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시대 -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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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치료가능한 병으로 죽는 어린이가 날마다 30,000명이지요. 3초마다 한 아이가 죽고 있어요. 지금 이 글을 보는 순간에도 몇 아이가 죽었습니다. 5세 미만의 어린아이들 중에서 1천만 명 이상이 해마다 영양 결핍이나 각종 전염병, 오염된 식수, 비위생적인 환경 때문에 목숨을 잃고 있지요.

 

아이만 죽는 것은 아니지요. 굶주림과 영양 부족 관련 병으로 죽는 사람이 3,600만 명이지요. 이 뿐 아니라 20억이 넘는 인구가 하루에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성인 8억 5천만 명이 문맹이며, 학교를 못 다니는 아이가 3억 2.500만 명에 달하는 세상이에요.

 

사람들은 굶주리는 세계를 알고 있지요. 하도 많이 들어서 지겹게 느껴질 수 있을 정도로. 너무 큰 숫자라 잘 와 닿지 않아 심각하지 않게 쳐다보는 사람도 있겠지요. 세계 7대 강국이 되려고 허리띠를 졸라맸기에 ‘가난한 나라? 어쩔 수 없지.’하며 더 잘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들도 열심히 일하면 잘 살겠지.’라며 잊고 살아갑니다.

 

잠깐 시간을 내어 봅니다. 한국도 조금만 고개를 돌려보면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이 있었지요. 보릿고개도 겪었던 한국에서 굶주림은 남 일이 아니기에 관심을 가져봅니다. 생각해보면 아주 이상합니다. 예전부터 제3세계에는 굶어죽는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고 언론에서 떠들어 되었고 모금 운동도 있었지요. 그렇지만 그들도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세월이 흐른 오늘날, 굶주림은 줄지 않고 오히려 늘고 있습니다.

 

그들을 먹일만한 식량이 없는 걸까요? 유엔 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현재 세계의 농업 생산력으로는 120억 명을 제대로 먹일 수 있다고 합니다. 식량도 충분하데 왜 굶어죽고 있을까요. 그들이 게으르고 못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라서 그럴까요? 제3세계 대부분 사람들은 하루 종일 일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밥 1끼 먹기도 힘드니까요.

 

식량은 충분한데 도대체 왜 굶어죽는 걸까?

 

그럼 도대체 왜 사람들은 굶어죽는 걸까요. 충분히 먹일 수 있는 식량이 나오고 있는데 도대체 왜? 이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푸짐하게 먹고 잔뜩 남긴 음식들이 떠오릅니다. 어떤 이는 굶주리는데 누가 음식을 버리면 답은 빤합니다. 누가 어떤 이가 먹을 음식을 빼앗은 것이죠.

 

세계를 지배하는 약육강식 질서에 공범이라는 깨달음은 괴로운 일이지요. 그냥 소시민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는데 왜 공범이냐고 되물으신다면 이렇게 말을 하겠습니다.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자기 할 일만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누군가 죽고 있는데 자기만 편안한 것이 옳은 일일까요.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지 않고 침묵하는 일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너무 뜨거운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괴롭기에 무시하거나 아니면 합리화 하지요. ‘신자유주의와 약육강식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야.’라고 말하며 그들을 외면하거나 아프리카 사람들은 게으르다, 동남아 사람들은 부패했다, 남미사람들은 무책임하다 등등 굶어죽는 사람들을 낮잡아 보는 이유를 대지요. 또는 한국 사람들 가운데에도 못 사는 사람이 있으니 국내에나 신경 쓰라고 말하면서 세계를 잊으려 합니다.

 

슬픕니다. 그리고 부끄럽습니다. 너무 길들여져서 살고 있었지요. 유엔 특별식량조사관 장 지글러가 쓴 <탐욕의 시대-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2008. 갈라파고스]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가슴이 아리게 하지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아들에게 부조리한 현실을 읊어주던 지은이는 <탐욕의 시대>에서 왜 더 가난해지고 있는지 파헤쳐요.

 

신자유주의를 하는데 더 가난해지는 나라들

 

기아와 궁핍은 제3세계에 그림자처럼 달라붙어서 떼어지지 않습니다. 요즘, 가난한 자들이 느끼는 압박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극심한 상황입니다. 반면, 가장 부유한 1퍼센트의 인구는 가장 가난한 인구 57퍼센트의 수입을 모두 합한 액수의 돈을 벌고 있습니다. 불평등한 구조가 한 국가를 넘어서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에게 신자유주의를 하라고, 이렇게 해야 우리처럼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힘 있는 나라들은 얘기합니다. 과연 가난한 나라들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고 좋은 나라가 되길 바라기에 신자유주의를 시킨다고 믿으시는지요. 그럴싸한 이론들을 가져오고 이리저리 압박하여 어쩔 수 없이 신자유주의를 하게 합니다. 결과는? 1980년대보다 더 굶어죽는 사람이 많아졌고 가난한 국가의 숫자가 늘어났습니다.

 

물론 세계 국가들은 모여서 좋은 일도 많이 하지요. 대인지뢰퇴치에 20억 달러를 쓰고 난민정착에 50억 달러, 영양실조와 기아퇴치에 190억 달러를 투자하고 있습니다. 박수를 쳐줘야 할까요? 군비지출 총액이 1조 달러에 이른다는 얘기에 박수가 멈춰집니다. 21세기 들어서도 왜 전쟁이 끝이 나지 않는지, 애꿎은 ‘악의 축’을 만들어서 전쟁을 벌이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빚, 아무리 갚아도 헤어날 수 없는 지옥

 

전쟁은 제국주의 국가들을 지탱하게 하는 도구이면서 존재이유이지요. 전쟁은 워낙 많이 다뤄진 얘기기에 지은이는 다른 것을 꼬집습니다. 바로 빚입니다. 빚은 경제 발전을 가로막고 국민들을 노예 상태에 붙잡아두지요. 빚은 열심히 땀 흘려 번 것을 몽땅 빼앗아가서 사람들을 굶주리게 하는 범인입니다. 사람을 파괴하는 끔찍한 괴물이지요.

 

힘 있는 나라들은 가난한 나라들 부채 탕감을 해줍니다. 300억 달러나 해주지요. 그런데 그들이 걷어가는 돈은 얼마나 될까요. 무려 3,700억 달러입니다. 2004년도 통계이기에 지금은 더 늘어났겠지요. 아무리 빚을 갚아도 이자는 꼬리에 꼬리를 물며 늘어갑니다. 세계에서 고리대금업을 하는 셈이지요.

 

그들은 이익의 극대화라는 명분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외면하지요. 빚은 갈수록 늘어 2004년에 26,000억 달러에 이르렀습니다. 돈이 벌리는 일이라면 영혼까지도 팔아서 할 그들이기에 지은이는 그들을 ‘신흥봉건제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봉건시대가 다시 왔다고 진단하지요. 거대다국적회사들을 봉건제후들라고 이르며 국가도 쥐락펴락하고 IMF, IBRD, WTO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며 통탄하지요.

 

커피를 많이 마시는 오늘날, 커피 생산 농부들은 돈 좀 벌었을까?

 

하나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한국 사람들이 이렇게 커피를 좋아하는 걸 어떻게 눈치 챘는지 봇물 터지듯 커피점이 들어섰습니다. 어느새 한국 사회 문화로 자리 잡을 만큼 커피는 자연스러운 기호식품이 되었지요. 다른 나라도 비슷하지요. 이렇게 커피소비가 늘어났으면 그만큼 커피 만드는 농부들은 돈을 벌었을 거라 짐작이 됩니다. 소비가 늘면 가격이 오르니까요.

 

당연히 커피회사들은 떼돈을 벌었지요. 종류 불문하고 전 세계에서 생산하는 커피 원두의 45% 이상을 산 5대 기업, 네슬레, 사라 리, 프록터 앤드 갬블, 치보, 그리고 크래프는 매출액과 영업이익이 엄청나게 증가했지요. 2000년, 네슬레는 26% 상승했고 치보는 47% 올랐지요.

 

그렇다면 농부들은? 재앙이 몰아쳤지요. 1kg에 3달러에서 86센트로 떨어졌지요. 재난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가 없지요. 100년 만에 처음이라고 할 정도로 갑자기 폭락했기 때문이죠. 농가들은 무너지고 도시 빈민으로 오게 되지요. 이런 상황에서 어떤 생활을 할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커피 유통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소비자들이 커피 소비를 위해 700억 달러를 썼는데 커피생산 농부들이 수출로 벌어들이는 돈은 55억 달러나 줄어듭니다. 커피생산에 전념하던 농부들은 수확을 포기하는 사태가 잇달아 나오지요. 왜 이런 일이 생겨났냐고요? 지은이는 옥스팜 설명을 빌려서 설명하지요.

 

지금까지는 커피국제협약으로 커피생산국에게 안정된 수입을 보장해주었지요. 왜냐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수백만, 수천만 명에 이르는 가난한 커피 생산 농부들이 공산주의에 빠지면 곤란하니까요. 그러나 냉전이 무너졌지요. 더 이상 커피국제협약은 쓸모가 없어졌지요. 오로지 강자, 5대 다국적기업들에게 복종해야하는 새로운 법칙이 생겨났고 원가 생산이하로 가격을 떨어뜨려 버립니다.

 

빚더미에서 절망하는 나라를 구할 방책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벌어진 일처럼 꾸미면서 이렇게 ‘봉건제후국’들은 약자들을 짓밟습니다. 생산가격은 갈수록 떨어지는데 소비자 가격은 날로 비싸집니다. 가운데에서 ‘경쟁력’있는 봉건제후국이 착취하기 때문이죠. 빚더미에 앉히고 착취의 굴레를 씌워버립니다. 그리고 노예처럼 부려먹으며 그 위에서 떵떵거리는 것이죠.

 


절망의 끝에 몰린 나라들은 빚에 허덕이며 죽음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오늘날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은이는 간단한 제안을 하지요. 모든 빚을 탕감시켜주라고. 그 빚 없애줘도 부자들은 여전히 부자로 남아있고 가난한 사람들이 약간 덜 가난해질 뿐이라고.



 

빚을 없애줘도 됩니다. 조건 없이 아주 덜어주더라도 산업사회의 경제와 그 경제체제에서 사는 사람들이 복지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을 겁니다. 지난 10년 동안 제3세계의 122개국에서 빚에 대한 이자와 원금 상환을 위해 채권국가의 은행으로 송금한 총 금액은 채권국 국민총생산의 2퍼센트에도 못 미칠 정도로 작은 돈이기 때문이죠. 또한 지은이는 여러 예를 들어 주지요.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전 세계 증권거래소에 몰아친 위기로 주가가치가 엄청나게 떨어지면서 자산이 사라졌지요. 이 기간 동안 증권거래소에서 없어진 가치는 제3세계 122개국 외채를 모두 합한 돈보다 무려 70배나 컸지요. 또한 2007년 8월 초에 금융위기가 또 와서 3조 달러가 사라졌지만 아무 이상 없이 잘 넘어갔지요. 그런데도 빚을 없애주지 않을까요?

 

이들은 어느 정도 합리적인 은행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돈으로 이 세상의 민중들을 지배하고 착취하겠다는 논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 책에서

 

‘추악한 빚’이 가득한 세상, 지은이는 혁명을 얘기한다

 

전 세계에 절대 빈곤층에 속하는 사람은 약 20억 명이지요. 하루에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 그들은 왜 이러한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을까요. 바로 봉건제후들의 마름, 콤프라드로(매판세력)가 있기 때문이죠. 겉으로는 자국민을 위하는 척하면서 그들은 나서서 민중들을 현혹하고 수탈하지요. 매국노라 할 수 있는 그들은 당당하게 권력을 쥐고 있고 민중들은 그들에게 시달리지요.

 

추악한 빚으로 가득한 세상을 보며 지은이는 분노합니다. 거리에서 굶어죽는 수많은 아이들을 보면서 지은이는 평생 흘릴 눈물을 다 쏟지요. 그리고 “기아는 절대로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아니다. 기아로 죽은 어린아이는 살해당한 것과 마찬가지다.”라며 울부짖습니다. 책장이 어렵게 안 넘어가는 부분들이 있는데 지은이가 얼마나 괴로워하면서 글을 썼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거기는 절절하게 꼭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나오지요.

 

“타인에게 가하는 비인간 행동은 내 안에 깃들어 있는 인간성을 말살시킨다.”는 말을 하는 점잖고 교양 있는 학자는 혁명과 전복을 꾀합니다. 극한점에 도달하여 더 이상 나빠질 수 없기 때문이죠.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 책에서

 

우연히 한국에서 태어나 호강하며 살았던 사람들에게 이 책은 너무 뜨겁습니다. 혹시 방글라데시에서 태어났다면, 에티오피아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상상을 해봅니다. 여전히 반공정신이 시퍼렇게 살아서 민중들의 창조성을 잡아먹는 한국에서 이 책은 ‘불온도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책을 붙잡은 두 손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데워집니다. 이 엉망진창 세상에서 나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는 세태가 눈물겹게 슬픕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L'emire De La Honte입니다. 부끄러운 제국이란 뜻이죠. 어느새 부끄러움은 잊어버린 사람들, 경제동물이 되어 숫자놀이에 정신없는 오늘날, 삶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왜 불행하게 살아가는 걸까요. 책을 읽으며 깊게 고민해봅니다. 마지막으로 파블로 네루다의 말을 전합니다.

 

“그들이 꽃이란 꽃은 모조리 꺾을 수 있어도 봄의 주인은 결코 될 수 없다.” - 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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