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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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툭 까놓고 얘기를 해봅니다, 왜 학부모들이 사교육에 돈을 쏟아 붓고 자식들을 좋은 대학 보내려고 안달을 하는 걸까요? 바로 어느 대학 출신이 그 사람 인생을 결정하기 때문이죠. 20대 이전 공부는 오로지 학벌을 위한 입시교육일 뿐이지요. 그럼 여기서 끝나는가? 아니죠. 20대는 취직을 위한 암기가 시작됩니다. 참다운 삶을 살기 위한 공부는 어디에도 없는 현실입니다.

 

그럼 도대체 왜 입시교육과 취직을 위한 암기를 하는가? 바로 ‘잘 먹고 잘살고 싶기’ 때문이죠. 누가 더 잘 외웠는지 줄을 세운 뒤 돈을 나눠주는 한국사회니까요. 돈에 대한 욕망이야 자연스러운 욕심이라 치고 넘어갑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죠. 도대체 그 돈으로 뭘 하고 싶은 걸까요?

 

사실은 이게 중요해요.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척 많지요. 마음만 제대로 먹으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게 돈이니까요.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값비싼 아파트, 번지르르 외제차, 부동산 투기, 노후를 위한 각종보험을 위해서 돈에 눈독들이고 있지요. 거기다 요런 삶을 자식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고 싶어 하지요. 고작 이걸 위해 청춘을 다 바치고 힘든 여정을 감수한다니. 맙소사!

 

그럼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어보자. 큰 아파트, 외제차, 부동산 따위가 정말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믿는가? 그러면 다들 말문이 막혀버린다. 언제부터 그것을 욕망하게 되었는지, 또 그 욕망이 행복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건 질문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니까. - 책에서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그린비. 2007]는 헛된 욕망을 좇지 말고 진짜 행복해지라고 말을 겁니다. 거짓말 조금 더 보태면, 책을 읽는 순간 두 팔이 떨립니다. 룰루랄라, 평탄한 길을 걷다가 갑작스레 나타난 높은 산을 쳐다봤을 때 표정이 되더군요. 지금까지 자신이 욕망하는 것들이 진짜 행복을 주는지 생각해보지 않았으니까요. 당연히 추구해야할 가치라고 믿고 있었지요.

 

지은이 고미숙은 호모 쿵푸스에서 진짜 행복해지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맛깔 나는 문장들을 풉니다. 인생이란 길에는 수많은 산들이 이어져 있으며 넘기 위해선 공부를 해야 한다는 주장과 짜임새 있는 논리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자아찾기부터 사회성공, 거기에 연애까지 공부를 해야 얻을 수 있으니까요.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공부는 쿵푸처럼 온 몸으로 하는 공부입니다. 그래서 호모 쿵푸스지요.

 

나를 모르는 사람들과 암기광신 한국



많은 사람들이, 난 나야,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할 거야, 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면 묻습니다. 근데, 원하는 게 뭐니? 무엇을 욕망하는지 말해줘. 여기에 자신 있게 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냐, 넌? 이라고 물을 때, 나안~ 하면서 자신을 제대로 소개할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요. 그만큼 자기 공부가 안 되어있다는 얘기죠.

 

공부는 안 되고 있지만 공부할 여건은 엄청 좋아졌습니다. 초고속 인터넷으로 조금만 뒤져도 정보들이 무더기로 쏟아지고 발달한 교통수단으로 어디든 빠르게 갈 수 있으며 이젠 잘 먹고 살만큼 경제도 나아졌지요. 군사독재정권도 끝이 나고 세상은 달라졌는데, 학교는 여전히 암기전투를 벌이는 전쟁터입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달려들어야 앞에 있는 놈 끌어내릴 수 있지요.

 

살아남기 위해서 갖은 술수를 다 쓰는 교육현장입니다. 가정경제 기둥뿌리 흔들리게 하는 사교육부터 어학연수, MBA, 영어성적과 학벌에 모든 걸 겁니다. 초등학생들도 일제고사를 보고 국제중학교 들어가라며 전투경험을 일찍부터 시키겠다고 살벌하게 부추깁니다. 삐뚤어진 교육광신이 드세 질수록 참 공부와 멀어지고 있다고 지은이는 진단하지요.

 

하지만 진정 놀라운 건 그게 아니지요. 아무도 이걸 왜 하는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어떤 청소년도 이런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이게 더 끔찍한 일이지요. 이 기막힌 상황을 아무도 거스르지 않고 있으며 저항한 선생님들을 해임파면 시켰지만 세상은 삐걱삐걱 잘도 돌아갑니다.

 

공부가 없는 현실, 진짜 공부를 하면 삶이 달라진다!

 

청소년들이 과중한 공부에 힘들어한다고 하지만 문제는 청소년들이 공부에 시달린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지요. 한창 힘과 패기가 넘칠 때 열나게 공부를 하는 거야 지극히 마땅한 일 아닌가요. 진짜 문제는 그들이 공부라고 하는 게, 시험이 끝나는 순간, 말짱 도루묵일 뿐이라는 거죠. 더 나아가 인생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걸림돌이 된다는 거예요.

 

어쨌든 그렇게 바라던 대학에 들어갔다고 칩시다. 하지만 대학에는 패기에 찬 논쟁도, 활발한 소통도 찾아볼 수 없지요. 더 이상 대학은 큰 배움터가 아니니까요. 취직 준비에 모든 걸 바치고 소비의 그물에 걸려 허우적대며 노후 대책에 골몰하지요. 청년이라 하기엔 너무 늙어버린 그들이지요. 당연히 늙어버린 그들이 늙은 사회에 들어가기에 세상은 늘 그 모양 그 꼴일 수밖에 없지요.

 

도대체 그럼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 걸까요? 공부는 쿵푸, 곧 온 몸으로 하는 것이기에 몸이 바뀌고 인생이 달라지는 공부를 해야 하지요. 학교를 넘어서서 평생 공부를 해야지요. 미네르바와 아고라의 논객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대중지성이 나타났지요. 학벌, 학점, 계급, 자격증, 소득, 사회 통념과 위계질서는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지요. 대중지성을 움직이는 힘은 오직 앎에 대한 열정이니까요.

 

그렇게 공부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 또 한 번의 비약이 일어난다고 지은이는 말을 하지요. 사는 것 자체가 모두 공부라는 걸 느끼게 되지요. 몸과 인생과 공부가 완전히 하나가 되는 오묘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지요. 언어와 문자의 경계를 넘어 세상 모든 것이 ‘책’이 되는 경이로움을 몸으로 느끼게 되지요.

 

그야 말로 문자와 몸과 세계가 혼연일체가 되는 순간, 앎은 행위에서 시작되고 행위는 앎의 완성이 되는 지행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거지요. 이 경제에서는 아무리 남한테 퍼주고 퍼줘도 깊은 산속 옹달샘마냥 계속해서 솟아나게 되어 있다고 지은이는 얘기하지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신가요?

 

독서를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오늘날

 

그럼 어떻게 공부를 하여야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우선 책을 읽어야죠. 지은이는 몸과 인생을 바꿔주는 지혜와 비전으로 가득 찬 책, 고전을 읽으라고 귀띔하지요. 독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합니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이제 가문이 망했으니 네가 참으로 독서할 때를 만났구나.”라고 편지를 쓸 정도로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답니다.

 

오늘날, 책을 안 읽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백지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란 거죠. 눈만 뜨면 광고와 인터넷, 각종 동영상에서 욕망을 자극하느라 시각 폭격을 해대는데, 웬만한 내공이 아니고는 그것들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란 거의 불가능한 지경이죠. 즉, 그냥 내버려둔다는 건 청년기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설치해놓은 함정에 그대로 빠져드는 걸 의미하지요.

 

1990년대 영상물이 문화의 전 영역을 장악하면서 독서의 영토는 그나마도 줄어들었지요. 대중지성이 하나로 연결될 수 있는 길은 하나, 독서뿐이지요. 책을 읽는다는 건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시각의 군림, 감각의 폭주를 거스를 수 있는 유일한 문이 되었어요. 21세기, 독서는 그자체로 이미 반문화이고 주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이 되는 거죠.

 

성공을 하고 싶다고? 책을 읽어~

 

독서는 성공하는 바탕이 되지요. 초야에 묻혀 밭을 갈며 살던 제갈량, 유비의 삼고초려 끝에 세상으로 나오지요. 나오자마자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온갖 지략과 술수로 천하를 쥐락펴락하지요. 그는 특별한 학벌도 경력도 없었지요. 다만 독서를 했을 뿐이에요. 굶주림에 지친 아내의 호통에 세상 밖으로 나온 허생, 다짜고짜 갑부 변씨를 찾아가 만금을 빌리고 그걸 밑천 삼아 100만 냥을 벌지요. 그는 실물 경제를 익힌 적이 없지요. 다만 독서를 했을 뿐이지요. 이들의 힘은 독서였던 거지요.

 

근데 유비는 제갈량의 재주와 지략을 어떻게 알아보고 삼고초려를 한 걸까요? 유비는 그냥 한눈에 제갈량의 그릇을 알아봤어요. 그의 얼굴과 몸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넘쳤기 때문이죠. 허생에게 변부자는 이름도 묻지 않고 즉석에서 만 냥을 내주지요. 허생의 내공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죠.

 

그들은 책을 통해 전혀 다른 종류의 몸이 된 것이죠. 사람의 운명과 성공을 결정하는 건 바로 그런 높은 수준의 감응력을 지닌 신체에요. 왜냐하면 감응력 높은 몸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니까요. 책을 읽으면 누구든 몸에 흐르는 기운을 바꿀 수 있지요. 연인이 닮아가고 가족이 닮듯이 좋은 책들을 오랫동안 읽으면 거기에 담긴 사유의 파동과 입자가 몸 안에 온축하게 되는 거지요.

 

그렇게 내공이 쌓이면 그 둘레에 에너지장이 형성되어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막 끌리게 되지요. 그래서 공자님이 말씀하셨지요. 덕은 반드시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네. 따라서 운명은 몸에서 배어나오는 거라 할 수 있지요. 몸의 동선과 습관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관계와 활동, 그게 바로 운명이 되니까요,

 

운명 같은 사랑, 특별하고 찐한 사랑을 하고 싶은 방법

 

이렇게 운명을 만들어내는 몸이기에 사랑도 만들어 내지요. 사랑은 사람의 활동 가운데 가장 활발한 생명 작용이니까요. 생명은 안과 밖의 소통으로 이루어지죠. 즉, 삶과 세계에 대한 통찰력이 자기 몸의 내공을 결정지어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삶의 모습과 나란히 함께 가지요. 사는 건 엉망인데, 사랑을 멋지게 하는 경우, 절대 없습니다.

 

삶에 대한 통찰력 없이 누군가를 끊임없이 오랫동안 사랑을 한다는 건 불가능하지요. 사랑은 내 존재의 깊은 곳이 울릴 때라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지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오늘날, 연애가 짧게 끝나는 것도 같은 맥락이죠. 내 안에 사랑을 지속할 힘과 기운이 충만하지 않으면 대상에 상관없이 그냥 끝나버리는 게 되지요. 계속 사랑할 힘이 부족하기에 근대인이 통상 밟아가는 연애의 끝은, 권태 아니면 변태지요.

 

이 빤한 과정을 벗어나 자신만의 특별하고 뜨거운 사랑을 하고 싶다면 방법은 간단해요, 자신이 먼저 그런 존재가 되는 거예요. 아무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사랑스런 사람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운명 같은 사랑을 하고 싶다면, 자신이 상대방의 운명을 바꾸어줄 만한 능력을 가지면 되는 거죠. 그리고 그걸 터득하는 길은 오로지 독서밖에 없지요.

 

한국은 아이부터 노인까지 ‘연애’에 눈독들이며 살고 있다고 할 정도지요. 그렇다면 행복의 열쇠는 연애에 달려 있는 셈이고 행복하기 위해선 연애를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네요. 제대로 연애 공부를 하고 있는지요?

 

길동무 사랑과 앎의 코뮌

 

지금 청소년들은 드라마를 통해 연애를 배우고 포르노를 통해 섹스의 기술을 얻고 있어요. 그리하여 사랑과 섹스는 생명의 기쁨이 되기는커녕 늘 청춘의 덫이 되지요. 하긴 청소년 뿐 아니라 중년층도 별 뾰족한 수가 없지요. 연애와 성에 대한 상상력은 대중문화가 쳐놓은 그물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진정한 사랑을 하고 싶다면 연애 공부를 빡세게 하여야겠지요. 상대방도 발전하고 자신도 성장하면서 서로 공부하고 함께 기뻐하는 사랑, 누구는 합류적 사랑이라고 하고 길동무 사랑이라고도 하지요. 그러한 짝을 만나려면 자신부터 준비가 되어야겠지요. 그래야 꿈에도 그리던 찐한 사랑을 하겠지요. 존 레논과 오노 요코처럼.

 

꼭 연인이 아니더라도 공부를 도와주고 자극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바로 스승과 벗들이지요. 그들과 단순히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를 넘어서 공동체, 코뮌이 됩니다. 서로 계몽이 아니라 촉발을 하게하고 훈계가 아니라 감염을 시키지요. 에피쿠로스는, 너는 무엇을 먹고 마실까보다 누구와 먹고 마실까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며 사람관계의 중요성을 오래전에 강조하였지요.

 

뇌과학의 성과에 따르면, 뇌의 존재 이유는 ‘네트워킹’하는 데 있다고 해요. 네트워킹을 하지 못하면 신경망이 점차 끊어져 결국 치매나 죽음에 이른다는 것이죠. 공부 역시 마찬가지에요. 스승과 벗을 찾아가는 네트워킹을 멈추지 않아야 하고 자신이 스승과 벗이 되려는 전환이 없으면 죽음으로 가게 되지요. 네트워킹을 끊임없이 하는 게 공부이고 이것이 바로 ‘앎의 코뮌’에 접속하는 일이지요.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들이여, 호모 쿵푸스가 되자!

 

사나이의 가슴 속에는 늘 가을 매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기상이 있어야 하며, 건곤을 작게 여기고 우주를 자신의 손바닥 안에 있는 것처럼 여겨야 옳다, 배움이란 무릇 이런 것이다, 라고 정약용은 말했지요. 자잘한 욕망만을 탐하는 배움이 아니라 세상을 논하고 우주를 품는 공부를 해야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에 물음표를 보내야하지요. 공부란 세상을 향해 물음의 그물망을 던지는 것이니까요. 홍대용은 일찍이 “크게 의심하는 바가 없으면, 큰 깨달음이 없다.”라고 하셨지요. 바꿔 말하면 질문의 크기가 곧 내 삶의 크기를 결정하는 거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네 삶에서 매일 하고 평생을 해도 변함없이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공부예요. 연애가 좋다지만 무상하기 이를 데 없잖아요. 섹스가 아무리 짜릿하다 해도 그 쾌락은 순식간에 지나가지요. 하지만 공부는 그렇지 않아요. 날마다 하고, 평생해도 행복하고 또 행복해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장 큰 쾌락은 지적 오르가즘이다.”

 

인생이 마음에 안 들고 세상이 불만스럽다면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가 나를 바꾸고 몸을 변하게 하고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행복해지고 싶은 모든 사람들이여, 호모 쿵푸스가 되세요.

 

공부란 특정한 시공간에 고착되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존재로 변이되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의 변이를 통해 세상의 질서와 배치를 바꾸는 것, 거기가 바로 공부가 혁명과 조우하는 지점이다. 무엇을 공부하건 공부는 그자체로 혁명이 되는 거다. - 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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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모 쿵푸스 실사판] 공부는 셀프!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3-30 16:51 
    ─ 공부의 달인 고미숙에게 다른 십대 김해완이 배운 것 공부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 몸으로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적절한 계기(혹은 압력?)를 주시곤 한다.공부가 취미이자 특기이고(말이 되나 싶죠잉?), ‘달인’을 호로 쓰시는(공부의 달인, 사랑과 연애의 달인♡, 돈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부해서 남 주자”고.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근대적 지식은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만을 앎의 영역으로 국한함으로써 가장 ...
 
 
 
부동산 계급사회 우리시대의 논리 11
손낙구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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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어디 살아요? 스스럼없이 묻고 대답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어디사세요?” “강남 xx아파트 살아요.” 단 한마디로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지위에 어떤 사람일지 대충 짐작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죠. 그 사람이 누구인지 사는 곳이 말해주고 있지요.  

부동산은 단지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요건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한국에서 부동산은 우상이 되었습니다. 공직자가 부동산 투기를 하면 커다란 범죄라고 비난하지만 누구든 돈에 여유가 생기면 맨 먼저 부동산에 눈을 돌리는 현실입니다. 도덕과 규범 차원에서는 부동산 거품이 꺼져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거품 붕괴가 경제 위기로 이어지지는 않을까하는 막연한 불안감을 갖고 있지요. 

이러한 사회맥락을 꼼꼼하게 따진 뒤, 주거 환경은 물론 개인 삶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자원이 부동산이라고 진단하는 책이 있지요. <부동산 계급사회>[2008. 후마니타스]를 쓴 손낙구는 자신의 모든 주장에 타당한 통계를 달았지요. 그래서 300개가 넘는 부동산 관련 통계로 한국 사회를 분석하지요. 서민들의 부동산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그동안 잘 몰라서 부끄럽기에 그는 이 책을 쓰지요.

지난 4년 간, 필자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국회도서관과 관계부처 자료를 이 잡듯이 뒤지며 부동산 문제에 파고들었다. 부동산 문제와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찾아 읽고, 메모하고, 분석했다. 부동산 귀신이 되어서라도 어떻게든 문제의 원인과 구조를 밝히고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책에서

 

그러한 부끄러움을 바탕으로 한 책임감, 사명의식은 지은이를 집요하게 하지요. 목표물을 끝까지 좇아가 물어뜯는 사냥개처럼 한국부동산의 문제점을 낱낱이 파헤치지요. 그가 이루어놓은 연구덕분에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무릎을 치면서 물신화된 부동산을 돌아보게 되지요. 그리고 한탄과 함께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지요. 한국에서 50년 동안 벌어진 부동산 문제는 극소수 부자들 빼고는 모두 피해자니까요.

 


서울 경기 땅 팔면 캐나다 사고도 남는다

 

지은이가 말하는 한국부동산의 문제점은 3가지에요. 첫째, 너무 빨리, 너무 많이 오르는 부동산 가격. 둘째, 그 결과 서민 생활이나 국가 경제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비싼 것. 셋째, 부동산 가격이 올라 생기는 엄청난 이익을 일부 부유층이 독차지함으로써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있는 것이죠.


 

 

지은이는 통계를 보여주며 10년에 한 번씩 부동산값이 폭등한 역사를 보여주죠. 1963년에 비해 2007년까지 도시노동자 가구 월평균 실질소득은 15배 늘어난데 비해 같은 기간 동안 땅값은 1,176배 올랐지요. 서울 경기도 땅을 팔면 930배가 넓은 캐나다 국토 전체를 사고도 남지요.

 

 

선진국을 포함해서 땅값이 안정된 대부분의 나라는 땅값 총액이 국내총생산(GDP)과 비슷한 수준이지요. 하지만 한국은 실제로 사고 팔리는 시가가 아니라 정부가 발표한 공시지가로 계산해도 GDP의 3.6배에 달하지요. 특히 서울 땅값이 지나치게 비싸지요. 전체 국토의 0.6%밖에 안 되지만 땅값은 31.6%를 차지하고 있어요. 집값 역시 국내총생산의 3배가 넘는 걸로 나오지요. 얼마나 비싼지 강남‧서초‧송파구의 공동주택을 팔면 주식 시가총액 1위에서 9위까지 재벌 대기업을 통째로 살 정도지요.

 

1만 가구가 살 수 있는 집을 30명이 차지한 한국

 

이렇게 비싼 이유는 투기 때문이지요. 한국에 있는 1370만 채 중에 59.4% 814만 채를 1가구 다주택자들이 소유하고 있어요. 반면 전체 가구 절반이 넘는 841만 가구는 집 없이 셋방살이를 하고 있지요. 집 부자 30명이 소유한 집은 모두 9923채로 한 사람 평균 330채씩 있지요. 1만 가구가 살 수 있는 집을 30명이 차지한 셈이지요. 집 욕심이 얼마나 많은지 많게는 1083채를 가진 사람도 있어요.


 

집과 마찬가지로 땅도 땅부자들이 몽땅 갖고 있지요. 그들은 땅투기를 하여 불로소득을 챙겼지요. 국토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1980년에 땅값총액이 134조원이었으나 2001년까지 21년 동안 땅값이 1419조로 올랐지요. 오른 만큼 거저 잇속 채운 것이지요. 땅불평등이 얼마나 심각한지 지은이는 이렇게 비유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나라가 100명이 사는 나라라면 27명이 사유지 기준으로 국토의 99%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이 소유하고 남은 1%의 땅을 33명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새통을 이루며 사라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나머지 40명은 서 있을 자리도 없어 바다 속에 빠진 상황이다. - 책에서

 

소득은 있지만 세금은 잘 걷히지 않는 부동산

 

이렇게 부동산 투기가 기승을 부리는 까닭은 거기서 얻는 이득을 제대로 환수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부동산 가격 상승분에서 소유자의 직접 투자에 의한 증가분을 제외한 모든 금액을 불로소득으로 보고 보유, 개발, 처분 단계별로 환수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한국은? 불로소득 가운데 평균 5%를 환수하는 거에 그쳤고 최근 들어 더욱 낮아지고 있지요. 대부분의 불로소득이 늘어나서 부동산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부동산이 없는 사람은 더 가난해졌지요.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는 조세원칙을 무시되는 실정이지요. 불로소득 가운데 일부분만 환수되고 대부분 사유화되었을 뿐 나머지는 극소수 부자들이 가져갔지요.

 

1999년 5월, 타워펠리스 1차 전용면적 기준 245㎥(101평형) 분양가는 17억 7,500만원 이었으나 2006년 12월에 53억 6,000만원에 팔렸지요. 한 달 평균 3,940만원씩, 1년 평균 4억 7,280만원씩 올라 35억 8,500만원이 올랐지요. 타워팰리스를 사서 엄청난 불로소득을 얻게 된 사람이 만약 5년 내에 팔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이 2채를 갖고 있어도 세금 한 푼도 안 냈던 경우가 있을 정도로 조세제도의 구멍이 많다고 지은이는 꼬집습니다.

 

불로소득으로 떼돈 버는 사람들 보면, 일하고 싶겠니?

 

이렇게 지나치게 비싼 부동산 때문에 한국에 큰 짐이 되고 있습니다. 먼저 노동의욕 감소입니다. 자신이 노력하지 않고 얻은 불로소득은 마땅히 거둬들여야 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투기를 부채질할 뿐만 아니라 땀 흘려 열심히 일하는 사람만 손해를 보게 돼 사회 전체가 병들어 가지요. 투기 불로소득을 좇는 욕망이 넘칠수록 성실한 노동과 이를 통해 얻는 정당한 소득이 천대받게 되지요.

 

다음으로 너무 비싼 물가입니다. 비싼 부동산 가격은 서울 물가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지요. UN은 직원을 서울로 보낼 때 다른 나라 도시보다 많은 출장비를 줘요. 유엔의 서울 출장 수당은 하루 368달러로 미국 뉴욕(347달러) 물론, 프랑스 파리(306달러), 일본 도쿄(273달러)보다 높아요. 사무총장이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까요? 아니에요. 서울 물가가 턱없이 비싸기 때문이지요.

 

또한 많은 사람들이 부동산 대출금을 갚느라 힘들어 합니다. 2007년 말, 한 가구에 평균 3,842만원을 빚지고 해마다 늘어나고 있지요. 사람들이 소비능력이 떨어지면서 내수침체로 이어지죠. 집 때문에 쪼들리고 아이 키우는 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기에 출산율 저하로 이어지고 내수에도 여파를 미치지요. 게다가 고령화 사회에서 평생 모은 재산이 주택에 묶여있어 노인 분들도 소비를 못하지요. 이런 것들이 맞물리며 내수침체가 심각하지요.

 

치솟은 집값, 서민 노동자들 울린다

 

투기로 치솟은 집값은 서민들의 내 집 마련 꿈을 산산조각내지요. 봉급으로 110㎥(33평형) 내 집 마련하는데 서울에서는 29년이 걸리고 강남에서는 44년이 걸리지요. 봉급쟁이들은 안정된 생활을 못하고 셋방살이를 전전하게 되는데, 문제는 집값보다 전세값이 더 크게 올랐다는 거죠. 서민들이 많이 사는 한강 이북지역은 집값에 비해 전세금이 2.5배나 더 올랐고 광역시도 2.4배 더 올랐지요. 
 
 

셋방살이를 해본 사람들은 알겁니다. 주인이 ‘방 빼’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지. 터무니없는 집값과 전세값은 사람들을 자주 이사 다니게 하지요. 이사 다니기 세계1위로 다른 나라와 비교가 안 될 정도지요. 뿌리 뽑힌 터전은 이웃사회를 해체시키고 이사 다니는 고통을 서민들에게 안겨주었지요.

 

이러니 노동자들은 파업할 수밖에 없지요. 4번에 걸친 부동산 폭등 때, 꼭 노동쟁의가 늘어납니다. 주거불안, 산업 간 임금격차 등이 사회불안으로 이어지면서 노동자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지요. 삼성경제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주택가격이 안정된 뒤에야 노동쟁의가 정상화 되었다고 하지요.

 

비싼 땅값은 산업에도 악영향

 

이것뿐이 아니지요. 비싼 땅값은 공장을 운영하기 힘들게 해서 제조업을 해외로 내몰고 외자유치의 걸림돌이 되지요. 노동자들 임금이 높아서 해외로 나간다는 것은 잘못된 분석이지요. 노동자들 임금이 높은 이유도(실제 높지도 않지만) 따지고 보면 세계 최고 수준의 땅값과 집값 때문이고, 제조업이 해외로 나가는 이유도 한국에 비해 40분의 1밖에 안 되는 값싼 땅 때문이죠. 
 

 

한국은 ‘건설족이 지배하는 토건국가’라 불리는 후진국형 산업구조도 지적하지요. 건설업 비중이 국민경제에 지나치게 높아요. 경기침체가 될 거 같으면 무조건 때려 부수고 뭔가를 짓는 건설로 경기부양을 하려고 하였지요. 선진국들이 새로운 성장 잠재력을 키우려고 눈을 돌릴 대 한국은 여전히 ‘삽질’에 집착하지요. 오바마는 녹색뉴딜을 할 때 오바마와 닮은 MB는 4대강 정비에 50조를 쏟아 붓는 것이죠.

 

게다가 토지투자이득이 자본투자이득보다 더 크기에 기업들은 생산 활동으로 돈을 벌려고 하기보다는 부동산 투기를 하였지요. 그 결과 설비투자의 효율성이 크게 떨어지고 있고 너무 많은 부동산을 갖고 있지요. 재벌 대기업치고 건설업을 하지 않는 재벌이 없는데서 알 수 있듯이 부동산으로 쉽게 돈을 벌 수 있기에 생산설비에 투자를 하지 않게 되지요.

 

제2의 토지개혁과 부동산 문제 해결책들

 

가구별로 빠짐없이 내 집을 갖아도 집이 1,032,800채가 남아돌고 있지요. 집이 늘어날수록 내 집을 갖고 자기 집에 사는 비율(자가 점유율)을 거꾸로 떨어지고 셋방살이가 늘어나고 있어요. 국민 10명 중 4명은 셋방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상한 일을 바로잡기 위해서 지은이는 주택계급별로 맞춤형 주택정책을 의견내지요. 


 

부동산 문제는 사람이 땅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요. 땅은 인간의 소유 대상이기 이전에 물이나 공기처럼 생명체가 생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자연의 일부지요. 땅은 그 위에 지은 집과 함께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보금자리가 되어야 하지요. 따라서 소수 욕심쟁이들이 독차지 하고 투기수단이 되지 않게 토지를 사들여 공유지로 만들자고 주장하지요.

 

이제는 건설과 공급을 하려는 주택정책이 아니라 복지 중심의 주택 정책이 필요하기에 주택정책 담당을 국토해양부가 아니라 복지부에 주택청을 설립해서, 넘겨야 한다고 말하지요. 건설재벌에게 비싼 집을 짓게 하지 말고 부동산통계를 제대로 내고 공영개발을 하라고 주문하지요. 이어 아파트 선분양 특권제를 폐지하고 분양 원가 공개를 의무화와 고위공직자는 부동산 백지신탁제를 도입해서 부동산투기에서 손을 떼어야 한다고 제안하지요.




부동산 5적 때문에 한국에서 살기 힘들다

 

좁은 국토에 인구가 많아서 땅값이 비싼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요. 하지만 한국보다 인구밀도가 13배나 높은 싱가포르는 10명 중 9명이 내집을 갖고 있지요. 싱가포르 정부는 한국처럼 이윤을 좇는 건설업체에게 주택공급을 맡기지 않고 직접 재정을 부담하고 국민과 직거래 하여 가장 싼 값에 집을 제공하였기 때문이죠.

 

부동산 가격은 저절로 오른 게 아니라 뚜렷한 목적을 갖고 가격을 끌어올리는 집단이 있고 이를 뒷받침하는 장치와 체제가 작동한 결과지요. 이 집단은 건설 재벌, 부동산 관벌, 정치인, 보수언론, 관변 학자들이며 부동산5적이라 부르지요. 한국 뇌물 사건의 55%는 건설 관련 부패이고 공직자가 물러나는 주된 이유도 부동산 관련 비리와 투기 때문이지요.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동산 계급 사회는 잘못된 정책 때문에 만들어진 인재지변입니다.
최소한 땅과 집은 투기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소박한 상식만 지켰어도 국토의 70%, 주택의 97%가 투기에 노출되어 국민다수가 투기의 먹이 사슬에 고통 받는 비극만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죠.


 

지금도 인간다운 주거 생활의 최저 기준에 미달하는 집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1000만 명이나 됩니다. 부동산극빈층도 160만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하방, 옥탑방, 쪽방, 움집 심지어 동굴에서 주거권을 보장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동산 투기의 피해로 사람의 품위를 유지할 수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같은 사회구성원들이 있습니다.

 


작년 박은경 환경부 장관 후보가 '땅을 사랑했을 뿐 투기가 아니다.' 발언을 기억해봅니다. 얼마나 공직자들이 썩어있는지 알 수 대목입니다. 어떻게 동시대를 살아가는 서민들을 사랑하지 않고 땅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정부는 부동산 거품이 빠지려고 하자 부동산에 돈을 몰아넣으려 하고 있습니다. 책을 덮으며 이런 한국에서 살아야 하는지 가슴이 갑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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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MB氏를 부탁해 - 집단지성,공영방송을 말하다
집단지성 엮음 / 프레시안북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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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부터 시끄럽지요. 보신각영상에 시민들 반응을 빼버린 KBS를 보면서 걱정이 커집니다. 시민들의 외침이 깨끗하게 지워진 채 오세훈 서울시장의 이야기가 TV로 전달이 되었지요. KBS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지워버려도 상관없고 높으신 오세훈 시장님 얘기를 온전히 전하는 일이 중요했겠지요. ‘알아서 기는’ KBS를 보면서 대표가 바뀐다는 게, 권력이 압박한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느껴지네요.


@오마이뉴스 권우성

 

이미 정권은 방송장악을 하려고 작심을 했지요. 촛불집회도 불온한 <PD수첩>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믿고 있는 그들에게 골치 아픈 얘기 자꾸 꺼내는 MBC는 눈엣가시겠지요. 방송때문에 정권을 두 차례나 빼앗겼다고 믿는 그들은 어떻게 하든 방송을 손에 쥐려고 하고 있습니다. MBC를 권력나팔수로 만드는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하자 언론노조가 총파업을 실시했고 야당에서 반대하고 있습니다. 법안이 통과되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빤하니까요.

 

지배신문언론이 MBC가 문제 많으니 사영화를 하자고 졸라댑니다. 그래? 하면서 정부는 준비한 듯 대응하고 어떠한 공청회나 정당한 절차 없이 방송법개정안을 통과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심각한 상황이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조용합니다. 일상에 바쁜 시민들이 MBC사영화가 왜 문제인지 알기란 쉽지 않으니까요. <MBC, MB氏를 부탁해>[2008. 프레시안’북]에 MBC를 왜 공영방송으로 지켜야 하는지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방송장악하여 장기집권 하겠다고는 못하겠고…

 

지금 정권이 자주 쓰는 ‘잃어버린 10년’이라 표현이 있듯이 10년 동안 대통령하지 못한 탓을 방송에게 돌렸지요. 시대가 달라지고 사람들 생각이 바뀐 걸 느끼지 못하고 자신들과 다른 소리를 내는 방송에 이를 갑니다. 정권과 언론은 불가근불가원이 기본인데도 인수위 때부터 ‘프레스 프렌들리’를 내세웠던 정권이었지요. 그답게 정권을 쥐자마자 낙하산부대를 투입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언론을 묶으려 하고 있습니다.

 

방송을 장악해 장기집권을 꾀한다고 솔직하게 얘기는 차마 못하겠고 시청자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부분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사영화 근거로 내세우는 논리는 첫째, 한국에 공영방송이 너무 많다는 것, 둘째, MBC가 그간 너무 편파방송을 했고 조직 경영의 생산성이 낮은 것입니다.

 

논리는 너무 유치하고 아전인수로 자료들을 해석하고 있지요. 미국과 영국, 일본의 사례를 들며 해외선진국의 경우 1공영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하지요. 물론 이들 세 나라가 PBS, BBC, NHK라는 1공영 다민영의 방송 구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각국의 정치, 경제, 언론의 역학관계와 사회발전의 단계가 다르다는 사실을 무시한 형식 논리일 뿐 아니라 복수의 공영방송 체제를 갖는 나라도 많다는 걸 얘기 안하고 있지요.


@오소영,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MBC가 편파방송을 했다? 그럼 ‘촛불도 반 잘못했고, 엉터리 졸속협상도 반 잘못했어요,’라고 방송을 해야 그들은 속 시원할까요?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냐고 문제제기를 한 <PD수첩>이 그럼 ‘정부가 훌륭하게 협상을 맺었습니다. 미국산 쇠고기 마음껏 드셔도 좋습니다.’라는 방송을 해야 그들은 흐뭇할까요?

 

조직경영의 생산성이 낮다? 공영방송이 시민들 대상으로 장사하는 곳인지요. 그리고 MBC본사는 최근 4년 동안 400억 이상, 2007년에는 1142억이라는 순이익을 남겼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큰 이득을 올려야 그들은 만족을 할까요. 왜 우리의 경영실적을 조중동에서 걱정해주는지 모르겠다는 <북극의 눈물> 조준묵 PD의 얘기가 떠오릅니다.

 

사탄의 무리와 명박산성

 

언론은 권력자에게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권력은 가만히 내버려두면 썩을 수밖에 없기에 감시하고 쓴 소리를 해줘야 합니다. 언론이 권언유착에서 벗어나 파수꾼 역할을 해주는 것이지요. 이 소리가 듣기 싫을 수밖에 없겠지만 권력은 감수해야합니다. 그것이 정상 언론과 정상 정부의 관계지요.

 

국정홍보를 맡고 있는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이 촛불집회를 비난하면서 과장과 거짓으로 무장한 세력, 심지어 사탄의 무리 운운한 것을 보면서 섬뜩한 느낌마저 듭니다. 동시에 청와대의 전면적 인적 쇄신이 시급하다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MBC뉴스데스크> 2008년 6월 8일

 

촛불집회를 보면서 사탄의 무리라고 하는 청와대 높으신 분들에게 보통 시민이라면 당연히 섬뜩한 마음이 들지요. 시민들의 마음을 콕 집어 대신 말해주는 게 언론이지요. 그러나 권력자들은 시민들 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방송보고 조용하라고 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시민들과 얘기하고 싶어 하는지 ‘명박산성’이 잘 보여줍니다.

 

지금까지 ‘참 잘했어요.’ 도장만 받다가 잘못했다고 반성문 쓰라니까 토라진 아이처럼 굴고 있습니다. 권력자들은 일을 잘 하여서 ‘참 잘했어요’ 소리를 들으려 하기보다 방송의 목을 비틀어서 ‘잘했다’는 얘기를 들으려 합니다. 사탕발림 아부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시민들의 진심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일부 불손세력의 조종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자신들과 쿵짝이 잘 맞는 조중동에게는 밥상을 차려주려 합니다. 자율과 시장원리라는 그럴듯한 논리로 당근을 내놓았지요. 반면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비판을 하는 언론과 인터넷을 향해서는 관리와 통제라는 채찍을 꺼내들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사이버모욕죄가 통과되면 소급해서 처벌할까 괜한 걱정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쉽게 꼬드기면 넘어가는 멍청한 대중?

 

정부가 언론과 인터넷을 어떻게 여기는지 보여주는 일들이 많았지요. 그 가운데 인상 깊은 거 하나를 소개합니다. 2008년 5월초, 문화부 홍보지원국 소속 공무원들에게 교육한 파워포인트 자료 내용을 <한겨레21>712호에서 공개했습니다.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인터넷)게시판은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의 한풀이 공간이지만 정성스런 답변에 감동하기도 한다. 멍청한 대중은 비판적 사유가 부족하므로 몇 가지 기술을 걸면 의외로 쉽게 꼬드길 수 있다. 붉은 악마처럼 그럴듯한 감성적 레토릭과 애국적 장엄함을 섞으면 더욱 확실하다.”

 

“이해찬 세대의 문제는 그야말로 아무 생각도 없고 원칙도 없다는 것이다. 학력이 떨어지니 직업전선에 더욱 급급하고, 하다 안 되면 언제든 허공에 주먹질할 것이다. 최루탄 3발이면 금방 엉엉 울 애들이지만 막상 헤게모니를 가진 집단이 부리기엔 아주 유리하다.”

 

대중을 선동 가능한 대상으로 보고 조작과 세뇌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어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끔찍합니다. 이날 교육에서는 마지막으로 언론 대책과 관련해 “절대 표 안 나게 유학과 연수, 정보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한 주요 기자와 프로듀서, 작가, 행정직의 관리가 필요하다”며 “소프트 매체에 대한 조용한 (취재) 아이템 제공과 지원도 효과적”이라며 방송장악 흑심을 드러냈습니다.

 

그럼 문화부 홍보지원국 소관은 누구일까요. 바로 너무 이름 높으신 신재민 차관입니다. 그는 <주간조선>편집장과 <조선일보>부국장을 지낸 뒤, 1990년대 후반 미국 워싱턴 특파원 재직 시절, 미국에서 체류하고 있던 이명박 대통령과 인연을 맺지요. 대선직전부터 ‘이명박의 입’으로 일하던 그는 문화부 2차관이 됩니다. 그를 보면서 이 정권이 얼마나 언론을 통제하려고 하는지 느껴집니다.

 

문제는 ‘이명박의 입’과 ‘문화부 2차관’은 역할은 달라도 한참 다르다는 사실이다. 2008년 2월 29일 문화부 차관으로 임명된 신 차관은 최근까지도 ‘이명박의 입’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가 히틀러를 위해 언론 장악에 전력을 기울였던 것처럼. - 책에서

 

다시는 땡전뉴스를 보고 싶지 않다

 

누가 지금 MBC사영화를 바라고 밀어붙이고 있나요. 과연 누구에게 이득이 될까요? 곰곰 생각해봅니다. 지금도 지배언론에서는 MBC사영화를 반드시 해야 된다고 날마다 떠들어 대고 있습니다. 정녕 MBC를 걱정하고 공공 이득을 위해 그런 말을 하는 걸까요? 지금까지 조중동이 이야기하는 내용이 얼마나 시민들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MBC는 힘이 있습니다. 시민들이 거는 기대와 두터운 신뢰를 갖고 있지요. 거기다 영상이 주는 파급력은 대단하지요. 쇠고기 수입협상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하기 전이었던 2007년까지 <프레시안>에서 광우병을 다룬 기사가 200개 넘습니다. 사람들은 그런가보다 하다가 <PD수첩> ‘긴급취재!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 한방에 민심이 들끓게 되지요. 그만큼 방송이 갖는 힘은 대단합니다.

 

방송이 힘이 큰 만큼 특정 세력 밑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방송은 공공재로 시민이 주인입니다. <PD수첩>의 약자 PD는 프로듀서(Producer), 또는 프로그램 디렉터(Program Director)가 아니라 Power of Democracy라고, 미디어 민주주의가 걸린 문제이고 결국 MBC수호는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일이라는 김민웅 교수의 지적을 곱씹어봐야 합니다.

 

80년대, 9시가 되면 ‘삐~삐~삐. 땡,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로 시작하는 뉴스가 날마다 나왔지요. 이른바 ‘땡전뉴스’지요. 그때 언론이 앞 다투어 충성하던 위대한 지도자 전두환이었습니다. 불과 20년이 조금 지난 오늘날, 전두환은 국가전복 우두머리이고 수천억을 해먹었지만 통장에는 30만원밖에 없으니 배 째라는 ‘호쾌한 장군’이십니다.


다시는 땡전뉴스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라디오에서 ‘안녕하십니까, 대통령입니다.’를 하듯이 MBC를 잡게 되면 어떻게 될지 짐작이 됩니다. ‘땡이뉴스’가 벌어질 수 있습니다. 벌써 KBS는 정권에 쫄아서 새해부터 시민들의 외침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만큼 정치권력은 무서우므로 경계해야 합니다. MBC는 MB씨 당신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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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ssex 2009-06-22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독재정권아래 살고 있지만,시대가 바뀌고 시민의식이 예전과 달라진 시점에서
시민들이 순수하게 비판하는 목소리들조차도 못내고, 그저 외면하고 침묵만 하고 있을 수 없지 않나요~!!
사이버모욕죄 같은건,,, 현정부와 반대적입장에 있다고 해서 김대중,노무현 전대통령에게 모욕적으로 비난하고 악담하는 자들에게나 해당되야 할겁니다.

좋은책 2009-06-29 12:56   좋아요 0 | URL
선생님 말씀처럼 침묵해서는 안 되지요. 비온 뒤에 땅이 굳듯이 지금 겪는 부조리와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훗날 한국을 더 튼튼하고 아름답게 해주리라 믿습니다. 선생님부터, 그 둘레부터 바꾸고 변화를 일궈주세요~~
 
탐욕의 시대 -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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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치료가능한 병으로 죽는 어린이가 날마다 30,000명이지요. 3초마다 한 아이가 죽고 있어요. 지금 이 글을 보는 순간에도 몇 아이가 죽었습니다. 5세 미만의 어린아이들 중에서 1천만 명 이상이 해마다 영양 결핍이나 각종 전염병, 오염된 식수, 비위생적인 환경 때문에 목숨을 잃고 있지요.

 

아이만 죽는 것은 아니지요. 굶주림과 영양 부족 관련 병으로 죽는 사람이 3,600만 명이지요. 이 뿐 아니라 20억이 넘는 인구가 하루에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성인 8억 5천만 명이 문맹이며, 학교를 못 다니는 아이가 3억 2.500만 명에 달하는 세상이에요.

 

사람들은 굶주리는 세계를 알고 있지요. 하도 많이 들어서 지겹게 느껴질 수 있을 정도로. 너무 큰 숫자라 잘 와 닿지 않아 심각하지 않게 쳐다보는 사람도 있겠지요. 세계 7대 강국이 되려고 허리띠를 졸라맸기에 ‘가난한 나라? 어쩔 수 없지.’하며 더 잘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들도 열심히 일하면 잘 살겠지.’라며 잊고 살아갑니다.

 

잠깐 시간을 내어 봅니다. 한국도 조금만 고개를 돌려보면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이 있었지요. 보릿고개도 겪었던 한국에서 굶주림은 남 일이 아니기에 관심을 가져봅니다. 생각해보면 아주 이상합니다. 예전부터 제3세계에는 굶어죽는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고 언론에서 떠들어 되었고 모금 운동도 있었지요. 그렇지만 그들도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세월이 흐른 오늘날, 굶주림은 줄지 않고 오히려 늘고 있습니다.

 

그들을 먹일만한 식량이 없는 걸까요? 유엔 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현재 세계의 농업 생산력으로는 120억 명을 제대로 먹일 수 있다고 합니다. 식량도 충분하데 왜 굶어죽고 있을까요. 그들이 게으르고 못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라서 그럴까요? 제3세계 대부분 사람들은 하루 종일 일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밥 1끼 먹기도 힘드니까요.

 

식량은 충분한데 도대체 왜 굶어죽는 걸까?

 

그럼 도대체 왜 사람들은 굶어죽는 걸까요. 충분히 먹일 수 있는 식량이 나오고 있는데 도대체 왜? 이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푸짐하게 먹고 잔뜩 남긴 음식들이 떠오릅니다. 어떤 이는 굶주리는데 누가 음식을 버리면 답은 빤합니다. 누가 어떤 이가 먹을 음식을 빼앗은 것이죠.

 

세계를 지배하는 약육강식 질서에 공범이라는 깨달음은 괴로운 일이지요. 그냥 소시민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는데 왜 공범이냐고 되물으신다면 이렇게 말을 하겠습니다.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자기 할 일만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누군가 죽고 있는데 자기만 편안한 것이 옳은 일일까요.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지 않고 침묵하는 일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너무 뜨거운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괴롭기에 무시하거나 아니면 합리화 하지요. ‘신자유주의와 약육강식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야.’라고 말하며 그들을 외면하거나 아프리카 사람들은 게으르다, 동남아 사람들은 부패했다, 남미사람들은 무책임하다 등등 굶어죽는 사람들을 낮잡아 보는 이유를 대지요. 또는 한국 사람들 가운데에도 못 사는 사람이 있으니 국내에나 신경 쓰라고 말하면서 세계를 잊으려 합니다.

 

슬픕니다. 그리고 부끄럽습니다. 너무 길들여져서 살고 있었지요. 유엔 특별식량조사관 장 지글러가 쓴 <탐욕의 시대-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2008. 갈라파고스]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가슴이 아리게 하지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아들에게 부조리한 현실을 읊어주던 지은이는 <탐욕의 시대>에서 왜 더 가난해지고 있는지 파헤쳐요.

 

신자유주의를 하는데 더 가난해지는 나라들

 

기아와 궁핍은 제3세계에 그림자처럼 달라붙어서 떼어지지 않습니다. 요즘, 가난한 자들이 느끼는 압박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극심한 상황입니다. 반면, 가장 부유한 1퍼센트의 인구는 가장 가난한 인구 57퍼센트의 수입을 모두 합한 액수의 돈을 벌고 있습니다. 불평등한 구조가 한 국가를 넘어서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에게 신자유주의를 하라고, 이렇게 해야 우리처럼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힘 있는 나라들은 얘기합니다. 과연 가난한 나라들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고 좋은 나라가 되길 바라기에 신자유주의를 시킨다고 믿으시는지요. 그럴싸한 이론들을 가져오고 이리저리 압박하여 어쩔 수 없이 신자유주의를 하게 합니다. 결과는? 1980년대보다 더 굶어죽는 사람이 많아졌고 가난한 국가의 숫자가 늘어났습니다.

 

물론 세계 국가들은 모여서 좋은 일도 많이 하지요. 대인지뢰퇴치에 20억 달러를 쓰고 난민정착에 50억 달러, 영양실조와 기아퇴치에 190억 달러를 투자하고 있습니다. 박수를 쳐줘야 할까요? 군비지출 총액이 1조 달러에 이른다는 얘기에 박수가 멈춰집니다. 21세기 들어서도 왜 전쟁이 끝이 나지 않는지, 애꿎은 ‘악의 축’을 만들어서 전쟁을 벌이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빚, 아무리 갚아도 헤어날 수 없는 지옥

 

전쟁은 제국주의 국가들을 지탱하게 하는 도구이면서 존재이유이지요. 전쟁은 워낙 많이 다뤄진 얘기기에 지은이는 다른 것을 꼬집습니다. 바로 빚입니다. 빚은 경제 발전을 가로막고 국민들을 노예 상태에 붙잡아두지요. 빚은 열심히 땀 흘려 번 것을 몽땅 빼앗아가서 사람들을 굶주리게 하는 범인입니다. 사람을 파괴하는 끔찍한 괴물이지요.

 

힘 있는 나라들은 가난한 나라들 부채 탕감을 해줍니다. 300억 달러나 해주지요. 그런데 그들이 걷어가는 돈은 얼마나 될까요. 무려 3,700억 달러입니다. 2004년도 통계이기에 지금은 더 늘어났겠지요. 아무리 빚을 갚아도 이자는 꼬리에 꼬리를 물며 늘어갑니다. 세계에서 고리대금업을 하는 셈이지요.

 

그들은 이익의 극대화라는 명분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외면하지요. 빚은 갈수록 늘어 2004년에 26,000억 달러에 이르렀습니다. 돈이 벌리는 일이라면 영혼까지도 팔아서 할 그들이기에 지은이는 그들을 ‘신흥봉건제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봉건시대가 다시 왔다고 진단하지요. 거대다국적회사들을 봉건제후들라고 이르며 국가도 쥐락펴락하고 IMF, IBRD, WTO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며 통탄하지요.

 

커피를 많이 마시는 오늘날, 커피 생산 농부들은 돈 좀 벌었을까?

 

하나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한국 사람들이 이렇게 커피를 좋아하는 걸 어떻게 눈치 챘는지 봇물 터지듯 커피점이 들어섰습니다. 어느새 한국 사회 문화로 자리 잡을 만큼 커피는 자연스러운 기호식품이 되었지요. 다른 나라도 비슷하지요. 이렇게 커피소비가 늘어났으면 그만큼 커피 만드는 농부들은 돈을 벌었을 거라 짐작이 됩니다. 소비가 늘면 가격이 오르니까요.

 

당연히 커피회사들은 떼돈을 벌었지요. 종류 불문하고 전 세계에서 생산하는 커피 원두의 45% 이상을 산 5대 기업, 네슬레, 사라 리, 프록터 앤드 갬블, 치보, 그리고 크래프는 매출액과 영업이익이 엄청나게 증가했지요. 2000년, 네슬레는 26% 상승했고 치보는 47% 올랐지요.

 

그렇다면 농부들은? 재앙이 몰아쳤지요. 1kg에 3달러에서 86센트로 떨어졌지요. 재난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가 없지요. 100년 만에 처음이라고 할 정도로 갑자기 폭락했기 때문이죠. 농가들은 무너지고 도시 빈민으로 오게 되지요. 이런 상황에서 어떤 생활을 할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커피 유통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소비자들이 커피 소비를 위해 700억 달러를 썼는데 커피생산 농부들이 수출로 벌어들이는 돈은 55억 달러나 줄어듭니다. 커피생산에 전념하던 농부들은 수확을 포기하는 사태가 잇달아 나오지요. 왜 이런 일이 생겨났냐고요? 지은이는 옥스팜 설명을 빌려서 설명하지요.

 

지금까지는 커피국제협약으로 커피생산국에게 안정된 수입을 보장해주었지요. 왜냐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수백만, 수천만 명에 이르는 가난한 커피 생산 농부들이 공산주의에 빠지면 곤란하니까요. 그러나 냉전이 무너졌지요. 더 이상 커피국제협약은 쓸모가 없어졌지요. 오로지 강자, 5대 다국적기업들에게 복종해야하는 새로운 법칙이 생겨났고 원가 생산이하로 가격을 떨어뜨려 버립니다.

 

빚더미에서 절망하는 나라를 구할 방책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벌어진 일처럼 꾸미면서 이렇게 ‘봉건제후국’들은 약자들을 짓밟습니다. 생산가격은 갈수록 떨어지는데 소비자 가격은 날로 비싸집니다. 가운데에서 ‘경쟁력’있는 봉건제후국이 착취하기 때문이죠. 빚더미에 앉히고 착취의 굴레를 씌워버립니다. 그리고 노예처럼 부려먹으며 그 위에서 떵떵거리는 것이죠.

 


절망의 끝에 몰린 나라들은 빚에 허덕이며 죽음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오늘날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은이는 간단한 제안을 하지요. 모든 빚을 탕감시켜주라고. 그 빚 없애줘도 부자들은 여전히 부자로 남아있고 가난한 사람들이 약간 덜 가난해질 뿐이라고.



 

빚을 없애줘도 됩니다. 조건 없이 아주 덜어주더라도 산업사회의 경제와 그 경제체제에서 사는 사람들이 복지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을 겁니다. 지난 10년 동안 제3세계의 122개국에서 빚에 대한 이자와 원금 상환을 위해 채권국가의 은행으로 송금한 총 금액은 채권국 국민총생산의 2퍼센트에도 못 미칠 정도로 작은 돈이기 때문이죠. 또한 지은이는 여러 예를 들어 주지요.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전 세계 증권거래소에 몰아친 위기로 주가가치가 엄청나게 떨어지면서 자산이 사라졌지요. 이 기간 동안 증권거래소에서 없어진 가치는 제3세계 122개국 외채를 모두 합한 돈보다 무려 70배나 컸지요. 또한 2007년 8월 초에 금융위기가 또 와서 3조 달러가 사라졌지만 아무 이상 없이 잘 넘어갔지요. 그런데도 빚을 없애주지 않을까요?

 

이들은 어느 정도 합리적인 은행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돈으로 이 세상의 민중들을 지배하고 착취하겠다는 논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 책에서

 

‘추악한 빚’이 가득한 세상, 지은이는 혁명을 얘기한다

 

전 세계에 절대 빈곤층에 속하는 사람은 약 20억 명이지요. 하루에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 그들은 왜 이러한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을까요. 바로 봉건제후들의 마름, 콤프라드로(매판세력)가 있기 때문이죠. 겉으로는 자국민을 위하는 척하면서 그들은 나서서 민중들을 현혹하고 수탈하지요. 매국노라 할 수 있는 그들은 당당하게 권력을 쥐고 있고 민중들은 그들에게 시달리지요.

 

추악한 빚으로 가득한 세상을 보며 지은이는 분노합니다. 거리에서 굶어죽는 수많은 아이들을 보면서 지은이는 평생 흘릴 눈물을 다 쏟지요. 그리고 “기아는 절대로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아니다. 기아로 죽은 어린아이는 살해당한 것과 마찬가지다.”라며 울부짖습니다. 책장이 어렵게 안 넘어가는 부분들이 있는데 지은이가 얼마나 괴로워하면서 글을 썼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거기는 절절하게 꼭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나오지요.

 

“타인에게 가하는 비인간 행동은 내 안에 깃들어 있는 인간성을 말살시킨다.”는 말을 하는 점잖고 교양 있는 학자는 혁명과 전복을 꾀합니다. 극한점에 도달하여 더 이상 나빠질 수 없기 때문이죠.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 책에서

 

우연히 한국에서 태어나 호강하며 살았던 사람들에게 이 책은 너무 뜨겁습니다. 혹시 방글라데시에서 태어났다면, 에티오피아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상상을 해봅니다. 여전히 반공정신이 시퍼렇게 살아서 민중들의 창조성을 잡아먹는 한국에서 이 책은 ‘불온도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책을 붙잡은 두 손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데워집니다. 이 엉망진창 세상에서 나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는 세태가 눈물겹게 슬픕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L'emire De La Honte입니다. 부끄러운 제국이란 뜻이죠. 어느새 부끄러움은 잊어버린 사람들, 경제동물이 되어 숫자놀이에 정신없는 오늘날, 삶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왜 불행하게 살아가는 걸까요. 책을 읽으며 깊게 고민해봅니다. 마지막으로 파블로 네루다의 말을 전합니다.

 

“그들이 꽃이란 꽃은 모조리 꺾을 수 있어도 봄의 주인은 결코 될 수 없다.” - 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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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사 - 칼라하리 사막의 !쿵족 여성 이야기
마저리 쇼스탁 지음, 유나영 옮김 / 삼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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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늘 궁금한 물음이지요. 인류의 선조들이 진화해온 역사까지 더하면 인류는 3백 만년에 달하는 시간동안 수렵채집생활을 하였어요. 인류사에서 거의 99퍼센트에 가까운 시간이지요. 농업사회는 1만 년쯤, 산업사회는 겨우 200년밖에 안 되었지요. 수렵채집 생활방식은 이제 거의 사라졌지만 인류의 특질은 수렵채집을 하며 이루어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기에 수렵채집생활은 여전히 의미 있지요.

 

그렇기에 인류학자들은 수렵채집부족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의 과거와 뿌리를 연구하였지요. 그 가운데 칼라하리 사막 도베지역에 사는 !쿵족은 관심을 끌지요. 지구에 몇 남지 않은 수렵채집생활을 하고 있으며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인류의 가장 오래된 조상의 직계 후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죠. !쿵족은 영화 <부시맨> 때문에 널리 알려진 부족이지요. 그러나 부시맨은 낮잡아 부르는 말로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쓰지 않지요.

 

먼저 !쿵족에서 !쿵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짚고 넘어가죠. !음은 치조구개음(齒槽口蓋音)으로 사람들이 아이를 어를 때 혀끝으로 입천장을 차면서 ‘딱딱’하고 내는 소리와 비슷해요. !쿵족은 딱쿵족이라고 발음하면 정확하지는 않지만 비슷할 거예요.

 

지은이 마저리 쇼스탁은 ‘딱딱’ 소리를 내며 수렵채집생활이 사라지기 전 !쿵족의 삶으로 들어가지요.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채집 여행에 함께하지요. 그들과 같은 오두막에서 기거하며 그들이 먹는 황야음식만을 먹고,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그들이 논쟁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기록해요. 그리고 여러 !쿵족 사람들을 인터뷰하여 녹음하지요. 그렇게 자료를 모은 뒤 10년에 걸쳐 번역하고 정리하여 <니사>를 내게 되어요.

 

1980대 중반에 나와 20만 부 이상 팔리며 화제를 낳았던 <니사>[삼인. 2008]가 한국에서 나왔네요. 주인공 니사는 전통 수렵채집생활을 하는 쉰 살 !쿵족 여성이지요. 책은 니사가 지은이에게 털어놓는 이야기와 니사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지은이가 !쿵족 생활양식을 설명한 민족지로 이루어져 있어요. 민족지란 연구하려는 사회에 인류학자가 들어가 자료를 수집하여 그 문화의 여러 모습을 쓴 보고서를 말해요.

 

니사, 성해방을 부르짖은 여성주의자들을 열광시키다.

 

주인공 니사는 상당히 흥미로운 인물이에요. 니사가 걸고 푸지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참으로 생생하고 재미있어요. 가족에 대한 기억, 성에 눈뜰 때, 결혼생활, 자식이 죽은 일, 수많은 애인들과 사랑을 나눈 일, 늙음에 대해 두런두런 알려주지요. 마치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조카딸에게 인생을 가르쳐 준다고 생각하고 자기 이야기를 맛깔나게 늘어놓는 듯싶어요.

 

그 가운데 지은이는 니사를 비롯한 !쿵 여성들이 ‘여성으로 산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집중해요. 지은이가 여성주의에 영향를 받고 뚜렷한 문제의식을 품고 있기 때문이죠. 사랑, 결혼, 섹슈얼리티, 일, 정체성 등등 여성성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씨름하는 젊은 여성이라고 스스로 정의하죠.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쿵 여성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물어보고 관찰함으로써 여성을 따져보네요.

 

지은이의 뜻에 완전히 꼭 들어맞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서구 여성주의자들이 추구한 독립과 평등을 !쿵족에서 찾지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수렵채집을 하는 !쿵족 여성의 삶은 인간 본연의 모습이 그러하다고 설명할 증거가 될 수 있지요. 책을 읽어보면 현대의미에서 양성평등하다고 볼 수 없는 면이 많이 있지만 분명히 여성을 억압하는 제도와 사람들 생각이 덜하니까요.

 

지금껏 내 애인들 얘기를 했지만, 다 털어 놓은 게 아니야. 그 수가 내 숟가락 발가락을 합친 것만큼이나 많았거든. 나는 나쁜 년이야. 애인 하나 없는 자네와는 다르지. 여자가 되었으면 말이지,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있기보다는 애인을 사귀게 마련이거든. 한 남자가 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어. 한 남자하고만 있겠다고? 우린 그렇게 안 해. 자네가 보기에는 남자 하나로 충분할 것 같아? - 책에서

 

자유롭게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결혼을 한 뒤에도 애인들을 거느리는 니사의 모습은 서구 여성주의자들을 열광시켰지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감정과 성욕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니사에게 짜릿함을 느끼죠. 성 억압을 당하고 있던 여성들은 당연하게 열렬한 반응을 보였고 책 <니사>는 인류학과 여성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꼭 읽어야 할 책이 되었지요.

 

1970~80년대는 여성해방운동이 크게 번지면서 굳어져 있던 여성 노릇을 재검토하며 구성된 성, gender비판이 한창이었지요. 그 흐름에 맞춰서 !쿵족 여성들의 삶이 어떠한지를 밝힌 <니사>는 역사 시대 전 수렵채집생활에서 여성의 삶이 어떠했는지 드러나는 좋은 자료가 되지요. 여성을 억압하는 현대 문화를 반성하는데, 힘을 싣는 책이네요.

 

책 <니사>가 갖고 있는 여러 의미들

 

수렵채집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밝혔다는 점에서 대단한 책이지만 인류정치학에서도 큰 의미가 있지요. !쿵족은 아프리카 토착민으로 글자체계가 없어서 그들의 생각이 서구사회에 전달되기란 불가능하지요. 그런데 <니사>는 토착민에다 문맹자라는 이중 억압을 넘어서 그들의 이야기를 전했어요. 거기다 성 억압까지 넘어 여성의 목소리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지요.

 

또한, 지은이에게 인상 깊은 것이 백인 특권층으로서 자기 성찰을 끝없이 한다는 거예요. 고유문화의 보존을 대변한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토착민 문화를 오염시키는 백인인류학자의 난처한 상황과 죄의식을 예민하기 적어 놓았어요. 거기에 니사를 비롯한 !쿵 사람들과 삐거덕거리면서 발전한 관계를 솔직하게 옮겼지요. 그 과정에서 자신이 느낀 갈등과 회의, 저지른 실수까지 고스란히 털어놓네요.

 

이렇게 연구자와 화자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 넘는 과정을 밝히는 것 자체가 구술생애사 연구에서 중대한 작업이에요. 연구자와 화자는 서로 불평등한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지요. 연구자는 무의식중에 듣고 싶은 말을 꾈 수 있고 화자는 연구자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려는 유혹이 있지요. 그렇기에 지은이의 감정변화와 성찰은 니사의 이야기를 더 큰 맥락에서 이해하게 돕지요. 인류학자와 현지인의 미묘한 권력관계를 이처럼 섬세하게 묘사한 글은 드물지요.

 

그럼에도 문화진화론 관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으며 인종 편견이 일정 부분 있다고 비판받지요. !쿵족이 과거 서구 제국주의에 입은 피해를 인식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쿵족을 역사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존재로 이상화하는 모순에 빠졌다는 지적도 있다는 점, 무시할 수 없지요.

 

무엇보다 <니사>는 성평등을 생각하게 해요. 여성이 하는 일과 살아가는 방식은 각 문화권마다 상당히 다르지만 대다수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낮은 자리에 있고 여성의 활동은 남성의 활동에 비해 그 가치가 낮게 평가되어요. !쿵족도 모계사회가 아니기에 어느 정도 남성이 더 중요한 권위를 차지하고 있지요. 그럼에도 서로를 착취하지 않고 놀라울 정도로 성 평등을 이루며 함께 살아가는 모습은 한국 사회에 일러주는 게 많네요.

 

21세기 현대도시문명에서 남성이 바라본 니사

 

모든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재평가 받게 되지요. 21세기, 한국에서 살아가는 남성으로서 봤을 때 니사는 재미있는 인물이에요. 수렵채집사회에 있는 성차와 거기에 따른 행동들은 상당히 흥미로우며 남녀 권력 관계와 도시문명에서 구성된 성차를 톺아보게 해요. 그러나 이미 몸에 밴 성에 대한 인식은 니사를 좋게만 볼 수 없게 하네요. 책을 번역한 유나영씨는 옮긴이의 말에다 이렇게 적었네요.

 

솔직히 말해서 니사는 개인적으로 각별히 친하게 지내고픈 사람은 아니다. 그녀는 어이없을 정도로 방종하고 욕심 많고 이기적인 면도 엿보이는 데다 시끄럽게 떠들면서 나대고 다니는 여자다. - 책에서

 

지은이 쇼스탁도 이러한 니사의 성격을 좀 더 도덕을 지키고, 도시인들에게 호감 가는 인물로 포장하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느꼈다고 고백해요. 니사가 도시문명 사람들의 도덕 기준을 크게 위반하지 않아야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미화되지 않았기에 기존 남녀 성역할을 정직하게 뒤엎을 수 있지요. 니사를 안 좋게 보는 것은 그미의 성격 탓만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착한여자’ 강박관념이 있다는 반증이니까요.

 

이것저것 대가를 요구하며, 기억력과 표현력이 뛰어난 니사는 ‘순진무구한 야만인’이란 신화를 부수지요. 나아가 남편 몰래 많은 애인과 잠자리를 갖는 그의 행동을 보면서 ‘여성의 성을 통제’하는 문명을 돌아보게 하지요. 뒤집어 생각하면 !쿵족 남성들도 니사가 하는 것보다 더 자유롭게 연애를 하는데 유독 니사가 털어놓는 자유분방한 연애만 불편하게 받아들인 자신의 성윤리를 꼬집을 수 있게 되네요.

 

오늘날, 순수한 수렵채집생활을 유지하는 !쿵족은 거의 사라졌지요. 다른 토착민들과 마찬가지로 !쿵 사람들도 과거 수백 년 동안 제국주의에 짓밟히고, 살던 땅을 빼앗기지요. 사냥기술을 지닌 세대는 많이 줄어들고 농사를 지으며 정부의 배급에 의존하는 횟수가 늘어나지요. !쿵족의 수렵채집 생활은 이제 책으로만 만날 수 있지요. <니사>를 읽으며 머나먼 과거, 인류가 수렵채집 하던 때를 상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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