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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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겠는가.  다만 여행할 시간과 여유가 없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하루키는 선택받은 사람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세계 도시들을 배회하고 그곳에서 살았다.  진정한 우리시대의 코스모폴리탄(세계인)이 있다면,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다.  부러우면 진다는 말이 있다.  하루키의 `자유방탕'한 일생의 여정은 찌든 현실속에 안주하는 일상인에겐 호사로운 인생이다.  하지만, 그의 여정은 호기심과 열정이 있는 자에게 주어진 기회이기도 했다.  왜냐면,  눈요기와 미식을 즐기는 부자들은 하루키와 같은 호기심으로 세계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자들의 여행과 하루키의 여정이 갈라서는 지점이 여기 아닐까.  하루키에겐 독보적인 그만의 시선이 있다. 우리가 하루키의 여행담을 읽으며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런 거다. 


여행은 내가 하면 됐지, 여행기 따윈 읽어서 뭐할까.  그렇다.  하루키가 아니었다면 사실 이런 책엔 관심 없었을 것 같다.  내가 이 책에서 기대했던 것은 하루키는 여행기를 어떻게 쓰는가 란 점이다.  그 다음으로, 하루키는 여행중에 무엇을 주목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였다.  산문이나, 소설이나, 가볍고 짧게 툭툭 던지는 하루키의 감성적인 문장들도 기대했다.  신작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문학동네,2016)는 그런 점에서 하루키의 개성이 살아있는 여행담이라고 봐도 좋겠다.  이 책의 제목은 좀 독특하지만, 나름 그럴싸한 사연이 있다.


하루키는 라오스에 가면서 일본발 직항편이 없어, 베트남 하노이에서 1박을 했다. 그때 한 베트남 사람은 "왜 하필 라오스 같은 곳에 가시죠?"라고 묻는다.  `베트남에는 없고 라오스에만 있는 것이 대체 뭐길래요'라는 뉘앙스를 다분히 담고 있는 질문이었다.  라오스보다 국제적인 관광지로서 더 유명한 베트남을 놔두고 왜 라오스같은 오지에 들어가는지 궁금했던거다.  독자들도 라오스는 좀 생소하지 않은가. 물론 라오스가 어디 붙어있는지는 상상이 가고 쌀이 많이 나오는 나라라 해서 `라오스(rice?)'라 했을 거란 추측도 가능하다.  맞는지는 모르겠다.  하루키의 대답은 위트있다.


" 자,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좋은 질문이다.  아마도, 하지만 내게는 아직 대답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지금 라오스까지 가려는 것이니까.  여행이란 본래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159쪽,  <라오스에는 대체 뭐가 있는데요?>,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는 소설을 쓰는 중간중간에 짬을 내서, 소품들을 자주 써온 작가다.  단편소설, 잡문, 에세이, 그리고 여행담이다.  하루키는 그런 글들을 자신의 폴더 속에 잘 보관해 뒀다가 기회 있을 때 기고를 하고, 또 그것을 책으로 묶어 단행본으로 출판한다.  그의 소품들은 소설만큼이나 인기 있다.  이 책도 예외가 아니다.  잡지사에다 오랜 시간 기회 있을 때마다 기고했던 글들을 한 권으로 묶어냈다.  여행기를 쓰기 위해, 일부러 떠난 여행이라기 보다는 그곳에 살면서 혹은 다른 일로 특별한 여행을 시작하면서, 글로 남긴 글 모음이다.  미국 보스턴에 관한 이야기는 2편으로 나뉘어 실렸다.  1편 `찰스 강변의 오솔길'은 미국에 정주하던 시기를 기억해 쓴 글이다.  2편 `야구와 고래와 도넛'은 보스턴을 훗날 다시 방문하며 남긴 감상이다. 


하루키식 여행의 특색이 조금씩 엿보인다.  그는 훌륭한 풍경을 찾아다니고, 미식을 즐긴다.  좀더 디테일하게 거주민들의 삶을 가까이서 듣고,보고, 경험하는 일들이 많다.  하루키는 음악광이자 마라토너이자 지독한 독서광이다.  여행을 하면서도, 그는 음악회를 찾아나서고, 중고레코드 가게를 기웃거리며, 숙박지를 벗어나 하루에  한번은 조깅을 하고, 도시의 서점들을 방문해 책 몇 권은 꼭 구입한다.  하루키 여행담의 특색있는 지점이라고 한다면, 어느 도시에 가나 자신의 관심사를 잊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스턴 인근에 살며, 보스턴 마라톤 대회를 총 6번이나 완주한 일에서 보듯 하루키는 매우 정열적인 면이 돋보이는 작가이기도 하다.   마라톤을 필력의 원동력이라 표현한 것이 괜한 호기가 아님을 여행기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뉴욕에 대한 여행담은 온통 재즈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뉴욕 여행담의 시작을 단정적인 어투에다 재즈 음악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관심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타임머신을 딱 한 번 사용할 수 있다면, 하루키는 1954년 뉴욕으로 날아가 그곳 재즈클럽에서 클리퍼드 브라운&맥스 로치 5중주단의 라이브를 원없이 들어보고 싶다고 말한다.  물론, 재즈 음악엔 관심없는 나같은 사람에겐 이해불가지만.  그는 나흘간의 뉴욕 여정 가운데 매일 밤 재즈 라이브를 즐기러 다녔다. 그것 뿐이 아니라, 낮에는 재즈 레코드 가게를 돌며 LP를 사들였는데, 이런 기행적인 여행담의 끝을 이렇게 마무리 한다.  "이 이상의 행복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130쪽) 


젊은 시절 글을 쓰기 위해 머물렀던 그리스의 두 섬, 미코노스 섬 그리고 스페체스 섬에 대한 여행담은 아름다운 한 편의 서정시 같은 느낌이 든다. `지금으로부터 이십사 년 쯤 전 나는 그리스의 섬에 살았다...'로 시작하는 이 글을 읽다보면,  먼 이국 그리스는 독자에게 한 편의 완벽한 이미지로 변신해 눈앞에 선명히 다가온다.   성공작 <노르웨이의 숲>과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쓰기 시작한 곳이기도 한 두 섬 생활은 하루키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도 특별한 느낌을 준다.  하루키는 24년 만의 섬 여행을 통해, 자신이 하숙하며 글을 썼던 집을 어렵게 찾아가 보고 깊은 정감에 빠져든다. 그는 당시 아침부터 낮까지 소설을 쓰고, 저녁이 되면 바닷바람을 맞으며 산책 겸 마을로 나가 바에서 와인이나 맥주를 가볍게 마시곤 했다.  하루키는 맥주 마니아기도 하다. 


`워드프로세서가 없었던 시절 대학노트에 볼펜으로 꼼지락꼼지락 글씨를 써 내려갔다'고 회고하는 하루키의 글을 읽다보면, 그 섬에서의 생활이란게 구체적인 옷을 입고 독자의 머릿속에 그려지기 십상이다.  하루키가 작가가 아니었다면,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말그대로 유유자적 여유있는 생활을 즐기는 그저 그런 부류의 이방인이지 않았겠는가.  독자의 눈에도, 또 섬 주민들의 눈에도 말이다.  하지만, 그는 매일 자신의 분신같은 작품을 창작하고 있었다.  섬 생활은 휴가가 아니고, 노동의 일부분이기도 했던 거다.  이런 생활은 로마에서도 이어졌다.  노트와 펜으로 글을 쓰던 시대는 저물었다. 하루키는 그런 낭만적이자 좀 불편하게 글을 썼던 마지막 작가세대가 아닌가. 편리한 글쓰기 도구들이 넘쳐나는 시대, 보다 쉽게 글을 쓸 수 있을까.  아니다.  도구보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고, 그것은 노트와 펜의 불편함 따위완 본래 관계 없다. 


"1980년 후반, 띄엄띄엄이나마 이삼년 로마에 살았다.  시내에 있는 아파트를 빌려서(조금이라도 나은 환경을 찾아 세 곳쯤 돌아다녔다) 소설을 썼다.  작가라는 직업의 이점은 뭐니뭐니해도 펜과 종이만 있으면 (대체로) 전 세계 어디서나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컴퓨터와 인터넷, 휴대전화, 페덱스도 아직 일반적이지 않던 시절이라 이래저래 일상적으로 불편함 점이 많았다.  (중략..) 그러나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원래 이런 거지 뭐'라는 각오가 생기고 나니 그런 불편함도 나쁘지 않았다."  199쪽 


남의 여행기 한 줄 읽느니, 차라리 동네 한바퀴 도는게 더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하루키의 글에 대한 애정이 아니었다면, 읽지 않았을 책을 읽으며 그래도 이 맛에 하루키를 읽는단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하루키의 문장들은 전기자극 같은 찌릿함을 전해왔다.  하루키는 이 여행담 속에서도, 과감하게 세계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표현하고, 인생을 규정하고, 평가하는 것이 서슴없다.  보스턴을 재차 방문하고 해변의 시푸드 레스토랑에서 레몬즙이 가득 뿌려진 해산물 요리를 맛보며, "이런 식사를 즐기다보면 인생의 미스터리니 다음번 빅뱅이니 알게 뭐냐"고 시니컬해지는 하루키에 동의하지 않을 독자가 어딨겠는가. 


지구반대편 시리아 알레포란 도시에선,  매일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미국과 러시아의 공중 융단폭격으로 희생당하고 있다.  내전을 핑계로 개입한 강대국의 국제정치적 이해관계속에서 병원조차 폭격으로 폐허가 되는 몰상식과 비문명의 시대를 세계 시민들은 목격하고 있다.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배웠던 인간 생명에 대한 존엄, 인생에 대한 가치, 상호 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경은 현실 세계속에서 다 교과서적인 헛소리일 뿐인가.  하루키의 소설이나 산문속에서 정치색이 잘 보이질 않고, 세계와 인류와 문명에 대한 교훈과 가르침을 독자에게 주려는 태도가 없는 것은 왜일까.  인류가 스스로의 가치를 배반하는 시대에는 차라리 휴머니즘이나 도덕적인 가르침은 모두 `사기'처럼 보인다. `괴물 유권자들'은 `괴물 정치와 정치지도자'를 잊을만 하면 이 세계로 초대한다.  그럴때마다,  인류가 간직해온 모든 진보적인 가치는 그런 괴물들의 합작으로 항상 퇴보하기 일수다.  이것이 허울좋은 민주주의의 실상이다.  교훈과 교과서는 넘쳐난다. 작가의 정치적 외면과 침묵은 차라리 그것 자체가 교훈이며 그것이 하루키의 스타일이 아닐까.


난, 그래서 하루키의 단정적인 세계 이해와 조금 `성질급한' 인생에 대한 단정이 반갑다.  사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해야 할 정치와 정책이 코메디보다 더 우스워질때, 우리 세계의 진실은 현실이 아니라 `소설'속에서 찾는게 낫다.  그때 인간은 현실보다 판타지 속으로 도피하는게 정신건강에 이롭다.   하루키의 글은 미세먼지에 익숙한 폐를 잠시나마 숨쉬게 하는 산소통이나 혹은 만성적인 불면증에 인위적인 단잠을 선물하는 `프로포폴' 같다.  


"여행지에서 모든 일이 잘 풀리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다'라는게 나의 철학(비슷한 것)이다."  137쪽


하루키의 여행담을 읽으며, 취향에 물든 여행이 꼭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덤이다.  여행자는 자기가 바라보고 싶은 것만 봐도, 나쁘지 않다. 자기가 가고 싶은 곳만 가도 나쁘지 않다.  여행중에 영화관에 들르거나, 커피숍에 들러 오후 한 나절을 보내거나, 훌륭하고 비싼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식사를 해보거나, 서점에 들러 몇시간이고 책을 뒤적이거나, 뭐 어떤가.  정해진것은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 여행이 재밌다.  지난번 짧게 떠난 여행에서 나는 프레디 머큐리의 음악만 듣고 다녔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그저 이름으로만 듣고 알게 지냈던 가수, 아 이렇게 아까운 사람이 너무 이른 나이에 죽다니..... 돌아오는 여행길에 이 멋진 가수를 알게 된 것은 그날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프레디 머큐리를 꼭 여행가서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다.  여행이 아니었다면, 그런 가수나 음악 따윈 들을 시간도, 여유도, 없었겠지.  하루키처럼 표현한다면, 이런게 진짜 알 수 없는 여행의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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