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 부조리에 관한 이해
나는 언제부터 나를 회의하기 시작했을까 ? 이 자문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말'이 곧 나와 사물의 관계, 나와 사물의 실체
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였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때부터 아마도 나는 정말로 나를 `의식'
하기 시작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 생각으로는 실체를 의심하지 않는자, 모
든 것을 회의하지 않는자는 결국 자신이 세운 `왕국'안에서는 `만족'할 수 있을지언정,
언제까지나 자신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
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변화를 거듭한다. 그것이 신체의 변화일수도 있을것이고, 정
신적인 변화일수도 있다. 이것은 인간에겐 아주 흔히 있는 일이다. 독실한 신앙인이 하
루 아침에 신을 부정하기도 하고, 자신만만하던 무신론자가 어느날 신의 부름을 받았다
고 떠벌리기도 한다. 변화 중에서도 이같은 가치관의 변화는 무서운 것이다. 결국 인간
이 매일매일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신념을 바탕으로 한 행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루하루의 양식처럼, 인간에겐 필수적인 것이며, 그를 아침에 눈뜨게 만들고 삶
에 의미를 부여하는 바로 그 힘이 된다. 그런데 어느날, 그런 일상인이 자신의 평범한 생
활이 갖고 있는 그 맹목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치자. 똑같이 분주한 아침, 출근길의
혼잡함, 피곤한 일과 그리고 퇴근, 휴식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그는 전혀 낯설 것이라고
믿고 있는 내일의 풍경을 머리속에 그리며, 잠에 빠진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내일이 실은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그런 일상중의 하나에
불과할 뿐이라면 어떨까. 더군다나 그가 지극히 당연한 일상으로 믿어의심치 않았던 것
들이 실은 매일 매일의 기계적인 습관성으로 지탱되어온 생활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다면, 아마도 그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생활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 부조리한 감정은 어떠한 길모퉁이에서 그 누구의 얼굴에
라도 덮쳐올 수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회의의 시작으로써 부조리한 감정을 그 전면에
내세웠다.
그의 부조리의 인식은 지극히 명료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세상이 부조리하다는 것,
즉 `세상이 살만한 가치가 없다'면 구태여 애쓰며 살아갈 필요가 없는 것이며, 세상에 회
의를 느꼈다면 세상을 거부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뮈는 그것이 합리적이
다라고 말한후에 다시, 그 합리성을 부정했다. 카뮈의 부조리 사상의 역설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내가 역설이라고 한 것은, 그것을 내가 한때 역설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에서의
역설일 뿐이다. 그 모순에 가까운 역설을 나는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를 통해, 제일 먼저
수정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부정을 함의한 역설이 아니라, 하나의 견고한 논리와
예증을 통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긍정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긍정한다는
것은, 부조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부조리를 극복할 대안
을 `거부'에 두지 아니하고 삶에 대한`정열'과 `반항'에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는 신화속의 시지프는 오직 생활을 위해 물이 필요했
다. 그래서 불경하게도 신의 비밀을 발설하고, 물을 얻는다. 결국 지옥의 신인 풀루토에
게 목덜미를 붙들린채, 바위가 준비되어 있는 지옥의 들판으로 끌려온다. 그리고 이제
그에게 형벌이 주어진다. 자신보다 몇배는 더 크고, 무거운 바위를 자신이 서 있는 들판
에서 산 정상으로 굴려올려야만 했던 것이다. 그의 죄명은 신에 대한 불복종, 그리고 신
성에 대한 도전, 더불어 신조차도 부러워할 만한 지상의 삶에 대해 그의 지극한 열정 바
로 그것이었다. 시지프가 그의 온 힘을 다하여, 굴려 올린 바위는 허무하게도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들판으로 굴러 떨러진다. 그가 바위를 굴려 올리기 위해 쏟던 노력도 일
순간 무위가 되어 버린다. 이제 그는 또다시 바위를 굴려 올리기 위해, 산 아래로 내려간
다. 그는 그 하릴없는 노력을 언제까지나 쏟아야만 했던 것이다. 지옥의 들판과 무거운
바위, 그리고 그가 흘리는 땀방울, 그의 끝없는 노동은 이제 엄연한 그의 현실이고, 모든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형벌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그것이 그리스 신화속, 시지프
의 부조리다.
카뮈는 시지프의 이 부당한 현실을 인간의 부조리와 대치시켰다. 생명의 열망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이미 죽음이라는 필연 또한 함께 지니고 살아간다. 시지프가 지옥의 신
플루토의 명령까지 무시해가며, 그토록 지옥에의 복귀를 미루었던 것은, 인간이 가진 그
살고자 하는 욕구와 합치되는 일이다. 그 부조리와 함께 인간이 살아가야 한다고 카뮈는
말했다. 하지만, 영원히 무익할지도 모르는 시지프의 노력이 부조리를 넘어서 있다고 주
장한다. 그 논리의 중심에 `반항정신'이 있다. 바위의 무게만큼이나, 그의 대가없는 노
력만큼이나 그리고 어느날 그의 마음속에 일지도 모르는 공허함만큼이나 그의 삶은 부
조리로 가득차있다. 하지만, 시지프는 그 일을 계속해 나간다. 불평조차 없다. 여기에
그의 위대함이 있다고 카뮈는 썼다.
묵묵히 그에게 내려진 형벌을 감수하며, 바위를 굴리는 시지프는 너무나도 성실한 사람
이다. 정상으로 바위를 굴려 올릴 때, 그는 잠시도 그 바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그
가 자신의 모습을 비관하고, 자신의 노력을 의심할 때엔, 아마도 그는 바위를 놓치고 말
것이다. 그가 쏟는 그 순간순간의 노력, 결국엔 무위가 될게 뻔한 그 허망한 열성, 무익
한 일에 순간순간 자신의 온 정열을 불태우는 시지프. 그 모습이 바로 카뮈가 우리에게
제시한 `부조리에 맞선 `반항'의 모습이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일이 결국
부조리를 물리치는 일이며,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이라는 말이다. 카뮈는 "멸시로 극복
되지 않는 운명은 없다"라고 말함으로써, 그것을 설명한다.
『이방인』에서의 뫼르소가 부조리를 각성한 자라면, 『페스트』에서의 리외는 반항을
실천한 인물이다. 일상인의 눈에는 뫼르소가 무정하고, 패륜적인 살인범으로밖에 비춰
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아주 태연했다. 모친의 주검 앞에
서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신다. 장례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음날 한 여자와 동침을
하고 희극적인 영화를 본다. 그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단지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동했
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세상사람들이 모친의 죽음에 대해선 슬퍼한다는 것을 안
다. 그래서 숙연한 마음을 갖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 마음은
일지 않았다.
더욱 터무니없는 것은 그가 태양빛의 강렬함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데 있다. 비록 그가
위협을 받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뫼르소는 두려움 때문에 살인을 한게 아니었다. 단지
뜨거운 태양이 그날 따라 싫었기 때문에 살인을 한 것이다. 이 무정한 살인범은 사형을
선고받는다. 법정에서 그는 잔혹한 살인범으로 낙인찍힌다. 그것을 위해 검사는 그의 행
적 하나하나에 깃든 무정함을 여실히 밝혀낸다. 그가 어머니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 않
는 일, 커피를 마신일, 담배를 피운일, 여자와 놀아난 일, 희극적인 영화를 본일, 이 모든
일 하나하나는 그의 잔인함을 증명하는 명백한 사례가 되었고, 그렇게 잔혹한 인간은 터
무니없는 이유를 들어 살인을 하고, 그리고 이미 죽은자의 몸에 4발의 총알을 더 박아넣
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판결은 완벽해 보인다.
뫼르소는 그 판결에 대해서도 별반 관심을 두지 않는다. 더욱이 그는 자신이 죄를 지었다
는 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는 오히려 세상이 그에게 거짓을 강요하고 있다고 토로한다.
뫼르소는 정직한 인물이다. 오랜 시간의 단절로 인해 어머니와 뫼르소의 관계는 그렇게
친밀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머니의 죽음이 사실 그 자신에겐 별다른 슬픔
을 주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해야 된다는 세상의
통념 때문에, 슬프지도 않으면서 슬퍼하는 척 해야만 한다면, 그는 그것이 정말로 거짓이
며, 부조리한 일이 아닌가 믿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그는 최소한 자기자신에게만은 정직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끊임없이 그에게 거짓을 요구하고, 그가 느끼지 못하는 죄에
대해 참회를 요구한다. 법정에서 뫼르소가 밝힌 살인동기는 모든 사람들의 비웃음을 산
다. 사람들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대체 누가 누구에게 거짓을 강
요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부조리한 것은 뫼르소인가 세계인가 ?
사회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주어진 현실을 아무런 의심없이 받들며, 그 사
회의 양식과 법률에 따라 살아가는 인간은 그 사회속에서만 올바른 인간이다. 하지만,
그는 심지어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며, 그는 자신의 주인이 아닌 사회의 대리인의 역할에
만족하다 자신을 깨닫지 못한 채 죽을지도 모른다. 카뮈는 뫼르소를 통해, 이 사회의 부조
리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반항은 부조리의 응시로부터 시작된다고 카뮈는 말했는데, 그것
은『이방인』에서의 뫼르소의 정직함과 통하는 바가 있다. 자신에게 사형을 언도한 세상
과의 타협을 거부하며, 신부의 멱살을 치켜든 그는 어떠한 거짓에도 물들지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 부조리한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사형집행이 이루어지길 희
망한다. 왜냐하면,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함성이 크면 클수록 뫼르소는 자신의 확신, 즉
세상 이 부조리로 가득찼다는 믿음을 더 명백히 증명해 보일 수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페스트』를 통해서 카뮈는 부조리에 맞서는 인간상을 보여줬다. 하나의 평범했던 도시
가 페스트균에 점령당하면서, 사람들은 공포와 극도의 불안 그리고 죽음에 직면한다. 평
범했던 많은 사람들이 어느 한순간 페스트균에 감염되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그
들의 이웃은 지켜본다. 지금껏, 아무런 의심없이 살아온 사람들은 일순간 혼란을 겪지 않
을 수 없다. 그 사람들은 페스트를 통해 부조리가 무엇인지 경험한다. 하지만, 누구도 부
조리를 극복하는 방법은 알지 못한다. 파늘누 신부는 그같은 재앙이 인간의 죄에 대한 신
의 경고라고 설교한다. 그 설교를 들은 의사 리외는, "적어도 애들은 죄가 없습니다"라는
말로, 신부를 반박한다. 그리고 구급대를 조직하고, 그 부조리에 온몸으로 맞선다. 자신
의 몸을 생각지 아니하고, 그는 환자를 돌보고, 이웃을 위로하고,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쏟는다. 비록 자신이 페스트균의 위력에는 터무니없이 무력하다는 걸 깨달은 후
에도, 불확실한 희망을 찾아 신앞에 무릎끓기를 거부하고, 의사로서 자신이 할 일을 다
해낸다. 비록, 페스트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파늘누 신부조차도, 그의 헌신에 감동한다.
그리고 카뮈는 끝으로 독자에게 이같이 묻는다. " 과연 우리는 신이 없는 세상에서 성자
가 될 수 있는가?" 라고.
의사 리외는 페스트를 인간에게 당면한 현실적인 부조리로 바라봤고, 그것을 극복하는
길을 헛된 희망이나 절망에서 찾지 아니하고, 반항에서 찾은 것이다. 그의 하루하루의
노력은 시지프가 바위에 쏟는 순간순간의 정열과 다를 바 없이 무익할지도 모른다. 하지
만, 그가 부조리에 맞서 결코 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그 모습자체가, 우리들에게 많은 공
감과 용기를 불러 일으킨다. 리외는 신이 떠나간 세상에서도 인간이 성자같은 마음가짐
과 행동으로 모든 이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인간이 매일매일 그의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처럼 여기고
살아간다면, 부조리를 생각할 겨를이 있겠는가. 그것은, 카뮈가 말한데로 `부조리를 멸
시' 하는 일이 될 것이며, 그같은 멸시를 통해 `극복되지 않을 부조리'는 없을 거라는 생
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수없는 변화가 내게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내 외모도 변하고, 그리
고 내 생각도 바뀔 것이다. 스물몇해, 내가 누구에게서도 위안을 얻지 못할 때, 카뮈는
내게 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는 내 마음속에서 하루하루 부조리와 그것의 극복이라는
문제를 고민하게 한다. 카뮈도 그 답을 얻기 위하여, 47살 이른 나이에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끝없이 자신을 채찍질 해왔다. 『반항인』에서 마르크스와 유혈 혁명을 부정하
고, 비폭력 아래 점진적인 사회 변화를 주창했을 때, 그는 오랜 지인이었던 동료 사르트
르와 논쟁하고, 그를 잃었다. 『전락』에서, 카뮈는 자신을 참회한다. 자신의 공정함, 정
직함, 고결함 등이 세속과 연계된 연극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모든 사상
은 모든 인간처럼 불완전하다는것을 깨닫는다.
나는 매일 매일을 시지프처럼 살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산다는 것은 정말로 힘이든다.
단지 내가 바라는 것은, 그의 열정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다. 오늘
하루를 꽉 채워서, 더 이상 아무것도 채울수 없는 삶을 살고 싶다. 그만큼 열심히 하루
를 살고 싶다. 카뮈의 부조리 철학으로 얻은 것은 이것 한가지다. 하지만, 나는 시지프처
럼 구태여 신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삶을 살아가면서 너무나 힘이들때면, 나는 신앞
에 무릎을 끓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 그 앞으로 인도되지 못했지만, 어느날 신의 사
랑을 깨닫는 날이 온다면, 나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를 찬양하고, 또 나의 구원을 위해
애쓰게 될 것이다. 인간은 현재의 신념, 바로 그것이며 그것을 통해 비로소 존재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
1999년 9월의 어느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