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이라 쓰고 버티기라 읽는 -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한재우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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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의 제목과 부제가 흥미롭다. 요즘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사람들의 동질적인 분위기라고 할까?  부제는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다.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을 일치시킬 수 없다. 그게 일치하는 사람은 행운아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고 싶지 않은 일에 시간을 보내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곳에 가장 필요한 미덕은 `버티기'가 될 수밖에 없다.  버티기란 말이 풍기는 뉘앙스가 부정적인가?  사람이 살아가면서 버티지 않아도 될 때는 일이 잘 풀리고, 의도하는대로 인생이 흘러갔을 때다. 목표에 쉽게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때, 하고 있는 일이 즐겁다는 느낌이 들때 우리는 `버틴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즐기는 시간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삶은 매순간 콘서트장에 서 있는게 아니다. 즐기는게 아니라 `버티기'는게 삶이란 얘기다. 저자 한재우는 이 버티는 일상을 자신의 삶과 버무려 한 편의 에세이로 풀이한다. 한재우 에세이 <노력이라 쓰고 버티기라 읽는>(21세기북스,2019)는 지금 세대의 핵심 키워드를 가장 공감이 가는 언어로 풀이한 책같다. 일단, 저자의 삶이 `노력하고 버텨왔던' 시간 같았다는 인상이 든다. 서울대 법학부를 졸업했지만, 남들처럼 사법고시라는 앨리트 코스에 접어들지 못했다. 늦깍이로 군대에 다녀와 여대 앞에 작은 카페를 열었으나 1년을 겨우 채우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카페에서 일하는 틈을 이용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1,500만이 듣는 팟캐스트 방송을 열었고, 베스트셀러 책을 몇 권 써냈다. 서른 줄에 접어들어서야, 자신이 무엇을 할 때, 즐겁고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저자는 회사 생활을 하며, 틈틈이 글을 쓰고 방송을 만들어 나간다. 이제는 하루종일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자신이 읽은 책을 남들과 나누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 그리고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이 거쳐온 2,30대의 시간들을 회고하며, 그 시절을 견디고 있는 독자들에게 어떻게 그 고민을 이겨낼 수 있는지 작은 지혜를 건넨다. 책의 목차가 `~고민에 대하여'라는 일관된 제목을 갖고 있고, 어떤 주제에 관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처방전을 내놓는다. 그같은 이유로, 독자는 아마 손에 쥔 책을 놓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완벽하게 준비되지가 않아서기 때문이다. 정치논객 진중권 교수는 미학 공부를 하기 위해, 독일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비행기 값'이라도 벌어볼 요량으로 작은 자취방에서 286 컴퓨터로 써낸 글은 다름아닌 3권짜리 <미학 오디세이>였다. 바로 현재 미학대중서의 고전이 된 책이다. 진중권은 20주권 기념판 서문에서 다시는 이런 책을 쓰지 못할 것 같다고 토로한다. 왜냐면, 그 시절보다 지식은 더 정교화되고 실력도 늘었을테지만, 그 시절 갖고 있던 지적 호기심과 새로운 앎에 대한 열정이 사그라들고 말았기 때문이라고. 그 말인즉, 위대한 업적은 결코 실력만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저자는 1년간 카페에서 다양한 에피소드를 겪었고 그것에 대해 글을 써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쓰지 못했다. 아직 글을 쓸만한 준비가 되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글쓰기 실력이 출중해지면 그 시절의 에피소드를 회고하며 멋지게 글을 써보리라, 생각했지만 이미 살아있는 감(感)은 사라지고 그 위에 `시간과 지식이 진흙처럼 쌓여 굳버버렸다'.  글쓰기 실력은 나아졌을지 모르지만, 글을 써야 할 의지와 동기가 사라진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시도하려 할때, 필요한 것은 탄탄한 실력과 준비인가, 살아있는 감이자 열정인가?


" 그러므로 무언가를 시도하기에 가장 좋은 때는, 그것에 대해 많이 알게 될 내일이 아니라 부족함을 여실히 느끼는 오늘이 아닐까. 완벽한 내일이 아닌 초라한 오늘로부터 시작하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41쪽, 한재우 <노력이라 쓰고 버티기라 읽는>


시작이 늦었다고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 "동기들은 다들 갈 길을 정해서 열심히 달리고 있는데, 나만 아직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고시공부든, 취업준비든, 남들보다 출발이 늦어서 불안합니다."  함께 취업준비를 하는데, 친구만 1차에 붙고, 나는 떨어지는 상황이거나, 누구는 인턴에 합격했는데, 나는 떨어졌을 때,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취업한 친구에 비해, 아직 취준생이 나는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단적인 예로, 수능시험 점수가 안 좋은 고3학생들은 크게 낙담한다.  1,2년 재수를 하는 학생들의 초조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인생 전체로 볼때 그들이 남보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몇 년이 과연 정말로 크게 늦은 것일까?  


저자는 스물일곱에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아홉에 군대를 갔고 서른둘에 취직을 했던 자신의 경험을 들려준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서른 하나, 팟캐스트 방송을 시작한 것은 서른 다섯이었다. 자신의 삶에서 눈을 씻고 찾아봐도 지름길은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늦게 가려 한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했는데도 이렇게 늦었다고 토로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늦게 가도 별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결국 조금 늦었을 뿐 취직을 했고 책을 냈으며, 팟캐스트 방송을 만들었고, 유튜브를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남들보다 늦기는 했어도 내 길을 찾아서 내 걸음으로 걷고 있다"는 점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월든>이란 책에서 누구나 자신의 북소리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두라고 말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빨리 성숙해야 할 일 따위는 중요하지 않고, 사람이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짓은 마치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는 일처럼 어리석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자기 속도에 맞추어서 끝까지 뛰면 된다. 일부러 늦을 필요는 없지만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면 그 또한 인생이다. 그리고 출발이 늦었다고 해서 꼭 전체기록이 나쁘리란 법도 없다."  71쪽


간간이 찾아오는 슬럼프를 극복하는 저자의 방법도 눈여겨볼 만 하다. 저자는 30살이 넘어서 꾸준하게 글을 써왔고 주 3회 팟캐스트 방송을 몇 년간 펑크없이 올렸다. 그런 일은 물론 매번 신나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좋았다가 실증났다가, 길을 찾은 듯 하다가 헤매다가, 사람은 본래 그렇게 일을 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진짜 슬럼프가 오면 모든 것에서 손을 놓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슬럼프 자체가 찾아올 때를 두려워한다. 그럴 때는 일 자체를 회피하게 된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가 애니 딜라드는 <창조적 글쓰기>에서 쓰기 싫더라도 매일 글을 써야 할 이유를 "나는 책을 쓴다기보다는 죽어가는 친구를 지키듯이 책을 지켰다" "진행중인 작품을 손에서 놓으면 그 작품이 사자처럼 포악해진다. 매일 찾아서 내가 주인이라는 것을 재차 확인시켜야 한다."고 언급했다. 즉, 슬럼프를 이기는 최선의 방법은 그 일에서 손을 놓지 않고 그냥 계속 하는 것이다.  저자는 슬럼프를 해소하는 나름의 방법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해결책은 간단하다. 가장 간단하기에 가장 정확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그냥 해버리는 것이다.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그냥 당장 해버리면 된다.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딱 하나다. `잘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버리는 일' " 148쪽 


책의 제목이 통속적이지만 이 책의 깊이와 공감력은 높이 살 만 하다. 첫 페이지를 넘기자 계속 페이지를 넘기지 않을 수 없는 흡입력이 있었다. 책의 전체를 일관하는 고민들은 누구나 살면서 겪게 되고, 지금도 우릴 괴롭히는 문제들이다. 저자는 각개격파 하듯, 하나하나 독자들의 고민을 해소하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한 권의 책을 통해, 많은 작가와 그들의 지혜를 만날 수 있다. 그만큼 이 책은 개인의 에세이를 넘어서는 위로와 위안이 있다.   `존버의 시대'라고들 한다.  그저 열심히 버티는 것이 최고의 미덕인 시대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버티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사람은 버텨야 할 때, 버텨내야 한다. 세상 모든 일에 버티는 능력은 감초의 역할을 한다. 


버티기는 노력이고, 성공으로 가는 씨앗이며, 위대한 성취의 밑거름이다. "버티는 한 기대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서른 두살에 글을 쓰기 시작해 마흔을 목전에 남기고 퇴사를 결심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을 살아가겠다고 결정은 것은, 퇴근 후 오랜 시간 엉덩이를 붙이고 책상앞에 앉아 버티는 힘을 길러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시간은 내가 과연 글쓰는 일을 잘 해 낼 수 있을지 스스로를 시험하며, 따라올 수 없는 내공을 기르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무슨 일에서건, 우리는 고수가 되고 성공에 이르기 위해서, 그런 끈기의 시간이 필요하다. 버텨내야만 도달할 수 있다.  존버의 시간을 버텨내야,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일치시킬 날이 빠르게 올 것이다. 한재우의 에세이는 감동과 깨달음을 전해주며 따뜻한 위로가 있는 책이다. `존버'하고 있는 당신께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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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너무 몰랐다 - 해방,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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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일부 `꼴통'부류의 인간들을 제외하고는 우리 국민은 매우 상식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지도자를 자기의 손으로 뽑기도 하지만 또 그들의 잘못을 `깨닫는 순간' 가차없이 무혈혁명으로 불의한 지도자를 내쫓기도 하는 역량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 정의로움과 무지가 한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좀처럼 이해할 순 없지만, 이것은 엄연히 우리가 경험한 최근의 역사이며 세계가 부러워하는 한국민의 저력이다.  이런 널뛰기 같은 `상식과 몰상식'의 정치인식은 어디에 기원하고 있는가?  첫째, 그것은 욕망일 것이고 둘째 그것은 무지일 것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신작 <우린 너무 몰랐다>(통나무 2019)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그 `무지'에 관한 것임을 우선 밝힌다. 


사람들의 욕망은 도덕성에 우선한다. 그들은 살기가 어려워지면, 정치 지도자의 도덕성 따위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과거 MB가 그 무수한 의혹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된 이유다. 그 사람은 이미 10여년 전 대선 당시에 제기됐던 똑같은 혐의로 지금 감옥에 수감 돼 재판을 받고 있다. 그 당시, 국민들의 판단력은 `국밥을 게걸스레 퍼먹으며 잘 살게 해주겠다는 꼬드김'에 흐려지고 말았다. 욕망은 그러나 정직하며 보편적인 것이기에 용서가 된다.  반면, 사람들의 무지는 그보다 훨씬 고약하다. 우선, 무지는 게으름의 산물이다. 알야야 할 것을 공부하지 않은 것이 첫번째 잘못이요, 그러한 무지가 자신의 사상을 형성한다는 것이 또다른 잘못이다. 우리가 받은 역사교육 자체가 무지의 산물이며, 무용지물이란 걸 도올의 책은 반증해주고 있다.


도올이 이 책에서 주요한 테마로 삼고 싶었던 건 1948년 `제주 4.3과 10.19 여순'이다. 그러나, 어떤 독자가 이 사건들의 전후 맥락에 대해 해설할 수 있는가?  우리의 역사지식으로 이 사건들의 발단,전개,의미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시대의 석학이자 공부하는 철학자' 도올에게도 마찬가지였던가 보다. 그의 현대사의 무지에 대한 반성과 개탄은 독자의 것이다. 그럼에도 내게 위안이 됐던 것은, 내가 그동안 주워들어 알아온 그 사건들에 대한 상식에 도올이 역사 문헌과 합리적 추론으로 근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주와 여순의 본질은 미국과 이승만, 해방후 청산되지 못한 친일파가 합작한 나찌의 유대인 학살을 넘어서는 `한국판 자국민 제노사이드(대량학살)'다.


도올의 이 책이 귀중한 자산이 될 것임은 그가 이 책에서 역사에 대한 기존의 틀에박힌 관념을 상당부분 독창적으로 해소한 점에 있다. 단적으로 도올은 해방이 이 민족에게 "저주,회한,근심,좌절의 대상"이었으며 "해방 때문에 패가망신했고 좆x다고 통곡했던 사람들의 역사가 이 민족의 역사였고, 해방 후 오늘날까지 진행되어온 불행한 역사를 야기시켜온 주체세력"이었다고 단정짓는다.(114쪽) 왜 그런가?  오늘날 보수가 소위 좌파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에게 흔히 들씌우는 `종북'이나 `빨갱이'니 하는 말들의 시작이 이 지점에서 탄생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 언술의 발설자가 또 그 세력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명백하다.  누군가가 역사적 팩트를 이야기하더라고, 그를 단번에 제압할 수 있는 말은 그 어떤 논리나 사실이 아니라 `빨갱이'란 단어 한마디로 끝나는 게 해방 후 21세기로 이어지는 유구한 역사적 언어습관이었다.


`빨갱이'라는 말은 도올에 따르면 제주 4.3과 여순 이후에 탄생한다. 그리고 그같은 단어를 조합해 누군가를 규정하는데 열을 올린 세력은 제주 4.3과 여순에서 약 4만 5천명의 자국민을 학살한 세력이었다. 4만 5천명은 `빨갱이'였기 때문에 사살되었다는 것이, 우리 현대사의 암묵적인 가르침이었고 그렇게 우린 교육받았다. 그게 맞느냐? 그러한 역사서술이 정당한가? 라는 질문을 이 책은 쏟아냈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들 속으로 들어가보면 우린 놀라운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사건의 주모자들이 내세운 결기어린 문장속에서 우리가 마주서게 되는 것은 매우 `상식적인' 요구였기 때문이다. 제주 4.3이나 여순 모두, 총격 학살자 처벌이나 남한 단독선거 거부, 미군정 퇴거, 자치적 인민위원회에 대한 탄압중지, 자국민 토벌작전에 대한 거부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승만과 다시 권력의 중앙으로 초청된 일제말의 친일파들은 자신의 반대파들을 제거해야할 명분이 분명했다. 그들은 인민위원회를 미군정의 도움으로 혁파해야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그 체제 아래서 부귀 영화를 누리는 것이 가능했으리라. 이승만은 영구분단을 고민했던 김구나 김규식 같은 인사들, 혹은 여운형과 같이 인민위원회를 구성해 민족 자치를 도모했던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유전자가 다른 인물이다. 70이란 노구에는 권력욕이 가득했고, 오직 초대 대통령이 되는 것이 그의 꿈이었으리라. 도올의 말처럼 해방이후 관공서에서 조용히 사라졌던 `좆x다'고 생각했던 친일파들에게 이승만과 미국은 구원의 장대한 서막이었을 것이다. 오직 그들이 새로운 구명줄로 삼은 것은 이 반공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 그것 하나면 족했으리라.  1948년 1년 동안 자국민 4만 5천명이 일거에 학살되는 데에는 이러한 이해관계가 놓여 있으며, 그 배후에 미국과 미군정이 든든히 자리하고 있다.


"여수 14연대의 항거는 부당한 명령에 대한 거부일 뿐이며, 사회사적,정치사적으로 보더라도, 그것은 가벼운 "소요에 지나지 않았다. 얼마든지 정상적 궤도로 컴백될 수 있고, 다스려질 수 있는 소요였다. 이것을 대규모 국민학살극으로 확대시킨 것은 오로지 국가 폭력의 업이었다. 여순민중항쟁은 14연대 사람들의 합리적 판단에 여순 지역 인민 전체가 호응한 결과의 산물일 뿐이다. 14연대 사람들은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모든 문제는 여수,순천 지역의 민중이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며 그들에게 가해지는 모든 폭력적 체제에 저항함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1만 5천명 이상의 학살로서 국가가 대응했다고 하는 것은 상식 이하의 만행이다." 303쪽, 도올 <우린 너무 몰랐다> 


이승만은 여순 진압 막바지에 담화문을 발표한다. 그 첫 문장은 "모든 지도자 이하로 남녀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로 시작된다. 한마디로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줄 남한 단독선거를 방해하는 자들은 불순세력이므로 어린아이까지 모두 학살하라는 지시였다. 이런 자가 초대 대한민국 1대 대통령이었다. 제주 도민과 여순 사람들이 남한 단독선거를 거부한 이유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매우 애국적이며 합리적인 요구였다. 그들은 `단선'이 결국 영구 분단으로 이어지고, 전쟁을 불러올 것을 우려했던 것인데 역사는 민초들의 예상이 정확히 적중했음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도올은 몇가지 신선한 역사에 대한 가정과 오류에 대한 수정을 논의의 장으로 끌고온다. 당대 미,소에 의한 신탁통치를 반대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1950년의 전쟁이나 영구분단의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러니까 당대 남한의 모든 인사들은 신탁을 거부했고 북한은 신탁을 찬성했다. 해방 후, 남북한이 오히려 찬탁으로 돌아서 미,소 공동위원회에 통치를 몇년간 맡겼다면 혼란의 수습기간이 지나고 전쟁없이 통일선거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게 도올의 가정이다.  인민위원회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일은 정당한가?  도올은 `인민'이란 단어에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에게 그 단어가 그 당시나 중국 고전속에서 매우 일상화된 용어라고 수정한다.  여운형이 해방 후 조직한 민간자치기구는 급속도로 전국에 조직을 확장시켰는데, 그 가운데 제주의 인민위원회가 가장 높은 수준과 참여를 이루어냈고 이승만과 미군정에겐 모난 돌이 됐다.


"제주 4.3 민중항쟁 지도부의 몇 사람이 남로당에 헌신하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허구적인 정체성이었고 실제 제주 민중항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제주민중항쟁은 오직 핍박 받는 제주민중이 피압박의 막다른 골목에서 분노를 표출한 사건일 뿐이다." 234쪽


도올은 무소불위의 언어로서 `꼴통들'이 난발하며 휘둘렀던 언어폭력 `빨갱이'란 말의 갑질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지금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해결사처럼 등장시킨 `빨갱이'란 단어에 내포된 고백을 이제 우린 눈치챌 수 있다.  첫째, 나는 게을러 역사에 대해 무지하다. 둘째, 나는 해방후 "좆x던 친일파 세력'의 후손이다. 셋째, 친일파로서 살아 남기 위해선 반공에 헌신해야 했다. 분명한 사실은, 오늘날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북한 체제나 공산주의를 추종할 수 없다는 점이다. 간략히 말해서 머리가 돌지 않고서는 의식주마저 해결못하는 북한을 찬양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빨갱이'니 `종북'이니 하는 단어가 반세기 이상 이 땅에서 유통되는 것에는 신묘한 비밀이 있지 않을까? 상식을 가진 모든 시민이 원하는 것은 남북한 평화요, 한민족의 무궁한 번영이다. 평화안에서만 경제도 있고 기초적 삶의 영위도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땅에는 어렵게 찾아온 남북,미북 평화의 시대에 훼방을 놓는 이들이 가득하다. 미국이 그러한 것은 이해가 된다. 그들은 언제나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무소불위의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천년을 함께 살았고 겨우 반세기 분단돼 살고 있는 우리가' 평화가 아니라 총부리를 겨누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걸 바라는 세력은 따로 있다. 최근 일본의 적대행위를 봐라!  지금 경제가 어렵다고?  사는게 힘들다고?  나는 지난 10년 이명박그네 정권아래서 아침 뉴스를 듣는게 정말 스트레스였다. 매일 미사일이 발사되고, 내일 핵전쟁이 일어날 듯 남북,북미가 서로 으르렁 거리며 전쟁 직전까지 갔던 그 시절이 악몽처럼 기억된다. `이명박그네'는 경제도 살리지 못했으면서, 남북관계까지 파탄낸 정치권력이었다. 감옥에나 갈 지도자를 누가 뽑았나?  그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위인'이 아니다. 우리의 손끝에서 탄생한 정권이었다.


역사에 대한 무지가 언제든 괴물을 소환시킬 것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존경스러운 것은 지난 10년의 악몽같은 시절에도 그가 똑같은 언설로 국민들의 무지와 정치권력의 도덕적 무능함, 남북관계의 악화를 비판하여 왔다는 점이다.  도올이 가리키는 달을 보아야 한다.  그의 거친 언사, 과감한 논리, 거침없는 주장이란 손가락을 볼 것이 아니라 무지를 질타하며 지식인으로서 책임을 다하고자하는 달을 주목해야 한다. 지식인의 시대적 소명과 양심을 지키며, 공부하는 철학자는 흔치 않다.  이 책이 담아 내고 있는 어려운 시대적 난맥과 맥락을 용맹스럽게 돌파하는 도올의 열정은 칭찬해야 마땅하다.  이 책은, 도올이 고백하듯이 역사에 대한 원통함, 저주받은 역사안 원혼들의 피눈물로 쓰여진 책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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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행 슬로보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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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묶인 하루키의 단편들은 최초의 장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 다음에 쓴 것이다. 더군다나 단편들을 한번에 몰아서 썼다. 그는 몇 군데 문예지에다 이 단편들을 연달아 발표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단편소설에 대한 실험'을 해보고 싶었단 얘기다. 작가로서 그는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고 없는지 알고 싶었고 단편소설을 과연 잘 써낼지도 궁금했다. 이 단편집에 실린 작품들은 그러니까 몹시 모험적이고 의욕적인 글쓰기의 시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루키는 이 단편들을 구상할 때, 치밀한 플롯을 노트에 적어보거나 구상해보지 않았다. 마치, 지금 내가 한 편의 서평을 쓸 때 구상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하얀 모니터에 생각나는 대로 어떤 글을 조합해 무언가를 타이핑 하듯이 말이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문장으로 풀어나가는 사이에 차츰차츰 저절로 줄거리가 펼쳐진'다고 하루키는 언급한다. 그러니까, 이 단편들을 읽다보면 머릿속이 정리가 되는게 아니라 복잡해지고 헝클어진다. 독자는 사건의 개연성을 어떻게든 찾고, 줄거리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분투한다.  만약, 그런 노력을 한다면 아마도 크게 실망할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을 처음 접한 독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 작가의 능력과 소설의 완결성을 의심할 것이다. 이건, 지금껏 배워온 소설의 작법이 아니다. 거기엔 교훈도, 단단한 플롯도, 금지옥엽같은 개연성과 인간과 세계에 대한 따뜻한 시선도 없다.  단지, 이 작품속에는 어떤 인간의 개별적 경험과 상상력의 조합만이 떠 다닌다.

그럼에도, 하루키의 단편들에는 세계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장점과 유사성이 존재한다. 인간과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설명할 수 없다는 것, 그 끝과 시작에 대해 해명할 수 없다는 것이 본질이다.   인간은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바쁘게 하루를 보내고,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며 의미있는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게 `의미 있다고 볼 만 한가?' 라는 질문앞에 서게 되는 날이 있다. 인간은 반복된 생활과 열정, 의미의 상실을 너무나 쉽게 오가갈 수 있는 존재다. 하루키가 일본인이라는 점은 이해가 간다. 일본이라는 땅 덩어리 자체가 몹시 불확실적인 장소다. 지진, 쓰나미, 태풍, 땅 자체가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건 신의 존재를 언제나 의심하게 만든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은 운명같은 죽음이다.  죽음에는 순서도, 이유도, 없다. 그 무정한 땅 덩어리 안에서는 말이다.

"누군가 형이상학적인 언덕 위에 형이상학적인 기관총을 설치해놓고 우리를 향해 형이상학적인 탄환 세례를 퍼부으려는 참인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죽음은 죽음을 뿐이다. 바꿔 말하면, 모자에서 튀어나오건 보리밭에서 튀어나오건 토끼는 토끼일 뿐이다. 달궈진 아궁이는 달궈진 아궁이일 뿐이고,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는 검은 연기일 뿐이다."  93쪽 <뉴욕 탄광의 비극>, 무라카미 하루키

죽음 뿐만이 아니다. 인간은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언제나 자신의 존재를 먼저 의심한다. 평생 내가 누구인지, 내가 존재하는지, 내가 나를 잘 알고 있는지, 스스로 묻지만 공허한 답이 내면에서 들려올 뿐이다.  불교는 수도의 목적이 `참나'를 찾는데 있다.  인간은 천사에서 악마로 한순간 변할 수 있는 롤러코스터에 앉아 있는 `불확정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라는 믿음은 그저 소망할 뿐이다. 사람은 그 어떤 존재도 될 수 있다는 것은 인류의 오랜 역사가 증명해 준다.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생명체가 누구인가?  또,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영혼을 가진 존재가 누구인가?  그 답이 하나라는 것만큼 인간에 대한 아이러니가 있을까?  

표제작 <중국행 슬로보트>는 그 넓은 인간의 스펙트럼에 대해 그럼에도 인간의 삶 안으로 다가오는 상실과 붕괴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이 살아오면서 만난 세 명의 중국인에 대한 이야기 안에 등장하는 중국인은 다음과 같다. 초등학교 시험 감독관을 했던 중국인, 고등학교 시절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며 짝사랑의 감정에 물든 중국인 여학생, 오직 중국인에게만 백과사전을 팔고 있는 외판원. 소설은 나의 눈에 비친 세명의 중국인에 대한 묘사이지만,  결국 그들과 엮인 시간속의 나를 되돌아보는 작품이다. 그 안에서 작가가 간절하게 찾고 싶은 것은 중국인이 아니라, 그들 중국인을 바라보고 겪는 나란 존재의 실체다.

"저기, 나는 나라는 인간에 대해 너에게 잘 설명할 수가 없어. 나도 때로는 나 자신을 잘 모를 때가 있거든. 내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어. 그리고 내게 어떤 힘이 있는지, 그 힘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몰라. (중략..) 마음과 다르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해. 그러니 나는 내가 훌륭한 인간이라고는 절대 말 못해."  32쪽 <중국행 슬로보트>

20대 시절, 나는 하루키를 잘 몰랐다. 그리고 하루키의 작품들에 관심갖지 않았다. 그의 <상실의 시대>는 일종의 흔한 연애소설 같았다. 짜임새 있고, 소설의 정석에 가 닿아 있는 작품들을 선호하고, 이 세계와 인간의 삶을 규정하고 반듯하게 정의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었으니까.  내게 하루키의 소설들이 잘 읽히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하루키의 소설은 무질서하다. 뜬금없다. 욕망에 솔직하다. 반논리와 반이성을 표방한다 . 따지고보면, 세계와 인간의 실상이 하루키의 소설과 닮았다.  살면 살수록 알 수 없고 무질서 한게 이 삶이 아니던가? 살면서 누군가 뜻밖 부고 소식이 들릴 때마다, 도대체 논리로서 해명되지 못할 운명과 매일 사회면 뉴스를 장식하는 터무니없는 사건속 죽음에 맞닥뜨릴때마다,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반듯하게 설계된 세계가 아닌 무질서 즉 카오스가 우주의 실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다.  "왜냐니, 나는 모른다. 어찌된 영문인지 나를 사로잡는 것은 늘 알 수 없는 것들이다." (53쪽, 가난한 아주머니 이야기)

이 카오스에 질서를 부여하는 딱 한가지 방법이 있다. 교리의 세계에 자신을 복속(服屬)시키는 것이다.  인간과 세계가 해명되고, 그 시작과 끝이 명확히 정의될 교리의 세계에서 카오스란 곧 반역이다. 그러나, 일흔이 다 된 하루키가 여전히 카오스를 인간과 세계의 실체로 정의하고, 삶과 죽음에 대해 아는게 없다고 자백했던 공자처럼 카오스를 소설속에 그려나갈 때, 나는 당혹스럽지만 반갑다.  내가 솔직히 하루키의 작품세계에 빠져드는 이유다.  그 세계에는 어줍잖은 교훈도, 사랑도, 정의로움도 찾아볼 수 없다.  한 개인의 욕망이 포효하고, 거친 운명이 사뿐히 날아들며, 기억과 상상이 조합된 신세계가 문장을 타고 넘는다.

갱도에 갖힌 탄광의 노동자들 가운데 경험많은 나이든 광부가 말한다. "다들 최대한 숨을 쉬지 마. 남은 공기가 얼마 안 돼"(뉴욕 탄광의 비극) 그들은 밖의 사람들이 자신을 포기했는지, 그들을 찾아 굴을 파고내려가는지 알 수 없다.  나이든 광부가 발설한 이 언어에는 희망이 아니라 `싸구려' 임기응변이 들어 있다. 그러나 지금 필요로 한 것은 기도가 아니라, 숨을 쉬지 않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그들이 구조되었는지, 아닌지는 나와 있지 않다.  하루키의 소설들은 희망이 아닌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세계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희망과 절망, 그 둘 가운데 무엇이 좋은가? 라고 묻지 않고,  그 둘 가운데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 하루키의 글쓰기다. 소설속에 전략이나 목표가 없는 것은 운명따위에 전략이나 목표가 필요치 않는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동시에 두 군데의 장소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게 내 유일한 희망이에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중략...) 백화점 상품관리 담당자이면서 맥도날드의 쿼터파운드 햄버거이고도 싶고요. 나는 애인과 자면서 당신과도 자고 싶습니다. 나는 개체이면서 원칙이고 싶습니다." 133쪽, <캥거루 통신>
 
하루키는 노벨문학상을 탈 수 없을 듯하다. 물론 탈지도 모른다. 하지만, 못탈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세계가 동물의 왕국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내야 노벨문학상을 탈 수 있다. 인간이 잔혹하지만 희망이 있다고, 설득해야 보수적인 평론가의 지지를 얻는다. 하지만, 내가 바라본 하루키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이 세계는 동물의 왕국이며, 그래서 그게 뭐가 나쁜데? 라는 되물음이다.  그렇게 생겨먹은 세계를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은 솔직함과 용기라고 본다.  20대의 세계관을 일흔의 나이에도 변함없이 견지하기란 힘들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회심하는 것은 정말 식상하다.  나는 하루키의 소설이 식상하지 않아서 좋다. 누가 이 세계와 당신을 해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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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451 환상문학전집 1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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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수가 아니라 방화수, 불을 지르는 것이 직업인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이 있다. <화씨 451>(황금가지,2009)이다.  미국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의 1953년작이다.  작가는 세상에 있지도 않은 이런 직업을 어떻게 상상해 냈을까?  더군다나 방화수의 목표는 오직 책을 불태우는 것에 있다. 책을 가진 사람을 마치 `마약'을 가진 사람인냥 범죄시 한다.  책을 읽거나 소유하거나, 감춰서는 안 되며 모든 시민은 어떤 책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가진 사람은 처벌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어느날 그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책을 태우고 찢고 파괴하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살았던 주인공 몬태그는 퇴근길에 한 소녀를 만난다. 외양은 자신과 같은 인간이나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을 살고 있는 소녀, 클라리세다.


그녀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을 즐기고, 모든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규율을 의심하며, 한 사회가 강요하는 집단적 규범에 의문을 표한다. 클라리세는 직업정신에 투철하고 자기의 생활을 한번도 의심해본적 없는 몬태그에게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 아저씬 행복하세요? "  각 가정마다 벽면 텔레비전이 설치돼 있고, 그곳에선 매일 즐거운 이야기와 신기한 풍경, 실시간의 뉴스가 제공된다.  사람들은 비싼 돈을 주고 집의 벽 하나씩을 텔레비전으로 바꾸는 것을 꿈꾼다.  보다 많은 정보와 즐거움, 시간을 잊게 만들고 복잡한 상상이나 고민 따윈, 해볼 시간과 이유를 갖기 못하게 만드는 텔레비전에 사람들은 푹 빠져살고 있다.  몬태그의 아내는 불면증과 약물중독에 시들어가면서도 벽면 텔레비전을 보는게 유일한 낙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집의 남은 벽을 텔레비전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한다.


클라리세가 몬태그에게 토로하는 개성없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문명에 대한 비판이다.  모든 사람들은 대화의 주제가 비슷하고, 누구도 남과 다른 이야길 화제로 꺼내놓지 않는다. 그들은 같은 드라마를 보고, 같은 음악을 들으며, 같은 오락을 즐긴다. 그저 사회성을 기른다는 핑계 아래 한 장소에 모아두고, `멋대로 정리한 교과서를 일방적으로 주입시키는 수업'을 하고, 아이들은 고분고분 침묵한 채 그 모든 교육을 받아들인다.  `감옥을 이 방 저 방으로 옮겨다니듯' 이 교실 저 교실로 돌아다니며 획일적 교육이 자행된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끊임없이 총기사고의 희생자가 되며 그 누구도 그러한 상황을 개선하고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클라리세의 입을 통해, 고발된 사회는 반세기 후,  정확히 오늘의 미국 사회와 겹친다.  1953년에 발표된 소설이 2018년의 실제 세계를 예언한다. 조지오웰이 <1984>에 그려논  `빅브라더'와 `텔레스크린'의 감시가 인간을 통제하는 극단적 전체주의 사회보다 그 순도가 약하지만,  훨씬 현실적이다.


왜 작가는 저런 모습의 미래를 소설속에 담았나?  그들을 지배하는 정부는 다른 정부를 상대로 핵전쟁을 준비하며, 벽면 텔레비전으로 전의를 다진다. 심지어는 이제 전 국민을 전쟁으로 이끌어내려 한다. 놀라운 것은, 그런 사회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10년 가까이, 방화수로서 책을 읽고, 책을 소유한 `범죄'를 처단하는 일에 몰두한 몬태그가 퇴근길 지하철역에서 우연하게 만난, 소녀의 질문 "아저씬 행복하세요?"에 비로소 자기를 돌아보는 성찰의 문에 가까이 간다.  소설은 이제부터 주인공의 `반란'을 틈타 책이 불태워지고 책읽는 사람을 증오하는 사회의 진면목을 하나씩 드러내기 시작한다. 


"꼭 어젯밤에 죽은 여자 때문만은 아니야. 간밤에 나는 지난 10년 동안 내가 불사르느라 뿌렸던 등유를 생각했어. 그리고 불태운 책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처음으로 깨달았지. 불에 타 없어진 하나하나의 책들마다 제각기 한 사람씩의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그게 누구든지 한 권의 책을 채우기 위해 그 모든 것들을 생각해 낸 거야. 책 한 쪽 한 쪽을 알맹이 있는 글로 채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았는지 알 수 없지.  전에는 결코 이런 생각을 해 보지 못했어."  89쪽, 레이 브래드버리 <화씨 451>


책에 대한 방화가 정의라고 규정되어진 세계에 대한 시스템을 의심하는 몬태그의 반대편에, 그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노력하는 `비티 서장'이 있다.  몬태그의 방화소 서장인 그는 이전 그 누구보다 책을 열심히 읽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이젠 몬태그에게 `책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책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길을 잃게 만드는 물건이라고 속삭이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유혹하는 뱀처럼 그의 언술은 유창하지만 그가 말하는 단 하나의 요점은, 책은 인간에게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비티 서장은 특유의 달변과 해박한 지식으로 몬태그를 유혹하지만, 시스템을 의심하기 시작한 몬태그의 일탈을 멈출 수는 없다. 


소설속에서 몬태그의 스승으로 나오는 파버 교수는 책을 불온시하는 시스템 안에서는 세가지가 부족하다고 역설한다.  첫째, 그것은 좋은 질이다. 질은 가치와 깨달음, 수많은 사람들의 짜임새 있는 삶이다.  둘째, 여가시간이다. 시스템 속 사람들은 충분한 여가를 누리고 있다 착각하지만 그들은 온전히 그 시간을 텔레비전에 바치고 있다.  텔레비전은 현실이다. 그것만 보는 사람은 영원히 현실안에 갖힌다.  반면, 책을 읽는 일은 상상이다.  인간은 책을 읽을 때만 현실을 벗어나 상상이란 여유를 누릴 수 있고, 그때에야 비로소 자기와 세계의 실상에 다가선다. 셋째, 질과 여가의 상호작용을 통해 얻어지는 실천이다. 그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동력이고, 보다 나은 곳에 대한 희망이다.  이것은 비단 소설속 세계만을 가정한 이야긴 아니다. 책이 극단적 해악으로 가정된 소설속 이야기와 그 사회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인생에서 책이 사라진 풍경 또한 비춰주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이야기이자 동시에 소설 밖 이야기라는 데 흥미로운 요소가 있다.  


"이제 알겠소?  왜 책들이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렸는지?  책들은 있는 그대로의 삶의 모습을, 숨구멍을 통해서 생생하게 보여지는 삶의 이야기들을 전해 준다오. 그런데 골치 아픈 걸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저 달덩이처럼 둥글고 반반하기만 한 밀랍 얼굴을 바라는 거야. 숨구멍도 없고, 잔털도 없고, 표정도 없지. 꽃들이 빗물과 토양의 자양분을 흡수해서 살지 않고 다른 꽃에 기생해서만 살려고 하는 세상, 그게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참모습이오."   137쪽


미래 예언 소설이자 문명 비판 소설인 <화씨 451>은 황폐하고 반 문명적인 미래 사회를 묘사하면서, 단 하나 `책'이라는 사물을 불온시하는 세상을 그려냈다. 책을 대체하는 것은 `벽면 텔레비전'이며, 그것이 상징하는 건 `생각하지 않는 인간', `비판능력을 상실한 인간'이다. 편리하고 신속하며 사람들의 혼을 빼놓을 정도로 흥미로운 벽면 텔레비전에 빠진 사람들은 구태여 책이란 고리타분한 물건을 찾지 않는다. 책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 가르치며, 반성하게 한다.  또, 인간, 시민, 피조물로서 자신의 위치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정부는 책을 불태우면서 이 모든 것을 막아놨다.  인간을 통제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인간이 사색하며,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임을 <화씨 451>안의 정부는 알고 있다. 그때 인간은 기계 부속품마냥, 거대권력의 지시와 통제에 순응하는 비판하지 않는 순응적 인간이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어떤가?  <화씨 451>에 등장하는 방화소나 방화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버금가는 교묘한 장치가 책을 범죄시한다.  과도한 노동시간, 빈부격차, 부족한 여가, 스마트폰, 시간때우기에나 쓸만한 영상컨텐츠의 범람, 무절제, 독서에 대한 인식 부족 등이다.  그렇게 우리는 책과 멀어지고 있다. 그 자리를 소설 속 `벽면 텔레비전'과 엇비슷한 스마트폰과 다양한 영상 기술,  컨텐츠가 사람들의 마음을 독서로부터 빼앗고 말았다. 한 편의 영상 미디어를 소비하는 것과 책을 읽어내는 과정 사이엔, 매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책읽기는 일정한 노력과 고통을 동반한다.  영상미디어의 소비는 쉽고 편안하다.  하지만, 우리가 그러한 편차 때문에 영원히 책을 잡지 않는다면 우리는 소설 속 몬태그처럼 삶을 낭비하고, 통제받는 것에 의심을 표하지 않는 사람들로 구성된,  자발적 전체주의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70여년 전, <화씨 451>를 썼다.  아마 그 시절 사람들도 책읽기에 소홀했고 당대 새롭게 보급된 영화, 티브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그 파급력이 얼마나 빠르고, 신속했던지, 작가는 그 새로운 기술에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며 책이 사라진 세계를 상상하였다.  하지만, 그 시대는 약과였을까?  오늘날엔 모든 사람들의 손에 벽면 텔레비전이 아니라, `손바닥 텔레비전'이 보급된 세상이다.  <화씨 451>의 세계에서 한층 진일보한 책과 독서 문화가 고사하기 알맞은 시대로 진입한지 오래다.   `벽면 텔레비전'의 가장 큰 해악은 사람들에게 깊이 생각하고, 느낄 시간을 주지 않는 다는 점이다.  그것은 주입받고 소비하면 끝이다.  민주주의는 지적이자 비판적 시민을 요구한다. 비판적 시민을 양성하지 못하면 민주주의가 고사한다. 소설 속 사회 분위기에서 전체주의가 감지되는 이유다. <화씨 451>은 영상시대의 가벼움과 즉흥성을 예언한 소설이자, 책읽기가 경시되는 사회의 위기를 SF 장르문학에 담아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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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기사단장 죽이기 - 전2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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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말이 돼?"라고 말하고 싶었다. 1천 페이지가 넘는 책장을 넘기고, 깊은 허무감이 엄습한 이후의 일이다. 마치, 한마리의 당나귀가 되어 눈앞의 당근을 쫓아 마지막 책장까지 당도한 기분이랄까?  조금만 더 가면, 이 기이한 이야기의 처음과 끝이 모두 분명하게 드러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끝은 생각만큼 명쾌하지 못했고 언제나 이성적인 것을 좋아하는 내게 하루키의 이야기는 무척 난감했다. 이런 성미에는 소설책 독서가 맞지 않은지도 모른다. 뭔가 좀 딱 잘라 인물과 사건이 얽힌 실타래가 풀리길 바랐다. 잘 풀리지 않고, 때론 갑갑하기조차 한 우리 삶과 다르게 소설가의 상상력 안에서는 인물들의 삶이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하루키가 소설을 풀어나가는 방식은 소설의 배경, 구성과는 다르게 몹시 현실적이다.  소설안을 종횡무진하던 비현실적인 캐릭터들은 일거에 사라져 버리고, 독자앞에 벌거숭이로 남은 캐릭터는 바로 독자를 닮은 초라한 사람의 모습이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하루키의 소설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누군가의 작품을 문장안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문장과 작법에 분명한 개성이 담겨 있다는 이야기다. 꼭 하루키만의 이야긴 아니지만, 하루키의 작품에는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그의 흔적들이 있다. 남,녀 등장인물의 거침없는 성애, 섹스의 대상은 지극히 도덕적이고 합리적이지 않다.  등장인물들의 행위는 성애 자체가 목적이다.  그들이 열렬한 섹스에 이르는 과정은 생략된다.  그들은 남과 여로서 짜릿한 성애를 즐길 뿐이다. 하지만, 그같은 행위가 전체적인 이야기의 질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어떻게보면, 그런 성적인 묘사가 필수불가결한 소설의 요소로 작동한다.  하루키의 많은 작품들이 성적인 묘사를 담아내고 있지만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는 이유다.


하루키는 이 두툼한 두 권짜리 장편소설에서 자신의 오래된 문학적인 자산을 활용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번 소설에서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와 토마스 만의 <마의 산>에서 인물과 배경을 차용한듯 하다.  주인공 나, 가 거주하는 산등성이의 화실 건너편에는 규모한 상당한 대저택이 있고 그곳에는 `멘시키'라는 인물이 산다.  그는 별다른 직업도 없으면서, 고급 외제차를 몇 대씩 굴리고, 대저택에서 혼자 살아가고 있다.  멘시키는 과거 우연하게 하룻밤을 함께 한 여인의 딸이 살고 있는 산등성이 계곡 건너편을 망원경으로 관찰한다. 그는 모든 걸 가진 듯 하지만, 그러지 못했고 자신의 딸일 수도 있는 그 아이의 일상을 관찰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돼 버렸다. 멘시키는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서 데이지를 위해 매일 밤 대저택에다 성대한 파티를 열며 모든 걸 가진 듯 하지만, 공허에 쌓여 있고 신비스런 아우라를 뽐내던 주인공 개츠비와 닮아 있다.  하루키의 소설 속에서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요양원 배경이 유명한 소설로 우리는 <상실의 시대>를 알고 있다. 그와 비슷한 요양원이 이 소설속의 배경을 이루는 것을 보면서, 나는 전대의 위대한 작품이 한 작가의 무의식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가를 확인한다.


나, 는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지만 어느날 갑자기 결혼 6년만에 아내에게 일방적으로 이혼을 통보받은 남자다. 그는 친구의 아버지가 오래도록 칩거하며 작품활동을 한, 화실에 들어앉아 미술이 밥벌이가 되느냐, 예술이 되어야 하느냐,를 깊이 고민한다.  이 작품은 한 화가의 관찰과 예지로 얻어낸 하나의 그림에는 혼이 담길 수 있고, 그것은 때로 영혼의 옷을 걸칠 수 있다는 신비주의적 상상력을 발동한다.  소설의 제목 <기사단장 죽이기>는 예술가 아마다 도모히코의 정신세계를 상징적으로 담아낸 그림이며,  기사단장은 주인공 나의 현실세계속으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비현실의 캐릭터다.  `기사단장'이라는 그림 속 등장인물을 중심에 놓고, 멘시키와 그의 딸로 추정되는 아키가와 마리에, 또 주인공 나,가 겪는 이해되지 않는 이데아 체험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독자를 되도록이면 멀리 현실과 동떨어지게 만들고, 그 이상한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장치다. . 독자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현실이라는 견고한 이성의 세계를 벗어날 흔치 않는 기회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근을 바라보고 그 먼 길을 쫓아온 독자들을 한동안 만족시킬 개연성과 상상력의 세계다.


"어쨌거나 그 풍혈 속에서 그애가 작은 목소리로, 마치 비밀을 털어놓듯이 꺼냈던 말은 진실이었다고 나는 - 이렇게 서른여섯살이 된 나는 - 지금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이 세상에는 정말로 앨리스가 존재한다. 3월 토끼도, 바다코끼리도, 체셔 고양이도 실제로 실재한다. 그리고 물론 기사단장도. "  420쪽,  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 1> 


하루키의 소설속에서 인생을 관조하는 캐릭터들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인생에 대한 관조란 지나온 삶을 반성하고 새로운 가치를 탐색하려는 의도를 담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껏 대부분의 하루키 캐릭터들은 현실을 즐기고, 느끼고, 사랑하며, 충만하게 살아가는 것에 관심을 뒀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여자없는 남자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등 최근 읽은 하루키의 작품들에선, 난 섹스와 맥주, 유부남,유부녀의 바람과 성애, 학창시절의 상처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사람의 인생을 그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젊은 시절 하루키의 감각을 그런대로 살리고 있긴 하지만, 조금 더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려는 태도가 엿보인다. 


나,는 아내에게 이유없는 이혼을 요구받았다. 소설의 전반부, 나,는 어느날 갑자기 내던진 아내의 이혼요구에 충격을 받는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몇개월, 일본의 동해안 이곳저곳을 유랑한다. 그 목적없는 여행이 의미하는 것은, 아내의 요구가 부당하고 부조리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세상일이란 모두 다 이해될 순 없다.  멘시키를 통해 하루키는 더욱 극적으로 삶이 허무로 치닫게 되는 사례를 보여준다. 멘시키는 남부러울게 없는 외모, 부를 가졌지만, 충족되지 못한 공허로 병들어 있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제법 똑똑하고 유능하고 미래에는 거의 완벽한 인간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쉰을 넘기고선 그 모든게 텅 빈 인간, 무, 빈 부분을 지푸라기로 채운 인간이 아닐까, 란 의심에 도달한다.  이것은 우울증을 앓는 인간의 전조 증상같기도 하고, 자신감과 우월감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이르게 되는 필연적 낭떠러지 일지도 모른다. 


" 숲의 정적 속에서는 시간이 지나고 인생이 흘러가는 소리마저 들려올 것 같았다. 한 사람이 가고 다른 사람이 온다. 한 생각이 가고 다른 생각이 온다. 한 형상이 가고 다른 형상이 온다. 나 자신조차 반복되는 나날 속에서 조금씩 무너졌다가 재생된다. 무엇하나 같은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은 상실된다. 시간은 내 등뒤에서 조금씩 죽은 모래가 되어 무너지고 사라진다. 나는 그 구덩이 앞에 앉아 시간이 죽어가는 소리에 마냥 귀 기울였다."  369쪽, <기사단장 죽이기 1>


멘시키와, 나,의 이러한 공허감은 어떻게 극복되는가?  아니 그것은 꼭 극복되어야만 하는 걸까?  하루키는 그렇게 묻고 있는 듯하다. 어떤 해결책도 이 결말안에는 없다. 그 주인공들은 그러한 허무감을 인생의 구성요소인냥 껴안고 살아가며,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하다. 멘시키는 자신의 삶이 고독하고 텅 비어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키가와 마리에가 자신의 딸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애써, 확인받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는 그저 그 아이를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멘시키는 자신이 일생 단 한 번 사랑했던 여인을 잃고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그가 가정생활에 적합한 인간이 아니며,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타인과 일상을 공유할 수 없다는 한계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매일 고독한 집중력을 필요로 했고, 그 집중력이 누군가의 존재로 인해 흐트러지는 것을 참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누군가와 함께 생활한다면 언젠가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될 것을 그는 걱정하는 것이다. 그게 아내이건, 아이이건 말이다. 


나,는 아내 유즈의 뱃속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그의 말을 듣고선, 유즈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상관없어, 내가 말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면 제정신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나는 당신이 낳을 아이의 잠재적인 아버지인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내 생각이 당신을 임신시켰는지도 몰라. 일종의 관념으로, 특별한 통로를 거쳐서."  584쪽, <기사단장 죽이기 2>


멘시키와 나,의 태도는 쉽게 이해될 수 없다. 그러나, 기사단장이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에게,그것은 분명 존재했고 존재할 수 있다. 누구나 비밀을 안고 살아간다. 기사단장이라는 이데아를 본 것은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그 비현실적 존재를 믿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기사단장은 존재하는 것이다.  공허를 공허로 인식하는 것은 우울증이다. 하지만, 공허를 새로운 믿음과 사랑으로 인식할 때, 공허는 믿음과 사랑으로 극복된다.  하루키가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보여주는 환상적 비현실은 오직 문학만이 구현할 수 있는 아름다운 창조의 세계이며, 상상의 세계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이상한 나라에서 엘리스가 만난' 환상적 등장인물들과 재회한다.  다 큰 어른은 더 이상 앨리스가 만난 기이한 캐릭터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기사단장 죽이기'란 그림속 인물들을 통해, 하루키는 인생이 공허한 어른들에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세계, 오래전 잃어버린 또하나의 세계와 만날 기회를 선물한다. 


멘시키와 나,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삶이 허무로 가닿는 방식을 수용하고, 극복하고 있다. 그들은 인생의 한계를 깨닫거나 현실의 부조리에 분노하는 대신, 그것을 용서하고 인정한다. 아내는 다른 남자와 바람을 펴서,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나와 헤어지려 했다. 솔직히 나,는 아내를 잃고 싶진 않다.  소설 속에서 이데아로 나타나는 비현실적인 존재는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독특한 캐릭터로, 그 존재감이 분명하다. 그는 이 소설안에서 살아 진동한다. 그러나, 오직 그 존재를 느끼고, 아는 것은 나,와 아키가와 마리에가 전부다. 왜냐하면, 기사단장은 그 두 사람에게만 `현현'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이 믿는 것만을 믿고 살아 갈 수밖에 없다. 믿는 힘,은 그래서 대단한 것이다.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는 그 누군가의 삶에 은밀히 현현하는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믿음과 공허'를 드라마틱하고, 환상적으로 구현해 낸 작품이다. "이 세계에 확실한 것은 없지만 하지만 적어도 무언가를 믿을 수는 있다"는 하루키의 전언은 언제나 그렇듯, 이 낡고 누추한 세상을 좀 더 색다르고 설레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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