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서재 (3) 수태고지와 방사능의 공통점은? 

다니엘 아라스의 “서양미술사의 재발견”


 원근법을 뜻하던 ‘코멘수라티오’(commensuratio)라는 말은 ‘측정할 수 있는’, ‘같은 단위로 잴 수 있는’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회화에서 원근법이란 거리감을 바탕으로 대상을 조화로운 비례에 따라 표현하는 기법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런 기법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던 15세기에 왜 ‘코멘수라티오’라는 말이 원근법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는지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니까 원근법은 인간이 세계를 측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등장했다. 15세기, 유럽인들은 더 이상 세계를 측정불가능할 정도로 큰 무한한 것으로 바라보지 않고 ‘측정가능한 것’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도제작을 하면서 공간을 재고, 시계를 가지고 시간을 측정했다. 피렌체 대성당의 돔 설계자이자 원근법 발명자인 브루넬레스키가 뛰어난 시계공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브루넬레스키는 원근법과 시계로 공간과 시간을 측정하고자 한 것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다니엘 아라스의 <서양미술사의 재발견>이라는 책은 서양미술사를 다룬 여러 책 중에서 내가 특히나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이 책은 천재 미술사학자였던 다니엘 아라스가 프랑스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했던 강의를 녹취한 내용인데, 그림을 단 한 장도 직접 보여줄 수 없는 라디오 방송에서 이렇게 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강연을 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더 놀라운 일도 있다. 그림 한 점 보여주지 못하는 라디오 미술 방송이 프랑스에서는 큰 인기까지 얻은 것이다.




이 책은 서양미술사에서 중요한 전환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두 시점을 중점적으로 논의하는데 그 중 하나가 18세기 인상주의의 등장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원근법의 등장이다.  다니엘 아라스는 우리가 원근법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15세기에 수태고지를 주제로 그려진 작품들을 살펴봐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 원근법을 사용했던 초기 작품들은 거의 다 수태고지, 즉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를 잉태할 것을 알려주는 성서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두스가 말한 것처럼 수태고지는“신이 인간으로, 무한이 유한으로, 비척도가 척도로 나타나는 순간”이다. 남자를 알지 전혀 알지 못하는 동정녀가 신의 아들을 잉태하는 신비를 표현하는데는 원근법이 적합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근법은 세계를 ‘측정할 수 있는 유한한 것’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여러 점의 수태고지에서도 원근법이 사용되고 있다. 코르토나에 있는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는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1433년 경에 그려진 이 그림을 자세히 살펴 보면, 천사 뒷 편으로 보이는 방의 커튼과 침대가 지나치게 가깝게 그려져 잘못 그려진 것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1450년 경에 그려진 산마르코 수도원에 있는 수태고지의 경우에도 뭔가 모르게 어색하다. 천사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마리아가 아주 크게 그려져 있는데다 마리아 뒷 편으로 보이는 방으로 들어가는 문은 아주 작게 그려져 있어, 마리아가 이 문을 통과해 방으로 들어갈 수는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프라 안젤리코는 원근법을 사용하는데 기술적으로 미숙했던 것일까? 다니엘 아라스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원근법은 세계를 측정하는 것인데 동정녀의 몸의 신비는 이 모든 측정을 초월하는 것이기에 프라 안젤라코가 ‘의도적으로’ 원근법의 규칙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성육신의 신비는 원근법으로도, 시계로도 측정되지 않는다! 이것이 프라 안젤리코가 수태고지에서 원근법의 규칙을 따르는 동시에, 원근법의 규칙을 위반한 이유였다.


원근법에 대해 다니엘 아라스가 이 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흡사 셜록 홈즈가 현장의 몇 가지 단서를 바탕으로 범죄 상황을 재구성하는 것이 연상된다. 프라 안젤리코는 다니엘 아라스의 추리대로 수태고지를 표현하는데 원근법이 적합하다고 생각했을까? 그리고 그는 정말 의도적으로 원근법을 위반했던 것일까? 알고 지내는 한 저명한 미술사학자에게 견해를 물어보니 그는 프라 안젤리코가 단지 원근법을 표현하는데 미숙했던 것으로 보는 편이 낫다고 했다. 어느 쪽 의견이 맞는지 천국에 가서 프라 안젤리코에게 물어보기 전까지는 단언하기 어렵겠지만 내 생각에는 다니엘 아라스의 접근 방식이 작품의 의미를 훨씬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책에서 다니엘 아라스가 보여주는 집요할 정도의 추리 과정을 힘겹게 쫓아가면서 나는 내 나름대로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법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일단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나면 작품의 구석 구석을 살펴보며 표현방식을 살펴본다. 그리고 제목이나 작품 옆의 간략한 설명을 참조하여 작품의 주제와 내용을 확인하고, 내용과 표현 방식이 어떤 논리로 결합되어 있는지를 따져보기 시작한다. 언제나 좋은 작품은 작품의 주제를 표현 방식이 가두지 않는다. 오히려 표현 방식이 작품의 주제가 지니는 의미를 훨씬 더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반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는 그의 표현 방식 때문에 단지 해바라기를 그린 것이 아니라 태양과 같은 강렬한 열정까지 그린 것으로 평가 받게 된 것이다.





 얼마 전 사진작가 정주하와 여럿이 함께 쓴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을 읽었다. 정주하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원자력 발전으로 폐허가 된 후쿠시마를 찾아 사진으로 기록하고 후쿠시마를 포함한 일본 전역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그의 사진에 재현된 후쿠시마는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장소처럼 평온한 모습이다. 들도, 산도, 강과 바다도 제목을 보지 않고 사진만 봐서는 방사능에 오염되었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다. 이 책에 실린 정주하의 사진을 보면서 다니엘 아라스의 이 책이 떠올랐다. 





 이제 원근법으로 측정불가능하고 표현불가능한 것은 ‘수태고지’의 신비만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신비 대신 또 다른 측정불가능한 것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인간의 삶이 80년 정도 지속된다 할 때,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한 방사능 피해는 측정가능한 것일까? 방사능으로 인한 피해는 수백년, 수만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의 척도를 완전히 넘어서 있다. 방사능의 영향은 후쿠시마라는 지역적 범위를 완전히 초과해 어디까지 피해를 주고 있는지 파악이 되지 않는다. 측정불가능하고 설명불가능한 것을 ‘신비’라고 한다면 우리는 ‘수태고지의 신비’를 ‘방사능의 신비’로 대체한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번에도 역시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정주하는 보이지 않는, 인간의 척도를 완전히 넘어서는 방사능의 파괴력을 보여주고자 방사능으로 인한 피해 장면을 찍는 대신 방사능 유출 이후에도 달라진 것이 없는 후쿠시마의 모습만 찾아서 촬영했던 것은 아닐까?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 예술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것은 예술이 아니거나 구태의연한 예술이다. 프라 안젤리코가 거장인 까닭은 그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의 신비를 보이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척도 자체가 없는 방사능의 신비를 보이게 만든 정주하의 작품도 분명 예술이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와 같은 신비가 도처에 있다는 것이 우리의 비극이 아닐까? 미세먼지가 불러오는 피해는 측정 가능한 것일까? 미세먼지가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보도가 매일 같이 나와도 학교에서는 체육대회를 열고, 아이들은 미세먼지를 힘껏 들이마시며 축구를 하고, 공사장 인부는 마스크도 없이 계단을 오르내린다. 미세먼지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까지 영향을 주는 것일까? 그 피해는 언제 나타나게 될까? 월성과 고리 원전이 가까운 경주에 지진이 일어 났다고 하는데 방사능의 신비가 우리와 상관 없는 이웃 나라의 이야기이기만 한 것일까? 수태고지도, 방사능도, 미세먼지도 원근법적 질서만으로는 표현되지 않는다. 


 원근법적 규칙을 따르는 것으로 표현불가능한 것은 이제 “구원의 신비”가 아니라 “파멸의 신비”다. 영혼의 구원 대신 안락만을 구원으로 믿었던 우리에게 방사능은 생명 대신 죽음을 고지하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을 수태할 것이라는 천사의 말에 마리아는 “당신의 말씀대로 제게 이뤄어지도록 하소서”라고 답했다. 방사능이 우리에게 ‘죽음’을 잉태할 것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원근법을 넘어서는 신비’, 즉 모든 척도를 넘어서는 위험 앞에서 이제 답해야 하는 질문이다.


*해기사 협회 잡지, 해바라기 10월호에 쓴 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