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서재 (3) 수태고지와 방사능의 공통점은? 

다니엘 아라스의 “서양미술사의 재발견”


 원근법을 뜻하던 ‘코멘수라티오’(commensuratio)라는 말은 ‘측정할 수 있는’, ‘같은 단위로 잴 수 있는’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회화에서 원근법이란 거리감을 바탕으로 대상을 조화로운 비례에 따라 표현하는 기법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런 기법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던 15세기에 왜 ‘코멘수라티오’라는 말이 원근법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는지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니까 원근법은 인간이 세계를 측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등장했다. 15세기, 유럽인들은 더 이상 세계를 측정불가능할 정도로 큰 무한한 것으로 바라보지 않고 ‘측정가능한 것’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도제작을 하면서 공간을 재고, 시계를 가지고 시간을 측정했다. 피렌체 대성당의 돔 설계자이자 원근법 발명자인 브루넬레스키가 뛰어난 시계공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브루넬레스키는 원근법과 시계로 공간과 시간을 측정하고자 한 것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다니엘 아라스의 <서양미술사의 재발견>이라는 책은 서양미술사를 다룬 여러 책 중에서 내가 특히나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이 책은 천재 미술사학자였던 다니엘 아라스가 프랑스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했던 강의를 녹취한 내용인데, 그림을 단 한 장도 직접 보여줄 수 없는 라디오 방송에서 이렇게 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강연을 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더 놀라운 일도 있다. 그림 한 점 보여주지 못하는 라디오 미술 방송이 프랑스에서는 큰 인기까지 얻은 것이다.




이 책은 서양미술사에서 중요한 전환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두 시점을 중점적으로 논의하는데 그 중 하나가 18세기 인상주의의 등장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원근법의 등장이다.  다니엘 아라스는 우리가 원근법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15세기에 수태고지를 주제로 그려진 작품들을 살펴봐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 원근법을 사용했던 초기 작품들은 거의 다 수태고지, 즉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를 잉태할 것을 알려주는 성서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두스가 말한 것처럼 수태고지는“신이 인간으로, 무한이 유한으로, 비척도가 척도로 나타나는 순간”이다. 남자를 알지 전혀 알지 못하는 동정녀가 신의 아들을 잉태하는 신비를 표현하는데는 원근법이 적합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근법은 세계를 ‘측정할 수 있는 유한한 것’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여러 점의 수태고지에서도 원근법이 사용되고 있다. 코르토나에 있는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는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1433년 경에 그려진 이 그림을 자세히 살펴 보면, 천사 뒷 편으로 보이는 방의 커튼과 침대가 지나치게 가깝게 그려져 잘못 그려진 것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1450년 경에 그려진 산마르코 수도원에 있는 수태고지의 경우에도 뭔가 모르게 어색하다. 천사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마리아가 아주 크게 그려져 있는데다 마리아 뒷 편으로 보이는 방으로 들어가는 문은 아주 작게 그려져 있어, 마리아가 이 문을 통과해 방으로 들어갈 수는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프라 안젤리코는 원근법을 사용하는데 기술적으로 미숙했던 것일까? 다니엘 아라스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원근법은 세계를 측정하는 것인데 동정녀의 몸의 신비는 이 모든 측정을 초월하는 것이기에 프라 안젤라코가 ‘의도적으로’ 원근법의 규칙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성육신의 신비는 원근법으로도, 시계로도 측정되지 않는다! 이것이 프라 안젤리코가 수태고지에서 원근법의 규칙을 따르는 동시에, 원근법의 규칙을 위반한 이유였다.


원근법에 대해 다니엘 아라스가 이 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흡사 셜록 홈즈가 현장의 몇 가지 단서를 바탕으로 범죄 상황을 재구성하는 것이 연상된다. 프라 안젤리코는 다니엘 아라스의 추리대로 수태고지를 표현하는데 원근법이 적합하다고 생각했을까? 그리고 그는 정말 의도적으로 원근법을 위반했던 것일까? 알고 지내는 한 저명한 미술사학자에게 견해를 물어보니 그는 프라 안젤리코가 단지 원근법을 표현하는데 미숙했던 것으로 보는 편이 낫다고 했다. 어느 쪽 의견이 맞는지 천국에 가서 프라 안젤리코에게 물어보기 전까지는 단언하기 어렵겠지만 내 생각에는 다니엘 아라스의 접근 방식이 작품의 의미를 훨씬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책에서 다니엘 아라스가 보여주는 집요할 정도의 추리 과정을 힘겹게 쫓아가면서 나는 내 나름대로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법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일단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나면 작품의 구석 구석을 살펴보며 표현방식을 살펴본다. 그리고 제목이나 작품 옆의 간략한 설명을 참조하여 작품의 주제와 내용을 확인하고, 내용과 표현 방식이 어떤 논리로 결합되어 있는지를 따져보기 시작한다. 언제나 좋은 작품은 작품의 주제를 표현 방식이 가두지 않는다. 오히려 표현 방식이 작품의 주제가 지니는 의미를 훨씬 더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반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는 그의 표현 방식 때문에 단지 해바라기를 그린 것이 아니라 태양과 같은 강렬한 열정까지 그린 것으로 평가 받게 된 것이다.





 얼마 전 사진작가 정주하와 여럿이 함께 쓴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을 읽었다. 정주하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원자력 발전으로 폐허가 된 후쿠시마를 찾아 사진으로 기록하고 후쿠시마를 포함한 일본 전역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그의 사진에 재현된 후쿠시마는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장소처럼 평온한 모습이다. 들도, 산도, 강과 바다도 제목을 보지 않고 사진만 봐서는 방사능에 오염되었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다. 이 책에 실린 정주하의 사진을 보면서 다니엘 아라스의 이 책이 떠올랐다. 





 이제 원근법으로 측정불가능하고 표현불가능한 것은 ‘수태고지’의 신비만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신비 대신 또 다른 측정불가능한 것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인간의 삶이 80년 정도 지속된다 할 때,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한 방사능 피해는 측정가능한 것일까? 방사능으로 인한 피해는 수백년, 수만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의 척도를 완전히 넘어서 있다. 방사능의 영향은 후쿠시마라는 지역적 범위를 완전히 초과해 어디까지 피해를 주고 있는지 파악이 되지 않는다. 측정불가능하고 설명불가능한 것을 ‘신비’라고 한다면 우리는 ‘수태고지의 신비’를 ‘방사능의 신비’로 대체한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번에도 역시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정주하는 보이지 않는, 인간의 척도를 완전히 넘어서는 방사능의 파괴력을 보여주고자 방사능으로 인한 피해 장면을 찍는 대신 방사능 유출 이후에도 달라진 것이 없는 후쿠시마의 모습만 찾아서 촬영했던 것은 아닐까?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 예술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것은 예술이 아니거나 구태의연한 예술이다. 프라 안젤리코가 거장인 까닭은 그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의 신비를 보이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척도 자체가 없는 방사능의 신비를 보이게 만든 정주하의 작품도 분명 예술이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와 같은 신비가 도처에 있다는 것이 우리의 비극이 아닐까? 미세먼지가 불러오는 피해는 측정 가능한 것일까? 미세먼지가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보도가 매일 같이 나와도 학교에서는 체육대회를 열고, 아이들은 미세먼지를 힘껏 들이마시며 축구를 하고, 공사장 인부는 마스크도 없이 계단을 오르내린다. 미세먼지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까지 영향을 주는 것일까? 그 피해는 언제 나타나게 될까? 월성과 고리 원전이 가까운 경주에 지진이 일어 났다고 하는데 방사능의 신비가 우리와 상관 없는 이웃 나라의 이야기이기만 한 것일까? 수태고지도, 방사능도, 미세먼지도 원근법적 질서만으로는 표현되지 않는다. 


 원근법적 규칙을 따르는 것으로 표현불가능한 것은 이제 “구원의 신비”가 아니라 “파멸의 신비”다. 영혼의 구원 대신 안락만을 구원으로 믿었던 우리에게 방사능은 생명 대신 죽음을 고지하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을 수태할 것이라는 천사의 말에 마리아는 “당신의 말씀대로 제게 이뤄어지도록 하소서”라고 답했다. 방사능이 우리에게 ‘죽음’을 잉태할 것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원근법을 넘어서는 신비’, 즉 모든 척도를 넘어서는 위험 앞에서 이제 답해야 하는 질문이다.


*해기사 협회 잡지, 해바라기 10월호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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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살이의 지루함 (2016.10.21 한국일보에 쓴 글)

아이 엄마의 출산 휴가가 끝이 났다. 이제 낮 동안 아이를 돌보는 일은 내 몫이 되었다. 아이가 깨어 있는 동안은 책을 읽어 주거나, 잠시 산책을 하고, 목욕을 시킨다. 아이가 자는 동안은 젖병을 씻어 소독하고, 설거지하고, 빨래를 널기 전 널었던 빨래를 가져와 개고,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담고, 쌓여 있는 쓰레기를 정리하고 밥을 짓고 요리를 한다.

<출처 한국일보>

글로 쓰면 이렇게 매끄러운 일이지만 실제로는 조금도 매끄럽지 않다. 설거지하고 뒤돌아서면 조금 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머그컵이 집안 곳곳에 있다. 다시 설거지한다. 뒤늦게 아이 유치원 가방에서 간식통을 발견하면 다시 설거지한다.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해야 겨우 설거지가 끝난다. 세탁실도 하루 평균 10번은 넘게 드나들어야 한다. 큰 아이가 유치원 다녀온 후 벗어둔 옷을 세탁실에 가져다 둔다. 욕실 수건에 냄새가 나서 세탁실로 다시 갔다. 백일이 지난 아이가 입은 옷은 따로 세탁하기 위해 세탁실로 다시 간다.

살림살이가 이토록 지루한 반복이었을까. 나는 살림을 시작하고 나서야 아이 엄마가 내 방에 들어와 “컵 없어?” “빨아야 할 것 없어?”라고 물었던 것의 의미를 깨달았다. 아이 엄마처럼 설거지하기 전에 먼저 각 방과 거실을 살피고 빈 그릇과 컵을 먼저 설거지통에 가져다 놓는다면 이렇게 몇 차례나 설거지를 반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빨랫감도 미리 챙겨 둔다면 몇 번만 세탁실에 들어가도 충분할 것이다. 말하자면 내게 그런 요령이 없었던 것인데, 요령이 없기 전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더 솔직한 말일 것이다. 나는 내가 쓴 컵을 설거지통에 가져다 두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그 정도만으로도 칭찬을 들었기 때문에 방마다 들어가 빈 컵을 챙겨올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최소한 집안 살림에 대해서만큼은 나는 나 자신만 생각할 뿐 전체를 보는 시야가 부족했던 것이다. 살림하기 전에는 살림은 그냥 되는대로 하면 되는 것이지 이렇게나 많은 디테일이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처럼 여러 번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일의 순서를 지켜야 한다.

얼마 전에는 아이 엄마와 크게 다퉜다. 내가 외출한 사이 집에 들어온 엄마가 내게 전화를 해 대뜸 화부터 냈다. 내가 가스 밸브를 잠그지 않은 채 나갔고, 끓여둔 국을 냉장고에 넣지 않아 모두 상해버렸다는 것이다. 내가 고의로 한 일이 아닌데도 이렇게까지 혼이 나야 하는 일인지 납득이 되지 않아 같이 성을 냈다. ‘신경 좀 써 달라’는 아이 엄마의 말에 화를 내다 얼마 전에 한 잡지와 했던 인터뷰가 떠올랐다. 기자는 육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서 내게 “그러면 집안 살림에는 얼마나 동참하고 계시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육아에 동참하는 것으로 살림에 동참하고 있고, 설거지나 청소에는 별로 재능이 없는 것 같다고 답했다. 집안 살림은 엄마의 몫이고, 아빠는 돈을 벌어다 주고 아이와 놀아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살림은 노동인 반면에 살림을 빼고 아이와 놀기만 하는 일은 내게는 하나의 취미 생활에 불과하다는 것은 최근에나 와서야 깨달은 것이다.

조지 소로우는 ‘월든’에서 ‘살림을 잘하는 사람’은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 잘하는 살림만이 아니라 죽은 것을 되살아나게 하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기르고 만들고 나누면서 스스로 몸과 마음과 영혼을 지켜내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돈을 벌어주는 것으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왔던 것은 아닐까. 죽은 것을 되살리는 것은 오직 지루한 살림살이뿐이라는 것은 그동안 알지 못했다. 오늘은 설거지하기 전에 집안부터 둘러봐야지. 내 빨래를 넣기 전에 아이 빨랫감은 없는지도 봐야겠다. 시장에 가기 전에 이번에는 내가 아이 엄마에게 물어봐야지. “마트 갈 건데 필요한 것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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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모삼


아이가 신발을 벗자 집에는 발냄새가 진동한다.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입고 있던 옷이 땀에 절었고 머리카락까지도 뻑뻑하다. 불결한 냄새를 풍기는 아이는 이번에도 “목욕하기 싫어”라며 억지를 부린다. “그러면 우리 목욕하지 말고 세차하자.” “아빠, 내가 차도 아닌데 어떻게 세차를 해?”라며 투덜대지만 아이의 눈이 세차라는 말에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첫 공정은 충분히 물을 뿌린 후 광택기를 이용해 자동차의 때를 제거해 주는 것이다. 아이의 광택기는 아빠의 손에 끼워진 노란색 이태리 타월이다. 이때 효과적인 광택이 되려면 자동차의 컴파운드라 할 수 있는 비누를 조금 바르는 게 좋다. ‘위이잉~’ 하는 광택기 소음은 사실 아빠의 입에서 나는 소리다. 아이는 아빠의 눈과 코를 스위치 삼아 광택기의 세기를 조절한다. 배터리가 방전되었다고 하면 충전 입력 단자인 아빠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고 충전을 시작한다. 세차를 하다 보면 하기 전엔 몰랐던 내 차의 흠집도 알게 되기 마련이다. “아빠, 광택기 돌리고 나면 흰색 차가 될 수 있을까?” 수영하러 갔다 친구들이 아이의 피부가 검다고 조금 놀렸던 모양이다. 세차를 하고 광택을 낸다 해서 검은 차가 흰 차가 될 리 없는 법, 아이에게 평소 지론대로 ‘자동차는 검은색이 멋있어’라고 해 놓고선 광택기를 보다 힘껏 돌린다. 광택 작업의 마지막 공정은 왁스칠이다. 보디로션을 왁스 삼아 아이 몸에 펴 바르자 검은 피부가 반짝반짝 윤이 난다. 식탁은 아이의 주유소다. 엔진에 있는 때를 벗겨 내야 더 빨리 달릴 수 있다며 아이가 평소 잘 먹지 않던 배추쌈도 건네 보았다. 아이는 말이 많아도 자동차는 말이 없다. 주는 대로 잘도 받아먹는다.


하긴 늘 그랬다. 잠은 자지 않겠다는 아이가 ‘충전’은 하겠다고 했다. 피아노 연습은 싫다면서 피아노 특공대 훈련은 좋단다. 이런 아이를 보며 아이 엄마는 ‘조삼모사’라며 바보 같다고 놀리지만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는 것은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는 것과 확실히 다르다. 수량은 같지만 의미가 다르고,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대상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샛별’과 ‘개밥바라기’는 모두 금성을 부르는 이름들이지만 금성과 샛별은 다르고, 샛별과 개밥바라기도 다르다. 새벽 동쪽 하늘의 저 별과 저녁 서쪽 하늘의 저 별이 어찌 금성과 같단 말인가. 그래서 조삼모사도 ‘조사모삼’과 다르고, 목욕도 ‘세차’와 다르며 잠과 ‘충전’도 다르다. 인간이 말 한마디에 달라질 만큼 소심한 까닭은 우리 모두 조금씩은 시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밤 충전을 마치면 세차를 하러 다녀와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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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서재 (2) 정보를 버리기,  책을 읽어버리기

-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한 주에 한 번 지역 라디오 방송에 나가 책을 소개하고 있다. 책 한 권을 정해 진행자와 15분 정도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다. 아마도 이 방송의 주청취자는 운전 중인 이들일텐데, 이들이 복잡한 교통상황을 읽어가며 도로를 누비면서 동시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책 소개에도 집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나가는 프로그램의 작가는 항상 내게 ‘좀 더 쉬운 책’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한다. 책 소개도 쉬워야 하고, 소개하는 책도 쉬워야 한다. 물론 나 역시 쉽게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처음 방송에 나가 소개했던 책은 서경식 선생의 <내 서재 속 고전>이라는 책이었다. 작가와 PD는 책이 어려운 편이기는 했지만 소개는 쉽게 해서 다행이라고 피드백을 해줬지만, 다음 방송부터 소개해 줬으면 하고 예로 든 책은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 고가 후미타케의 <미움 받을 용기>와 같은 책이었다. 청취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베스트셀러나 상대적으로 가벼운 에세이를 소개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라디오의 청취자들이 쉬운 책에 더 관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누군가 소개까지 하며 알려주지 않더라도 이미 다 아는 유명한 책이나 예비적인 준비가 없어도 읽을 수 있는 쉬운 책들은 아무리 좋은 책이라고 해도 방송에서 소개하고 싶지 않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청취자들이 항상 쉬운 것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믿는 쪽이다. 조심성이 없는 비교일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기 있는 최신가요보다 바흐의 음악을 어렵게 느낀다. 하지만 바흐의 음악을 듣는 것은 최신가요를 듣는 것과는 다른 ‘특별한 경험’으로 여기지 않는가. 쉬운 책도 당연히 좋은 책일 수 있지만, 쉬운 만큼 사실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신문에 쓰는 글도 마찬가지다. 내가 쓴 칼럼이 신문에 실리고 나면 '지나치게 철학적이다'라는 평을 한번은 듣게 된다. 여기서 ‘철학적’이라는 것은 칭찬이 아니다. 담당 기자가 ‘어렵다’는 말을 돌려 말한 것일 뿐이다. 얼마 전, 한 신문사에 원고를 보내자 이번에도 기자는 '너무 철학적'이라고 했다. 사실 내가 보낸 원고의 글감이었던 황현산 선생의 <우물에서 하늘보기>는 내가 쓴 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책이다. 이 책에 실린, 결코 쉽게 읽히지만은 않는 시화(詩話)들은 일간지에 선생이 4000자 분량으로 두 주에 한 번씩 1년여간 연재했던 글이다. 



그러니까 소위 ‘쉽지 않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떤 ‘자격’이 필요하다. 이미 탄탄한 독자층이 확보되어 있는 논객이나 작가, 직업적으로 어려운 말을 해도 좋다고 암묵적인 허락을 받은 경우라 할 수 있는 교수나 변호사, 평론가들이라면 굳이 글을 쉽게 쓰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이 쓰는 글에 앞서 있는 그들 존재가 이미 독자들을 설득하는 힘이 있다. 내가 글을 쉽게 써야 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말해, 나는 그런 자격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일부러 어렵게, 현학적으로 쓰지 않는다. 단지 30대 남성, 지방 거주자이자, 독립연구자라는 내 위치에서 보이는 세계를 드러내고, 이 세계에서 살아가며 겪게 되는 어려움을 글로 드러내기 위해 노력해 왔을 뿐이다. 나는 가능한 한 쉽게 쓰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런 노력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문장을 쉽게 풀어내는 재주의 부족 탓이 크겠지만, 어렵다는 반응을 만날 때마다 나는 내 글의 주제가 독자들에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 변명해왔다. 왜냐하면 읽는 사람이 가진 생각이나 관점과 일치하는 글이라면 복잡하고 어려운 문장으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쉽게 읽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김훈처럼 쉬운 표현으로 빼어난 문장을 직조해 사람들의 통념을 깨트리는 글쓰기는 나 같은 범부가 닿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내가 독백의 방에 갇힌 이유는 어려운 글을 쓸 ‘자격’도 없는 주제에 어려운 글을 썼기 때문이겠지만, 다른 한편 길고 어려운 글을 마음과 시간을 내어 읽으려는 독자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 소개하려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쓴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사람들은 책을 읽는 것을 단지 정보를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정보를 얻기 어려운 글은 금방 손에서 놓아 버리고 만다. 그러나 사사키에 따르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정보를 얻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래서 사사키 아타루는 책을 읽기 위해서 온갖 ‘정보’를 주는 것을 버리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저는 다양한 것들을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미술관에 다니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영화보는 것도 그만두었습니다. 듣는 것을 그만두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만, 음악활동도 그만두었습니다. 텔레비전 보는 것을 그만 두었습니다. 잡지 보는 것도 그만두었습니다. 스포츠 관람도 그만두었습니다. 어쩐 일인지 담배도 끊었습니다. ... 그리고 다양한 정보를 차단하기로 했습니다. 친구가 하는 말밖에 듣지 않고, 친구가 권하는 것밖에 보지 않습니다. 그것도 이따금 있는 일입니다. ...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정보는 우리에게 명령한다. 사람들이 악착같이 정보를 모으는 이유는 정보를 따라 살기 위해서다. 어느 사이트에 가면 최신 스마트폰을 좀 더 싸게 살 수 있다, 어느 지역에 부동산 투자를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다, 어느 회사의 주식을 사면 재미를 볼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정보를 알게 되면 우리는 정보의 명령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하게 된다. 결혼을 위해 중요한 것은 어느 새 사랑이 아니라 결혼정보가 되었고, 교육에서도 중요한 것은 배움이 아니라 입시정보가 되었다. 정보가 더 많은 사람들이 정보의 명령을 따르도록 만들려면, 어떤 정보도 어려워서는 안되고, 어떤 명령도 복잡해서는 안된다. 정보로 쓰여진 글은 어렵지 않다. 어려운 광고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책 읽기란 정보를 끌어모으는 것을 그만두고, ‘책을 읽어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냥 책을 읽었다가 아니라, “오, 맙소사, 책을 읽어버리고 말았다”와 같은 느낌으로 읽는 것이야말로 책 읽기라는 것이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불러온 혁명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루터가 철저히 성서를 읽었기 때문이다. 마호메트가 이슬람 세계의 문을 연 것도 책 읽기와 무관하지 않다. 마호메트가 천사로부터 받은 첫 계시는 바로 “읽어라”였다. 문맹이었던 마호메트에게 책은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을까! 그럼에도 책을 읽어버리면 자신이 미치던지, 세상이 미치던지 둘 중 하나가 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철저히 책을 읽고 또 읽어서 책이 그려 보이는 세계상이 세계에 대한 ‘잣대’로 서면 그때 바로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인간의 삶도 단순하지 않고, 폭력적인 단순화를 하지 않는 한 진실한 책이 쉬운 글로 쓰이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글이 어렵고 복잡하게 된 것은 글재주의 부족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깊이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세계는 단언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글쓰기의 윤리는 쉬운 주제를 쉬운 글로 쓰는 것에 있지 않다. 어렵고 복잡한 글을 견뎌줄 수 있는 독자의 존재가 글쓰기를 윤리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어려운 책이라 포기하지 말고, 책을 읽어버리자. 반복해서, 읽고 또 읽자. 루터는 성서를 읽었고, 번역했고, 많은 책을 썼고, 수없이 반복했다. 결국 혁명은 책을 읽어버리면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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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김덕희의 '낫이 짖을 때'를 읽었다. 
김덕희 작가는 이 소설로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근래 읽은 작품 장 가장 좋았다.
고백하자면, 이 작품을 손에 집어들었을 때 작품 제목을 '낫이 짖을 때'가 아니라 '낮이 짖을 때'로 잘못 읽고서, 대낮의 대지의 부르짖음을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최근에 친구의 소개로 Julien Mauve (http://www.julienmauve.com)라는 작가의 밤과 빛에 대한 사진을 보고 난 직후였던 탓인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은 '낮'이 아니라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고 할 때의 그 낫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작품의 문제 의식은 다양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내게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에 대한 것이었다. 기역자를 낫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처지에 대한, 그래서 글을 읽는 것과 글쓰기에 대한, 글자를 의미로부터 끝없이 분리시키는 것에 대한, 무엇보다 오독에 대한 이야기. 마치 낫을 낮으로 읽는 것처럼 말이다.


1. 소설에서 수복의 주인은 자신의 노비인 수복의 이름을 물은 후 한자로 명이 길다는 뜻으로 한번, 명이 짧다는 뜻으로 또 한번, 두번을 써서 의미를 두 개로 갈라 놓는다. 이건 데리다가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를 분석할 때 ‘he war’가 지닌 의미론적 풍요로움을 언급하는 대목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war'는 영어에서는 전쟁을 뜻하지만 독일어에서는 존재했다는 의미로 데리다는 의미의 복수성에 대한 예로 가져온다. 이 작품에서 ‘수복’이라는 '말'은 그저 노비인 수복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주인은 그것을 바닥에 씀으로 목숨이 짧다는 것으로도, 정반대로 목숨이 길다는 뜻으로 만든다. 수복이라고 부르는 말은 이런 의미상의 차이를 소거시키는데, 음성중심주의는 차이를 소거시킨다는 데리다의 견해, 요컨대 파롤은 발화주체의 동일성을 유지하지만 에크리튀르는 그것을 바로 찢어서 이중화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모든 기호는 원리적으로 항상 동시에 복수의 언어, 복수의 컨텍스트, 복수의 독해레벨에 속한다. 실제로도 수복의 목숨은 주인의 손에 달려 있다. 주인이 원한다면 목숨을 짧게도, 길게도 만들 수 있는 '노비'의 상태에 있다. 그런 점에서 주인은 수복의 이름을 잘못 쓴 것이 이렇게 한번, 저렇게 한번 정말 정확히 쓴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2. 이 작품에서 수복의 직업은 책을 베껴 쓰는 일, 즉 '필경사'다. 바틀비처럼 ‘I would prefer not to’를 밤낮없이 하다간 수복은 목숨이 붙어 있을 수 없을 것이기에, 수복은 바틀비와는 반대로 주어진 일을 철저하고 성실하게 빈틈 없으리만큼 정확히 수행한다. 그런데, 이 필경이라는 일, 책을 모사하고, 따라쓰고, 베껴쓰는 일의 끝은 이상하리만큼 파국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서 만큼은 바틀비와 공통적이다. 바틀비는 무수한 반복적 작업과 모방으로 모든 것을 거부하기에 이르고, 수복은 무수한 반복적 작업과 모방으로 글을 완전히 의미로부터, 또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켜 버리는데까지 이른다. 즉 반복은 이상하게도 원심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어떤 중심으로부터 바깥으로 내몬다. 이 작품에서 반복의 끝은 첫 문장과 끝 문장이 반복되는 것이다. '난 글을 읽을 줄 모른다'.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말은 수복의 말인지, 주인의 말인지 분명하지 않다. 되풀이(불)가능성에 대한 장면처럼 읽힌다.















3. '낫이 짖을 때' 라는 제목은 수복의 말에서 온 것이다. 흙에 그린 낫으로는 지푸라기 하나 벨 수 없고, 흙에 그린 개가 도둑을 쫓아내기 위해 짖을 수는 없다는 수복의 말은 글의 무력함을 항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낮으로 그린 개, 그러니까 글자는 짖을 수는 없을 지언정 개보다 훨씬 더 강하다. 작품 곳곳에서 글의 힘을 강조하는 대목이 나온다. 수복의 아비는 글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라 배워서는 안된다고 몇번을 거듭해 말한다. 본래 양반 가문이었던 수복의 집안을 노비가 된 것도 글 때문이고, 붉은 도포를 입은 문하생이 매질을 당한 것도 글 때문이다. 글은 소 한 필, 쌀 열가마니 보다 비싼 값에 거래되기도 한다. 수복은 글쓰기가 아닌 글을 그리지만, 만약 수복이 글쓰기가 시작된다면 글쓰기는 많은 것을 바꿔 놓게 될 것이다. 에크리튀르, In-scription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본은 정본을 파괴시키지만, 정본보다 이본들이 더 큰 진실을 담게 되는 경우가 있는 법이다. 정본은 오직 현전적인 주체, 지금 이곳에 있는 주체와 결부되어 있지만, 베껴써진 이본은 ‘자기컨텍스트와의 단절력’이 자리잡고 있다. 아즈마 히로키가 이를 두고 ‘씌어진 문자는 이야기된 소리와 다르고, 그것을 발화한 주체의 부재, 극단적인 경우 죽은 후에도 계속 남는다’, ‘에크리튀르는 항상 주체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있기에 자유롭게 인용되고 해석될 수 있다’고 한 문장도 함께 떠오른다.


4. 작품을 읽으며, 정확히 수복과 수복의 주인을 보며, 나는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작품은 내게 그런 걸 묻고 있다. 나는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원심력을 그려내는 것이 가능한 반복적 회전 운동이 내게 있는 것일까? 아마도 아직은, 어쩌면 앞으로도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낫을 들고 쓴 글쓰기를 상상하게 된다. 낫은 쓰거나 말할 수 없고, 짖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낫으로 그려진 글이야말로 붓으로 쓰여진 글보다 훨씬 더 크게 세상을 향해 부르짖는 글이 될 수도 있다. 


 "양반들은 그 낫으로 도둑의 목을 베고 그 개를 앞세워 사냥을 할 수도 있다. 어디 그뿐일 줄 아느냐. 그 낫이 짖기 시작하고 그 개가 논두렁에 뛰어들어 추수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러면 세상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오래전 네 증조부 때처럼 말이다".


마지막 문장에서 단서를 삼아 이 작품에 나온 수복의 주인을 수복의 다른 자아라 생각해본다면 정사에서 누락된 사사를 기록해 글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주인의 뜻, 수복의 증조부의 의지는 날카로운 낫이 짖을 때의 모습, 혁명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난 글을 읽을 줄 모른다'라는 문장은 'I would prefer not to'에 비견할만한 문장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세계를 그려내는 말의 조건인 힘을 가진 자가 그려내는 글의 세계를 거부하는 말, 그 말이 바로 이 말이지 않을까. ‘난 글을 읽을 줄 모른다’. 수복은 글을 쓰지 않는다. 글을 ‘그린다’.


5. 지금 쓰는 이 글은 이 작품을 제대로 베낀 것일까? 나는 문맹인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데리다로 이 작품을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이 작품에 대한 배반이 아닐까? 이 소설을 제대로 그리지 않고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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