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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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도 몇 번씩, 전쟁과 재해 그리고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찍은 사진들과 마주칩니다. 섬뜩한 사진을 보다 보면, 크게 두 가지 반응이 나오지 않나 싶습니다. 하나는 사진을 보며 안타깝고 슬퍼하면서도 ‘뜻하지 않게’ 자신의 안전을 느끼는 반응, 둘째는 저러한 사진은 널리고 널렸다며 아무리 사진이 많다한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며 넌더리내는 반응.

 

이 둘은 겉보기엔 무척 다르지만, 속은 매우 닮았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뻔한’ 반응이니까요. 사람들의 삶은 이미 판박이가 되어버렸고 남과 다른 반응을 하기란 어려운 일이지요. 현대인들은 이른바 ‘불쌍한 사람’을 보면 둘 가운데 하나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쓰럽지만 어쩔 수 없음에 얼마를 나눠주거나 하도 자주 봐서 떨떠름해하며 고개를 돌리거나…….

 

그렇지만, 누군가의 고통에 마주했을 때, 새로운 몸짓과 정서를 열어내고 나눌 순 없을까요? 툭하면 셀 수 없이 쏟아지는 끔찍한 일들과 영상들을 보게 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수잔 손택의『타인의 고통』은 이에 대한 뾰족한 답을 주진 못하지만 지금과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도대체 이런 사진들을 전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람들의 분노를 일깨우려고? 사람들을 ‘후회’하게 만들려고, 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 슬퍼지게 만들려고? 애도 작업을 도와주기 위해서? 이제는 이 끔찍한 일들을 처벌할 수도 없을 만큼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꼭 이런 사진들을 봐야만 하는 것일까? 이런 이미지들을 본다고 해서 우리가 더 선량해지는 걸까? 이 사진들이 정말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고 있기는 한 것일까? 오히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그도 아니면 알고 싶어하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것에 지나지 않을까?『타인의 고통』140쪽

 

손택이 던지는 물음처럼 특정세력의 입김대로 어떠한 일들을 자꾸만 떠올리게 밀어붙이며 머릿속에 새기려고 하는 ‘너무 많은’ 사진들과 영상들이 있습니다. 어디를 틀어도 그 영상이 나오기에, 자신이 알고 싶어 하지 않더라도 ‘이미’ 자신의 몸에 파고들어 무의식처럼 어리어있는 기억들이 있지요. 국가라거나 민족이나 시장을 하나의 실체거나 꼭 있어야 하는 기둥처럼 믿게끔 만드는 사진과 자료를 통해 ‘붕붕 뜬 상상’은 끝없이 되풀이되면서 만들어지고 사람들을 주무르지요.

 

이렇게 대중매체가 이끄는 대로, 권력의 손아귀에서 만들어지는 흐름대로, 자본의 회오리가 불어 닥치는 대로, 반응을 할 수밖에 없는 판이기에 이 안에서 다른 감각과 다른 앎을 갖기란 몹시 어려운 형편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눈과 귀와 입은 이미 늘 무언가에 휘둘리고 있고 이에 자신의 감각 바깥에 있는 것들은 통 알 수 없지요. 자신이 알고 있거나 알고자 하는 것은 이미 늘 남들에게 알려진 것이거나 남들도 알고자 하는 것일 따름이니까요. 그러다보니 특정 사건에 대한 사진과 자료는 넘치는데 어떤 사건에 대한 이미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그럴수록 사람들의 눈길을 받지 못하고 잊힙니다.

 

예컨대 1904년 독일의 식민 정부가 나미비아의 헤레로족을 완벽하게 몰살시키로 작정한 사건, 일본이 중국을 습격한 사건(특히, 1937년 12월 중국인 40만여 명을 학살하고 8만여 명을 강간한 이른바 난징 대학살 사건), 1945년 베를린 주둔 소비에트 사령부의 묵인 아래 승전을 거둔 소비에트 병사들이 1백여 명의 부녀자들과 3만여 명의 소녀들을 강간한 사건(이들 중 1만여 명이 자살했다) 등이 좋은 예이다. 사람들은 이런 사건들에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130쪽

 

그러나 이미지들이 사람들의 눈을 흐리게 하고 감각을 어지럽힌다고 나무라기만 하는 건 그리 슬기로운 일은 아니지요. 드보르나 보드리야르의 주장처럼 이미지들이 그 자체로 허울뿐인 세계를 만들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치고 있기에 잘 알아야 하지만, 그와 더불어, 이미지들이 미처 몰랐던 세계를 알게 해주고 사람들의 감각을 새롭게 열어줄 수 있는 그 될성부름을 놓쳐선 안 되지요. 고개를 숙이고 이죽거리며 차가운 침만을 뱉어대기엔 아직 할 일이 많으니까요.

 

손택은 수많은 사진작가들의 사진들을 가져다가 전쟁이 무엇인지, 그러한 소름 돋는 사진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누군가를 걱정하고 생각한다는 건 어떤 뜻인지, 하루하루가 무서움인 사람들과 그들의 사진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나지막이 되물으며 이야기를 끌어가다가, 끝내 연민을 넘어 자신의 삶과 지구마을을 바꿔야 한다고 묵직하게 말을 하네요.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두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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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럭서스 예술혁명 - 예술체험과 예술창조의 새로운 가능조건에 대한 미학적 탐구 다중지성총서 1
조정환.전선자.김진호 지음 / 갈무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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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저 예술가들의 세계는 끝났다고! 삶에서 뚝 떨어져 자신들만의 예술을 하는 이들이 여태 있겠지만, 이미 예술과 삶을 떼려야 뗄 수 없는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저 예술가들의 세계가 끝났다는 뜻은 삶예술의 세계가 시작했다는 얘기지요. 우리의 삶은 이미 예술입니다.

 

이러한 삶예술을 만들어낸 예술운동이 플럭서스입니다. 인상파나 입체파, 초현실주의 같이 플럭서스를 뭐라고 딱 분질러 테두리 짓기가 어려운 까닭은 이들은 말 그대로 삶이 예술이라는 걸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라틴어로 ‘흐름’이라는 뜻으로 끊임없는 움직임이자 바뀜을 담아내는 플럭서스가 아직 좀 낯설다면, 새로 나온 책『플럭서스 예술혁명』은 정겨운 길동무처럼 차근차근 짚어내면서 조곤조곤 수다 떨면서 플럭서스의 세계로 한발 내딛게 해줍니다.

 

세계의 역사는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1965년에 조지 마키우나스(George Manciunas 1931~1978)가 내놓은 플럭서스 선언문 가운데 “예술오락은 단순하고 즐겁고 비가식적이며 하찮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예술오락은 어떤 숙련도 필요로 하지 않아야 하며 무수한 예행연습도 필요로 하지 않아야 하고 어떠한 상품가치나 제도적 가치도 갖지 않아야 한다”에서 알 수 있듯, 예술은 더 이상 어떠한 틀에 맞춰서 권위를 얻으려는 무언가가 아니지요.

 

이 책은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면서 한 시대를 뒤흔들던 존 케이지, 요제프 보이스, 백남준을 다루면서 플럭서스를 풀어냅니다. “세계의 역사는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는 백남준의 말처럼, 이들은 하나같이 세상이 짜놓은 경기에서 이기고자 아득바득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즐기며 잘 할 수 있도록 규칙을 바꿔내는데, 이것이 플럭서스의 정신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근대까지, 어떠한 틀이 있고 그 틀 안에서 고분고분히 말 잘 들으며 하란 것을 엄청나게 연습을 한 뒤 어느 정도 인정을 얻고 이름값을 가지면서 예술가가 되었다면, 플럭서스는 이러한 틀을 바수면서 삶에서 예술을 피어내고자 한 것이죠. 사실, 그동안 예술은 삶으로부터 동떨어져있을 뿐만 아니라 예술가 자신에게서도 소외되어왔으니까요.

 

이러한 예술에서 예술창작은, 노동이 노동생산물로부터 소외된 활동일 뿐만 아니라 노동과정에서도 소외된 활동이며 궁극적으로는 노동자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된 활동이듯이, 오브제화된 예술품을 만들어냄으로써 소외되고, 그 결과 예술창작 과정이 소외된 활동으로되며 결국 예술가가 그 자신으로부터 소외되도록 만들었다. 13~14쪽

 

밍밍한 삶, 멍멍한 예술, 다시 플럭서스를 생각하다

 

그러나 플럭서스 예술가들의 바람처럼 아직 삶예술이 되지 않고 여전히 생활인과 예술가는 따로 놀지요. 사람들은 예술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고 예술가들은 삶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습니다. 삶은 밍밍하고 예술은 멍멍하지요. 플럭서스도 뭇사람들 속으로 섞이기보다는 산업자본의 손아귀에 들어가면서 하나의 상품이 되어버렸고 상품들의 값을 올려주는 꾸밈새가 되었습니다. 예술혁명은 상품혁명을 낳았을 뿐이지요.

 

예술이란 칸막이를 부셔내고 자본에 맞서며 덤볐던 역사 속 플럭서스가 어느새 자본을 이끄는 짐마차가 되어 사람들의 감각을 외곬으로 몰아가는 요즘, 플럭서스를 생각한다는 건 그때의 플럭서스를 그대로 배우고 반복하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새로운 물음을 던지면서 ‘다시’ 플럭서스를 이루겠다는 몸짓이죠. 예전의 전위들의 바람대로 예술이 대중화되었는데 그렇다고 더할 나위가 없는 세상이 아니니까요.

 

혁명적 아방가르드들은 탈근대적 상품세계를 열기 위해 싸웠고 그들의 운동은 승리했는가? 아니면 혁명적 아방가르드들은 상품세계를 거부하기 위해 싸웠고 탈근대적 상품세계 앞에서 그들의 예술전략은 좌초했는가? 아니면 혁명적 아방가르드의 예술운동은 오늘날의 상품세계나 상품적 예술세계와는 다른 그 무엇을 지시하는가? 170~171쪽

 

이름을 세계에 널리 떨친 플럭서스 예술가들을 살피면서 그들을 떠받들며 우러르기보다 그들에게서 배울 건 배우고 떨어낼 건 떨어내면서 바로-여기에서 산뜻한 물음표를 피워내자고 세 지은이들은 힘껏 소리칩니다. 물 흐르듯 시원스레 흘러가는 글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플럭서스를 느낄 수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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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타클의 사회 - 문화교양 7
기 드보르 지음, 이경숙 옮김 / 현실문화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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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휘둥그레지는 볼거리로 사회가 범벅되고 삶 자체가 커다란 볼거리가 되어버린 오늘날, 무언가 자신만의 예술정신을 갖고 있다는 건 씁쓸한 자위일 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이미 볼거리가 넘치고 이미 볼거리가 된 사회에서 예술은 기껏해야 조금 더 볼만한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끝없이 관음증을 불러일으키고 야릇한 욕망들을 쉴 새 없이 자아내는 요즘 사회에서 상황주의자들의 문제의식을 되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대로 쭉 살면, 그릇되거나 한갓된 욕망만을 부풀리는 볼거리들에 휩싸일 수밖에 없고 끝없이 자신의 삶에서 자신은 낯설어지고 머쓱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상황주의자들은 삶과 노동이 갈라지고 상품소비에 휘둘리며 스펙타클한 이미지들에 어칠비칠해지는 사회에 노여움을 느끼고, 저 멀찍이 떨어져서 언젠가 찾아올 ‘혁명’을 기다리기보다 바로 여기에서 혁명을 일으키고자 하였죠. 이러한 정신이 기 드보르의『스펙타클의 사회』에 잘 나옵니다.

 

스펙타클은 엄청나게 긍정적인, 반박 불가능하고 접근 불가능한 어떤 것으로서 나타난다. 그것은 오로지 “겉으로 보이는 것은 좋은 것이며, 좋은 것은 겉으로 보인다”고 말할 뿐이다. 스펙타클이 원칙적으로 요구하는 태도는 수동적 수용인데, 실은 스펙타클은 아무런 응답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신의 겉보이기 방식에 의해서, 즉 외양의 독점에 의해서, 이같은 수동적 수용을 이미 달성하고 있다. 12

 

스펙타클은 이 사회의 밑절미이자 어쩌면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물레방아입니다. 어떠한 스펙타클이 없으면 견디지 못하도록 사람들은 길러졌고, 끝없이 무언가를 보고자 여기저기를 뒤적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욕망대로 스펙타클은 쉴 새 없이 터져 나와 사람들을 홀리고 꼬시며, 그만큼 사람들은 자기 삶의 두근거림에서 소외되고 멀어집니다. 스펙타클의 구경꾼 노릇하느라 정신없으니까요.

 

상황주의자들은 이에 어깃장을 놓습니다. 죽은 시간 없이 살려면, 자기 삶의 이글거림을 마음껏 누리려면, 나날이 달라야 하기에 상황주의자들은 판박이 같은 일상과 뻔한 몸짓들, 틀에 박힌 생각들을 깨뜨리고자 ‘상황들’을 뿜어내지요. 굳어버린 삶에 새로운 물결을 끼치며 새로운 일들을 펼쳐 보였지요. 삶을 옥죄는 스펙타클과 상품경제를 바수어버리고 삶의 생생함을 느끼고자!

 

상황주의자들은 여러 상황들을 만들어 뭇사람들에게 그저 ‘충격’만을 전해주려 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관계가 상거래처럼 변해가고 끼리끼리 몸값을 재면서 하나의 상품처럼 팔려나가는 현실을 바꿔내는 과정에서 그러한 ‘충격’이 있어야 하기에, 상황을 만든 것이죠. 사람들이 스펙타클에서 벗어나 자기 삶을 상큼하게 꾸려가려면 상상력이 권력을 잡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사회권력을 뒤집고자 상황을 펼친 것이죠. 사람들이 ‘역사’와 ‘대화’하길 바라며!

 

전도된 진리의 물질적 토대로부터의 해방 -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자기해방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같은 “세계 속에 진리를 설립하는 역사적 사명”은 고립된 개인이나 혹은 조작대상이 되고 있는 원자화된 대중, 그 어느 쪽에 의해서도 달성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실현된 민주주의의 탈소외적 형태, 즉 평의회 안으로 모든 권력을 가져옴으로써 모든 계급의 해체를 초래할 수 있는 계급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이 평의회 안에서 실천이론은 자신을 통제하고 자신의 행동을 감독하게 된다. 이것은 오로지 개개인들이 “보편적 역사에 직접 연결되어” 있는 곳에서만, 다시 말해 대화가 자신의 상황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무장하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221

 

상황주의자들은 노동과 삶이 쪼개진 채 빡세게 일하다가 끝나자마자 소비자가 되어 흥청망청하는 사회를 넘어서 저마다 자기 삶을 즐기며 사랑을 나누는 사회로 나아가길 바랐죠. 그러려면 한사람 한사람이 자기 삶에 어떠한 그늘을 두지 않은 채 스스로 주인으로서 이끌고 나가면서 삶을 옹글게 가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렇게 사람들이 자기 안의 힘을 깨우고 기쁨과 신명을 마냥 누리면서 권위주의에 찌든 국가나 사람들 위에 올라가 목에 힘주는 어떠한 조직도 받아들이지 않고 떨쳐내기를 바랐습니다.

 

그야말로 아방가르드(avantgarde)들이지요. 앞장서(avant) 나가는 돌격부대(garde)처럼 상황주의자들은 새로운 길을 열어가려고 애썼습니다. 이러한 상황주의자들은 자본의 쓰다듬을 받는 다소곳한 예술을 패대기치며 “기념품모음” 같은 예술들은 이제 끝장나다는 뜻으로, “예술세계의 종언”(189)을 얘기합니다. 문화 속에서 역사와 삶을 되살리지 않는 예술은 그저 쓸데없이 값비싼 꾸밈이 될 따름이니까요.

 

아직 역사를 살아보지 못한 역사적 사회에서 예술의 폐지를 추구하는 부정적 운동으로서, 해체의 시대에 있는 예술은 변화의 예술인 동시에 불가능한 변화의 순수한 표현이다. 그것의 도달범위가 광대하면 할수록, 그것의 진정한 실현은 더욱더 그 범위 밖에 있다. 이 예술은 불가피하게 아방가르드이며, 그리고 아방가르드는 예술이 아니다. 아방가르드는 예술의 소멸이다.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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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과 에드워드 사이드 카이로스총서 21
발레리 케네디 지음, 김상률 옮김 / 갈무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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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사이드 하면 곧바로 ‘오리엔탈리즘’이란 말이 떠오를 정도로, 사이드와 오리엔탈리즘은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그만큼 사이드는『오리엔탈리즘』이란 책으로 서구백인들의 생각이 얼마나 외곬으로 치우치고 삐뚤어졌는지 수많은 문헌을 뒤져 밝혀냅니다. 서구백인들의 눈과 귀를 ‘오리엔탈리즘’이 얼마나 흐리고 일그러뜨렸는지 낱낱이 파헤칩니다.

 

1978년에 나온 이 책은 지구마을을 뒤흔들었고 오리엔탈리즘이란 말이 ‘상식’처럼 널리 퍼져나갔지요. 사람이 무언가를 바라보고 생각할 때 이미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불어오는 입김에 휘감기기 마련인데, 사이드는 그 가운데에 서구가 아랍과 무슬림에 대해 품고 있는 옴팡진 망상들을 드러내 보이죠.『오리엔탈리즘』은 서구의 뒤틀린 의식세계를 버르집으며 과연 사람의 생각과 감각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지금 자신은 어떠한지 저마다 되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에드워드 사이드는 훌륭해, 라고 손뼉치고 돌아서기보다 그의 날카로운 고민을 익혀야겠지요. 사이드 스스로도 자신을 우러르기만 하는 이들을 만드는 데 전혀 뜻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합니다. 음악에도 깊이가 남달랐으며 꽤나 멋진 피아니스트였던 사이드는 함께 오케스트라를 만들려고 했던 동무, 다니엘 바렌보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선생으로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점이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 나의 학생들이 나를 비판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를 공격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실 많은 학생들이 그렇게 하기는 합니다만, 나에게 독립을 선언하고 그들 자신의 길을 가라는 의미의 비판 말입니다.『평행과 역설』[생각의 나무. 2003]136~137쪽

 

사이드의 말마따나, 사이드를 떠받들지 말고 사이드의 연구를 두엄삼아 새로운 희망과 아늑한 평화를 피워내야 하겠죠.『오리엔탈리즘과 에드워드 사이드』[갈무리. 2011] 는 사이드를 내 안에 ‘들여와’ ‘사이드처럼’ 생각할 수 있게끔 잘 다져진 입문서입니다. 사이드의 수많은 연구들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내리친 뒤 맛깔난 요리로 빚어낸 책이죠.

 

문학과 문화 비평가 그리고 사회 평론가로 알려진 에드워드 사이드는 세계 지성계에서 매우 중요하고 논쟁적인 인물이다. 그의 저작은 그 폭과 깊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고 논쟁적인 인물이다. 그의 저작은 그 폭과 깊이에 있어서 가히 놀라울 수준일 뿐만 아니라, 현대 문화 이론과 탈식민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오리엔탈리즘과 그와 관련된 분야에 대한 사이드의 저술을 수많은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으며, 후속 연구자들은 다시 사이드의 사상적 진화에 도움을 줌으로써 사이드는 마침내 20세기 서구 인문학의 지형을 완전히 바꾸는 데 성공했다. 35쪽

 

글쓴이 발레리 케네디의 말처럼, 에드워드 사이드만큼 지구마을의 판을 통째로 갈아엎으며 어마어마한 물결을 일으킨 학자도 드뭅니다. 탈식민주의 담론이 지성계에 물보라를 일으키며 서구를 잣대삼아 자신들을 재고 낮잡던 의식을 깨부쉈지요. 비록 그는 떠났지만, 그의 발자취를 밟으며 새로운 길을 내는 이들이 불거집니다.

 

사이드는 수많은 사람들 가슴에 불을 지폈는데, 그 까닭은 그저 글을 잘 쓰거나 똑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삶과 생각이 뜨거웠기 때문입니다. 사이드는 ‘고향을 잃어버린 소수자’로써 끝없이 세상을 낯설게 바라보고, 거리두기를 하면서 지식인의 호젓함을 지켜내었죠. 어느 누구보다 공부를 많이 한 먹물이지만 먹통이 되지 않고자 ‘세속’에 뛰어들어 목소리를 내고 사회변화를 이끌어내고자 애쓴 실천지식인이었습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평생 어떠한 하나의 이론이나 담론에 치우치거나 특정한 문화나 정치적인 행위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해 왔다. 그는 또한 인종이나 종교, 심지어 비평의 세계에서조차 ‘순수성’을 주장하는 것을 대단히 위험하고 파괴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사이드는 인간을 획일화하고 억압하려는 그 어떠한 총체적 시스템과도 맞서 싸우려 했으며, 세속주의와 지리적 ‧ 사회적 ‧ 문화적 통섭을 대안으로 주장해 온 이 시대의 진정한 지성이었다. 298쪽

 

하지만 그가 쌓은 업적이 높고 커다란 만큼 그늘도 있을 수밖에 없고 그의 논리에도 구멍들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이 책의 지은이는 사이드만큼 매서우면서도 꼼꼼히 요모조모 짚어냅니다. 뒤쪽에선 사이드를 가야트리 스피박이나 호미 바바 같은 탈식민주의 이론가들과도 견주는데, 무척 솔깃하네요.

 

세계화란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미국화란 욕망의 소용돌이가 지구동네에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사이드 다시 읽기’가 이뤄지는 까닭은 별 생각 없이 멍하니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노란 미국인’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지요. 사이드의 글을 다시 보고 새롭게 읽어내면서 삶을 가다듬고 팔 걷어붙이며 사회에 뛰어들어야겠지요.

 

그의 글들을 읽기가 좀 망설여지거나 만만치 않다면,『다시 에드워드 사이드를 위하여』[앨피. 2005]란 괜찮은 입문서가 있었는데, 거기에『오리엔탈리즘과 에드워드 사이드』를 더할 수 있겠네요. 사이드를 만나면, 강자들의 욕망을 욕망하라는 부채질에서 벗어나 약자에 대한 상냥한 마음가짐을 배우며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바람이 자기 안에서 일어납니다.

 

평생 휴머니즘을 옹호한 시대의 지성으로, 불의한 권력과 맞서 싸워 온 실천적 지식인으로, 문학적 근원과 고향을 떠나 망명적인 삶을 살아온 고독한 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는 팔레스타인이라는 변방에서 태어나 세상의 중심을 변화시킨 사유의 혁명가였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의 부재를 아쉬워하기보다 우리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지식인으로서 그와 같은 삶을 살도록 애쓰는 일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의식의 세계로 그의 정신을 다시 살려 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죽은 자를 위한 진정한 애도는, 그를 오랫동안 기억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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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 - 박가분의 붉은서재
박가분 지음 / 인간사랑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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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요즘 젊은 것들』[2010. 자리]에서 박가분의 얘기는 무척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군복무를 마치는 대로 한국사회에 ‘백태클’을 날리겠다는 그의 말엔 발칙함을 넘어서 벼려진 마음맺음을 보여주었지요. 아니나 다를까, 요즘 들어 그가 펼치는 주장들과 글들은 수많은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프랑스 현대철학의 세례를 듬뿍 받은 그는 단순히 ‘외국지식들’을 사들여와 얌전히 팔고 있는 이들과 다르게 그 이론들을 ‘지금-여기’에 쓰려고 합니다. 헤겔과 맑스를 밑절미 삼아 한국사회를 바꾸고자 목소리 높이며 ‘한국의 지젝’이라거나 ‘젊은 이진경’ 등으로 ‘벌써’ 불리고 있습니다.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머잖아 그의 이름이 사람들 가슴에 불길을 지피겠지요.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을 어떻게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는 박가분

 

‘88만원세대’란 꼬리말은 젊은이들의 현실을 까발리는 효과는 있었지만, 지은이들의 뜻과는 달리 올가미처럼 젊은이들을 얽매기도 합니다. 88만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경제모순을 드러내었고 사회담론으로 올렸지만, 그 숫자는 젊은이들 얼굴에 그늘을 짙게 드리웠지요. 그러다보니 젊은이들 스스로도 주눅이 들었고 사회에서도 젊은이들을 ‘불쌍한 녀석들’로 여기기만 합니다.

 

그러나 기성세대라고 다 낡고 구린 게 아니듯 ‘88만원 세대’라고 해서 어깨 축 처진 이들만 있는 건 아니지요. 대중매체에서 다루지 않아서 그렇지 그 안에서 희망을 일구고자 팔 걷어붙인 젊은이들이 수두룩합니다. 나아가 이 사회판마저 갈아버리려고 눈에 초롱불을 켠 젊은이들도 많지요.

 

박가분이 그런 젊은이인데, 그가 블로그에 쓴 글들을 모아 낸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2010. 인간사랑]는 그야말로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그 까닭은 “20대는 불행하고 흔들리고 있다”는 표상을 깨부수며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을 어떻게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니까요. 청춘이 얼마나 대단한 힘인지 어디까지 생각의 날개를 펼 수 있는지, 박가분의 글은 아주 빼어나게 보여줍니다.

 

80년대 민주화운동에 기름을 부으며 지금까지도 쉽지 않은 외국정치철학들을 주로 번역하는 출판사 <인간사랑>의 대표조차 박가분의 글을 읽으며 대학원박사과정에 있는 사람이 쓴 글이라고 생각했는데, 20대 중턱의 학부생이 쓴 글이란 걸 알고 깜짝 놀랐다고 하더군요. 이럴 만치 박가분의 글은 어느 교수보다 훨씬 뜨겁고 여느 지식인보다 되우 탄탄합니다. 박가분은 20대 대학생들을 통째로 지질이로 만들어버리는 사회담론을 북 찢어버립니다.

 

젊은이들이 옮겨야 하는 생각의 발걸음

 

한쪽에선 88만원이다, 청년실업이다 아우성이지만, 다른 쪽에선 젊은이들이 사치품에 눈이 멀고 소비에 흠뻑 빠져있습니다. 그러니까 젊은이들이 가엾다는 안타까움과 젊은이들이 개념 없다고 조리돌림이 엉겨있는 곳이 한국사회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어정쩡한 다독임과 어이없는 손가락질을 당하기보다 ‘생각 있는 젊은이들’이 스스로 외쳐야 하지 않을까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젊은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없다고!

 

다시 말하면, 젊은이들 사이에 어떤 때보다도 떡하니 계급으로 갈라져있습니다. 얄팍한 계급상승과 알량한 허영을 욕망하게끔 부추기지만, 사실, 한국은 이미 신분사회이고 계급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릅니다. 암만 알바를 해서 사치가방을 둘러매고 빚을 내어 차를 끌어도 젊은이들의 앞날은 ‘거의’ 판가름나있습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의 부모가, 당신의 미래를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 생각의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한국사회 안에서 써버림을 쾌락으로 느끼며 자랐기에 자신이 욕망하는 만치 써버릴 수 없는 ‘88만원’을 받으니 울컥하며 괴로워하는데, 오히려 박가분처럼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의 괴로움이 사회에서 생긴 것이라면, 이 괴로움을 무릅쓰면서 사회를 바꿔내야 하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 지금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가난하다’는 게 문제라면 오히려 자본가들과 관료들에게, 그리고 우리의 부모들에게 과감하게 ‘가난해져도 좋다’고 외치는 게 급선무이며, 그것이 더 타격이 클 것입니다. (…) 오히려 그것이 진짜 ‘문제’이며 지금 대한민국의 자본주의적 상황의 첨예한 모순이지만, 그러한 문제에 대처하는 우리가 ‘연대’하기 위해서라면, 앞으로 달라질 우리 사회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413쪽

 

참을 수 없는 시대의 가벼움에 주먹감자를 날려야

 

두말할 거 없이 박가분의 글이 다 옳거나 누구에게나 잘 읽히며 고개 끄덕이게 하는 건 아닙니다. 오늘날 있어야 하는 건 어설픈 회의가 아니라 단호한 이행이며 레닌처럼 철저한 반복을 해야 한다는 대목에선 한줌도 안 되는 한국의 좌파 안에서조차 여러 말씨름을 낳고 손사래를 받겠지요.

 

하지만 그가 외치는 ‘대의(Cause)’는 젊은이라면, 이 사회의 앞날을 생각하는 이라면, 누구나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cause엔 원인이란 뜻 뿐 아니라 주의나 주장, 대의란 뜻이 있는데, 이 사회가 휘청거리고 비틀거리는 ‘원인’은 ‘대의’가 사라졌기 때문이니까요. ‘좋은 세상’은 오지 않았지만 어느덧 사람들은 ‘이 정도’에 만족하며 허리띠를 푼 결과, 한국사회는 지금 요 꼴로 굴러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커다란 뜻을 품고 새로운 사회를 향한 마음가짐이 매듭지어져야 합니다. 그 과정이나 방법이 꼭 80년대와 똑같을 순 없겠지요. 여건과 형편이 달라졌으니까요. 그럼에도 바뀌지 않는 건 이 사회의 상스러움과 메스꺼움을 불살라버려야 한다는 사실이며, 이걸 이루기 위해선 ‘참을 수 없는 시대의 가벼움’에 주먹감자를 날려야 합니다. 죄다 응석부리려는 오늘날, 깊이와 묵직함을 다시 불러들어야 할 때입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패기 있는 젊은이답게 발랄하고 깜찍한 이야기를 하지 못해서 대단히 미안하다. 하지만 모든 젊은이들이 김연아나 박태환이 아닌 이상 앞으로 그럴 발랄함을 기대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것은 나의 책임도 그리고 우리들의 책임도 아니다. ‘발랄함’과 ‘개드립’에 대한 찬양이 유행하는 이 시대 속에서 이 책을 바로 앞으로의 젊은이들의 새로운 ‘반시대적인 진지함’을 위해 바친다. 17~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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