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니까 청춘이다 - 인생 앞에 홀로 선 젊은 그대에게
김난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알맹이와 그 뜻은 사뭇 괜찮지만 읽다보면 아쉬운 책들이 꽤 많습니다. 그 까닭은 그 괜찮음이 오로지 낱낱사람들의 마음맺음만을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저마다의 재주와 깜냥을 헤아리면서 자신의 삶을 추스르고 가다듬는 일은 중요하고 중요하지요. 미처 몰랐던 생각들을 배우며 자기 삶을 키워가는 건 누구나 평생 해나가야 하는 운동이니까요. 이때 곰살궂은 북돋음이 곁들여지면 매우 고맙죠.

 

허나, 거기에만 그친다면 그 사람은 결코 자기 삶을 바꿀 수 없습니다. 사람은 사회와 떼려야 뗄 수 없으니까요. 사회를 바꾸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기 일쑤입니다. 따라서 사회성과 정치의식을 얘기하지 않는 ‘괜찮은 책’은 도리어 해로울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좋은 생각거리들’을 던져주고 그 바깥을 상상치 못하게 빗금 긋는 노릇을 하면서, 진짜 깊이 있게 생각해야 하는 이야기들을 덮으니까요. 불티나게 팔리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도마 위에 올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현실여건에 대한 꼬집음이나 돌아봄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 책은 자기 경험과 기억들을 어쭙잖게 늘어놓는 뻔한 책들보다는 조금 낫습니다. 지은이가 대학교수다보니 대학생들과 어울리면서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여러 고민을 나름 잘 알고 있고 그에 따라 젊은이들의 형편을 헤아리려는 몸가짐이 있으니까요. 이런 점들이 글에 잘 우러나와 적잖은 이들에게 따뜻한 울림과 따끔한 울음을 느끼게 하지요.

 

하지만 거북하게도 그는 젊은이들의 어깨를 어루만져주고 이겨내라고 쓴 소리도 날리지만, 그 어려움이 왜 생겨났고 이렇게 옴팡진지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끝 모르고 치솟는 대학등록금에 버거워하는 대학생들, 비명문대생들의 열등감, 연애가 거래가 되어버린 것에 찝찝해하면서 그렇게 만들어진 ‘이유’엔 모르쇠입니다. 힘들어하는 젊은이들에게 지은이는 엉뚱하게도 자신보다 힘겨운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 다스리기를 권합니다.

 

실제로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보라.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그대의 좌절조차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연로하신 어르신들이 검정고시를 치르고 수능을 준비하며 만학(晩學)의 꿈을 불태운다. (…) 생활고에 쫓겨 스펙은커녕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너무도 많다. 우리 주위에는 언론의 주목조차 받지 못하는 수많은 어둠의 공간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그대의 힘겨운 오늘이, 자신은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호사일 수도 있다. 136쪽

 

스펙을 쌓느라 애면글면해야 하고 그렇게 안달복달해도 취업이 안 되는 현실여건에 대한 ‘꼬집음’이나 ‘돌아봄’은 전혀 없고 스펙에 매달리지 말라는 얘기만 합니다. 젊은이들이 “학벌의 열등감을 전과를 통해 치유하겠다고 황금같은 시간을 허비”(193쪽)하는 걸 안타까워하면서 수능점수 더 높은 학과로 전과하는 걸 ‘학벌세탁’이자 ‘고3마인드’(191~192쪽)라 부르지만, 고3마인드와 학벌세탁을 할 수밖에 없는 사회조건에 대한 비판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겪은 세상이 좁고 몸소 움직여서 뭔가를 바꿔본 경험이 얕다보니, 그의 이야기들은 정겹고 포근하지만 하나같이 학생들이 알아서 자기 삶을 바꿔보라는 ‘뻔한 마무리’로 마감됩니다. 그렇기에 교수가 해야 할 몫을 학생에게 덤터기까지 씌웁니다. 교수들이 대학체제에 휩쓸려 학생들과 상담은커녕 수업도 엉망이 되었다고 푸념하면서 뜨악하게 이런 얘기를 꺼내죠.

 

미안한 말이지만, 학생들이 먼저 시작해주는 것이 좋을 거 같다. 먼저 할 일은 학교나 교육당국에 ‘선생님’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일이다. 교수나 연구나 봉사뿐 아니라, 강의와 상담을 통해 전인적 교육의 실질적 담당자가 되도록 해달라고 말이다. 강의와 상담을 잘해주고 동아리의 지도를 기꺼이 맡아주는 교수들이 어떤 형태로든 그 보상(꼭 금전적인 의미가 아니다)을 받도록 현실적인 제안을 해야 한다. 172쪽

 

요즘 교수들과 학생들 사이가 데면데면하고 강의도 변변찮고 학생들이 상담신청을 해도 퉁명스러운 건 교수들이 강의나 상담이나 지도에서 “어떤 형태로든 그 보상”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니 그걸 받을 수 있도록 학생들이 나서야 한다는 얘기에, 어이가 없어 웃음도 안 나오지요. 터무니없음을 느끼며 도로 그에게 물어야 하겠지요. 왜 교수인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려 하는가? 청춘은 불안한 게 ‘너무 자연스럽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은 왜 ‘너무 자연스럽게’ 철밥통을 끌어안고 있는가? 당신들은 왜 학교나 교육당국에 ‘학생들’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지 않는가?

 

이런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인지 생게망게하게도 알바로 큰돈을 벌지 말라고 딱 부러지게 얘기합니다. 뜯어 먹히는 대다수 젊은이들의 현실엔 눈 감으면서 젊은 나이에 알바로 삶이 기름기가 끼는 한줌도 안 되는 이들에게 호통을 칩니다. ‘자기경험’에 틀어박힌 지은이는 아무 고민도 없이 돈 많이 버는 데에 경계심을 나타내면서 ‘가혹한 저임금’이란 낱말만 한 번 꺼내놓고 입을 꾹 다뭅니다.

 

알바가 가혹하게 저임금이면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힘들고 허탈하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수입이 지나치게 좋은 경우다. 일부의 사례이지만, 그 알바의 수입이 꽤 좋은 경우에는 ‘굳이 졸업을 해야 하나?’ 혹은 ‘취업을 해도 초봉이 형편없다던데’하는 생각마저 든다고 하니 말이다. 279~280쪽

 

지은이는 왜 이렇게밖에 글을 쓰지 못 하나, 사람들은 왜 이런 책을 ‘자꾸’ 읽나

 

유명대학의 교수이자 글쓰기에 애를 쓴다고 얘기하는 지은이가 어쩜 이리도 생뚱맞은 이야기들을 마치 대단한 귀띔인 것처럼 털어놓는지 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미디어가 메시지라며 젊은이들이 신문을 읽어야 한다고 목소리 높이면서 덜렁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기사만 책에 따옵니다.

 

김수영의 시를 들먹이지만 조선일보에 2년째 칼럼을 쓴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정도로 ‘정치의식’이 거의 없다보니 그는“1980년대는 정부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우리나라 경제가 고도성장을 하던 시기였다”(245쪽)고 적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가혹한 저임금’으로 죽어나갈 때, '손무덤‘이 쌓여가던 시기에, 행정고시를 붙으려고 아득바득하던 그에게는 3저 호황에 따른 경제번영의 시기였나봅니다.

 

달랑 6개월 만에 ‘장교로 전역’시켜주는 석사장교제도가 있었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아들들이 딱 써먹고 없애버린 몹쓸 제도인데,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석사장교가 되었다며 자꾸 떠벌리는 대목들에선 안쓰러움을 넘어서 서글픔까지 자아내지요. 학생들에게 ‘좋은 선생’으로 자리매김하고 싶다는 교수인데, 어찌하여 이리도 ‘사회의식’이 떨어지는지 스산하고 씁쓸하기만 하네요.

 

지은이는 ‘청년실업을 완화를 위해 기성세대가 기득권을 많이 양보해야 한다’는 칼럼을 싣고 엄청난 ‘악플’을 받은 경험을 꺼내며, 젊은이들이 눈높이를 낮추면 얼마든지 취직할 수 있다는 댓글들이었다고 소개합니다.(291쪽) 이명박 대통령 수준에 머무르는 기성세대들의 댓글들에 지은이는 울컥하지만 정작 그 댓글들을 다는 기성세대들과 자신의 글이 큰 차이가 없다는 걸 느끼지 못 합니다.

 

꼰대들이 거칠고 서투르게 돌팔매질을 한다면, 그는 좀 더 살갑게 등 두드려주지만, 저들이나 지은이나 젊은이들의 삶에 별 도움이 안 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오히려 걸림돌이기 쉽지요. 왜냐하면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사람들은 지은이처럼 “스승으로서, 아버지로서, 그러면서도 기득권을 가져버린 기성세대로서, 미안하고 안쓰럽다”(292쪽)면서도 “기차에 올라타라”고 충고하는 기성세대가 아니라 기득권을 내려놓고 이 사회와 싸우는 ‘팔팔한 어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성세대에게 절절하게 있어야 하는 몸가짐은 젊은이들에게 어정쩡한 도움말을 던지는 게 아니라 지은이가 “나의 진정한 성장은 아직도 20여 년이 남아 있다”(312쪽)고 털어놓듯 반성을 통한 성장입니다. 그 자람은 자신이 갖고 있던 기득권을 놓으려는 몸부림과 남의 고통에 함께하려는 몸가짐에서만 얻어질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시간강사를 하면서 ‘죽고 싶었다’던 지은이가 정교수가 되었으니 시간강사들의 형편을 바꿔내고자 팔 걷어붙일 때!

 

차고 넘치는 볼품없는 교수들 틈바구니에서 그는 좋은 교수 쪽에 속할 테고, 어쩌면 그에게 날아간 화살들은 좀 지나치지 않았나 싶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책은 어려움에 빠진 젊은이들이 현실의 맨얼굴과 마주보고 견디게 하기보다는 야트막한 아늑함을 살짝 안겨주면서 오히려 정치성에 눈가리개를 합니다. 어줍게 겉으론 드러난 잎사귀들을 보듬으려 해봤자 썩어있는 뿌리를 고치지 않으면 별 쓸모가 없듯, 이 사회의 경제모순과 짓눌린 정치의식을 되짚지 않는다면, 알량한 토닥임일 따름이니까요.

 

조금만 뒤져보면, 몇 년 전에도, 더 몇 년 전에도, 십 년 전에도, 아니 어느샌가, 제목과 지은이만 슬쩍 바뀔 뿐, 거의 판박이 같은 책이 나옵니다. 차갑게 말하면, 허접한 빨간약 같은 글들이죠. 그런 글들은 자신의 아픔을 잠깐 가라앉히는 듯싶지만 치유에 이르진 못합니다. 금세 상처는 도지고 뭇사람들은 또 다른 빨간약을 찾게 만들지요. 그러므로 꼭 있어야 하는 책은,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라 아프니까 그 이유를 찾자, 너희들이 아픈 건 정치의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밝혀주는 책입니다.

 

경제사회정치를 젊은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지 않고선 어떠한 희망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들어야 할 말은 “이제 좀 위안이 돼? 하지만 위안 받기는 아직 일러. 이 글이 진정 위안이 되려면 네 ‘오늘’이 변화해야 하거든. 실천하지 못하는 결심이란, 한낱 자위일 뿐이거든.(230쪽)” 지청구가 아니라 이것입니다. “어설픈 위안을 받으려 하지 마, 진정 위안이 되려면 네가 속한 ‘사회의 오늘’이 변화해야 하거든. 사회를 바꾸려는 움직임이 없는 결심이란, 한낱 자위일 뿐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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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와로 2011-03-13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대 중반인 저도 이 책이 역겹더라고요. 서평 잘 읽었습니다.

좋은책 2011-03-23 08:31   좋아요 0 | URL
이 책이 '먹히는' 사회환경을 두루 짚어볼 필요가 있겠지요.

diline 2011-09-29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서평입니다.
이런 내용으로도 위로가 된다는 걸 보면 20대들이 많이 힘들긴 하나봅니다.

좋은책 2011-10-18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는 이들이 젊은이들만이 아닌 걸 보면
이 시대에 '아픈 이들'이 이렇게 많다고도 읽어낼 수 있겠죠.
 
오리엔탈리즘 - 개정증보판 현대사상신서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 교보문고(교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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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는 인도와 바꾸지 않겠다는 영국인들의 얘기가 매우 그럴 듯하게 한국에 퍼져있습니다. 그만치 ‘훌륭한 예술가’를 높이 여긴다는 말로 쓰이지만, 이 말을 살짝만 뒤집으면 어처구니없습니다. 거죽은 그럴싸하지만 이 말의 뼛속은 제국주의에 흠뻑 절어있습니다. 마치 인도를 자기들 마음대로 ‘바꾸거나 팔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지요. 인도에 사는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은 단박에 싸구려가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섬뜩한 사실은, 한국사회에선 아무렇지 않게 이런 말을 툭툭 내뱉고 걸핏하면 셰익스피어를 얘기하며 ‘외국나라 이야기들’을 떠받들고 추어올리는데, 정작 영국에선 셰익스피어를 ‘한국만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영국 사람들은 셰익스피어를 잘 알고 그가 쓴 이야기들을 즐길 거 같은데, 이것은 ‘환상’이지요.

 

그 영어선생은 영국인은 누구나 셰익스피어 전집을 가지고 있다고도 했다. 나의 중학시절에—1960년대초—두 가지 전집이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갖고 싶어 몇 달을 고민하다가 결국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여 그것을 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나는 영미의 많은 가정을 방문했으나 셰익스피어의 전집을 본 적이 없다. 내가 간 곳은 대부분 교수집이었으니—영문학교수도 있었다—반드시 잘못 본 것만도 아니었다. 일류대학 학생들에게 물어봐도 한 두 작품의 이름을 알까 대개는 잘 몰랐다. 일반시민들도 평생 그 공연을 한두번 볼까말까였지 책을 읽기는커녕 집에 두지도 않았다. 셰익스피어는 미국에서는 물론 영국에서도 전혀 일상이 아니었다. 오 나의 영어선생이여! 이제 더 이상 흰소리를 말아라! 셰익스피어의 4대비극을 외우는 학생은 이 세상에서 대한민국 수험생들뿐이다. 도대체, 그게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냐?『오리엔탈리즘』635쪽

 

위 글은『오리엔탈리즘』의 옮긴이 박홍규가 미국과 영국을 넘나들며 느낀 점을 쓴 글인데, 무척 솔깃하더군요. 서구에서 오랜 세월 아랍과 무슬림, 동양에 갖는 인상을 에드워드 사이드가 쑤시고 뒤집으며 거짓부렁이자 지배욕이었음을 밝히고 지식과 권력이 얼마나 쫀득쫀득 달라붙어있는지 까발리는 작업도 대단하지만, 한국에서 지식인으로서 호젓한 길을 걸어간 박홍규의 옮긴이 주 또한 볼만하더군요.

 

한국제도권에서 먹물을 먹은 대부분 사람은 샅샅이는 모르더라도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따위의 햄릿의 대사나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교양’으로 알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세계에 이름을 떨친 셰익스피어라고 조잘거리는 이들은 많지만, 왜 셰익스피어의 이름값이 ‘높아야’ 하는지에 물음을 던지는 이는 듬성하지요. 사실, 셰익스피어의 이야기들은 조금만 따져도 영국을 넘어 저 멀리 한국 학생들까지 꼭 알아야 하는 아주 대단한 알맹이들은 아니니까요.

 

한국에서 먹물들이 여전히 미국과 외국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고, 마치 미국에서 학위를 따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은 ‘식민화된 대학’에 대한 박홍규의 호통은 벌써 2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울립니다. 그 까닭은 한국인의 얼굴을 하였지만 속은 맥도날드의 캐릭터가 들어간 이들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겠지요. 일제에게 해방이 되었다지만, 진짜 해방이었을까요?

 

지구마을에서 남한처럼 미국화된 사회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저 겉모습뿐 아니라 어느덧 사람들의 몸속까지 미국화되었죠. 80년대 운동권에서 한국을 미국의 51번째 주라거나 사실상 식민지라면서 반미를 외쳤던 까닭은 야금야금 또는 매섭게 이곳에 사는 사람들 머릿속과 생활 속으로 미국이 스며들었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서구로 상징되는 마구 써버림과 현대문명을 욕망하지 않는 이가 드문 형편이지요.

 

진짜 ‘한국인’이라는 본때가 지켜야 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사이드가 걱정하듯 서구를 몰아내자며 정통만을 내세우는 ‘근본주의’ 또한 슬기로운 길이 아니니까요. 문화는 섞이고 자꾸만 바뀌면서 나아가는 짬뽕이라면, 상대를 지배하거나 짓누르지 않는 지식과 만남이 오늘날 인류가 해내야 할 몫이겠지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외우기보다 자신의 생각과 욕망, 살아가는 모습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자신에게 불어 닥치는 입김들은 무엇인지 헤아리는 깜냥이 절절하게 있어야 하는 시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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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 88만원세대 새판짜기
우석훈 지음 / 레디앙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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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할지 모르지만, 학생들 답변은 두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선생님, 저희는 외로워요.”와 “선생님, 저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였다. 이것을 하나로 요약한 것이, “내 몸이 신자유주의예요.”이다.『혁명은 이렇게 조용히』53쪽

 

우석훈의 얘기는 따끔하면서도 실팍하게 다가옵니다. 뼛속까지 몽땅 저잣거리에 떠맡기는 흐름에 젖은 젊은이들은 외롭고 팍팍한 데다, 그대로 있으면 괴로움이 덮칠 걸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선자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신자유주의의 싸늘한 된바람에 구멍이 뻥뻥 뚫린 자신의 집이 휘청거리지만, 어설픈 스펙으로나마 안간힘을 써서 자신의 집을 꾸미려하는 이들이 요즘 젊은이들이니까요.

 

책이 나온 뒤 대학교에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강연하고, 학생들도 직접 만나면서 결국 내가 발견한 것은 ‘혁명의 파토스’가 지금 한국의 20대에게는 아직 없다는 것이다. ‘혁명’은 아마도 인간이 만들어 낸 말 중 가장 격정적이고, 가장 많은 상상력을 집약시킨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지금 20대는 그 말을 감당해 낼 힘이 없다. 그들은 지나치게 겁에 질려 있고, ‘쫄아 있다.’ 좀 심하게 얘기하면, 지금 대학생들은 한 과목에서 F만 나와도 자신이 인생의 낙오자고, 사소한 실수로도 취업에 실패할 수 있으며, 정말로 의미 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 두려워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렇게 겁에 질려 있는 집단을 어떻게 끌어내 좀 멀리 넓게 현실을 보게 할 것인가?『혁명은 이렇게 조용히』34쪽

 

젊은이들이 쫄아있다고 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사회여건이지요. 그러다보니 젊은이들 가운데 주눅 들고 움츠려든 이가 흔합니다. 겉으론 여러 스펙을 쌓아 으쓱하는지 몰라도 속으론 언제 무너질지 몰라 조마조마한 ‘부실공사’한 젊은이들이 적잖습니다. 누군가 곁에 다가와 건드리기만 해도 흔들리기에 ‘신자유주의의 자식들’은 서로서로 멀찍이 거리를 두고 외로움에 와들와들하지요.

 

몸과 맘은 겹쳐있기에 몸이 오그라든 사람이 생각이 팽팽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생각이 조그만 사람은 몸도 쪼그라들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오므라들 수밖에 없는 사회흐름이라지만, 그럼에도, 쭈그려 앉아있으면 활짝 웃을 날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울타리 밖으로 몸을 내보내고 평소에 미처 품어보지도 않던 생각들을 골똘히 해야 합니다. 그럴 때만 자기 삶에서 날갯짓을 할 수 있으니까요.

 

새로운 꿈을 꾸는 사람만이 새로운 삶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새롭게 움직이는 사람만이 자기 삶을 옮길 수 있습니다. 이 사회를 되돌아보고 자기 생각을 가다듬는 사람만이 새로운 사회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다시 ‘혁명’을 생각하고 가슴에 품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더 나은 사람으로 살고 싶다면!

 

(…)후배들에게 꼭 넘겨주고 싶은 것이 있는데, 바로 ‘혁명’이다. 혁명이란 말을 어떻게 이해하든 상관없다. 그러나 그 말이 주는 역동적 힘만큼은 한 번쯤 가슴에 두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좋겠다. 이 말을 들으면 왠지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는가? 나는 한국의 20대에게 혁명이라는 말에 숨겨진 기이한 매력과 폭발적 힘을 전달해 주고 싶다. 또한 그들 안에 이미 혁명의 기운이 조용히 번져 가고 있음을 다른 이들에게 말해 주고 싶다.『혁명은 이렇게 조용히』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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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의 탐독 - 정성일의 한국영화 비평활극
정성일 지음 / 바다출판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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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과 포털에 넘쳐나는 영화정보들 가운데 시시껄렁하지 않은 글이 얼마나 있을까요? 얼마나 벗었다는 둥 뽀뽀를 했다는 둥 돈이 얼마가 들어갔다는 둥 허섭스레기들만 뇌까리고 있는 영화기사들을 볼 때면, 시대가 몹시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엔 날카롭고 뾰족한 영화비평들을 읽으며 함께 수다 떠는 문화가 있었는데, 어느새 영화는 뻥튀긴 강냉이마냥 시간 때우는데 써먹히고 있을 따름이네요.

 

사람들은 놀이공원에 가듯 영화관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2시간 남짓 웃고 즐기는 ‘문화소비재’로써 영화를 보죠. 이제 어떤 영화를 볼지 헤아리고 본 뒤에 영화가 어땠는지 생각하는 시간보다 어느 극장에서 볼지 영화가 끝나면 뭘 할지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입니다. 왜 지성의 눈으로 영화를 보려하지 않는지 정성일은『필사의 탐독』(바다출판사. 2010)에서 따져 묻습니다.

 

오늘날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코드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너무나 많은 것들은 전문적이 되어 버려서 낯선 얼굴을 드러내고 만다. 판도라의 상자. 사람들이 지식의 도움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할 때 영화는 종종 테이블 위에 올려진 카드처럼 패를 돌린다. 공집합으로서의 담론. 차라리 잡담. 여기서 예술에 대한 열정을 되찾으려 하거나, 혹은 영화에서 낯선 문화에 대한 이해를 얻으려 들거나, 지적인 언어를 동원하지 않고 영화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사실상 예술에 대한 열정이 거의 사라졌으며, 낯선 문화는 거의 남아있지 않고, 지적인 언어의 영역은 지나치게 전문화되어 버려서 서로가 접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28~29쪽

 

요즘엔 영화라는 값싼 끈이 사람들 사이를 엉성하게 잇고 있습니다. 영화도 재미있겠지만, 영화를 ‘같이’ 봤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위로’를 봤죠. 영화라는 문화소비를 하지 않으면 스스로 불쌍하게 여기는 오늘날, 영화는 단순히 너와 나의 외로움을 가려주며 덮개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죠. 영화가 재미있다 없다, 배우가 좋다 별로다, 등등 지나고 나면 기억조차 남지 않는 텅 빈 얘기들을 나누고 있는 형편이네요.

 

이러한 ‘텅 빈 머리’로 만드는 흐름에 맞서 영화는 물음을 던지는 거라고, 보는 사람은 이에 답을 해야 한다면서 정성일은 줄기차게 ‘만만치 않은’ 글을 써나갑니다. 정성일은 한국에서 손꼽히는 영화비평가지요. 그는 이 책에서 아직 영화비평이 죽지 않았음을 알리는 듯 차분하지만 뜨거운 말들로 영화에 대해 써내려갑니다. 꼼꼼하면서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글들을 읽다보면, 절로 그 영화들을 다시 보고 싶어집니다.

 

『필사의 탐독』엔 <오아이스>, <극장전>, <친절한 금자씨>, <괴물>, <외출>, <해안선>, <님은 먼 곳에> 등등 잘 알려진 영화뿐만 아니라 <소름>, <이리> 같이 덜 알려진 영화까지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똑같이 영화를 봤는데도 마치 다른 영화를 본 거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정성일은 영화의 속살을 들추는데, 그 솜씨가 대단합니다. 이 책은 영화가 너무 흔해진 나머지 그저 ‘2시간 오락거리’로 써버려지는 데 질린 사람들에게 영화의 즐거움을 새롭게 안겨줄 성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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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그리의 제국 강의
안토니오 네그리 지음, 서창현 옮김 / 갈무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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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조마조마한 시대입니다. 불안이 너울대며 사람들을 집어삼키려 하니까요. 언제 무슨 일이 ‘또’ 터질지, 어떤 용가리가 ‘또’ 들이닥쳐 쑥대밭을 만들지 한치 앞도 앞을 내다보기 힘들어진 21세기입니다. 인류사를 통틀어 이렇게 넉넉하고 덜퍽진 때가 없지만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쓰러져 죽습니다. 더구나 2008년, 세계경제는 무너지면서 그동안 잘못 굴러갔다는 걸 스스로 까발렸죠. IT기술에 들떠하며 탈근대라든지 정보화라며 손뼉만 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간의 힘으로 만들 수 있는 여러 세상 중 가장 나은 세상이 아니다. 우리가 다른 종류의 결정을 내렸더라면 지금 다른 모습의 세상에 살고 있을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볼 때 우리는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이 내리는 결정들이 확고한 증거와 제대로 된 논리에 근거한 것들인지 따져봐야 한다.『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16쪽. (부키. 2010)

 

자본주의를 긍정하는 장하준 교수조차 지금 경제짜임새를 땜질하듯 고쳐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에 힘을 줍니다. 그는 “지금 우리의 당면 과제는 세계 경제를 완전히 새롭게 재건하는 것이다”(327쪽)라며, 지금과 딴판인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부르짖습니다. 그냥 이대로 가다가는 지구고을이 작살나는 일밖에 남지 않으니까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때, 정치철학자 네그리의 연구는 훌륭한 지팡이가 되어줍니다. 모조리 시장에 떠맡기자는 신자유주의 물결에 지구마을이 휩쓸린 가운데, 근대 내내, 그리고 요즘 들어 더 또렷하게, 온누리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네그리는『제국』과『다중』에서 읽어내었죠. 이젠 미국과 몇 나라들이 으스댈 수 없는 제국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제국주의와는 달리 제국은 결코 영토상의 권력 중심을 만들지 않고, 고정된 경계나 장벽들에 의지하지도 않는다. 제국은 개방적이고 팽창하는 자신의 경계 안에 지구의 영역 전체를 점차 통합하는, 탈중심화되고 탈영토화되는 지배 장치이다. 제국은 명령 네트워크를 조율함으로써 잡종적 정체성, 유연한 위계, 그리고 다원적 교환을 관리한다.『제국』17쪽. (이학사. 2001)

 

제국주의시대처럼 힘 센 나라들이 약한 나라를 쳐들어가 식민지를 삼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란 그물망이 온 지구를뒤덮었으며, 사람들 위에서 지배하기보다는 사람들 그 자체를 지배하려고 한다며, 수많은 자료들을 끌어들여 커다랗게 바뀐 대목들을 파헤칩니다. 하지만 네그리가 일컫는 ‘다중들’이 정작『제국』을 읽어내기 수월치 않다는 점은 좀 찝찝하죠. 책 내용이 여간내기가 아니거든요. 마침 그가 지구동네를 돌아다니며 강연한 알맹이들을 묶은『네그리의 제국 강의』(갈무리. 2010)이 나와, 보다 더 쉽게 수다보따리를 푸네요.

 

자신의 책을 갈림길 삼아 제국이 맞느냐, 제국주의가 맞지 않느냐, 말씨름이 거세게 일어났던지라 네그리는 그러한 물음들에 하나하나 답을 하며 보다 더 친절하게 자신의 생각을 꺼냅니다. 제국주의란 틀에 갇혀있으면 변한 오늘날을 올바로 헤아리지 못한다면서, 지구의 얼개가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 넘어갔다고 딱 잘라 말합니다.

 

제국은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의 조합입니다. 달리 말해, 제국은 이 세 정점들 주위에 구성되고 있는 힘들의 구조 속에 존재합니다. 제국의 위계적 구조화는 권력의 세 수준들의 분절에 의해 작동합니다. 첫째는 미국의 군주적 수준으로서, 이 수준에서 군사적, 화폐적, 문화적 헤게모니가 유지됩니다. [둘째로] 모순들에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효과적으로, 전 세계 생산의 모든 공간들에 자신의 영향력을 미치는 귀족정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이미 어떠한 국민적 색깔도 띠지 않는 금융 체계들에 기초하고 있는, 거대한 자본주의적 다국적기업들입니다. 30쪽

 

이렇게 제국이란 안경으로 지구를 들여다보면, 그동안 안 보였던 것들이 보이고 흐릿하게 보이던 것들이 또렷하게 보입니다. 지난 20세기와 달리 여러 나라들이 ‘전쟁’을 벌이지 않고 ‘치안 관리’에 힘쓰는 까닭도 자신의 손아귀를 뻗어 움켜쥐어야 할 바깥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겠지요. 이제 자본주의 안에 들어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니까요. 맑스가 얘기하는 ‘실질포섭’이 끝난 셈이죠.



그렇다면 미국이 벌이는 아프가니스탄를 쳐들어간 일이나 이라크 침공은 전쟁이 아니란 말일까요? 네그리는 ‘쿠데타’라고 설명합니다. 2001년 9월 11일 뒤로 미국이 제국에 ‘쿠데타’를 일으켜 세계주도권을 다시 가져오려고 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쳐들어갔다가 수렁에 빠진 미국을 보면 알 수 있듯 제국시대엔 어떠한 ‘군주’ 혼자 팔뚝질을 해대도 제국권력을 다 가질 순 없다고 네그리는 얘기합니다.

 

제국이라 말을 들으면 당나라나 로마가 떠올라 답답하고 어두컴컴할 수 있지만, 도리어 네그리는 절대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는 마당이 열렸다고 여깁니다. 제국은 다중들의 움직임을 잡아매고자 어쩔 수 없이 생겨난 얼개이고, 제국을 만들어낸 다중이 이 제국마저 넘어설 거라고 내다봅니다. 그렇다면 다중은 누구일까요?

 

다중은 우선 먼저 계급 개념입니다. 더 잘 표현하자면 다중은 하나의 계급적 경험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하나의 확장된 계급 개념, 달리 말해 노동계급이라는 낡은 개념보다 더 폭넓고, 더 광범위하며 더 포괄적인 계급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중은 그 안에 가사노동을 하는 여성들, 서비스 부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농업 노동자들, 학생들, 연구자들 등등을 포함합니다. 198쪽

 

다중은 한마디로, 백성(百姓)들입니다. 말 그대로 지배권력의 말과 글로 종잡을 수 없는 사람들이죠. 그렇지만 그저 대중이나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노동의 지식화가 이뤄지고 사회의 공장화가 퍼져간 오늘날에 새롭게 나타난 뭇사람들의 엮임입니다. 여태껏 정통 맑스주의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노동자들을 비롯하여 그 바깥의 언저리에 있던 이들까지 아우르는 널찍한 개념입니다.

 

다중은 끝없이 자본주의와 지배세력에 대들고 맞서는데, 이미 지구 골골샅샅에서 다중들의 저항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2008년 촛불시위에 나온 사람들을 보면, 네그리가 내놓은 생각과 꽤 잘 맞아떨어지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을 바꿔나가는 힘은 대학생이나 노동자만이 아니라 이 사회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셈이죠.

 

배불뚝이들이야 콧노래를 부르며 흥청망청 살아가는지 모르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이리 치이고 저리 채이며 날마다 괴롭게 버티는 지경입니다. 오랜 세월, 줄기차게 솟구치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바람을 일으키고, 지금 여기에서 이뤄내자고 네그리는 외치네요.

 

혁명이라는 주제가 다시 의제로 복귀되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위기(그리고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을 포함하여 신자유주의가 낳은 억압적 힘들의 위기)는 새로운 개혁적 시각들을 열지도 못할뿐더러, 우리가 궁극적으로 다다를 수 있는 장대한 지평들을 제공해주지도 못합니다. 이 위기 이후에 우리에게 남은 것은, (신자유주의의 패배가 다시 한 번 드러내는) ‘또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라는 확신 속에서, 세상을 새롭게 건설하겠다는 결의를 갖춘, 가난의 절박함과 사랑의 긴장입니다.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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