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사물은 단 하나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의해 설명된다 " - 카뮈, <시지프의 신화>



-------------------------------------------------------------------------------------
1999년 4월20일 미국 콜로라도 리틀톤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는 두 명의 재학생이 교내에
서 총을 난사해 학생 12명과 교사 1명을 사망케하고, 20여명에 이르는 학생들을 다치게 했다.
그리고 총을 난사한 당사자인 두 명의 학생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충격적인 사건을
소재로 하여 만들어진 영화가 거스 반 산트 감독의 2003년 작품 <엘리펀트>다.

영화는 어느 가을 날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 샛노란 낙엽들이 교정에 하나 둘씩 내려 앉는
늦가을.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가 조용히 울려 퍼지는 가운데, 콜럼바인의 재학생들은 나름
대로 평온하게 교내 활동을 하고 있다. 술에 취한 아버지대신 운전을 하다 학교에 지각해서
꾸중을 듣는 존. 사진 촬영에 바쁜 일라이 그리고 각자 개성이 남다른 평범한 아이들의 일상
을 카메라는 침묵하며 뒤따른다. 그리고 알렉스와 에릭은 그 평온한 교내로 군복을 입고
총을 가방에 숨긴채 걸어들어가고 있다.

900여발의 총알로 단 16분동안 13명을 죽이고 20여명에게 부상을 입힌 알렉스와 에릭은 어떤
학생이었나 ? 나치가 나오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본다거나 폭력적인 내용의 컴퓨터 게임에 열
중해 있고 인터넷을 통해 손쉽게 총기를 구매해서 그것을 시험삼아 발사해 본다. 영화가 보여
주는 사건의 단서들은 무척 단순하고 짤막하다. 한가지 더 그들이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인정
받지 못했다는 것, 따돌림을 받았고 괴롭힘도 받아왔다는 것. 선생님에겐 문제아로 찍혀,
자주 꾸중을 듣었다는 것 등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건의 원인이라고 단정짓기엔 이들이 벌인
일이 너무나 터무니없고, 잔인하다.

그래서 감독은 이 영화의 제목을 <엘리펀트>로 지었다. 왜 코끼리인가 ? 서양 우화가운데
`거실의 코끼리'란게 있다.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는 문제에는 그냥 익숙해지는 것이 해결책
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더불어, 장님 코끼리 만지듯 이라는 속담에서처럼, 문제의 본질에는
다가서지 못하면서 그 부분들만을 떠벌이며, 그것이 본질인냥 착각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파편적인 원인들론 문제의 본질을 설명할 수 없다는 감독의 뜻이 담겨 있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볼링 포 콜럼바인>의 소재가 되기도 한 이 사건에서 어떤 특정한 원인으로
사건의 본질에 다가설 수 없는 미국민들의 고민을 엿보게 된다. 마이클 무어는 자신의 영화에
서 미국내의 손쉬운 총기 구매와 무차별적인 사용을 문제 삼아, 이 사건에 접근하려 했다. 문제
는 미국외의 어떤 나라도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마이클 무어는 항변했던게
기억난다. 가깝게 캐나다의 예를 들어 무어 감독은, 총기 구매와 습득이 자유로운 캐나다와 미
국을 비교해서 미국의 특별한 사정에 의구심을 표시한다.

과연 그렇다면, 무엇이 미국내 어린 학생들의 총기 난사 사건의 반복을 가져 오는 것인가 ?
<엘리펀트>의 감독은 사실 이에 답하지 못한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그날의 사건과 그날 희
생된 아이들의 일상, 섬뜩하게 평온한 가을 하늘과 짙노란 낙엽들. 시시껄렁한 아이들의
대화일 뿐이다.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에 도무지 어떠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는 감독. 영화
가 지극히 비극적인 이유는 남겨진 이들의 이러한 난감함 때문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독특한 방식으로 충격을 가중한다. 영화의 73분 동안, 총기 난사가 시작되는
것은 60분이 가까워서다. 그 한 시간 남짓 동안 카메라가 줄곧 따라잡는 것은 아이들이 있는
곳이다. 그 아이들은 도서관에서, 탈의실에서, 운동장에서, 교실에서 자신들의 일에 몰두
하고 있다. 침묵과 침묵이 이어지고, 짤막한 대사들은 지극히 무의미할 정도다. 극전 반전을
노리긴 했지만, 그것 자체가 충격적이라기 보다는 그것을 담아내는 카메라의 시선이 충격적
이라고 봐야 한다. 가을 하늘을 비추듯, 아이들의 일상을 담아내는 카메라는 알렉스와 에릭의
총기 난사를 절제된 모습으로 잡아 내고 있다. 화면이 공포스런 것은 난자한 핏방울 때문이라
기 보다는, 총을 쏘아 대고 있는 이 둘의 평범하고 평온한 표정과 대사에서 전해지는 전율
때문이다.

그래서 감독은 무엇을 보여주려 했을까 ? 감독이 사건의 해명 대신에 사건의 `보여줌'을
택한 이유는 이 사건을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해명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차라리 어설프게 이 사건의 문제를 분석하려 들었다면, 영화는 잘못된
분석으로 가닿을 수도 있는 것이기에. 보여주기로 끝난 영화는 관객에게 오랜시간 이
사건의 원인과 그날의 충격을 곱씹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감독이 노린 것은 이것
이 아닐까 ? 그가 뒷날 비평가들에게 이 영화의 관조하기가 책임을 회피하는 짓이었다고
비난 받은 이유가 되긴 했지만, 차라리 관객들에겐 그 편이 더 나았다.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영상, 평온하지만 결코 평온하지 않은 일상. 이 영화가 주는 충격은 침묵
과 고요가 주는 강렬함 같은 것이다.






2004. 9. 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