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대한 존경
-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민족문화추진위원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모님은 생일선물로 오직 책을 사주셨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늘 그게 불만이었다. 책 선물이라고 해서 낱권으로 된 그림책이 아니다. 1학년 생일에 받은 책은 한국편 32권, 외국편 32권으로 구성된 금성사에서 나온 [소년소녀위인전기]였다. 나는 한국편보다는 외국편을 더 즐겨보는 편이었는데,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32명 중에 아문센이 포함된 것을 의아하게 여기곤 했다. 세계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냥 옷만 따뜻하게 입고 걸어가면 되는 일 아닌가 하고 어린 마음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2학년 생일에는 계몽사에서 나온 70권짜리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을 선물 받았다. 선물이라서 좋았던 기억은 별로 없다. ‘아, 이걸 다 언제 읽나’ 그런 생각뿐이었다. 소년소녀들이 읽는 문학이라고 하지만 거기에는 허먼 멜빌의 <모비딕>과 같은 고전들도 있었고, 동양 작품으로는 드물게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 같은 작품도 있었다. 하지만 초등 2학년의 지적 수준으로 읽을 수 있는 작품은 많지 않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계몽사판 그림동화에서 봤던 책들 중 겹치는 책들에 주로 손이 갔다. <피터팬>이나 <빌헬름텔>, <피노키오> 같은 책들. 그 중에서도 <소공녀>는 결말의 속시원한 반전 때문에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였다.

부모님은 이후에도 생일 때마다 전집을 집에 들이셨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는 수백 권에 이르는 책을 다 읽어 내지 못했다. 그 중에선 단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한, 아니 읽을 수 없었던 전집 시리즈도 있었는데, 바로 4학년 때 받은 선물이었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라는 총 28권짜리 전집이었다. 이 책과 관련된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아버지께서 내 생일 한 주 전에 전집류를 주로 취급하는 외판원에게 전화를 걸어 집으로 부르셨다. 아버지보다 몇 살 많아보였던 외판원 아저씨는 여러 상품 중에서도 유독 이 전집을 권했다. 아이가 평생 보게 될 책이라며 좀 비싸더라도 이번 기회에 장만하라 했다. 그 외에도 영국과 미국의 무슨 책들에 대해서도 쉴 새 없이 이야기했는데, 그 때는 몰랐지만 아마도 [브리태니커백과사전]과 [아메리카나백과사전]이었던 것 같다. 일찍 학업을 중단하신 아버지께서 그게 무슨 책인지 아실 리 없었지만, 매년 거래해 오던 외판원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으셨고, 한 주 후 책이 배달되었다. 책은 이전에 나로서는 한번도 보지 못한 크기, 두께였고 초등학교 4학년이던 내가 들기도 버거울 만큼 무거웠다. 아버지는 내 방 책장 한쪽을 차지하고 있던 디즈니 그림책을 박스에 넣으시고는, 집에 막 도착한 책을 꺼내 한 권씩 책장 한쪽에 꽂아 넣으셨다. 동화책들이 만들어내는 형형색색의 빛깔 대신, 1권, 2권, 3권.. 한 권씩 백과사전을 꽂아 넣었다. 점점 책장은 무겁고 짙은 고동색으로 채워졌다.

책에 대한 ‘원체험’이라는 것이 있다면, 내게는 아마 바로 이 책들을 아버지와 함께 책장에 꽂아넣은 그날의 경험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전에도 집에는 책이 있었고, 자주 책을 샀고, 매일 같이 책을 읽었지만 이 백과사전이 들어온 그 날부터 그 책들은 책으로 보이지 않았다. 내가 백과사전으로 알게 된 것은 기껏해야 이렇게나 두꺼운 책은 색인만 해도 책 한 권 분량이라는 것과 내가 가고 싶었던 대학의 역사, 내가 살던 대구에 대한 지리 정보가 전부였지만, 책장에 꽂혀 한 달에 한 번도 손길이 가지 않던 ‘권위적인’ 책을 바라보며 “지금 나는 어려서 저 책을 읽을 수 없는 것이지, 저 책은 아마 어마어마한 내용일거야”라며 속으로 생각했다.

고등학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를 하면서 어머니는 그 전집을 중고책방에 갖다 주셨다. 거의 새 책이었지만, 중고책방에는 같은 종류의 전집이 너무 많이 쌓여 있어 형편 없는 가격을 받았다. 얼마 가지 않아 백과사전이 시디로 만들어지는 시대가 왔다. 이제는 아마도 구립 도서관 정도에는 가야 있을만한 이런 종류의 책을 집에 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얼마 전에 아이 엄마와 함께 집 근처에 있는 전집 전문 서점에 들렀다. 사장님은 이젠 그런 백과사전류는 나오지 않는다며 다른 책을 소개했다. 아이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만화 스타일에 주제도 다양하고, 온갖 색으로 치장된 표지의 전집이었다. 세계문학전집류와 위인전집은 여전히 나오고 있지만 내가 읽었던 것과는 달라보였다. 출판사들이 세계문학전집의 ‘세계’가 말만 세계일 뿐 서구 중심의 전집 편찬이었다는 비판을 충분히 의식했기 때문인지 어떤 전집에도 인도인 하인을 둔 런던 아가씨 이야기인 [소공녀]는 없었다. 위인전집에 실릴 수 있는 ‘위대한 사람’의 기준도 예전과 많이 달랐다. 프라다를 입고 다니는 보그의 악마 ‘앤디 윈터’, 샤넬을 만든 ‘코코 샤넬’ 전기를 보면서, 어릴 때 위인전을 읽으며 느꼈던 위화감, 그러니까 나는 천재도 아니고 모험을 할 만큼 용기도 없으니 위인은 못되겠구나 하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서점을 나오면서 아이 엄마는 내게 물었다. “요즘도 전집을 사는 사람이 있나봐?”. 그동안 우리는 언제나 칼데콧이나 뉴베리와 같은 큰 상을 받은 책이나 유명 작가들의 책을 가능한한 섬세히 선별해 낱권으로 책을 샀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문득 나는 내 아버지가 내게 준 책에 대한 경험까지 내 아이에게 주고 있는지 생각을 해보았다. 책을 사다주며, 책에 대한 경험까지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버지께서 비싼 전집을 사겠다고 생각한 것은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기대와 욕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본인은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책에는 그 돈을 들일만큼 가치가 있다는 믿음, ‘고전’에 대한 경외와 존경도 없었다고 할 수 없다. 아마도 내 아버지 뿐 아니라 우리 부모님들은 그런 믿음을 가진 세대였을 것이다.

백과사전을 포함해 사놓고 읽지 않은 책들이 더 많지만,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은 단지 존재만으로도 내가 인간의 지적 유산에 대한 동경을 키우도록, 때로는 내게 책을 더 읽도록 해주는 압력도 되었다. 프랑스 혁명이 계몽사상가들이 만든 [백과사전]이 있었기에 촉발되었다고는 하지만 혁명을 주도하던 사람들도 백과사전을 다 읽지는 못했을 것이다. 대신 책, 그러니까 ‘책에 대한 존경’이 ‘왕에 대한 존경’을 이길 때 변화가 일어났다. 아버지보다 두 배는 더 많은 시간 책을 읽었겠지만 나는 아버지만큼 책을 존경하고 있을까? 내 아이에게는 ‘책’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일까? 책을 읽는 대신 책을 구입하자는 뜻은 결코 아니다. 보르헤스의 말대로 “도서관은 무한하며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우주이지 않은가? 공공도서관이 드물던 내 유년기에 비하자면 이제 책에 대한 존경은 집보다 몇 배는 더 큰 무한한 우주인 도서관에서 더 배우기 쉬울 것이다. 그러니 책에 대한 존경은 단지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구입다고 해서 생겨나지 않는다. 이 우주 속에서 나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는 그 순간 생겨난다.
짙은 고동색 백과사전 전집이 어린 내겐 그 우주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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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 백화점에 갔다가.

얼마전에 대구에 신세계 백화점이 생겨서 거기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었는데,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의 글이 되었다. 조경란의 <백화점>이라는 에세이를 읽었는데 내가 백화점에서 자주 느꼈던 부분과는 다른 결의 글이었다.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도 도움이 될까 해서 봤는데, 벤야민이 살던 때의 아케이드와 지금 백화점은 상당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하간 이번 글은 몇 시간을 고민했지만 제대로 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채, 백화점에서 나란 인간이 얼마나 찌질한 인간인지만 보여주는 자기고백이 된 것 같다^^. (원래 인간이란 찌질하니까 부끄러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빙 고프만은 사회 속에서 인간은 언제나 연기를 하고 있으니까, 자기 자아를 찾아라는 식의 결론으로 도달하지 않는다. 나도 그런 결론에 도달하고 싶지는 않았다. 백화점에서 내가 나 자신을 연출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었다. 거기에는 나의 욕망도 있고, 백화점이 내가 연출을 편리하게 할 수 있도록 무대 장치를 잘 세팅해 놓기 때문일 것 같았다. 점원도, 매장 구성도, 조명과 동선까지도 아주 영리하게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새로 생긴 백화점도 그런 점에서 나를 다른 나로 느끼도록 만들어주는 공간이었다. 백화점에 있는 시계 매장에 난생 처음 들어가게 만들었으니까. 내가 이 글에서 백화점 시계매장에 처음 들어갔다고 쓴 건 진실은 아니다. 외국에 있는 매장은 아무렇지 않게나 들어가서 이것 저것 물어본다. 그런 차이가 어디에서 왔을까 생각해봤다.
일단 나는 백화점 매장에 들어가서 관심 있는 물건의 가격은 바로 물어보지 않는다. 택을 바로 들추기 전에 그것이 옷이든, 전자제품이든 일단 이리 저리 살펴보고 물건의 특징부터 살펴본다. 이건 내가 그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가격보다 그 물건이 어떤 것인지를 더 궁금해 해서가 아니다. 일단 택을 들추기 전에 내가 그 물건이 내 취향에 맞는 물건인지 확인부터 하는 심미적 취향이 있는 손님이라는 것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가격 때문에 사지 못하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려는 연기를 매장에서 하는 것이다. 일단 마음에 드는 옷이 있으면 가격부터 물어보는 솔직함이 없어서 백화점에서 물건 사기는 내게는 늘 연출의 부담이 있는 공간이다. 
아울렛이나 외국 특히 미국 쇼핑몰이 편하게 느껴졌던 것은 이런 연출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아울렛에 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가격에 민감한 소비자라는 신호인데다 아울렛 매장은 늘 사람들로 북적대 자아의 부각이 잘 일어나지 않고, 그래서 연출의 부담도 잘 생기지 않는다. 마음대로 택 가격을 살펴보고, 가격이 비싸면, "아울렛 물건이 왜 이렇게 비싸냐"고 점원에게 투정을 부릴 수도 있다. 미국에 있는 백화점들은 매장마다 점원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점원에게 응대를 받을 가능성이 없고, 명품 시계 같은 럭셔리 물건을 파는 매장에서는 직원이 있지만 이들은 내가 살 능력이 없어도 아시안들은 헤비쇼퍼라는 인상이 있어서 가격부터 물어도 문화적 차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외국인이지 않은가? 자아가 좀 부각되더라도 그 때 뿐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한국 백화점에서 물건, 특히 명품을 사는 일은 외국에서 사는 것보다 틀림 없이 더 큰 기쁨을 느끼게 할 것 같다. 비싼 물건을 비싸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 보이면서 카드를 척 낼 때 느끼는 기분 같은 것은 아무래도 이쪽이 더 드라마틱하고 나 자신에 대한 생각도, 그것이 비록 저급한 방식이라 하더라도, 고양시키는 느낌을 줄 것이다. 명품 매장에서 물건을 사면 프랑스산 물이나 이태리산 음료를 주고, 고객 카드에 이름을 적으면서 백화점 명품 매장이라는 무대의 주인공 중 하나로, 아니 자신을 주인공 중 하나라 믿게 되는 것이다. 명품 매장 직원이 착용한 흰 장갑은 여러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
여하간 백화점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왜 이렇게 어려울까. 신문에 쓴 글도 결론을 내기 어려웠고,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마무리하기 어렵구나.



백화점이라는 무대 (매일신문, 권영민의 에세이산책에 쓴 글)
새로 생긴 백화점에 들렀다가 시계 매장 앞을 지나게 되었다. 시계는 내가 쇼핑 욕구를 느끼는 거의 유일한 물건이다. 시계는 단지 시간만을 알려주는 물건이 아니다. 크로노그래프와 GMT 기능이 있는 시계는 시계를 착용한 남자를 모험과 도전을 즐기는 성공한 자처럼 보이게 만든다. 물론 내가 그런 남자라서 명품시계를 동경해온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시계 하나로 그런 이미지를 갖고 싶어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명품시계 구매는커녕 시계 매장에도 들어가 본 적이 없다. 가격도 물론 큰 이유였지만 매장 내 손님이 별로 없는 시계 매장은 뭔가 모르게 들어가기 부담스러웠다. 그 날도 발걸음을 돌리려다 문득 내가 시계매장에 들어갈 정도의 모험 정신도 없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져 매장에 들어가 봤다. 직원은 내게 B사의 시계를 추천해줬다. 시계를 살펴보며 직원이 눈치 채지 않게 가격표를 힐끗 보고, 가격은 조금도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뉘앙스로 직원에게 가격을 물었다. 나는 살 마음이, 아니 살 능력이 없었지만 다른 시계들도 보여 달라 했다. 가격을 듣고, 그 가격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다. 나는 직원에게 “가격은 좋은데, 다이얼장식이 마음 들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다른 매장을 보고 오겠다고 했다. 직원은 둘러보고 다시 오라고 했다. 물론 나는 다시 가지 않았다.
시계매장을 나오며 어빙 고프만이 <자아연출의 사회학>에서 한 말이 떠올랐다. “공연된 자아는 그럴 듯하게 연출하여 남들로 하여금 그를 그가 연기한 인물로 보게 만드는 일종의 이미지다”. 나는 시계매장에서 내 연기가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구매능력은 없지만 구매자처럼 행동했고, 직원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직원은 내가 구매 능력이 없다는 것을 눈치 채고도 적당히 맞장구쳐줬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백화점, 그 중 명품매장은 무대가 되어 나 자신을 내가 ‘공연한 자아’로 점차 믿게 만드는 곳임을 깨달았다. B사의 시계가 내게 특히 잘 어울린다는 직원의 말이 오래 남았다.
명품이 즐비한 새로 생긴 백화점을 무대로 나는 ‘공연된 자아’가 되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시계가 단지 시간을 알려주는 물건이 아니듯 백화점도 단지 물건을 파는 곳만은 아니다. 무대 위의 우리 배역이 오직 ‘고객님’이 되도록 모든 것을 사전에 셋팅해 두고, 우리를 구매능력이 있고 존중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고객님으로 대우한다. 그렇게 우리는 백화점이라는 무대 위에서 연출된 나 자신을 자기 자신의 자아로 믿으며 조금씩 쇼핑의 즐거움에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연기에 너무 도취되지 말아야 한다. 백화점은 영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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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느낀 분노만이 유일한 분노는 아니다>
- 폭력시위/평화시위라는 이분법에 대해

나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 연일 보도로 나오고 있다. 이 정부가 이런 일까지 했단 말인가.. 기가 막힌 일이 하나둘이 아니다. 며칠 전에도 놀라운 보도를 접했다. 청와대 유력 인사가 최순실이 자주 가는 성형외과의 중동진출을 타진해달라는 요청을 한 컨설팅 업체에 했었는데, 이 업체는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해 요청을 반려했다. 그 후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컨설팅 업체 사장이 운영하는 회사를 포함해 일가족, 친인척이 운영하는 회사 모두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았다. 서른 명도 되지 않은 회사였다고 한다. 게다가 남편은 한직으로 좌천되었고, 공사로 해외 근무 중이던 동생은 국내로 들어와야 했다. 이 업체 사장이 일을 반려한 이후 이 일을 관할했던 조원동 수석은 자리를 떠나야 했다.

청와대가 이렇게 세심하게 한 개인의 사익을 챙겨주려 노력했고, 찌질하게 권력을 이용해 시민 한 사람을 괴롭혔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나는 이 업체 사장과 일가족들이 느꼈을 분노에 대해 생각했다. 이들은 청와대가 ‘조직적’으로 한 가족을 향해 ‘전방위적’으로 압박해온다고 느낄 때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아마 국가 조직의 위세에 공포심을 느꼈겠지만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나로서는 가늠조차 하기 힘든 무게의 ‘억울함’을 느꼈을 것이다. 억울함은 분노를 낳는 가장 강력한 감정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개성공단 폐쇄가 비선에 의한 즉흥적 결정이었다는 것을 알아버린 개성공단 사업주들은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군사적 이유도, 아니 그보다 더 졸렬한 정치적 이유도 아닌 비전문가 집단이 하룻밤 사이에 두고 내린 결정 때문에 생활 터전을 잃어버린 이들은 뉴스를 보고 어떤 기분이었을까? 생업을 팽개치고 삭발까지 하게 만든, 조용한 마을을 분열시킨 주범인 사드도 비선의 결정이었고 거기에 무기상까지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의 기분은 또 어떨까? 해산된 통합진보당의 당원과 당직자들의 기분은? 헌법재판소에서의 옥신각신은 ‘연극’에 불과했고, 비선에 의해 짜여진 각본에 의해 해산되었다는 것을 듣고 그들이 느꼈을 감정은 나와 같은 것이었을까? 무엇보다 세월호 유족들은 지금 어떤 기분일까? 대통령이 7시간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렴풋이 밝혀지고 있는 마당에 비선에 의해 국정이 마비되어 버린 탓에 구조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된 유족들은 어떤 기분일까. 억울함을 느꼈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이들은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폭력시위/평화시위라는 이분법적 구도는 시위에 나온 대중들의 분노의 질과 수준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JTBC와 한겨레에 보도된 믿을 수 없는 뉴스에 느낀 허탈감과 상실감에 기초한 분노와 세월호 유족들과 개성공단 사업주들이 느끼는 억울함에 기초한 분노는 질적으로 다르다. 중요한 것은 어느 누구도 그 분노의 정당성에 대해서 말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에 의한 피해는 간접적인 경우에서부터 직접적인 경우까지 광범위한 만큼 분노의 질과 폭도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폭력시위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평화시위가 아니면 안된다는 주장을 비판하려는 것이다. ‘평! 화! 시! 위!’라는 외침, ‘평화시위가 아니라면 전략적으로 옳지 않다’는 믿음, ‘시위에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는 판단, 그런 외침, 믿음, 판단은 그저 그것이 체제 내화의 결과여서거나 폭력시위에 대한 강박증적 거부의 증상이여서가 아니라 ‘평화시위라는 미명으로’ 다양한 분노의 수준을 단선적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억울한 사람들에게 그 억울함을 견디도록, 분노한 사람에게 그 분노를 억누르게 하는 것이야말로 ‘폭력적’이다. 따라서 ‘비폭력’이 이데올로기화되면 비폭력은 전도된 폭력으로 그 사회의 가장 억울한 자를 억압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오해를 막기 위해 덧붙이자면, 나는 폭력시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시위에는 여러 종류의 분노를 가진 사람의 다양한 전선이 있어야 하고, 우리는 시위를 위해 광장에 모인 대중들이 그 과정에서 서로의 분노에 대해 공감할 기회를 얻게 된다고 믿는다. 폭력시위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시위만을 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발상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각자의 분노가 자유롭게 시위에서 표출되고, 자신의 억울함과 분노를 해결할 실마리를 관철시키기 위해 광장에서의 논의가 진행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실마리는 각자의 분노, 억울함의 감정을 존중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비폭력 평화 시위가 어쩌면 JTBC뉴스를 시청하고 분노한 사람들의 이해와 감정표출 방법만을 대변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비폭력도 전략이고 역사적으로 ‘맥락’에 따라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폭력도 전략일 수 있다. 단순한 치기와는 구분해야겠지만, 만약 세월호 유족과 성주군민들이 물리적 수단을 동원하기로 한다면 나는 말릴 마음이 전혀 없거니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다치지 않도록 동참할 것이다. 꼭 내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도 레비나스 말을 빌리자면,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일은 목숨을 건 도약이다. 지금 폭력 시위/평화 시위를 두고 벌어지는 토론은 우리가 타자에 대해 어디까지 응답할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한 과정일 수 있다.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폭력이야말로 신화적 폭력을 중지시키는 신적 폭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어느 누구도 단순한 치기로 폭력을 일삼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 저마다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철두철미 강박적 자기 검열로 “평! 화! 시! 위!”라고만 외치지 않을 것이다. 외신과 언론으로부터 칭찬받고 스스로도 자부할만한 일을 만들어보겠다는 것이 이 시위의 유일한 목표가 아니라면 말이다.


어쩌면 시위란 그 자체로 이미 폭력적인 것이다. 시위는 사회를 중지시키고, 에너지가 분출되고, 단지 모이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위협이 되기도 한다. 시위를 통해 공유지식이 형성되면 모인 사람들의 뇌 속에서 집단적 연대가 생겨나고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향하면 그것만으로 폭력이 된다. 하지만 뇌의 전기 신호 조차도 똑같은 강도로 일어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내가 느낀 분노만이 유일한 분노가 아니다. 일자리를 잃었고, 꿈을 상실했고, 가족이 다쳤고, 아이가 죽었다. 국정이 농단되었다는 기막힌 사태에 대한 분노 수준으로는 결단코 치환될 수 없는 일들. 우리는 이런 일에도 비폭력을 말할 수 있을까? 나의 억울함에 빗대는 것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억울함을 겪고 있을 이들에 대한 상상력이 있다면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햄릿에게 참으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삼촌의 만행이 드러난 이상 햄릿만이 대문자 질문 -'To be or not to be?'-에 답할 수 있다. 아버지 유령의 명령을 상속할지, 삼촌에게 복수를 할지, 아니면 죽은 듯 없는 사람처럼 살아갈지..햄릿 외에 그 결정에 대한 권리를 가진 사람은 없다. 폭력인가 평화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로 억울하게 죽고, 일자리를 뺏기고, 삶을 빼앗겨버린 이들에게 응답할 수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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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최순실'

순실한 마음으로 받은 은택

 고전적인 정의 관념은 공허하긴 하지만 정의가 무엇인지를 사유할 때 늘 전제가 된다. 고대 그리스의 사람들은 정의(dike)가 각자의 몫을 각자에게 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특권이란 각자가 얻어야 할 몫 이상의 몫을 자신의 지위와 권한, 누군가와의 관계를 이용해 취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지위, 권한, 관계를 이용하는 것이 '의식적인 경우'에만 특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부지불식 간에, 아무런 의식 없이 '이 정도는 괜찮겠지', '사소한 것에 불과한 것이지'라며 '자기 몫 이상의 몫을 자기의 몫'으로 생각하는 모든 행위와 태도가 '특권'에 해당하는 것이다. 게다가 자기 몫 이상의 몫이 공공의 것일 경우에 '특권'은 공공에 대한 위협으로, 공화국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게 된다.

 그렇게 보자면, 동향 사람이라고 박근혜를 뽑았고, 같은 대학 출신이라고 후배를 승진시키는 것, 친분이 있는 관계라면 비판/비평을 주저하게 되는 것이나 병원에서 내 아이를 받아준 의사라고 좋은 자리에 임명하고, 아버지 어머니 잃고 힘들 때 함께 있어준 사람이라 국정까지 관할하게 하는 것은 양적인 차이라면 몰라도 질적인 차이는 조금도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 특권을 욕망하는 태도다. 과연 나라면, 만약 내가 정치인이라면, 내가 정치인이라는 이유로 자동차 할부 이자를 0.3% 깎아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할 수 있었을 것인가? 나는 나와 친분이 있는 작가, 선생님들을 향해 비판하는 글을 쓴 적이 있는가? 내게 그럴 용기가 없었다는 것은 나 역시 '부지불식' 간에 박근혜와 아는 사이였고, 차은택 혹은 정유라와 아는 사이였다면 내 몫보다 더 많은 몫을 주겠다는 제안을 내 몫으로 생각하고 수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박근혜와 아는 사이라니 생각만 해도 근사하지 않은가? 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학벌주의, 연고주의, 지역주의, 친분주의처럼 무슨 '주의'라는 말을 붙이기 전에 우리 사회에서는 사적 관계를 우선시하는 것은 하나의 마음의 습속 같은 것이라서 우리는 모두 조금은 '최순실적'이고 '박근혜적'이다. 특히 대구 경북에서 박근혜를 지지했던 많은 이들은 '불쌍한 공주에 대한 동정'으로 포장된 사이비 윤리 속에 '우리가 남이가' 식의 특권적 이해관계를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물론 내가 우리 모두가 최순실이고 특권을 욕망하는 자들이니까 최순실, 박근혜, 차은택에게 면죄부를 줘야 한다는 값싼 대속 논리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유야무야 특권을 향유하고, 특권을 향유하길 바라는 사실상 '공화국의 적대자'라는 불편한 진실을 직시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치 왕처럼 지위와 권한, 관계를 이용해 내 몫을 넘어서는 몫까지 자신의 몫으로 취하려는 태도와 의식이 공공의 것을 사유화시키고 공동체를 근본적으로 침식시킨다.


  프리모 레비는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수용소의 포로들 중 작은 특권을 누리던 자들을 '회색지대'에 있던 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죽 0.5리터를 더 얻기 위해 같은 포로들을 배신하고, 조금 더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나치에 협력했다. 그것은 포로들 사이의 협력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고, 적대의 선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수용소에서까지,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 자명했던 수용소에서조차 특권을 쫓는 자가 있었다는 것은 작은 특권에 도취되는 것이 인간성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런 인간성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작은 특권에 대해서조차도 두려워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단두대는 공화국을 세우는 효과적인 전략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길로틴 떨어지는 소리가 '부지불식' 간에 내 몫을 넘어서는 몫을 내 것으로 취하는 것의 결과가 무엇이었는지 상기시켰을 것 아닌가.




철학자 김영민 선생이 <동무론>에서 서늘한 관계를 우정으로 형상화했던 것이 떠오른다. 차갑지도, 그렇다고 뜨겁지도 않은 기분 좋은 서늘한 관계를 만드는 데 미숙한 우리의 태도가 지금의 사태를 만든 것이다. 공동체, 공화국을 사유하는 근본적인 의식의 변화가 없다면, 아니 의식의 변화를 불러올 대전환이 없다면 제2의 차은택, 제2의 최순실, 제2의 박근혜, 제2의 그 성형외과, 제2의 산부인과는 얼마든지 있다. '순실한 마음으로 권력자와 사귀어 은택을 입은 것'이라 우겼다고 하더라도, 그 순실한 마음, 순실하게 베풀어준 은택 속에서 조용히 사회는 침식되는 것이다.

 고등학교 적 일이 하나 떠오른다. 학생회장으로 일할 때다. 성탄절을 기념해 불우이웃돕기를 위한 모금을 해달라는 학생과장 선생의 요청에 따라 캠페인을 했고, IMF 로 모두가 힘든 시기에 저마다 십시일반 500원, 1000원을 꺼내 놓았다. 그렇게 전교생을 통해 거둔 돈이 50만원 정도가 되었고 예년보다 많은 금액에 학생회 간부들은 성공적이라 환호했다. 그 돈을 학생과장과 2학년이던 후배 부학생회장을 데리고 교장선생님께 전달하러 갔다. 당시 교장선생님은 내가 다녔던 중학교의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아버지셨고, 아버지 사업 부도로 내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돈을 들고 들어가자 교장은 내게 "네가 가져라"고 했다. 당황했지만 그 때 나는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 돈을 들고 나왔다. 절대 나는 미르재단이나 K스포츠재단처럼 내가 그 돈을 먹으려고 한 사업이 아니었다. 순실한 마음으로 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조금도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러니까 내가 학생회장이고, 교장과 내가 아는 사람이기에 이 돈을 내가 받게 된 것은 아닐까, 내가 지금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 말이다. 나는 아마도 우리 학교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 중 하나였고, 그렇기에 심지어 내가 받을 권리까지 있다고도 생각했다. 물론 내가 그 돈을 받았다는 것을 그 자리에 있었던 몇 사람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불우이웃돕기로 학생회가 모금한 돈은 학생회장이 가졌다는 것, 어쩌면 그 일이 내가 특권에 길들여지게 된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은 시간이 오래 지나 용서받을 수 있다는 교묘한 마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인할 수 없이, 나 역시 내가 그동안 누리고 있었던 많은 것이 권한을 가진 자의 은택을 순실한 마음으로 받은 것이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이번 사태가 있고 나서야 뒤늦게 솔직하게 되돌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 뿐 아니라 우리는 모두 특권에 길들여지게 된 개인적 역사를 마음 속에 숨겨두고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지역, 학교, 친분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이뤄지지 일들이 이뤄지지 않고, 그런 관계를 넘어서 혼자 뭔가를 이룩해내겠다는 것은 무모한 것으로만 취급되기 때문이다. 유행이던 해외 학부 유학이 인기가 없어진 이유가 해외대학의 수준이 낮아져서인가? 대학 수준보다 더 중요한 학벌 때문이지 않은가?

 부디 바라건대 이 사태가 순실한 마음으로 은택을 받는 행위, 그런 은택을 바라는 모든 태도가 공동체에 대한 부인할 수 없이 중대한 범죄이며, 더 나아가 김영란법의 경제적 손실 운운하기 전에, 특권을 욕망하고, 향유하고, 확장시키는 것에 무디고 무딘 마음을 예민하게 만드는 마음의 혁신으로 이어져 김영란 법의 내실을 온전하게 만드는 것이었으면 한다. 박근혜 하나 하야로 끝날 일이 아니다. 특권을 가진 자들의 착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줄 기회가 되어야 한다. 라거의 회색지대에 있었던 자들의 종말은 결국 '죽음'이었다. 단두대는 한번으로 충분하다. 역사에서 교훈을 찾는 명예로운 혁명이 되길, 아둔한 자가 많지 않길 빌 뿐이다.

- 이 글은 본색 소사이어티 영화제 '씨네 노마드 2016' 뒷풀이에서 이야기했던 내용으로 이정기씨의 요청으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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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디얇은 치졸함. 세심한 비열함

셀레브와 인맥 쌓기에 열을 올리는 것과 자기 주변으로부터 신뢰를 얻는 것은 반비례하는 것 같다. 예전에 친구는 내게 전화해 대학원 같은 학과에서 공부하던 한 지인이 이름난 지식인들과의 친분을 위해 공금을 동의없이 사용하고 심지어 유용까지 했고, 셀레브와의 관계를 과시하는데 급급하다며 한참을 비난했다. 그 지인은 내가 보기엔 조금도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동의가 되지 않았다. 친구는 그 학과 사람들 모두 그 지인과 등을 졌다며 지인을 믿지 못할 사람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친구가 지인을 모함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다시 말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지인은 정말 그런 류의 사람이었고, 친구의 말이 맞았다. 사람 일에는 겉으로 다 드러나지 않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점들이 있다. 태블릿 컴퓨터라도 발견되지 않으면, 누군가의 추가적인 고발이나 항변, 폭로라도 없으면 믿기지 않는, 결코 다른 사람들로부터는 공감 받을 수 없는 그런 '세심한 비열함'과 '얇디얇은 치졸함' 같은 것. 그런 것들이 있다. 최순실의 치졸이나 비열도 그런 종류의 것이라 친박계 인사들이 지인을 옹호하려 든 나처럼 멍청하게 최순실을 옹호하려 들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최순실처럼 위악적인 인간보다 말로는 공공, 정의, 선을 외치는 위선적인 인간들의 진심을 알기란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너무나도 세심하고 얇디 얇지만 도무지 참을래야 참을 수 없는 종류의 비겁함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아마 지인을 비난했던 친구의 심정도 그랬을 것이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겹다는 느낌. 역겨움을 견디지 못했던 친구는 외로운 삶을 살아가지만, 역겨움에 겨운 그 지인은 수많은 동정표를 얻고 공정하고 따뜻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로 자기 소원대로 셀레브들 주변을 멤돌며 셀레브들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셀레브들과 잘 지내고 있다. 역겨운 지인만큼이나 역겨운 현실인데, 박근혜 주변을 멤돌며 박근혜와 친분을 과시하며 박근혜와 잘 지낸 최순실의 몰락을 보니 역겨움을 심판하게 될 일말의 가능성이 아직은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의 외로움도 보상을 받을 날이 올 것이고, 셀레브를 쫓아다니며 온갖 유명한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페친을 맺고 셀레브의 간지러운 곳을 핥아대는 지인도 심판 받을 날이 올 것이다. 
힘을 내자.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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