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서재 (2) 정보를 버리기,  책을 읽어버리기

-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한 주에 한 번 지역 라디오 방송에 나가 책을 소개하고 있다. 책 한 권을 정해 진행자와 15분 정도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다. 아마도 이 방송의 주청취자는 운전 중인 이들일텐데, 이들이 복잡한 교통상황을 읽어가며 도로를 누비면서 동시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책 소개에도 집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나가는 프로그램의 작가는 항상 내게 ‘좀 더 쉬운 책’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한다. 책 소개도 쉬워야 하고, 소개하는 책도 쉬워야 한다. 물론 나 역시 쉽게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처음 방송에 나가 소개했던 책은 서경식 선생의 <내 서재 속 고전>이라는 책이었다. 작가와 PD는 책이 어려운 편이기는 했지만 소개는 쉽게 해서 다행이라고 피드백을 해줬지만, 다음 방송부터 소개해 줬으면 하고 예로 든 책은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 고가 후미타케의 <미움 받을 용기>와 같은 책이었다. 청취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베스트셀러나 상대적으로 가벼운 에세이를 소개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라디오의 청취자들이 쉬운 책에 더 관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누군가 소개까지 하며 알려주지 않더라도 이미 다 아는 유명한 책이나 예비적인 준비가 없어도 읽을 수 있는 쉬운 책들은 아무리 좋은 책이라고 해도 방송에서 소개하고 싶지 않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청취자들이 항상 쉬운 것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믿는 쪽이다. 조심성이 없는 비교일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기 있는 최신가요보다 바흐의 음악을 어렵게 느낀다. 하지만 바흐의 음악을 듣는 것은 최신가요를 듣는 것과는 다른 ‘특별한 경험’으로 여기지 않는가. 쉬운 책도 당연히 좋은 책일 수 있지만, 쉬운 만큼 사실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신문에 쓰는 글도 마찬가지다. 내가 쓴 칼럼이 신문에 실리고 나면 '지나치게 철학적이다'라는 평을 한번은 듣게 된다. 여기서 ‘철학적’이라는 것은 칭찬이 아니다. 담당 기자가 ‘어렵다’는 말을 돌려 말한 것일 뿐이다. 얼마 전, 한 신문사에 원고를 보내자 이번에도 기자는 '너무 철학적'이라고 했다. 사실 내가 보낸 원고의 글감이었던 황현산 선생의 <우물에서 하늘보기>는 내가 쓴 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책이다. 이 책에 실린, 결코 쉽게 읽히지만은 않는 시화(詩話)들은 일간지에 선생이 4000자 분량으로 두 주에 한 번씩 1년여간 연재했던 글이다. 



그러니까 소위 ‘쉽지 않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떤 ‘자격’이 필요하다. 이미 탄탄한 독자층이 확보되어 있는 논객이나 작가, 직업적으로 어려운 말을 해도 좋다고 암묵적인 허락을 받은 경우라 할 수 있는 교수나 변호사, 평론가들이라면 굳이 글을 쉽게 쓰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이 쓰는 글에 앞서 있는 그들 존재가 이미 독자들을 설득하는 힘이 있다. 내가 글을 쉽게 써야 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말해, 나는 그런 자격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일부러 어렵게, 현학적으로 쓰지 않는다. 단지 30대 남성, 지방 거주자이자, 독립연구자라는 내 위치에서 보이는 세계를 드러내고, 이 세계에서 살아가며 겪게 되는 어려움을 글로 드러내기 위해 노력해 왔을 뿐이다. 나는 가능한 한 쉽게 쓰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런 노력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문장을 쉽게 풀어내는 재주의 부족 탓이 크겠지만, 어렵다는 반응을 만날 때마다 나는 내 글의 주제가 독자들에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 변명해왔다. 왜냐하면 읽는 사람이 가진 생각이나 관점과 일치하는 글이라면 복잡하고 어려운 문장으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쉽게 읽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김훈처럼 쉬운 표현으로 빼어난 문장을 직조해 사람들의 통념을 깨트리는 글쓰기는 나 같은 범부가 닿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내가 독백의 방에 갇힌 이유는 어려운 글을 쓸 ‘자격’도 없는 주제에 어려운 글을 썼기 때문이겠지만, 다른 한편 길고 어려운 글을 마음과 시간을 내어 읽으려는 독자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 소개하려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쓴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사람들은 책을 읽는 것을 단지 정보를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정보를 얻기 어려운 글은 금방 손에서 놓아 버리고 만다. 그러나 사사키에 따르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정보를 얻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래서 사사키 아타루는 책을 읽기 위해서 온갖 ‘정보’를 주는 것을 버리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저는 다양한 것들을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미술관에 다니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영화보는 것도 그만두었습니다. 듣는 것을 그만두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만, 음악활동도 그만두었습니다. 텔레비전 보는 것을 그만 두었습니다. 잡지 보는 것도 그만두었습니다. 스포츠 관람도 그만두었습니다. 어쩐 일인지 담배도 끊었습니다. ... 그리고 다양한 정보를 차단하기로 했습니다. 친구가 하는 말밖에 듣지 않고, 친구가 권하는 것밖에 보지 않습니다. 그것도 이따금 있는 일입니다. ...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정보는 우리에게 명령한다. 사람들이 악착같이 정보를 모으는 이유는 정보를 따라 살기 위해서다. 어느 사이트에 가면 최신 스마트폰을 좀 더 싸게 살 수 있다, 어느 지역에 부동산 투자를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다, 어느 회사의 주식을 사면 재미를 볼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정보를 알게 되면 우리는 정보의 명령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하게 된다. 결혼을 위해 중요한 것은 어느 새 사랑이 아니라 결혼정보가 되었고, 교육에서도 중요한 것은 배움이 아니라 입시정보가 되었다. 정보가 더 많은 사람들이 정보의 명령을 따르도록 만들려면, 어떤 정보도 어려워서는 안되고, 어떤 명령도 복잡해서는 안된다. 정보로 쓰여진 글은 어렵지 않다. 어려운 광고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책 읽기란 정보를 끌어모으는 것을 그만두고, ‘책을 읽어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냥 책을 읽었다가 아니라, “오, 맙소사, 책을 읽어버리고 말았다”와 같은 느낌으로 읽는 것이야말로 책 읽기라는 것이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불러온 혁명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루터가 철저히 성서를 읽었기 때문이다. 마호메트가 이슬람 세계의 문을 연 것도 책 읽기와 무관하지 않다. 마호메트가 천사로부터 받은 첫 계시는 바로 “읽어라”였다. 문맹이었던 마호메트에게 책은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을까! 그럼에도 책을 읽어버리면 자신이 미치던지, 세상이 미치던지 둘 중 하나가 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철저히 책을 읽고 또 읽어서 책이 그려 보이는 세계상이 세계에 대한 ‘잣대’로 서면 그때 바로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인간의 삶도 단순하지 않고, 폭력적인 단순화를 하지 않는 한 진실한 책이 쉬운 글로 쓰이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글이 어렵고 복잡하게 된 것은 글재주의 부족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깊이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세계는 단언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글쓰기의 윤리는 쉬운 주제를 쉬운 글로 쓰는 것에 있지 않다. 어렵고 복잡한 글을 견뎌줄 수 있는 독자의 존재가 글쓰기를 윤리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어려운 책이라 포기하지 말고, 책을 읽어버리자. 반복해서, 읽고 또 읽자. 루터는 성서를 읽었고, 번역했고, 많은 책을 썼고, 수없이 반복했다. 결국 혁명은 책을 읽어버리면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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