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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ㅣ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솔직히 툭 까놓고 얘기를 해봅니다, 왜 학부모들이 사교육에 돈을 쏟아 붓고 자식들을 좋은 대학 보내려고 안달을 하는 걸까요? 바로 어느 대학 출신이 그 사람 인생을 결정하기 때문이죠. 20대 이전 공부는 오로지 학벌을 위한 입시교육일 뿐이지요. 그럼 여기서 끝나는가? 아니죠. 20대는 취직을 위한 암기가 시작됩니다. 참다운 삶을 살기 위한 공부는 어디에도 없는 현실입니다.
그럼 도대체 왜 입시교육과 취직을 위한 암기를 하는가? 바로 ‘잘 먹고 잘살고 싶기’ 때문이죠. 누가 더 잘 외웠는지 줄을 세운 뒤 돈을 나눠주는 한국사회니까요. 돈에 대한 욕망이야 자연스러운 욕심이라 치고 넘어갑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죠. 도대체 그 돈으로 뭘 하고 싶은 걸까요?
사실은 이게 중요해요.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척 많지요. 마음만 제대로 먹으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게 돈이니까요.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값비싼 아파트, 번지르르 외제차, 부동산 투기, 노후를 위한 각종보험을 위해서 돈에 눈독들이고 있지요. 거기다 요런 삶을 자식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고 싶어 하지요. 고작 이걸 위해 청춘을 다 바치고 힘든 여정을 감수한다니. 맙소사!
그럼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어보자. 큰 아파트, 외제차, 부동산 따위가 정말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믿는가? 그러면 다들 말문이 막혀버린다. 언제부터 그것을 욕망하게 되었는지, 또 그 욕망이 행복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건 질문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니까. - 책에서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그린비. 2007]는 헛된 욕망을 좇지 말고 진짜 행복해지라고 말을 겁니다. 거짓말 조금 더 보태면, 책을 읽는 순간 두 팔이 떨립니다. 룰루랄라, 평탄한 길을 걷다가 갑작스레 나타난 높은 산을 쳐다봤을 때 표정이 되더군요. 지금까지 자신이 욕망하는 것들이 진짜 행복을 주는지 생각해보지 않았으니까요. 당연히 추구해야할 가치라고 믿고 있었지요.
지은이 고미숙은 호모 쿵푸스에서 진짜 행복해지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맛깔 나는 문장들을 풉니다. 인생이란 길에는 수많은 산들이 이어져 있으며 넘기 위해선 공부를 해야 한다는 주장과 짜임새 있는 논리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자아찾기부터 사회성공, 거기에 연애까지 공부를 해야 얻을 수 있으니까요.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공부는 쿵푸처럼 온 몸으로 하는 공부입니다. 그래서 호모 쿵푸스지요.
나를 모르는 사람들과 암기광신 한국
많은 사람들이, 난 나야,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할 거야, 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면 묻습니다. 근데, 원하는 게 뭐니? 무엇을 욕망하는지 말해줘. 여기에 자신 있게 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냐, 넌? 이라고 물을 때, 나안~ 하면서 자신을 제대로 소개할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요. 그만큼 자기 공부가 안 되어있다는 얘기죠.
공부는 안 되고 있지만 공부할 여건은 엄청 좋아졌습니다. 초고속 인터넷으로 조금만 뒤져도 정보들이 무더기로 쏟아지고 발달한 교통수단으로 어디든 빠르게 갈 수 있으며 이젠 잘 먹고 살만큼 경제도 나아졌지요. 군사독재정권도 끝이 나고 세상은 달라졌는데, 학교는 여전히 암기전투를 벌이는 전쟁터입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달려들어야 앞에 있는 놈 끌어내릴 수 있지요.
살아남기 위해서 갖은 술수를 다 쓰는 교육현장입니다. 가정경제 기둥뿌리 흔들리게 하는 사교육부터 어학연수, MBA, 영어성적과 학벌에 모든 걸 겁니다. 초등학생들도 일제고사를 보고 국제중학교 들어가라며 전투경험을 일찍부터 시키겠다고 살벌하게 부추깁니다. 삐뚤어진 교육광신이 드세 질수록 참 공부와 멀어지고 있다고 지은이는 진단하지요.
하지만 진정 놀라운 건 그게 아니지요. 아무도 이걸 왜 하는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어떤 청소년도 이런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이게 더 끔찍한 일이지요. 이 기막힌 상황을 아무도 거스르지 않고 있으며 저항한 선생님들을 해임파면 시켰지만 세상은 삐걱삐걱 잘도 돌아갑니다.
공부가 없는 현실, 진짜 공부를 하면 삶이 달라진다!
청소년들이 과중한 공부에 힘들어한다고 하지만 문제는 청소년들이 공부에 시달린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지요. 한창 힘과 패기가 넘칠 때 열나게 공부를 하는 거야 지극히 마땅한 일 아닌가요. 진짜 문제는 그들이 공부라고 하는 게, 시험이 끝나는 순간, 말짱 도루묵일 뿐이라는 거죠. 더 나아가 인생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걸림돌이 된다는 거예요.
어쨌든 그렇게 바라던 대학에 들어갔다고 칩시다. 하지만 대학에는 패기에 찬 논쟁도, 활발한 소통도 찾아볼 수 없지요. 더 이상 대학은 큰 배움터가 아니니까요. 취직 준비에 모든 걸 바치고 소비의 그물에 걸려 허우적대며 노후 대책에 골몰하지요. 청년이라 하기엔 너무 늙어버린 그들이지요. 당연히 늙어버린 그들이 늙은 사회에 들어가기에 세상은 늘 그 모양 그 꼴일 수밖에 없지요.
도대체 그럼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 걸까요? 공부는 쿵푸, 곧 온 몸으로 하는 것이기에 몸이 바뀌고 인생이 달라지는 공부를 해야 하지요. 학교를 넘어서서 평생 공부를 해야지요. 미네르바와 아고라의 논객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대중지성이 나타났지요. 학벌, 학점, 계급, 자격증, 소득, 사회 통념과 위계질서는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지요. 대중지성을 움직이는 힘은 오직 앎에 대한 열정이니까요.
그렇게 공부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 또 한 번의 비약이 일어난다고 지은이는 말을 하지요. 사는 것 자체가 모두 공부라는 걸 느끼게 되지요. 몸과 인생과 공부가 완전히 하나가 되는 오묘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지요. 언어와 문자의 경계를 넘어 세상 모든 것이 ‘책’이 되는 경이로움을 몸으로 느끼게 되지요.
그야 말로 문자와 몸과 세계가 혼연일체가 되는 순간, 앎은 행위에서 시작되고 행위는 앎의 완성이 되는 지행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거지요. 이 경제에서는 아무리 남한테 퍼주고 퍼줘도 깊은 산속 옹달샘마냥 계속해서 솟아나게 되어 있다고 지은이는 얘기하지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신가요?
독서를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오늘날
그럼 어떻게 공부를 하여야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우선 책을 읽어야죠. 지은이는 몸과 인생을 바꿔주는 지혜와 비전으로 가득 찬 책, 고전을 읽으라고 귀띔하지요. 독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합니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이제 가문이 망했으니 네가 참으로 독서할 때를 만났구나.”라고 편지를 쓸 정도로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답니다.
오늘날, 책을 안 읽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백지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란 거죠. 눈만 뜨면 광고와 인터넷, 각종 동영상에서 욕망을 자극하느라 시각 폭격을 해대는데, 웬만한 내공이 아니고는 그것들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란 거의 불가능한 지경이죠. 즉, 그냥 내버려둔다는 건 청년기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설치해놓은 함정에 그대로 빠져드는 걸 의미하지요.
1990년대 영상물이 문화의 전 영역을 장악하면서 독서의 영토는 그나마도 줄어들었지요. 대중지성이 하나로 연결될 수 있는 길은 하나, 독서뿐이지요. 책을 읽는다는 건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시각의 군림, 감각의 폭주를 거스를 수 있는 유일한 문이 되었어요. 21세기, 독서는 그자체로 이미 반문화이고 주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이 되는 거죠.
성공을 하고 싶다고? 책을 읽어~
독서는 성공하는 바탕이 되지요. 초야에 묻혀 밭을 갈며 살던 제갈량, 유비의 삼고초려 끝에 세상으로 나오지요. 나오자마자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온갖 지략과 술수로 천하를 쥐락펴락하지요. 그는 특별한 학벌도 경력도 없었지요. 다만 독서를 했을 뿐이에요. 굶주림에 지친 아내의 호통에 세상 밖으로 나온 허생, 다짜고짜 갑부 변씨를 찾아가 만금을 빌리고 그걸 밑천 삼아 100만 냥을 벌지요. 그는 실물 경제를 익힌 적이 없지요. 다만 독서를 했을 뿐이지요. 이들의 힘은 독서였던 거지요.
근데 유비는 제갈량의 재주와 지략을 어떻게 알아보고 삼고초려를 한 걸까요? 유비는 그냥 한눈에 제갈량의 그릇을 알아봤어요. 그의 얼굴과 몸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넘쳤기 때문이죠. 허생에게 변부자는 이름도 묻지 않고 즉석에서 만 냥을 내주지요. 허생의 내공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죠.
그들은 책을 통해 전혀 다른 종류의 몸이 된 것이죠. 사람의 운명과 성공을 결정하는 건 바로 그런 높은 수준의 감응력을 지닌 신체에요. 왜냐하면 감응력 높은 몸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니까요. 책을 읽으면 누구든 몸에 흐르는 기운을 바꿀 수 있지요. 연인이 닮아가고 가족이 닮듯이 좋은 책들을 오랫동안 읽으면 거기에 담긴 사유의 파동과 입자가 몸 안에 온축하게 되는 거지요.
그렇게 내공이 쌓이면 그 둘레에 에너지장이 형성되어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막 끌리게 되지요. 그래서 공자님이 말씀하셨지요. 덕은 반드시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네. 따라서 운명은 몸에서 배어나오는 거라 할 수 있지요. 몸의 동선과 습관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관계와 활동, 그게 바로 운명이 되니까요,
운명 같은 사랑, 특별하고 찐한 사랑을 하고 싶은 방법
이렇게 운명을 만들어내는 몸이기에 사랑도 만들어 내지요. 사랑은 사람의 활동 가운데 가장 활발한 생명 작용이니까요. 생명은 안과 밖의 소통으로 이루어지죠. 즉, 삶과 세계에 대한 통찰력이 자기 몸의 내공을 결정지어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삶의 모습과 나란히 함께 가지요. 사는 건 엉망인데, 사랑을 멋지게 하는 경우, 절대 없습니다.
삶에 대한 통찰력 없이 누군가를 끊임없이 오랫동안 사랑을 한다는 건 불가능하지요. 사랑은 내 존재의 깊은 곳이 울릴 때라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지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오늘날, 연애가 짧게 끝나는 것도 같은 맥락이죠. 내 안에 사랑을 지속할 힘과 기운이 충만하지 않으면 대상에 상관없이 그냥 끝나버리는 게 되지요. 계속 사랑할 힘이 부족하기에 근대인이 통상 밟아가는 연애의 끝은, 권태 아니면 변태지요.
이 빤한 과정을 벗어나 자신만의 특별하고 뜨거운 사랑을 하고 싶다면 방법은 간단해요, 자신이 먼저 그런 존재가 되는 거예요. 아무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사랑스런 사람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운명 같은 사랑을 하고 싶다면, 자신이 상대방의 운명을 바꾸어줄 만한 능력을 가지면 되는 거죠. 그리고 그걸 터득하는 길은 오로지 독서밖에 없지요.
한국은 아이부터 노인까지 ‘연애’에 눈독들이며 살고 있다고 할 정도지요. 그렇다면 행복의 열쇠는 연애에 달려 있는 셈이고 행복하기 위해선 연애를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네요. 제대로 연애 공부를 하고 있는지요?
길동무 사랑과 앎의 코뮌
지금 청소년들은 드라마를 통해 연애를 배우고 포르노를 통해 섹스의 기술을 얻고 있어요. 그리하여 사랑과 섹스는 생명의 기쁨이 되기는커녕 늘 청춘의 덫이 되지요. 하긴 청소년 뿐 아니라 중년층도 별 뾰족한 수가 없지요. 연애와 성에 대한 상상력은 대중문화가 쳐놓은 그물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진정한 사랑을 하고 싶다면 연애 공부를 빡세게 하여야겠지요. 상대방도 발전하고 자신도 성장하면서 서로 공부하고 함께 기뻐하는 사랑, 누구는 합류적 사랑이라고 하고 길동무 사랑이라고도 하지요. 그러한 짝을 만나려면 자신부터 준비가 되어야겠지요. 그래야 꿈에도 그리던 찐한 사랑을 하겠지요. 존 레논과 오노 요코처럼.
꼭 연인이 아니더라도 공부를 도와주고 자극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바로 스승과 벗들이지요. 그들과 단순히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를 넘어서 공동체, 코뮌이 됩니다. 서로 계몽이 아니라 촉발을 하게하고 훈계가 아니라 감염을 시키지요. 에피쿠로스는, 너는 무엇을 먹고 마실까보다 누구와 먹고 마실까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며 사람관계의 중요성을 오래전에 강조하였지요.
뇌과학의 성과에 따르면, 뇌의 존재 이유는 ‘네트워킹’하는 데 있다고 해요. 네트워킹을 하지 못하면 신경망이 점차 끊어져 결국 치매나 죽음에 이른다는 것이죠. 공부 역시 마찬가지에요. 스승과 벗을 찾아가는 네트워킹을 멈추지 않아야 하고 자신이 스승과 벗이 되려는 전환이 없으면 죽음으로 가게 되지요. 네트워킹을 끊임없이 하는 게 공부이고 이것이 바로 ‘앎의 코뮌’에 접속하는 일이지요.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들이여, 호모 쿵푸스가 되자!
사나이의 가슴 속에는 늘 가을 매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기상이 있어야 하며, 건곤을 작게 여기고 우주를 자신의 손바닥 안에 있는 것처럼 여겨야 옳다, 배움이란 무릇 이런 것이다, 라고 정약용은 말했지요. 자잘한 욕망만을 탐하는 배움이 아니라 세상을 논하고 우주를 품는 공부를 해야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에 물음표를 보내야하지요. 공부란 세상을 향해 물음의 그물망을 던지는 것이니까요. 홍대용은 일찍이 “크게 의심하는 바가 없으면, 큰 깨달음이 없다.”라고 하셨지요. 바꿔 말하면 질문의 크기가 곧 내 삶의 크기를 결정하는 거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네 삶에서 매일 하고 평생을 해도 변함없이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공부예요. 연애가 좋다지만 무상하기 이를 데 없잖아요. 섹스가 아무리 짜릿하다 해도 그 쾌락은 순식간에 지나가지요. 하지만 공부는 그렇지 않아요. 날마다 하고, 평생해도 행복하고 또 행복해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장 큰 쾌락은 지적 오르가즘이다.”
인생이 마음에 안 들고 세상이 불만스럽다면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가 나를 바꾸고 몸을 변하게 하고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행복해지고 싶은 모든 사람들이여, 호모 쿵푸스가 되세요.
공부란 특정한 시공간에 고착되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존재로 변이되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의 변이를 통해 세상의 질서와 배치를 바꾸는 것, 거기가 바로 공부가 혁명과 조우하는 지점이다. 무엇을 공부하건 공부는 그자체로 혁명이 되는 거다. - 책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