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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 - 개정증보판 ㅣ 현대사상신서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 교보문고(교재) / 2015년 9월
평점 :
셰익스피어는 인도와 바꾸지 않겠다는 영국인들의 얘기가 매우 그럴 듯하게 한국에 퍼져있습니다. 그만치 ‘훌륭한 예술가’를 높이 여긴다는 말로 쓰이지만, 이 말을 살짝만 뒤집으면 어처구니없습니다. 거죽은 그럴싸하지만 이 말의 뼛속은 제국주의에 흠뻑 절어있습니다. 마치 인도를 자기들 마음대로 ‘바꾸거나 팔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지요. 인도에 사는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은 단박에 싸구려가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섬뜩한 사실은, 한국사회에선 아무렇지 않게 이런 말을 툭툭 내뱉고 걸핏하면 셰익스피어를 얘기하며 ‘외국나라 이야기들’을 떠받들고 추어올리는데, 정작 영국에선 셰익스피어를 ‘한국만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영국 사람들은 셰익스피어를 잘 알고 그가 쓴 이야기들을 즐길 거 같은데, 이것은 ‘환상’이지요.
그 영어선생은 영국인은 누구나 셰익스피어 전집을 가지고 있다고도 했다. 나의 중학시절에—1960년대초—두 가지 전집이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갖고 싶어 몇 달을 고민하다가 결국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여 그것을 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나는 영미의 많은 가정을 방문했으나 셰익스피어의 전집을 본 적이 없다. 내가 간 곳은 대부분 교수집이었으니—영문학교수도 있었다—반드시 잘못 본 것만도 아니었다. 일류대학 학생들에게 물어봐도 한 두 작품의 이름을 알까 대개는 잘 몰랐다. 일반시민들도 평생 그 공연을 한두번 볼까말까였지 책을 읽기는커녕 집에 두지도 않았다. 셰익스피어는 미국에서는 물론 영국에서도 전혀 일상이 아니었다. 오 나의 영어선생이여! 이제 더 이상 흰소리를 말아라! 셰익스피어의 4대비극을 외우는 학생은 이 세상에서 대한민국 수험생들뿐이다. 도대체, 그게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냐?『오리엔탈리즘』635쪽
위 글은『오리엔탈리즘』의 옮긴이 박홍규가 미국과 영국을 넘나들며 느낀 점을 쓴 글인데, 무척 솔깃하더군요. 서구에서 오랜 세월 아랍과 무슬림, 동양에 갖는 인상을 에드워드 사이드가 쑤시고 뒤집으며 거짓부렁이자 지배욕이었음을 밝히고 지식과 권력이 얼마나 쫀득쫀득 달라붙어있는지 까발리는 작업도 대단하지만, 한국에서 지식인으로서 호젓한 길을 걸어간 박홍규의 옮긴이 주 또한 볼만하더군요.
한국제도권에서 먹물을 먹은 대부분 사람은 샅샅이는 모르더라도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따위의 햄릿의 대사나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교양’으로 알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세계에 이름을 떨친 셰익스피어라고 조잘거리는 이들은 많지만, 왜 셰익스피어의 이름값이 ‘높아야’ 하는지에 물음을 던지는 이는 듬성하지요. 사실, 셰익스피어의 이야기들은 조금만 따져도 영국을 넘어 저 멀리 한국 학생들까지 꼭 알아야 하는 아주 대단한 알맹이들은 아니니까요.
한국에서 먹물들이 여전히 미국과 외국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고, 마치 미국에서 학위를 따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은 ‘식민화된 대학’에 대한 박홍규의 호통은 벌써 2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울립니다. 그 까닭은 한국인의 얼굴을 하였지만 속은 맥도날드의 캐릭터가 들어간 이들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겠지요. 일제에게 해방이 되었다지만, 진짜 해방이었을까요?
지구마을에서 남한처럼 미국화된 사회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저 겉모습뿐 아니라 어느덧 사람들의 몸속까지 미국화되었죠. 80년대 운동권에서 한국을 미국의 51번째 주라거나 사실상 식민지라면서 반미를 외쳤던 까닭은 야금야금 또는 매섭게 이곳에 사는 사람들 머릿속과 생활 속으로 미국이 스며들었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서구로 상징되는 마구 써버림과 현대문명을 욕망하지 않는 이가 드문 형편이지요.
진짜 ‘한국인’이라는 본때가 지켜야 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사이드가 걱정하듯 서구를 몰아내자며 정통만을 내세우는 ‘근본주의’ 또한 슬기로운 길이 아니니까요. 문화는 섞이고 자꾸만 바뀌면서 나아가는 짬뽕이라면, 상대를 지배하거나 짓누르지 않는 지식과 만남이 오늘날 인류가 해내야 할 몫이겠지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외우기보다 자신의 생각과 욕망, 살아가는 모습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자신에게 불어 닥치는 입김들은 무엇인지 헤아리는 깜냥이 절절하게 있어야 하는 시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