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환 선생의 입국 불허를 반대한다. 모든 조선적이 한국에 입국하게 해달라.


박유하 선생이 아래의 글을 써서 올렸다고 하는데, 놀라운 내용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심지어 이 글을 쓴 후에는 자신은 정영환을 비판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한국 정부를 비판하려고 했다고 한다. 이 글에서 정영환에 대한 비판을 읽은 사람이 있다면 박유하 선생은 이번에도 오독했다고 할 것이다.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비판자들을 모두 오독했다고 비판하는 것과 다를 바 전혀 없다. 오독이야 했을 것이다. 누구나 오독을 하고 모든 읽기는 어느 정도는 오독이니까. 하지만 이토록 오독한 사람을 많이 생산해내는 글을 쓰기란 섬세한 오독 발생의 계기와 장치를 마련하려는 노력 없이도 쉽지 않을 것이다. 오독은 그 계기와 장치에 무심하게 걸려넘어진 결과일까, 그 계기와 장치를 모조리 드러내는 방식일까? 정영환 선생이 이 글에서 말하는 바, 나로서는 아래의 가져온 부분이 정부 비판보다는 정영환 비판에 더 많은 무게가 실린 글로 읽힌다. 어떤가? 이번에도 오독인가? 이렇게 오독이 되도록 글을 쓴 의도가 뭔가? 이 글에서 정영환에 대한 비판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오독에 걸려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나?

박유하 선생의 글 중에서1.
"정영환씨는 한국과 북한에서 정치적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한국입국이 불허된 사람이다. 국가가 개인의 이동의 자유를 관리하는 일에 나는 비판적이지만, 이들의 담론이 한일화해에 대한 강한 두려움을 내비치는 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정영환의 두려움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남들이 나를 빼고(그의 표현에 따르면 망각하고) 화해할까 봐 두려워하기보다는, 재일교포사회와 일본과의, 혹은 북한과 일본과의 화해를 모색하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다.(「누구를 위한 불화인가」 2016년 6월 28일)"

박유하 선생의 글 중에서2.
"나는 국적을 갖지 않는 것을 택한 조선적 분들을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 정점에 작가 김석범 선생이 있고, 내가 ‘조선적’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도 그 분을 통해서였다.
내가 언급한 건 오로지 ‘한국정부의 판단’이다. 쓰여 있지 않는 비난을 굳이 읽어내 비난하는 이들의 행위는, 위안부는 원래 일본인이 대상이었고 국가에 의해 이동당한 가난한 여성이라는 의미로 ‘조선인 위안부는 가라유키상의 후예’라고 썼더니 ‘그건 매춘부라는 뜻!’이라면서 판금[삭제 요구를 가리킬 것이다]을 요구한 지원단체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2016년 6월 29일)"

한국일보에 쓴 장정일 선생의 글도 사실 확인을 중시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라는 자신의 논지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http://www.hankookilbo.com/v/a4d05cd008d94fa6adf0edfb23e92c46) 아마 장정일 선생의 칼럼에서 산케이 신문 보도 관련 부분은 2016년 1월 18일자 기사에 나온 "慰安婦は強制連行された「性奴隷」であるとして、異論を唱えにくい韓国言論界にあって、同書は多様な境遇にあった慰安婦の実態を踏まえた冷静な議論を求め、日韓の相互理解を深めるために書かれたものだ。" 부분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이 기사의 원문 (http://www.sankei.com/world/news/160118/wor1601180005-n1.html)을 보면 산케이가 이 책을 강제동원설을 전제로 한 "한국 정부의 반민주적 작태 vs 언론 표현 자유의 표상으로서의 박유하"라는 구도를 중심으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케이 기사 검색을 해보면 이런 구도는 산케이가 계속적으로 <제국의 위안부>를 다루는 전형적인 논지이며, 한국 정부가 이런 식의 공정한 목소리를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탄압하고 있다는 보도로 박유하 선생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다. 소녀상이 다양한 위안부를 표상하지 못한다는 비판은 박유하 선생을 한국 민주화의 투사로 그리는 산케이신문에 되돌려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산케이가 노골적인 격찬을 한 것은 아닌지 몰라도 이런 대비 구도를 끊임 없이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박유하 선생에 대한 우회적 격찬 아닌가. (어디선가 굳이 이런 점을 읽어내 비판하는 나는 지원단체와 하등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장정일 선생은 산케이의 이런 보도 방식을 모르지 않았을텐데 산케이가 한 말이라고는 '한일 상호 이해 지향' 정도로 언급하는 것을 보니 왜 이를 모른 척하는지 의문스럽다. 한겨레를 비판하는 섬세함이 어째서 산케이에게는 적용되지 않는가. 그 뿐 아니라 장정일 선생의 칼럼에서 30만명 위안부 총수를 추산하는 한겨레의 한 기사에 대한 선생의 비판도 유사 실증주의다. 위안부 총수는 공식 문서가 없어 어떤 견해든 잠정적일 수밖에 없고 40만까지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런 사실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는가. 실증적이지 않은 책은 괜찮고, 실증적이지 않은 신문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건가.

박유하 선생이 내일 정영환 선생의 책에 대해 반론을 위한 기자간담회를 한다고 한다. 부디 정영환 선생의 정치적 활동 내지 재일 지식인들의 책동 운운 음모론 내지 책을 읽지 않았다면 책을 읽으면 풀릴 오해 내지 책을 읽었다면 의도적, 비의도적 오독 내지 왜곡 내지 재판 중에 있는 자신에 대한 비판은 자신을 불리하게 할 뿐이라는 궤변 내지 학술적 논의는 재판 전에 했었어야 하고 자기는 재판 준비 중이라 여기에 모두 대응할 수 없다는 식의 되풀이되는 주술 같은 그간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기자회견이 아닌 차분한 실증적 논박이 제시되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 나는 <제국의 위안부>를 읽은 후 박유하 선생의 분석과 논지에 동의하는 부분도 있었다. 아마 나와 의견이 가장 다른 부분은 '법적 책임'과 관련된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박유하 선생이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 못하는 바 아니다. 내가 동의하기 가장 어려운 부분은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논지인데 이런 부분은 전망의 차이니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책에 제기된 여러 실증적 오류에 대해서는 적절한 응답이 제시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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