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 - 개정판 다빈치 art 12
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 다빈치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덧붙임.

오늘 교통방송에서 오늘은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이라는 책을 소개했다. 사실 이 책은 이중섭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내용만을 담고 있다. 만약 이중섭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최열 선생님의 <이중섭 평전>(돌베개)를 추천한다. 최열 선생께서는 죽기 전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이 책을 쓰셨다고 하는데,  만약 이 책이 너무 두껍고 힘겹다면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하는 <이중섭 백년의 신화> 전시도록도 참고할 만하다. 이 책에는 최열 선생이 정리한 이중섭 연보가 소상히 적혀 있고, 서울대 권영민 교수가 이중섭의 절우였던 구상의 시를 비평해두신 글도 실려 있고, 이중섭과 마사코가 주고 받은 편지화도 많이 실려 있다. 편지화 자체도 하나의 작품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는데, 오늘 소개한 책에는 편지 내용만 번역하여 실려 있어 아쉬움이 크다. 또 마사코와 이중섭의 대화를 주고 받는 형식으로 묶은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편지를 다른 장으로 묶어 대화의 맥락을 따라가기 어려운 것도 아쉬운 점이다. 하지만 이 책에 미덕이 있다. 일단은 앞의 두 책보다 가볍고 가격도 훨씬 싼데다 이중섭의 주요한 작품이 모두 컬러로 실려 있어 '가족'이라는 관점으로 이중섭의 작품을 온전히 바라보는 경험을 갖도록 도와준다. 나는 특히 이중섭이 장남 태성에게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몇 번을 약속하는 장면에서 몇 번이나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가볍게 읽기 시작해도, 책을 내려 놓을 때는 여운이 오래 남는다.

아래 은지화는 방송할 때는 마치 제주에서 그린 것처럼 이야기하긴 했지만, 은지화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고, 최열 선생에 따르면 가장 유력한 것은 서귀포 생활을 마친 직후 정착한 부산일 것이라고 한다. 마사코의 증언이 있고, 양담배 종이를 구하기도 아마 부산이 더 쉬웠을 것이다. 대구 전시를 실패하고 정신분열증이 발병한 이중섭이 한 말이 귀에 맴돈다.

“예술을 한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무슨 대단한 예술가가 될 것처럼 세상을 속였다”. 이 말은 진실일까? 이중섭은 세상을 속였는가? 조선의 정직한 화공이라 스스로를 불렀던 그는 전시 실패 후 자신이 세상을 속였다고 생각하자 스스로 곡기를 끊었다. 누가 누구를 속이고 있는 것일까. 나는 또 누구를 속이고 오늘도 공밥을 먹고 있는 것일까.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1.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책을 가져오셨나요?


네, 이번 주에 제가 가져온 책은 출판사 다빈치에서 만들고, 이중섭이 쓴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이라는 책입니다. 


2. 이중섭이라면 우리가 아는 그 화가 이중섭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오늘 제가 소개해드리는 책은 화가 이중섭이 자신의 아내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와 또 그의 그림을 엮은 책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이중섭은 일본인인  야마모토 마사코와 1945년에 결혼해서 1946년에 첫 아들 태성을, 1948년 태현을 얻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터지고 1951년에 제주도는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판단해 서귀포로 가게 되는데요, 그 때 아이들이 여섯 살, 네 살 때였으니까 한참 귀였을 때지요. 그런데 가족이 함께 오래 살지 못합니다. 가족들이 떨어져 지내게 되면서 이중섭은 아내 마사코와 편지를 주고 받게 되는데요, 그 때 쓴 편지들을 엮은 것이 바로 오늘 소개해드리는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이라는 책입니다. 저도 이제 일곱 살 짜리 아들의 아빠이고, 또 얼마 있지 않으면 둘째도 태어나게 되는데요, 이중섭의 편지를 읽으며 여러 번 감정이 올라와 힘들었습니다. 


3. 이중섭이 가족들과 떨어져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어요. 왜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을까요?


 일단은 가난이 가장 컸습니다. 이중섭이 1916년 생인데요, 사실 1951년은 전쟁시기로 주변은 아주 어려웠던 때이지만 이중섭의 일생으로 봤을 때는 가장 행복했던 일 년이 바로 이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도쿄에서 유학하던 시절인 1941년 역시 문화학원이라는 자유로운 학교에서 인정도 받았고, 일본에서도 미술창작가협회의 회원 자격을 받는 등 좋은 시기가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중섭이 식민지 현실이라는 상황을 아주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냥 행복했다고는 할 수 없는 청년기를 보냈어요. 그렇지만 1951년 1월부터 12월까지 정확히 일 년을 제주 서귀포에서 머무는데, 이중섭이 이 시기에 아이들이 해변가에서 자유롭게 노는 모습을 주제로 한 작품을 무수히 그리고, 작품들 속에서 어두운 기색도 찾아 보기 힘듭니다. 엉덩이를 쳐들어올린 까까머리 아이들이 물고기를 잡고, 게를 잡으며 노는 작품들이 많이 있는데 모두 이 시기동안 그려진 작품입니다. 

 그런데요, 이런 재밌는 작품들 대부분은 은지화 위에 그려집니다. 은지화라는게요, 이중섭의 독창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피난 시절에 재료가 부족해서 하는 수 없이 사용하게 된 게 은지화에요. 은지화는 양담뱃갑 속에 있는 은박지 종이를 반듯하게 편 다음에 날카로운 철촉으로 된 펜으로 종이가 뚤어지지 않을만큼 눌러서 윤곽선을 그리고 색칠을 해서 효과를 내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는데요, 그래서인지 작품의 크기가 대부분 작고 질감이 독특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보관상태가 좋지는 않아요. 양담배 속 은박지 종이라 보니까 작품을 유지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거죠.




4. 그만큼 가난했던 거군요. 종이를 구하기 힘들었을만큼..


 혹시 잭슨 폴록이라는 미국 화가 아시나요? 많은 분들이 들어 보셨을 수 있는데, 잭슨 폴록은 커다란 캔버스 위에 유화 물감을 떨어뜨리는 방식의 액션 패인팅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어요. 사실 이런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물감도, 캔버스도, 그 뿐 아니라 작품을 만들기 위한 재료가 풍부했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이중섭의 은지화는 그에 비하면 정말 열악한 환경 속에서 나온 거지요. 이중섭은 본래 아주 부잣집 자제였는데요, 이런 가정은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만 시대를 잘 만났다면 아마 더 좋은 여건에서 더 재밌는 작품도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겁니다. 사실 은지화는 가난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그 표현 방식 자체는 그럼에도 정말 독창적이니까요. 

 이중섭의 아내인 마사코씨는 서귀포 시절을 추억하면서 정말 그 때는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정말 반찬은 구경도 못했고, 겨우 밥만 먹는 것도 다행이었다고 해요. 이중섭이 이 시기 그린 작품에 ‘게’가 많이 등장하는데요, 게를 잡아서 반찬으로 쓰고는 했다고 합니다. 지금 서귀포에 가면 이중섭 미술관 아래 이중섭 가족이 살았던 생가가 있는데, 가보면 집이 꽤나 커 보이지만 그 집 전체가 이중섭 가족의 집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초가의 아궁이 뒤편으로 있는 사람 두 명이 겨우 몸을 누일 공간이 있는 방 한칸에서 네 가족이 함께 지냈던 거지요. 




5. 이중섭에게 가장 행복했던 때가 서귀포 시절이라고 하셨는데, 지금 말씀을 들어보면 전혀 행복했을 것 같지 않아요. 밥도 못 먹을 정도로, 아이도 밥도 못 먹일 정도로 가난했잖아요.


 네, 맞습니다. 그래도 이중섭이 가족과 온전히 함께 지냈던 시기는 오직 서귀포 시절 뿐이었어요. 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중섭의 권유에 따라 마사코가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나게 됩니다. 마사코가 한국에 온지 7년만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는데요, 처음에는 마사코는 가지 않으려 했다고 해요. 가난을 이기지 못한 것이지요. 마사코가 일본으로 떠난 후부터 이중섭과 마사코, 이중섭과 두 아들 사이의 편지가 오고 가게 됩니다. 오늘 소개해 드리는 책도 이 시기에 이중섭이 가족에게 쓴 편지를 담은 책입니다.

 

6. 이중섭은 어째서 가족들을 일본으로 보낼 생각을 한 것일까요? 전쟁 중이라 위험해서였을까요?


 아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자신도 곧 일본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컸던 것 같습니다. 작업에 집중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금방 가족들을 다시 부르거나 자신이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일단 사기를 당했습니다. 마사코가 조금이라도 가계에 보탬이 되려고 일본 서적을 한국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시작했는데요, 그 일을 대행해 준 사람이 이중섭의 오산학교 후배인 마영일이었는데, 이 사람이 이중섭에게 전해줄 돈을 전해주지 않고 27만엔이나 되는 돈을 횡령하고 결국 부도를 냅니다. 이 때 27만엔이면 2,3인 가족의 일년 생활비에 해당하는 액수였다고 해요. 그 빚을 전부 마사코가 떠안게 되었고 이걸 해결하려다가 마사코가 무리하여 건강도 나빠지게 됩니다. 이 무역 때문에 두 부부가 아주 많이 괴로웠는데요, 편지에도 이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그런 와중에도 편지를 읽어보면 이중섭의 아내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느낄 수 있습니다. 편지 하나의 일부를 읽어보겠습니다. 


 아고리는 마음으로부터 만족하고 있소. 제발 돈에 대해서나 다른 일체의 일에 대해서 그다지 신경을 쓰지 말고 하루빨리 건강해주기만 바라오. (중략) 부산에 가서 광석형을 만나지 못하면 서울까지 가서라도 마씨의 건, 확실히 받을 수 있도록 법적 수속을 하고 돌아올 것이니 오직 건강회복에만 정성을 다해주시오. 요즘 매일 야외로 나가 봄 경치를 그리고 있소. 그저 그대들을 만나는 희망 하나로 안간 힘으로 팽팽히 버티고 있소. 발가락 군의 일은 어째서 써 보내지 않는 거요. 태현, 태성에게 뽀뽀를 하나씩 나누어주구려. 


7. 아, 따뜻한 편지네요. 뽀뽀를 나눠준다는 말도 재밌습니다. 그런데, 편지 중에 나오는 아고리, 발가락 군은 누구인가요?


 아고리는 턱이 길다고 해서 붙인 이중섭의 애칭이고, 발가락 군은 발가락이 예쁘다고 하여 붙인 마사코의 애칭이었다고 해요. 두 사람의 사랑이 묻어 나는 애칭이죠. 이 책에 실린 이중섭의 편지의 주제는 어쩌면 아주 단순합니다. 가족을 만나러 가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고자 했던 이중섭과 마사코의 끊임 없는 노력, 그리고 서로를 향한 애타는 그리움이 편지 전체에서 흐르고 있어요. 이런 글도 있습니다.

 

  11월 8일에 부친 편지 이후, 통 소식이 없어 몹시 궁금하오. 이렇게 소식이 뜸해지면 맥이 풀리오. 아고리 군은 그저 편하게 지내면서 제작을 하는 것 아니오. 오직 하나의 즐거움, 매일 기다리는 즐거움은 당신에게서 오는 살뜰한 편지 뿐이오. 당신의 편지를 받은 날은 그림이 한결 더 잘 그려지오. 정말 외롭구려. SOS, SOS, SOS, 하루 빨리 건강하고 다사로운 기쁨의 편지 보내주기 바라오. 내일은 태현 태성에게 재미있는 그림을 그려 이 편지와 함께 보내겠소. 나만의 사람, 나의 보배, 남덕 군, 자 살뜰하고 긴 뽀뽀를, 당신과 함께 잇는 꿈을 꾸면서 잠자리에 들려 하오. 푹 자고 내일은 걸작을 그릴 예정이오. 자나 깨나 소중한 당신만을 사랑하고, 열렬히 사랑하고, 무한히 사랑하고...




8. 아마 그 때는 전화도 자유롭지 않았을 것이고, 편지 뿐이었으니 기다림이 얼마나 컸을까요? 함께 있을 때는 너무 가난하고, 떨어져 있을 때는 이토록 그립고.. 이중섭은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큰 아들인 태성의 안부를 물으며 도쿄 가서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몇 번의 약속을 반복해서 쓰는데 태성이는 그 편지에 얼마나 설레였고,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이 당시에 편지를 쓰면서 이중섭은 아들 태현, 태성이 물고기와 게하고 놀고 있는 그림을 자주 그리고, 또 어떤 그림은 보내기도 하는데요, 시간이 3~4년이 흘러 가는데도 여전히 서귀포 시절을 잊지 못합니다. 

 이 당시 그림을 보면요, 재밌는 점이 발견되는데 화면 속에 긴 줄을 아이들이 가지고 놀고 있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아마 이 긴 줄은 이중섭이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이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 줄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사용했던 것 같아요. 또 한가지, 게의 집게발이 아이들의 고추를 집으려는 장면도 자주 나오는데요, 아마 이중섭 스스로가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어 생겨나는 일종의 거세불안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약속하면서도 사주지 못하고, 곧 가겠다고 하면서 몇 년을 가지 못하고, 기다리라고 하면서도 만날 수 없는 아버지로서의 무력한 자기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표현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9. 결국은 가족이 다시 재회하지는 못했지요?


 네, 이중섭은 1955년에 서울에서 전시를 성공하면 드디어 가족을 만나러 갈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도 그림을 사갈 정도로 실제로 많은 인정도 받았고, 자신이 대작을 그릴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전시는 호평을 받았지만 그림값을 상당히 많이 떼였다고 합니다. 서울에서의 아쉬움을 만회하기 위해 시인 구상의 소개로 대구 미국문화원에서 다시 전시를 하게 되는데요, 작품이 거의 팔리지 않으면서 실망과 분노에 영양실조까지 겹쳐 정신분열증세를 이 시기부터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편지도 더 이상 쓰지 않았다고 해요. 결국 그 다음해인 1956년 9월에 간염과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가족을 다시 보지 못하고 말이죠. 




10. 네, 이제 정리해주시지요.


 사실 오늘 제가 소개해 드리는 이 책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은 이중섭 예술 세계의 전반에 대한 이해를 얻기에는 역부족입니다. 하지만 이중섭의 편지와 작품을 나란히 두고 읽다보면 한 인간의 고뇌와 역사가 만들어내는 비극이 보여 이중섭의 작품을 그의 시선으로 보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중섭 개인의 삶으로서는 고통이었지만 어쩌면 이중섭 작품이 지금의 수만큼이라도 남아 있는 이유는 가족을 만나겠다는 일념 하나가 그를 끝없이 작품을 생산하도록 자극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 책을 보시면 우리가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는 이중섭에 대해서도 새로이 알게 되지만, 무엇보다 우리 가족, 내 남편, 내 아내가 다르게 보입니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이중섭, 백년의 신화라는 제목으로 전시가 열리고 있는데요, 꼭 한번 가보시길 권해드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고흐의 경우도 그렇지만 이중섭의 경우도 결국 가난 때문에 죽었습니다. 대구에서 전시가 실패하면서 이중섭은 미친거지요. 온 정성을 다해 작품을 만들었니까요. 그런데 이중섭은 대구 전시를 실패하고 나서 “예술을 한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무슨 대단한 예술가가 될 것처럼 세상을 속였다”고 자책하는 말을 남깁니다. 이중섭의 말은 사실일까요? 수준 있는 우리 청취자분들, 행여나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시고 마음에 드신다면 꼭 한 점 정도 사주셔요.  많은 청춘들이 이중섭처럼 목숨을 걸고 붓을 들고 있으니까요.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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