의 노래가 사회저항적이란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런 노래만을 앨범에 담은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신의 가사가 때로는 저항적이지만, 목가적이기도 하고, 사랑에 흠뻑 젖어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살고 있는 공동체와 개인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 자신의 노래였다고 고백한다.  하여, 자신을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가 아닌 목동으로 봐달라고 요구한다.  밥 딜런은 자서전의 상당 부분을 소박한 삶에 대한 바람으로 채워넣고 있다. 


"멀리 갈 곳이 없었다. 남들은 무슨 꿈을 꾸고 사는지 모르지만 내가 꿈꾸는 것은 아홉시부터 다섯시까지 일하고 나무가 양쪽에 늘어선 집에 하얀 말뚝 울타리를 치고 뒷마당에는 붉은 장미가 피는 집에서 사는 것이었다. 그것이면 충분했고 그것이 나의 가장 깊은 꿈이었다. " 130쪽


그의 꿈이 우리가 알고 있는 밥 딜런의 투사의 이미지와 상반될까?  아니라고 본다.  그가 언급했듯, 가장으로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족을 먹여살리고, 큰 욕심 부리지 않고 평범한 일상인의 모습으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어찌 소박하다고 타박받아야 할 꿈이란 말인가.   `블로잉 인 더 윈드'에서 노래 하듯,  인간은 어리석은 전쟁과 폭력의 노예로, 비양심과 탐욕의 화신으로, 증오와 갈등의 주동자로,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어리석은 모습을 언제까지 반복해야만 그것을 그치고, 반성하고, 올바른 길로 접어들며 세계를 지금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어갈 수 있을까라고 묻고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는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소망하는 세계가 밥 딜런이 꿈꾸었지만 사람들이 경시하는 그 `평범과 평화'안에 있질 않은가.  


한림원의 노벨문학상 시상식에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밥 딜런.  그 사유를 그는 `선약이 있어서'라는 애매모호한 답으로 대신했다. 수상소식을 듣고도 2주간 침묵한 것 때문에 비난도 받은 그였다.   하지만, 무척 긴 수상소감문을 편지로 보내왔다.  그 속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수많은 음반과 콘서트를 했지만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제 노래'입니다. 다양한 문화 속, 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 자리를 찾은 것 같아서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한번도 스스로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내 노래가 문학인가?' 그 질문을 던져주고 이런 멋진 답까지 준 스웨덴 한림원에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  밥 딜런 올림"    형식과 이미지에 치중하지 않고, 담박한 노래와 시로서 살아가는 진정한 인간의 진심이 담긴 문장들.   평범함이란 인류의 오랜 꿈이자 이상이었음을 그는 몸과 마음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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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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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겠는가.  다만 여행할 시간과 여유가 없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하루키는 선택받은 사람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세계 도시들을 배회하고 그곳에서 살았다.  진정한 우리시대의 코스모폴리탄(세계인)이 있다면,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다.  부러우면 진다는 말이 있다.  하루키의 `자유방탕'한 일생의 여정은 찌든 현실속에 안주하는 일상인에겐 호사로운 인생이다.  하지만, 그의 여정은 호기심과 열정이 있는 자에게 주어진 기회이기도 했다.  왜냐면,  눈요기와 미식을 즐기는 부자들은 하루키와 같은 호기심으로 세계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자들의 여행과 하루키의 여정이 갈라서는 지점이 여기 아닐까.  하루키에겐 독보적인 그만의 시선이 있다. 우리가 하루키의 여행담을 읽으며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런 거다. 


여행은 내가 하면 됐지, 여행기 따윈 읽어서 뭐할까.  그렇다.  하루키가 아니었다면 사실 이런 책엔 관심 없었을 것 같다.  내가 이 책에서 기대했던 것은 하루키는 여행기를 어떻게 쓰는가 란 점이다.  그 다음으로, 하루키는 여행중에 무엇을 주목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였다.  산문이나, 소설이나, 가볍고 짧게 툭툭 던지는 하루키의 감성적인 문장들도 기대했다.  신작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문학동네,2016)는 그런 점에서 하루키의 개성이 살아있는 여행담이라고 봐도 좋겠다.  이 책의 제목은 좀 독특하지만, 나름 그럴싸한 사연이 있다.


하루키는 라오스에 가면서 일본발 직항편이 없어, 베트남 하노이에서 1박을 했다. 그때 한 베트남 사람은 "왜 하필 라오스 같은 곳에 가시죠?"라고 묻는다.  `베트남에는 없고 라오스에만 있는 것이 대체 뭐길래요'라는 뉘앙스를 다분히 담고 있는 질문이었다.  라오스보다 국제적인 관광지로서 더 유명한 베트남을 놔두고 왜 라오스같은 오지에 들어가는지 궁금했던거다.  독자들도 라오스는 좀 생소하지 않은가. 물론 라오스가 어디 붙어있는지는 상상이 가고 쌀이 많이 나오는 나라라 해서 `라오스(rice?)'라 했을 거란 추측도 가능하다.  맞는지는 모르겠다.  하루키의 대답은 위트있다.


" 자,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좋은 질문이다.  아마도, 하지만 내게는 아직 대답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지금 라오스까지 가려는 것이니까.  여행이란 본래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159쪽,  <라오스에는 대체 뭐가 있는데요?>,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는 소설을 쓰는 중간중간에 짬을 내서, 소품들을 자주 써온 작가다.  단편소설, 잡문, 에세이, 그리고 여행담이다.  하루키는 그런 글들을 자신의 폴더 속에 잘 보관해 뒀다가 기회 있을 때 기고를 하고, 또 그것을 책으로 묶어 단행본으로 출판한다.  그의 소품들은 소설만큼이나 인기 있다.  이 책도 예외가 아니다.  잡지사에다 오랜 시간 기회 있을 때마다 기고했던 글들을 한 권으로 묶어냈다.  여행기를 쓰기 위해, 일부러 떠난 여행이라기 보다는 그곳에 살면서 혹은 다른 일로 특별한 여행을 시작하면서, 글로 남긴 글 모음이다.  미국 보스턴에 관한 이야기는 2편으로 나뉘어 실렸다.  1편 `찰스 강변의 오솔길'은 미국에 정주하던 시기를 기억해 쓴 글이다.  2편 `야구와 고래와 도넛'은 보스턴을 훗날 다시 방문하며 남긴 감상이다. 


하루키식 여행의 특색이 조금씩 엿보인다.  그는 훌륭한 풍경을 찾아다니고, 미식을 즐긴다.  좀더 디테일하게 거주민들의 삶을 가까이서 듣고,보고, 경험하는 일들이 많다.  하루키는 음악광이자 마라토너이자 지독한 독서광이다.  여행을 하면서도, 그는 음악회를 찾아나서고, 중고레코드 가게를 기웃거리며, 숙박지를 벗어나 하루에  한번은 조깅을 하고, 도시의 서점들을 방문해 책 몇 권은 꼭 구입한다.  하루키 여행담의 특색있는 지점이라고 한다면, 어느 도시에 가나 자신의 관심사를 잊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스턴 인근에 살며, 보스턴 마라톤 대회를 총 6번이나 완주한 일에서 보듯 하루키는 매우 정열적인 면이 돋보이는 작가이기도 하다.   마라톤을 필력의 원동력이라 표현한 것이 괜한 호기가 아님을 여행기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뉴욕에 대한 여행담은 온통 재즈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뉴욕 여행담의 시작을 단정적인 어투에다 재즈 음악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관심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타임머신을 딱 한 번 사용할 수 있다면, 하루키는 1954년 뉴욕으로 날아가 그곳 재즈클럽에서 클리퍼드 브라운&맥스 로치 5중주단의 라이브를 원없이 들어보고 싶다고 말한다.  물론, 재즈 음악엔 관심없는 나같은 사람에겐 이해불가지만.  그는 나흘간의 뉴욕 여정 가운데 매일 밤 재즈 라이브를 즐기러 다녔다. 그것 뿐이 아니라, 낮에는 재즈 레코드 가게를 돌며 LP를 사들였는데, 이런 기행적인 여행담의 끝을 이렇게 마무리 한다.  "이 이상의 행복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130쪽) 


젊은 시절 글을 쓰기 위해 머물렀던 그리스의 두 섬, 미코노스 섬 그리고 스페체스 섬에 대한 여행담은 아름다운 한 편의 서정시 같은 느낌이 든다. `지금으로부터 이십사 년 쯤 전 나는 그리스의 섬에 살았다...'로 시작하는 이 글을 읽다보면,  먼 이국 그리스는 독자에게 한 편의 완벽한 이미지로 변신해 눈앞에 선명히 다가온다.   성공작 <노르웨이의 숲>과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쓰기 시작한 곳이기도 한 두 섬 생활은 하루키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도 특별한 느낌을 준다.  하루키는 24년 만의 섬 여행을 통해, 자신이 하숙하며 글을 썼던 집을 어렵게 찾아가 보고 깊은 정감에 빠져든다. 그는 당시 아침부터 낮까지 소설을 쓰고, 저녁이 되면 바닷바람을 맞으며 산책 겸 마을로 나가 바에서 와인이나 맥주를 가볍게 마시곤 했다.  하루키는 맥주 마니아기도 하다. 


`워드프로세서가 없었던 시절 대학노트에 볼펜으로 꼼지락꼼지락 글씨를 써 내려갔다'고 회고하는 하루키의 글을 읽다보면, 그 섬에서의 생활이란게 구체적인 옷을 입고 독자의 머릿속에 그려지기 십상이다.  하루키가 작가가 아니었다면,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말그대로 유유자적 여유있는 생활을 즐기는 그저 그런 부류의 이방인이지 않았겠는가.  독자의 눈에도, 또 섬 주민들의 눈에도 말이다.  하지만, 그는 매일 자신의 분신같은 작품을 창작하고 있었다.  섬 생활은 휴가가 아니고, 노동의 일부분이기도 했던 거다.  이런 생활은 로마에서도 이어졌다.  노트와 펜으로 글을 쓰던 시대는 저물었다. 하루키는 그런 낭만적이자 좀 불편하게 글을 썼던 마지막 작가세대가 아닌가. 편리한 글쓰기 도구들이 넘쳐나는 시대, 보다 쉽게 글을 쓸 수 있을까.  아니다.  도구보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고, 그것은 노트와 펜의 불편함 따위완 본래 관계 없다. 


"1980년 후반, 띄엄띄엄이나마 이삼년 로마에 살았다.  시내에 있는 아파트를 빌려서(조금이라도 나은 환경을 찾아 세 곳쯤 돌아다녔다) 소설을 썼다.  작가라는 직업의 이점은 뭐니뭐니해도 펜과 종이만 있으면 (대체로) 전 세계 어디서나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컴퓨터와 인터넷, 휴대전화, 페덱스도 아직 일반적이지 않던 시절이라 이래저래 일상적으로 불편함 점이 많았다.  (중략..) 그러나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원래 이런 거지 뭐'라는 각오가 생기고 나니 그런 불편함도 나쁘지 않았다."  199쪽 


남의 여행기 한 줄 읽느니, 차라리 동네 한바퀴 도는게 더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하루키의 글에 대한 애정이 아니었다면, 읽지 않았을 책을 읽으며 그래도 이 맛에 하루키를 읽는단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하루키의 문장들은 전기자극 같은 찌릿함을 전해왔다.  하루키는 이 여행담 속에서도, 과감하게 세계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표현하고, 인생을 규정하고, 평가하는 것이 서슴없다.  보스턴을 재차 방문하고 해변의 시푸드 레스토랑에서 레몬즙이 가득 뿌려진 해산물 요리를 맛보며, "이런 식사를 즐기다보면 인생의 미스터리니 다음번 빅뱅이니 알게 뭐냐"고 시니컬해지는 하루키에 동의하지 않을 독자가 어딨겠는가. 


지구반대편 시리아 알레포란 도시에선,  매일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미국과 러시아의 공중 융단폭격으로 희생당하고 있다.  내전을 핑계로 개입한 강대국의 국제정치적 이해관계속에서 병원조차 폭격으로 폐허가 되는 몰상식과 비문명의 시대를 세계 시민들은 목격하고 있다.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배웠던 인간 생명에 대한 존엄, 인생에 대한 가치, 상호 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경은 현실 세계속에서 다 교과서적인 헛소리일 뿐인가.  하루키의 소설이나 산문속에서 정치색이 잘 보이질 않고, 세계와 인류와 문명에 대한 교훈과 가르침을 독자에게 주려는 태도가 없는 것은 왜일까.  인류가 스스로의 가치를 배반하는 시대에는 차라리 휴머니즘이나 도덕적인 가르침은 모두 `사기'처럼 보인다. `괴물 유권자들'은 `괴물 정치와 정치지도자'를 잊을만 하면 이 세계로 초대한다.  그럴때마다,  인류가 간직해온 모든 진보적인 가치는 그런 괴물들의 합작으로 항상 퇴보하기 일수다.  이것이 허울좋은 민주주의의 실상이다.  교훈과 교과서는 넘쳐난다. 작가의 정치적 외면과 침묵은 차라리 그것 자체가 교훈이며 그것이 하루키의 스타일이 아닐까.


난, 그래서 하루키의 단정적인 세계 이해와 조금 `성질급한' 인생에 대한 단정이 반갑다.  사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해야 할 정치와 정책이 코메디보다 더 우스워질때, 우리 세계의 진실은 현실이 아니라 `소설'속에서 찾는게 낫다.  그때 인간은 현실보다 판타지 속으로 도피하는게 정신건강에 이롭다.   하루키의 글은 미세먼지에 익숙한 폐를 잠시나마 숨쉬게 하는 산소통이나 혹은 만성적인 불면증에 인위적인 단잠을 선물하는 `프로포폴' 같다.  


"여행지에서 모든 일이 잘 풀리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다'라는게 나의 철학(비슷한 것)이다."  137쪽


하루키의 여행담을 읽으며, 취향에 물든 여행이 꼭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덤이다.  여행자는 자기가 바라보고 싶은 것만 봐도, 나쁘지 않다. 자기가 가고 싶은 곳만 가도 나쁘지 않다.  여행중에 영화관에 들르거나, 커피숍에 들러 오후 한 나절을 보내거나, 훌륭하고 비싼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식사를 해보거나, 서점에 들러 몇시간이고 책을 뒤적이거나, 뭐 어떤가.  정해진것은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 여행이 재밌다.  지난번 짧게 떠난 여행에서 나는 프레디 머큐리의 음악만 듣고 다녔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그저 이름으로만 듣고 알게 지냈던 가수, 아 이렇게 아까운 사람이 너무 이른 나이에 죽다니..... 돌아오는 여행길에 이 멋진 가수를 알게 된 것은 그날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프레디 머큐리를 꼭 여행가서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다.  여행이 아니었다면, 그런 가수나 음악 따윈 들을 시간도, 여유도, 없었겠지.  하루키처럼 표현한다면, 이런게 진짜 알 수 없는 여행의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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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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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소설보다 에세이를 더 잘 쓴다.  물론 소설을 못쓴다는 얘기는 아니다.  소설가가 에세이를 잘 쓴다는 말은 칭찬이다.  몇 해 전 읽은 <달리기를 할 때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부터 재밌단 느낌이 들었다.  그 에세이집은 자신의 소설쓰는 인생을 평생 지속해온 마라톤에 비유해 풀어낸 에세이다.  하루키의 에세이가 흥미로운 건, 그 안에서 전혀 문학적인 태도로 글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에세이를 쓸 때, 초보적인 문학지망생 같은 문체를 유지한다.  이것이 일반적인 유명 작가들의 에세이집과 다른 점이다.  이게 그의 전략인지는 모르겠다. 내 말이 틀린 것인지 유명 소설가들이 펴낸 산문집을 한 번 읽어보시라.  에세이를 소설처럼 쓰는 작가들이 대부분이다.  왠 묘사는 그리 많고, 문체는 소설 문장 같은지,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모를 지경이다.  그런 화려한 문체는 감동을 주진 못하고 부러움을 사기에 알맞다. 아니면 열패감 같은 것?  글을 읽다가 독자들은 자존심이 상한다. 그래 너 잘랐다!?


하루키는 일단 쉽게 쓴다.  하루키를 읽고 있으면 이 사람이 내가 알고 있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였는지 의아해진다. 문장은 가볍고 거리낌없이 고백적이다.  자기 삶을 완전히 드러내놓는다는 의미에서는 아니다.  적당히 가릴것은 가리면서도, 글쓰는 인생에 관해서 이야기할때 그는 고해성사에 가깝게 삶을 그려낸다.  소설쓰는 인생에 관한 자전적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현대문학,2016)를 읽다보면, 자서전을 보는 듯하다. 거기에는 하루키가 소설을 쓰게 된 사연부터 젊은날의 방황, 고뇌, 그리고 자기세계를 구축해 온 역사와 투쟁이 담겨 있다. 초등학생이 읽어도 무난한 내용과 평이한 서술에 놀라게 된다.  그런데, 사실 하루키는 그렇게 겸손할 필요가 없는 작가다. 


현재 동양인 작가 가운데 노벨상에 가장 근접해 있는 작가라서가 아니다.  그가 노벨상을 받을거라는 얘기는 몇 해 전부터 떠돌던 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풍문으로 그칠일은 아니라는데 매해 도박사들이 하루키에 거는 배팅액이 그 증거가 될 테다. 이 작가는 일본에서 자신의 소설이 잘 팔리던 때 안주를 포기하고 일본을 박차고 나온다.  미국의 유명 잡지 뉴요커에 작품이 소개되고, 훗날 뉴요커 베스트셀러 순위 1위에 등극한다. 1990년대가 오면, 하루키의 소설들은 전세계적으로 번역 돼 읽히기 시작하는데 우리나라에 <상실의 시대>(원제:노르웨이의 숲) 바람이 불었던 때와 일치한다.  1990년대 러시아 베스트셀러 10위 목록의 절반 정도가 하루키의 책으로 채워질 정도였다.   `하루키 현상' 그 열풍은 그친게 아니라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럼에도, 하루키 글쓰기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소설가와 소설쓰기에 관한 친절한 메뉴얼 혹은 `레시피' 같은 글 모음이다.  소설을 써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안성맞춤이라고 할까. 소설을 어떻게 시작하고 써야 하는지, 이론에 관한 이야긴 하나 없지만,  소설쓰기와 소설가로서의 삶에 대한 교양수업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100권의 이론서보다 더 분명하게 소설의 정체와 소설쓰는 삶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내고, 갈망을 증폭시키는 매혹적인 글들로 채워졌다.  하루키를 좀 아는 독자들에게 유명한 이야기지만, 하루키는 자신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를 고백한 적이 있다.  야구광이었던 하루키는 자신이 자주 찾던 진구 구장 외야석 맨흙더미에 앉아 있다가 문득 소설을 써볼 수 있겠단 생각을 했다.  


"소설을 쓰자고 생각을 하게 된 날짜를 정확히 기억해 낼 수 있다. 1978년 4월 1일 오후 1시 반 전후였다. 그날, 진구 구장의 외야석에서 나는 혼자 맥주를 마시면서 야구를 관전하고 있었다.  (...) 배트가 강속구를 정확히 맞추어 때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구장에 울려 퍼졌다. 힐튼은 재빠르게 1루 베이스를 돌아서 여유 있게 2루를 밟았다. 내가 `그렇지 소설을 써보자'라는 생각을 떠올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의 일이다. "   <달리기를 할 때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 中


이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문제될 게 없다.  이 말이 그럴듯하게 보이는 이유는 그 날짜의 정확함과 공간적 배경의 구체성에 기댄다. 소설쓰기에 대한 하루키의 거짓말 같은 이야기에는 소설 장르가 가진 분명한 특징을 설명하기에 알맞다.  팩트를 통해 진실에 접근하는 것, 이때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문학이 궁극적으로 이 인간세계에서 찾아 헤매는 절대적 `아이템'이다.  하루키는 자신이 소설가로 발딛게 된 사연을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가벼우면서도 진실되게 포착해주고 있다.  하루키의 매력은 이런 데 있다.  그는 자신의 소설쓰는 삶을 과대포장하지 않는다.   작가에게 갖는 독자들의 편견이란 무엇인가.  작가는 우리와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별종들이란 생각이다. 


이른 결혼과 생계를 위해 20대에 시작한 음악주점 사장이었던 하루키는 새벽시간 가게문을 닫고 퇴근해 자신의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집필한다.  `키친소설'로 일명한 처녀작은 허름한 아파트의 식당 테이블에서 본업을 마친 후, 새벽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쓴 소설이다. 하루키는 이 소설로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랐으나 떨어졌고, <군조>지 신인상을 통해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하루키는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를 가벼운 붓놀림으로 이렇게 묘사한다. " 갑자기 무언가가 쓰고 싶어졌다. 그뿐이다. 정말 불현듯 쓰고 싶어졌다"(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中)  하루키가 문학에 입문하게 된 과정에 필연 같은건 아무것도 없다.  훗날, 일본정통 문학계가 하루키를 무시하게 된 배경이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문단의 입장에서 보면,  하루키 같은 작가는 `족보없는 듣보잡'이자 문학을 대하는 태도 또한 마땅치 않았을 게다.


하지만, 과연 독자들에게도 그렇게 비춰질까.  하루키의 이런 태도는 오히려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문학을 택한 독자들의 입장에선 공감할 만하다.  문단의 인정을 받은 작품을 `제조'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그것을 통과해야지만 문학을 할 수 있는 자격증을 부여하는 문단권력과 독자들이 하등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작가와 독자의 관계란 단순하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의 가치를 인정해주며 기꺼이 지갑을 열 독자가 필요하며,  독자는 순수한 열망으로 영혼을 흔들어놓는 작품을 생산해내는 작가를 원한다.  하루키는 책 속 <문학상에 대해서>란 장에서 "어떤 문학상도 훈장도 호의적인 서평도 내 책을 자기 돈 들여 사주는 독자에 비하면 실질적인 의미는 없습니다"고 언급한다.   최근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이 몰려드는 언론과 그네들의 지나친 관심에 "얼른 내 방에 틀어박혀 소설을 쓰고 싶다"고 토로한 것도 같은 맥락일테다. 


하루키는 이 책에서 글쓰기에 대한 고통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그 방법론적인 막연함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고백한다. 첫 소설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하루키는 창작의 고통이 아닌 현실적인 문제와 마주한다.  막상 소설을 쓰겠다고 하니 "아무것도 쓸 게 없다는 것을 쓰는 수밖에 없겠다고 통감"한 일이다.  이 말이 겸손이 아님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전반부를 읽다보면 느낄 수 있다.  하루키는 소설 도입부를 새내기 작가의 고충을 토로하는 글로 채어넣는다.  이 진솔함의 매력은 신선하다.  "모두가 잠든 새벽 세시에 부엌의 냉장고를 뒤지는 사람은 이 정도의 글 밖에는 쓸 수 없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中)  그러면 하루키는 글쓰기의 막연함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 `아무것도 쓸 게 없다'는 점을 거꾸로 무기로 삼아서 그 지점에서부터 소설을 써 내려가는 수밖에 없겠다, 라고 그러지 않고서는 앞선 세대의 작가들에게 대항할 수단이 없습니다. 아무튼 가진 것을 죄다 쓸어 모아 얘기를 만들어보자고 생각한 것입니다."  131쪽,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는 이런 과정을 거치며 `세계가 따분하고 시시한 듯 보이면서도 실로 수많은 매력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원석으로 가득'하단 진실을 발견한다. 그러면서 소설가란 이 원석을 발견하는 눈을 가진 사람이며 당신이 올바른 한 쌍의 눈만 갖고 있다면 그런 귀중한 원석은 무엇이든 선택 무제한, 채집 무제한이란 사실을 귀띔한다.  하루키는 소설을 쓰는 노하우을 몇 번에 걸쳐 언급한다.  일단 자신의 내적인 혼돈을 마주해야 된다.  혼돈은 의식의 겉표면에는 없다.  그걸 만나기 위해선 자신의 의식 밑바닥까지 혼자 내려가야 된다.  누구에게나 소설을 쓸 주제를 내면에 품고 있다는 얘기다.  이제, 작가는 그것을 충실하고 성실하게 언어화해야 되는데, 이 때 필요한 것이 과묵한 집중력과 좌절없는 지속력이다. 또, 그런 자질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신체력이 필요하다.  하루키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정해진 시간에 자고, 일어나 아침 나절 몇 시간 소설을 쓰고, 매일 마라톤으로 건강을 관리한다. 


하루키에게 마라톤은 `음의 기척'을 날려버리는 `푸탁거리'였다.  고뇌와 고통스런 창작 과정속에서 좌절하는 일반적인 작가들과는 다르게, 그는 35년간 즐겁게 소설을 써왔다.  하루키는 기쁘게 고백한다.  한번 뿐인 인생을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소설가로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라 표현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우리가 작가를 부러워하는 이유는 뭔가.  대부분의 작가들이 빈궁하다.  하루키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작가들은 몇 없다.  하지만, 직업만족도가 가장 높은 직업가운데 하나가 소설가란 조사도 있다. 그 이유가 어딨겠는가.  문학이 바로 자기표현의 수단이라서 그렇다.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다보면 그는 작가로 태어나지 않았다.  그저, 운이 좋아서 자신의 내적인 능력을 발견하고 그것을 깊이 있게 꾸준히 키워낸 케이스다.  누구나 하루키처럼 성공한 작가가 될 순 없다.  하루키의 작가로서의 삶에는 평범과 비범이 뒤섞여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단연코 그 평범함 아니겠는가.


" 그런데 어쩌다 소설을 쓰기 위한 자질을 마침 약간 갖고 있었고, 행운의 덕도 있었고, 또한 약간 고집스러운(좋게 말하면 일관된) 성품 덕도 있어서 삼십오 년여를 이렇게 직업적인 소설가로서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아직도 나를 놀라게 한다. 매우 크게 놀란다.  내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요컨대 그 놀람에 대한 것이고, 그 놀람을 최대한 순수한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는 강한 마음(아마 의지라고 칭해도 좋으리라)에 대한 것이다. 나의 삼십오 년 동안의 인생은 결국 그 놀람을 지속시키기 위한 간절한 업業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이 든다."  334쪽,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中 후기


난 한번도 소설을 써보겠다고 작정한 일이 없다. 아무튼, 내 기억에는 그렇다.  나와 창작은 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쓸 이야기도 없고 쓰면 그저 내 인생에 대한 고백이 될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이마트에 간날 서점 코너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을 살피다 하루키의 이 책과 마주했다.  이마트에서 책을 사는 경우는 없는데, 그날따라 기분이 좀 안 좋아서 책을 구입하고 무작정 차를 몰아 집에서 80KM 떨어진, 모교대학 교정의 도서관에 도착했다.  내가 그 여름의 끝자락 10여년 만에 찾은 모교의 대학도서관에서 읽은 책이 바로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였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소설가가 되는 망상에 젖어들었다.  내가 소설을 쓴다면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루키의 속삭임처럼, 내면의 깊은 심층에는 무슨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내게도 들려줄만한 이야기가 있긴 있는건가.


머릿속에서는 아니야, 난 쓸 수 없어, 란 답변이 들려왔지만 그 오후의 반나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계의 표정이 바뀌었다. 세계는 바뀐게 없는데 하루키를 통해 내 마음과 눈이 달라졌다.  세계적인 작가인 하루키가 `동네 아재'같은 말투로 자신의 35년 인생, 소설을 써온 그 파란만장한 이야길 저토록 가벼운 붓터치로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었다.  책 속에서 이야기되지 못한 숱한 시간들이 있었으리라.  하지만, 내가 명확하게 포착해 낸 것은 책읽기, 글쓰기, 문학, 작가로 이어질 무한정한 창작의 세계다.  모든 이들의 내면에는 아직 발자국 한번 나지 않은 심연의 세계가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음을 하루키는 가르쳐주고 있었다.  하루키는 젊은날 진구 구장의 안타 한방에 그 세계로 내려갈 결심을 한 것이고, 35년간 그 세계의 탐험을 멈추지 않고 지속해 왔다.


35년이란 직업세계의 경력은 주위에서도 흔치 않다.  갈수록 근속년수가 짧아져만가는 직장인들에게 35년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신화적인 시간이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에서 35년은 이제 전성기를 지나고 있을 나이다.  은퇴 나이가 없는 작가에게 시간이란 의미없는 일일테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글을 쓰는 것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작가가 될 수 있다. 하루키의 속삭임 때문은 아니다.  하루키는 모든 걸 행운으로 이야기했지만,  그는 이미 학창시절부터 학업에 소홀하면서도 닥치는대로 책을 집어삼킨 못말리는 책벌레였다. 하루키의 책을 한동안 빠짐없이 읽겠다고 한 것은 괜한 호들갑이 아니다.  그날, 여름의 끝자락, 추억조차 가물거리는 모교의 도서관에서 하루키의 문장이 진구 구장의 안타공처럼 날아들었다.  나는 마지막 폭염이 세계를 감싸안고 있는 그날 오후,  내면을 가득채운 책에 대한 열망과 글쓰기에 대한 간절함을 다시, 하루키란 작가를 통해 살려했다.  열망이 전부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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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글쓰기 - 단순하지만 강력한 글쓰기 원칙
박종인 지음 / 북라이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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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자존심 상하는 일이 많다.  한 분야에 능통해지기 위해 10년 그 이상을 수련해 왔는데, 어느날 그 분야의 `듣보잡' 고수가 나타나 너의 방식은 틀렸어! 라고 일갈한다면 어떨까.  산야의 고수들은 이때 두 방식으로 대응할 게다.  첫째, 네가 뭔데 내 방식을 틀렸다고 참견하는거냐?라며 무시하는 것.  둘째, 그래 이거야 하며 그간 고집한 방식을 과감하게 고치고 새 길을 가는 것.  첫번째 방식도 그리 나쁘지 않다. 다만, 지름길 놔두고 고생할 뿐이다.  두번째 방식을 곧바로 차용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세상 고수들은 다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이것이 우리앞에 나타난 `듣보잡' 선생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기자의 글쓰기>(북라이프, 2016년)를 쓴 박종인은 조선일보 기자다.  내 평생 이 분이 쓴 글을 읽은 적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안 읽을 듯 하다.  그 신문사가 맘에 안 들어서다.  책을 살까 말까 고민한 것도 그 회사 때문이다면 우스울까.  결국 샀다.  난 이 책에서 `기술적'이며 `기교적'인 글쓰기를 습득하길 원했다.  목적이 분명한 독서다.  그는 `여행과 인물에 관한 글과 사진'을 주제로 글을 써왔다.  그는 인문적인 글쓰기에 능통한 기자며, 조선일보 저널리즘 아카데미에서 `고품격 글쓰기와 사진 찍기'를 강의하고 있다. 1992년부터 기자로 살았으니 `기자의 글쓰기'를 오랜 시간 숙련해 온 사람이다.  `글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쓰는가', 그 노하우를 독자가 얻을 수 있다면 이 `부적절한 로맨스'는 성공이다.  


그간 틈틈이 많은 글쓰기 책을 읽어왔다.  지난 10년간 내 글쓰기는 꾸준한 연습과 이론적인 학습에 밑바탕을 뒀다. 강의를 들어본적은 없어도 다양한 저자들의 글쓰기 책을 읽으며 내 글쓰기를 되돌아 봤다.  나름의 노하우가 담긴 글쓰기 책은 도움이 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반이다.  도덕교육이 한 사람을 완벽한 도덕적 인간으로 만들지 않듯이, 글쓰기의 정도가 담긴 책들도 모든 독자를 완벽한 글쟁이로 변신시키지 못한다. 이런 `갭'은 왜 발생할까.  오래된 습관을 뜯어고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글을 쓸 때 문장을 짧게 쓰면 한국어의 리듬감이 살고, 주어 술어의 호응이 안 맞는 문법적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문장을 짧게 쓰는 게 몸에 익지 않으면 문장은 길어지기 마련이다. 


길을 알면서도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하게 되는 역설,  글쓰기의 함정이다.   <기자의 글쓰기>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몇가지 글쓰기 원칙'들을 제시한다.  글쓰기에 관한 서론이 아니라 본론으로 직행해, 좋은 글의 요건을 보여준다. 요즘엔 인공지능이 기사를 쓰는 시대라고 한다. 그게 가능한 이유가 있다.  기자들의 글쓰기에는 분명한 원칙이 존재해서다.  언론사에 취업했다고 좋은 기자가 되는게 아니다. 그들은 나름 도제식 교육을 선,후배 사이에 시행한다.  기사문에 평균치의 품격을 갖게 하는 힘은 거기서 나온다.  저자가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나열한 기자의 글쓰기 원칙들을 살펴보자. 


"쉬움" "짧음" "팩트(fact)"다.  무슨 소린가.  이 세가지 원칙이 책의 고갱이다.  먼저 "쉬움"이다.  글쓰기에 서툴수록 글을 어렵게 쓴다. 글이라고 하면 현학은 기본이요, 수사는 필수고, 목표는 작가다.  글은 유식하게 써야 제맛이라고 착각한다.  하여, 글에 거추장스러운 부사나 형용사 등의 수식어가 잔뜩 들어간다.  음식에 양념이 너무 많이 들어가면 요리를 버린다.  얼굴을 많이 뜯어고친 성형미인들은 티가 난다.  모두 쉽게 질리고 외면 받는다.  고수들은 쉽게 쓴다. 


"나 글 좀 씁네 하는 순간에 글에 현학이 들어가고 글이 어려워진다. 그리고 스스로 읽으면서 나는 어쩌면 이렇게 글을 잘 쓸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한 당신을 보고 고수들은 웃는다.  너 조금만 있어봐.  선생이라면 혼을 내고 친한 독자라면 비웃고 조금 통이 큰 사람이라면 기다려준다.  좋은 글은 자연스럽게 쉬운 글로 모인다."   127쪽,  <기자의 글쓰기>, 박종인


둘째, "짦음"이다.  글을 못쓰는 사람일수록 문장이 길어진다.  글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이 쓴 글을 보라.  문장이 길다.  `단문(短文)으로 글을 쓰면 주어, 술어 호응이 잘 맞는다.  문법적으로 완벽할 뿐더러 읽을 때 어색하지 않다.  단문은 글 읽는 호흡을 빠르게 하며 리드미컬하게 읽히게 한다.  쉽게, 짧게라는 이 원칙,  쉽다.  하지만, 몸에 익혀두지 않으면 글은 어려워지고 길어진다.  아무리 고치려해도 잘 고쳐지지 않는 고질적인 악습이다. 


셋째, 팩트(fact)다. "주장은 팩트, 사실로 포장해야 한다"   사실, 이 책을 칭찬하게 만드는 원칙이다.  수많은 글쓰기 교재들이 나와 있지만, 팩트를 이렇게 강조하는 책은 처음이다.  <기자의 글쓰기>에선 팩트란 말이 100번은 반복된다.  `쉬움'과 `짦음'이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글쓰기의 기술임에 비해, 이 `팩트'는 연마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글쓰기의 고수가 되는 마지막 경지가 여기다. 글을 `팩트'에 기반해 쓰느냐, 아니면 형이상학적인 주장과 논술과 단어들로 채우느냐.  하지만, 글에 팩트를 채워넣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글쓰기 10년 공부는 다 허사며, 하산은 멀고 먼 일이다.  


"`팩트는 신성하다'는 말이 있다. 기자 세계에서 통하는 격언이다. 글은 팩트를 담아야 한다. 주장이 아니라 팩트다. (중략..) 자기가 생각하거나 느낀 것만 가지고 쓴다면 그 글은 힘이 없다. `굉장히 아름답다'라고 쓰지 말고 굉장히 아름다운 이유를 써야 한다. `난리 났다!'라고 호들갑을 떨지 말고 무슨 난리가 났는지 구체적으로 써야 한다."  47쪽


저자가 소개하는 부수적인 글쓰기 노하우도 쓸만하다.  첫째, 좋은 글은 구성이 있어야 한다.  무슨 말?  기승전결에 기반해 글을 쓰라는 얘기다. 서론,본론,결론 3단계로 글을 쓰면 글이 밋밋해 진다.  기승전결에서 중요한 부분은 `전'에 있다.  주제와 거리를 유지하면서 마지막 `결'로 돌아와 주제를 제시한다.  `전혀 엉뚱해 보이면서도 연관된 장면'으로 한번 돌려주는 단계가 전(轉)이다.  `독자들은 엉뚱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숨을 고르게 되고, 결론으로 치닫는 글의 마지막을 예상하게 된다'(186쪽).  지금껏 전 단계를 염두해 두고 글을 쓰지 않았다면, 이 변주를 알아두면 글이 풍성해질 듯하다. 


둘째, 글의 힘은 첫문장과 끝문장에서 나온다.  소설가 김훈은 <칼의 노래> 첫 문장을 쓰며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와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 사이에서 크게 갈등했다 한다.  첫문장 조사 하나 때문에 고수들은 고민한다.  오직 초보들만 첫문장을 대충 시작한다. 저자는 첫문장과 끝문장을 떡밥과 미끼에 비유한다.  떡밥은 물고기를 모이게 한다.  미끼는 모인 물고기 떼 가운데 한 마리를 낚게 한다.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가 뭔가.  내 주장에 대한 동의와 공감이다.  그 목적의 실현 가능성은 첫문장과 끝문장에 달려 있다.  대충 시작할 수 있겠는가.


셋째, 좋은 글은 입말로 쓴다.  이 원칙도 신선하다.  보통 사람들은 글을 쓸 때 말과 글은 다르다 생각한다.  말은 그냥 가볍게 해도 되고, 글은 왠지 품격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글과 말은 다르지 않다.  "제일 좋은 글은 술자리 혹은 차를 마시며 친구들과 쑥덕대는 바로 그 형식 그대로 쓴 글이다."(50쪽)  친구들과 이야기 할 때, 구체적이며 쉽고 짧은 문장을 구사하게 된다. 좋은 말하기는 좋은 글쓰기와 상통한다. 팩트와 입말로 글쓰기, <기자의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글쓰기 원칙이다. 


" 칼럼은 팩트를 통해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글이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가치 판단을 최대한 배제해야 한다.  독자가 판단할 수 있도록 팩트로 구성을 하고 자기가 맞다 틀렸다 얘기는 빼도록 하자.  잘 쓴 칼럼들은 다 그렇다.  이 사람 착하다, 이 사람 나쁘다, 라는 얘기를 되도록 숨겨야 객관적인 글이 될 수 있다."  245쪽


여기까지다.  인정하자.  저자는 `듣보잡'이 아니라 기자 세계의 글쓰기를 독자에게 성심성의껏 전수해 준 고수였다.  글쓰기 책을 참 많이 읽었다.  그런데, 이 책은 낯설다.  분명 내가 그동안 익히 알고 있는 글쓰기 원칙들이었으나 착각이었다. 책을 읽으며 내 글쓰기가 미궁에 빠진 이유를 목격했다.  그동안 글쓰기라면 무턱대로 내 방식대로 쓰면 족하다고 믿었다.  앞서 말했지만, 그 방식도 맞을 수 있다.  하지만, 지름길 놔두고 돌아가는 격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길을 가다 노동하는 촌부에게까지 배움을 구했다.  잘못된 방식을 고치지 않는 관성이 걱정거리라고 고백했다.  <기자의 글쓰기>는 내 글쓰기가 잘못된 지점을 콕콕 찔러 댔다.  


글을 잘 쓰고 싶은가.  이 책에서 제시한 기본적인 원칙들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팩트'에 치중하자는 말, 백퍼센트 공감한다. 기자들의 글은 군더더기가 없고, 맞춤법에 충실하다.  글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글쓰는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 올려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이다.  조지 오웰, 김훈, 장강명, 김소진, 모두 기자 출신 소설가다.  그들은 기자에서 소설가로 변신했다.  일생 글을 읽고, 써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기자의 글쓰기>에서 저자는 자신의 오랜 노하우를 가감없이 선보인다.  이제 고집을 버릴 때다.  글쓰기, 무턱대로 연습한다고 잘할 수 있는게 아니다.  오래 쓴다고 더 잘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먼저, 글쓰기의 정도를 익히는게 먼저다.  잘못된 방식을 탈피하지 않으면 우리 글쓰기는 절대 나아지지 않는다.   당신 글쓰기는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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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시대의 삶 - 책으로 세상을 건너는 법
한기호 지음 / 어른의시간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신문 사이트를 클릭했다 놀랐다.  나라가 사드 문제, 관료들의 부정부패로 어지러운 판국에 아침부터 올라온 헤드라인 뉴스란게 "포켓몬 go, 한국 상륙, 속초로 포켓몬 잡으러 떠나자" 였다.  편집자가 한심했다. 게임을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품격있는' 신문사가 평일 아침부터 미국에서 이제 막 뜨기 시작한 증강현실 게임을 홍보대사라도 된듯 띄우고 있어서였다.  증강현실 게임이란 현실의 이미지나 동영상에 3차원 가상이미지를 덧씌워 현실과 가상을 섞는 방식의 게임기술을 말한다.  현실인지 게임인지 그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 가상체험의 몰입도를 높인다.   한국에 정식으로 들어오지도 못한 이 게임을 즐기기 위해, 속초로 떠나는 사람들로 버스표가 동나는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고작 게임 하나를 하기 위해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며 그들의 발을 이끄는 힘의 정체는 뭘까?


지난 3월,  인공지능 알파고와 인간 이세돌의 가상 바둑대결이 있었다.  글로벌 기업 구글이 키워낸 최고의 인공지능 컴퓨터와 프로기사 이세돌의 격돌이 벌어진 다섯번의 경기 결과는 놀라웠다. 이세돌은 가볍게 인공지능을 제압하겠다고 호언했지만, 결과는 겨우 1승을 뽑아내는데 만족해야 했다.  이세돌은 다섯 번의 경기 가운데 단 한 번밖에 이기지 못했으나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다.  그가 내리 세번을 지고 이긴 네번째 경기에서 놓은 돌을 언론들은 호들갑스럽게 `신의 한수'라고 치켜 세웠다.  하지만, 컴퓨터가 접근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창조적인 바둑의 영토마저 인공지능에게 내주고 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인간의 천재성은 이 `괴물 인공지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컴퓨터 기술을 활용한 인공지능이 우리 삶을 통째로 바꾸고 있다.  컴퓨터가 인간의 일자리와 사람들의 혼까지 빼앗는 일이 매일 뉴스거리다. 미래는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과 경쟁해서 살아남아야 하는 시대다.  하지만, 0.1%의 천재도 인공지능을 이길 수 없는 시대가 이미 우리 앞에 와 있음을 알파고는 경고 한다.  출판 평론가 한기호의 책,  <인공지능 시대의 삶>(어른의 시간, 2016년)은 `기계와 경쟁해야 하는 시대, 미래 세대의 생존술'을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알파고' 이후 많은 분석 기사들이 쏟아졌지만, 한 권의 책이 보여줄 수 있는 탄탄한 통찰에는 미치지 못했다.


저자는 한국을 대표하는 독서운동가다.  그는 출판평론분야에서 30년 내공을 쌓았다.  책 마케팅, 기획, 출판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고, <학교도서관 저널>, <기획회의> 등 그 기여도와 무게감이 남다른 잡지를 오랜 시간 펴내고 있다.  또, 그는 블로그에 매일 글을 쓰는 열정적인 블로거다.  매년 그는 책읽기와 글쓰기, 독서교육을 주제로 책을 펴내고도 있다.  물론 이 글들은 블로그에 올린 컨텐츠를 기본으로 삼는다.  이번에 펴낸 <인공지능 시대의 삶>은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 이후, 창조적 분야에서까지 인간의 능력을 잠식하는 컴퓨터에 맞서, 그 대안을 제시해보겠다는 지식인의 마음가짐이 엿보이는 책이다. 


" 이제는 대학 졸업장이나 석,박사학위보다도 어떤 역량을 실제로 갖췄는가가 더욱 중요하다. 한 번의 직업 선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직업을 선택해도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만 한다. 정보에 대한 접근능력이 아무런 경쟁력이 되지 않는 시대에는 정보를 끄집어내 주관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가치를 발생시킬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여야 시대를 주도할 수 있다. 이런 능력 또한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으며 중요한 부분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망각하는 능력,  즉 콘셉트를 뽑아내는 훈련을 제대로 한 사람만이 갖출 수 있다. "  7쪽, <인공지능 시대의 삶>, 한기호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이란 것이 특별하지 않다.  그간 펴낸 책들에서 꾸준하게 주장했던 내용이다.  2014년에 출간된 <마흔, 이후 인생길>에서 그는 한국 사회의 전근대적 교육시스템을 문제삼았다.  세상이 원하는 인재의 가치 기준이 `엑스퍼트' 가 아닌 `프로페셔널'로 바뀌어 가고 있음에도,  한국 교육이 학벌과 스펙으로 무장한 젊은이들을 양산하는데 치중하고 있다 비판했다. 저자가 프로페셔널의 조건으로 내건 인재의 가치는 `지식을 편집하고 통찰하며 거기서 중요한 컨셉을 끌어내는 힘'이었다.  그런 능력은 평소 다양한 책을 읽고 생각하는 힘을 기르며, 그 가운데 중요한 정보를 재편집하는 꾸준한 글쓰기를 연습해 도달할 수 있다.  


저자는 단 200권의 책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이 뒤바뀔 수 있음을 강조했다.  어떤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그 분야의 책 100권만 섭렵하면 된다고 호언했다.  그가 그렇게 주장한 이유는 분명했다.  한국의 엘리트 교육 과정이란게 최고 스펙의 대학 졸업생을 양산해 내지만, 결국 그들도 어려운 취업관문을 뚫고 들어간 직장에서 정년조차 채우지 못하고 구조조정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과 경쟁해서 1등이 되는 법, 루저가 되지 않는 길만을 연마했지만,  인생이 지닌 가치, 생명에 담긴 위대함을 배우진 못한다.  한국이 OECD 국가중 자살률 최고, 청소년 행복지수 최하인 이유다.   우리가 진정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하는 건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개인의 자존감을 학습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 현실적으로 인간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책읽기'가 거의 유일합니다.  책을 함께 읽다보면 나와 남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 생각의 차이가 바로 상상력입니다.  그 상상력이 이 세상을 이겨낼 `역량'입니다.  이 역량은 어떤 상황에서도 이겨낼 힘을 가져다줍니다.  책을 읽어 역량을 갖춘 사람은 미래에 어떤 세상이 오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  259쪽


분명해 졌다.  우리는 인공지능을 이기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20대,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백수가 됐다. 공무원 시험에 수차례 떨어졌다.  비정규직을 수년간 전전했다.  육체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시절 내가 섭렵한 직업은 다양하고 초라하다.  대학졸업장은 거추장스럽기까지 했다.  그 시절을 버티게 해준 것은 `책'이었다.  20대, 이후 내게 책은 취미 생활이 아니었다.  삶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과 고통에 마주선 이가 답을 찾아내기 위해 벌이는 오랜 투쟁이었다.  책을 읽고 글을 조금씩 쓰기 시작했다.  잘 읽었는지, 잘 썼는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책을 읽는 시간, 글을 쓰는 시간동안 나는 스스로 중요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칸트, 카뮈, 사르트르를 읽는 동안 나는 그들만큼 삶을 이해하고 있었다.  책은 자존감을 선물했다. 


`포켓몬 go'가 인간에게 살아갈 이유와 존재해야 할 근거를 주는 게 아니다. 게임은 그저 시간을 죽이고, 인생을 도락으로 이끄는 수단일 뿐이다.  저자 한기호의 말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이겨낼 힘"을 길러내기 위해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  인공지능이 우리 직업을 잡아삼키는게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돈을 잘 벌고, 잘 사는게 중요한게 아니다.  잘못된 외교, 남북관계가 한반도에 전쟁을 불러올 수 있다.  핵전쟁의 위기 가운데, 개인의 영달이 다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투표일에는 투표장에 가야하고, 민주주의와 평화를 지키려는 정치세력에 표를 던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이 인간의 직업을 잠식하는 미래가 중요한게 아니다.  몇 해 전, 천재들의 집합소인 카이스트 학생들과 교수들의 연이은 자살 사건이 있었다.


미래가 보장된 천재적인 젊은이들은 왜 자살했을까.  나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공부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지금 청년들의 실업, 취업 문제는 최악이다.  학창시절, 남과 경쟁해서 이기는 법만 공부하고 터득한 이들에게 경쟁에서의 패배는 치욕이자 의미의 상실을 가져온다. 그들은 치열한 두뇌경쟁에서 이긴 천재일망정, `국졸 학력'의 장삼이사 만큼도 인생에 대해 알지 못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과 자존감이 경제 문제에 달려 있진 않다.  5천년 역사를 통틀어 우린 생활의 질이 가장 높은 시대에 태어났다.  인간의 가치와 존엄을 경제적 경쟁관념에서만 보면, 우린 절대 행복해질 수가 없다.  이 삶을 이해하고 통찰하는 상상력과 관점이 중요하다.  그 관점을 기르고 배우는 통로가 바로 책읽기와 글쓰기다.  인생을 살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불행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그 시절을 견디고 그 과정에서 인생을 알아가는 능력은 `알파고의 초능력'과는 하등 관계 없다.


그래서, 우린 읽기와 쓰기를 우리 생활로 만들어야 한다.  저자는 `지금까지는 글을 쓰지 않고도 잘 살았지만 앞으로는 누구나 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일을 소프트웨어가 하는 시대에 사람의 가치는 상상력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30년 내공의 출판전문가는 블로그에 글을 쓰라고 추천 한다.  책을 읽고 서평을 쓰거나 영화를 보고 영화평을 쓰거나 어느 것이나 좋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순간, 우리는 자기 생각을 가진 인격으로서 격상 된다.  평생 자기 생각을 갖지 않는 사람이 바로 노예다.  고분고분하고 시키는 일 잘하는 능력은 로봇이나 인공지능을 따라잡을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공포와 불안을 안겨주는 것은 인공지능의 놀라운 능력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무지(無知)다.  공자가 말한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의 경지(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다.  삶의 비밀을 아는 자에게 인생은 두렵지 않다.  오직 책을 가까이하고 생각을 멈추지 않으며, 글을 써야 한다.   포켓몬go게임에 홀려 속초행 버스에 오를때가 아니다.  그 열정으로 지금 서점으로 달려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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