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느낀 분노만이 유일한 분노는 아니다>
- 폭력시위/평화시위라는 이분법에 대해
나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 연일 보도로 나오고 있다. 이 정부가 이런 일까지 했단 말인가.. 기가 막힌 일이 하나둘이 아니다. 며칠 전에도 놀라운 보도를 접했다. 청와대 유력 인사가 최순실이 자주 가는 성형외과의 중동진출을 타진해달라는 요청을 한 컨설팅 업체에 했었는데, 이 업체는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해 요청을 반려했다. 그 후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컨설팅 업체 사장이 운영하는 회사를 포함해 일가족, 친인척이 운영하는 회사 모두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았다. 서른 명도 되지 않은 회사였다고 한다. 게다가 남편은 한직으로 좌천되었고, 공사로 해외 근무 중이던 동생은 국내로 들어와야 했다. 이 업체 사장이 일을 반려한 이후 이 일을 관할했던 조원동 수석은 자리를 떠나야 했다.
청와대가 이렇게 세심하게 한 개인의 사익을 챙겨주려 노력했고, 찌질하게 권력을 이용해 시민 한 사람을 괴롭혔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나는 이 업체 사장과 일가족들이 느꼈을 분노에 대해 생각했다. 이들은 청와대가 ‘조직적’으로 한 가족을 향해 ‘전방위적’으로 압박해온다고 느낄 때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아마 국가 조직의 위세에 공포심을 느꼈겠지만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나로서는 가늠조차 하기 힘든 무게의 ‘억울함’을 느꼈을 것이다. 억울함은 분노를 낳는 가장 강력한 감정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개성공단 폐쇄가 비선에 의한 즉흥적 결정이었다는 것을 알아버린 개성공단 사업주들은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군사적 이유도, 아니 그보다 더 졸렬한 정치적 이유도 아닌 비전문가 집단이 하룻밤 사이에 두고 내린 결정 때문에 생활 터전을 잃어버린 이들은 뉴스를 보고 어떤 기분이었을까? 생업을 팽개치고 삭발까지 하게 만든, 조용한 마을을 분열시킨 주범인 사드도 비선의 결정이었고 거기에 무기상까지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의 기분은 또 어떨까? 해산된 통합진보당의 당원과 당직자들의 기분은? 헌법재판소에서의 옥신각신은 ‘연극’에 불과했고, 비선에 의해 짜여진 각본에 의해 해산되었다는 것을 듣고 그들이 느꼈을 감정은 나와 같은 것이었을까? 무엇보다 세월호 유족들은 지금 어떤 기분일까? 대통령이 7시간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렴풋이 밝혀지고 있는 마당에 비선에 의해 국정이 마비되어 버린 탓에 구조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된 유족들은 어떤 기분일까. 억울함을 느꼈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이들은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폭력시위/평화시위라는 이분법적 구도는 시위에 나온 대중들의 분노의 질과 수준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JTBC와 한겨레에 보도된 믿을 수 없는 뉴스에 느낀 허탈감과 상실감에 기초한 분노와 세월호 유족들과 개성공단 사업주들이 느끼는 억울함에 기초한 분노는 질적으로 다르다. 중요한 것은 어느 누구도 그 분노의 정당성에 대해서 말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에 의한 피해는 간접적인 경우에서부터 직접적인 경우까지 광범위한 만큼 분노의 질과 폭도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폭력시위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평화시위가 아니면 안된다는 주장을 비판하려는 것이다. ‘평! 화! 시! 위!’라는 외침, ‘평화시위가 아니라면 전략적으로 옳지 않다’는 믿음, ‘시위에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는 판단, 그런 외침, 믿음, 판단은 그저 그것이 체제 내화의 결과여서거나 폭력시위에 대한 강박증적 거부의 증상이여서가 아니라 ‘평화시위라는 미명으로’ 다양한 분노의 수준을 단선적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억울한 사람들에게 그 억울함을 견디도록, 분노한 사람에게 그 분노를 억누르게 하는 것이야말로 ‘폭력적’이다. 따라서 ‘비폭력’이 이데올로기화되면 비폭력은 전도된 폭력으로 그 사회의 가장 억울한 자를 억압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오해를 막기 위해 덧붙이자면, 나는 폭력시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시위에는 여러 종류의 분노를 가진 사람의 다양한 전선이 있어야 하고, 우리는 시위를 위해 광장에 모인 대중들이 그 과정에서 서로의 분노에 대해 공감할 기회를 얻게 된다고 믿는다. 폭력시위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시위만을 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발상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각자의 분노가 자유롭게 시위에서 표출되고, 자신의 억울함과 분노를 해결할 실마리를 관철시키기 위해 광장에서의 논의가 진행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실마리는 각자의 분노, 억울함의 감정을 존중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비폭력 평화 시위가 어쩌면 JTBC뉴스를 시청하고 분노한 사람들의 이해와 감정표출 방법만을 대변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비폭력도 전략이고 역사적으로 ‘맥락’에 따라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폭력도 전략일 수 있다. 단순한 치기와는 구분해야겠지만, 만약 세월호 유족과 성주군민들이 물리적 수단을 동원하기로 한다면 나는 말릴 마음이 전혀 없거니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다치지 않도록 동참할 것이다. 꼭 내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도 레비나스 말을 빌리자면,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일은 목숨을 건 도약이다. 지금 폭력 시위/평화 시위를 두고 벌어지는 토론은 우리가 타자에 대해 어디까지 응답할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한 과정일 수 있다.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폭력이야말로 신화적 폭력을 중지시키는 신적 폭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어느 누구도 단순한 치기로 폭력을 일삼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 저마다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철두철미 강박적 자기 검열로 “평! 화! 시! 위!”라고만 외치지 않을 것이다. 외신과 언론으로부터 칭찬받고 스스로도 자부할만한 일을 만들어보겠다는 것이 이 시위의 유일한 목표가 아니라면 말이다.
어쩌면 시위란 그 자체로 이미 폭력적인 것이다. 시위는 사회를 중지시키고, 에너지가 분출되고, 단지 모이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위협이 되기도 한다. 시위를 통해 공유지식이 형성되면 모인 사람들의 뇌 속에서 집단적 연대가 생겨나고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향하면 그것만으로 폭력이 된다. 하지만 뇌의 전기 신호 조차도 똑같은 강도로 일어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내가 느낀 분노만이 유일한 분노가 아니다. 일자리를 잃었고, 꿈을 상실했고, 가족이 다쳤고, 아이가 죽었다. 국정이 농단되었다는 기막힌 사태에 대한 분노 수준으로는 결단코 치환될 수 없는 일들. 우리는 이런 일에도 비폭력을 말할 수 있을까? 나의 억울함에 빗대는 것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억울함을 겪고 있을 이들에 대한 상상력이 있다면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햄릿에게 참으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삼촌의 만행이 드러난 이상 햄릿만이 대문자 질문 -'To be or not to be?'-에 답할 수 있다. 아버지 유령의 명령을 상속할지, 삼촌에게 복수를 할지, 아니면 죽은 듯 없는 사람처럼 살아갈지..햄릿 외에 그 결정에 대한 권리를 가진 사람은 없다. 폭력인가 평화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로 억울하게 죽고, 일자리를 뺏기고, 삶을 빼앗겨버린 이들에게 응답할 수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