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기사단장 죽이기 - 전2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게 말이 돼?"라고 말하고 싶었다. 1천 페이지가 넘는 책장을 넘기고, 깊은 허무감이 엄습한 이후의 일이다. 마치, 한마리의 당나귀가 되어 눈앞의 당근을 쫓아 마지막 책장까지 당도한 기분이랄까?  조금만 더 가면, 이 기이한 이야기의 처음과 끝이 모두 분명하게 드러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끝은 생각만큼 명쾌하지 못했고 언제나 이성적인 것을 좋아하는 내게 하루키의 이야기는 무척 난감했다. 이런 성미에는 소설책 독서가 맞지 않은지도 모른다. 뭔가 좀 딱 잘라 인물과 사건이 얽힌 실타래가 풀리길 바랐다. 잘 풀리지 않고, 때론 갑갑하기조차 한 우리 삶과 다르게 소설가의 상상력 안에서는 인물들의 삶이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하루키가 소설을 풀어나가는 방식은 소설의 배경, 구성과는 다르게 몹시 현실적이다.  소설안을 종횡무진하던 비현실적인 캐릭터들은 일거에 사라져 버리고, 독자앞에 벌거숭이로 남은 캐릭터는 바로 독자를 닮은 초라한 사람의 모습이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하루키의 소설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누군가의 작품을 문장안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문장과 작법에 분명한 개성이 담겨 있다는 이야기다. 꼭 하루키만의 이야긴 아니지만, 하루키의 작품에는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그의 흔적들이 있다. 남,녀 등장인물의 거침없는 성애, 섹스의 대상은 지극히 도덕적이고 합리적이지 않다.  등장인물들의 행위는 성애 자체가 목적이다.  그들이 열렬한 섹스에 이르는 과정은 생략된다.  그들은 남과 여로서 짜릿한 성애를 즐길 뿐이다. 하지만, 그같은 행위가 전체적인 이야기의 질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어떻게보면, 그런 성적인 묘사가 필수불가결한 소설의 요소로 작동한다.  하루키의 많은 작품들이 성적인 묘사를 담아내고 있지만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는 이유다.


하루키는 이 두툼한 두 권짜리 장편소설에서 자신의 오래된 문학적인 자산을 활용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번 소설에서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와 토마스 만의 <마의 산>에서 인물과 배경을 차용한듯 하다.  주인공 나, 가 거주하는 산등성이의 화실 건너편에는 규모한 상당한 대저택이 있고 그곳에는 `멘시키'라는 인물이 산다.  그는 별다른 직업도 없으면서, 고급 외제차를 몇 대씩 굴리고, 대저택에서 혼자 살아가고 있다.  멘시키는 과거 우연하게 하룻밤을 함께 한 여인의 딸이 살고 있는 산등성이 계곡 건너편을 망원경으로 관찰한다. 그는 모든 걸 가진 듯 하지만, 그러지 못했고 자신의 딸일 수도 있는 그 아이의 일상을 관찰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돼 버렸다. 멘시키는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서 데이지를 위해 매일 밤 대저택에다 성대한 파티를 열며 모든 걸 가진 듯 하지만, 공허에 쌓여 있고 신비스런 아우라를 뽐내던 주인공 개츠비와 닮아 있다.  하루키의 소설 속에서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요양원 배경이 유명한 소설로 우리는 <상실의 시대>를 알고 있다. 그와 비슷한 요양원이 이 소설속의 배경을 이루는 것을 보면서, 나는 전대의 위대한 작품이 한 작가의 무의식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가를 확인한다.


나, 는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지만 어느날 갑자기 결혼 6년만에 아내에게 일방적으로 이혼을 통보받은 남자다. 그는 친구의 아버지가 오래도록 칩거하며 작품활동을 한, 화실에 들어앉아 미술이 밥벌이가 되느냐, 예술이 되어야 하느냐,를 깊이 고민한다.  이 작품은 한 화가의 관찰과 예지로 얻어낸 하나의 그림에는 혼이 담길 수 있고, 그것은 때로 영혼의 옷을 걸칠 수 있다는 신비주의적 상상력을 발동한다.  소설의 제목 <기사단장 죽이기>는 예술가 아마다 도모히코의 정신세계를 상징적으로 담아낸 그림이며,  기사단장은 주인공 나의 현실세계속으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비현실의 캐릭터다.  `기사단장'이라는 그림 속 등장인물을 중심에 놓고, 멘시키와 그의 딸로 추정되는 아키가와 마리에, 또 주인공 나,가 겪는 이해되지 않는 이데아 체험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독자를 되도록이면 멀리 현실과 동떨어지게 만들고, 그 이상한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장치다. . 독자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현실이라는 견고한 이성의 세계를 벗어날 흔치 않는 기회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근을 바라보고 그 먼 길을 쫓아온 독자들을 한동안 만족시킬 개연성과 상상력의 세계다.


"어쨌거나 그 풍혈 속에서 그애가 작은 목소리로, 마치 비밀을 털어놓듯이 꺼냈던 말은 진실이었다고 나는 - 이렇게 서른여섯살이 된 나는 - 지금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이 세상에는 정말로 앨리스가 존재한다. 3월 토끼도, 바다코끼리도, 체셔 고양이도 실제로 실재한다. 그리고 물론 기사단장도. "  420쪽,  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 1> 


하루키의 소설속에서 인생을 관조하는 캐릭터들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인생에 대한 관조란 지나온 삶을 반성하고 새로운 가치를 탐색하려는 의도를 담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껏 대부분의 하루키 캐릭터들은 현실을 즐기고, 느끼고, 사랑하며, 충만하게 살아가는 것에 관심을 뒀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여자없는 남자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등 최근 읽은 하루키의 작품들에선, 난 섹스와 맥주, 유부남,유부녀의 바람과 성애, 학창시절의 상처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사람의 인생을 그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젊은 시절 하루키의 감각을 그런대로 살리고 있긴 하지만, 조금 더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려는 태도가 엿보인다. 


나,는 아내에게 이유없는 이혼을 요구받았다. 소설의 전반부, 나,는 어느날 갑자기 내던진 아내의 이혼요구에 충격을 받는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몇개월, 일본의 동해안 이곳저곳을 유랑한다. 그 목적없는 여행이 의미하는 것은, 아내의 요구가 부당하고 부조리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세상일이란 모두 다 이해될 순 없다.  멘시키를 통해 하루키는 더욱 극적으로 삶이 허무로 치닫게 되는 사례를 보여준다. 멘시키는 남부러울게 없는 외모, 부를 가졌지만, 충족되지 못한 공허로 병들어 있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제법 똑똑하고 유능하고 미래에는 거의 완벽한 인간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쉰을 넘기고선 그 모든게 텅 빈 인간, 무, 빈 부분을 지푸라기로 채운 인간이 아닐까, 란 의심에 도달한다.  이것은 우울증을 앓는 인간의 전조 증상같기도 하고, 자신감과 우월감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이르게 되는 필연적 낭떠러지 일지도 모른다. 


" 숲의 정적 속에서는 시간이 지나고 인생이 흘러가는 소리마저 들려올 것 같았다. 한 사람이 가고 다른 사람이 온다. 한 생각이 가고 다른 생각이 온다. 한 형상이 가고 다른 형상이 온다. 나 자신조차 반복되는 나날 속에서 조금씩 무너졌다가 재생된다. 무엇하나 같은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은 상실된다. 시간은 내 등뒤에서 조금씩 죽은 모래가 되어 무너지고 사라진다. 나는 그 구덩이 앞에 앉아 시간이 죽어가는 소리에 마냥 귀 기울였다."  369쪽, <기사단장 죽이기 1>


멘시키와, 나,의 이러한 공허감은 어떻게 극복되는가?  아니 그것은 꼭 극복되어야만 하는 걸까?  하루키는 그렇게 묻고 있는 듯하다. 어떤 해결책도 이 결말안에는 없다. 그 주인공들은 그러한 허무감을 인생의 구성요소인냥 껴안고 살아가며,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하다. 멘시키는 자신의 삶이 고독하고 텅 비어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키가와 마리에가 자신의 딸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애써, 확인받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는 그저 그 아이를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멘시키는 자신이 일생 단 한 번 사랑했던 여인을 잃고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그가 가정생활에 적합한 인간이 아니며,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타인과 일상을 공유할 수 없다는 한계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매일 고독한 집중력을 필요로 했고, 그 집중력이 누군가의 존재로 인해 흐트러지는 것을 참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누군가와 함께 생활한다면 언젠가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될 것을 그는 걱정하는 것이다. 그게 아내이건, 아이이건 말이다. 


나,는 아내 유즈의 뱃속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그의 말을 듣고선, 유즈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상관없어, 내가 말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면 제정신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나는 당신이 낳을 아이의 잠재적인 아버지인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내 생각이 당신을 임신시켰는지도 몰라. 일종의 관념으로, 특별한 통로를 거쳐서."  584쪽, <기사단장 죽이기 2>


멘시키와 나,의 태도는 쉽게 이해될 수 없다. 그러나, 기사단장이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에게,그것은 분명 존재했고 존재할 수 있다. 누구나 비밀을 안고 살아간다. 기사단장이라는 이데아를 본 것은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그 비현실적 존재를 믿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기사단장은 존재하는 것이다.  공허를 공허로 인식하는 것은 우울증이다. 하지만, 공허를 새로운 믿음과 사랑으로 인식할 때, 공허는 믿음과 사랑으로 극복된다.  하루키가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보여주는 환상적 비현실은 오직 문학만이 구현할 수 있는 아름다운 창조의 세계이며, 상상의 세계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이상한 나라에서 엘리스가 만난' 환상적 등장인물들과 재회한다.  다 큰 어른은 더 이상 앨리스가 만난 기이한 캐릭터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기사단장 죽이기'란 그림속 인물들을 통해, 하루키는 인생이 공허한 어른들에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세계, 오래전 잃어버린 또하나의 세계와 만날 기회를 선물한다. 


멘시키와 나,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삶이 허무로 가닿는 방식을 수용하고, 극복하고 있다. 그들은 인생의 한계를 깨닫거나 현실의 부조리에 분노하는 대신, 그것을 용서하고 인정한다. 아내는 다른 남자와 바람을 펴서,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나와 헤어지려 했다. 솔직히 나,는 아내를 잃고 싶진 않다.  소설 속에서 이데아로 나타나는 비현실적인 존재는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독특한 캐릭터로, 그 존재감이 분명하다. 그는 이 소설안에서 살아 진동한다. 그러나, 오직 그 존재를 느끼고, 아는 것은 나,와 아키가와 마리에가 전부다. 왜냐하면, 기사단장은 그 두 사람에게만 `현현'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이 믿는 것만을 믿고 살아 갈 수밖에 없다. 믿는 힘,은 그래서 대단한 것이다.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는 그 누군가의 삶에 은밀히 현현하는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믿음과 공허'를 드라마틱하고, 환상적으로 구현해 낸 작품이다. "이 세계에 확실한 것은 없지만 하지만 적어도 무언가를 믿을 수는 있다"는 하루키의 전언은 언제나 그렇듯, 이 낡고 누추한 세상을 좀 더 색다르고 설레이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