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하루에도 몇 번씩, 전쟁과 재해 그리고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찍은 사진들과 마주칩니다. 섬뜩한 사진을 보다 보면, 크게 두 가지 반응이 나오지 않나 싶습니다. 하나는 사진을 보며 안타깝고 슬퍼하면서도 ‘뜻하지 않게’ 자신의 안전을 느끼는 반응, 둘째는 저러한 사진은 널리고 널렸다며 아무리 사진이 많다한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며 넌더리내는 반응.

 

이 둘은 겉보기엔 무척 다르지만, 속은 매우 닮았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뻔한’ 반응이니까요. 사람들의 삶은 이미 판박이가 되어버렸고 남과 다른 반응을 하기란 어려운 일이지요. 현대인들은 이른바 ‘불쌍한 사람’을 보면 둘 가운데 하나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쓰럽지만 어쩔 수 없음에 얼마를 나눠주거나 하도 자주 봐서 떨떠름해하며 고개를 돌리거나…….

 

그렇지만, 누군가의 고통에 마주했을 때, 새로운 몸짓과 정서를 열어내고 나눌 순 없을까요? 툭하면 셀 수 없이 쏟아지는 끔찍한 일들과 영상들을 보게 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수잔 손택의『타인의 고통』은 이에 대한 뾰족한 답을 주진 못하지만 지금과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도대체 이런 사진들을 전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람들의 분노를 일깨우려고? 사람들을 ‘후회’하게 만들려고, 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 슬퍼지게 만들려고? 애도 작업을 도와주기 위해서? 이제는 이 끔찍한 일들을 처벌할 수도 없을 만큼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꼭 이런 사진들을 봐야만 하는 것일까? 이런 이미지들을 본다고 해서 우리가 더 선량해지는 걸까? 이 사진들이 정말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고 있기는 한 것일까? 오히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그도 아니면 알고 싶어하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것에 지나지 않을까?『타인의 고통』140쪽

 

손택이 던지는 물음처럼 특정세력의 입김대로 어떠한 일들을 자꾸만 떠올리게 밀어붙이며 머릿속에 새기려고 하는 ‘너무 많은’ 사진들과 영상들이 있습니다. 어디를 틀어도 그 영상이 나오기에, 자신이 알고 싶어 하지 않더라도 ‘이미’ 자신의 몸에 파고들어 무의식처럼 어리어있는 기억들이 있지요. 국가라거나 민족이나 시장을 하나의 실체거나 꼭 있어야 하는 기둥처럼 믿게끔 만드는 사진과 자료를 통해 ‘붕붕 뜬 상상’은 끝없이 되풀이되면서 만들어지고 사람들을 주무르지요.

 

이렇게 대중매체가 이끄는 대로, 권력의 손아귀에서 만들어지는 흐름대로, 자본의 회오리가 불어 닥치는 대로, 반응을 할 수밖에 없는 판이기에 이 안에서 다른 감각과 다른 앎을 갖기란 몹시 어려운 형편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눈과 귀와 입은 이미 늘 무언가에 휘둘리고 있고 이에 자신의 감각 바깥에 있는 것들은 통 알 수 없지요. 자신이 알고 있거나 알고자 하는 것은 이미 늘 남들에게 알려진 것이거나 남들도 알고자 하는 것일 따름이니까요. 그러다보니 특정 사건에 대한 사진과 자료는 넘치는데 어떤 사건에 대한 이미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그럴수록 사람들의 눈길을 받지 못하고 잊힙니다.

 

예컨대 1904년 독일의 식민 정부가 나미비아의 헤레로족을 완벽하게 몰살시키로 작정한 사건, 일본이 중국을 습격한 사건(특히, 1937년 12월 중국인 40만여 명을 학살하고 8만여 명을 강간한 이른바 난징 대학살 사건), 1945년 베를린 주둔 소비에트 사령부의 묵인 아래 승전을 거둔 소비에트 병사들이 1백여 명의 부녀자들과 3만여 명의 소녀들을 강간한 사건(이들 중 1만여 명이 자살했다) 등이 좋은 예이다. 사람들은 이런 사건들에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130쪽

 

그러나 이미지들이 사람들의 눈을 흐리게 하고 감각을 어지럽힌다고 나무라기만 하는 건 그리 슬기로운 일은 아니지요. 드보르나 보드리야르의 주장처럼 이미지들이 그 자체로 허울뿐인 세계를 만들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치고 있기에 잘 알아야 하지만, 그와 더불어, 이미지들이 미처 몰랐던 세계를 알게 해주고 사람들의 감각을 새롭게 열어줄 수 있는 그 될성부름을 놓쳐선 안 되지요. 고개를 숙이고 이죽거리며 차가운 침만을 뱉어대기엔 아직 할 일이 많으니까요.

 

손택은 수많은 사진작가들의 사진들을 가져다가 전쟁이 무엇인지, 그러한 소름 돋는 사진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누군가를 걱정하고 생각한다는 건 어떤 뜻인지, 하루하루가 무서움인 사람들과 그들의 사진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나지막이 되물으며 이야기를 끌어가다가, 끝내 연민을 넘어 자신의 삶과 지구마을을 바꿔야 한다고 묵직하게 말을 하네요.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두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15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