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타클의 사회 - 문화교양 7
기 드보르 지음, 이경숙 옮김 / 현실문화 / 199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눈이 휘둥그레지는 볼거리로 사회가 범벅되고 삶 자체가 커다란 볼거리가 되어버린 오늘날, 무언가 자신만의 예술정신을 갖고 있다는 건 씁쓸한 자위일 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이미 볼거리가 넘치고 이미 볼거리가 된 사회에서 예술은 기껏해야 조금 더 볼만한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끝없이 관음증을 불러일으키고 야릇한 욕망들을 쉴 새 없이 자아내는 요즘 사회에서 상황주의자들의 문제의식을 되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대로 쭉 살면, 그릇되거나 한갓된 욕망만을 부풀리는 볼거리들에 휩싸일 수밖에 없고 끝없이 자신의 삶에서 자신은 낯설어지고 머쓱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상황주의자들은 삶과 노동이 갈라지고 상품소비에 휘둘리며 스펙타클한 이미지들에 어칠비칠해지는 사회에 노여움을 느끼고, 저 멀찍이 떨어져서 언젠가 찾아올 ‘혁명’을 기다리기보다 바로 여기에서 혁명을 일으키고자 하였죠. 이러한 정신이 기 드보르의『스펙타클의 사회』에 잘 나옵니다.

 

스펙타클은 엄청나게 긍정적인, 반박 불가능하고 접근 불가능한 어떤 것으로서 나타난다. 그것은 오로지 “겉으로 보이는 것은 좋은 것이며, 좋은 것은 겉으로 보인다”고 말할 뿐이다. 스펙타클이 원칙적으로 요구하는 태도는 수동적 수용인데, 실은 스펙타클은 아무런 응답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신의 겉보이기 방식에 의해서, 즉 외양의 독점에 의해서, 이같은 수동적 수용을 이미 달성하고 있다. 12

 

스펙타클은 이 사회의 밑절미이자 어쩌면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물레방아입니다. 어떠한 스펙타클이 없으면 견디지 못하도록 사람들은 길러졌고, 끝없이 무언가를 보고자 여기저기를 뒤적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욕망대로 스펙타클은 쉴 새 없이 터져 나와 사람들을 홀리고 꼬시며, 그만큼 사람들은 자기 삶의 두근거림에서 소외되고 멀어집니다. 스펙타클의 구경꾼 노릇하느라 정신없으니까요.

 

상황주의자들은 이에 어깃장을 놓습니다. 죽은 시간 없이 살려면, 자기 삶의 이글거림을 마음껏 누리려면, 나날이 달라야 하기에 상황주의자들은 판박이 같은 일상과 뻔한 몸짓들, 틀에 박힌 생각들을 깨뜨리고자 ‘상황들’을 뿜어내지요. 굳어버린 삶에 새로운 물결을 끼치며 새로운 일들을 펼쳐 보였지요. 삶을 옥죄는 스펙타클과 상품경제를 바수어버리고 삶의 생생함을 느끼고자!

 

상황주의자들은 여러 상황들을 만들어 뭇사람들에게 그저 ‘충격’만을 전해주려 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관계가 상거래처럼 변해가고 끼리끼리 몸값을 재면서 하나의 상품처럼 팔려나가는 현실을 바꿔내는 과정에서 그러한 ‘충격’이 있어야 하기에, 상황을 만든 것이죠. 사람들이 스펙타클에서 벗어나 자기 삶을 상큼하게 꾸려가려면 상상력이 권력을 잡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사회권력을 뒤집고자 상황을 펼친 것이죠. 사람들이 ‘역사’와 ‘대화’하길 바라며!

 

전도된 진리의 물질적 토대로부터의 해방 -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자기해방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같은 “세계 속에 진리를 설립하는 역사적 사명”은 고립된 개인이나 혹은 조작대상이 되고 있는 원자화된 대중, 그 어느 쪽에 의해서도 달성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실현된 민주주의의 탈소외적 형태, 즉 평의회 안으로 모든 권력을 가져옴으로써 모든 계급의 해체를 초래할 수 있는 계급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이 평의회 안에서 실천이론은 자신을 통제하고 자신의 행동을 감독하게 된다. 이것은 오로지 개개인들이 “보편적 역사에 직접 연결되어” 있는 곳에서만, 다시 말해 대화가 자신의 상황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무장하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221

 

상황주의자들은 노동과 삶이 쪼개진 채 빡세게 일하다가 끝나자마자 소비자가 되어 흥청망청하는 사회를 넘어서 저마다 자기 삶을 즐기며 사랑을 나누는 사회로 나아가길 바랐죠. 그러려면 한사람 한사람이 자기 삶에 어떠한 그늘을 두지 않은 채 스스로 주인으로서 이끌고 나가면서 삶을 옹글게 가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렇게 사람들이 자기 안의 힘을 깨우고 기쁨과 신명을 마냥 누리면서 권위주의에 찌든 국가나 사람들 위에 올라가 목에 힘주는 어떠한 조직도 받아들이지 않고 떨쳐내기를 바랐습니다.

 

그야말로 아방가르드(avantgarde)들이지요. 앞장서(avant) 나가는 돌격부대(garde)처럼 상황주의자들은 새로운 길을 열어가려고 애썼습니다. 이러한 상황주의자들은 자본의 쓰다듬을 받는 다소곳한 예술을 패대기치며 “기념품모음” 같은 예술들은 이제 끝장나다는 뜻으로, “예술세계의 종언”(189)을 얘기합니다. 문화 속에서 역사와 삶을 되살리지 않는 예술은 그저 쓸데없이 값비싼 꾸밈이 될 따름이니까요.

 

아직 역사를 살아보지 못한 역사적 사회에서 예술의 폐지를 추구하는 부정적 운동으로서, 해체의 시대에 있는 예술은 변화의 예술인 동시에 불가능한 변화의 순수한 표현이다. 그것의 도달범위가 광대하면 할수록, 그것의 진정한 실현은 더욱더 그 범위 밖에 있다. 이 예술은 불가피하게 아방가르드이며, 그리고 아방가르드는 예술이 아니다. 아방가르드는 예술의 소멸이다.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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