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미술관에서 서경식 선생님 강연이 있었고, 그 날 패널로 나서게 되어 말씀을 나눴다. 우문들을 선생님은 이번에도 너무도 아름답고도 정교한 언어로 답해주셨다. 사전에 아래의 질문 목록을 만들어 갔는데, 대부분의 질문을 드렸다. 선생님의 강연과 대담 내용은 아르코미술관에서 나중에 책으로 묶어낼 계획도 있다고 하신다. 일단 내가 준비해갔던 질문 목록을 올려둔다.


아르코미술관 난민포럼5. 서경식 선생님의 강연 후 드리게 될 질문들. (패널. 권영민)


(강연을 듣고)

1.한국에서도 혐오 발언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재특회에서는 재일조선인을 바퀴벌레로 부른다고 하셨는데, 여기에서는 파키스탄 사람들을 바퀴벌레를 연상시키는 말로 ‘파퀴벌레’, 중국 사람을 ‘짜장’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일본에서 헤이트스피치가 이렇게 증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최근에 위안부 문제로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한 일본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는 일본에서 ‘혐한’ 감정이 커지는 이유를 이렇게 썼습니다. “혐한 감정은 특히 이 10년동안 서서히 커져왔다. 그리고 그들의 혐한은 1990년대 초 이후의 역사 문제 갈등에서 한국인이 그들을 용서하지 않고 언제까지고 비난만 한다는 생각에서 오는 부분이 크다”. 이런 생각은 타당한 것일까요?


(난민에 대한 책임의 문제)

 3.  우리나라의 난민 인정률은 3.8%입니다. 세계 평균의 1/10. 얼마되지 않는 숫자인데, 일부에서는 우리가 너무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지금 난민이 대거 발생하게 된 책임은 미국과 유럽 세계에 있는데 그 책임을 왜 우리가 함께 져야 하냐는 거죠. 그리고는 옆 나라 일본은 난민 안받는다며 진정한 주권국가라고 치켜 세웁니다.

 

 선생님께서도 9.11 이후 “대테러의 시대”가 발생한 근원으로 돌아가 사고하고자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식민지주의’에 있다고 하신 적이 있고, 유럽, 미국,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의 마이너스 유산이라고 하신 적이 있는데요, 그 마이너스 유산을 왜 우리 같은 식민지 경험이 있는 나라가 져야 하냐고 묻는 겁니다. 식민지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난민을 적극적으로 받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럽과 미국, 일본에게 난민을 더 받으라 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한국 상황에 대해서) 

4.  우리문화사랑국민연대와 같은 오프라인 조직을 포함해 우리나라에는 현재 다문화주의를 반대하는 온라인 커뮤니트만 20개 정도가 있습니다.

 이들은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는 혐오하지 않지만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에 대한 지원은 강력히 반대한다’고 하는데, 언뜻 들으면 인종주의적 혐오와 선을 그으려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말하자면, 난민을 포함해 한국에 있는 외국인을 지원하는데 예산만 해마다 2000억 이상 쓰이고, 지원단체까지 포함하면 수조원을 쓰고 있다며 외국인에게 지나친 특권을 주면서 정작 정부가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헌법은 위반하고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보면 쉽고 명확한 논리인데요, 외국인에 대한 지원을 반대하는 것과 외국인을 혐오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차별금지법에 대해서)

 5.  일본에서는 헤이트스피치 금지 법안이 통과되었고, 이 나라에서도 ‘차별금지법’이 이미 2007년에 입법이 예고되었는데 10년동안 통과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요, 최근에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법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고 맞서고 있습니다.  문제는 헤이트스피치 금지법안이나 차별금지법이 마련되더라도 혐오와 차별을 근본적으로 막지는 못할 것 같다는 것에 있습니다. 


(전시에 대해서)

 6.  선생님께서 지금 아르코미술관에서 하고 있는 전시를 보셨는데요, 선생님께는 어떤 작품이 인상적이셨나요?


 저는 차지량 작가의 코리언세일이라는 작품이 재미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다문화 반대운동, 외국인 혐오 발언을 하는 이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마치 난민을 환경오염 물질처럼 취급하는 것 같습니다. 탄소는 미국이 가장 많이 배출했는데 왜 우리가 탄소로 인한 피해를 받아야 하냐는 거지요. 그래서 탄소배출권을 거래하듯 언젠가는 난민을 거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차지량 작가가 코리언세일이라는 작품에서 그런 상상력을 발휘한게 아닐까 해서 저는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브렉시트에 대해서)

8.  최근에 마이클 무어가 이탈리아를 휴가도 많고 낙관적인 나라인양 그린 영화를 만들어 공개했는데요, 사실 이탈리아 해변에 몇 년전부터 난민들이 떠밀려 오고 있다고 합니다. 한 쪽에는 일광욕을 하고 물놀이를 하는데 옆에서 바다를 건너기 위해 튜브를 사는 난민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입국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에서 샤를리 앱도 테러 이후 외국인에 대한 보복테러가 잇따라 일어났구요 르펜과 같은 극우정치인의 등장에는 그런 배경이 있는 것 같구요, 영국의 브렉시트, EU 탈퇴 결정을 두고도 난민 문제와 결부시켜 분석하려는 시도가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자유, 평등, 인권과 같은 가치를 여지껏 유럽 세계가 내세워 왔는데 최근 분위기는 명백히 이런 인도주의적 입장이 후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선생님께서 이베리안 반도 최후의 이슬람교 나라 그라나다가 함락, 그리스도교에 의한 레콩키스타가 완성되었을 때 유럽의 다원적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불관용적인 일원적 지배의 시대로 돌입했고 그것이 결국 홀로코스트로 귀결되었다고 쓰신 적이 있습니다. 영국의 EU 탈퇴 결정이 새로운 불관용의 시대로 돌입하는 것은 아닐까요?


(보편주의에 대해서)

9.  세계자본주의가 국가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 것이라는 전망이 그동안 우세했었습니다. EU도 애초부터 경제적 이익을 위해 각 국가들이 월경을 쉽게 만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경계가 약해졌지만, 지금 양상은 흐릿한 경계 때문에 부의 편중이 일어나자 다시 국민주의로 회귀하는 상황처럼 보입니다. 다시 국경의 벽을 더 높게 만드는 것인데요, 세계적인 현상처럼 보입니다. 


(보편주의는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10. 선생님께 늘 여쭤보고 싶었지만 그동안 여쭤보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시라 생각도 됩니다만, 선생님, 난민들 내지 소수 민족 커뮤니티 중심주의와 보편주의 사이에는 긴장이 있을텐데요, 말씀하신대로 이 양자의 긴장을 해소하는 것이 ‘새로운 보편주의’ 혹은 ‘보편적 보편주의’에 대한 모색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리고 보편주의와 또 다른 보편주의 사이의 갈등도 있을 겁니다. 새로운 보편주의를 구상하기 위해서는 연대가 필요하고, 연대가 가능하려면 새로운 이념이 필요할텐데, 반식민주의가 그런 이념의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예비질문1. (모순과 갈등을 견디는 것에 대해서)  

  보편주의와 보편주의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갈등을 견디고 갈등과 함께 살아가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논리적으로 딱 맞아 떨어지지 않더라도, 모순적인 것들을 견디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예비질문 2. (에스니시티와 내셔널의 관계에 대해서)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헤이트스피치는 인종주의적인 것일까요, 내셔널리즘적인 것일까요? 제가 이런 질문을 드리는 까닭은 선생님의 글에서 네이션과 에스니시티가 가끔 구분되지 않을 때처럼 읽힐 때가 있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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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 <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
정영환 지음, 임경화 옮김, 박노자 해제 / 푸른역사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누구를 위한 오독인가


지금 보니 박유하 교수 본인이 자기 책을 오독하고 있는 것 같다. 업자만이 법적 책임이 있다고 <제국의 위안부>에 분명히 적혀 있는데도 박유하 교수는 어제 기자회견에서 업자도 책임이 있다고 썼다고 한다. 자신의 책을 오독하고 있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센다 가코가 하지도 않은 주장을 주장이라고 써놓고선 이제와 자신의 해석이었다고 한다. 센다가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다고 비판하는 이들에게 오독이라고 일갈해놓고선 그건 자신의 해석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나 오독한 사람이 많았던 것은 역시나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길윤형 기자가 쓴 글처럼 나도 누구보다 한일화해를 바라고,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고, 위안부에게는 소녀상민으로 표현되지 않는 다양한 모습이 있다고도 생각한다. 모두 제국의 위안부의 논점에 대한 부분이고 공감하는 편이다. 심지어 법적 책임 묻기 곤란하다는 주장도 왜 그렇게 말하고 있는지 이해한다. 아마 박교수 책을 지지하는 많은 지식인들은 그런 취지에 공감하는 쪽일 것이다. 이들은 박교수 비판자들이 1) 책도 읽지 않고 선입견에 근거하고 있거나 2) 읽었더라도 '동지적 관계'와 같은 오해가 많을 수 있는 말들을 오해 내지 오독했거나 3) 박교수가 재판 중인데도 비판하는 것은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박교수의 책을 옹호한다. 문제는 이들이 2)에 해당되지 않는 이들을 1)이라고 비판하고, 설령 2)에 해당되지 않은 이들에 대해서도 자기와 다르게 읽은 사람이 있다면 2)라고 비판하는 것에 있다. 나는 책도 읽었고, 고진을 번역한 박유하 교수에게 오히려 호감이 있었던 편이었고, 동지적 관계도 맥락상 나올 수 있다는 생각도 했었다. 


박교수의 책을 지지하는 이들은 이런 종류의 비판 대신 박교수의 책과 박교수의 독해를 문제삼는 부분들에 대해서 좀 더 응답해야 한다. 정영환 선생이 제기하는 문제들과 같은 <제국의 위안부>에서 박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불확실한 논거와 다양한 오류가 해명되지 않으면, 특히나 '동족으로서의 군인'과 같은 표현에 대해서와 같은 부분들, 어쩌면 의도적인 곡해로 읽히는, 만약 무의식적인 오독이라면 더 무서운 부분들에 대한 해명이 없다면 주장의 진정성이 훼손되고 정영환 선생이 제기하는 질문,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업자만이' 법적 책임이 있다고 썼다가 이제와서 '업자도'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말을 바꾸면, 제국의 위안부가 누구를 위한 화해를 말하는 책인지 분명하지 않게 되지 않겠는가.(아래의 포스팅 참고) 잘못된 근거로 화해를 하면 피해자는 2차 가해를 입게 된다. 할머니들은 바로 그 점을 문제시하고 있는 것 아닐까?


박유하교수의 기자간담회(7월11일)에서의 반박에 대하여 (정영환 교수의 응답)

https://www.facebook.com/notes/%EC%A0%95%EC%98%81%ED%99%98/%EB%B0%95%EC%9C%A0%ED%95%98%EA%B5%90%EC%88%98%EC%9D%98-%EA%B8%B0%EC%9E%90%EA%B0%84%EB%8B%B4%ED%9A%8C7%EC%9B%9411%EC%9D%BC%EC%97%90%EC%84%9C%EC%9D%98-%EB%B0%98%EB%B0%95%EC%97%90-%EB%8C%80%ED%95%98%EC%97%AC/1731933963744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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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타는 날은 온다


 “놀부는 왜 이렇게 심술이 난 걸까?”. <흥부전>을 읽으며 물었더니 아이는 “흥부가 자꾸 밥을 달라고 하잖아”라고 했다. 그리고는 “밥은 어차피 놀부꺼니까 놀부 마음대로 하면 돼”라고 했다. 일곱 살 아이의 영악한 대답이다. 잠자코 있던 아이 엄마도 맞장구를 쳤다. “맞네, 놀부가 가진 것은 놀부 마음대로 하는 게 맞지”. 그러니까 그 누구도 놀부의 재산처분권을 제한할 수는 없다는 논리다. 나도 질 수 없었다. “놀부가 부모님 재산을 독차지해서 부자가 된 거잖아. 그러니까 흥부도 밥을 달라고 할 권리가 있어”. 그러자 아이는 “아니야. 원래 흥부가 태어나기 전에는 놀부 밖에 없었어. 그러니까 전부 다 놀부거야”라고 했다. “무슨 말이야?”. “아빠, 내 동생이 태어나기 전에 아빠가 사준 장난감은 다 내꺼라고 했지? 아빠가 내 장난감은 동생한테 안줘도 된다고 했지? 놀부도 그런거야”.




 그러니까 나는 흥부의 관점에서, 아이는 놀부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읽은 것이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생긴 것일까? 육아서에는 늦둥이가 태어나면 큰 아이가 소외감을 느끼기 쉽기 때문에 큰 아이만의 영역을 만들어 주라고 한다. 내 경우에는 동생과 나이차가 한 살 밖에 나지 않아서인지 그런 소외감을 느꼈던 적은 없었는데, 내 아이는 동생과 여섯 살 차이가 나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시차(視差)가 생기게 된다. 즉 동생에게 형은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항상 있어온 존재이지만, 큰 아이는 동생을 전에 없었다 나타나서 자기 영역을 침범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놀부 심보란 형의 초조함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놀부는 대책 없이 아이만 많이 낳은 흥부에 비해 경제적 합리성이 있었고, 흥부가 자기 주제도 모른 채 제비의 부러진 다리를 고쳐주는 수고를 하는 것에 비해 놀부는 재산 증식의 수단이 된다면 제비 다리까지도 부러뜨릴만큼 과감함도 갖춘 인물이었다. 교육부 공무원이란 자가 “민중은 개돼지라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되고, 신분 격차가 존재하는 사회가 합리적인 사회”라 했다는데, 이런 합리성과 과감함은 제 집에 찾아온 제비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과 얼마나 다른 것일까. 


  정부와 개인, 국민과 난민, 부자와 빈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갑과 을 사이에 시차가 없을 수야 없겠지만 시차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부족한 사회는 ‘합리성’이라는 이름의 놀부 심보가 보편화되게 된다. 하지만 다리 부러진 제비도 날아오를 날이 있고, 입에 박씨를 물고 돌아올 날이 있다. 좁은 자기 중심주의를 넘어 내 형제를, 가난한 자를, 심지어 동물까지도 환대하라는 <흥부전>의 정신을 망각한 개인과 사회에게 남은 것은 실렁실렁 박 타는 날 맛보게 될 호된 몽둥이 뿐일지도 모른다. 박 타는 날은 온다.


내일 자 매일신문에 쓴 글이다. 아이에게 동생이 생긴지 이제 3주가 되었다. 나와 내 여동생은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아이는 동생과 여섯 살 차이가 난다. 나이 차이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이와 <흥부전>을 읽으며 놀부와 흥부의 갈등은 나이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내 기억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동생이 내 의식에서 없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동생 없이 일 년을 먼저 살았던 것이 분명하지만 내 의식 속에서 동생은 언제나 나와 함께였다. 그러니 동생을 배제하고 온전히 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결혼 전까지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내 어머니, 아버지 뿐 아니라 장난감, 책, 방까지도 모두 동생과 나눠 써야 한다는 당위를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모든 것을 독차지하려는 놀부가 이상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내 아이는 이미 소유 관념을 가지고 있다. 내 아이는 자기만의 장난감, 엄마, 아빠, 방, 악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동생은 자기 세계의 침범자가 되는 것이다. 나와 내 동생 사이에는 없었던 시차가 아이와 동생 사이에는 발생하게 된다. 내 아이는 흥부전을 읽으며 흥부는 놀부에 비해 나이가 많이 어릴 것이라 예상했다. 아이 관점에서는 그러니 흥부가 이상해 보였던 것이다. 나는 흥부전을 읽으며 흥부와 놀부는 나이차가 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왔기 때문에 서로 다른 방식의 읽기가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두 아이를 보면서 든 생각이 발단이 되었지만, 놀부와 흥부는 강자와 약자의 은유일 것이다. 부자들, 엘리트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서민들이 자기 세계의 침범자로 여겨 자신들의 세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들에게 서민들은 내 세계를 끝없이 위협하고, 밥을 달라고 하고, 울고 떼쓰는 존재, 개돼지 같은 존재로 보일 것이다. 요컨대 놀부의 관점에서 흥부는 아이만 무식하게 낳는 동물적인 삶을 사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흥부전은 아주 정치적인 이야기가 된다. 제비가 물고온 박씨는 놀부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민초들이 꿈꾸는 희망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제비가 물고 온 박씨는 놀부의 질서와 놀부 세계의 구조 밖의 어떤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구조 바깥을 구조 내부로 기입하는 것이 데리다에게는 '글쓰기'(in-scription)라면 흥부전에서의 기입 방식은 명주실로 부러진 제비의 다리를 묶어주는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흥부전에서 제비의 다리가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생각도 하는데 일단 그 부분은 넘어가도록 하자. 여하간 제비, 인간 아닌 것, 동물의 세계, 질서와 구조 밖의 것이 박으로 표상되는 어떤 새로운 것을 가져온다. 그리고 (흥부와 가난한 자의 표상으로서의) 제비는 제 다리를 부러뜨린 자를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흥부전>은 그런 점에서 종말론적인 이야기고, 혁명에 대한 고대가 있는 이야기고, 동물이든 동생이든 가난한 자든 타자를 환대하라는 무거운 요구를 담은 이야기이지, 단지 착한 사람 복 받는다는 소위 '착한 이야기'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과 자연은 모두 평등하다는 존재론적 진실을 담고 있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데, 둘째를 낳은 후 큰 아이가 겪을 심리적 상황에 대한 배려가 필요할 것 같아 육아서들을 찾아 보았다. 대부분 큰 아이만의 독자적인 공간, 소유물을 제공해주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걸 읽으며 아마 놀부 부모가 흥부에게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재산은 모두 놀부 네 것이야. 흥부는 침범할 수 없어'. 지혜로운 대처 방식인 줄 몰라도 그 때문에 놀부는 그 때문에 동생을 짐으로 여기고, 제비를 재산증식의 수단으로만 삼았던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여하간, 박 타는 날은 온다. 실렁실렁 박을 타며 잭팟을 기대하는 이들도 예기치 못한 것을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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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환 선생의 입국 불허를 반대한다. 모든 조선적이 한국에 입국하게 해달라.


박유하 선생이 아래의 글을 써서 올렸다고 하는데, 놀라운 내용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심지어 이 글을 쓴 후에는 자신은 정영환을 비판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한국 정부를 비판하려고 했다고 한다. 이 글에서 정영환에 대한 비판을 읽은 사람이 있다면 박유하 선생은 이번에도 오독했다고 할 것이다.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비판자들을 모두 오독했다고 비판하는 것과 다를 바 전혀 없다. 오독이야 했을 것이다. 누구나 오독을 하고 모든 읽기는 어느 정도는 오독이니까. 하지만 이토록 오독한 사람을 많이 생산해내는 글을 쓰기란 섬세한 오독 발생의 계기와 장치를 마련하려는 노력 없이도 쉽지 않을 것이다. 오독은 그 계기와 장치에 무심하게 걸려넘어진 결과일까, 그 계기와 장치를 모조리 드러내는 방식일까? 정영환 선생이 이 글에서 말하는 바, 나로서는 아래의 가져온 부분이 정부 비판보다는 정영환 비판에 더 많은 무게가 실린 글로 읽힌다. 어떤가? 이번에도 오독인가? 이렇게 오독이 되도록 글을 쓴 의도가 뭔가? 이 글에서 정영환에 대한 비판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오독에 걸려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나?

박유하 선생의 글 중에서1.
"정영환씨는 한국과 북한에서 정치적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한국입국이 불허된 사람이다. 국가가 개인의 이동의 자유를 관리하는 일에 나는 비판적이지만, 이들의 담론이 한일화해에 대한 강한 두려움을 내비치는 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정영환의 두려움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남들이 나를 빼고(그의 표현에 따르면 망각하고) 화해할까 봐 두려워하기보다는, 재일교포사회와 일본과의, 혹은 북한과 일본과의 화해를 모색하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다.(「누구를 위한 불화인가」 2016년 6월 28일)"

박유하 선생의 글 중에서2.
"나는 국적을 갖지 않는 것을 택한 조선적 분들을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 정점에 작가 김석범 선생이 있고, 내가 ‘조선적’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도 그 분을 통해서였다.
내가 언급한 건 오로지 ‘한국정부의 판단’이다. 쓰여 있지 않는 비난을 굳이 읽어내 비난하는 이들의 행위는, 위안부는 원래 일본인이 대상이었고 국가에 의해 이동당한 가난한 여성이라는 의미로 ‘조선인 위안부는 가라유키상의 후예’라고 썼더니 ‘그건 매춘부라는 뜻!’이라면서 판금[삭제 요구를 가리킬 것이다]을 요구한 지원단체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2016년 6월 29일)"

한국일보에 쓴 장정일 선생의 글도 사실 확인을 중시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라는 자신의 논지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http://www.hankookilbo.com/v/a4d05cd008d94fa6adf0edfb23e92c46) 아마 장정일 선생의 칼럼에서 산케이 신문 보도 관련 부분은 2016년 1월 18일자 기사에 나온 "慰安婦は強制連行された「性奴隷」であるとして、異論を唱えにくい韓国言論界にあって、同書は多様な境遇にあった慰安婦の実態を踏まえた冷静な議論を求め、日韓の相互理解を深めるために書かれたものだ。" 부분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이 기사의 원문 (http://www.sankei.com/world/news/160118/wor1601180005-n1.html)을 보면 산케이가 이 책을 강제동원설을 전제로 한 "한국 정부의 반민주적 작태 vs 언론 표현 자유의 표상으로서의 박유하"라는 구도를 중심으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케이 기사 검색을 해보면 이런 구도는 산케이가 계속적으로 <제국의 위안부>를 다루는 전형적인 논지이며, 한국 정부가 이런 식의 공정한 목소리를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탄압하고 있다는 보도로 박유하 선생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다. 소녀상이 다양한 위안부를 표상하지 못한다는 비판은 박유하 선생을 한국 민주화의 투사로 그리는 산케이신문에 되돌려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산케이가 노골적인 격찬을 한 것은 아닌지 몰라도 이런 대비 구도를 끊임 없이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박유하 선생에 대한 우회적 격찬 아닌가. (어디선가 굳이 이런 점을 읽어내 비판하는 나는 지원단체와 하등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장정일 선생은 산케이의 이런 보도 방식을 모르지 않았을텐데 산케이가 한 말이라고는 '한일 상호 이해 지향' 정도로 언급하는 것을 보니 왜 이를 모른 척하는지 의문스럽다. 한겨레를 비판하는 섬세함이 어째서 산케이에게는 적용되지 않는가. 그 뿐 아니라 장정일 선생의 칼럼에서 30만명 위안부 총수를 추산하는 한겨레의 한 기사에 대한 선생의 비판도 유사 실증주의다. 위안부 총수는 공식 문서가 없어 어떤 견해든 잠정적일 수밖에 없고 40만까지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런 사실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는가. 실증적이지 않은 책은 괜찮고, 실증적이지 않은 신문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건가.

박유하 선생이 내일 정영환 선생의 책에 대해 반론을 위한 기자간담회를 한다고 한다. 부디 정영환 선생의 정치적 활동 내지 재일 지식인들의 책동 운운 음모론 내지 책을 읽지 않았다면 책을 읽으면 풀릴 오해 내지 책을 읽었다면 의도적, 비의도적 오독 내지 왜곡 내지 재판 중에 있는 자신에 대한 비판은 자신을 불리하게 할 뿐이라는 궤변 내지 학술적 논의는 재판 전에 했었어야 하고 자기는 재판 준비 중이라 여기에 모두 대응할 수 없다는 식의 되풀이되는 주술 같은 그간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기자회견이 아닌 차분한 실증적 논박이 제시되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 나는 <제국의 위안부>를 읽은 후 박유하 선생의 분석과 논지에 동의하는 부분도 있었다. 아마 나와 의견이 가장 다른 부분은 '법적 책임'과 관련된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박유하 선생이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 못하는 바 아니다. 내가 동의하기 가장 어려운 부분은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논지인데 이런 부분은 전망의 차이니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책에 제기된 여러 실증적 오류에 대해서는 적절한 응답이 제시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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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아이들과 한 달 살기
전은주(꽃님에미)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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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교통방송 책 소개에서는 원래 하지현, 엄기호가 쓴 <공부중독>을 소개하려고 했다. 책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가 선생님에게 메시지가 왔다.

"요즘 책 선정이 무겁다고 모니터 회의에서 이야기가 나왔는데 조금 가벼운 걸로 될까요?"

나는 메시지를 받고, "제가 몸이 무거워 책도 무거운 것을 좋아해요"라고 답을 드렸다. 하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왜냐하면 최근 소개했던 책은 가벼운 책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3)에서는 단편 <소나기>를 이어쓰는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소개했고, (32)에서는 진중권이 쓴 <아이콘>, (30)에서는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을 소개했다. 다소 무거운 책이라면, (31)에 했던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이지만 이 책도 사실 어렵거나 무거운 책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더 가벼운 책이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받고 나는 라디오 방송에 나가서 많은 분들에게 권할 수 있을만한 더 가벼운 책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모니터를 하신다는 분들에게 묻고 싶었다. 어떤 책이 무겁다고 생각하시는지, 라디오에서 소개할만한 가벼운 책은 어떤 책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물론 모니터 회의에 갈 수가 없으니 물어볼 수도 없다. 그리고 이전까지는 모니터에서 비교적 무게 있는 책을 재미있게 소개해줘 유익하다 정도의 반응이 나왔다고 들었기 때문에, 이번 모니터 내용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내가 지나치게 완고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년 소녀를 만나다>가 무겁다면, 그보다 더 가벼운 책은 나도 소개하고 싶지 않다. 다른 방송 예컨대 TBS에서 진행되는 책 소개 프로그램에서 소개되는 책은 <당신을 만나서 참 좋았다>, <가족이라는 병> 같은 책들인데, 솔직히 이런 책은 나는 별로 소개하고 싶지 않다.

사실, 나는 방송에서 소개할 책을 고를 때는 신간이나 청취자들이 좋아할 만한 책을 특별히 염두에 두기 보다 우선 내가 읽고 싶은 책을 고려하고, 그렇게 읽은 책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공감이 될 수 있는 내용 같다는 생각이 들면 소개글을 썼다. (물론 쉬운 책을 골라야 한다는 부담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건 아니다) 세상에 책은 너무 많기 때문에 모든 책 소개는 좀 편파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소개하는 이의 취향이 많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것이 책소개고 그런 것이 공감을 얻기 더 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런 과정이 썩 잘 되지는 않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작가 선생님에게 그만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만 한다면 되도록 빨리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개편이 이뤄지는 11월까지는 해야 한다고 한다. 그전까지는 '한주에 한권 가볍게 책을 읽어본다'는 취지에 맞는 책을 골라서 소개해야 한다. 오늘 <아이들과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를 소개한 것도 그런 맥락이 있다. 물론 이 책은 누구에게라도, 특히 부모에게라면 강력히 추천할만한 책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없었다면 라디오에서 소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여행과 제주에 대해서 내 생각을 좀 더 적극적으로 적어보려고 했다. 너무 유명한 책이라 관심 없는 분들도 소개글은 읽어봐 주신다면 고맙겠다.

여하간 교통방송 책소개는 몇 개월을, 최소한 3개월은 더 해야 하지만 그동안 좋은 점도 많았다. 쉬운 책을 늘 선정해야 한다는 부담 탓에 평소라면 잘 읽지 않았을 책을 읽고 생각해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린 것이 기뻤다. 책선정이 너무 무겁다는 말이 아니라 책 소개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들었다면 그만하겠다고 마음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무겁고 가볍고 무슨 기준으로 그러는지 모르겠다. 정치, 경제, 여행은 어려워도 책은 어려우면 안되는 이유를 모르겠다.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이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소개하고 그런 반응이라면 수긍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솔직한 내 생각을, 끝으로 말하자면, 전혀 수긍이 안된다. 그동안 내가 소개한 책 중 그 어떤 책도 무겁지 않다. 아무튼, 이제 몇 번 안 남았다. 쉬운 책 사러 알라딘 중고서점에 나가봐야겠다.



아이들과 제주도에서 한달 살기

-전은주


  1. 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시나요?


 네, 이번 주에 제가 소개해드릴 책은 출판사 북하우스에서 만들고, 전은주씨가 쓴 <아이들과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이미 아시는 분들도 많으실텐데요, 제주도 한달살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 낸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은주씨는 꽃님이, 꽃봉이 두 남매의 엄마인데요, 이 책에는 제주도에서 아이들과 한 달을 함께 보낸 경험이 담겨 있습니다. 방송을 들으시는 분들 중에 기억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2016년 처음으로 소개해드렸던 책이 마이케 빈네무트가 쓴 <나는 떠났다 그리고 자유를 배웠다>였습니다. 이 책은 마이케가 퀴즈쇼에서 우승을 해 받은 상금으로 1년동안 한 달동안 한 도시를, 그래서 모두 열 두 개의 도시를 여행하는 내용을 담은 책인데요, 전은주씨는 퀴즈쇼 우승도 하지 않았는데도 한 달 간 제주도에서 살기로 마음 먹고 떠난 것이지요. 


2. 퀴즈쇼에서 우승을 했다면 아마 아마 제주에서 일 년 살기를 했을 수도 있겠죠. 아이들 학원 보내랴, 남편 뒷바라지 하랴 말은 쉽지만 그래도 한 달 살이를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아요.


 <나는 떠났다 그리고 자유를 배웠다>에서 마이케의 경우는 50만 유로나 되는 상금도 있었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고, 사실 직업도 저널리스트이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로운 상황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이케가 떠난 후에 자유를 배웠다고는 하지만 마이케의 상황은 이미 보통 사람들에 비해서는 상당히 자유로웠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꽃님엄마 전은주씨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주도에 월세방을 구해 방학동안 가 있을 것이라고 하니까 이웃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남편은?”이었다고 해요. 이 질문은 “마누라가 밥도 안 해주고 한 달이나 집을 비운다는데, 또 재롱떠는 아이들을 못 보는건데 남편이 허락해줬냐”는 뜻이기도 하구요, 아니면 “애 아빠도 없이 혼자서 두 아이를 어떻게 돌보냐”는 뜻이기도 한 거죠. 그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방학이었다고 해도, 아이들은 사실 방학 때 더 바쁘거든요. 각종 캠프를 가고 학원 뺑뺑이를 돌기 때문에 학교 다니면서 해오는 것들을 모두 중지하고 ‘한 달’의 휴식기를 갖는다는 것이 보통 부모로서는 쉬운 결정이 아닙니다. 지금은 제주 한달살이가 정말 힙한 문화처럼 유행이 되었지만 전은주씨 가족이 가던 2013년은 그런 문화는 거의 없었던 때거든요. 그런 점에서 어려운 결정을 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3. 정말 그렇네요. 요즘 제주도 많이 가잖아요? 대구에서도 제주로 가는 비행편이 많이 생겨서 예전보다는 쉽게 2박 3일, 3박 4일 짧게 다녀오시는데, 한 달씩이나 있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좀 들어요.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제주도에서 가볼 만한 곳은 다 가봤다고 생각했거든요. 제주에 가면 누구나 가는 곳들이 있잖아요? 천지연, 천제연 폭포, 용두암, 만장굴, 성산일출봉, 섭지코지, 여미지식물원 같은 유명 관광지들 말이죠. 식당도 저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꼭 가봐야 하는 식당은 다 가봤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오만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달 살이도 길다고는 물론 할 수는 없겠지만 한 달 정도는 살겠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절대 가볼 수 없는 곳들을 이 책은 여러 장소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꽃님이네도 처음에는 잘 알려진 장소 위주로 방문을 합니다. 한림공원이나, 김녕미로공원 같은 곳들이죠. 그런데 한 달 살이의 종반으로 갈수록 단기 관광객들이 잘 가지 않는 곳이 더 많아지게 됩니다. 제주 기적의 도서관, 아부오름, 휴애리 자연생활농원 같은 곳들은 아마 가보지 못한 분들이 더 많으실 겁니다. 사실 제주도가 굉장히 넓습니다. 서쪽 애월에서 동쪽 성산까지 가려면 차로 2시간은 가야 하거든요. 2박 3일 여행으로 제주도를 다 봤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죠.


4. 제주에서 한 달 살이가 제주도를 ‘재발견’하도록 해준 거네요.


 책과는 조금 먼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최근 제주는 국제자유도시가 되겠다고 기치를 세우고 나서부터 부동산 광풍에 외국의 개발자본이 대거 유입되면서 난개발이 우려가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제주도민들도 그런 문제를 대체로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는데요, 많은 자본이 들어오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말 문제는 사람들이 ‘제주’를 잘 모른다는 것에 있습니다. 제주를 잘 모른다는 것이 단지 좋은 관광지가 어디인지를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주의 문화, 정서, 제주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채로 관광지를 훑어보고, 맛집을 들르거나 하는 것은 지역을 훼손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거든요. 어쩌면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여행 방식 자체가 대단히 소비적이고 파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 이 마을을 전혀 모르는 관광객이 해마다 1000만명 이상이 오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길게 드린 이유는 이 책이 좀 다른 방식의 여행을 제안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관광지를 훑어보는 여행, 여행지에 대한 이해 없는 여행이 아니라 이 책은 “느린 여행”이 뭔지를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5. “느린 여행”, 느낌이 좋은 말인데요, “슬로우푸드”처럼 여행도 천천히, 음미하면서 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네, 그런 여행을 디투어링이라고도 하는데요, 말 그래도 진짜 여행은 목적지까지 바로 가는 것이라기 보다 좀 우회로를 거치는 여행이거든요.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참 충실합니다. 책의 후반부에는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분들에게, 특히 어린이들과 함께 읽을만한 도서 목록을 제시해줍니다. 설문대할망을 모르면 제주 문화에 대해서 무지하다고 할 수 있는데요, 설문대할망과 관련된 재밌는 이야기를 담은 책, 또 일을 나간 해녀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이야기를 담은 책, 또 저희가 잘 알지 못하는 제주의 역사, 특히 4.3 항쟁에 대해 소개해주는 이야기 책 등 여러 권을 소개해 줍니다. 제주를 더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제주를 더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한거죠. 특히 전은주씨는 두 아이를 데리고 비가 오는 날이면 제주에 있는 도서관으로 가서 이런 책들을 읽었다고 해요. 제주에는 아름다운 도서관이 참 많은데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바람도서관’이라는 곳이 참 좋았습니다. 바람도서관은 카이스트와 서울대를 나온 젊은 부부가 지리산에서 꿀을 치면서 살다가 제주로 와서 펜션을 운영하면서 거실을 이렇게 도서관으로 만들어 공유하고 있다고 해요. 꽃님이와 꽃봉이가 여기서 책을 읽고 뛰어놀고 낮잠도 자는 것을 보니 저도 제 아이와 함께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6. 비가 오는 날이면 도서관에 가고, 햇살 좋은 날이면 바닷가로 나가고, 정말 슬로우여행이네요. 


 슬로우여행으로 꽃님이네는 ‘제주’도 재발견을 했지만, 무엇보다 전은주씨는 ‘가족’을 재발견합니다. 아이들과 밀착해서 한 달을 아름다운 제주에서 보내니까 이전에 알지 못했던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거죠. 한 달 동안 부비고 다니다 보니 남매는 서로를 더 의지하게 된 것은 물론입니다. 또 전은주씨 역시 제주에서 밥그릇 네 개, 식판 두 개, 냄비 하나로 살아보니 그동안 외출할 때마다 입을 옷이 없다며 불평했던 자신에 대해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주도에서는 늘 입던 옷도, 똑같은 반찬으로 지내도 괜찮았던 이유가 뭘까를 생각해보니, “애초에 삶이 지루하지 않으니 옷이나 메뉴따위로 변화를 줄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루한 삶을 소비로 바꾸려 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책은 언뜻 제주도에서 아이들과 한 달을 살아본 사람의 여행기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닌 책입니다. 엄마와 아이가 여행을 통해서 성장한 기록을 담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주도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준다는 점에서 여행기이기도 하고, 아이들을 양육하는 하나의 방법을 알려주는 육아서적이기도 하고, 엄마가 된 여성의 성장 에세이이기도 한 여러 얼굴이 있는 책입니다.


7. 제주에서 한 달을 지내는 것이 생각만 해도 낭만적이기는 한데, 이런 질문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선 비용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월세를 얻고, 항공권을 사는 것으로도 비용이 많이 들텐데요, 전은주씨는 생각보다 많이 들지 않았다고 해요. 일단 꽃님이네가 가장 많이 간 곳이 바닷가와 도서관인데요, 아시다시피 바닷가와 도서관은 입장료가 없지요. 아침은 해 먹고, 점심은 도시락, 저녁은 외식과 해먹기를반반으로 하니까 생활비도 많이 들지 않았다고 해요. 평소 쓰던 한 달 생활비를 바탕으로, 아이들 학원비가 안들어가니까 서울에서 살 때와 큰 차이가 없었던 거죠. 그리고 제주에서 한 달을 지내려면 차가 필요한데요, 렌트 비용이 크기 때문에 꽃님이네는 배에 차를 실어 갔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 편이 더 저렴했다고 해요. 이 책을 읽으면 정말 아이를 데리고 제주도 가고 싶어 온 몸이 근질근질합니다. 꽃님이와 꽃봉이는 밤이면 엄마와 그림 그리기, 만들기를 해서 작품을 벽에 붙여두고, 동화책을 읽고, 비오면 수학 문제도 풀고, 날씨 좋으면 올레길도 가고, 바다도 갑니다. 그리고 금새 다른 아이들과 친구가 되고 밤이면 깊은 잠에 빠집니다. 학원 다닌다고 지쳐 있는 아이의 모습 대신에, 또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모습 대신에 내 아이에게 한 달이라도 그런 시간을 오롯이 주고 싶다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면 안할 수가 없어요. 저도 이 책을 읽고 그런 생각을 이기지 못해 2014년 가을에 아이를 데리고 제주 한 달 살이를 떠났습니다. 그 때 이 책이 정말 도움이 되었어요.

 간단히 제 경험을 말씀드리면, 이 책의 내용처럼 정말 생각보다 많은 비용이 들지 않았고, 저희가 묵은 민박집에 함께 한달 살이 온 가족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제 아이는 남자아이인데, 동갑내기 여자아이가 바로 옆 방에 묵고 있어 함께 여행을 했어요. 지금까지도 서로 연락을 하고 지내고 있구요. 저희는 제주가 준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8. 아, 이번 여름방학에 더 많은 분들이 제주 한달 살이에 도전해보시면 어떨까 하네요. 정리해주시죠.

 아까 디투어링에 대해서, 슬로우 여행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요, 요즘 청년들이 많이 하는 여행 중에 ‘내일로’라고 56500원을 내면 5일 간 열차를 자유롭게 이용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그 여행이 참 근사한 슬로우 여행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거기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낯선 곳을 가보고, 길도 잃어버려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요즘에는 ‘내일로’ 여행 족보가 돌아다닙니다. 어딜 가서 자야하는지, 뭘 보고, 뭘 먹어야 하는지 매뉴얼에 따라 청년들이 다니는 거에요. 이런 여행은 새로운 곳을 경험한다는 여행의 취지와는 맞지 않습니다. 여행이기보다는 쇼핑에 가깝죠. 

 오늘 소개해드리는 <아이들과 제주에서 한 달 살기>에도 숙소로 고려할 만한 곳, 꽃님이네가 다닌 맛집과 카페, 좋았던 장소들이 소개되고 있는데요, 이 책을 읽으시는 독자분이라면 부디 이 책을 족보로 생각하고 이 책을 따라하지 마시고 정말 발길 닿는대로, 마음에 드는 곳에서 서고, 조용한 식당에 들어가보고, 낯선 제주를 경험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전은주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익히되 잊으라”. 계획은 세우고 움직이더라도 아이들과 여행을 할 때는 엄마 계획을 잊으라고 권합니다. 바닷가에 오면 물에 들어가야 한다는 건 엄마 생각이고, 아이들은 그냥 모래만 팔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게 여행의 묘미이고 즐거움이라는 겁니다. 이 책을 제주 여행 족보가 아니라 ‘슬로우 여행 지침서’로 읽으신다면 ‘제주’와 ‘가족’을 재발견하는 기회가 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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