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아이들과 한 달 살기
전은주(꽃님에미)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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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교통방송 책 소개에서는 원래 하지현, 엄기호가 쓴 <공부중독>을 소개하려고 했다. 책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가 선생님에게 메시지가 왔다.

"요즘 책 선정이 무겁다고 모니터 회의에서 이야기가 나왔는데 조금 가벼운 걸로 될까요?"

나는 메시지를 받고, "제가 몸이 무거워 책도 무거운 것을 좋아해요"라고 답을 드렸다. 하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왜냐하면 최근 소개했던 책은 가벼운 책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3)에서는 단편 <소나기>를 이어쓰는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소개했고, (32)에서는 진중권이 쓴 <아이콘>, (30)에서는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을 소개했다. 다소 무거운 책이라면, (31)에 했던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이지만 이 책도 사실 어렵거나 무거운 책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더 가벼운 책이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받고 나는 라디오 방송에 나가서 많은 분들에게 권할 수 있을만한 더 가벼운 책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모니터를 하신다는 분들에게 묻고 싶었다. 어떤 책이 무겁다고 생각하시는지, 라디오에서 소개할만한 가벼운 책은 어떤 책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물론 모니터 회의에 갈 수가 없으니 물어볼 수도 없다. 그리고 이전까지는 모니터에서 비교적 무게 있는 책을 재미있게 소개해줘 유익하다 정도의 반응이 나왔다고 들었기 때문에, 이번 모니터 내용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내가 지나치게 완고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년 소녀를 만나다>가 무겁다면, 그보다 더 가벼운 책은 나도 소개하고 싶지 않다. 다른 방송 예컨대 TBS에서 진행되는 책 소개 프로그램에서 소개되는 책은 <당신을 만나서 참 좋았다>, <가족이라는 병> 같은 책들인데, 솔직히 이런 책은 나는 별로 소개하고 싶지 않다.

사실, 나는 방송에서 소개할 책을 고를 때는 신간이나 청취자들이 좋아할 만한 책을 특별히 염두에 두기 보다 우선 내가 읽고 싶은 책을 고려하고, 그렇게 읽은 책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공감이 될 수 있는 내용 같다는 생각이 들면 소개글을 썼다. (물론 쉬운 책을 골라야 한다는 부담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건 아니다) 세상에 책은 너무 많기 때문에 모든 책 소개는 좀 편파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소개하는 이의 취향이 많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것이 책소개고 그런 것이 공감을 얻기 더 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런 과정이 썩 잘 되지는 않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작가 선생님에게 그만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만 한다면 되도록 빨리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개편이 이뤄지는 11월까지는 해야 한다고 한다. 그전까지는 '한주에 한권 가볍게 책을 읽어본다'는 취지에 맞는 책을 골라서 소개해야 한다. 오늘 <아이들과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를 소개한 것도 그런 맥락이 있다. 물론 이 책은 누구에게라도, 특히 부모에게라면 강력히 추천할만한 책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없었다면 라디오에서 소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여행과 제주에 대해서 내 생각을 좀 더 적극적으로 적어보려고 했다. 너무 유명한 책이라 관심 없는 분들도 소개글은 읽어봐 주신다면 고맙겠다.

여하간 교통방송 책소개는 몇 개월을, 최소한 3개월은 더 해야 하지만 그동안 좋은 점도 많았다. 쉬운 책을 늘 선정해야 한다는 부담 탓에 평소라면 잘 읽지 않았을 책을 읽고 생각해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린 것이 기뻤다. 책선정이 너무 무겁다는 말이 아니라 책 소개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들었다면 그만하겠다고 마음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무겁고 가볍고 무슨 기준으로 그러는지 모르겠다. 정치, 경제, 여행은 어려워도 책은 어려우면 안되는 이유를 모르겠다.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이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소개하고 그런 반응이라면 수긍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솔직한 내 생각을, 끝으로 말하자면, 전혀 수긍이 안된다. 그동안 내가 소개한 책 중 그 어떤 책도 무겁지 않다. 아무튼, 이제 몇 번 안 남았다. 쉬운 책 사러 알라딘 중고서점에 나가봐야겠다.



아이들과 제주도에서 한달 살기

-전은주


  1. 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시나요?


 네, 이번 주에 제가 소개해드릴 책은 출판사 북하우스에서 만들고, 전은주씨가 쓴 <아이들과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이미 아시는 분들도 많으실텐데요, 제주도 한달살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 낸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은주씨는 꽃님이, 꽃봉이 두 남매의 엄마인데요, 이 책에는 제주도에서 아이들과 한 달을 함께 보낸 경험이 담겨 있습니다. 방송을 들으시는 분들 중에 기억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2016년 처음으로 소개해드렸던 책이 마이케 빈네무트가 쓴 <나는 떠났다 그리고 자유를 배웠다>였습니다. 이 책은 마이케가 퀴즈쇼에서 우승을 해 받은 상금으로 1년동안 한 달동안 한 도시를, 그래서 모두 열 두 개의 도시를 여행하는 내용을 담은 책인데요, 전은주씨는 퀴즈쇼 우승도 하지 않았는데도 한 달 간 제주도에서 살기로 마음 먹고 떠난 것이지요. 


2. 퀴즈쇼에서 우승을 했다면 아마 아마 제주에서 일 년 살기를 했을 수도 있겠죠. 아이들 학원 보내랴, 남편 뒷바라지 하랴 말은 쉽지만 그래도 한 달 살이를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아요.


 <나는 떠났다 그리고 자유를 배웠다>에서 마이케의 경우는 50만 유로나 되는 상금도 있었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고, 사실 직업도 저널리스트이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로운 상황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이케가 떠난 후에 자유를 배웠다고는 하지만 마이케의 상황은 이미 보통 사람들에 비해서는 상당히 자유로웠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꽃님엄마 전은주씨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주도에 월세방을 구해 방학동안 가 있을 것이라고 하니까 이웃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남편은?”이었다고 해요. 이 질문은 “마누라가 밥도 안 해주고 한 달이나 집을 비운다는데, 또 재롱떠는 아이들을 못 보는건데 남편이 허락해줬냐”는 뜻이기도 하구요, 아니면 “애 아빠도 없이 혼자서 두 아이를 어떻게 돌보냐”는 뜻이기도 한 거죠. 그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방학이었다고 해도, 아이들은 사실 방학 때 더 바쁘거든요. 각종 캠프를 가고 학원 뺑뺑이를 돌기 때문에 학교 다니면서 해오는 것들을 모두 중지하고 ‘한 달’의 휴식기를 갖는다는 것이 보통 부모로서는 쉬운 결정이 아닙니다. 지금은 제주 한달살이가 정말 힙한 문화처럼 유행이 되었지만 전은주씨 가족이 가던 2013년은 그런 문화는 거의 없었던 때거든요. 그런 점에서 어려운 결정을 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3. 정말 그렇네요. 요즘 제주도 많이 가잖아요? 대구에서도 제주로 가는 비행편이 많이 생겨서 예전보다는 쉽게 2박 3일, 3박 4일 짧게 다녀오시는데, 한 달씩이나 있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좀 들어요.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제주도에서 가볼 만한 곳은 다 가봤다고 생각했거든요. 제주에 가면 누구나 가는 곳들이 있잖아요? 천지연, 천제연 폭포, 용두암, 만장굴, 성산일출봉, 섭지코지, 여미지식물원 같은 유명 관광지들 말이죠. 식당도 저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꼭 가봐야 하는 식당은 다 가봤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오만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달 살이도 길다고는 물론 할 수는 없겠지만 한 달 정도는 살겠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절대 가볼 수 없는 곳들을 이 책은 여러 장소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꽃님이네도 처음에는 잘 알려진 장소 위주로 방문을 합니다. 한림공원이나, 김녕미로공원 같은 곳들이죠. 그런데 한 달 살이의 종반으로 갈수록 단기 관광객들이 잘 가지 않는 곳이 더 많아지게 됩니다. 제주 기적의 도서관, 아부오름, 휴애리 자연생활농원 같은 곳들은 아마 가보지 못한 분들이 더 많으실 겁니다. 사실 제주도가 굉장히 넓습니다. 서쪽 애월에서 동쪽 성산까지 가려면 차로 2시간은 가야 하거든요. 2박 3일 여행으로 제주도를 다 봤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죠.


4. 제주에서 한 달 살이가 제주도를 ‘재발견’하도록 해준 거네요.


 책과는 조금 먼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최근 제주는 국제자유도시가 되겠다고 기치를 세우고 나서부터 부동산 광풍에 외국의 개발자본이 대거 유입되면서 난개발이 우려가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제주도민들도 그런 문제를 대체로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는데요, 많은 자본이 들어오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말 문제는 사람들이 ‘제주’를 잘 모른다는 것에 있습니다. 제주를 잘 모른다는 것이 단지 좋은 관광지가 어디인지를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주의 문화, 정서, 제주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채로 관광지를 훑어보고, 맛집을 들르거나 하는 것은 지역을 훼손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거든요. 어쩌면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여행 방식 자체가 대단히 소비적이고 파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 이 마을을 전혀 모르는 관광객이 해마다 1000만명 이상이 오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길게 드린 이유는 이 책이 좀 다른 방식의 여행을 제안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관광지를 훑어보는 여행, 여행지에 대한 이해 없는 여행이 아니라 이 책은 “느린 여행”이 뭔지를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5. “느린 여행”, 느낌이 좋은 말인데요, “슬로우푸드”처럼 여행도 천천히, 음미하면서 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네, 그런 여행을 디투어링이라고도 하는데요, 말 그래도 진짜 여행은 목적지까지 바로 가는 것이라기 보다 좀 우회로를 거치는 여행이거든요.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참 충실합니다. 책의 후반부에는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분들에게, 특히 어린이들과 함께 읽을만한 도서 목록을 제시해줍니다. 설문대할망을 모르면 제주 문화에 대해서 무지하다고 할 수 있는데요, 설문대할망과 관련된 재밌는 이야기를 담은 책, 또 일을 나간 해녀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이야기를 담은 책, 또 저희가 잘 알지 못하는 제주의 역사, 특히 4.3 항쟁에 대해 소개해주는 이야기 책 등 여러 권을 소개해 줍니다. 제주를 더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제주를 더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한거죠. 특히 전은주씨는 두 아이를 데리고 비가 오는 날이면 제주에 있는 도서관으로 가서 이런 책들을 읽었다고 해요. 제주에는 아름다운 도서관이 참 많은데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바람도서관’이라는 곳이 참 좋았습니다. 바람도서관은 카이스트와 서울대를 나온 젊은 부부가 지리산에서 꿀을 치면서 살다가 제주로 와서 펜션을 운영하면서 거실을 이렇게 도서관으로 만들어 공유하고 있다고 해요. 꽃님이와 꽃봉이가 여기서 책을 읽고 뛰어놀고 낮잠도 자는 것을 보니 저도 제 아이와 함께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6. 비가 오는 날이면 도서관에 가고, 햇살 좋은 날이면 바닷가로 나가고, 정말 슬로우여행이네요. 


 슬로우여행으로 꽃님이네는 ‘제주’도 재발견을 했지만, 무엇보다 전은주씨는 ‘가족’을 재발견합니다. 아이들과 밀착해서 한 달을 아름다운 제주에서 보내니까 이전에 알지 못했던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거죠. 한 달 동안 부비고 다니다 보니 남매는 서로를 더 의지하게 된 것은 물론입니다. 또 전은주씨 역시 제주에서 밥그릇 네 개, 식판 두 개, 냄비 하나로 살아보니 그동안 외출할 때마다 입을 옷이 없다며 불평했던 자신에 대해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주도에서는 늘 입던 옷도, 똑같은 반찬으로 지내도 괜찮았던 이유가 뭘까를 생각해보니, “애초에 삶이 지루하지 않으니 옷이나 메뉴따위로 변화를 줄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루한 삶을 소비로 바꾸려 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책은 언뜻 제주도에서 아이들과 한 달을 살아본 사람의 여행기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닌 책입니다. 엄마와 아이가 여행을 통해서 성장한 기록을 담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주도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준다는 점에서 여행기이기도 하고, 아이들을 양육하는 하나의 방법을 알려주는 육아서적이기도 하고, 엄마가 된 여성의 성장 에세이이기도 한 여러 얼굴이 있는 책입니다.


7. 제주에서 한 달을 지내는 것이 생각만 해도 낭만적이기는 한데, 이런 질문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선 비용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월세를 얻고, 항공권을 사는 것으로도 비용이 많이 들텐데요, 전은주씨는 생각보다 많이 들지 않았다고 해요. 일단 꽃님이네가 가장 많이 간 곳이 바닷가와 도서관인데요, 아시다시피 바닷가와 도서관은 입장료가 없지요. 아침은 해 먹고, 점심은 도시락, 저녁은 외식과 해먹기를반반으로 하니까 생활비도 많이 들지 않았다고 해요. 평소 쓰던 한 달 생활비를 바탕으로, 아이들 학원비가 안들어가니까 서울에서 살 때와 큰 차이가 없었던 거죠. 그리고 제주에서 한 달을 지내려면 차가 필요한데요, 렌트 비용이 크기 때문에 꽃님이네는 배에 차를 실어 갔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 편이 더 저렴했다고 해요. 이 책을 읽으면 정말 아이를 데리고 제주도 가고 싶어 온 몸이 근질근질합니다. 꽃님이와 꽃봉이는 밤이면 엄마와 그림 그리기, 만들기를 해서 작품을 벽에 붙여두고, 동화책을 읽고, 비오면 수학 문제도 풀고, 날씨 좋으면 올레길도 가고, 바다도 갑니다. 그리고 금새 다른 아이들과 친구가 되고 밤이면 깊은 잠에 빠집니다. 학원 다닌다고 지쳐 있는 아이의 모습 대신에, 또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모습 대신에 내 아이에게 한 달이라도 그런 시간을 오롯이 주고 싶다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면 안할 수가 없어요. 저도 이 책을 읽고 그런 생각을 이기지 못해 2014년 가을에 아이를 데리고 제주 한 달 살이를 떠났습니다. 그 때 이 책이 정말 도움이 되었어요.

 간단히 제 경험을 말씀드리면, 이 책의 내용처럼 정말 생각보다 많은 비용이 들지 않았고, 저희가 묵은 민박집에 함께 한달 살이 온 가족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제 아이는 남자아이인데, 동갑내기 여자아이가 바로 옆 방에 묵고 있어 함께 여행을 했어요. 지금까지도 서로 연락을 하고 지내고 있구요. 저희는 제주가 준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8. 아, 이번 여름방학에 더 많은 분들이 제주 한달 살이에 도전해보시면 어떨까 하네요. 정리해주시죠.

 아까 디투어링에 대해서, 슬로우 여행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요, 요즘 청년들이 많이 하는 여행 중에 ‘내일로’라고 56500원을 내면 5일 간 열차를 자유롭게 이용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그 여행이 참 근사한 슬로우 여행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거기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낯선 곳을 가보고, 길도 잃어버려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요즘에는 ‘내일로’ 여행 족보가 돌아다닙니다. 어딜 가서 자야하는지, 뭘 보고, 뭘 먹어야 하는지 매뉴얼에 따라 청년들이 다니는 거에요. 이런 여행은 새로운 곳을 경험한다는 여행의 취지와는 맞지 않습니다. 여행이기보다는 쇼핑에 가깝죠. 

 오늘 소개해드리는 <아이들과 제주에서 한 달 살기>에도 숙소로 고려할 만한 곳, 꽃님이네가 다닌 맛집과 카페, 좋았던 장소들이 소개되고 있는데요, 이 책을 읽으시는 독자분이라면 부디 이 책을 족보로 생각하고 이 책을 따라하지 마시고 정말 발길 닿는대로, 마음에 드는 곳에서 서고, 조용한 식당에 들어가보고, 낯선 제주를 경험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전은주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익히되 잊으라”. 계획은 세우고 움직이더라도 아이들과 여행을 할 때는 엄마 계획을 잊으라고 권합니다. 바닷가에 오면 물에 들어가야 한다는 건 엄마 생각이고, 아이들은 그냥 모래만 팔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게 여행의 묘미이고 즐거움이라는 겁니다. 이 책을 제주 여행 족보가 아니라 ‘슬로우 여행 지침서’로 읽으신다면 ‘제주’와 ‘가족’을 재발견하는 기회가 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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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 - 황순원의 「소나기」 이어쓰기 문지 푸른 문학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엮음, 김종회 책임편집, 황순원 원작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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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얼마 전 <어둠에서 벗어나기>를 읽으며, 이야기에 있어서 죽어 가는 자의 권위에 대해 생각했었다. 나는 방송에서 책을 소개하려고 몇 년만에 황순원의 <소나기>를 다시 읽었고, 그 직후 <어둠에서 벗어나기>를 읽은 탓인지 이번에도 두 책이 겹쳐 보였다. <소나기>는 1952년에 쓰여진 작품인데, 이 시기가 한국전쟁 당시였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 나라에서 "죽음이 또 다른 얼굴을 획득하는 과정" 에서 쓰여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어둠에서 벗어나기>에서 디디 위베르만은 우리가 이야기와 멀어진 이유를 벤야민의 말을 빌려와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죽음이 또 다른 얼굴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지나친 격의일 수 있지만, (나는 모든 것을 정확히 말해야 하는 학자적 책임과 같은 것은 사람이기에) <소나기>에서 소녀가 죽을 때 한 말, "자기가 죽거던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혀서 묻어달라"고 한 부분에서 벤야민이 이야기꾼에 대해서 쓰면서 하는 말, "이야기를 구성하는 질료들은 죽어 가는 자에게서 소통 가능한 형식을 띠게 된다. (중략) 그리고 자신의 표현과 자신의 시선 속에서 갑자기 잊을 수 없는 것이 솟아 오른다. 이것이 이 사람을 스쳤던 모든 것에 권위를 부여한다"와 겹쳐 보였다. 아마도 소녀의 분홍색 스웨터는 그래서 많은 것을 의미하고 있었을 것이다. <소나기>의 기원에는 죽어가는 소녀의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 <소년, 소녀를 만나다>는 <소나기>에 대한 아홉편의 오마쥬다. 개인적으로는 전상국의 <가을하다>는읽기 좀 거북했지만 나머지 단편들은 모두 재밌었고, 발상도 흥미로웠다.  특히 '이어쓰기'를 전승이라고 할 때 이어쓰기는 이야기만의 독점적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이 책이 <소나기>를 정보를 전달하는 하나의 고립된 소설이 아니라 경험을 전달하는 이야기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아홉 편의 이야기에 모두 죽음이 드리워져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

황순원의 ‘소나기’ 이어쓰기


1.안녕하세요? 이번 주에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시나요?


혹시 황순원 작가의 단편소설 <소나기> 읽어보셨나요? 


2.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라면 국민단편이니 저도 당연히 학교 다닐 때 읽어봤죠.


 그러면, 혹시 <소나기>에 나오는 소년, 소녀의 이름도 아시나요? 혹시 기억하세요?


3. 소설 <소나기>에는 소년과 소녀의 이름이 나왔나요? 저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 


 네, 소설 <소나기>에는 한 소녀와 한 소년이 나옵니다. 소녀는 서울에서 온 윤초시네 증손 딸이구요 분홍색 스웨터에 단정한 치마를 입은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는 5학년 여학생입니다. 소년은 소녀가 온 시골 마을에서 살고 있고 소녀가 던진 조약돌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만지작 거리는 부끄러움 많은 동갑내기 친구에요. 소년은 개울가 징검다리에서 만난 소녀를 좋아해 꽃도 꺾어다 주고, 밭에 들어가 무도 뽑아 나눠 줍니다. 소녀에게 잘 보이려 코뚜레도 뚫지 않는 송아지 등을 타보이기도 하구요. 그러다가 둘은 산너머로 놀러 갔다가 소나기를 만납니다. 소년은 소녀가 소나기를 피할 수 있도록 수수밭으로 달려가 수숫단을 세워주고, 비가 와 물이 불어 있는 도랑을 소녀를 업어 건넙니다. <소나기>의 결말은 아마 다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소녀는 소나기를 맞은 일로 앓다가 제대로 약도 써보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소녀의 아버지가 사업 실패로 어려운 처지였기 때문이죠. 소녀는 죽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해요. “그런데 참 이번 기집애는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어?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달라구..”. 


4. 그 옷은 소년과 함께 소나기가 오는 날 소녀가 입고 있던 옷이죠? 소년의 등에서 진흙물이 베어 버려서 얼룩이 생긴..


 네, 아마 소녀는 소년과 산너머까지 놀러다닌 것이 참 좋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달라구’ 했는데요, 이 말은 소녀의 마지막 말이기도 하고, 또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기도 해요. 


5. 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고 나서는 여운이 오래 남았습니다. 이제 홀로 남은 소년의 마음은 어땠을까, 죽기 전 소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네, 저도 <소나기>를 처음 읽은 것은 중학교 다니며 국어 시간이었는데요, 교과서에 참 좋은 작품이 많지만 제게는 <소나기>는 소설을 읽은 원-체험이라고 할까요, 소설이란 것이 이런 거구나 하고 처음 느낀 원초적 기억처럼 남아 있습니다. 소년과 소녀의 풋풋한 사랑도, 또 소설의 배경이 되는 개울이 흐르고, 갈대 밭이 있고, 수박 밭, 무 밭 사이로 저 멀리 원두막이 보이고, 허수아비를 흔들고, 아름다운 풀꽃 들꽃이 피어있는 공간은 한국 사람들의 고향에 대한 ‘보편적 기억’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소녀가 남긴 말은 많은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죠. 

 지금까지 황순원의 단편 <소나기>에 대해서 길게 말씀을 드렸지만 오늘 제가 소개해드릴 책은 사실 <소나기>가 아닙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책은 문학과 지성사에서 만들고,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 마을에서 엮은 <소년, 소녀를 만나다>라는 책이에요. 이 책의 부제에는 ‘황순원의 소나기 이어쓰기’라는 제목이 붙어 있어요. 말 그대로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 남는 여운과 마지막 대사가 불러 일으키는 저마다의 상상력으로 <소나기>를 이어쓰는 9편의 소설이 실려 있습니다. 


6. 아, 그러니까 <소나기>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아홉 개의 작품을 담은 책이군요. 정말 재미있는 기획이네요.


 아까 제가 소년과 소녀의 이름을 기억하시냐고 여쭸는데요, 원작 <소나기>에는 소년과 소녀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 작가는 소년과 소녀의 이름을 붙이지 않는 방법으로 소설을 읽는 독자가 누구라도 자신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도록 했겠죠. 그런데 이 책에서 <소나기>를 이어 쓴 서하진 작가의 <다시 소나기>에는 소년의 이름은 ‘환’, 소녀의 이름은 ‘윤희수’로 소개됩니다. 소년, 소녀에게 이름을 붙인 것도 재밌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소설의 내용도 흥미롭습니다. <다시 소나기>에서 ‘환’은 윤희수의 사촌인 윤희영과 한 반이 됩니다. 처음에는 희영이 희수의 사촌인 줄 몰랐던 환은 희영이 희수와 많이 닮았다고만 생각했는데, 우연히 함께 귀가하다가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둘이 걷다 다시 소나기를 만나고, 둘은 함께 달리기 시작합니다. 서하진 작가는 희수와의 기억이 사촌인 희영과의 만남으로 이어지는 상상력을 발휘해본 것이죠.


7. 아, 재밌네요. 마지막에 환과 희영이 다시 소나기를 만나는 것도 원작 <소나기>의 내용이 오마쥬되는 거네요.


 네, 그래서 이 작품 제목이 <다시 소나기>이기도 해요. 이외에도 아홉 편의 단편에서 원작 <소나기>의 여러 내용이 차용되고, 저마다 다른 상징과 의미로 활용됩니다. <소나기>에서 소녀가 개울가에서 소년에게 집어 던진 ‘조약돌’, 그리고 조약돌을 집어 던지며 소녀가 소년에게 한 말 ‘이 바보’라는 말, 또 소녀가 소녀에게 건네 준 ‘대추 한 줌’, 거기에 대한 보답으로 소년이 근동에서 제일 가는 맛이라 서리한 ‘호두’, 소녀가 입고 다녔던 ‘분홍색 스웨터’, 둘이 함께 맞았던 ‘소나기’ 등 소설에 나오는 소품과 소재들이 아홉편의 소설에서 저마다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 책에서 구병모가 이어 쓴 <헤살>은 소녀가 죽고 나서 소년의 슬픈 마음을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헤살>에서는 소녀가 죽고난 후 소년도 며칠 아팠다고 작가는 상상합니다. 소년은 학교도 한동안 가지 못했는데, 유급을 피하려 학교에 가는 날 다시 문제의 개울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물 안개가 자욱히 껴 잘 보이지 않는 건너편을 응시하며 징검다리를 건넙니다. 제가 잠깐 읽어보겠습니다.


“소년은 한 발을 돌 위에 올려놓았다. 다음 그리고 다음. 네댓번째, 예닐곱번째를 가볍게 건너뛰어 기어이 그 자리에 섰다. (중략) 소년은 부스러지고 눅눅해져 이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호두 알맹이를 개울에 뿌렸다. 물살을 따라 어딘가로 춤을 추는 듯 떠내려갔다. 주머니를 까뒤집어 나오는 대로 뭐든 개울에 떨어뜨렸다. 말라비틀어진 대추 몇 알하며 소녀의 목덜미처럼 흰 조약돌까지”.


8. 호두 알맹이도, 대추알도, 조약돌도 개울에 떠내려 보내며 슬픔까지 떠내려 보려고 했던 것이군요. 


 네, 그래서 저도 구병모가 이어 쓴 <헤살>은 소년의 애도를 담고 있는 이야기로 읽었구요, 특히 <헤살>은 이야기가 이뤄지는 시점도 소녀가 죽고 난 직후고, 문체도 황순원 작가의 것을 최대한 따라 쓰고자 한 점이 있어 마치 <소나기>와 한편의 이야기처럼 읽힙니다. 하지만 <소나기>에서 호도, 대추알, 조약돌은 소년과 소녀의 소박하고 수줍은 사랑을 상징하는 것들이었지만 <헤살>에서는 슬픔과 애도의 의미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점이 차이라 할 수 있겠죠.


9. 선생님께서는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었던 이야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솔직히 말씀드려 모두 다 재밌었는데요, 특히나 기발하다고 생각하며 읽었던 작품은 손보미 작가가 쓴 <축복>입니다. 좀 소개를 해드리면요, 손보미 작가는 <소나기>에 소년과 소녀 두 사람 말고 원작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제 3자를 개입시킵니다. 그 제 3자는 바로 소녀를 좋아하는 소년을 좋아하는 또 다른 소녀입니다. 기발한 상상이죠? <축복>에서의 주인공인 이 시골 소녀는 서울서 전학 온 소녀를 부러워 합니다. 얼굴이 ‘햇볕에 타서 시커멨고 머리카락은 귀밑까지 짧게 자르고 다녔던’ 자신과 ‘분홍색 스웨터와 남색 스커트를 입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반양말을 신고서는 얼굴이 아주 하얀’ 서울서 온 소녀와 자신을 비교합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한 소년이 서울 소녀에게 갈꽃을 꺽어주고, 조약돌을 집어던지고 하는 걸 모두 숨어서 바라 봅니다. 못났고 예쁘지도 않은 자신의 모습에 비해 서울 소녀와 소년의 데이트는 너무나 아름다웠던 거죠. 그런 소녀는 서울 소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여자애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또 소녀가 죽습니다. 소녀는 자라서 서울에 있는 여대에 진학 후 친구들이 시위를 하며 거리에서 죽어가는 것을 봅니다. 이 과정에서 ‘죽음’의 의미를 좀 더 이해하게 됩니다. 소년이 서울 소녀가 죽었을 때의 느꼈을 감정에 대해서도 생각하구요.


10. 아, 소년과 소녀를 바라보는 또 다른 소녀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네요.


 심지어 이 책에는 소년이 노인이 되어 등장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노희준 작가가 쓴 <잊을 수 없는>에서 소년은 이제 노인이 되어 동물원에서 어린 손녀와 함께 앉아 있습니다. 이제 노인이 된 소년은 치매 초기 증상를 보입니다. 치매를 앓으며 가까운 기억부터 사라져 이제 노인은 소년일 때의 기억 앞에 있습니다.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상처도 이십대의 가슴앓이와 함께 지나가 버렸고”, “열심히 일하는 동안, 소녀의 기억은 전생처럼 멀어져” 갔습니다. 그리고는 손녀와 함께 있는 동물원에도 소나기가 내립니다. 인생의 끝자락에는, 열정도, 사랑도, 가슴앓이도 사위어가지만 그럼에도 동심의 기억은 여전히 강렬합니다. 이 작품에서 원작 <소나기>의 이야기는 하나의 추억이 되고, 소나기는 그 추억을 되살리는 매개가 됩니다.


11. <소나기>의 소년이 노인이 된 이야기까지, 흥미로운 책입니다. 이 책을 소개해주시는 이유 정리해주시죠.


 이 책은 지난 2015년 황순원 탄생 100주년을 맞아 황순원 문학촌에서 여러 작가들이 <소나기>를 오마주한 작품을 묶은 책입니다. 다섯 편은 황순원 작가의 경희대 제자인 다섯 명의 현역 작가들, 네 편은 경희대 출신의 젊은 작가 4명의 작가가 썼습니다. <소나기>는 1952년 작품이구요, 이 소설이 쓰여진지는 60년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 엮인 아홉 편의 이야기는 우리 시대의 고민들도 담고 있습니다. 소년을 노인으로 그린 작품은 기억의 문제, 세대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또 시골 소녀와 서울 소녀의 대비가 나타나는 작품에서는 서울과 지방 사이의 문제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작품에서는 소년이 이제 자라 공장 노동자가 되는데 여기에서는 도시 삶의 고단함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야기에서는 소녀가 외계인이었다는 설정도 있습니다. 저마다 지금의 문제를 <소나기>의 뒷이야기를 상상하며 다루고 있습니다. 


 책을 구매하시면, 별책으로 ‘소나기 이어쓰기’라는 노트를 한 권 받게 되시는데요, 여기에는 독자들 역시 자신만의 <소나기> 이어쓰기를 권유하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도 아홉 명의 작가처럼 이번 여름 소나기 오는 날, 마음을 다잡고, <소나기> 이어쓰기를 한번 해보면 어떨까요? 어떤 이야기라도 좋습니다. 그렇게 쓴 이야기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시대가 담겨 있는 것이죠. 거기서부터 치유가 일어납니다. 문학의 힘인 것이지요. 이 책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읽어보신다면, 청취자분들, 문학을 만나게 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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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 - 진중권의 철학 매뉴얼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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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이번 주는 교통방송에서 진중권의 <아이콘>을 소개했다. '왠 진중권?' 하는 반응도 있었는데, 거기에 나는 '진중권이 왜?'라고 응수했다. 진중권이 쓴 책의 부정확한 부분 때문에 논란이 있는 것도 알고, 진중권의 말에 상처를 받은 사람도 많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안다. 그리고 진중권의 '모두까기식 화법'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도 많겠지만 나는 최소한 진중권의 모두까기에는 먼 사람이라면 가혹하고, 가까운 사람이라면 봐주는 식이 없다는 일관성을 늘 높이 사는 쪽이었다. 또, <미학오딧세이>는 미학의 대중화 뿐 글쓰기에 있어서도 분명히 중요한 역할을 한 점이 있다. 너무 많은 책을 쓰고, 너무 많은 말을 해서 진중권의 '말의 힘'이 약해진 것일까. 말의 힘은 말 자체에서 나오지 말의 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진중권이 여전히 정확하지는 않을지언정 솔직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도 그렇다. 이 책은 어시스턴트를 두고 자료조사하게 해서 얼치기로 인문학 강의하는 사람들이라면 결코 해내지 못한 현대 철학의 몇 가지 개념들을 재미있게 포착하고 있다. 그리고 현대 유럽철학이 지시하는 '모호한 영역', 지젝이 대타자의 똥이라고 불렀고, 데리다라면 '구조의 배꼽'이라 불렀던 지점을 현대철학자들이 결코 해주지 않는 쉬운 방식으로 그려준다. 이해의 단순화가 만들어내는 왜곡은 장승업이 그린 작품이 아닌데 장승업이 그렸다고 하는 것에 비하자면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니다. 진중권은 최근 들어 조영남이 보조작가 시켜서 작품을 만든 것이 사기냐는 논란에 대해 별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 쪽에 있는데, 어시스턴트 시켜서 강의만드는 사람이 그런 편을 든다면 같이 두들겨 맞아야겠지만 진중권은 일단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충분히 확보한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이 책 <아이콘>은 김규항에 대한 비판이라 해도 좋을 책이다. 이 책에서 데리다를 불러오는 부분은 모두 김규항에 대한 비판이라고 해도 좋다. 김규항은 언젠가 진중권에게 '진보신당의 당적을 가진 자유주의자'라 썼는데, 결국 김규항이 보기에 진중권은 '제대로 된 정체성'을 가진 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진중권은 거기에 '근대적 강박관념', '복고적인 비판', '순혈주의자의 아집'이라고 일갈한다. 글을 읽으면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왜 김규항이 박유하에 대해서 보이는 관대함을 진중권에게는 발휘하지 않는가?". 진중권에게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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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중권의 철학 매뉴얼


1. 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오늘 제가 소개해드릴 책은 출판사 씨네21북스에서 만들고, 진중권이 쓴 <아이콘>이라는 책입니다. 진중권 선생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이미 잘 알고 계실텐데요, 다양한 정치, 사회 문제에 비판적으로 개입해 오신 한국 사회의 대표 논객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그런 평가에 동의하는데요, 사실은 진중권 선생은 논객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이 분의 정체성을 드러내기에는 역부족일 것 같아요. 먼저, 미학자로도 각각 세 권짜리인 <미학오딧세이>,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이미지 인문학>, <현대미학 강의>, <미학에세이> 등 수십 권의 책이 있구요, 정치평론가로서 <폭력과 상스러움>, <내 무덤에 침을 뱉으마>, <레퀴엠> 등 또 여러 권의 책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팟캐스트 <진중권의 문화다방>을 진행하면서 만난 예술가들과의 인터뷰를 엮은 책 <예술가의 비밀>이라는 책도 냈고, TV에도 <속사정 쌀롱>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도 있지요. 그리고 동시에 대학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 그러고 보니 정말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시네요.


 네, 생산력이 대단하다는 것도 인상적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중권 선생에 대해서 정치적인 관점 때문에 편견을 가진 분들은 진중권 선생의 이런 다양한 면모를 모르시는 분들도 꽤 있습니다. 사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진중권 선생의 대표작인 <미학오딧세이>는 미학이 어떤 학문인지 한국 사회에 널리 알린 중요한 계기가 된 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미학오딧세이>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만큼 많은 분들이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미학 분야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비판이 있다는 것도 압니다만, 저는 미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인지 그런 부분은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았구요, 오히려 <미학오딧세이>라는 책을 통해서 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소개해드리는 진중권은 논객이나 정치 비평가로서의 진중권이 아닌 미학자로서의 진중권 선생과 진중권 선생이 쓴 <아이콘>이라는 책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물론 논객 진중권과 미학자 진중권이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겠지만요.


3. 저도 TV에서 진중권 선생이 토론하는 것 보면, 말씀을 너무 잘하셔서 놀랄 때가 있는데, 최근에는 조영남씨가 그린 작품에 대해서 의견 표명한 적을 들은 적이 있어요. 진중권 선생은 조영남씨의 작업을 사기로 볼 수는 없다고 하시더라구요.


 오늘 소개해드리는 <아이콘>이라는 책을 보시면, 왜 진중권 선생이 조영남씨의 작업을 사기나 범죄로 보지 않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혹시 ‘파르마콘’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세요? 아마 청취자분들께서도 처음 들어본 말일텐데요, 이 말은 플라톤이 쓴 <파이드로스>라는 책에 나오는 말인데, 우리가 약국을 영어로 pharmacy라고 하잖아요? 파르마콘은 pharmacy의 어원이 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파르마콘에는 약 혹은 치료라는 뜻이 있어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파르마콘에는 약이라는 뜻과 함께 ‘독약’이라는 뜻도 함께 있습니다. 한 단어에 완전히 반대되는 두 말이 모두 들어 있는 거죠. 그러니까 만약에 이 말이 들어간 문장을 번역한다고 하면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앞 뒤 내용을 잘 보고 파르마콘을 약으로 번역할지, 독으로 번역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거죠. 사실 철학자 플라톤은 모든 것에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고 가짜를 솎아내려고 했어요. 이상 세계인 이데아에 가까운 것은 진짜고, 그렇지 않으면 가짜라고 봤던 건데요, 파르마콘의 뜻이 사람을 살리는 약도 되고, 사람을 죽이는 독도 되는 것을 보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파르마콘이라는 말을 독으로 번역해야 진짜인가요? 약으로 번역해야 진짜인가요? 말하기 쉽지 않은 거지요. 이렇게 ‘파르마콘’이라는 말을 가지고 생각해보면 조영남의 작품이 사기냐, 사기가 아니냐 말하기 어려워 집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윤리적 관점에서는 직접 그리지 않았으니 사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예술의 문제에서는 최근 들어 작가가 직접 그리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조영남씨 작품은 진짜가 되고, 어떻게 보면 가짜가 되는 거죠. 진중권 선생은 파르마콘이라는 말을 설명하면서 진짜냐 가짜냐를 따지는 것보다 조영남씨가 보조 작가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해서 서명만 한게 어떻게 작품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4. 좀 어려운 말이기는 한데, ‘파르마콘’이라는 독도 되고, 약도 되는 말을 통해서 조영남씨의 작품도 어떤 경우에는 사기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식의 결론을 끄집어 내는 거군요. 


 네, 맞습니다. 오늘 소개해드리는 이 책 <아이콘>은 바로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파르마콘, 파타피직스, 니힐리즘, 탈주 등 현대 철학에서 가장 자주, 또 중요하게 다뤄지는 개념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소개하고, 그것을 정치나 미술, 음악, 문학 등 여러 가지 사례에 적용하면서 아주 재밌게 소개해주는 책입니다. 사실 이 책에서 금방 말씀 드린 파르마콘으로 조영남씨 사건을 직접 설명하고 있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건, 일상, 변화를 개념을 통해서 볼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5. 그런데, 개념, 플라톤, 니힐리즘 이런 어려운 말이 나오고, 또 철학이라니까 조금 어렵게 느끼실 청취자분들도 많으실 것 같아요. 


 아마 그렇게 느끼시는 분들도 분명히 계실텐데요, 사실 ‘개념’이라는 것은 전혀 어려운 게 아닙니다. 일상에서도 우리가 하는 말들이 다 일종의 ‘개념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요즘 자주 쓰는 ‘헬조선’이라는 말이나 ‘금수저’, 취업, 결혼, 자녀 갖기를 포기하는 ‘삼포세대’ 같은 신조어도 일종의 모두 개념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점이 중요합니다. ‘금수저’라는 말도 개념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틀림 없이 이 말은 아버지가 부자인 금수저 자식들은 노력하지 않아도 잘먹고 잘살고, 흙수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세태를 드러내는 말인데요, 우리는 이런 금수저라는 말 때문에 우리 사회의 불평등한 현실을 이전보다 더 잘 이해하고 포착하게 됩니다. 삼포세대도 그런 말이에요. 삼포세대라는 말이 있기 전에도 청년들의 삶은 어려웠는데, 이런 개념어가 만들어져서 사회가 청년들이 처한 현실을 더 잘 포착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 뿐만 아니에요. 삼포세대나 금수저라는 말은 현실을 드러내주기도 하지만 이런 말을 쓴다는 것은 지금의 불평등이나 어려운 현실을 개선하자는 요구를 나타내기도 하거든요. 책의 제목이 ‘아이콘’인데요, 컴퓨터 상에 있는 아이콘을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아이콘을 클릭하면 프로그램이 실행되거나 파일이 열리죠? 옛날에는 프로그램 하나를 실행하는 것도 명령어를 일일이 넣어야 했기 때문에 쉽지 않았지만, 이제 아이콘만 클릭하면 복잡한 명령어 없이도 필요한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문가가 아니라도 누구라도 할 수 있죠. 마찬가지입니다. 개념어를 잘 이해하면 복잡하고 어려운 철학적 문제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누구나 철학자처럼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6. 아, 그러니까 금수저라는 개념으로 우리 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바라보는 것처럼, 파르마콘이라는 개념을 통해 조영남씨 논란을 철학자처럼 생각해 볼 수 있는 거네요.


 네, 바로 그 점이 이 책이 가진 미덕인데요, 사실 파르마콘이라는 개념어는 데리다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가져와 사용하는 말인데, 데리다 철학을 이해하기란 정말로 어렵지만 이 책을 따라 읽어가면 훨씬 쉽게 이해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재밌는 사례와 개념들이 정말 너무너무 많습니다. 현대철학에서 많이 다뤄지는 개념 중 또 하나가 ‘지루함’입니다.


7. ‘지루함’이 개념어인가요? 


 네, ‘지루함’도 개념어에요. 사실 우리가 세상을 객관적으로, 이성적으로 본다고 해도 기분에 같은 세상이라도 다르게 보이잖아요? 저만 해도 배가 부를 때는 모든 것을 용서하는 쪽이지만, 배가 고픈 날에는 짜증을 많이 냅니다. 우리가 이성을 가지고 세상을 대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기분을 통해서 세상을 먼저 만나죠. 지루함도 이런 기분 중의 하나입니다. 지루한 날과 지루하지 않은 날을 비교해 보시면 확실히 다르죠? 현대철학에서는 현대인의 삶을 지배하는 기분 중 하나가 바로 ‘지루함’이라고 해요. 지루함이라는 개념어를 가지고 세상을 보면 설명되는 게 많습니다. 이 책에서는 ‘묻지마 범죄’의 경우도 지루함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동의가 안되시는 분도 많으실텐데요, 영화 배트맨을 보면 조커가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이유는 그가 살고 있는 고담시가 특별히 미워서가 아니라 너무 지루해서 그러는 거 같아요. 조커는 ‘악을 물리치는 정의의 사도’라는 배트맨을 영웅 만드는 이야기를 너무 너무 지루하게 느끼는 거죠. 만약 조커가 악행을 저질렀는데, 배트맨이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조커는 게임에 흥미를 잃고 인질로 잡은 이들을 그냥 풀어줬을지도 몰라요. 오직 배트맨과의 대결만 조커에게 재미를 주기 때문입니다. 


8. 조커는 지루함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지루함’이라는 개념어를 통해 보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네요.


 네, 그 뿐만 아니구요,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금각사>라는 아름다운 소설을 쓴 사람인데 국수주의자였어요. 이 사람이 일본 무사들이 자결하는 방식으로 할복하여 자살했습니다. 이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이런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해요. “전후의 일본은 전사의 미덕으로 이룩한 시적 위대함을 잃고, 이해관계만 따지는 경제동물들의 산문적 사회로 전락해버렸다”. 이 책에서 진중권 선생은 미시마 유키오가 이런 산문적 사회가 된 일본을 지루하게 느꼈고, 지루함을 깨고 일본인들의 삶에 의미를 주기 위해 자신의 배를 갈랐다고 합니다. 역시 지루함이라는 개념으로 사건을 설명하는 거죠. 이렇게 보면 일베 같은 사이트에 집중하는 사람들도 설명이 됩니다. 제 주변의 일베 이용자들에게 왜 그 사이트를 이용하냐고 물어보면 단지 재밌어서 그냥 한다고 하거든요. 일베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혐오 문제도 결국 지루함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9. 철학적인 개념을 통해 현실을 다른 시선으로 보게 해주는 책인데요, 정리해주시죠.


 사실 개념은 말에 불과하다,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개념은 힘이 셉니다. 어린이라는 말이 중세에는 없었던 것 아세요? 어린이라는 것도 개념이고 근대에 이르러 발명된 겁니다. 인권이라는 개념도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없었어요. 소외라는 개념도, 민주주의라는 개념도 모두 만들어진 개념들인데, 그 개념 때문에 사람들이 세상을 전혀 다르게 보게 되었고 세상이 이만큼이나 변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이 책은 생각의 힘이 세지도록 하는데 유용합니다. 

 어려운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진중권 선생의 특유의 문체로 쉽고 재밌는 글이 되었습니다. 책에 실린 내용들은 대부분은 영화 매거진인 씨네21에도 실은 글이라 내용은 어렵지만 이해하기는 절대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청취자분들에게 조금 어려운 책, 철학책을 읽어보시라고 강력하게 권하고 싶습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읽기 쉬운 책을 찾기 마련이지만, 책이 쉽다는 것은 거기에 별 내용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복잡한데 글이 쉽게 쓰여지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글을 못쓰는 사람이 쓴 책이 아니고서야, 깊이 있는 생각을 담은 책들은 대부분 읽기 쉽지만은 않습니다. 쉬운 책만 선호한다는 것은 지적인 성장을 그만두기로 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헬스장 가서 가벼운 것만 들어서는 근육이 안 생기는 것과 똑같지요. 

 특히 철학책은 깊은 생각을 하도록 전문적으로 훈련 받은 사람들 중 최고로 깊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써내는 책들이기에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벤치 프레스 같은 역할을 합니다.  여러 나라로 여행을 다니며 온갖 경험을 단편적으로 수십년하는 것보다 한 권의 철학책이 더 가치있는 경험과 지혜를 줍니다. 제가 유명하지만 논란도 많은 진중권 선생의 책을 소개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어려운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쉽고 정확하게 현대철학의 가장 깊은 생각들을 재미있게 소개해주고 있어 일독의 가치가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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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8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철학본색 2016-06-25 20:35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만약 당사자라면 기분이 많이 나쁠 것 같아요^^
 
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 - 개정판 다빈치 art 12
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 다빈치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덧붙임.

오늘 교통방송에서 오늘은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이라는 책을 소개했다. 사실 이 책은 이중섭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내용만을 담고 있다. 만약 이중섭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최열 선생님의 <이중섭 평전>(돌베개)를 추천한다. 최열 선생께서는 죽기 전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이 책을 쓰셨다고 하는데,  만약 이 책이 너무 두껍고 힘겹다면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하는 <이중섭 백년의 신화> 전시도록도 참고할 만하다. 이 책에는 최열 선생이 정리한 이중섭 연보가 소상히 적혀 있고, 서울대 권영민 교수가 이중섭의 절우였던 구상의 시를 비평해두신 글도 실려 있고, 이중섭과 마사코가 주고 받은 편지화도 많이 실려 있다. 편지화 자체도 하나의 작품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는데, 오늘 소개한 책에는 편지 내용만 번역하여 실려 있어 아쉬움이 크다. 또 마사코와 이중섭의 대화를 주고 받는 형식으로 묶은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편지를 다른 장으로 묶어 대화의 맥락을 따라가기 어려운 것도 아쉬운 점이다. 하지만 이 책에 미덕이 있다. 일단은 앞의 두 책보다 가볍고 가격도 훨씬 싼데다 이중섭의 주요한 작품이 모두 컬러로 실려 있어 '가족'이라는 관점으로 이중섭의 작품을 온전히 바라보는 경험을 갖도록 도와준다. 나는 특히 이중섭이 장남 태성에게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몇 번을 약속하는 장면에서 몇 번이나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가볍게 읽기 시작해도, 책을 내려 놓을 때는 여운이 오래 남는다.

아래 은지화는 방송할 때는 마치 제주에서 그린 것처럼 이야기하긴 했지만, 은지화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고, 최열 선생에 따르면 가장 유력한 것은 서귀포 생활을 마친 직후 정착한 부산일 것이라고 한다. 마사코의 증언이 있고, 양담배 종이를 구하기도 아마 부산이 더 쉬웠을 것이다. 대구 전시를 실패하고 정신분열증이 발병한 이중섭이 한 말이 귀에 맴돈다.

“예술을 한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무슨 대단한 예술가가 될 것처럼 세상을 속였다”. 이 말은 진실일까? 이중섭은 세상을 속였는가? 조선의 정직한 화공이라 스스로를 불렀던 그는 전시 실패 후 자신이 세상을 속였다고 생각하자 스스로 곡기를 끊었다. 누가 누구를 속이고 있는 것일까. 나는 또 누구를 속이고 오늘도 공밥을 먹고 있는 것일까.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1.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책을 가져오셨나요?


네, 이번 주에 제가 가져온 책은 출판사 다빈치에서 만들고, 이중섭이 쓴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이라는 책입니다. 


2. 이중섭이라면 우리가 아는 그 화가 이중섭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오늘 제가 소개해드리는 책은 화가 이중섭이 자신의 아내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와 또 그의 그림을 엮은 책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이중섭은 일본인인  야마모토 마사코와 1945년에 결혼해서 1946년에 첫 아들 태성을, 1948년 태현을 얻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터지고 1951년에 제주도는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판단해 서귀포로 가게 되는데요, 그 때 아이들이 여섯 살, 네 살 때였으니까 한참 귀였을 때지요. 그런데 가족이 함께 오래 살지 못합니다. 가족들이 떨어져 지내게 되면서 이중섭은 아내 마사코와 편지를 주고 받게 되는데요, 그 때 쓴 편지들을 엮은 것이 바로 오늘 소개해드리는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이라는 책입니다. 저도 이제 일곱 살 짜리 아들의 아빠이고, 또 얼마 있지 않으면 둘째도 태어나게 되는데요, 이중섭의 편지를 읽으며 여러 번 감정이 올라와 힘들었습니다. 


3. 이중섭이 가족들과 떨어져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어요. 왜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을까요?


 일단은 가난이 가장 컸습니다. 이중섭이 1916년 생인데요, 사실 1951년은 전쟁시기로 주변은 아주 어려웠던 때이지만 이중섭의 일생으로 봤을 때는 가장 행복했던 일 년이 바로 이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도쿄에서 유학하던 시절인 1941년 역시 문화학원이라는 자유로운 학교에서 인정도 받았고, 일본에서도 미술창작가협회의 회원 자격을 받는 등 좋은 시기가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중섭이 식민지 현실이라는 상황을 아주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냥 행복했다고는 할 수 없는 청년기를 보냈어요. 그렇지만 1951년 1월부터 12월까지 정확히 일 년을 제주 서귀포에서 머무는데, 이중섭이 이 시기에 아이들이 해변가에서 자유롭게 노는 모습을 주제로 한 작품을 무수히 그리고, 작품들 속에서 어두운 기색도 찾아 보기 힘듭니다. 엉덩이를 쳐들어올린 까까머리 아이들이 물고기를 잡고, 게를 잡으며 노는 작품들이 많이 있는데 모두 이 시기동안 그려진 작품입니다. 

 그런데요, 이런 재밌는 작품들 대부분은 은지화 위에 그려집니다. 은지화라는게요, 이중섭의 독창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피난 시절에 재료가 부족해서 하는 수 없이 사용하게 된 게 은지화에요. 은지화는 양담뱃갑 속에 있는 은박지 종이를 반듯하게 편 다음에 날카로운 철촉으로 된 펜으로 종이가 뚤어지지 않을만큼 눌러서 윤곽선을 그리고 색칠을 해서 효과를 내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는데요, 그래서인지 작품의 크기가 대부분 작고 질감이 독특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보관상태가 좋지는 않아요. 양담배 속 은박지 종이라 보니까 작품을 유지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거죠.




4. 그만큼 가난했던 거군요. 종이를 구하기 힘들었을만큼..


 혹시 잭슨 폴록이라는 미국 화가 아시나요? 많은 분들이 들어 보셨을 수 있는데, 잭슨 폴록은 커다란 캔버스 위에 유화 물감을 떨어뜨리는 방식의 액션 패인팅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어요. 사실 이런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물감도, 캔버스도, 그 뿐 아니라 작품을 만들기 위한 재료가 풍부했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이중섭의 은지화는 그에 비하면 정말 열악한 환경 속에서 나온 거지요. 이중섭은 본래 아주 부잣집 자제였는데요, 이런 가정은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만 시대를 잘 만났다면 아마 더 좋은 여건에서 더 재밌는 작품도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겁니다. 사실 은지화는 가난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그 표현 방식 자체는 그럼에도 정말 독창적이니까요. 

 이중섭의 아내인 마사코씨는 서귀포 시절을 추억하면서 정말 그 때는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정말 반찬은 구경도 못했고, 겨우 밥만 먹는 것도 다행이었다고 해요. 이중섭이 이 시기 그린 작품에 ‘게’가 많이 등장하는데요, 게를 잡아서 반찬으로 쓰고는 했다고 합니다. 지금 서귀포에 가면 이중섭 미술관 아래 이중섭 가족이 살았던 생가가 있는데, 가보면 집이 꽤나 커 보이지만 그 집 전체가 이중섭 가족의 집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초가의 아궁이 뒤편으로 있는 사람 두 명이 겨우 몸을 누일 공간이 있는 방 한칸에서 네 가족이 함께 지냈던 거지요. 




5. 이중섭에게 가장 행복했던 때가 서귀포 시절이라고 하셨는데, 지금 말씀을 들어보면 전혀 행복했을 것 같지 않아요. 밥도 못 먹을 정도로, 아이도 밥도 못 먹일 정도로 가난했잖아요.


 네, 맞습니다. 그래도 이중섭이 가족과 온전히 함께 지냈던 시기는 오직 서귀포 시절 뿐이었어요. 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중섭의 권유에 따라 마사코가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나게 됩니다. 마사코가 한국에 온지 7년만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는데요, 처음에는 마사코는 가지 않으려 했다고 해요. 가난을 이기지 못한 것이지요. 마사코가 일본으로 떠난 후부터 이중섭과 마사코, 이중섭과 두 아들 사이의 편지가 오고 가게 됩니다. 오늘 소개해 드리는 책도 이 시기에 이중섭이 가족에게 쓴 편지를 담은 책입니다.

 

6. 이중섭은 어째서 가족들을 일본으로 보낼 생각을 한 것일까요? 전쟁 중이라 위험해서였을까요?


 아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자신도 곧 일본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컸던 것 같습니다. 작업에 집중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금방 가족들을 다시 부르거나 자신이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일단 사기를 당했습니다. 마사코가 조금이라도 가계에 보탬이 되려고 일본 서적을 한국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시작했는데요, 그 일을 대행해 준 사람이 이중섭의 오산학교 후배인 마영일이었는데, 이 사람이 이중섭에게 전해줄 돈을 전해주지 않고 27만엔이나 되는 돈을 횡령하고 결국 부도를 냅니다. 이 때 27만엔이면 2,3인 가족의 일년 생활비에 해당하는 액수였다고 해요. 그 빚을 전부 마사코가 떠안게 되었고 이걸 해결하려다가 마사코가 무리하여 건강도 나빠지게 됩니다. 이 무역 때문에 두 부부가 아주 많이 괴로웠는데요, 편지에도 이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그런 와중에도 편지를 읽어보면 이중섭의 아내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느낄 수 있습니다. 편지 하나의 일부를 읽어보겠습니다. 


 아고리는 마음으로부터 만족하고 있소. 제발 돈에 대해서나 다른 일체의 일에 대해서 그다지 신경을 쓰지 말고 하루빨리 건강해주기만 바라오. (중략) 부산에 가서 광석형을 만나지 못하면 서울까지 가서라도 마씨의 건, 확실히 받을 수 있도록 법적 수속을 하고 돌아올 것이니 오직 건강회복에만 정성을 다해주시오. 요즘 매일 야외로 나가 봄 경치를 그리고 있소. 그저 그대들을 만나는 희망 하나로 안간 힘으로 팽팽히 버티고 있소. 발가락 군의 일은 어째서 써 보내지 않는 거요. 태현, 태성에게 뽀뽀를 하나씩 나누어주구려. 


7. 아, 따뜻한 편지네요. 뽀뽀를 나눠준다는 말도 재밌습니다. 그런데, 편지 중에 나오는 아고리, 발가락 군은 누구인가요?


 아고리는 턱이 길다고 해서 붙인 이중섭의 애칭이고, 발가락 군은 발가락이 예쁘다고 하여 붙인 마사코의 애칭이었다고 해요. 두 사람의 사랑이 묻어 나는 애칭이죠. 이 책에 실린 이중섭의 편지의 주제는 어쩌면 아주 단순합니다. 가족을 만나러 가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고자 했던 이중섭과 마사코의 끊임 없는 노력, 그리고 서로를 향한 애타는 그리움이 편지 전체에서 흐르고 있어요. 이런 글도 있습니다.

 

  11월 8일에 부친 편지 이후, 통 소식이 없어 몹시 궁금하오. 이렇게 소식이 뜸해지면 맥이 풀리오. 아고리 군은 그저 편하게 지내면서 제작을 하는 것 아니오. 오직 하나의 즐거움, 매일 기다리는 즐거움은 당신에게서 오는 살뜰한 편지 뿐이오. 당신의 편지를 받은 날은 그림이 한결 더 잘 그려지오. 정말 외롭구려. SOS, SOS, SOS, 하루 빨리 건강하고 다사로운 기쁨의 편지 보내주기 바라오. 내일은 태현 태성에게 재미있는 그림을 그려 이 편지와 함께 보내겠소. 나만의 사람, 나의 보배, 남덕 군, 자 살뜰하고 긴 뽀뽀를, 당신과 함께 잇는 꿈을 꾸면서 잠자리에 들려 하오. 푹 자고 내일은 걸작을 그릴 예정이오. 자나 깨나 소중한 당신만을 사랑하고, 열렬히 사랑하고, 무한히 사랑하고...




8. 아마 그 때는 전화도 자유롭지 않았을 것이고, 편지 뿐이었으니 기다림이 얼마나 컸을까요? 함께 있을 때는 너무 가난하고, 떨어져 있을 때는 이토록 그립고.. 이중섭은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큰 아들인 태성의 안부를 물으며 도쿄 가서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몇 번의 약속을 반복해서 쓰는데 태성이는 그 편지에 얼마나 설레였고,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이 당시에 편지를 쓰면서 이중섭은 아들 태현, 태성이 물고기와 게하고 놀고 있는 그림을 자주 그리고, 또 어떤 그림은 보내기도 하는데요, 시간이 3~4년이 흘러 가는데도 여전히 서귀포 시절을 잊지 못합니다. 

 이 당시 그림을 보면요, 재밌는 점이 발견되는데 화면 속에 긴 줄을 아이들이 가지고 놀고 있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아마 이 긴 줄은 이중섭이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이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 줄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사용했던 것 같아요. 또 한가지, 게의 집게발이 아이들의 고추를 집으려는 장면도 자주 나오는데요, 아마 이중섭 스스로가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어 생겨나는 일종의 거세불안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약속하면서도 사주지 못하고, 곧 가겠다고 하면서 몇 년을 가지 못하고, 기다리라고 하면서도 만날 수 없는 아버지로서의 무력한 자기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표현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9. 결국은 가족이 다시 재회하지는 못했지요?


 네, 이중섭은 1955년에 서울에서 전시를 성공하면 드디어 가족을 만나러 갈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도 그림을 사갈 정도로 실제로 많은 인정도 받았고, 자신이 대작을 그릴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전시는 호평을 받았지만 그림값을 상당히 많이 떼였다고 합니다. 서울에서의 아쉬움을 만회하기 위해 시인 구상의 소개로 대구 미국문화원에서 다시 전시를 하게 되는데요, 작품이 거의 팔리지 않으면서 실망과 분노에 영양실조까지 겹쳐 정신분열증세를 이 시기부터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편지도 더 이상 쓰지 않았다고 해요. 결국 그 다음해인 1956년 9월에 간염과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가족을 다시 보지 못하고 말이죠. 




10. 네, 이제 정리해주시지요.


 사실 오늘 제가 소개해 드리는 이 책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은 이중섭 예술 세계의 전반에 대한 이해를 얻기에는 역부족입니다. 하지만 이중섭의 편지와 작품을 나란히 두고 읽다보면 한 인간의 고뇌와 역사가 만들어내는 비극이 보여 이중섭의 작품을 그의 시선으로 보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중섭 개인의 삶으로서는 고통이었지만 어쩌면 이중섭 작품이 지금의 수만큼이라도 남아 있는 이유는 가족을 만나겠다는 일념 하나가 그를 끝없이 작품을 생산하도록 자극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 책을 보시면 우리가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는 이중섭에 대해서도 새로이 알게 되지만, 무엇보다 우리 가족, 내 남편, 내 아내가 다르게 보입니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이중섭, 백년의 신화라는 제목으로 전시가 열리고 있는데요, 꼭 한번 가보시길 권해드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고흐의 경우도 그렇지만 이중섭의 경우도 결국 가난 때문에 죽었습니다. 대구에서 전시가 실패하면서 이중섭은 미친거지요. 온 정성을 다해 작품을 만들었니까요. 그런데 이중섭은 대구 전시를 실패하고 나서 “예술을 한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무슨 대단한 예술가가 될 것처럼 세상을 속였다”고 자책하는 말을 남깁니다. 이중섭의 말은 사실일까요? 수준 있는 우리 청취자분들, 행여나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시고 마음에 드신다면 꼭 한 점 정도 사주셔요.  많은 청춘들이 이중섭처럼 목숨을 걸고 붓을 들고 있으니까요.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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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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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에서 한 주에 한 권 책을 소개해드리고 있지만 항상 책 소개가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책을 소개한다는 것이 뭘까, 책을 제대로 소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 좋을까,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까..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어쩌면 제가 그동안 소개했던 책 중에 가장 소개하기 힘든 책 중에 하나였어요. 너무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책인데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깊이를 가진 책이라 짧은 소개가 오히려 책의 가치를 훼손시킨다는 느낌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어떻게 소개해도 소개를 잘할 수가 없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애청자분들에게 꼭 추천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읽어봐야지만 그 가치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책이니까요." - 대본 중 일부

 

멀고도 가까운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1.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책을 가지고 오셨나요?

 

네, 오늘 제가 가져온 책은 출판사 반비에서 만들고, 리베카 솔닛이 쓴 <멀고도 가까운>이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혹시 ‘멘스플레인’이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대답) 멘스플레인이란 말을 뉴스에서 들어보신 분들이 계실 텐데요, 이 말은 남자(man)와 설명하다라는 뜻의 영어표현인 explain을 결합한 단어인데요, 흔히 남자가 여자를 가르치려 드는 경우를 의미할 때 쓰는 말입니다. 일부 남성들이 여성들이 자신들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가르치려 하는 것을 꼬집는 신조어에요. 오늘 제가 소개해드리는 <멀고도 가까운>이라는 책을 쓴 리베카 솔닛이 이 단어를 만든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2. ‘멘스플레인’이라는 말을 이 책의 저자가 만들었다고요?

 

사실 멘스플레인은 여러 곳에서 동시에 사용된 말이라 리베카 솔닛이 만든 말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좀 있습니다. 그런데 리베카 솔닛이 쓴 책 중에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라는 책이 있는데요, 이 말이 힘을 얻게 된 발단이 이 책이 된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이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솔닛이 어느 파티에서 한 남성을 만나게 되었다고 해요. 이 남자가 리베카 솔닛이 책을 썼다는 것을 들었다고 하면서 말을 걸어오자, 그녀는 자신이 최근에 에드워드 머이브리지에 관한 책을 썼다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솔닛의 말을 뚝 끊어 버리고 “머이브리지에 대한 중요한 책이 올해 출간된 걸 아느냐”고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사실 그 중요한 책을 쓴 사람이 바로 리베카 솔닛이었던 거죠.

 

3. 남자가 가르치려 했던 여자가 정작 그 책의 저자였던 거네요.

 

멘스플레인이라는 말을 듣고 솔직히 말해서 저는 크게 공감을 하지는 못했었습니다. 제가 정말, 특별히 여성들에게만 가르치고 더 아는 척을 했던가, 생각을 해 본적이 있는데 농담입니다만 저는 사실 직업탓에 모든 사람을 가르치려는 듯한 태도가 있어서 남성, 여성 모두에게 그런 태도가 있는 것 같더라구요.(웃음) 그런데 수많은 여성분들이 이 말을 공감해서 뉴욕타임즈에서는 2010년 올해의 단어 중 하나로 선정되었고, 미국언어연구회의 2012년 가장 창조적인 단어 후보에도 올랐고요, 심지어 옥스퍼드 사전에도 등재된 말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많은 분들이 공감했다는 뜻이겠죠.

그래도 이 말에 공감이 안되는 분들이 있다면 아마 주로 남성 청취자분들이실 것 같은데요, 인터넷에서 운전을 정말 이상하게 하는 사람들을 보고 ‘김여사’라고 하죠? 사실 그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고, 또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성이 김씨인지 이씨인지 모르는데요, 아무렇지 않게 우스개 소리랍시고 이상하게 운전하는 사람을 보고 ‘김여사’라고 부릅니다. ‘김여사’라는 말 속에는 이미 여자는 남자보다 운전이 미숙하고, 여자들은 운전을 더 배워야 한다는 ‘멘스플레인’적인 태도가 담겨 있는거죠.

 

4.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김여사’라는 농담에 그런 비하의 의미가 있을 수 있네요. 그 외에도 여성을 비하하는 말이 유독 많기는 한 것 같아요. 된장녀, 김치녀라는 말도 그런 것 중 하나죠.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요즘 커피전문점에서 커피 한잔 5000원 하는데 그걸 여성분들만 특별히 더 마시는게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그런 구매 행위는 생각이 없다고 남성들이 여성들을 비판하면서 ‘된장녀’라고 부르는데 사실 굉장히 모욕적인 말이지요. 그러니까 멘스플레인은 생각보다 대단히 광범위하게, 남성들도 별로 의식하지 않지만 어디서나 일어나고 있는 현상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리는 책의 저자 리베카 솔닛이 이 말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리베카 솔닛이 얼마나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저자인지, 또 뛰어난 언어 감각의 소유자인지를 짐작하게금 합니다. 오늘 소개해드리는 <멀고도 가까운>이란 책 역시 리베카 솔닛의 정말 놀라울 정도의 감수성과 아름다운 언어가 직조된 책인데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래 묵은 저의 상처를 용기를 내어 다시 끄집어 내어 바라보고, 어루만지고, 치유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멀고도 가까운>, 이 책은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책입니다만, 굳이 정리하자면 ‘치유의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5. 상처를 치유하는 이야기라, 어떤 이야기일일까요?

 

제목부터 말씀을 드려보고 싶은데요, 이 책 제목이 <멀고도 가까운>이잖아요? 혹시 진행자님께서는 멀고도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분이 계신가요? (대답)

네, 다들 그런 관계들이 조금씩은 있으실텐데, 레베카 솔닛에게는 바로 그녀의 어머니가 그런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작가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모든 것을 질투했다고 해요. 딸의 눈부신 금발도, 글쓰기 재능까지도 질투했지만 정작 나이가 들어서는 다른 자녀들을 다 제쳐두고 오직 리베카 솔닛에게 의지하고, 부르고, 청을 했다고 합니다. 이 책의 작가 역시 어머니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책에서 솔닛은 자신이 어머니의 도움 없이는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쓰기도 하니까요. 이 책에서 작가인 리베카 솔닛과 어머니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을 이루는 중심 이야기 중 하나에 해당됩니다.

이 책은 어머니와 작가 사이의 멀고도 가까운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점점 더 멀어져 가는 의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리베카 솔닛의 어머니는 알츠하이머병, 그러니까 치매를 앓고 있습니다. 알츠하이머병이 생기면 어린 아이와 비슷해진다고 하지만 사실 기억은 어린 아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점점 더 기억을 쌓아가고 점점 더 멀리가지만, 알츠하이머를 앓는 이들은 그동안 쌓아뒀던 기억을 하나씩 허물어가고 점점 더 자기 안으로만 들어가게 되죠. <멀고도 가까운> 이라는 제목은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하나의 은유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6.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어머니와 그녀의 딸인 작가의 이야기라 할 수 있겠네요. <멀고도 가까운>이라는 제목이 이해가 됩니다. 치매를 앓고 있는 내 어머니는 자신의 딸도 알아볼 수 없을만큼 기억이 손상되어버리면 자녀 입장에서는 ‘멀고도 가까운’ 존재로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네, 그렇지요. 그런 이야기도 이 책에 나오는데요, 리베카 솔닛이 말하는 알츠하이머병 환자 가족에게 가장 짜증나는 질문은 “어머니가 당신을 알아보나요?”라고 해요. 그런데, 여기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알아본다는 말에는 다양한 뜻이 있고, 어떤 의미에서 어머니는 나를 단 한번도 알아보지 못했다. 나중에는 어머니가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우리 관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고 해요.

 

7. 아, 왜요? 너무 슬픈 일일 것만 같은데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가 나를 알아본다는 게 그렇게 중요하고 대단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 무렵에, 내 목소리나 다른 특징이 어머니에게 익숙한 무엇이 되어서 당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어쩌면 어머니를 나를 더 진실하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나 역시 어머니를 더 진실하게 알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피상적인 것이 벗겨져 나가자, 어머니라는 인간성의 핵심, 그리고 그 연약함이 날것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8. 그러니까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병을 앓게 되면서 오히려 어머니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거군요.

 

그런 것 같아요. 어머니 역시 자신의 딸을 알아볼 수 없게 되자, 딸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자신에게 익숙한 대상으로 여기게 된 것 같아요. 딸에 대한 기대, 자신의 거울로 살아줬으면 하는 욕심,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딸이 가졌다는 것에 대한 분노를 모두 내려 놓자, 비록 자신의 딸이라는 것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리베카 솔닛이라는 한 인간을 그대로 바라보게 되는 거죠. 리베카 솔닛 역시 자신이 가진 어머니에 대한 기대, 분노를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겁니다. 알츠하이머병이 두 사람의 관계를 ‘멀지만’, 그러면서도 ‘가까운’ 관계로 만들어준거지요.

 

이 책의 제목은 지금 말씀 드린 이야기 외에도 정말 다양하고도 많은 은유를 담고 있습니다. 금방 말씀 드린 것처럼 이 책은 어머니와 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리베카 솔닛 본인의 아이슬란드 여행기이기도 하구요, 또 작가가 힘든 병을 얻고 치유하는 과정을 쓴 책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은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이야기가 중첩적으로, 몇 겹으로 짜여져 진행이 됩니다. 보통의 책들처럼 하나의 이야기에 하나의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와 겹쳐지고, 처음 나온 이야기가 가장 마지막에 나오기도 합니다.

 

이 책의 목차가 재밌는데요, 이 책은 1장부터 13장까지 모두 13개의 이야기가 있는데요, 1장과 13장, 2장과 12장, 3장과 11장, 이런 식으로 5장과 9장이 제목이 같습니다. 1장 제목이 살구인데 13장도 살구에요. 마치 책 전체가 실을 감았다가 중간부터는 다시 감은 실을 푸는 것 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9. 정말 특이한 구조네요. 책의 목차를 보니까 6장은 감다, 7장은 매듭, 8장은 풀다네요.

 

네, 그리고 다시 9장에는 5장과 같은 제목이 붙습니다. 두 이야기가 하나의 쌍을 이루는 건데요, 작가는 6장까지는 이야기로 기억을 감아올리고, 9장부터는 이야기를 기억을 자신에게서 떠나 보내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책의 구조 역시 <멀고도 가까운>이라는 제목처럼 이뤄져 있는거죠. 이 책은 작가가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면서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을 이야기하고, 체게바라의 혁명을 이야기하고, 아이슬란드의 늑대를 이야기하고, 프랑켄슈타인, 어릴적 읽었던 나니아 연대기를 끄집어 내어 다시 읽고 풀어내며 작가가 어머니와 화해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작가는 이제 자신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와 어떻게 대화할 수 있었을까요? 작가가 여러 ‘이야기’를 가져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프랑켄슈타인, 체게바라, 안데르센 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타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말이 가진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에게 공감할 수 있게 된다는 거지요. 작가는 여러 이야기를 통해 이제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10.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것을 통해 세상을 다른 관점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임을 이 책이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정리해주시지요.

 

제가 늘 이 방송에서 한 주에 한권 책을 소개해드리고 있지만 항상 책 소개가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책을 소개한다는 것이 뭘까, 책을 제대로 소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 좋을까,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까..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어쩌면 제가 그동안 소개했던 책 중에 가장 소개하기 힘든 책 중에 하나였어요. 너무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책인데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깊이를 가진 책이라 짧은 소개가 오히려 책의 가치를 훼손시킨다는 느낌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어떻게 소개해도 소개를 잘할 수가 없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애청자분들에게 꼭 추천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읽어봐야지만 그 가치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책이니까요.

 

한가지 더. 최근에 있었던 강남역 살인사건이라는 초유의 여성혐오 범죄가 있었죠? 이 책을 읽으면 여성의 삶에 대해, 고통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인간에 대한 성찰이 있는 문학이자, 철학적이며 치유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책을 통해 한 여성의 삶을, 이야기를 듣고, 여러분의 삶의 이야기도 감아 올리게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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