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최순실'

순실한 마음으로 받은 은택

 고전적인 정의 관념은 공허하긴 하지만 정의가 무엇인지를 사유할 때 늘 전제가 된다. 고대 그리스의 사람들은 정의(dike)가 각자의 몫을 각자에게 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특권이란 각자가 얻어야 할 몫 이상의 몫을 자신의 지위와 권한, 누군가와의 관계를 이용해 취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지위, 권한, 관계를 이용하는 것이 '의식적인 경우'에만 특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부지불식 간에, 아무런 의식 없이 '이 정도는 괜찮겠지', '사소한 것에 불과한 것이지'라며 '자기 몫 이상의 몫을 자기의 몫'으로 생각하는 모든 행위와 태도가 '특권'에 해당하는 것이다. 게다가 자기 몫 이상의 몫이 공공의 것일 경우에 '특권'은 공공에 대한 위협으로, 공화국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게 된다.

 그렇게 보자면, 동향 사람이라고 박근혜를 뽑았고, 같은 대학 출신이라고 후배를 승진시키는 것, 친분이 있는 관계라면 비판/비평을 주저하게 되는 것이나 병원에서 내 아이를 받아준 의사라고 좋은 자리에 임명하고, 아버지 어머니 잃고 힘들 때 함께 있어준 사람이라 국정까지 관할하게 하는 것은 양적인 차이라면 몰라도 질적인 차이는 조금도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 특권을 욕망하는 태도다. 과연 나라면, 만약 내가 정치인이라면, 내가 정치인이라는 이유로 자동차 할부 이자를 0.3% 깎아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할 수 있었을 것인가? 나는 나와 친분이 있는 작가, 선생님들을 향해 비판하는 글을 쓴 적이 있는가? 내게 그럴 용기가 없었다는 것은 나 역시 '부지불식' 간에 박근혜와 아는 사이였고, 차은택 혹은 정유라와 아는 사이였다면 내 몫보다 더 많은 몫을 주겠다는 제안을 내 몫으로 생각하고 수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박근혜와 아는 사이라니 생각만 해도 근사하지 않은가? 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학벌주의, 연고주의, 지역주의, 친분주의처럼 무슨 '주의'라는 말을 붙이기 전에 우리 사회에서는 사적 관계를 우선시하는 것은 하나의 마음의 습속 같은 것이라서 우리는 모두 조금은 '최순실적'이고 '박근혜적'이다. 특히 대구 경북에서 박근혜를 지지했던 많은 이들은 '불쌍한 공주에 대한 동정'으로 포장된 사이비 윤리 속에 '우리가 남이가' 식의 특권적 이해관계를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물론 내가 우리 모두가 최순실이고 특권을 욕망하는 자들이니까 최순실, 박근혜, 차은택에게 면죄부를 줘야 한다는 값싼 대속 논리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유야무야 특권을 향유하고, 특권을 향유하길 바라는 사실상 '공화국의 적대자'라는 불편한 진실을 직시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치 왕처럼 지위와 권한, 관계를 이용해 내 몫을 넘어서는 몫까지 자신의 몫으로 취하려는 태도와 의식이 공공의 것을 사유화시키고 공동체를 근본적으로 침식시킨다.


  프리모 레비는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수용소의 포로들 중 작은 특권을 누리던 자들을 '회색지대'에 있던 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죽 0.5리터를 더 얻기 위해 같은 포로들을 배신하고, 조금 더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나치에 협력했다. 그것은 포로들 사이의 협력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고, 적대의 선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수용소에서까지,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 자명했던 수용소에서조차 특권을 쫓는 자가 있었다는 것은 작은 특권에 도취되는 것이 인간성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런 인간성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작은 특권에 대해서조차도 두려워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단두대는 공화국을 세우는 효과적인 전략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길로틴 떨어지는 소리가 '부지불식' 간에 내 몫을 넘어서는 몫을 내 것으로 취하는 것의 결과가 무엇이었는지 상기시켰을 것 아닌가.




철학자 김영민 선생이 <동무론>에서 서늘한 관계를 우정으로 형상화했던 것이 떠오른다. 차갑지도, 그렇다고 뜨겁지도 않은 기분 좋은 서늘한 관계를 만드는 데 미숙한 우리의 태도가 지금의 사태를 만든 것이다. 공동체, 공화국을 사유하는 근본적인 의식의 변화가 없다면, 아니 의식의 변화를 불러올 대전환이 없다면 제2의 차은택, 제2의 최순실, 제2의 박근혜, 제2의 그 성형외과, 제2의 산부인과는 얼마든지 있다. '순실한 마음으로 권력자와 사귀어 은택을 입은 것'이라 우겼다고 하더라도, 그 순실한 마음, 순실하게 베풀어준 은택 속에서 조용히 사회는 침식되는 것이다.

 고등학교 적 일이 하나 떠오른다. 학생회장으로 일할 때다. 성탄절을 기념해 불우이웃돕기를 위한 모금을 해달라는 학생과장 선생의 요청에 따라 캠페인을 했고, IMF 로 모두가 힘든 시기에 저마다 십시일반 500원, 1000원을 꺼내 놓았다. 그렇게 전교생을 통해 거둔 돈이 50만원 정도가 되었고 예년보다 많은 금액에 학생회 간부들은 성공적이라 환호했다. 그 돈을 학생과장과 2학년이던 후배 부학생회장을 데리고 교장선생님께 전달하러 갔다. 당시 교장선생님은 내가 다녔던 중학교의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아버지셨고, 아버지 사업 부도로 내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돈을 들고 들어가자 교장은 내게 "네가 가져라"고 했다. 당황했지만 그 때 나는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 돈을 들고 나왔다. 절대 나는 미르재단이나 K스포츠재단처럼 내가 그 돈을 먹으려고 한 사업이 아니었다. 순실한 마음으로 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조금도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러니까 내가 학생회장이고, 교장과 내가 아는 사람이기에 이 돈을 내가 받게 된 것은 아닐까, 내가 지금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 말이다. 나는 아마도 우리 학교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 중 하나였고, 그렇기에 심지어 내가 받을 권리까지 있다고도 생각했다. 물론 내가 그 돈을 받았다는 것을 그 자리에 있었던 몇 사람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불우이웃돕기로 학생회가 모금한 돈은 학생회장이 가졌다는 것, 어쩌면 그 일이 내가 특권에 길들여지게 된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은 시간이 오래 지나 용서받을 수 있다는 교묘한 마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인할 수 없이, 나 역시 내가 그동안 누리고 있었던 많은 것이 권한을 가진 자의 은택을 순실한 마음으로 받은 것이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이번 사태가 있고 나서야 뒤늦게 솔직하게 되돌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 뿐 아니라 우리는 모두 특권에 길들여지게 된 개인적 역사를 마음 속에 숨겨두고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지역, 학교, 친분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이뤄지지 일들이 이뤄지지 않고, 그런 관계를 넘어서 혼자 뭔가를 이룩해내겠다는 것은 무모한 것으로만 취급되기 때문이다. 유행이던 해외 학부 유학이 인기가 없어진 이유가 해외대학의 수준이 낮아져서인가? 대학 수준보다 더 중요한 학벌 때문이지 않은가?

 부디 바라건대 이 사태가 순실한 마음으로 은택을 받는 행위, 그런 은택을 바라는 모든 태도가 공동체에 대한 부인할 수 없이 중대한 범죄이며, 더 나아가 김영란법의 경제적 손실 운운하기 전에, 특권을 욕망하고, 향유하고, 확장시키는 것에 무디고 무딘 마음을 예민하게 만드는 마음의 혁신으로 이어져 김영란 법의 내실을 온전하게 만드는 것이었으면 한다. 박근혜 하나 하야로 끝날 일이 아니다. 특권을 가진 자들의 착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줄 기회가 되어야 한다. 라거의 회색지대에 있었던 자들의 종말은 결국 '죽음'이었다. 단두대는 한번으로 충분하다. 역사에서 교훈을 찾는 명예로운 혁명이 되길, 아둔한 자가 많지 않길 빌 뿐이다.

- 이 글은 본색 소사이어티 영화제 '씨네 노마드 2016' 뒷풀이에서 이야기했던 내용으로 이정기씨의 요청으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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