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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미 정보기관 CIA의 비밀 암살요원으로 활동하면서 전 세계에서 수많은 요인 암살을 수행해왔던 주인공 크리시(덴젤 워싱턴)는 한 때 동료이자 친구인 레이번(크리스토퍼 월켄)의 권유에 따라 멕시코의 한 부유한 집안에 보디가드로 일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의 임무는 어린 피타(다고타 패닝)를 경호하는 것인데, 멕시코는 하루에 평균 네 건의 유괴 사건을 비롯해 각종 범죄가 줄을 잇고 있다. 수많은 살인과 그로인한 죄책감을 술로 이겨내며 삶의 기쁨을 상실한채 살아왔던 크리시가 티없이 맑고 상냥한 피타를 만나 비로소 웃음을 되찾지만, 곧 피타가 유괴되고 그는 자신의 삶에 한줄기 빛이 되어준 아이의 죽음앞에, 처절한 복수를 다짐한다. 이런 평범한 스토리를 담고 있는 토니 스콧 감독의 <맨 온 파이어>는 스토리 보다는 소녀와 킬러의 우정과 희생을 그렸던 <레옹>을 연상시키면서, 두 주연 배우의 뛰어난 연기에 주목하게 하는 영화다.

한 편 한 편 영화를 보는 즐거움은 어떤 것이 있을까 ? 감독의 연출력, 화면의 예술성,스토리의 흥미 모두 즐거움일 수 있겠지만, 새로운 배우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같은 것도 있다. 이 영화속의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 다코타 페닝, 10살짜리 이 자그만 여자아이의 내면 어딘가에서 뿜어나오는 천재적인 연기력은 높이 살만하다.

토니 스콧 감독의 <맨 온 파이어>는 따스하고 잔혹한 영화다. 147분의 상영 시간을 둘로 구분해 볼 수 있다면, 정확하게 두 부분으로 떨어질만한 대조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러한 명백한 구분은 이 영화의 안정감을 방해하는 요소다. 불의에 대한 철저한 응징, 복수를 보여주기 위해서 아마도 감독은 후반부의 철저하고 잔혹한 복수에 논리를 부여해줄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문제점은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불의를 설명하는 부분에 논리성이 너무 희박하다는 것이다. 몇마디 대사로서 이야기의 중요한 복선들을 관객이 잡아낼거라고 상상했다면 너무 지나친게 아니었을까?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 아이의 유괴속에 내포한 의미를 이 영화는 정확하게 설명해주기 못하고 있다.

더불어 후반부에 불어닥치는 피의 복수는 지금껏 보아왔던 그 어떤 영화보다도 잔인함을 더하는데, 그것은 덴젤 워싱턴이란 배우가 풍기는 지적이고 감성적인 느낌에 반한다.그러나 그는 냉혹하고 처절한 복수의 서막을 열어재끼고, 하나 둘씩 유괴의 범죄자를 처단해 나간다. 유괴라는 가장 반 사회적이고 반인간적인 범죄앞에 그의 응징은 어느정도 설득력을 획득하는 듯 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지나치단 느낌이 들기도 한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 그러나 한편으론 삶의 의미를 되찾게 해준 아이를 지켜주지 못한 보디가드의 자책과 분노로서 이해될만한 구석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후반의 그런 복수가 가능하려면, 아이와 보디가드의 유대가 더욱 더 긴밀해질 필요가 있었는데 이 영화에선 왠지 레옹에서와 같은 킬러와 소녀 사이의 유대와 우정이 깊이있게 그려지지 못한다.

덴젤워싱턴과 다코타 패닝의 연기 모두 좋았지만, 확연히 구분되는 두 파트의 스토리 구조가 이야기의 비약을 가져오고, 영화의 균형감을 위태롭게 한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킬러와 소녀의 대비라든가, 어른과 아이의 우정이라는 설정이 뿜어내는 따뜻한 감성과 포근함은 높이 살만하다. 멕시코 시티의 이국적인 배경도 볼만한 요소다. 그러나 영화내용 가운데 멕시코 경찰들의 철저한 부패와 범죄율의 과장 같은 것은, 멕시코에 대한 그릇된 인상을 관객에게 심어줄 위험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영화 끝 부분에선 멕시코 정부와 멕시코시티에 촬영에 대한 사의를 표하는 자막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 매우 아이러니하다. 자국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를 포함하는 영화라는 것을 알았다면, 과연 촬영을 허락하기나 했을런지 ? 미국의 편견은 항상 일방적이고 폭력적이며 타국을 바라보는 시선에 언제나 오만이 깃들어 있음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2004.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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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 블루스 창비시선 149
신현림 지음 / 창비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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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림 시집 <세기말 블루스>





가끔은 시가 그리울때 습관처럼 펴드는 시집 한권이 있다. 그 시집속에서
나는 나와 비슷한 자아 하나를 거울마냥 들여다보다 다시 덮어버리곤 한다.
거울에 때가 끼듯 하나의 자아는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지 않는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늙어가며 하나 둘씩 나이를 먹어 시는 더이상 이 시를 쓴 사람
에겐 맞지 않겠지만, 여전히 거울밖의 독자에겐 오래된 외투마냥 익숙해져
버렸다. 신현림의 시집 <세기말 블루스>는 1996년에 나왔다.

신현림이란 시인을 알게 해준 시집이자, 시의 언어가 무엇인지 가르쳐 준,
그래서 언젠가는 시가 가진 멋진 언어의 환락속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나를 시와 느슨하게라도 연결해 놓고 있던 끈이 돼 준 것이 바로 이 시집
이다. 이 시집을 세기말로부터 세기초에 이르는 시간동안 제법 오래도록
붙잡고 있었다. 그 이유란 아마도 이 시집속에서 그렇고 그러한 시간들
을 시인과 함께 공감했고, 공유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한 공유는 젊음이 가진 습속같은 것들이다. 시인은 세기말이란 불안한
자유속에서 슬픔과 과거 현재와 절망 모두를 안고 살아가는 고독한 자아다.
`슬픔의 독을 품고 가라'고 포문을 연 시인이 당도하는 곳은 황량한 세기말
의 풍경들이다. 거기엔 익을대로 익어버린 문명의 황폐함과 익명의 단절감
이 존재하고, 그 속에서 시인은 주체할 수 없는 과거의 절망과 미래의 암울
을 온몸으로 버텨내며, 세기말로 향한다. 그러나 시의 언어가 가진 자유의
풍요로움이란 절망도 슬픔도 감추지 않고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 것
인가 ?

나는 이 시집 속에서 스물 아홉 청춘의 어정쩡한 젊음을 발견한다. 20대를
정리해야 할 나이지만, 무엇을 정리할 수 있을까 ? 여전히 현재 진행형 인
생에서, 반듯반듯 구획되지 못할 삶 가운데서 무엇을 정리하고 갈 수 있을
것인가 ? 그럼에도 시인은 20대의 한 시절을 깔끔하게 정리해 보인다. 스
무살에서 서른살까지를 아우르는 "나의 20대"란 시는 한 사람의 인생이
단자화된 언어에 촘촘히 집약된 모습을 보여준다. 나의 20대를 이렇게
선명하게 규정지을 수 있다면 규정짓고 싶을 정도로, 그녀의 언어속에 담
긴 20대는 분명 하지만, 거기엔 다시 겪고 싶지 않을 기억들이 그녀를 옥
죄고 있다. 그 가운데 25세란 구절에서 그녀에게 예술이 그 시절 어떤 모
습으로 인생에서 의미를 획득해 나가고 있었는지 확인해 볼 수 있다.



"25세 - 고독과 예술의 은총을 선택했다- 장미화원처럼 황홀
했던 정기간행물실에서 살다. 자살하고 요절하고 남달리 불
우하고 저주받은 작가에게 위로받고 고단백 예술의 영양가
를 얻다. 사트트르와 함께 구토하고 카프카의 성에서 바슐라
르와 촛불을 켜고 카뮈에게 정직함을 배우다" (나의 이십대)


이 시집의 독특한 점은 시와 다른 예술 기법의 조합이다. 이 시집 사이사
이에 시인이 직접 작업해 올려놓은 포트레이트(상반신인물사진)나, 판화
작업을 통한 작품들이 시와 함께 시인의 내면의 폭과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그 작업들도 시인의 손을 거친것은 물론이다. 시인의
다재 다능함을 엿볼 수 있는 이 시집 전체가 그녀의 혼의 열정처럼 다가
오는 이유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면 세기말에 시인은 어디쯤 와 있는 것인가 ? 격랑의 20대를 지나 30
대의 장년에 한참 발을 들이밀고 있는 "삼십삼 세의 가을"이란 시에서 그녀
는 그 나이의 인생을 홀로 걸어가고있는 자신의 모습이 어떠하며 어떠해야
하는지 해설한다.


"나의 삼십삼 세란
무엇에든 용감해지는 일이다
바람 속 장작불처럼 거친 외로움은
죽음의 공포쯤은 커피 마시듯 넘겨주는 일"(삼십삼 세의 가을)


신현림의 시어들은 패기있고 발랄하다. 그녀는 자신의 나이 40를 바라다
보는 독신자 라는 점을,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자아가 기뻐하고,
절망하는 일상을 무모하리만치 솔직한 시어로 직조해 내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언어는 세월 속에서 처절하게 세기말을 맞이하는 사람들, 어쩌면
인생의 황혼으로 다가가는 모두를 자신의 시어들로 보듬어 안고 있단 느
낌을 들게 만든다. 그녀의 시가 보편적인 위안을 선물하는 것은 인생에
성공보다는 그 성공의 이면뒤에 누추한 자아의 실패와 절망이 이면처럼
존재한다는 상식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비단 세기말의 궁지에 몰린 인
간들만의 고뇌가 아니라, 젊음을 견디어 내야 하는 모든 청춘들의 고뇌
이기도 한 것이어서, 이 시집이 가진 가치는 여전히 젊은 모두에게 의미
있다 할 것이다.


힘겹게 일어서야 하는 장년의 인생이란 더군다나 혼자서 그 모두를 견디
어 내야 하는 청춘이란 이처럼 고단한 언어들을 한시절 토해내지 않을
수 없게 한 듯이 보인다.












2004.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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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 부조리에 관한 이해






나는 언제부터 나를 회의하기 시작했을까 ? 이 자문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말'이 곧 나와 사물의 관계, 나와 사물의 실체
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였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때부터 아마도 나는 정말로 나를 `의식'
하기 시작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 생각으로는 실체를 의심하지 않는자, 모
든 것을 회의하지 않는자는 결국 자신이 세운 `왕국'안에서는 `만족'할 수 있을지언정,
언제까지나 자신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
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변화를 거듭한다. 그것이 신체의 변화일수도 있을것이고, 정
신적인 변화일수도 있다. 이것은 인간에겐 아주 흔히 있는 일이다. 독실한 신앙인이 하
루 아침에 신을 부정하기도 하고, 자신만만하던 무신론자가 어느날 신의 부름을 받았다
고 떠벌리기도 한다. 변화 중에서도 이같은 가치관의 변화는 무서운 것이다. 결국 인간
이 매일매일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신념을 바탕으로 한 행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루하루의 양식처럼, 인간에겐 필수적인 것이며, 그를 아침에 눈뜨게 만들고 삶
에 의미를 부여하는 바로 그 힘이 된다. 그런데 어느날, 그런 일상인이 자신의 평범한 생
활이 갖고 있는 그 맹목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치자. 똑같이 분주한 아침, 출근길의
혼잡함, 피곤한 일과 그리고 퇴근, 휴식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그는 전혀 낯설 것이라고
믿고 있는 내일의 풍경을 머리속에 그리며, 잠에 빠진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내일이 실은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그런 일상중의 하나에
불과할 뿐이라면 어떨까. 더군다나 그가 지극히 당연한 일상으로 믿어의심치 않았던 것
들이 실은 매일 매일의 기계적인 습관성으로 지탱되어온 생활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다면, 아마도 그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생활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 부조리한 감정은 어떠한 길모퉁이에서 그 누구의 얼굴에
라도 덮쳐올 수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회의의 시작으로써 부조리한 감정을 그 전면에
내세웠다.


그의 부조리의 인식은 지극히 명료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세상이 부조리하다는 것,
즉 `세상이 살만한 가치가 없다'면 구태여 애쓰며 살아갈 필요가 없는 것이며, 세상에 회
의를 느꼈다면 세상을 거부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뮈는 그것이 합리적이
다라고 말한후에 다시, 그 합리성을 부정했다. 카뮈의 부조리 사상의 역설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내가 역설이라고 한 것은, 그것을 내가 한때 역설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에서의
역설일 뿐이다. 그 모순에 가까운 역설을 나는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를 통해, 제일 먼저
수정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부정을 함의한 역설이 아니라, 하나의 견고한 논리와
예증을 통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긍정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긍정한다는
것은, 부조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부조리를 극복할 대안
을 `거부'에 두지 아니하고 삶에 대한`정열'과 `반항'에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는 신화속의 시지프는 오직 생활을 위해 물이 필요했
다. 그래서 불경하게도 신의 비밀을 발설하고, 물을 얻는다. 결국 지옥의 신인 풀루토에
게 목덜미를 붙들린채, 바위가 준비되어 있는 지옥의 들판으로 끌려온다. 그리고 이제
그에게 형벌이 주어진다. 자신보다 몇배는 더 크고, 무거운 바위를 자신이 서 있는 들판
에서 산 정상으로 굴려올려야만 했던 것이다. 그의 죄명은 신에 대한 불복종, 그리고 신
성에 대한 도전, 더불어 신조차도 부러워할 만한 지상의 삶에 대해 그의 지극한 열정 바
로 그것이었다. 시지프가 그의 온 힘을 다하여, 굴려 올린 바위는 허무하게도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들판으로 굴러 떨러진다. 그가 바위를 굴려 올리기 위해 쏟던 노력도 일
순간 무위가 되어 버린다. 이제 그는 또다시 바위를 굴려 올리기 위해, 산 아래로 내려간
다. 그는 그 하릴없는 노력을 언제까지나 쏟아야만 했던 것이다. 지옥의 들판과 무거운
바위, 그리고 그가 흘리는 땀방울, 그의 끝없는 노동은 이제 엄연한 그의 현실이고, 모든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형벌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그것이 그리스 신화속, 시지프
의 부조리다.


카뮈는 시지프의 이 부당한 현실을 인간의 부조리와 대치시켰다. 생명의 열망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이미 죽음이라는 필연 또한 함께 지니고 살아간다. 시지프가 지옥의 신
플루토의 명령까지 무시해가며, 그토록 지옥에의 복귀를 미루었던 것은, 인간이 가진 그
살고자 하는 욕구와 합치되는 일이다. 그 부조리와 함께 인간이 살아가야 한다고 카뮈는
말했다. 하지만, 영원히 무익할지도 모르는 시지프의 노력이 부조리를 넘어서 있다고 주
장한다. 그 논리의 중심에 `반항정신'이 있다. 바위의 무게만큼이나, 그의 대가없는 노
력만큼이나 그리고 어느날 그의 마음속에 일지도 모르는 공허함만큼이나 그의 삶은 부
조리로 가득차있다. 하지만, 시지프는 그 일을 계속해 나간다. 불평조차 없다. 여기에
그의 위대함이 있다고 카뮈는 썼다.


묵묵히 그에게 내려진 형벌을 감수하며, 바위를 굴리는 시지프는 너무나도 성실한 사람
이다. 정상으로 바위를 굴려 올릴 때, 그는 잠시도 그 바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그
가 자신의 모습을 비관하고, 자신의 노력을 의심할 때엔, 아마도 그는 바위를 놓치고 말
것이다. 그가 쏟는 그 순간순간의 노력, 결국엔 무위가 될게 뻔한 그 허망한 열성, 무익
한 일에 순간순간 자신의 온 정열을 불태우는 시지프. 그 모습이 바로 카뮈가 우리에게
제시한 `부조리에 맞선 `반항'의 모습이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일이 결국
부조리를 물리치는 일이며,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이라는 말이다. 카뮈는 "멸시로 극복
되지 않는 운명은 없다"라고 말함으로써, 그것을 설명한다.


『이방인』에서의 뫼르소가 부조리를 각성한 자라면, 『페스트』에서의 리외는 반항을
실천한 인물이다. 일상인의 눈에는 뫼르소가 무정하고, 패륜적인 살인범으로밖에 비춰
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아주 태연했다. 모친의 주검 앞에
서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신다. 장례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음날 한 여자와 동침을
하고 희극적인 영화를 본다. 그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단지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동했
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세상사람들이 모친의 죽음에 대해선 슬퍼한다는 것을 안
다. 그래서 숙연한 마음을 갖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 마음은
일지 않았다.


더욱 터무니없는 것은 그가 태양빛의 강렬함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데 있다. 비록 그가
위협을 받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뫼르소는 두려움 때문에 살인을 한게 아니었다. 단지
뜨거운 태양이 그날 따라 싫었기 때문에 살인을 한 것이다. 이 무정한 살인범은 사형을
선고받는다. 법정에서 그는 잔혹한 살인범으로 낙인찍힌다. 그것을 위해 검사는 그의 행
적 하나하나에 깃든 무정함을 여실히 밝혀낸다. 그가 어머니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 않
는 일, 커피를 마신일, 담배를 피운일, 여자와 놀아난 일, 희극적인 영화를 본일, 이 모든
일 하나하나는 그의 잔인함을 증명하는 명백한 사례가 되었고, 그렇게 잔혹한 인간은 터
무니없는 이유를 들어 살인을 하고, 그리고 이미 죽은자의 몸에 4발의 총알을 더 박아넣
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판결은 완벽해 보인다.


뫼르소는 그 판결에 대해서도 별반 관심을 두지 않는다. 더욱이 그는 자신이 죄를 지었다
는 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는 오히려 세상이 그에게 거짓을 강요하고 있다고 토로한다.
뫼르소는 정직한 인물이다. 오랜 시간의 단절로 인해 어머니와 뫼르소의 관계는 그렇게
친밀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머니의 죽음이 사실 그 자신에겐 별다른 슬픔
을 주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해야 된다는 세상의
통념 때문에, 슬프지도 않으면서 슬퍼하는 척 해야만 한다면, 그는 그것이 정말로 거짓이
며, 부조리한 일이 아닌가 믿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그는 최소한 자기자신에게만은 정직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끊임없이 그에게 거짓을 요구하고, 그가 느끼지 못하는 죄에
대해 참회를 요구한다. 법정에서 뫼르소가 밝힌 살인동기는 모든 사람들의 비웃음을 산
다. 사람들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대체 누가 누구에게 거짓을 강
요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부조리한 것은 뫼르소인가 세계인가 ?


사회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주어진 현실을 아무런 의심없이 받들며, 그 사
회의 양식과 법률에 따라 살아가는 인간은 그 사회속에서만 올바른 인간이다. 하지만,
그는 심지어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며, 그는 자신의 주인이 아닌 사회의 대리인의 역할에
만족하다 자신을 깨닫지 못한 채 죽을지도 모른다. 카뮈는 뫼르소를 통해, 이 사회의 부조
리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반항은 부조리의 응시로부터 시작된다고 카뮈는 말했는데, 그것
은『이방인』에서의 뫼르소의 정직함과 통하는 바가 있다. 자신에게 사형을 언도한 세상
과의 타협을 거부하며, 신부의 멱살을 치켜든 그는 어떠한 거짓에도 물들지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 부조리한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사형집행이 이루어지길 희
망한다. 왜냐하면,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함성이 크면 클수록 뫼르소는 자신의 확신, 즉
세상 이 부조리로 가득찼다는 믿음을 더 명백히 증명해 보일 수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페스트』를 통해서 카뮈는 부조리에 맞서는 인간상을 보여줬다. 하나의 평범했던 도시
가 페스트균에 점령당하면서, 사람들은 공포와 극도의 불안 그리고 죽음에 직면한다. 평
범했던 많은 사람들이 어느 한순간 페스트균에 감염되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그
들의 이웃은 지켜본다. 지금껏, 아무런 의심없이 살아온 사람들은 일순간 혼란을 겪지 않
을 수 없다. 그 사람들은 페스트를 통해 부조리가 무엇인지 경험한다. 하지만, 누구도 부
조리를 극복하는 방법은 알지 못한다. 파늘누 신부는 그같은 재앙이 인간의 죄에 대한 신
의 경고라고 설교한다. 그 설교를 들은 의사 리외는, "적어도 애들은 죄가 없습니다"라는
말로, 신부를 반박한다. 그리고 구급대를 조직하고, 그 부조리에 온몸으로 맞선다. 자신
의 몸을 생각지 아니하고, 그는 환자를 돌보고, 이웃을 위로하고,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쏟는다. 비록 자신이 페스트균의 위력에는 터무니없이 무력하다는 걸 깨달은 후
에도, 불확실한 희망을 찾아 신앞에 무릎끓기를 거부하고, 의사로서 자신이 할 일을 다
해낸다. 비록, 페스트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파늘누 신부조차도, 그의 헌신에 감동한다.
그리고 카뮈는 끝으로 독자에게 이같이 묻는다. " 과연 우리는 신이 없는 세상에서 성자
가 될 수 있는가?" 라고.


의사 리외는 페스트를 인간에게 당면한 현실적인 부조리로 바라봤고, 그것을 극복하는
길을 헛된 희망이나 절망에서 찾지 아니하고, 반항에서 찾은 것이다. 그의 하루하루의
노력은 시지프가 바위에 쏟는 순간순간의 정열과 다를 바 없이 무익할지도 모른다. 하지
만, 그가 부조리에 맞서 결코 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그 모습자체가, 우리들에게 많은 공
감과 용기를 불러 일으킨다. 리외는 신이 떠나간 세상에서도 인간이 성자같은 마음가짐
과 행동으로 모든 이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인간이 매일매일 그의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처럼 여기고
살아간다면, 부조리를 생각할 겨를이 있겠는가. 그것은, 카뮈가 말한데로 `부조리를 멸
시' 하는 일이 될 것이며, 그같은 멸시를 통해 `극복되지 않을 부조리'는 없을 거라는 생
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수없는 변화가 내게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내 외모도 변하고, 그리
고 내 생각도 바뀔 것이다. 스물몇해, 내가 누구에게서도 위안을 얻지 못할 때, 카뮈는
내게 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는 내 마음속에서 하루하루 부조리와 그것의 극복이라는
문제를 고민하게 한다. 카뮈도 그 답을 얻기 위하여, 47살 이른 나이에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끝없이 자신을 채찍질 해왔다. 『반항인』에서 마르크스와 유혈 혁명을 부정하
고, 비폭력 아래 점진적인 사회 변화를 주창했을 때, 그는 오랜 지인이었던 동료 사르트
르와 논쟁하고, 그를 잃었다. 『전락』에서, 카뮈는 자신을 참회한다. 자신의 공정함, 정
직함, 고결함 등이 세속과 연계된 연극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모든 사상
은 모든 인간처럼 불완전하다는것을 깨닫는다.


나는 매일 매일을 시지프처럼 살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산다는 것은 정말로 힘이든다.
단지 내가 바라는 것은, 그의 열정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다. 오늘
하루를 꽉 채워서, 더 이상 아무것도 채울수 없는 삶을 살고 싶다. 그만큼 열심히 하루
를 살고 싶다. 카뮈의 부조리 철학으로 얻은 것은 이것 한가지다. 하지만, 나는 시지프처
럼 구태여 신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삶을 살아가면서 너무나 힘이들때면, 나는 신앞
에 무릎을 끓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 그 앞으로 인도되지 못했지만, 어느날 신의 사
랑을 깨닫는 날이 온다면, 나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를 찬양하고, 또 나의 구원을 위해
애쓰게 될 것이다. 인간은 현재의 신념, 바로 그것이며 그것을 통해 비로소 존재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




1999년 9월의 어느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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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사물은 단 하나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의해 설명된다 " - 카뮈, <시지프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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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4월20일 미국 콜로라도 리틀톤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는 두 명의 재학생이 교내에
서 총을 난사해 학생 12명과 교사 1명을 사망케하고, 20여명에 이르는 학생들을 다치게 했다.
그리고 총을 난사한 당사자인 두 명의 학생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충격적인 사건을
소재로 하여 만들어진 영화가 거스 반 산트 감독의 2003년 작품 <엘리펀트>다.

영화는 어느 가을 날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 샛노란 낙엽들이 교정에 하나 둘씩 내려 앉는
늦가을.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가 조용히 울려 퍼지는 가운데, 콜럼바인의 재학생들은 나름
대로 평온하게 교내 활동을 하고 있다. 술에 취한 아버지대신 운전을 하다 학교에 지각해서
꾸중을 듣는 존. 사진 촬영에 바쁜 일라이 그리고 각자 개성이 남다른 평범한 아이들의 일상
을 카메라는 침묵하며 뒤따른다. 그리고 알렉스와 에릭은 그 평온한 교내로 군복을 입고
총을 가방에 숨긴채 걸어들어가고 있다.

900여발의 총알로 단 16분동안 13명을 죽이고 20여명에게 부상을 입힌 알렉스와 에릭은 어떤
학생이었나 ? 나치가 나오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본다거나 폭력적인 내용의 컴퓨터 게임에 열
중해 있고 인터넷을 통해 손쉽게 총기를 구매해서 그것을 시험삼아 발사해 본다. 영화가 보여
주는 사건의 단서들은 무척 단순하고 짤막하다. 한가지 더 그들이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인정
받지 못했다는 것, 따돌림을 받았고 괴롭힘도 받아왔다는 것. 선생님에겐 문제아로 찍혀,
자주 꾸중을 듣었다는 것 등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건의 원인이라고 단정짓기엔 이들이 벌인
일이 너무나 터무니없고, 잔인하다.

그래서 감독은 이 영화의 제목을 <엘리펀트>로 지었다. 왜 코끼리인가 ? 서양 우화가운데
`거실의 코끼리'란게 있다.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는 문제에는 그냥 익숙해지는 것이 해결책
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더불어, 장님 코끼리 만지듯 이라는 속담에서처럼, 문제의 본질에는
다가서지 못하면서 그 부분들만을 떠벌이며, 그것이 본질인냥 착각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파편적인 원인들론 문제의 본질을 설명할 수 없다는 감독의 뜻이 담겨 있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볼링 포 콜럼바인>의 소재가 되기도 한 이 사건에서 어떤 특정한 원인으로
사건의 본질에 다가설 수 없는 미국민들의 고민을 엿보게 된다. 마이클 무어는 자신의 영화에
서 미국내의 손쉬운 총기 구매와 무차별적인 사용을 문제 삼아, 이 사건에 접근하려 했다. 문제
는 미국외의 어떤 나라도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마이클 무어는 항변했던게
기억난다. 가깝게 캐나다의 예를 들어 무어 감독은, 총기 구매와 습득이 자유로운 캐나다와 미
국을 비교해서 미국의 특별한 사정에 의구심을 표시한다.

과연 그렇다면, 무엇이 미국내 어린 학생들의 총기 난사 사건의 반복을 가져 오는 것인가 ?
<엘리펀트>의 감독은 사실 이에 답하지 못한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그날의 사건과 그날 희
생된 아이들의 일상, 섬뜩하게 평온한 가을 하늘과 짙노란 낙엽들. 시시껄렁한 아이들의
대화일 뿐이다.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에 도무지 어떠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는 감독. 영화
가 지극히 비극적인 이유는 남겨진 이들의 이러한 난감함 때문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독특한 방식으로 충격을 가중한다. 영화의 73분 동안, 총기 난사가 시작되는
것은 60분이 가까워서다. 그 한 시간 남짓 동안 카메라가 줄곧 따라잡는 것은 아이들이 있는
곳이다. 그 아이들은 도서관에서, 탈의실에서, 운동장에서, 교실에서 자신들의 일에 몰두
하고 있다. 침묵과 침묵이 이어지고, 짤막한 대사들은 지극히 무의미할 정도다. 극전 반전을
노리긴 했지만, 그것 자체가 충격적이라기 보다는 그것을 담아내는 카메라의 시선이 충격적
이라고 봐야 한다. 가을 하늘을 비추듯, 아이들의 일상을 담아내는 카메라는 알렉스와 에릭의
총기 난사를 절제된 모습으로 잡아 내고 있다. 화면이 공포스런 것은 난자한 핏방울 때문이라
기 보다는, 총을 쏘아 대고 있는 이 둘의 평범하고 평온한 표정과 대사에서 전해지는 전율
때문이다.

그래서 감독은 무엇을 보여주려 했을까 ? 감독이 사건의 해명 대신에 사건의 `보여줌'을
택한 이유는 이 사건을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해명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차라리 어설프게 이 사건의 문제를 분석하려 들었다면, 영화는 잘못된
분석으로 가닿을 수도 있는 것이기에. 보여주기로 끝난 영화는 관객에게 오랜시간 이
사건의 원인과 그날의 충격을 곱씹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감독이 노린 것은 이것
이 아닐까 ? 그가 뒷날 비평가들에게 이 영화의 관조하기가 책임을 회피하는 짓이었다고
비난 받은 이유가 되긴 했지만, 차라리 관객들에겐 그 편이 더 나았다.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영상, 평온하지만 결코 평온하지 않은 일상. 이 영화가 주는 충격은 침묵
과 고요가 주는 강렬함 같은 것이다.






2004.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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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 김현의 일기 1986~1989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문학사상 가장 뛰어난 비평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던 김현, 그는 1990년
6월 27일, 48세의 젊은 나이로 작고했다. 생전에 백년 후까지도 살아남아있을 그 몇
안 되는 비평가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일컬어지던 불문학자 겸, 문학 비평가가 바로
그였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책이 되고만 이 일기에서 만난 그는, 무척 소탈하고 책읽기를 좋
아했던 평범한 한 사람의 성실한 독자로 비춰진다.  그것은 이 책이 `행복한 책읽기'로

이름지어진 이유가 아닐까.  이 일기속에서 그는 정말로 열심히 읽는다.  요즘의 문학
평론가들도 이만큼 열심히 읽기는 힘들겠단 생각을 해볼정도로, 그의 책읽기는 무척
꼼꼼하고 성실하다.

<행복한 책읽기>는 1986년에서 1989년까지의 독서와 일상에 대한 김현의 기록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책이자, 또 가장 큰 애착을 보여준 책은 공교롭게도 그의 거창
한 문학 평론집들이 아니라, 바로 이 책이었다.

김현은 이 글을 286 컴퓨터로 써 내려갔다한다. 죽기 얼마전부터 그는 컴퓨터에 무척
심취했었는데, 이 책에서 보여지는 소탈하고 거침없는 문체는 아마도, 컴퓨터 타이핑
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책에 대한 감상, 일상에 대한 느낌. 이 두 부분을 적절히 혼합한 느낌이 들지만 주를
차지하는 것은 역시 책에 대한 감상이다. 이 일기를 살펴보면 그의 독서 방향을
엿볼 수 있는데, 주로 시에 대한 비평이 다수를 찾지하고 있는 것은 좀 특기할만하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김현은 어느날의 일기속에서 갈수록 `짧은 글을 선호하게
된다'라고 썼다. 병세가 갈수록 위중해지는 모습을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겨우, 그런
작가의 암시속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김현은 자신이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는 모습을
좀처럼 이 일기에서 드러내보이지 않는다.  일기치고는 너무 객관적이라고 해야 할까.

이 책속에서 독자는 어떤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왜 이 책에 이상한
애착을 품었는가 ? 1980년대의 말미에 나는 중학생이었다.  그가 독서일기를 쓴 그
3년간 나는 까까머리 중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문학이란 고리타분한 국어 과목의 일부
분이었을 거고, 책읽기란 교과서 읽기가 다였을 거였다. 그 시기에 쓰여진 일기를 읽는
다는 것은 아마도 그 시절의 순수함같은 걸 되찾는 일같다.  매 일기의 첫 머리에
기록되어 있는 날짜를 보면서, 나의 무덤덤한 중학 시절과 김현의 `행복했던 책읽기'의
시절이 겹쳐진다. 누구에겐가는 파릇파릇한 성장의 시기였다면 또 누군가에게는 생명
의 빛이 꺼져가는 시간이었을거란 이런 사소한 깨달음은, 이 책을 읽는 나에게는 비애
감과 섬뜩함을 심어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어김없이 한 장 한 장을 채우고 있는 그 3년동안의 책읽기와
일기의 날짜들에서 삶의 유한성 보다는 삶의 완결성을 배운다. 더불어 삶이 과정이
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종착지로서의 인생 보다는 과정으로서의 인생을 중요하게
바라봐야 할 논리를 배운다. 그래서 언제나 시작처럼 끝도 당당하고 성실해야 한다
는 사실을 깨우치는 것이다. 일기처럼 삶도 묶여질 수 있다면, 유한한 시간속에서
우리의 하루하루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 답을 이 책은 주고 있는 듯 했다. 하나의
텍스트는 삶의 완결성에 닿아 있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동시대의 작가들이 비평가인 김현의 손에 요리되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느 신진작가에게는 가차없는 비판이 가해지고, 또 어떤 작가들에는 과도
한 찬사가 이어진다. 비록, 일기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이 글속에서도 김현은
자신이 비평가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비평가로서 냉정과 호의 사이를 오가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긍정적으로 평가한 작가들 가운데 요즘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는
작가가 많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김훈이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기자에서 소설가로
변신한 김훈은, 80년대 김현의 예언대로 훌륭한 작가로 성장했다.

이 책의 미덕을 무엇에 둘까? 그것은 아마도 책의 반 이상이 할애된 작가의 노고만큼
시에 대한 독자의 새로운 인식이 아닐까 한다. 단순히 그 시대의 시인들만이 아니라,
인용된 시를 통해 시를 보는 방법, 안목을 배우게 된다. 그래서 요즘 나는 인문학
서적 가운데서도, 시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시의 독법을 자연스레 이 책을 통해서
배우게 된 것이다.

다시금 아쉬운 점은 훌륭한 비평가가 너무 이른 나이에 요절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젊은 나이에 김현은 이미 비평가로서는 모든걸 이루어냈다.

더불어, 새로운 시인, 새로운 소설가. 그들의 탄생앞에서 통과의례처럼 막강한 영향력
을 발휘하던 막후의 비평가들의 존재를 김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을 지적해
두고 싶다. 문학권력은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는지, 이 책은 내게 물음표를 던진다.



<밑줄긋기>


"한 사오 년 전쯤, 거의 모든 것을 팽개치고 집에 들어앉아, 노자와 장자만 읽던 내가
생각난다. 나는 버렸고, 그리고 이삼 년을 보냈다. 그러고 나니 조금씩 기력이 되살아
났다. 지금도, 그때의 그 무기력증을 생각하면, 겁이 난다. 삶에는 지름길이 없다. 자
기가 가야 할 길은 가야 한다.(1989.10.24)"


"새벽에 형광등 밑에서 거울을 본다 수척하다 나는 놀란다
얼른 침대로 되돌아와 다시 눕는다
거울 속의 얼굴이 점점 더 커진다
두 배, 세 배, 방이 얼굴로 가득하다
나갈 길이 없다
일어날 수도 없고, 누워 있을 수도 없다
결사적으로 소리 지른다 겨우 깨난다
아,살아 있다 (1989.12.12) "







2004. 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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