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의 끝없는 욕망 - 터닝메카드


 나들이 길에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렀다. 휴게소의 잡화점에서 변신 자동차 장난감을 팔고 있었다. 아이가 갖고 싶다고 이야기하던 TV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장난감이었다. 가격은 3만 4천원. 터무니 없이 비쌌다. 대형마트에서 파는 가격의 정확히 두 배였다. 점원은 요즘 인기가 좋아서 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비싼 가격 때문에 주저하고 있는 우리 일행을 보며 아이에게 말했다. “이건 할아버지가 능력이 있어야 사줄 수 있는거야”.


 점원은 아이의 할아버지의 자존심과 아이에 대한 사랑을 ‘바가지’ 가격으로 시험하려 했던 걸까? 아무리 인기있는 장난감이라고 하더라도, 우동 한 그릇도 비싼 고속도로 휴게소라 해도 두 배는 지나쳤다. 곧 아이보다 3살 정도 많아 보이는 남자 아이가 가게로 들어왔다. 그 아이 손에는 가게에서 팔고 있는 것과 똑같은 장난감이 들려 있었다. 아이는 자기 것과 요리조리 비교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줌마, 이거 중국산 짝퉁이죠?”. 점원은 아니라고 손사레를 쳤지만 아이도 밀리지 않았다. 자기 손에 든 장난감 자동차를 앞으로 내 보이며 “내 것과 다른데요. 나는 마트에서 샀는데..”. 그러고 보니 거기서 팔고 있는 장난감 자동차는 뭔가 조잡해 보였다. 품절 현상이 극심한 제품이라 중국산 가짜 물건도 있다는 뉴스를 본 적도 있었는데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가게에서 나와 차에 돌아온 후 아이는 한참을 울었다. 아이는 울면서 할아버지와 아빠가 장난감 하나 사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원망하지는 않았을까?


 아이에게도 그 장난감이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그렇게 사다 모은 게 열 개나 있다. 나와 내 파트너가 이 장난감을 열 개나 사다줬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자괴감이 생기지만 다른 아이들의 사정도 다를 바 없다. 오히려 아이 또래의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10개 정도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TV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변신자동차 장난감이 전부 상품으로 출시되어 있기 때문에 대략 종류만 30종 이상에, 같은 종이라도 여러 색깔로 출시되어 있어 전체 시리즈는 100종이 넘는다. 아이에게 100종 모두를 사주는 부모야 있을리 없겠지만, 놀랍게도 100종을 모두 사준다고 해도 아이가 만족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왜냐하면 장난감 자동차 박스 안에는 카드 세 장이 랜덤으로 들어 있는데 어떤 아이들은 이 카드를 모으기 위해 같은 종류, 같은 색깔의 제품을 또 사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새로 산 제품 안에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카드가 들어 있다는 보장도 없다. 한 마디로 이 장난감은 아이들에게 ‘끝없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도박에 빠지는 사람들처럼 아이들은 이 변신 자동차 30종을 모으면 다시 색깔별로 모으고, 색깔별로 모으면 다시 카드를 모으는 것이다.


 요즘은 TV 방송에 나오는 애니메이션을 방송국이 아니라 처음부터 장난감 제조사에서 제작하고 캐릭터 상품을 만든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아동용 프로그램이 교육적 가치가 있는지, 예술적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지는 부차적인 문제가 되었다. 단지 아이들의 소비 욕구를 자극할 수 있는가가 중요할 뿐이다. 그 때문일까? 이 장난감 제조사는 지난해 사상 최대 이익을 거뒀다고 하며 언론에서는 성공 마케팅이라고 칭찬한다. 하지만 부모들이 모여 있는 인터넷 카페에는 원성이 자자하다. ‘종류가 너무 많아서 부담된다’, ‘애니메이션의 질이 지나치게 낮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중에서 ‘너무 쉽게 부숴진다’는 불만이 가장 많다. 비싼 만큼 제발 제대로라도 만들어 달라고. 내 아이가 가진 4대의 변신자동차도 더 이상 변신이 되지 않는다.


 곧 ‘시즌2’가 방송된다고 한다. 보여주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사정을 모르는 소리다. 아예 보여주지 않아도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빠짐 없이 배워온다. 시즌2가 시작되면 새로운 장난감 시리즈가 나올까봐, 아이와 장난감 가게에서 씨름하게 될까봐, 부숴져서 우는 아이 달래러 또 울며 겨자먹기로 사오게 될까봐 두렵기만 하다. 그러는 사이에 내 아이는 소비의 노예가 된 ‘자본주의 키드’로 자라난다. 온 사회가 한 마음으로 키운 자본주의 키드로 말이다.


터닝메카드 시즌 2 방영에 반대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사람, 장소, 환대 현대의 지성 159
김현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덧붙임.

 

교통방송에서 스물한번째로 소개한 책은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이다. 이 책은 사람이란 하나의 자격이며, 사람 자격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사회로 들어가기 위한 인정투쟁을 하고 있고, 그들에게 장소를 내어주는 절대적 환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다. 여러 논증들이 다채롭게 엮여 단번에 그 전모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 책 읽기는 내게 세 가지 의미에서 특별한 경험이었다.

 

첫째는, 그동안 내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써왔던 주제, 예를 들면 명함의 현상학, 직업의 지배, 겸손의 현상학으로 썼던 글이 이 책의 주제의식에 의해 거의 대부분 포괄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명함과 직업은 이 책의 주제에 비춰보면, 사람 자격을 상징하는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나 자신이 하나의 유령처럼 여기 있으면서도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유를 나는 거기에서 찾았다. 겸손의 현상학이라는 주제 역시 이 책의 주제에서 비춰보면 상호작용 의례라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상호작용 의례상에서 겸손인 것이 사회 구조적으로는 비겁이 될 수 있고, 겸손은 이 책의 '모욕의 의미'를 다루는 장에서 보듯이 누군가에게는 굴욕을 안겨 줄 수 있다.  

 

둘째는, 본색소사이어티에서 진행했던 '이단의 목소리'의 문제의식과 이 책의 주제는 거의 유사하다. 우리는 이단을 사회로부터 정당성을 얻기 위해 투쟁하는 자들이라 규정하고, 이들을 사회로부터 추방당한 자로 이름했는데 이 책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가 말하는 '이단'은 인간이지 사람은 아니다. 책에 나오는 인정투쟁에 대한 내용도 이단의 정당성 투쟁과 매우 유사하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사람됨'의 문제로까지 인식하지 않았지만 이 책은 그러하다는 것, 이 책에서 개인의 차원에 집중하는 것과는 달리 운동의 차원에서 접근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단들의 정당성 투쟁에 집중한 나머지 사회의 역할을 규명하지 못했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 이 책은 공공성을 그 답으로 제시한다. 공공성은 환대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셋째는, 대단히 성실한 책이라는 것이다.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 자체는 이렇듯 이단과 정체성의 문제,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비교적 유행하는 흔한 주장일 수 있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 엄밀하고 정직하다. 좋은 지적 결과물은 성실한 지적 훈련에서만 나온다는 것을 보여준 책이다. 주변에서 이뤄지는 사소한 사고를 사건으로 다루는 작가의 솜씨는 그럴싸한 직관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다. 나의 게으름에 대해서도 반성하게 된다.   

 

 

<이단의 목소리>를 시작하며.

에드워드 사이드는 사람들이 추방된다는 것의 의미를 완전한 단절, 고립, 절망적 분리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한다. 추방이 그런 완벽한 외과적 수술과 같은 것이라면 차라리 상황은 나았을 것이다. 오히려 추방 당한 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그런 고립과 분리이기 보다, "당신이 추방 상태에 있고, 당신의 집이 사실상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현 생활에서의 정상적인 왕래가 옛 거처와 끊임 없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그것이 감질나고 충족되지 못한 접촉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케 하는 것들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완전히 벗어난 것도 아니고 완전히 속한 것도 아닌 그 '어정쩡한 상태' 말이다.

 

우리는 이 어정쩡한 상태에 놓인 자들을, 많은 개념상의 오해에도 불구하고, "이단"으로 부르고자 한다. 사회적 정당성을 어느 순간에 상실해 버린 이들은 사실상 사회로부터부터 '정죄되었고', '추방된 것'과 마찬가지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지적대로 추방의 고통이 그 '어정쩡함'에 있다면 사회와 일상적으로 만나고 교섭하면서도 사회와 진정으로 만나는데는 수많은 오해와 불신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은 소위 이단으로 불리는 자들이 겪는 어려움과 일치한다. 한 사회 내에 함께 현존하지만 연대에서는 배제된 자들. 바로 이단들이다.

 

철학본색과 대구경북학술공동체인 비상구에서는 소위 '이단'에 놓여 있는 자들과 몇 차례 만나는 자리를 만들고자 한다. 사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자들, 그래서 어정쩡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자들의 목소리.앞으로 몇 달 간 연속, 불연속적으로 진보정당 관계자, 양심적 병역거부자, 성소수자 등등 여러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분명하게 하고 싶은 한 가지는 우리가 그들을 '이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단은 사회적 정당성이 상실된 상태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것, 즉 사회가 그렇다고 규정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단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거나, 사회와의 손쉬운 화해나 조화를 꿈꾸지 않는 자들이다. 그래서 <이단의 목소리>는 이들이 어째서 그런 방식으로 살기로 했는지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고, 그들과의 연대 가능성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이단의 목소리>는 이들을 편들고 위로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것은 이들을 '적대적으로 여기는 것' 만큼이나 '대상화'하거나 '타자화' 시킬 위험이 있다. 동등한 시민으로, 그들의 입이 '말하는 입'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장이 되도록 하는 것에, '이단'이기 이전에 '목소리'를 지닌 인간으로서 그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되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2014.4.8 본색소사이어티 권영민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1.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오늘 제가 소개해드릴 책은 출판사 문학과 지성사에서 만들고, 김현경이 쓴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이제 출간된지 딱 1년이 되었는데요, 출간 이후 이 책은 하나의 '사건'이라고까지 호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책의 제목처럼 <사람, 장소, 환대>라는 세가지 개념을 중심으로 “사람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답을 찾아보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사람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어떻게 보면 단순하지만 아주 철학적인 질문이라 어렵게도 느껴지는데요. 저자가 생각하는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요?

 

지난 3월 26일이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이 있었던지 25년이 되었던 해였는데요, 프랑스 민법에서는 사람이 아무 연락 없이 그의 집이나 거처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때 실종을 선고하는데, 이 때부터 실종추정기간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실종추정기간은 실종자가 귀가하거나, 죽었다는 증거가 나타나거나, 실종 선고로부터 10년이 흐르면 종료되는데요, 만약 실종자가 실제로 어딘가에 살아있다고 해도 10년이 지나면 죽었다고 여겨지게 됩니다.

 

3.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살아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겠네요.

 

그렇죠? 그래서 저자는 사람과 인간을 구분합니다. 그러니까 이 책의 저자인 김현경 선생에 따르면 어떤 존재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 안으로 들어오지 않아도 인간입니다. 실종자라는 것은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사회 속에서 확인되고 있지 않아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는 거지요. 즉 사람이라는 것은 그냥 태어나서 살아간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일종의 자격이고 누군가 그 존재를 사람으로 인정해줄 때만 사람이 되는 거죠. 또 다른 예로, 태아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직 자궁에 있는 태아는 분명히 인간이지만 사람은 아닙니다. 법적으로 일단 출생한 신생아를 죽이는 것은 살인죄가 인정되지만 태아를 죽이는 행위는 살인죄가 아닙니다.

 

이 뿐만 아니라 전통 사회에서는 출생했다고 모두 사람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었다고 해요. 지금은 출생과 동시에 아기는 사람으로 인정되지만 과거에는 아기가 출생하더라도 백일잔치를 거치면 사람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만약 백일 전에 죽으면 태아가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장례도 치르지 않고 매장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점을 보면 인간이라고 해서 모두가 사람인 것은 아닌 거죠. 그런데 오해하지 말아야 마셔야 할 것이 있는데요, 이 책에서 사람과 인간을 구분한다고 해서 태아는 인간이니까 낙태해도 된다는 식의 주장을 이 책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로부터의 통과의례라던가 어떤 인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거죠.

 

4. 사람과 인간은 다른 이유는 사회로부터 사람으로 인정 받았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와 관련이 되어 있는 거라고 할 수 있는 거군요. 저도 예전에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어르신들은 예전에 백일이 되어서야 아기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는 하셨다고 하더라구요. 그것도 백일 이후에 사람이 되었다는 것과 관련이 되어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이 책에서는 노예의 사례도 나오는데요, 노예에게는 온전한 이름이 없다고 합니다. 심지어 로마법에서는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으로 규정했다고 해요. 그리고 “노예는 태아와 같다”는 격언도 있었다고 합니다. 노예가 살아있지만 사회적으로는 죽었고, 사회 밖으로 쫓겨나 있고, 실종자 같은 존재라는 거죠. 그래서 저자는 사람이라는 것은 사회로부터 사람임을 인정 받을 때 얻어지는 하나의 자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트롤로프의 <미국인의 가정예절>이라는 책에서는 흑인 남자 노예 앞에서 태연히 코르셋을 졸라매는 숙녀나, 밤중에 깼을 때 목이 마를까봐 부부 침실 한구석에 여자 노예를 재우기도 했다고 해요. 이 경우 이들은 노예들이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같은 공간에 있는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격으로 대우하지 않는 거죠.

 

5. 아, 그렇게까지나요?

 

충격적이죠? 이 책에는 이처럼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 자들을 상징하는 존재로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소개합니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샤미소의 소설인데요, 어떤 한 사나이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거절하기 힘든 거래를 제안합니다. “다름 아니라 조금 전 정원을 거닐 때 햇빛 아래 펼쳐진 당신의 멋진 그림자를 보았노라고, 그 그림자가 몹시 마음에 드는데 자기에게 그걸 주는 대가로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이 사나이는 어떻게 했을까요? 진행자님은 어떻게 하셨을 것 같으세요? (대답) 이 사나이는 그림자를 주고 그 대가로 금을 무한하게 만들어내는 ‘행운의 자루’를 얻게 됩니다. 엄청난 부를 가지게 되었으니 너무 좋았을 것 같은데요, 이 사나이는 예상하지 못한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더 이상 낮 동안에 길거리를 걸을 수 없게 된 거에요. 사람들이 그림자가 없다고 이 사나이에게 손가락질을 하는거죠. 그림자라는 것은 그렇게 큰 용도도 없고, 금을 만들어내는 행운의 자루처럼 부를 가져다 주지도 않는데, 사람들은 이 남자가 그림자가 없다고 배척합니다. 심지어 결혼까지 좌절되고 맙니다.

 

6. 언뜻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가 연상이 되는데요, 그림자는 그 사나이의 영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책 <사람, 환대, 장소>는 이 사나이에게서 ‘그림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찾아가는 내용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책의 저자는요, 그림자가 의미하는 것은 영혼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림자는 영혼처럼 고상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아주 세속적이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해요. 그림자가 없어서 결혼도 못하고, 그림자가 없어서 길거리도 못 다니니까요. 사람들은 그림자가 없는 이 사내를 더럽고 역겨운 것을 볼 때처럼 멀리합니다. 그래서 이 남자는 하루 종일 집에 틀어 박혀 있는거죠. 그러니까 이 사나이는 인간이기는 했지만, 그림자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으로 인정 받지 못했던 거에요. 그러면 이 이야기에서 ‘그림자’는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자가 없기 때문에 사람으로 인정 받지 못했다면 그림자가 있다면 사람 자격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니까요.

 

7. 그러면 사람이 사람으로 인정 받기 위해서는 그림자가 필요한 것인데, 그림자가 영혼도 아니고 돈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사실 돈이 많다고 해서 사람임을 꼭 인정 받게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많은 경우에서 볼 수 있는데요, 예를 들면 유명한 축구 선수가 중요한 국가 대표 경기에서 계속 헛발질을 하고, 그 때문에 우리나라 국가 대표팀이 결국 패하게 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 경우 운동선수가 유명한 사람이니까 돈은 많겠지만 그 선수가 살고 있는 동네의 헬스장이나 커피샾에 가는 것은 굉장히 부담스러울 거에요. 돈과 권력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이 경우처럼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꺼려지는데, 그것은 역시 그림자를 판 사나이처럼 손가락질을 받고 배척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거든요. 그러니까 모욕을 당할까봐 두려운 겁니다.

 

그리고 법이 권리를 보장해준다고 해도 항상 사람으로 인정 받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우리나라 법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고 선언하죠. 잘 살거나 못 살거나, 배웠거나 못 배웠거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고는 하는데요, 현실에서는 꼭 그렇지 않습니다. 예고 없이 실직을 당했다거나, 일한 대가가 터무니 없이 적을 때, 아무리 절약해도 반지하 셋방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자신이 사회로부터 배척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누군가가 일부러 모욕감을 준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다는 굴욕감을 느끼는 거죠.

 

그래서 저자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림자를 갖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사람으로 인지되는 것은 그림자로 인지되는 것이라고 해요. 그림자는 조금씩 크기가 다르지만 다 비슷하잖아요? 몸과 달리 색깔과 표정이 없고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죽으면서 함께 사라지는 거죠. 어떤 사람이 돈이 많든 없든, 많이 배웠든 못 배웠든 사람들의 인격이나 개성과 상관 없이 같은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환대해주고 있을 수 있는 장소를 허락해줘야 한다고 이 책은 말합니다. 결국 그림자는 우리의 몸이 있는 자리를 표시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죠. 앞에서 말씀 드린 축구 선수의 경우도 사회가 그 사람을 유명한 국가대표 축가선수로 인지해서는 그 선수를 사람으로 인정하고 환대해줄 수 없는 거죠. 유명한 국가대표 선수든, 장애가 있든, 못 배웠든, 가난하든 간에 누구에게라도 사회에 자리를 내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8. 현실에서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못 배웠다는 이유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너무 많은 차별이 있는 것 같아요.

 

얼마 전 뉴스에서 집은 원룸 월세에 살면서 고급 수입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는데요, 그 뉴스를 본 대부분의 반응은 ‘생각이 없다’, ‘철이 없다’, ‘겉멋만 들었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집이 없거나, 벤츠나 BMW와 같은 고급차를 타지 않으면 사람 대접 해주지 않는 사회에서 수입차를 사는 편이 집 값 보다는 훨씬 더 싸게 먹힙니다.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든 힘을 기울여 사회에 들어오기 위해 인정투쟁을 하는데, 정작 우리 사회는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는 일에 너무 게으른 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9. 마지막으로 우리 청취자에게 이 책을 추천해주시는 이유를 정리해주시죠.

 

사실 저 자신이 모든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환대해주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좋은 사회는 누구에게라도 각자의 자리를 만들어주는 환대해주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저마다에게 각자의 자리를 허락해줄 때 사람들 간에 우정이 생겨 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를 한번 생각해 보시면 우정이 없는 사회입니다. 사람들이 일상적인 모욕과 굴욕감에 시달립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종업원이 쭈그리고 앉아서 주문을 받게 합니다. 백화점 영업이 시작되는 시간에 직원들이 입구에 늘어서서 ‘어서 오세요 고객님 사랑합니다’ 와 같은 별로 의미도 없는 말을 한참동안 복창하게 합니다. 계산원이나 조립라인 작업원처럼 한 곳에 장시간 서 있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성인용 기저귀를 차고 근무하게 합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는 사회인거죠. 평등하다고 하지만 사람들에게 이런 굴욕감을 주는 사회에서는 우정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우정 대신 끝없는 경쟁과 그로 인한 경멸이 생기는 거죠. 그건 요즘 학교 폭력을 보면 분명히 드러납니다. 예전에는 ‘일진’이 가난하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었는데요, 지금은 아닙니다. 교실 내에서의 위계는 사회 내에서의 위계와 비슷합니다. 가진 게 많은 아이들, 공부 잘하는 아이, 운동 잘하는 아이가 꼭대기에 있고, 집이 가난하거나 특정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은 밑바닥에 있습니다. 위에 있는 아이들이 아래에 있는 아이들을 괴롭히는 거죠. 아이들조차 서로의 자리를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정도 희박해졌습니다.

 

이 책은 대단히 좋은, 제가 근래 읽은 책 중에 가장 좋은 책이라 강력히 추천드립니다. 하지만 읽기 쉬운 책은 아닙니다. 하지만 한 절 한 절 힘들게 따라 읽어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시며 뇌도 단련해 보시고, 모욕주고 모욕당하는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도 고민하시는 기회가 되시길 바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꿈들
박기범 지음, 김종숙 그림 / 낮은산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덧붙임.

 

<그 꿈들>.
이 책은 내용도 아름답지만 무엇보다 두 분 작가의 삶이 놀랍다. 책에 소개된 작가 소개를 그대로 옮겨 본다. 그림을 그린 김종숙 작가, 이야기를 만든 박기범 작가에 대한 소개.

 

 

박기범.
동화 쓰는 사람. 이천삼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시작할 무렵, 그곳 아이들의 곁이 되고자 인간방패, 평화지킴이로 전쟁터로 들어가 그 전쟁을 함께 겪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로 그곳에서 인연을 맺은 이들과 우정을 나누며 평화를 바라는 일들로 지내었으나, 내전으로 치닫는 상황에 하나둘 소식마저 멀어졌다. 세상에 대한 무력감은 글을 쓰는 일에 대한 자괴감으로 이어졌고, 이천칠년, 한옥 짓는 일을 배우는 목수학교에 들어갔다. 이천십이년, 숭례문 복원공사와 석가탑 해체보수공사 같은 곳에 잡부로 들어가 맨 밑에서 일들을 배운 뒤, 지금은 문화재보수기술자가 되어 일을 하고 있다.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글과그림」 동인...으로 『문제아』, 『미친개』 같은 동화를 썼다.

 

김종숙.
그림 그리는 사람.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림 그리는 것으로 진정의 끝에 닿고자 하며, 붓을 잡으면 고통스러운 대결을 놓지 못한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눈물겨운 것,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그 극한의 칼날 위를 걸어야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는. 그러하기에 그의 작업을 지켜보는 일은 조마조마하기만 하다. 당신의 붓질 하나하나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를 알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살라 버릴 것만 같은, 몸속 식지 않는 불덩이. 그러나 그 작고 가녀린 몸으로 오징어 덕장에서는 다른 이보다 곱절의 일을 씩씩하게 해내며, 식당 설거지도 마다하지 않고 즐겁게 해 오고 있다. 1965년 속초에서 태어났고, 「글과그림」 동인으로 『미친개』에 그림을 그렸다.

 

두 분 모두 직업과 생업 사이의 거리를 지닌 분들이라는 점이 우선 감동이 된다. 인터뷰에서 박기범 작가는 세상의 조화를 깨고 싶지 않아 목수가 되었고, 문화재 복원일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http://www.aladin.co.kr/author/wauthor_interview.aspx?AuthorSearch=@63071 

 

 

이렇듯 동화작가가 된다는 것은 그냥 작가가 되는 것과는 조금 더 고단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동화작가는 한편의 동화를 개연성있게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을 넘어 삶 전체가 고스란히 자신이 그려낸 동화 속 세계에 바쳐지길 요구 받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 헌신과 열정이 이 책의 그림과 글에서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책을 보고(읽는 것이 아닌), 또 작가의 삶을 보고 나는 어떤 세계에 바쳐진 삶인가 생각하게 된다. 하느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데, 두 작가의 삶에 비하자면 나는 돈을 예배하며 매일 같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가.. 책에 나온 이야기처럼 공감도, 고통도, 애원도 숫자에는 들어있지 않다. 숫자의 편리함은 공감의 고통과 번거로움을 줄여준다. 그림책 한 장 한 장을 넘기면서 숫자란 그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돈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호기있게 외쳤던 10살 때의 감각이 되살아 남을 느꼈다.

 

 

그 꿈들

    

 

1.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이번 주는 특이한 책을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혹시 진행자님께서는 최근에 그림책을 읽어본 적 있으세요?

 

2. 아이들이 보는 그림책이라면 자주 읽어주지요.

 

네, 저도 아직 아이가 어려서 그림책을 자주 읽어주는 편입니다만, 그래서인지 그림책이라는 것은 어린이들을 위한 책이라고만 생각해왔는데요, 아마 많은 분들이 저처럼 생각하실 겁니다. 하지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사실 서점에는 성인들을 위한 그림책도 많이 있는데요, 오늘은 특별하게 그림책 한권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출판사 낮은산에서 만들고, 박기범이 쓰고 김종숙이 그린 <그 꿈들>이라는 책입니다.

 

3. 성인을 위한 그림책이라고 하시니까, 언뜻 생각하기로는 만화책도 떠오르구요, 미술에 관한 책인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어떤 책인가요?

 

네, 제가 오늘 소개해드릴 <그 꿈들>이라는 책을 처음 만나게 된 계기부터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저는 이 책을 제주도에 있는 그림책 갤러리 제라진이라는 곳에 방문했다가 소개 받게 되었습니다. 제라진 갤러리는 미술작품을 판매하는 상업 갤러리는 아니구요, 그림책미술관 시민모임이라는 곳에서 운영하는 그림책 문화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제라진갤러리를 방문했을 때는 오늘 소개해드리는 책인 <그 꿈들>에 그려져 있는 김종숙 화가의 원화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는데요, 잘 아시겠지만 사실 앤소니 브라운이나 로즈메리 웰스와 같은 아이들 그림책은 너무 아름다고 예술성도 뛰어나잖아요? 제라진갤러리는 그래서 이렇게 좋은 그림책에 실려있는 원화를 전시하고, 그림책을 읽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가해 그림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림책 독서회를 진행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림책미술관 시민모임에서 읽는 그림책은 단지 어린이들을 위한 책은 아니구요, 어린이들도 읽기에는 별로 무리가 없긴 하지만 내용과 그림이 그보다는 좀더 복잡한 성인들이 읽는 그림책이라 할 수 있어요. 제라진 갤러리에서는 이 밖에도 그림책 창작 워크샵도 진행하구요, 드로잉 수업도 하구요, 작가를 모시고 북콘서트도 진행하기도 합니다.

 

4. 그림책을 읽고 독서모임을 하는 것을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왠지 그림책이라니까 참여하는데 부담이 적을 것 같아서 좋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저도 사실 제라진 갤러리에 방문해 그림책미술관 시민모임이라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그림책 독서모임이라는 것은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요, 제라진 갤러리에 계신 분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정말 괜찮은 모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일단 그림책이면 큰 부담이 되지 않으니까 독서회에 와서 누구라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고전이나 어려운 책을 읽는 모임도 도움이 많이 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지적으로 더 훈련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면 모임에 나와서 자유롭게 생각을 나누기에는 한계가 많잖아요? 하지만 그림책은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읽는 것에는 부담이 적지만 책의 그림을 보거나 글을 읽고 느끼는 점은 사람마다 다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이제 일곱 살인 제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줄 때도 새롭게 깨닫는 점이 많은데요, 저는 아이가 그림책에 나오는 이야기와 정보를 이해했는지에 집중하는 반면 아이는 이야기보다는 그림에 훨씬 더 관심이 많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엉망진창 흙>이라는 그림책을 읽어준 적이 있는데요, 저는 흙의 종류가 10만가지가 넘고, 가로세로 1미터 크기의 땅에 300만마리가 넘는 생물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아이가 알게 되는 것이 더가치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는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흙에 대해 설명해주는 두더지 옆에 조그맣게 그려진 개구리를 찾느라고 책을 읽어줘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거죠. 하지만 아이는 아빠가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을 배웁니다. 장난스럽게 그려진 개구리를 찾으면서 개구리는 흙에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흙이 점점 없어지면 더 이상 개구리도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말이죠. 아이와의 그림책 읽기에서도 어른인 제가 보지 못했던 것을 새롭게 보게 되는데요, 이처럼 그림책은 단순해 보여도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책에 실려 있는 그림을 하나 하나 살펴보며 의미를 파악하고, 감상하기 위해서는 보통의 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더 시간이 많이 걸리고 복잡하다고도 할 수 있죠. 오늘 소개해드리는 <그 꿈들>이라는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5. 아, 그렇네요. 그림책에 실려 있는 그림들은 이해를 돕기 위한 단지 참조그림이나 일러스트가 아니라 그것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니까 그 의미를 읽어가는 것이 만만치 않겠네요.

 

네, <그 꿈들>이라는 이 책에 실려 있는 삽화들도 말씀하신 대로 이야기를 돕기 위한 참조그림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 하나의 작품이라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마치 너무 좋은 작품이 많이 전시된 미술관에서는 이 작품을 보다가 저 작품으로 가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죠. 오늘 소개해드리는 <그 꿈들>은 이라크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두꺼운 그림책입니다. 이 책에서는 전쟁에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 그러니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와 언론의 왜곡에 가려져 잘 들리지 않는 소박하고 힘이 없는 개인들의 삶과 꿈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책의 한 부분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저 멀리, 텔레비전과 신문으로만 소식을 듣는 사람들은 더는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슬픈 마음에 깊이 젖어들지 못했습니다.

-어제 하루에만 백 명도 넘게 죽었다는군.

-시장 한가운데다 로켓포를 쏘았다나 봐요.

-어쩌자고 죄 없는 사람들까지 다 죽게 하는지.

-어차피 이럴 거면 한 번에 다 쏟아 부어야 해. (중략)

 

어느 날은 백 명이었고, 어느 날은 백오십 명이라 했습니다.

어느 날은 공원에서 폭발이 일어났다고 했고, 또 어느 날은 예배당 건물에 포탄이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뉴스에서는 거기까지만 말해 줄 뿐,

죽거나 다치게 된 이들이 간직한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스러져 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

묻혀 버린 한 사람 한 사람의 어젯밤 이야기,

숨이 막힌 한 사람 한 사람의 사랑,

저물어 버린 한 사람 한 사람의 꿈.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것들.

하지만 전쟁을 벌이는 이들은 그 아름다운 것들을 아주 없는 것처럼 무시했습니다.

오로지 사망자 숫자만 헤아릴 뿐. 먼 곳의 사람들은 그 숫자에 무덤덤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번 그 오누이가 나눈 이야기도, 그 노인의 얼굴에 깊게 팬 주름도,

아이를 들쳐 업고 뛰던 아버지의 숨소리도 그 숫자로는 알 수 없었습니다.”.

    

 

6. 숫자에는 영혼이 없죠. 수백명이 죽었다는 것은 수백개의 삶과 꿈이 사라졌다는 것인데, 뉴스를 통해 사라져간 삶과 꿈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기란 어려우니까요.

 

그렇습니다. 이 책을 쓴 박기범 작가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시작될 무렵, 그곳 아이들의 곁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인간방패로 전쟁터에 들어가 함께 전쟁을 겪었다고 합니다. 인간방패가 되었다는 것은 미국의 이라크 전쟁의 명분에 동의하느냐 못하느냐, 그러니까 이라크 독재자인 후세인 편이냐 미국 편이냐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라크인들도 독재자의 지배가 옳지 않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인데요, 박기범 작가는 독재보다도 어떤 명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쟁이 더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직접 전쟁을 겪으면서 한 개인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전쟁에는 결코 승자와 패자도 없고 모두가 패자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이 책에는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너무 많은데요,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택시 기사인 하이달의 꿈은 곧 결혼할 가디르와 조그만 보금자리에서 가디르를 닮은 아기를 낳고, 해 저물녘 티그리스 강변을 가디르와 함께 거니는 것입니다. 소박한 꿈이죠.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이 전쟁에 참전한 군인인 미국인 스미스 일병입니다. 스미스는 원래 트럭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요, 여자 친구인 메이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고 결혼을 하려 했는데 여자친구의 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했다고 합니다. 여자친구의 아버지는 스미스를 열정도, 용기도 없는 청춘으로 보았다고 해요. 스미스는 그래서 이라크 파병 군인이 되기로 했다고 합니다. 여자친구의 아버지에게 자신이 용기있고 열정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다시 청혼하기 위해서 말이죠.

 

7. 두 명 모두 비슷한 처지네요. 모두 결혼을 하겠다는 소박한 꿈이 있는...

 

네, 나이도 비슷했다고 해요. 어느 날 스미스 일병이 지키고 있는 검문소에서 소동이 일어납니다. 저쪽에서 자동차 수색을 하던 선임병이 그 안에 타고 있던 사람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서로 맞고함을 치고 차 안에 있던 한 젊은 남자가 어떤 손동작을 하기도 하면서요. 스미스 일병은 주변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나는 것을 자주 봤기 때문에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젊은 남자로부터 뭔가 위협을 느꼈어요. 그리고 죽고 싶지 않아서, 살아서 여자 친구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방아쇠를 당겨 총구를 휘갈겼습니다.

 

그런데요, 그 실랑이 벌였던 사람이 바로 택시기사 하이달이었습니다. 이라크에 폭격이 시작되자 한 초등학교에도 폭탄이 떨어져 수 많은 아이들이 팔다리가 잘려 나갔는데요, 하이달은 운전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죽어가는 아이들을 병원으로 옮기는 일을 해 왔습니다. 늘 가는 병원에 더 이상 아이를 눕힐 곳이 없자 근처 보건소로 아이들을 싣고 가는 길에 검문소에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아이들의 출혈이 많아 위급한 상황이라 하이달은 너무 급하니까 그냥 지나가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군인들은 무조건 입다물고 기다려라는 거죠.

 

 하이달은 “아이들이 죽어간다”고 외쳤지만, 군인은 “한마디만 더 나불대면 테러범으로 생각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한 사람은 미국인, 한 사람은 이라크인이니까 서로 대화가 잘 될 리가 없죠.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 하이달의 목소리가 커졌던 겁니다. 울부짖듯 애원을 했으니까요. 거기에 놀라서 스미스 일병이 하이달에게 총을 쏜 겁니다. 트럭기사인 스미스가 택시기사인 하이달을 쏘아죽인 거죠. 청혼을 준비하던 하이달에게 또 다른 청혼을 준비하던 스미스가 말이죠.

 

8. 아, 가슴이 아프네요. 한 사람은 전쟁에서 죽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 때문에, 다른 한 사람은 전쟁에서 죽어가는 아이를 살려야겠다는 간절함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거네요. 정말 전쟁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는 것 같아요.

 

이 책에는 사람들의 꿈이 전쟁에서 사그라드는 무수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습니다. 기름통을 배달하지만 축구 선수가 꿈인 한 소년의 무릎에 폭탄의 파편이 박히고, 90세의 노인이 평생 처음 갖게 된 집이 폭격으로 폐허가 됩니다. 아마 청취자분들께서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안타깝게 느끼시겠지만 이 책에 실린 그림들을 함께 보신다면 더 많은 것을 느끼고 경험하게 되실 겁니다. 폐허가 된 땅을 쓸고 있는 노인의 뒷모습의 슬픔과 폭격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초조한 모습이 물감을 두껍게 발란 그린 유화 작품으로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박기범 작가는 이 책을 이라크에서 돌아온 후 10년이 지난 후에 썼습니다. 이라크에서 돌아온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는 이라크의 많은 사람들과 연락이 닿았지만 종전 후에 이라크에서 내전이 발발하면서 대부분과 연락이 끊겼다고 해요. 그래도 마음 따뜻해지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10년 후 스미스가 이라크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사람들에게 용서를 빕니다. 임신하고 있던 여자친구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데리고 와서 말이죠. 그리고 스미스가 무릎을 꿇고 있는 동안 스미스의 아이인 빌리와 이라크 아이들은 벌써 친구가 되었구요.

 

9. <그 꿈들>, 이 책을 추천해주시는 이유를 한번 정리해주시죠.

 

네, 이 책은 전쟁에서 우리에게 잘 들리지 않았던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이야기와 그림을 통해서 들려줍니다. 뉴스를 보면서, 수많은 숫자들을 보며 놓치기 쉬웠던 전쟁의 비극과 고통, 한 사람의 꿈에 대해 다시 상상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수십만의 실직자가 있고, 수백명이 바다에 빠져 죽었을 때 거기에는 숫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한 인간의 삶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상상하기 위해서 감수성이 필요합니다. 뉴스를 보면서는 분노할 수 있지만 감수성이 생기지는 않잖아요. 이 책은 아름다운 그림들과 함께 그런 감수성을 일깨워줍니다. 그런 점에서 그림을 전혀 보여드리지 못한 오늘의 책 소개는 반쪽짜리 소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림책은 한번만 보는 책이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사다주면 읽었던 그림책을 수십번을 읽잖아요? 읽을 책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읽을 때마다, 그림을 보면서 전에는 느끼지 못했고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다시 새롭게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동영상과 문자가 줄 수 없는 메시지를 움직이지 않는 한 장의 그림이 우리에게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소개해드리는 <그 꿈들> 뿐 아니라 더 많은 그림책을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어떤 분이 예전에는 문맹이 문제였지만 앞으로는 점점 더 이미지를 읽어내지 못하는 이미지맹이 문제가 될 거라고 한 말이 기억납니다. 그림책 읽기로 이미지맹에서 탈출을 시도해보시길 추천해드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일 자 대구신문에 나가는 글. 예전에 페북에다 써 놓은 글을 가다듬어 신문사에 보냈는데, 오늘 다시 읽어 보니 신문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글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만 부디 신문에 가득 찬 '배신'이라는 말과의 대비 속에서 '고흐의 사랑'을 읽어 주길 빌 뿐이다. 그리고 지난 주는 고난주간이었다는 것도, 이제 오순절 기간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도 누군가는 생각해주며 읽어주길 빌 뿐이다. 극렬한 사랑은 부작용을 낳는다. 그리고 그것이 삶인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것, 소동을 일으키고, 창피를 당하고, 망신을 당하고, 사람을 긴장하게 했다가 의기 소침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사랑은 아름다운 말이지만, 사랑은 항상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지 않는다. 그러나 삶의 의미는 사랑으로 어떤 결과를 얻었느냐가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했는가에 있지 않을까. 따뜻한 관심과 열정적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생의 이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아닌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이유는 쉽게 사랑을 포기해버리는 것 때문일 수도 있겠다. 고흐가 가난했지만 가난하지만은 않았던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모든 순간, 그것이 무엇이든지 늘 강렬하게 사랑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규칙 위반이다."




반 고흐의 세계

김연수는 ‘하루키 월드’에서 깊이 사랑하는 것은 규칙위반이라고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거의 항상 주인공이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떠나게 되고, 결국 홀로 남은 사람의 마음에도 깊은 상처가 남는다. 얼마 전 반 고흐의 편지글을 읽으면서 발견한 것은 하루키와 달리 ‘반 고흐 월드’에서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죄가 된다는 것이었다. 고흐도 하루키의 생각처럼, 깊은 사랑은 결국 깊은 상처를 남기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여동생 윌에게 남긴 편지에서 동생에게 ‘사랑할 것’을 권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래, 차라리 바보짓을 몇 번이든 하렴.” 이뿐 만 아니다. 고흐는 사람들이 공부에 집중하거나 종교나 이념에 빠지게 된 것은 ‘연애사건’, 즉 ‘사랑에 빠지지 못해서’라고 한다. 따라서 ‘반 고흐 월드’에서는 제대로 된 사랑을 하는 것이야말로 많은 공부를 하거나 사회주의에 심취하는 것보다 올바른 일이다. 

“대개는 그런 사건으로 창피와 망신만 당할 뿐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한 것이 전적으로 옳았다고 생각한다”.

고흐가 극렬주의자였다면 바로 이런 면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사랑에 있어서 절제가 필요하다거나 지나치게 열정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하루키의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남자들처럼 ‘세련된’ 사랑은 없다. 고흐는 주변 사람들을 지치고 힘들 정도로 사랑했다. 그건 사촌인 케이에 대한 사랑에서나 매춘부였던 시엔에 대한 사랑에서도 마찬가지고, 동생인 테오에 대한 사랑에서도 그렇다.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고흐가 목숨을 스스로 끊게 된 이유는 테오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흐가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동생 테오에게 더 이상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편지 곳곳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정신 착란으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어 동생에게 진 빚을 갚을 길이 없게 된 고흐가 동생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죽음 외에는 없었다.

어쩌면 정신 착란 증세도 깊은 사랑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고흐는 동생에게 신세를 갚겠다는 마음으로 ‘예술’로 끝까지 자기를 내몰았다. 테오가 정신 착란 증세가 심각해져 생레미 요양원에 입원해 있는 고흐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글귀가 나온다. 

“그 그림들은 형이 자연과 살아 있는 생명체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거야. 형이 생명체 안에 본래부터 내재한다고 강렬하게 느끼는 것들. 이런 그림을 그리기 위해 형은?모든 것을 극한까지 몰고가는 모험을 감수했을 테니 머리가 얼마나 힘들었겠어. 혼란을 겪은 것도 무리가 아니야”. 

고흐는 동생도, 예술도, 연인도, 자연도 극한까지 사랑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도, 건강도, 돈도, 심지어는 동생까지 모든 것을 잃었다. 오로지 작품만 남았다.

하루키 월드에서 보자면 이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짓임이 틀림 없다. 하루키는 새벽에 늘 같은 시각에 일어나 원고를 쓰고, 오후에는 취미로 번역을 하고, 마라톤을 완주하고, 이 나라에서는 선인세로 수억원을 받으며, 깊이 사랑할 가능성이 있는 자녀도 애초부터 낳지 않아 부유하고, 건강하고, 고흐에 비하자면 이렇게까지나 오래 살고 있다. 물론 고흐와 비교해 그것을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두 세계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차이는 내가 보기에 ‘깊은 사랑’에 대한 태도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어느 글에서 나는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을 읽고 하루키의 지혜가 내게 없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깊이 사랑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 그 사람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고흐의 서간집을 읽으면서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세상에 대한 경험도 부족한 주제에 사랑까지 깊이 하지 않겠다는 것은 사실상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것, 소동을 일으키고, 창피를 당하고, 망신을 당하고, 사람을 긴장하게 했다가 의기 소침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사랑은 아름다운 말이지만, 사랑은 항상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지 않는다. 그러나 삶의 의미는 사랑으로 어떤 결과를 얻었느냐가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했는가에 있지 않을까. 따뜻한 관심과 열정적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생의 이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아닌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이유는 쉽게 사랑을 포기해버리는 것 때문일 수도 있겠다. 고흐가 가난했지만 가난하지만은 않았던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모든 순간, 그것이 무엇이든지 늘 강렬하게 사랑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규칙 위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몸에 관한 일기 (5) - 지방샘

                             성공과 실패의 표상으로서의 비만 



나는 집에서 버스로 25분 정도는 가야 하는 중학교에 배정받아 다녔다. 내가 살고 있는 집 가까이에는 중학교가 없었기 때문인데, 버스는 언제나 만원이었고, 비가 오는 날은 초만원이 되었다. 버스에서 내려 다시 10분 정도를 걸으면 학교 정문이 보였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40년이나 되어 낡디 낡았을 뿐 아니라 곧 이전을 앞두고 있어 관리가 전혀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아이들은 아주 거칠었다. 입학 첫 날부터 각 국민학교에서 온 주먹질 좀 한다는 아이들이 겁을 줬고, 누가 진정한 일진인지를 두고 싸움을 벌였다. '쓰바리'란 말은 중학교에 가서 처음 들었다. 상급생들이 신입생들에게 버스 승차권이라던가 잔돈 따위를 뺏아가는 '쓰바리'를 쳤다. 심지어 나는 중학교에 배정 후 입학 전에 치른 반 배치고사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지 못했다. 어머니께 야단을 하도 맞은 탓에 지금도 정확히 등수를 기억한다. 학급 9등, 전교 81등. 600명 신입생 중에서 10%에도 들지 못한다는 것을 어머니는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셨다. 학교까지 오고 가고, 일진 아이들에게 치이고, 선배들을 피해다니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는데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성적 때문에 학교를 마치면 셔틀 버스를 타고 다시 학교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종합반 학원을 다녀야 했다. 셔틀 버스에서 아이들은 어느 학교의 누가 더 주먹이 쎈지, 어느 만화가 볼만한지, 어느 오락실이 좋은지를 이야기했다. 자위행위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것도 그 셔틀 버스 안이었다. 다른 학교에 다니던 한 녀석은 자위 행위를 소설가적 감수성으로 이야기하고는 했다. 어떤 여자를 생각하는지, 사정이 될 때의 느낌은 어떤 것인지 떠들어 대는 녀석 앞에서 나는 그저 애송이에 불과했다. 성적이나 학원 수업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해 본 기억이 없다. 그 때 한창 드라마 <마지막 승부>가 인기를 끌던 때라 이따금씩 주말에 만나 농구를 하자고 약속하는 정도가 셔틀 버스 토크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건전한 주제였다. 


중학교 시절은 지금 생각해봐도 모든 것이 어둡기만 하다. 이제 제법 근육이 붙기 시작하는 사춘기 남자아이들의 힘의 각축전으로 학교는 홉스적 자연상태라 늘 나는 뭔가 위축되어 있었고, 국민학교 때에 비해 성적도 떨어져 나는 선생님께나 다른 아이들에게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중학교를 입학할 때만 하더라도 72Kg 정도였던 몸무게가 2학년 때는 100Kg까지 나갔다. 학교에서의 일과가 끝나고 곧장 학원으로 가면 저녁은 언제나 라면이었다. 밤 10시에 집에 들어가면 늘 야식을 먹었다. 아버지는 다정한 분이시라 밤 10시에 가족이 함께 둘러 앉아 드라마를 보며 치킨을 먹고, 빵을 먹고, 과일을 먹는 것을 좋아하셨다. 공부 부담 때문에 운동할 겨를도 없었다. 성적은 꾸준히 올라 어느 덧 1, 2등을 다투게 되었지만 나도 모르게 살은 어마어마하게 쪄 있었다. 살이 쪘지만 사실 불편한 것은 없었다. 금화주머니와 그림자를 바꾼 사내처럼 나도 성적과 몸무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심지어 당시에는 나 자신이 '비만'이라는 인식조차 없었다. 덩치가 좋아진 것일 뿐이었고 그것이 나의 학교 생활을 점점 더 편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14살 남자 아이들은 단순하다. 덩치가 크다는 것은 곧 강함을 의미했다. 어떤 세계에서는 큰 차가 권위를 상징하고, 큰 집이 부를 상징하고, 큰 것이 곧 권력을 상징하는 것처럼 말이다. 덩치가 커지자 학교에서 눈치 볼 일이 줄어들었다. 학교에서 꽤나 주먹을 쓴다고 하던 아이들까지도 나를 견제할 정도가 되었다. 나 역시 내 힘을 과시하고 싶었다. 나보다 덩치가 작았던 아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게 굴면 가차 없이 두들겨 팼다. 나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불량 학생의 표상이던 교내 화장실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거나, 힘이 약한 아이들에게 쓰바리를 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학교의 일진들이 공유하는 기호를 하나씩 갖기 시작했다. 빈폴 코트, 노티카 점퍼, 트래벌 폭스 야구화, 블랙앤화이트 바지 등을 입고선 마음에 들지 않는 덩치 작은 녀석 하나 두들겨 패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 태도까지. 게다가 공부도 제법 했기 때문에 3학년이 되자 나는 언제나 학급의 중심에 있게 되었다. 신입생 때 가졌던 두려움은 모두 사라졌다. 성적은 올랐고, 덩치가 커져서 어느 누구도 나를 괴롭힐 수 없고, 최고학년이 되어 쓰바리를 당할 걱정도 하지 않았다. 힘이 생기자 학교 생활은 편해졌다. 그 때 나는 내가 느끼는 자신감의 원천을 지금처럼 제대로 규명해낼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다행스럽게 생각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또렷이 기억한다. 어머니 외에는 아무도 내 성적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명 성적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남들보다 상당히 덩치가 크다는 것, 거기에 안도했다. 


어머니도 내가 살이 찌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셨다. 어머니는 나더러 뚱뚱하다는 친척들에게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국민학교 때도 살이 많이 쪘었는데 그게 다 키로 가더라구요". 살이 키로 갈리 없는데도, 어머니는 이번에도 내 살이 키로 갈 것이라 믿고 계셨다. 그래서 튼 살이 생기고, 몸에 맞는 옷이 점점 줄어들어도 어머니는 개의치 않으셨다. 오히려 어머니의 걱정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내 몸 곳곳에 여드름처럼 올라오는 붉은 뾰루지들이었다. 사춘기 시절에는 누구나 얼굴에 나는 여드름으로 고민하지만, 나는 뾰루지가 팔뚝에 집중적으로 생기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주말 저녁이면 나를 무릎에 눕혀 놓고선 팔뚝에 난 뾰루지의 고름을 짜냈다. 뾰루지는 아주 작았기 때문에 고름의 양은 많지 않았지만 양 팔의 팔뚝에 작은 뾰루지가 수백개나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단순한 여드름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고, 심각한 피부병일 수 있겠다며 걱정하셨다. 며칠 후 내 엄지 손톱의 물집을 치료했던 피부과로 갔다. 오랜만에 나를 본 의사는 내 팔에 난 뾰루지를 보기도 전에 이렇게 물었다. "왜 이렇게 살이 쪘어?". 어머니는 대답 대신 내 팔뚝에 난 뾰루지를 의사에게 보이며 이게 왜 생기는 거냐고 물었다. 의사는 이번에도 "당장 살을 빼세요"라며 이번에도 내 살을 문제 삼았다. 어머니는 "살이 요새 좀 쪘는데 다 키로 갈거에요"라고 하신 후 내 팔에 난 뾰루지에 대해서 다시 물었지만 의사는 내 팔에 난 뾰루지가 뭔지 정확히 설명해주지 않았고, 별 다른 치료도 없었다. 그냥 여드름 같은 거니까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고만 했다. 진료실을 나서려 하자 의사는 등 뒤에서 다시 말했다. "지금 팔이 중요한 게 아냐. 당장 살을 빼야 해요!".


의사의 말과 달리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내 팔뚝의 뾰루지는 없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한동안 뾰루지 짜내기에 집중하셨지만, 얼마 안 가 그만두셨다. 내 피부가 닭살이라서 그렇다고 어머니는 자체 결론을 냈다. 사실 별로 불편한 것이 없었다. 가렵거나 아프지 않고, 일부러 짜지 않으면 고름이 나와 옷을 더렵히는 일도 없었다. 민소매만 입지 않으면 남들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피부 문제를 해결도 못하는 실력 없는 피부과 의사 주제에 나더러 왜 자꾸 살을 빼라는 건지 짜증만 났다. 살은 나의 힘이었기 때문에 살을 빼라는 것은 힘을 버려라는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어머니도 그 의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살은 키로 곧 갈 것이기에, 또 의사가 말한대로 뾰루지들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살을 빼라는 말을 진지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확실히 그 의사는 돌팔이였다. 내 팔뚝에 난 수백개의 뾰루지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대로다. 20년이 넘도록 전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만약 여드름이라면 나는 지금까지도 2차 성징기를 겪고 있는 셈이 되는 거다.


내 팔뚝의 뾰루지를 여드름이 아닌 다른 관점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대학 3학년 때이다. 교회에서 친하게 지냈던 선배 둘과 함께 목욕탕에 갔는데 공교롭게 두 선배에게도 팔뚝 뾰루지가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같은 대학에 다닌다는 것, 같은 교회에 다닌다는 것, 같은 성가대에서 노래한다는 것, 팔뚝에 같은 뾰루지가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셋 다 뚱뚱하다는 것. 같은 대학, 같은 교회, 같은 성가대라고 해서 같은 뾰루지가 있을 가능성보다는 우리 모두가 뚱뚱하다는 것이 같은 뾰루지의 원인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생각하고 나는 그날부터 생각날 때마다 뚱뚱한 사람들의 팔뚝을 관찰했다. 뚱뚱한 사람들은 뚱뚱하기 때문에 민소매 티셔츠를 거의 입고 다니지 않아 일부러 티셔츠의 소매를 들춰보지 않는 한 팔뚝에 뾰루지가 있는지를 확인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알 수 있었다. 의심스러우면 모른 척 좀 더 가까이 가서 보기도 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 사이라면 직접 물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이런 뾰루지가 주로 뚱뚱한 남자들에게 많이 발견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께 오랜만에 다시 한번 뾰루지를 짜달라고 했다. 그러고보니 짜낸 것은 고름과는 확실히 달랐다. 고름을 짜내면 피가 섞여 나오지만 내 팔뚝의 뾰루지에서는 피가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고름처럼 보이는 노란 것은 끈적한 액체가 아니라 오히려 작은 알갱이 같았다. 나는 친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생물학과에 다니는 동아리 후배에게 '노란 알갱이'의 성분이 무엇인지를 알아봐달라 부탁했다. 다음 날 문자 메시지가 왔다. "형 어제 주신거요. 그거 지방인데요".


지방이라고? 그러면 내 몸에 과잉 축적된 지방이 팔뚝 지방샘으로 분비되는 것인가? 그때 의사가 살을 빼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나? 여드름이 아니라 지방샘인가? 몸에 지방을 더 이상 저장할 곳이 없어서 뚱뚱한 사람들만이 지니고 있는 새로운 배출 기관인건가? 물론 얼마 안가 이런 생각이 조금도 신체애 대한 완전한 무지에서 나온 공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팔뚝의 뾰루지가 '팔뚝 여드름' 증상의 하나이고, 팔뚝 모공이 각질로 인해 막히면서 생기게 된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실제와는 정반대로 추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팔뚝의 뾰루지는 지방을 배출하는 지방샘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반대로 정상적인 경우라면 지방샘에서 지방이 배출되어야 하는데 각질과 노폐물로 지방샘이 막혀 지방이 나가지 못해 생긴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과는 다르게 나는 내 팔뚝 뾰루지를 볼 때마다 나 자신이 지방으로 꽉 차 있다는 것을 다시 인지하게 된다. 그러니까 내게 팔뚝 여드름은 모공의 고장이 아니라 지방이 꽉 차 있음을 드러내는 문학적인 상징 같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항상 모든 것을 거꾸로 이해하며 지내왔다. 12살 어린이일 때는 살이 키가 된다고 믿었고, 14살 까까머리 중학생일 때는 살이 찌는 것을 문제가 아니라 자랑으로 믿었고, 23살 대학생 때는 팔뚝 여드름을 보며 지방이 너무 많이 분출되고 있다고 믿었고, 최근까지 나는 고도비만이면서 동시에 건강할 수 있다고, 수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도 사실과는 전혀 다르게, 또 어떤 것을 완전히 거꾸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내 몸의 변화와 내가 하는 작은 습관 조차도 알지 못하면서 모두 아는 양 여기에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두웠던 중학교 시절에 성적을 올리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살이 쪘고, 다른 한편 힘을 갖기 위해 일부러 살을 찌웠다. 살은 성적 상승의 결과였고, 작은 아이들을 굴복하게 만들었으니까. 오래동안 살을 빼지 못했던 것은 '살'은 최소한 나 자신에게만큼은 승리의 표상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패배와 무책임과 낮은 자존감의 표상이다. 의학에서나 팔뚝 여드름이나 비만은 단정적으로 문제로 규정할 수 있겠지만, 실제에서는 팔뚝 여드름 하나 조차 앞서 내가 문학적 상징으로 이해한 것처럼 의미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중학교 때 아이들을 두들겨 팬 것에 대한 대가는 지금 충분히 치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큰 덩치로 지금 나는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3월 29일.

27일이 생일이었다. 생일에는 일을 했다. 28일에 처형이 생일축하를 해주셨다. 나를 위한 케잌을 사기 위해 버스를 타고 2시간이나 시간을 쓰셨기 때문에 사양할 수가 없어서 조금 먹기로 했다. 그런데 너무 맛있었다. 케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2시간을 쓸만큼 맛있는 케잌이었기 때문에 유혹을 이길 수가 없었다. 오늘은 아이와 집근처 커피샵에 갔다. 아이가 배 고파해 커피샵에서 파는 피자를 사줬다. 아이가 졸라대는 통에 몇 조각을 먹었다. 다이어트는 정성을 거절하고, 남은 음식은 버릴 수 있는 자만이 성공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새삼 든다. 정말 나 자신이 먹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지금 케잌과 피자를 먹은 나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다이어트는 음식만이 아니라 예의와 경제 관념과도 거리를 둘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나는 아직 그럴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내가 먹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먹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던 거다. 하지만 정말 맛있었다. 케잌도, 피자도. 내일은 어떤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