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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의 탐독 - 정성일의 한국영화 비평활극
정성일 지음 / 바다출판사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신문과 포털에 넘쳐나는 영화정보들 가운데 시시껄렁하지 않은 글이 얼마나 있을까요? 얼마나 벗었다는 둥 뽀뽀를 했다는 둥 돈이 얼마가 들어갔다는 둥 허섭스레기들만 뇌까리고 있는 영화기사들을 볼 때면, 시대가 몹시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엔 날카롭고 뾰족한 영화비평들을 읽으며 함께 수다 떠는 문화가 있었는데, 어느새 영화는 뻥튀긴 강냉이마냥 시간 때우는데 써먹히고 있을 따름이네요.
사람들은 놀이공원에 가듯 영화관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2시간 남짓 웃고 즐기는 ‘문화소비재’로써 영화를 보죠. 이제 어떤 영화를 볼지 헤아리고 본 뒤에 영화가 어땠는지 생각하는 시간보다 어느 극장에서 볼지 영화가 끝나면 뭘 할지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입니다. 왜 지성의 눈으로 영화를 보려하지 않는지 정성일은『필사의 탐독』(바다출판사. 2010)에서 따져 묻습니다.
오늘날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코드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너무나 많은 것들은 전문적이 되어 버려서 낯선 얼굴을 드러내고 만다. 판도라의 상자. 사람들이 지식의 도움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할 때 영화는 종종 테이블 위에 올려진 카드처럼 패를 돌린다. 공집합으로서의 담론. 차라리 잡담. 여기서 예술에 대한 열정을 되찾으려 하거나, 혹은 영화에서 낯선 문화에 대한 이해를 얻으려 들거나, 지적인 언어를 동원하지 않고 영화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사실상 예술에 대한 열정이 거의 사라졌으며, 낯선 문화는 거의 남아있지 않고, 지적인 언어의 영역은 지나치게 전문화되어 버려서 서로가 접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28~29쪽
요즘엔 영화라는 값싼 끈이 사람들 사이를 엉성하게 잇고 있습니다. 영화도 재미있겠지만, 영화를 ‘같이’ 봤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위로’를 봤죠. 영화라는 문화소비를 하지 않으면 스스로 불쌍하게 여기는 오늘날, 영화는 단순히 너와 나의 외로움을 가려주며 덮개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죠. 영화가 재미있다 없다, 배우가 좋다 별로다, 등등 지나고 나면 기억조차 남지 않는 텅 빈 얘기들을 나누고 있는 형편이네요.
이러한 ‘텅 빈 머리’로 만드는 흐름에 맞서 영화는 물음을 던지는 거라고, 보는 사람은 이에 답을 해야 한다면서 정성일은 줄기차게 ‘만만치 않은’ 글을 써나갑니다. 정성일은 한국에서 손꼽히는 영화비평가지요. 그는 이 책에서 아직 영화비평이 죽지 않았음을 알리는 듯 차분하지만 뜨거운 말들로 영화에 대해 써내려갑니다. 꼼꼼하면서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글들을 읽다보면, 절로 그 영화들을 다시 보고 싶어집니다.
『필사의 탐독』엔 <오아이스>, <극장전>, <친절한 금자씨>, <괴물>, <외출>, <해안선>, <님은 먼 곳에> 등등 잘 알려진 영화뿐만 아니라 <소름>, <이리> 같이 덜 알려진 영화까지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똑같이 영화를 봤는데도 마치 다른 영화를 본 거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정성일은 영화의 속살을 들추는데, 그 솜씨가 대단합니다. 이 책은 영화가 너무 흔해진 나머지 그저 ‘2시간 오락거리’로 써버려지는 데 질린 사람들에게 영화의 즐거움을 새롭게 안겨줄 성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