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 금지 - 재미있는 게 이기는 거다!
놀공발전소 엮음 / 이야기나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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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이번 주 교통방송에서는 놀공발전소의 <노력금지>를 소개했다. 이 책이 지닌 다채로움과 놀공이 만든 게임의 메커니즘을 제대로 설명했다는 자신이 없다. 게다가 오늘은 내 코너를 마친 후 특집 방송이 있어 13분 내에 소개를 마쳐야 했다. 지난 12월에 플레이어스 캠프에서 피터공을 만나 뵌 적이 있는데, 나보다 더 무섭게 생기셔서 다가가기 힘들었지만 몇분의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피터공이 직접 소개하는 게임과 놀공발전소에 대해서 들을 수 있는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그 때 들었던 내용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정확한 멘션은 기억나지 않지만, 게임은 가상적이지만 게임의 참가자들이 느끼는 경험과 감정은 결코 가상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가상현실을 체험한다고 하더라도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나 자신은 결코 가상적이지 않다는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인데, 나는 그 때 가상현실에서의 체험을 실제현실에서의 체험에 비해 인식론적으로 더 불확실하고, 낮은 질과 등급을 지닌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어왔다는 것을 피터공과 대화하며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예술-경험 자체가 본질적으로 '가상성'과 불가분하다는 것은 당연한 것임에도 유독 게임에 대해서만큼은 그 가상성을 어떤 혐의를 가진 것으로 의심하고 경계하고 있었다. 내가 별로 게임을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도 아마 그런 오해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흔한 스타크래프트 한번 한 적이 없고, 화투나 카드놀이, 장기, 바둑, 모든 종류의 보드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놀이를 굳이 들자면 그냥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이 거의 유일했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랬을까. 돌이켜보건대 나는 가상의 갈등에 참여하면서 내가 갈등으로부터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때 느끼는 그 결코 '가상적이지는 않는 기분과 느낌'을 용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실제 현실에서도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은데 왜 가상현실에서까지 그런 경험을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었던 거다. 가상의 갈등에서 진 것은 내가 바둑판에 둔 흰돌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것을 견디기 힘들었다.

 

더하여, <노력금지>를 이번에 소개하면서 새롭게 생각하게 된 것도 있다. 놀공이 하는 일, 더 본질적으로 게임이라는 것이 현상학적 환원과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현상학은 규정하기 어려운 분야지만, 내 식으로 이해하자면 '보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후설과 하이데거는 모두 사태 그 자체로 가서 사태를 직시하면서 보이는 것을 기술하려고 했다. 즉 관찰자가 아니라 세계 내에 존재하는 참가자로서 말이다. 놀공이 만드는 게임은 그런 의미에서 현상학적이다. 게임 참가자들이 사태의 방관자나 관찰자가 아니라 사태 자체에 들어가도록 게임을 고안하고, 어떤 사태를 기존의 방식과는 다르고 낯설게 볼 수 있도록 한다. 그러니까 놀공클래식의 경우, 우리가 고전에 대해서 갖고 있는 선입견에 대해서 판단 중지하고, 고전에 대해 누군가로부터 듣는 수준이 아니라 게임이라는 '틀'에서 직접 체험하게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특정 고전을 다른 방식으로 보도록 만들고, 게임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 예를 들면 교보문고 강남점이라는 공간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만들고, 심지어 게임에 참여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다르게 보도록 만든다. 놀공이 유니세프와 협력해서 만드는 교육 게임이나 책에 소개된 어느 그룹에서 진행된 창의성과 관련된 게임도 기존의 구호활동, 창의성 자체를 게임을 통해 새롭게 보고 재정의하도록 유도하는데 이런 과정은 '현상학적인 것' 그 자체이다. 

 

현상학 이야기가 나왔으니 더 이어가자면, 하이데거는 '보는 방법'을 배우고자 오랜 시간을 들여야만 했다고 한다. 세잔 역시 생빅투아르산과 사과를 끝도 없이 그렸던 것도 보는 방법에 대한 탐구였다고 할 수 있다. 세잔을 사랑했던 피카소는 세잔이 이룩한 성과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보는 방법을 개척해 나갔다. 즉 그 방법은 '모방'이었다. 피카소는 습작으로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수없이 모방했는데 이것은 단지 테크닉 때문이 아니라 '다른 나'가 되어 보는 연습이었다. 다른 존재가 되어 대상을 바라보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의 반복을 통해 피카소는 자아를 연성화시키고자 했다. 쉽게 말해 모방은 자아를 '말랑말랑'하게 만든다. 창의성, 새롭게 보기는 이 말랑말랑한 자아라야 가능하다. 딱딱한, 경화된 자아의 시선은 일상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에 닫혀 있다. 무엇이든지 '-되기'를 원했던  피카소가 최종적으로 모방하고 싶었던 것은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자유분방하고 언제든지 다른 나자신이 되고,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편견이 없다. 어쩌면 놀공은 놀라운 현상학적 직관으로 자신들이 풀어야 하는 문제, 고전에 대해서, 학습에 대해서, 창의성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새로운 경험을 담은 게임을 고안하고, 게임 참가자들은 게임 속에서 피카소처럼 '다른 나'가 되는 경험으로 자아를 연성화시키고 사태를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된다. 어쩌면 나는 게임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토록 자아가 경직되고 굳어있고, 현상학 연구도 포기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몸이 안좋아져서 읽으면서 든 생각, 다이어트도 '노력금지'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것. 공부보다 살을 빼기 위한 노력의 총량이 더 많았던 것이 그동안 내 삶이었다. 놀듯이 공부하는 것처럼 놀듯이 다이어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놀공발전소를 따라 놀듯이 다이어트하는 놀다이체육관을 만들어보고 싶다. 피터공은 러닝머신을 탈까?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그 기계를 '노력금지'를 세상에 외치는 놀공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궁금해진다.

 

 

노력금지

재미있는 게 이기는 거다!

 

1. 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이번 주에는 출판사 이야기나무에서 만들고, 놀공발전소에서 만든 <노력금지>라는 책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특이하게도 이 책의 저자는 한 사람이 아닙니다. 놀공발전소라는 회사의 구성원들이 함께 쓴 책인데요, 사실 이 책이 특이한 점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노력금지>라는 책의 제목도 독특하고, 책의 구성도 독특하고요, 주제도 독특합니다. 그리고 책을 쓴 이 회사 구성원의 이름도 독특하고, 놀공발전소라는 회사가 하는 일도 독특합니다. 정말 모든 것이 독특한 책을 오늘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2. 그렇게 모든 것이 독특할 수 있나요? 어떤 책일지 궁금해집니다. 먼저 책의 저자가 놀공발전소라고 하셨는데요 어떤 곳인가요? 꼭 동아리 이름 같아요.

 

놀공발전소는 ‘놀공’으로 부르기도 하는데요, 한마디로 말하면 게임을 만드는 회사입니다. 게임이라고 하면 아마 많은 분들이 컴퓨터 게임이나 보드게임 같은 것을 떠올리실텐데요, 이 회사는 좀 다른 종류의 게임을 만듭니다. 사람들이 직접 움직이며 체험할 수 있는 빅게임을 만드는데요, 예능 프로그램 중에 “러닝맨”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죠? 거기에서 출연자들이 미션을 수행하고, 추격전을 펼치는 것을 생각해보시면 이해가 쉬우실 겁니다. 놀공발전소는 이렇게 게임 참가자들이 말을 움직이거나 캐릭터를 손가락으로 조작하는 게임과는 달리 참가자들이 직접 카드가 되고, 캐릭터가 되는 게임을 만드는 회사라고 소개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게임을 만드는 회사라는 설명만으로는 놀공발전소를 제대로 소개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놀공에서는 게임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삶의 반경과 생각의 깊이가 게임을 통해 확장되도록” 만들겠다는 거지요. 그래서 이 회사의 이름이 놀이발전소가 아닙니다. 놀이와 공부의 첫 글자가 합쳐진 ‘놀공발전소’죠. ‘놀 듯이 공부하자!’라는 뜻을 품고 있는 회사인 겁니다. 그래서 이 회사는 게임을 만드는 동시에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거죠.

 

3. 아, 놀공발전소가 그런 뜻이었군요. 놀 듯이 공부하고, 공부하듯이 논다.

 

이 책의 제목 <노력금지>, 부제인 “재미있는 게 이기는 거다!” 라는 말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노력금지라는 말은 놀공을 창립한 피터공의 좌우명이라고 해요. 피터공은 미국 뉴욕에서 대학을 마치고 19년 동안 생활하면서 ‘Dinner Dash'라는 성공한 게임을 만든 게임회사의 CEO였습니다. 피터공은 게임회사를 세우기 전에 타임지에서도 일을 했고, 제약회사에서도 있었는데 그 때 “내가 진정으로 즐거운 일이 아니라면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해요. 이렇게 말하면 꼭 해야 할 일 중에 꼭 즐겁기만 한 일이 아닌 것도 있다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요, 피터공의 말은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피터공과 놀공발전소는 하기 싫지만 어떻게 하면 우리가 꼭 해야 할 일들을 ’게임‘을 활용해서 즐기면서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겁니다.

공부도 바로 그런 거죠? 꼭 해야 하지만 하기 싫죠. 사실 학창시절에 공부 참 하기 싫잖아요. 그래도 엉덩이에 진물이 날 정도로 앉아서, 졸리면 허벅지를 연필로 찔러가면서 공부했던 기억이 누구나 있죠? 피터공은 공부도 게임을 이용하면 전혀 다르게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게임의 문법을 이용하면 지루한 공부도 재미있게, 그리고 더 낫게 공부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책에서 피터공은 게임을 “플레이어가 규칙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갈등에 참여하고 그 과정에서 측정 가능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시스템”이라고 규정하는데요, 어떤 게임이라도 해 보셨던 분은 다 아시겠지만 이 게임 속의 갈등은 분명히 현실이 아니고 가상인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참여하면서 갈등에서 이기려고 노력하고, 지면 분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이런 게임의 특성을 현실을 변화시키고, 사람들이 힘들게 느끼는 학습과도 접목시켜 보겠다는 것이 피터공의 생각이었던 거지요.

 

4. 놀공발전소의 대표인 피터공이라는 이름도 특이하네요. 성이 공씨인건가요?

 

특이하죠? 저는 처음에는 좀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피터공의 본래 이름은 피터 리거든요. 근데 왜 피터공이라고 할까, 이상했습니다. 그런데 피터공 뿐만 아니라 놀공발전소의 모든 구성원들의 호칭에도 지인공, 애련공, 은현공처럼 공이 붙어 있습니다. 피터공은 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온 후 수평적인 대화환경을 만들기가 어려웠다고 해요. 창의적인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멤버가 수평적으로 자유롭게 토론하고 비판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는데 서로를 부를 마땅한 호칭도 찾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씨’라고 하기에는 건방지고, 영어 이름을 만드는 것도 어색했다고 해요. 그래서 이름 끝에 ‘씨’를 대신해 ‘공’을 붙여 부르기로 했다고 합니다. 뭔가 옛날 유럽 귀족 호칭도 연상되고 나이 차이나 직위 차이도 지워지기도 하고, 구성원들 간의 멤버십도 돈독해지는 효과가 있었다고 합니다. 놀공만의 특이한 조직 문화인데요, 놀공만이 지닌 독특하고 재밌는 조직문화가 이 책에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혹시 진행자분은 다른 회사 워크샵에 가본 적 있으세요? (대답) 내 회사 워크샵도 가기 싫은데 다른 회사 워크샵을 왜 갑니까? 그런데 놀공멤버들은 새로움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기 위해서 다양한 사람들을 워크샵에 초대해서 1박2일간 게임하고, 바비큐하고, 콘서트도 한다고 해요. 놀공에는 놀공싸롱이라는 모임도 있는데요, 한 달에 한 번 마지막 주 수요일 저녁 7시에 놀공사무실에서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를 초대해 자유로운 만남을 갖는다고 해요. 이렇게 창의적인 조직 문화 속에서 창의적인 결과가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5. 놀공발전소가 만들어낸 창의적인 결과물이 어떤 것들이 있나요?

 

이 책에는 놀공이 만들어지는 과정, 멤버 소개, 놀공만의 문화 뿐 아니라 놀공이 그동안 해온 일을 하나씩 소개하고 있는데요, 저는 그 중에서도 놀공클래식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마도 문고판 책이 나오는 펭귄클래식에서 착안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요, 놀공클래식도 펭귄클래식처럼 고전을 다루는 프로젝트입니다. 그동안 놀공에서는 놀공클래식으로 조지 오웰의 <1984>,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니나>,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쥴리엣>, 괴테의 <파우스트>와 같은 고전을 다뤘다고 합니다.

 

6. 아, 그러면 고전을 게임으로 만드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정말 놀랍죠? 저는 이 책에서 놀공클래식을 소개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사실 고전은 읽기 힘들고 어렵잖아요? 고전은 꼭 읽어야 되는 책이기는 한데 정작 읽은 사람은 잘 찾기 어려워요. <로미오와 쥴리엣>도 많은 분들이 영화나 동화로 보았지, 정작 이 책을 원작 그대로 독서한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솔직히 저만 해도 그렇구요. 놀공클래식은 고전을 놀공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게임의 문법을 활용해서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이 ‘고전’을 친숙하게 여길 수 있도록 만드는 게임 시리즈입니다.

 

한 예로 <1984>라는 소설은 전체주의 국가에서 빅브라더가 사람들을 통제하는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는 작품인데요, 놀공은 자체 스터디를 통해서 <1984>라는 작품 안에서 구어를 대신하여 ‘신어’, 그러니까 새로운 말을 빅브라더가 개발해 사회를 통제해 나갑니다. 신어를 개발하는 목적은 글의 구조를 단순하게 만들고, 어휘의 양을 줄여서 사회의 구조를 위협하는 사상 범죄를 차단하는 것에 있는 것인데요, 왜냐하면 어휘가 단순해지면 사고의 폭이 좁아져 사상 범죄가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놀공은 <1984>에 대한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게임 규칙은 이렇습니다. 12개의 부스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각각 서로 다른 단어가 스티커로 보관되어 있습니다. 12개의 부스에는 빅브라더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게임 참가자는 그 얼굴 앞으로는 지나갈 수 없습니다. 참가자는 12개의 부스를 드나들며 그 속에 있는 단어를 기억하고, 방송에서 기습적으로 어떤 단어를 찾으라고 하면 그 단어가 적힌 부스를 찾아서 자신이 가지면 됩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해서 가장 많은 단어를 수집한 사람이 승리하는 게임입니다. 물론 실제 게임에는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세부적인 장치들이 있습니다.

 

7. 일종의 단어 스티커의 위치를 기억해서 많이 가지면 이기는 게임이군요.

 

네, 단순해보이지만 이 게임에는 <1984>와 관련된 많은 장치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빅브라더의 얼굴 앞으로 지나가지 못하는 규칙은 빅브라더의 통제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찾아야 하는 단어는 빅브라더가 없애려고 하는 구어를 상징하구요, 그리고 참가자는 게임에 참여를 하면서 이 소설의 핵심 주제라 할 수 있는 전체주의적인 통제 사회의 문제점을 온 몸으로 깨닫게 되는 겁니다. 실제로 후기를 보면 사람들이 이 게임을 계기로 <1984>를 직접 읽게 되었다고 해요. 게임을 통해, 놀이를 통해 공부한다는 놀공의 목표대로 말이죠.

 

8. 게임을 통해서 직접 체험하게 되니까 그냥 고전이 중요하다고 들을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다르겠네요.

 

저는 이 게임을 직접 해본 적이 없는데도, 책에 소개된 게임 방법을 읽고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놀공클래식에서 다룬 고전작품들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피터공은 이 책에서 학습에도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고 해요. 전통적인 관점에서 학습은 무엇에 관해서 배운다라는 목표 하에서 지식 전달이 핵심이었지만 지금은 클릭 한번만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이런 식의 학습은 불필요해졌다고 해요. 피터공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 어떤 활동을 할 때 자신이 가장 즐거운지 알 수 있는 기회를 교육을 통해 제공해야 한다. 마치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가 자신의 정체성을 마법사, 요정, 기사 등으로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운 과제 앞에서 능수능란하게 전화하는 법을 알려주고 싶었다. 즉 놀공이 생각하는 교육 모델은 누군가가 되는 법을 배우는 형태였다”.

 

즉, 게임을 통해서 ‘누군가가 되는 법’을 배운다는 거죠. 수학을 배워야 한다면 공식을 위한 지식습득이 아니라 직접 수학자가 된 것처럼 사고하고 문제를 해결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게임을 통해 가능할 수 있다는 거죠. <1984>라는 게임에 참여한 사람은 직접 전체주의적 통제 하에 놓여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되고, 그것이 고전으로 더 가까이 가도록 해주는 징검다리가 되는 겁니다.

 

8. 끝으로 청취자들에게 책을 추천하시는 이유를 말씀해주세요.

 

놀공은 놀공클래식에서 <안나 카레니나>를 런칭하기 위해서 박웅현씨와 함께 강독회를 합니다. 박웅현씨는 <책은 도끼다> <여덟단어>와 같은 좋은 인문서를 쓴 유명한 광고디렉터시죠? 그리고 <파우스트>는 독일문화원의 요청으로 만들어져 이미 글로벌한 프로젝트가 되어 성공을 거뒀습니다. 놀공발전소라는 작은 회사가 해내는 일이 놀랍지요? 저 역시 책을 읽는 내내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지금의 일상과 일에 권태를 느끼는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아주 일부만 소개해드렸지만 놀공발전소가 해온 일은 결국 우리가 세계를 조금 다른 방식과 태도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것이라 정리할 수 있습니다. 게임이라는 틀로 공부, 사회, 세계를 바라보니까 이전에 가치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는 거지요. 놀공은 놀공 클래식의 하나로 <로미오와 쥴리엣>을 게임으로 만들었는데요, 이 게임은 영업이 끝난 강남 교보문고에서 진행했다고 합니다. 어렵고 딱딱한 고전만 새롭게 보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점이라는 일상적 공간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도록 만들어 준거죠. 지루한 일상에서 너무 많은 노력으로 고단해 하시는 분들에게 <노력금지>, 이 책을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일상을 새롭게 보는 마법의 방법을 익히게 되실 겁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피터공과 놀공발전소가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일로, 자신들이 가장 즐거워 하는 일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공부는 힘들고 지루하고 어렵다는 우리 모두가 한번은 겪는 고민을 ‘노력금지’를 외치면서 더 즐겁게 해나갈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놀공발전소가 게임으로 일과 놀이와 예술을 재정의하고 있다고 감히 단언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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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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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비행운, 민폐의 존재론

 

 교통방송에서 이번 주에 소개한 책은 김애란 작가의 <비행운>이다. 이 책은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2013년에 소개된 적이 있는데, 나도 이 소설집을 좋아해서 이번에 소개하게 되었다. 빨간책방 팟캐스트에서는 김애란 작가가 직접 나와서 이 소설집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는데, 나는 그 방송을 KBS 1 라디오 '공부가 좋다'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위해 서울로 가는 길에 들었다. 이렇게 정확히게 기억하는 이유는 이 방송 이후로 빨간책방을 더 이상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동진을 평론가로서 신뢰하는 편이지만 이동진이 작가 앞에서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것이 불편했다. 마치 자신의 독해를 작가로 끝없이 추인 받으려는 것처럼, 작가가 작품에 대해서 너무 많은 말을 하도록 만드는 것 같았다. 배울 것이 많았던 방송이었지만 지금 기억나는 거라곤 그 때의 불편함, 김애란 작가의 조곤조곤 낮은 목소리와 시적인 화법과 같은 분위기 뿐이다.

  내가 이 소설집을 좋아하는 이유는 김애란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잘 어울리는 '간신히' 라는 말 때문이다.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주인공들은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따라 읽어가다보면 모욕감을 받는 것도 '간신히' 살아남은 나고, '간신히' 살아남은 누군가에게 모욕감을 주는 것도 나라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니까 사는 것은 끝없이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이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에서의 선배의 삶도, <서른>에서 수인의 삶, 수인의 남자 친구의 삶도, <벌레들>에서 임신한 아내의 삶도 끊임 없이 누군가에게 폐를 끼친다. 소설 속의 어느 누구도 악인은 없다. 갑도 없다. 간신히 살아남은 을이 간신히 살아남은 을에게, 보통 사람이 보통 사람에게 모욕감을 주고, 민폐를 끼치고, 모욕을 당하고, 민폐를 떠안으며 살아간다. 마치 내 삶처럼 말이다. 나는 항상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자책에 시달린다. 내가 여기 살고,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 민폐가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 때면 우울한 기분마저 든다. 카드를 돌려 막듯이 누군가에게 짐을 떠 넘기며, 억지로 지게 하고, 그리고 모른 척 한다.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민폐고, 민폐는 죄다. 이런 생각이 나를 너무 강하게 사로 잡을 때면 예수를 생각한다. 원죄라는 것은 민폐를 끼치는 인간의 숙명을 두고 하는 말이었구나, 우리는 신에게까지 민폐를 끼치고 신을 죽게 만들었구나, 그리고 내가 끼치는 민폐를 기꺼이 예수만큼은 져주려고 했던 것이구나 하고 신을 부르게 된다. 물론 <비행운>은 이런 신앙의 세계가 아니다. 민폐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행운은 민폐를 떠 넘겨 받은 사람의 비-행운으로만 이뤄진다는 비극의 세계, 그렇지만 작가의 시선은 처절하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다. 


 어쩌면 이 소설집의 윤리는 이런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세계의 저 아래에는 세계의 저 위에서부터 떠넘긴 온갖 민폐를 다 떠 맡은 누군가가 허덕이고 있겠지?", "그들은 지금 '간신히' 살아남기라도 한 것일까?". 이런 질문 앞에 우리를 서게  한다는 점 말이다.

 

비행운

- 김애란 소설집

 

1. 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네, 이번 주에 제가 소개해드릴 책은 출판사 문학과 지성사에서 만들고 김애란 소설가가 쓴 <비행운>이라는 소설집입니다. 김애란 작가는 강동원씨와 송혜교씨가 나온 영화였던 <두근두근 내 인생>의 원작자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오늘 소개해드릴 책은 김애란 작가의 단편소설집입니다. 모두 여덟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요, 진행자님께서는 ‘비행운’이라고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2. 비행운이라니까 비행기가 날아갈 때 생겨나는 구름이 먼저 떠오르는데요.

 

네, 이 책의 제목인 ‘비행운’은 사실 이중적인 의미가 있는데요, 말씀하신대로 비행기가 만들어내는 구름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비-행운, 그러니까 행운이 아니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 소설집에 나오는 주인공들 대부분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제목이 많이 암시하고 있습니다. 행운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 결국에는 비-행운, 행운이 아니었던 것들이 밝혀지는 과정이 8편의 소설이 공유하고 있는 이야기의 구조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라는 단편 소설 많이들 아시지요? 인력거꾼이 오늘따라 손님이 많아 운수 좋은 날인 줄로만 알았는데 집에 돌아가보니 아내가 죽어있었던 것이죠.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는 그런 비행기를 타는 것과 같은 기분 좋은 행운과 모든 것이 꼬이고 엉망이 되어 버리는 비-행운의 엮이면서 진행됩니다.

행운에서 불운으로 전개되는 악화 일로의 이야기이지만 분위기가 무겁거나 어렵지 않습니다. 재밌어서 조금씩 아껴 읽게 되는 책입니다.

 

3.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뒤돌아 보면 꼭 그렇지 않은 일도 있어요. 비행운이 비행기가 날아간 뒤에 생기는 것처럼, 어떤 일이 행운이었는지 불운이었는지도 지나봐야 알게 되더라구요.

 

비행운이라는 제목으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 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책의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 지나간 자리에서 생긴 비행운이 행운이 아니라 ‘불운’이었다는 비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한 작품을 소개해드리고 싶은데요, <너의 여름은 어떠니>라는 가장 앞에 실린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서미영이라는 여자인데요,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잠깐 쉬면서 살이 찐 것으로 나옵니다. 서미영은 친구의 장례식 날, 2년 만에 대학 선배로부터 전화를 받게 됩니다. 만나자는거죠. 미영은 살이 찐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고민하다가 ‘도와달라’는 선배의 부탁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나가기로 마음 먹게 됩니다. 왜냐하면 미영이 대학 다닐 때 이 선배를 좋아했거든요. 대학 다닐 때 선배는 시 모임에서 미영이 쓴 시를 좋다고 격려해주고, 야구장에도 처음 데려가줬다고 해요. 자기가 한 때 좋아했던 선배를, 지금도 생각하면 설레는 선배를 도와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대를 품고 선배가 일하는 방송국으로 갑니다. 더운 여름에 땀이 채이고, 저녁에는 친구 장례식도 가야하지만, 선배를 2년만에 다시 만난다는 설레는 마음을 가지구요.

 

4. 아, 한 때 좋아했던 선배를 만난다는 것은 그런거죠. 뭔가 두근두근대고, 심장이 떨리고..

 

네, 미영도 그런 마음으로 선배를 만나러 나갔는데, “선배는 자신이 맡은 프로그램에 누군가 펑크를 냈는데 그것을 자기 메꿔야 하는 상황이라고, 일반인 중에 구해야 하는데 아는 사람도 없고, 입사한지 얼마 안 돼 애를 먹고 있다며” 미영에게 잠깐 출연해줄 수 없냐고 부탁을 합니다. 미영이는 창피해서 하기 싫었지만 선배가 담당 피디에게 혼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흔들려 내키지 않지만 그만 수락하고 맙니다. 미영이 나가기로 한 방송에는 핫도그 먹기 챔피언인 탱크탑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늘씬한 여성과 뚱뚱한 역도선수, 유도선수, 그리고 일반인 여성 중 누가 가장 핫도그를 많이 먹는지를 보여주기로 되어 있었던 겁니다. 미영은 일반인 뚱보 여성 역할을 맡았고, 뚱뚱한 푸드 파이터가 되어서 날씬하지만 핫도그를 더 많이 먹는 챔피언을 부각시켜야 했습니다. 게다가 뚱뚱한 몸매를 도드라지게 하려고 ‘레슬링복’을 입고 말이죠.

 

5. 갈수록 가관이네요. 오랜만에 만난 선배가 방송에 대타가 되어 달라고 하고, 그것도 모자라 푸드파이터가 되어 달라고 하고, 심지어 레슬링 복장까지 입혀서 핫도그를 마구 먹게 하고..

 

야구장에 가서 소릴 지르고 싶다고 하면 “너는 야구장이 소리 지르는 덴 줄 아니”, “야구장은 신전이야”라고 했던 선배는 “그냥 평소 너 먹는대로만 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워서 방송국을 황급히 빠져나간 미영을 쫓아와서 선배는 “오늘 고생했어. 고마워. 너 편할 때..”. 그러고 나서 뭐라고 그러는지 아세요? “문자로 계좌번호 좀 넣어주라. 주민번호랑...”

6. 아, 가슴 아픈 이야기인데요, 미영이가 느낀 모욕감이 엄청 컸겠네요.

 

네, 미영이 받은 선배의 전화는 미영의 마음을 잠깐 설레게 하고 돌이킬 수 없을 만큼의 모욕감을 느끼도록 만들었는데요,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가 독자들에게 ‘모욕감’이 무엇인지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 작품만이 아니라 이 책에서는 공항의 화장실 청소부, 다단계 판매원, 철거 아파트 주민 등 ‘모욕감’을 경험하는 캐릭터들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데요, 작품들을 따라 읽어가다보면 우리가 한 개인이 느낄 수 있는 모욕적인 기분에 대한 상상력이 없이 살아왔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한 때 사랑했던 남자 앞에서 레슬링복을 입고 푸드파이터가 되어 핫도그를 허겁지겁 먹으며 출연료를 달라고 계좌번호를 보내야 할 때 느끼는 그 기분, 그 기분을 이해하는데 이 소설집의 가치가 있습니다.

 

미영의 예는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사실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누군가의 신체나 외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나, 취업이나 결혼에 대해서 종용하거나, 장애를 가진 분들에 대한 차별적인 표현들도 누군가에게는 모욕이 됩니다. 미영처럼 사람은 누구나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고, 지키고 싶은 자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그 프로에서 뚱뚱하거나 외모가 예쁘지 않은 개그우먼들을 희화화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웃고 있지만 사실 그런 역할을 맡은 개그우먼들은 모욕감을 느끼지 않을까요?

 

7. 소설 속의 주인공은 화도 나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냥 무기력하고, 허탈하고, 답답했을 것만 같은데요, 작품을 듣고 말씀을 들어보니, <비행운>이라는 책 제목이 정말 와닿네요. 작가는 왜 이토록 불운이 겹치는 이야기를 쓴 것일까요?

 

네, 이 소설집은 정말로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벌레들>이라는 작품에서 주인공은 전세값 너무 올라 내몰리게 되었는데, 간신히 재건축을 앞둔 허름한 빌라에 안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끝도 없이 나오는 벌레를 잡으려다 애쓰는 과정에서 임신한 주인공이 전화도 없고, 누구의 도움도 요청할 수 없는 곳에서 출산을 하게 됩니다. <물 속 골리앗>이라는 작품에서 주인공은 아버지는 크레인에서 실족사로 죽고, 어머니는 당뇨 쇼크로 죽고 자신만 큰 홍수 속에서 화장실 문을 떼어내 뗏목 삼아 간신히 살아남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런 이야기는 소설 속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야,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지만 사실 현실은 이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습니다. ‘간신히’, 겨우 살아남은 자들이 그리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제 뉴스를 보니 청년 실업이 12.5%가 넘어 역대 최대라고 하지요? 청년들은 지금 정말 ‘간신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취업을 한 청년들의 경우에도 일자리의 질이 그렇게 높지만은 않아요. 비정규직이거나 정규직 파트타이머도 상당히 많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물 속 골리앗’의 주인공처럼 역시 ‘간신히’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노인 빈곤율이 우리나라가 OECD 최고라고 하지요? 우리 어르신들도 자식들 키운다고 고생하시고 ‘간신히’ 살아가고 계십니다. 얼마 전 뉴스에 종교 시설에서 주는 500원을 받기 위해 하루 종일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는 500원 순례길에 대한 보도가 나온 적이 있죠. 하루에 6000원을 벌어 한달을 그렇게 해서 방값을 ‘간신히’ 낼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김애란 작가는 불운이 끝도 없이 겹치는 상황을 우리 시대의 실존적 상황이라고 본 것 같아요.

 

8. 사실 직장인들도 ‘간신히’ 살아가고 있죠?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으니까요. 소개해주신 이야기를 들으면서 작품 속에 판타지적인 요소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어쩌면 판타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소설집의 가장 끝에 실린 <서른>도 ‘간신히’ 살아가고 있는 수인이라는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재수 끝에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지만 마땅히 취업할 곳이 없었던 수인은 보습학원에서 60만원을 받는 강사가 됩니다. 꽤나 아이들에게 인기있는 강사가 되었는데, 그러다 아버지에게 일어난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해요. 빚이 많아지면서 돈이 급하던 차에 예전 남자 친구의 추천으로 다단계 판매를 시작하게 됩니다. 3만원 짜리 시계를 58만원에 넘기고, 15만원짜리 핸드백은 120만원에 건네고, 아는 사람 모두에게 전화를 걸어 인맥을 팔다가 수인은 결국 자기가 빠져 나오기 위해서 학원에서 자기를 좋아해주던 학생을 끌어들이기까지 합니다. 결국 그 학생은 자살을 시도한 후 식물인간이 되고, 수인은 큰 충격과 자괴감에 빠지게 됩니다.

 

이 작품을 보면,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이용하고, 또 어쩔 수 없이 빠져들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악의가 없다하더라도 자기가 살아가기 위해서 누군가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지요. ‘간신히’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는 서로를 이용하게 됩니다. 만약 여유 있게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 협력을 할 겁니다. 그래서 이 소설집은 우리 시대의 처절한 생존기이자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9. 끝으로 이 책을 우리 청취자분들게 추천해주시는 이유를 말씀해주세요.

이 책은 비극적인 이야기지만 차갑지 않고, 따뜻합니다. 그래서 비극적인 이야기를 읽어가다 보면 슬픔에 빠지기 보다 마음이 치유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작가가 간신히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겪고 있는 모욕감을 알아주고 있고, 살아가기 위해 다른 사람을 짓밟으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도 되돌아 볼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삶에 지쳐 있는 분들에게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우리 주변의 ‘간신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에 대한 깊은 상상력과 성찰을 줍니다. 우리가 저마다 다 ‘간신히’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서로 밟기보다는 오히려 서로를 격려해줄 수 있습니다. <서른>에서 수인은 재수할 때 고시원에서 만난 임용고사를 8번이나 낙방한 언니를 격려합니다. 이번 봄에는 주변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계시는 분들을 격려해보시면 어떨까 하여 이 책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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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 팻, 비만과 집착의 문화인류학
돈 쿨릭.앤 메넬리 엮음, 김명희 옮김 / 소동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방송에서는 하지 못한 이야기.
교통방송에서 17번째로 소개한 책이다. <팻>. 지금 서경식 선생님은 아주 날씬해지셨지만 10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덩치가 크고 머리도 아주 짧게 자르시고, 중절모에 검은 코트를 입고 다니셨는데, 서경식 선생님을 내게 소개시켜 주셨던 사학과 I 교수는 내게 "따뜻하고 다정한 분이시지만 실제 만나뵈면 야쿠자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하셨다. 서울에 선생님께서 계실 때 선생님께 비만인권리투쟁협회, 비투협을 만들어야 한다고 농담을 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그저 웃기만 하셨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가끔 비투협에 대해 언급하셨다. 나는 정말 그런 협회가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비만인권리협회가 미국에서 소수이지만 현재 활동을 하고 있고, 이 책에 소개된 내용을 보면 활동이나 철학이 아주 섬세하다. 예를 들어 협회 소속원들이 다이어트를 하는 것은 모순적일까, 우리의 주장이 청소년들에게 전달되는 것은 과연 바람직할까 등등의 진지한 고민, 그리고 길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뚱뚱하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묻는 등의 캠페인은 섬세하게 계산하지 않았다면 이뤄지기 어려웠을 활동이다. 특히 기억에 남는 내용은 뚱보 인권운동가에게 "사이즈가 얼마냐?"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이다. 사이즈는 달라진다고 한다. 브랜드마다 다른 사이즈를 입고, 셔츠와 코트와 바지를 살 때도 같은 사이즈가 아니고, 시기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그리고 그들은 비만인들에게 맞는 옷 사이즈가 제공되지 않는 브랜드 매장 앞에서 공격적 시위를 하기도 한다. 나만 해도 이 정도 몸집이 되면 어지간한 브랜드에는 사이즈가 없을 때가 많다. 나는 폴 스미스에서 만든 옷을 예쁘다고 생각해 왔는데 여태 단 한번도 사입어 본 적이 없다. 사이즈가 없어서 둘러보다 그냥 나오기 민망해 머플러를 하나 산 것이 전부다. 랄프로렌은 예민한 디자인 감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선호할 만한 브랜드가 아닐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폴로가 없다면 기성복 라인에서 내 몸에 맞는 남방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20대 초반에는 제일모직에서 나온 푸부라는 브랜드가 있었는데, 지금은 잘 찾아보기 힘들고 내 나이대에 걸맞는 디자인도 아니다. 백화점 점원들은 내가 너무 커서 맞는 옷을 팔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 하지만 시장 상인들은 나와 눈을 마주치면 "사이즈 없어요"라고 물을 기회도 주지 않는다. 심지어 제주에 어떤 시장에서는 사이즈를 볼 수 있냐고 물으니 상인이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보던 TV를 보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살을 가장 빼고 싶은 이유를 들자면 폴로 말고 다른 옷을 입어 봤으면 하는 것이다!
방송에서는 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은데, 특히 뚱보 포르노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아쉽다. 뚱보 포르노에는 뚱보 여성이 성관계하는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저 가슴과 배를 드러내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생크림을 숟가락으로 떠먹는 모습을 비춰 준다는 것인데, 저자는 말년에 푸코가 가학/피학 성애에 대해 말을 많이 했다는 것을 가져와서 아마 푸코도 뚱보 포르노에 열광했을 것이라 예상한다. 푸코의 관점에서 이런 '변태 성향'은 남근 중심의 성적 욕망이 재배치된 결과이다. 보통 포르노 영상은 금지되고, 소수적인 취향을 미세하게 반영한다. 엄청나게 뚱뚱한 여자가 마음껏 음식을 먹는 것을 보는 것은 '금지'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에서 별 차이가 없다. 뚱보 포르노에서 '비대한 살'은 역겹거나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랑스럽고 욕망의 대상이 된다. 성기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과 비슷하게 말이다. 아무튼 이 책은 '뚱뚱하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문화사회학적으로, 인류학적으로 해명하는 여태 보지 못했던 책이다. 솔직히 말해 잘 읽히지는 않는다. 그래도 팻에 대해서만큼은 팻하게 담고 있는 아주 내실 있는 책이다.

<팻>
비만과 집착의 문화인류학

1.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책을 소개해주시겠어요?

벌써 2016년도 두 달이 지나 벌써 3월이 되었는데요, 새해에 세우셨던 계획과 다짐이 지금까지 잘 지켜지고 있으세요? 저는 새해 다짐은 세울 때마다 지키는 것을 실패하는 편이라 잘 세우지 않는 편인데요, 그래도 해마다 다짐하는 것이 있다면 “올해는 정말 살 한번 빼보고 싶다”는 겁니다. 청취자들은 저를 보신 적이 없으실테니까 모르시겠지만 사실 저는 상당히 뚱뚱하거든요. 그래서 연초에 피트니스 센터를 등록하긴 하는데요, 사실은 몇 번 가지 않고 그만둔 적이 많습니다.

2. 그런 분들이 많으시죠. 피트니스 센터를 등록하고 나서 운동은 하지 않으시고 거기서 목욕만 하고 오시는 분들도 많으시더라구요.

저도 그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헬스, 건강, 외국어 공부하기와 관련된 상품이 연초에 많이 팔리는데요 이런 것을 ‘결심산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결심과 다짐을 이용해서 장사를 하는 것인데요, 저도 매번 결심만 하고 있고, 벌써 살을 좀 빼보겠다는 연초 다짐은 물건너간지 오래인데요, 오늘 소개해드릴 책은 제가 그런 고민 끝에 찾아 읽게 된 <팻>이라는 책입니다. 출판사 소동에서 만들고 돈 쿨릭과 앤 메넬리가 쓴 책입니다. 그리고 책 속에서 어느 정도 답을 찾았는데요, 결국 다이어트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 책에 따르면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의 76%는 다이어트를 시작한지 3년 뒤에 다이어트 이전보다 살이 더 찌며, 5년 뒤에는 95%나 살이 더 찐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차피 살을 뺐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다시 돌아가게 된다는 거죠. 제 경험에 비춰봐도 정말 맞는 이야기였구요, 유명한 아나운서인 이금희씨와 같은 분이나 오프라 윈프리 경우에도 정확하게 이 통계와 일치하는 사례입니다. 결심산업 같은 것이 되는 이유가 사실은 다이어트를 사람들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이어트의 효과가 별로 없기 때문인거죠.

3. <팻>이라고 하면, ‘뚱뚱함’이라는 말인거죠? 그러면 제목이 우리 말로 ‘뚱뚱함’ 인거네요.

맞습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뚱뚱한 것, 그러니까 비만에 대해서 쓴 책인데요, 영어인 팻은 사실 ‘뚱뚱하다’는 뜻 외에도 여러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에요. ‘기름’을 의미하기도 하구요, 어떤 경우에는 부유하고 풍요롭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살찐’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냥 ‘살’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의 번역자가 ‘팻’이라는 제목을 그대로 사용한 건데요, 이 책은 이렇게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팻’의 다양한 측면을 재밌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책 속에 흥미로운 내용이 정말 많은데요, 니제르 사람들이 뚱뚱한 여성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유, 뚱보 포르노 영화가 만들어지는 이유, 하와이 사람들이 스팸 통조림을 좋아하는 이유가 소개되기도 하구요, 토스카나 지역에서 올리브유가 갖는 의미 등 한 마디로 ‘뚱뚱함’에 대한 정말 다양한 정보와 다각도의 시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 비만과 관련된 책이 다루는 살을 빼는 방법이나 살을 빼야 하는 건강상의 이유 같은 것은 전혀 다루지 않습니다. 이 책은 다이어트에 관심을 갖는 독자들이 ‘지방’에 대해서, ‘뚱뚱함’이나 우리 몸의 체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를 주려고 합니다. 책의 부제가 ‘비만과 집착의 문화인류학’인데요, 문화인류학적 방법으로 ‘뚱뚱하다는 것’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주는 책이죠. 딱 저 같은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책인거죠.

4. 그렇네요. 우리는 흔히들 비만은 무조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은 다른 관점을 보여주는 책인거네요.

네, 이 책도 비만이 건강에 해가 된다는 명백한 과학적인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비만은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을 책의 초반부터 이야기해두고 시작합니다. 책의 한 부분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뚱뚱함을 걱정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최근 <이코노미스트>는 비만 특집호에서 비만의 몇 가지 문제점을 이렇게 요약했다. “뚱뚱하다고 해서 죽는 것은 아니지만, 비만한 사람은 여러 질병에 걸려 일찍 죽게 될 위험성이 높다. 과체중인 여성은 표준 체주의 여성보다 제2형 당뇨병에 걸릴 확률이 다섯 배 높고, 고도 비만인 여성은 50배나 더 높다. 비만은 암과도 관련이 있다. 최근 미국의 한 연구에 따르면, 암으로 사망하는 남자의 14%와 여자의 20%는 비만에 원인이 있다. 또한 과체중은 전쟁, 말라리아, 에이즈를 제외하고 전세계 인류의 최고 사망원인인 심장병의 주요 발병 요인이기도 하다”. (중략) 이런 식으로 논박의 여지가 없는 증거를 앞에 두고도,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을 살이 찌도록 놔두는 걸까? 아마도 현실의 삶은 훨씬 더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맞는 이야기죠? 사실 저도 비만이 이런 건강에는 정말 좋지 않다는 것을 몰라서 살을 빼지 못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비만이 건강에만 좋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문화에서는 ‘뚱뚱하다’는 것은 자신의 신체를 가꿀만한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해서 빈곤을 표시하기도 하고, 또 ‘게으르고 둔하다’는 이미지도 있으니까 이런 온갖 것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부정적인 것이 많은데 사람들이 살을 빼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이상한 일이죠. 이 책에서는 인간과 현실이 아주 복잡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거죠.

5.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요. 비만에서 벗어나야 할 이렇게나 많은 이유가 있는데 왜 살을 빼지 못하는 걸까요?

이 책에 ‘스팸’을 다룬 챕터가 있는데요, 스팸이라는 통조림 제품 잘 아시죠? 짭짜름한 맛을 내는 고기 통조림인데요, 이걸 하와이 사람들이 아주 좋아한다고 해요. 미국에서 스팸 소비가 가장 많은 지역이고, 스팸과 관련된 축제도 열리는데, 여기에서 스팸 만리장성 쌓기, 기네스북에 올리기 위한 세게에서 가장 긴 약 99미터의 스팸 무스비 만들기 만들기 대회 같은 것을 열 정도로요. 그런데 하와이 사람들도 스팸이 건강에는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스팸을 즐겨 먹는데 그 이유는 아주 복잡한데요, 스팸이 휴대가 편하고 오래 보관할 수 있으니까 2차 대전 당시에 미군들에게 식량으로 보급되었다고 해요. 그런데, 진주만 공습이 있고 하와이에 미군이 증강되면서 군인 뿐만 아니라 스팸도 밀려 들어온 거죠. 그러니까 2차 세계 대전 때 하와이 주민의 식단에서 중요한 위치가 된 건데, 그렇게 된 것은 진주만 피습 후에 미국 정부가 근해 어업을 금지하면서 하와이 사람들의 주식인 생선이 귀해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스팸은 구하기 쉽고 저렴했기 때문인거죠. 맛은 있지만 몸에는 별로라고 생각하는 음식이 하와이에서는 전쟁의 힘든 시기를 성공적으로 이겨낸 것을 연상시키는 ‘그리운’ 음식이 되었고, 해를 거듭하면서 전통으로 자리잡게 된 겁니다.




6. 아, 그러니까 사회 문화적인 배경이 있는 거네요. 살을 빼고 찌우는 것이 단지 개인의 의지나 건강상의 요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측면도 있다는 거군요.

네, 사실 이 밖에도 흥미로운 다른 요인이 많은데요, 책의 저자들은 노동자들이 달고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게 된 것은 문화와 경제, 정치적인 힘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합니다. 영국의 경우에는 19세기에 설탕이 엄청난 인기를 얻었는데요, 그게 노동자들의 에너지를 보충해주고 배고픔의 고통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어서 공장주들에게 이득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책을 보면 살을 빼지 못하는 이유가 개인의 심리적인 상처 혹은 트라우마와도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라틴랩의 거장인 ‘빅 펀’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그래미상 후보가 될 정도로 90년대 후반에 날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빅펀이라는 가수의 몸무게가 698파운드, 그러니까 316킬로그램이나 나갔습니다. 어렸을 때는 뚱뚱하지 않았지만 섭식장애가 있었다고 해요. 어머니는 마약 중독자였고, 양아버지는 아주 폭력적이었는데 거기에 대한 분노와 좌절감으로 빅펀은 벽에 구멍을 내서 벽돌 부스러기를 먹곤 했다고 합니다. 영양분이 없는 물질을 계속 먹는 것을 이식증이라고도 하는데요, 주로 영양 결핍이 있거나 부모의 방치나 학대가 있으면 생긴다고 합니다. 빅펀은 어릴 때 당했던 사고에 관한 소송으로 50만 달러를 받게 되는데요, 돈이 생기자 식욕을 채우기 시작했고 체중이 급격하게 불어났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28살의 나이에 심장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빅펀의 경우는 하와이 사람들과는 다르게 어릴 적 경험이 비만의 요인이 되기도 했고, 힙합 세계라는 문화적 요인도 한 몫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럽의 귀족은 몸무게가 무거운 것을 힘이나 권력과 연결시켜서 생각을 했고, 힙합 가수들이 덩치가 크고 헐렁한 옷을 입는 것도 백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방법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뚱뚱하다는 것은 명예고, 금전적 성공을 의미하는 거죠. 힙합 문화가 주류 문화에 대한 저항을 노래하잖아요? 힙합 랩퍼들은 뚱뚱하면 역겹고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미국인의 주류적인 시각에 저항을 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7. 같은 미국인이라고 해도 백인계 미국인과 흑인계 미국인이 뚱뚱함을 바라보는 시각에 차이가 난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네, 미국에 가보면 백인보다는 흑인 중에 뚱뚱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요, 거기에는 흑인들이 단지 가난하기 때문에 패스트푸드를 많이 먹어서가 아니라 흑인들이 백인들보다 뚱뚱하게 된다는 것에 거부감이 별로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로 흑인들은 백인과는 다른 아름다움에 대한 이상을 갖는 경우가 많고, 음식을 조절하는 것을 ‘쿨하게 생각하지 않는 문화’가 있는 거죠.
실제로 이 책에 나오는 니제르의 경우는 여성들이 마른 여성을 엄격하고 남자 같아 보여서 싫어한다고 해요. 심지어 이 사람들은 살이 쪄서 생기게 되는 ‘튼살 자국’을 좋아한다고 해요. 노래 중에도 “튼살 자국이 있는 허리”가 있는데 이게 사랑 노래구요, 젊은 여자들은 하나 같이 팔이나 다리에 튼살 자국이 생기기를 소망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체중을 잴 때마다 조금이라도 덜 나가게 하려고 신발도 벗고, 외투도 벗고 재잖아요? 니제르 여자들은 편안하게 모든 것을 갖추고 올라가는 거죠. 그 이유는 니제르의 아랍 상류층 여자들에게 움직일 수 없을만큼 찐 살은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될 능력을 나타내는 거라고 합니다. 또 이 사람들에게 건강한 몸은 차가움과 뜨거움이 조화를 이룬 상태인데 살이 쪄야 몸에 있는 구멍들이 막혀 따뜻해 지게 된다고 생각한다고 해요. 우리와 몸에 대한 관념 자체가 완전히 다른 거죠.

8. 아, 재밌는 이야기들이 정말 많네요. 이제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청취자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시는 이유를 한번 정리해주세요.

이 책에는 비만인권운동가가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섹시한 옷을 입을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체형인정협회와 연대합니다. 저만 해도 제 사이즈에 맞는 옷을 사면 기분이 나빠질 때가 많습니다. 사이즈가 없어서요. 비만인권운동가들은 여성들에게 날씬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와 싸우고, 뚱뚱하다는 것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생각들에도 저항합니다. 뚱뚱하고도 행복할 수 있고, 뚱뚱하고 자랑스러울 수 있다는 거죠. 앞서 제가 말씀 드렸던 내용처럼 뚱뚱하다는 것이 문화적 정체성을 나타내기도 하고, 힘과 권력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우리는 너무 일방적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체형을 부정하도록 만드는 문화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성분들 100퍼센트가 다이어트를 한다는 농담도 있는데, 사실 다이어트의 효과가 별로 없다는 것은 입증된 것이라 다이어트가 오히려 대사를 망치고 사람을 더 살찌게 할 수도 있습니다.

비만은 건강에 나쁜 것은 분명하지만, 이 책은 우리가 비만이라는 현상에 대해 정말 다양한 관점을 갖게 도와줍니다. 비만하고 뚱뚱한 것을 바라보는 여러 관점을 읽어가다보면, 인간이 정말 단순하지 않고 깊이를 지닌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올해 다이어트 계획을 세웠다고 실패하신 분들에게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자책하시기 전에 이 책을 한번 읽어보시면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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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나의 작사법 - 우리의 감정을 사로잡는 일상의 언어들
김이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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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에서는 하지 못한 이야기.

이번 주는 방송에서 김이나가 쓴 <김이나의 작사법>이란 책을 소개했다. 부제인 '우리의 감정을 사로잡는 일상의 언어들'이란 제목에 끌렸다. 대중음악 작사가는 어떻게 말들을 길러내나. 쉬우면서도 아름다운 말들을 말이다. 책을 통해 알게 된 것은 그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와 관련되어 있다. 김이나는 자신의 위치에 대한 인식이 확고하다. 책의 첫문장이 "한번도 내가 예술을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다. 그러니까 상업 작사가라면 꼭 있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있을 법한' 예술가와 장사꾼 사이에서의 분열 같은 것이 없다. 그는 자기 자신을 "좋은 일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책 전반에서 그 지점이 계속 강조된다. 작사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주는 김이나의 조언은 '클라이언트가 찾지 않으면 작사의 기회 자체가 없다'는 점, '작사는 읽히기 위한 글이 아니라 부르기 위한 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확고하고 흔들림 없는 정신에서 대담함이 나온다. 나는 그 대담함이 행여나 부끄러움이 없는 대담함이 아닐까 늘 경계하는 쪽이었다. 다른 작사가들이 비웃지는 않을까, 팬들이 무시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없다. 내가 쓴 글을 누가 비웃지 않을까, 누가 나를 무시하지는 않을까. 김이나가 그런 걱정이 아예 없는 것인지, 아니면 애써 무시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전자인 것 같다. 그런 대담함을 나는 부끄러움을 핑계로 눌러왔다면, 김이나는 대담함을 대담하게 끝까지 지키고, 자기 나름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단지 장사꾼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대담함을 억누르는 부끄러움은 어쩌면 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대담함을 대담하게 끝까지 밀고 갈 용기가 없었던 것에 대한 핑계였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정쩡하면 숨겨야 할 것이 많고, 그래서 꼬아서 말하게 되고, 결국 우회로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나의 자아라는 복잡한 미로로 데려오게 된다. 나는 좋은 일꾼이 아니라, 좋은 일꾼이면서 예술가이고 싶고, 장사꾼이면서 연구자이고 싶고, 학생이면서 선생님이고 싶고, 현실이면서 동시에 이상이고 싶다. 성공은 대담함을 대담하게 끝까지 가져가는 것에 있겠지만 진실은 복잡하고 어정쩡한 채로 살아가는 것에 있다고 믿으니까 말이다.    




김이나의 작사법

- 우리의 감정을 사로잡는 일상의 언어들


1. 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네, 오늘 제가 소개해드릴 책은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만들고 김이나씨가 쓴 <김이나의 작사법>이라는 책입니다. 질문부터 드리고 싶은데요, 혹시 노래를 만들 때 가사부터 쓸까요, 멜로디부터 만들까요? (대답) 네, 정답은 멜로디부터입니다. 싱어송라이터들은 가사를 먼저 쓰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대부분은 멜로디가 먼저 만들어지고 나서 가사를 붙인다고 해요. 오늘 소개하는 책의 작가인 김이나씨는 유명한 작사가입니다.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는 이선희의 ‘그 중에 그대를 만나’, 브라운아이드걸즈의 ‘아브라카다브라’ 같은 곡에 가사를 쓴 분이구요, 우리 가요 시장에서 소위 가장 ‘핫한’ 작사가라고 합니다. 2015년에 작사 부문에서 저작권료 수입 1위를 하기도 했다고 해요. 오늘 소개해드릴 책은 제목 그대로입니다. 김이나라는 작사가가 자신의 작사법을 소개하는 내용이 바로 이 책의 핵심입니다.


2. 그렇군요. 유명한 작사가가 쓴 작사법이라니 기대가 되는데요, 이 책을 보면 저도 작사가가 될 수 있을까요?


 네, 이 책은 본격적인 작사 실전 연습 같은 책은 아닙니다. “작사란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질문을 먼저 앞세우고 나서 아주 세밀하게 멜로디에 가사를 붙여보는 과정을 알려주는 식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작사법’을 넘어서 있는 ‘작사법’에 관한 책이기도 한데요, 좀 더 자세하게 말씀을 드려 보자면, 이 책에는 김이나씨가 작사가가 된 과정, 그리고 작사를 할 때 염두에 두는 요소들, 자신이 작사한 곡이 만들어지기 까지의 과정과 숨은 에피스도들, 음반 업계의 작업 방식 등 기술적으로 작사를 어떻게 하는지 보다 ‘작사’라는 작업의 전반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 책을 읽으면 누구라도 작사가가 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 같긴 합니다만, 작사가를 꿈꾸고 생각하시는 분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업계 1인자가 업계 1위를 한 비밀이 들어 있는 책이니까요. 


3. 그렇군요. 그런데요, 권영민 선생님은 작사가도 아니시고, 작사가 지망생도 아니시지 않나요? 


 맞습니다. 저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제가 작사가가 될 수 있다거나 작사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는데요, 사실 이 책의 저자인 김이나씨도 처음부터 작사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고 해요. 음악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핸드폰 벨소리 만드는 일을 하다가 우연히 작곡가 김형석씨를 만났다고 합니다. 김형석씨에게 당돌하게도 작곡을 배우고 싶다고 했는데 기본기가 없어서 거절 당하고 맙니다. 거절당하고 나오면서 평소 김형석씨 팬이라 콘서트장에서 찍은 사진이 있다고 자신의 홈페이지를 가르쳐 주고, 김형석씨가 그 홈페이지에 들어가 김이나씨가 쓴 글을 읽으면서 작사가를 해보라고 권했다고 해요. 그게 시작이었던 거죠. 작사가 지망생만이 작사법을 읽으라는 법은 없는 거죠.


 사실 제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작사법’이라는 책의 제목보다 이 책의 부제 때문이었어요. 제가 신문사나 잡지사 몇 곳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고 있는데요, 본의 아니게 제가 쓴 글이 어렵다는 평을 자주 듣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게 쓸 수 있을까 늘 고민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서점을 지나다 이 책의 부제가 눈에 확 들어왔어요. 이 책에 붙은 부제가 “우리의 감정을 사로잡는 일상의 언어들”입니다. 김이나씨가 작사가로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일상에서 우리가 흔하게 쓰는 말로 대중들의 감정을 사로잡을 수 있는 능력이 정말 뛰어난 것에 있지 않았을까, 그러면 그 비결이 뭘까 하는 생각에 책을 집어 들게 된 거죠. 그리고 책을 집어 들었고, 제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4. 그렇네요. 대중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보다는 쉬운 말로 표현되는 것이 당연히 더 유리할텐데요, 사실 쉽게 쓰고 말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 같기도 해요.


 이 책의 첫 문장이 그런 점을 확실히 보여줍니다. 김이나씨는 이렇게 씁니다. “한번도 내가 예술을 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다만 좋은 일꾼이라고는 생각해왔다”. 이 문장이 많은 것을 보여주는데요, 김이나씨는 대중음악에 곡을 붙이는 자신의 일을 ‘예술’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산업’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가사를 쓴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책도 ‘작사란 무엇인가’와 같은 어려운 이야기보다 작사를 하기 위해서는 가사를 쓰기 전에 캐릭터를 어떻게 잡는지, 댄스곡과 발라드곡에서 발음 디자인은 어떻게 다른지 같은 부분에 더 집중해서 이야기해줍니다. 

 특히 저는 이 책에서 김이나 작사가가 어떤 곡을 쓰기 전에 가사 내용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캐릭터’를 잡는 부분이 정말 흥미로웠는데요, 김이나 작사가는 자신을 자기 세계관을 끊임 없이 그려내고 고집하는 예술가가 아니라 누군가가 꾸어낸 꿈을 토대로 밑그림을 그려내는 기술자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가수 박진영씨의 경우는 자기 이야기가 아니면 가사로 쓰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런 경우라면 캐릭터를 잡는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가사의 이야기는 자기 이야기니까 가사를 쓰면서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 필요가 없는 거죠. 하지만 김이나씨는 작곡가나 가수들에게 ‘작사’를 의뢰받아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자기 세계를 고집해서는 어려운 거죠.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의뢰받은 곡의 느낌과 노래를 부를 가수에게 맞는 ‘캐릭터’를 계속 상상하고 만들어내야 하는 거죠.


5. 그러면 ‘캐릭터’를 잡는다는 것이 잘 와닿지 않는데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좀 더 쉽게 설명해주세요.


 네, 사실 대중가요를 들어보면 10곡 중에 9곡은 주제가 사랑이지요? 아마 사랑이라는 것은 대중들에게 공감을 가장 넓게, 또 강력하게 이끌어낼 수 있는 주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일텐데요, 그런데 노래 가사를 음미하다보면 다 같은 사랑 노래라도 노래마다 사랑의 방식도, 사랑하는 사람의 성격도, 사랑을 대하는 자세도 다 다릅니다. “똑같은 이별을 겪더라도, 누군가는 말없이 보내주고 누군가는 지질하게 매달리고 또 누군가는 복수의 칼을” 갈기도 하죠. 그래서 작사가에게 캐릭터 잡기란 가수의 성격, 환경, 성별 등 다양한 요소를 조합하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작사가에게 이 과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해요. 

 이 책에는 재밌는 사례들도 많이 제시되는데, 그 중에 몇 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케이윌이라는 가수가 있는데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 가수는 “마냥 어리지는 않지만, 노련미가 있는 어른의 이미지”도 아닙니다. 믿음직한 “순정파” 같은 이미지가 있는데요, 김이나씨는 처음에 곡을 의뢰받고 곡의 분위기가 밝고 순수하고 벅찬 느낌이 강해서 케이윌이 원래 가지는 이미지와 결합을 해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첫째, 어리지 않음, 둘째, 밀당을 하지 않는 순수한 사람임, 셋째, 그래서 언변도 화려하지 않음. 이렇게 세가지 특성을 잡고 이런 남자가 일생일대의 사랑에 빠졌을 때 느끼는 기분에 대해서 가사를 씁니다. 그렇게 탄생한 곡이 ‘가슴이 뛴다’라는 곡인데요, 이 노래의 가사 후렴에 “너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한다”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화려한 언변은 아니지만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가사를 보면 정말 마음에 와닿습니다. 


6. 아, 단순한 가사처럼 보이는데도 그 나름대로 논리가 있는 거군요.


 조용필의 노래 <걷고 싶다>의 경우는 다른 캐릭터를 잡은 경우인데요, 김이나씨는 조용필의 새앨범에 들어갈 곡을 의뢰받고는 “선생님이 누군가를 위로하는 이야기는 이전의 수많은 명곡들에서 이미 다뤘다”고 생각해서 “선생님 또한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는 곡”을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해요. 그리고 별 일 아닌 일에 느끼는 ‘행복의 찰나’를 표현한 곡을 케이윌 때와 다른 성숙하고 훌륭한 사람들의 사랑으로 가사를 붙였다고 합니다. “불안한 나의 마음을 언제나 쉬게 했던 모든 것이 다 괜찮을거야 말해주던 오 나의 사람아” 와 같은 가사는 이렇게 나오게 된거지요.


7. 이 책을 읽으면서 책에 소개되는 곡을 함께 들어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모든 곡을 다 듣지는 않았지만, 아마 지난 주는 대중음악을 제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들은 한 주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이 찾아서 들었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노래 중에는 제가 그동안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가수나 장르도 많이 소개되어 있는데요, 김이나씨가 캐릭터를 잡고 곡을 분석해서 쓴 가사를 읽어보면 곡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거지요. 저는 30대 중반인데도 아이돌 가수들이 나와서 노래 부르는 것을 보면 솔직히 가사가 이해가 안되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이 책을 읽으면서 의미 없어 보이는 가사에도 많은 전략과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혹시 아이돌 밴드 중에 엑소라는 팀 아시나요? 엑소의 가장 유명한 곡이 ‘으르렁’인데요, 저는 그동안 어떻게 이런 가사가 이렇게 많은 인기를 얻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 책에서는 정말 좋은 가사의 대표적인 곡으로 소개되어 있더라구요. 엑소라는 팀의 비주얼컨셉트, 팀 색깔, 곡 정서 등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건데요, 그런 관점에서 들어보면 아주 잘 짜여진 가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사실 시와 비슷한 가사라야 좋다고 생각했는데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많이 깨졌습니다. 상업 음악에서 좋은 가사라는 것은 곡의 분위기를 잘 이끌어내고 사람들의 감정을 만질 수 있어야 하니까요. 이 책에는 조용필, 이선희, 임재범, 이승철과 같은 거장인 가수들부터 아이유, 가인, 인피니트 같은 아이돌 가수들의 노래까지 많은 곡들이 가사와 뒷이야기와 함께 소개되어 있는데요, 이전에 몰랐던 새로운 노래도 알게 되어 저는 참 좋았습니다. 


8. 말씀을 들어보니 작사가라는 직업이 정말 많은 상상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사를 붙이는 일은 멜로디를 따는 것보다 쉬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네요.

 

 네, 김이나 작사가는 자신이 대중음악의 작사가고, 예술가가 아니라 기술자라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저는 어지간한 예술가보다 훨씬 치열하고 고민하는 기술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뚜렷한 철학, 자기만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예술적인 가사라 할 수는 없지만 저는 김이나의 작사법을 읽으면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가사를 쓰기 위한 방법을 배우는 것은 우리가 우리 마음의 감정을 글로 표현하고 드러내는 법을 배우는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에 보면 김이나씨가 사랑의 진행 단계를 9단계로 나눠서 진행 단계에 따른 사랑노래들을 정리한 표가 나오는데요, 썸타기 단계 - 사랑의 시작단계- 절정 단계-이별의 예감 단계- 이별의 순간 단계- 이별 직후 단계 - 이별 후 시간 경과 단계- 미련 단계 - 완전한 극복 단계에 따라 이별 직후에 해당하는 곡은 이현우의 ‘헤어진 다음날’, 사랑의 시작 단계인 곡은 성시경의 ‘내게 오는 길’.. 이런 식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랑의 과정을 생각해보고, 해당되는 곡을 정리하는 과정은 충분한 고민 끝에 나온 결과지요. 심지어 가사의 캐릭터를 잡으면서 ‘고양이’의 시점에서 가사를 쓰기도 합니다. 제아라는 가수의 <길고양이>라는 노래인데요, 가사를 보고, 가수의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표현을 보면 작사가의 상상력과 사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9. 마지막으로 이 책을 우리 청취자들에 추천해주시는 이유를 정리해주시죠.


 누구나 자신만의 감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것을 너무 잘 표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정체도 모르고, 그래서 표현도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 어떤 노래의 가사 하나가 마음에 오면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눈물도 나고, 가슴이 뚫리는 느낌을 받고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방법을 간신히 찾게 됩니다. 이 책은 그런 가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우리에게 알려주는 책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나만 아는 이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방법을 수많은 노래가사들과 함께 알려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감정이 글과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작사가’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겠지요.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자신과 전혀 관련 없는 분야의 책을 읽는 것의 재미를 여러분에게 전달해 드리고 싶습니다. ‘작사법’이라니 언뜻 들으면 자신과는 상관 없는 일처럼 여겨지실 수도 있을텐데요, 재미는 놀이에서 나오고, 진짜 노는 것은 먹고 사는 것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나와 무관한 것을 하는 겁니다. 나와는 다른 분야에서 어떻게 일이 이뤄지는지를 보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거든요. 나와 상관 없는 일, 의미 있는 딴 짓을 이 책과 함께 해보시는 것은 어떨까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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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영혼의 편지 (반양장) 반 고흐, 영혼의 편지 1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예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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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부기.

하루키 월드와 반 고흐 월드

 

김연수는 “하루키 월드”에서 깊이 사랑하는 것은 규칙위반이라고 했다. 깊이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을 떠나게 만들고 그래서 이제 홀로 남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도 깊은 상처를 남긴다. 이번에 고흐의 편지글을 읽으면서 발견한 것은 하루키와 달리 “반 고흐의 월드”에서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죄라는 것이다. 고흐도 하루키만큼이나 깊은 사랑이 깊은 상처를 남기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여동생인 윌에게 남긴 편지에서 동생에게 사랑을 권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래, 차라리 바보짓을 몇 번이든 하렴”. 이뿐 만이 아니다. 고흐는 공부를 하거나 종교나 이념에 빠지게 된 것은 자신이 “말도 안되는 연애사건”, 즉 “사랑에 빠지지 못해서”라고 한다. 그리고 “반고흐 월드”에서 그것은 많은 공부를 하거나 사회주의에 심취하는 것보다 올 바른 일이다. “대개는 그런 사건으로 창피와 망신만 당할 뿐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한 것이 전적으로 옳았다고 생각한다”.

 

고흐가 극렬주의자였다면 바로 이런 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사랑에 있어서 절제가 필요하더거나 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하루키의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남자들처럼 ‘세련된’ 사랑은 없다. 고흐는 주변 사람들이 지치고 힘들 정도로 사랑한다. 그건 사촌인 케이에 대한 사랑에서나 시엔에 대한 사랑에서도 마찬가지고, 테오에 대한 사랑에서도 그렇다.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고흐가 목숨을 스스로 끊은 것은 테오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흐의 평소 태도 상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동생 테오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편지 곳곳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정신 착란으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어 동생에게 진 빚을 갚을 길이 없게 된 고흐가 동생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죽음 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정신 착란 증세도 깊은 사랑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고흐는 동생에게 신세를 갚기 위해서 ‘예술’로 끝까지 자기를 내몰았기 때문이다. 테오가 정신 착란 증세가 심각해져 생레미 요양원에 입원해 있는 고흐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글귀가 나온다. “그 그림들은 형이 자연과 살아 있는 생명체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거야. 형이 생명체 안에 본래부터 내재한다고 강렬하게 느끼는 것들. 이런 그림을 그리기 위해 형은 모든 것을 극한까지 몰고가는 모험을 감수했을 테니 머리가 얼마나 힘들었겠어. 혼란을 겪은 것도 무리가 아니야”. 고흐는 동생도, 예술도, 연인도, 자연도 극한까지 사랑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도, 건강도, 돈도, 심지어는 동생까지 모든 것을 잃었다. 오로지 작품만 남았다.

 

아마도 하루키 월드에서 보자면 대단히 어리석은 짓임이 틀림 없다. 하루키는 새벽에 일어나 써야 할 원고를 쓰고, 오후에는 취미로 번역을 하고, 마라톤을 완주하고, 작품도 수백만부 씩 팔리고, 이 나라에서는 선인세도 수억원씩 받으며, 깊이 사랑할 가능성이 있는 자녀도 애초부터 낳지 않아 부유하고, 건강하고, 고흐에 비하자면 이렇게까지나 오래 살고 있다. 고흐에 비교해서 그것을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두 세계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차이는 내가 보기에 ‘깊은 사랑’에 대한 태도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어느 글에서 나는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을 읽고, 또 내게 일어난 어떤 소동으로 인해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깊이 사랑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그런데 고흐의 서간집을 읽으면서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세상에 대한 경험도 부족한 주제에 사랑까지 깊이 하지 않겠다는 것은 사실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랑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것, 소동을 일으키고, 창피를 주고 망신을 당하게 만들고, 사람을 긴장하게 했다가 의기 소침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온갖 것의 '부정성‘을 생각해보면서도 정작 사랑도 항상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동안 미처 깨닫지 못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하루키 월드도 깊은 사랑을 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세계이기도 하다.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를 너무 사랑하고, 사랑했던 여자가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고흐와 하루키의 차이는 ’깊은 사랑‘을 하느냐에 비해 어쩌면 깊은 사랑의 대상이 늘 있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는가의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여자가 사라지고 나면 더 이상 사랑할 것을 찾지 못하는 하루키 월드에서와는 달리 반고흐 월드에서는 모든 순간, 그것이 무엇이든지 늘 강렬하게 사랑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규칙 위반이다.

    

“내가 가장 불안하게 생각하는 점은, 글을 쓰려면 공부를 더 해야 한다는 네 믿음이다. 제발 그러지 말아라, 내 소중한 동생아. 차라리 춤을 배우든지 장교나 서기 혹은 누구든 네 가까이 있는 사람과 사랑을 하렴”

 

“종교나 정의나 예술이 그렇게 신성할까? 자신의 사랑과 감정을 어떤 이념을 위해 희생시키는 사람보다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 더 거룩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글을 쓰고 싶다면 행동을 해라. 인생에 대해 무언가를 담고 있는 그림을 그리든지.”

    

아무 것도 아닌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이유는 쉽게 사랑을 포기해버리는 것 때문일 수도 있겠다.

고흐가 가난했지만 가난하지만은 않았던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

- 빈센트 반 고흐

 

1.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네, 오늘 제가 소개해드릴 책은 출판사 예담에서 만들고 빈센트 반 고흐가 쓴 <반 고흐, 영혼의 편지>라는 책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여러 분이 다 아시는 바로 그 화가, 고흐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책은 바로 고흐가 쓴 책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이 책은 고흐의 편지글을 모은 건데요, 고흐는 동생 테오와 대략 9년간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요 이 책에는 그 편지들이 엮여져 있습니다.

 

2. 그렇군요. 사실 고흐와 동생 테오가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내용이기도 하지요.

 

그렇습니다. 고흐는 1872년 8월부터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해서 1890년 7월의 마지막 편지까지 651통의 편지를 보냈구요, 고갱을 포함해 주변의 동료 화가에게 보낸 것까지 포함하면 모두 819통이나 됩니다. 고흐가 받은 편지도 83통이나 된다고 하니까 분량이 어마어마하죠. 분량이 많다 보니 고흐의 고향인 네델란드에서도 고흐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1953년에야 네 권짜리 전집이 출판되었구요, 일본에서도 1963년에 두꺼운 책 3권으로 편집되어 간행되었는데요, 아쉽게도 우리나라에서는 고흐의 서간문을 완역한 책이 아직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소개해드리는 이 책 역시 고흐 서간문 전체를 담고 있지 않습니다. 고흐의 서간문 중 그의 삶과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편지를 역자가 임의로 뽑아서 편집한 것인데요, 그런 점에서 아쉬움이 남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에 반 고흐의 편지를 비슷한 방식으로 엮어서 만든 책들이 몇 종류가 있는데요, 오늘 소개해드리는 <영혼의 편지> 말고도 펭귄 문고판으로 나온 <고흐의 편지>라는 책도 있습니다. <영혼의 편지>와 달리 이 책은 네델란드의 반고흐 미술관장인 로날트 데 레이우가 편집한 것이고 번역도 사실 훨씬 좋은데요, 안타깝게도 고흐 작품이 하나도 실려 있지 않습니다. 오늘 제가 소개해 드리는 <반고흐, 영혼의 편지>라는 책은 번역과 편집이 다소 아쉽긴 하지만 고흐가 남긴 작품들과 관련된 편지글이 함께 있어서 훨씬 더 좋습니다.

 

3. 정말 많은 양의 편지를 썼네요. 편지를 대략 나흘에 한 통씩 썼다는 말이 되네요.

 

사실 양도 양이지만, 고흐의 서간집은 고백문화의 백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도 고흐의 그림을 실제로 볼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요,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그림도 좋았지만 저는 고흐의 서간집을 읽고 난 후부터 고흐를 정말로 ‘위대한 화가’로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제가 위대한 화가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고흐가 살아 있는 동안 몇 점의 그림을 판매했는지 아시나요? (대답) 네, <붉은 포도밭>이라는 그림 단 한 점만을 팔았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사실 유화로 그린 작품 중 판매된 것이 한 점 뿐이라는 것이지 스케치나 데생은 여러 점이 팔린 적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한 개인의 삶으로만 보자면 마치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불행하고 실패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어 가다보면 고흐의 고통이 150년의 세월을 관통해 읽는 우리의 마음에도 전달되는데요, 바로 그 점 때문에 고흐의 서간집을 위대한 문학이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4. 고흐는 대단히 가난했다고 알고 있어요.

 

네, 그래서 이 편지는 어쩌면 고흐가 가난과 싸운 투쟁기라고 소개드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책 전체에 그런 내용이 두드러지는데요, 사실 고흐는 20대 초반에 그림 판매를 하다가 그만 둔 이후로 단 한번도 직접적으로 생계와 관련된 일을 한 적은 없습니다. 고흐가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지원해준 것은 동생 테오인데요, 테오는 고흐와 함께 화랑에서 그림 판매를 했었는데 형은 그만뒀지만 끝까지 남아서 그림판매상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고흐는 27살이나 되어서야 전업화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는데 테오가 10년 후 고흐가 죽기 전까지 돈을 보내주는 거지요.

그래서 책을 보면 동생에게 돈을 받아써야 하는 형의 미안한 마음이 전반에서 묻어납니다. 고흐가 그림을 시작하고 얼마되지 않아 유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동생에게 보낸 편지 중 한 부분을 읽어 보겠습니다.

 

유화가 팔리지 않을 것 같다면 목탄이나 다른 것으로 데생을 하는 게 낫겠지. 그러나 혹시라도 유화를 그리는 데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면 유화를 계속하고 싶다. 특히 요즘은 유화가 점점 나아지고 있으니까, 예상하지 않았던 기회가 올지도 모르니까. 단지 팔릴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다른 식으로 배울 수 있는 일에 물감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고흐는 값이 비싼 유화물감로 연습을 계속 해보고 싶은 건데요, 돈을 많이 써야 하니까 동생에게 미안하니까 나는 연필이나 목탄으로 해도 된다고 둘러 말하는 거죠. 그래서 동생에게 내가 그린 유화 작품이 팔릴 가능성을 있는지도 물어보는 겁니다. 고흐는 자신의 그림이 언젠가는 팔릴 수 있다고 믿고 정말로 필사적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린 그림을 팔 수 있어야만 동생에게 신세진 것을 다 갚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동생에게 받은 돈을 갚기 위해서라도 더 좋은 작품을 그려야 하고, 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열심히 해야 하니까 정말 열심히 작업을 합니다. 그런데 이게 악순환인거지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돈이 들어가고,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그림을 많이 그려야 하는데 정작 그림을 팔리지 않고, 그림이 안팔리다 보니까 그림을 더 많이 그리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고, 그러면 또 돈이 들어가 빚이 생기고... 이런 과정이 반복되는 거죠.

 

5. 그렇네요, 정말 악순환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데요, 테오도 결국 지치지 않았을까요?

 

고흐도 대단하지만 테오도 정말 대단하다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테오는 고흐가 작품을 할 수 있도록 끝까지 지지해주고,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경제적 지원도 계속해서 해줍니다. 고흐는 말년에 몸이 아주 쇠약해지고, 심각한 정신 착란 증세가 오게 되는데요, 그 때문에 이웃들이 고흐를 불안하게 여겨서 정신병원에 가두려는 진정서를 쓰게 됩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정신병원도 공짜는 아니잖아요? 고흐는 정신병원에 들어가면 그림을 그릴 수 없어서 동생에게 받은 돈을 갚을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아프리카의 외인부대에게 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동생 테오가 이 소식을 듣고 고흐에게 쓴 편지의 한 부분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외인부대에 간다는 생각, 그건 절망에 빠져서 내린 결정이야. 그렇지? 난 형이 그런 직업을 진심으로 좋아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 지금 형은 그림을 전혀 그릴 수 없고, 조금씩 건강을 회복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어. 그런 상황이 형에게 다시는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심어줬을 것 같아. 그러니 석달동안 일도 할 수 없으면서 비용만 드는 곳에 가서 보살핌을 받고도 벌어들이는 건 전혀 없을 거라고 고민했겠지. (중략) 결국 형은 불필요하게 머리를 괴롭히고 있어. 작년은 내게 경제적으로 괜찮은 한 해였어. 그러니 내게 부담을 줄까 두려워 하거나 망설이지 말고 내가 보내는 것을 받아 써도 괜찮아.

 

6. 형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테오도 깊이 생각하고 있네요.

 

이런 편지 내용을 보면 테오는 고흐를 정말 진심으로 아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테오는 형에 대한 존경심으로 가득했어요. 자신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가중시키고, 정작 형의 그림은 팔기도 어렵고, 또 고흐가 가끔 테오에 대해서 가혹한 비판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들에게 고흐와 똑같은 ‘빈센트’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형을 사랑했습니다.

 

고흐가 말년에 목숨을 끊기로 결심한 것에는 아마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더 이상 동생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테오가 결혼을 해서 아들 빈센트를 낳은 것이 1890년 1월인데요, 고흐가 같은 해 7월에 권총자살합니다. 그해 5월에 동생 집에 방문을 하고 약간의 다툼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자신이 가족을 돌봐야 하는 동생에게 부담을 주고 있다는 생각을 깊이 했던 것 같습니다. 10년 가까이 동생으로 많은 돈을 받아 썼는데, 자신은 정신 착란이 와서 제대로 된 생활도 되지 않고, 그림도 못 그리게 되니까 지금부터라도 더 이상의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겠죠.

 

그런데요, 고흐와 테오 사이의 관계는 단지 형제애라는 말 정도로는 드러낼 수 없는 것들이 정말 많습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이 두 사람은 한 쪽이 없었다면 다른 쪽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관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890년 7월에 고흐가 죽고, 그로부터 6개월 후인 1891년에 테오가 서른 세 살의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7. 삶이라는 것이 참 기묘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고흐는 동생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형이 없으니 동생도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던 거군요.

네, 두 형제의 이야기를 보는 것으로도 이 서간집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글을 읽다보면 고흐가 위대한 사상가였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고흐는 극렬주의자이고 행동주의자입니다. 옳다고 믿는 일은 그냥 끝까지 해버리는 사람인데요, 세상을 바꾸는 생각은 어쩌면 그런 극단적인 생각에서 나오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도 그런 대목이 자주 나오는데요, 고흐는 한 때 임신한 매춘부를 사랑하게 되는데요 그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고흐를 떠나게 됩니다. 그래도 고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한 여자를 저버리는 일과 버림 받은 여자를 돌보는 일 중 어떤 쪽이 더 교양있고, 남자다운 자세냐고 되묻습니다. 그리고 글을 쓰겠다는 여동생 윌에게는 가까이 있는 사람과 사랑을 하라고 권합니다. 공부는 독창성을 죽이니까 기를 쓰고 공부하지는 말고 차라리 사랑에 제대로 한번 빠져보라는 것이죠.

 

8. 공부를 하지 말고 사랑에 빠져라는 말이 아주 인상적이네요.

 

네 저도 그 말이 오랫동안 남았습니다. 고흐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는데요, 고흐야 말로 학교도 다니지 않고 스스로 공부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고흐는 그림을 시작하기 전에 신학 공부를 했지만 잠깐 다니다 중도에 그만뒀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나서도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이 없고, 프랑스 화가 등용문이라 할 수 있는 살롱전에서 입상한 적도 없습니다. 잠깐 모베라는 화가에게 배운 적이 있지만 그것도 짧은 기간 일시적일 뿐입니다. 고흐는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4명이 있었는데요, 주변의 반대와 당사자들의 거부로 단 하나의 사랑도 이뤄지지 않습니다. 4살 짜리 아들이 있는 미망인 연상의 사촌을 사랑하기도 하고, 임신한 매춘부를 사랑하기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합니다. 고흐의 세계에서 배움은 학위와 같은 자격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테오와 고흐의 관계도 이렇게 보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고흐는 자연도, 사람도, 동생도, 무엇보다 예술도 정말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죠.

 

9. 마지막으로 청취자분들에게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죠.

 

제 개인적으로 이번 방송을 준비하며 다시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제게 위로가 되는 부분이 정말 많았어요. 고흐는 테오에게 글을 쓰고 있지만 마치 나에게 ‘네가 글을 쓰는 이유, 살아가는 이유가 뭔지’ 묻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고흐는 자신에 대해서도, 테오에 대해서도 진짜 삶이 무엇인지 끊임 없이 묻고 행여나 다른 길로 갈 것 같으면 ‘가차 없이’ 비판합니다. 고흐 작품을 보면 정말 자연을 사랑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작품들이지요? 누군가의 인정이나 동의에 기대지 않고 온갖 가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예술에 헌신하는 모습에 제 자신이 참 부끄러워졌습니다.

 

고흐의 일평생 과제가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인간, 어떤 식으로라도 쓸모있는 인간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임신한 매춘부를 도울 수 있었을 때 그녀와 사랑하게 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흐 일생은 그림이 팔리지 않았고, 동생에게 폐를 끼쳤고, 병도 얻었습니다. ‘생활’이 너무 무거웠던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흐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그립니다.

 

 저는 고흐의 삶을 보면서 결혼, 취업,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라는 우리 젊은 세대가 떠올랐습니다. 직장에 들어가서 세상에 기여해보고 싶고, 부모님께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데 등록금과 학원비, 월세 내기도 빠듯한 청년들의 삶은 사실 가난 때문에 두려움에 떨며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던 고흐의 삶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와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계속되는 고민을 하고 계신 분들이 읽으신다면 큰 위로와 함께 통찰을 얻으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살아서 고흐는 가난했지만, 죽어서 고흐는 전 세계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가 되었다는 사실이 여러분들에게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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