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의 희생양 - 테러와의 전쟁에서 증오범죄와 국가범죄 카이로스총서 22
마이클 웰치 지음, 박진우 옮김 / 갈무리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시는 미국 대통령을 두 번이나 하면서 시간이 흐르면 역사가 저절로 나아진다는 생각을 작살내었지요. 부시는 광신자나 머리가 나쁜 쪼다라기보다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꼴이며 인류에 드리운 어둠이 얼마나 짙은지 알려주는 범죄자이지요. 미국은 여기저기에서 깽판을 놓았고 지금도 설치며 그에 따라 지구동네는 툭하면 피범벅이 됩니다. 클린턴 정부 때 한반도에도 미사일들이 쏟아질 뻔했다는 사실은 자본주의 미국과 애꿎게 죽어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구인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부시에게만 돌을 던질 수 없지요. 부시는 미국인들의 표를 받고 어엿하게 지도자가 된 얼뜨기니까요. 그렇다면 왜 미국인들은 부시를 욕망했을까? 라는 물음을 던져야 하겠지요. 여기서 공포정치가 나옵니다. 미국말도 어수룩하게 잘 못하는 부시지만 소스라치게도 두려움과 으스스함을 심어주는 데는 누구보다 혀를 잘 놀렸지요. 그가 퍼뜨리는 공포에 취한 미국 대중들은 이성이 마비된 채 부시를 우러릅니다. 얼마 전 CIA가 빈 라덴을 무턱대고 죽여 버렸는데 이에 기뻐하던 미국인들의 모습은 미국이란 나라가 어떻게 주물려져 있는지 들통 내죠.

전쟁이 나라와 나라끼리 벌이는 게 아니라 미국이라는 깡패나라가 남의 나라에 쳐들어가 어느 단체와 싸우거나 자국민들을 을러대는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이지요. 이렇게 안보가 전쟁을 대비하는 국방에서 시끄러움을 막기 위한 치안으로 바뀜에 따라 곳곳에서는 예전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일들이 일어납니다.『911의 희생양』[갈무리. 2011]은 2001년 9월 11일로 말미암아 미국사회가 얼마나 보수화되었고 엉망진창이 되었는지를 촘촘하게 담아냅니다.

테러와의 전쟁은 “사회적 발명품”

지금 미국은 조금 더 안전한 사회를 염원하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은 국가안보에 대한 그들의 필사적인 욕구를 가장 명백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하지만 테러와의 전쟁은 사회적 발명품이다. 때문에 테러와의 전쟁은 겉으로 드러나 있는 명시적인 기능, 즉 테러공격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는 데에만 그 목표를 두지 않는다. 20쪽

지은이는 테러와의 전쟁이 “발명품”이라고 잘라 말하고 정치지배자들이 어떻게 대중들을 조작하고 이성을 잃게끔 이끄는지 그리고 어떠한 이득을 얻으며 권력을 지켜 가는지 수많은 자료들을 끌어들여서 보여줍니다. “테러와의 전쟁”은 기막힌 통치술인 셈이지요. 불안을 부추기고 두려움을 일으키게 하면서 끝내 사람들의 머릿속을 얼어버리게 하고 입에서는 욕지기를 토해내며 누군가를 미워하게 만듭니다. 미국인들은 정치모리배들이 가리키는 희생양을 물어뜯고 셋째 손가락을 치켜세웁니다.

더 소름이 돋는 것은 한소끔 들끓다가 그치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증오는 꺼지지 않고 끝없이 또 다른 먹잇감을 찾습니다. 정치부라퀴들은 끝없이 사회를 술렁이게 하고 대중들은 쉴 새 없이 사냥감을 찾습니다. 희생양 만들기가 이뤄지는 구조인 것이죠. 희생양을 때릴 때에만 자신의 불안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집니다. “증오범죄가 사회적 불안의 주요한 지점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증오의 이동 가능성은 위험사회론의 메커니즘과 관계가 있다. 희생양 만들기에서 가장 명백히 드러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무고한 희생자들을 향한 증오 때문에 폭력이 발생한다는 것이다.”(120쪽)

이렇게 희생양을 만들어낼 수 있는 까닭은 지배권력이 부채질하는 ‘타자화’와 사람들 안에 오랫동안 쌓인 편견이 맞물리기 때문이지요. 타자화는 다른 게 아니라 누군가를 밀어내면서 자신과 다르다는 걸 드러내는 일입니다. 타자화가 된 대상은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괴롭히거나 내치고 함부로 대하게 됩니다. 타자화가 무서운 이유죠. 어느 사회에서 누군가 타자화가 되었다면 대중들은 자신이 바라지 않아도 그 누군가를 꺼리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싫어하게 되지요.

911 테러 이후의 미국에서 이 “타자화”의 역학은 크게 번성했다. 사실 세계무역센터와 미국 국방성에 가해진 테러공격은, 이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모호하게 남았을 “그들”이라는 개념을 분명하게 해 주었다. 이 개념의 명확화는 [서로 다른 문화적 환경을 지닌 중동인들을] “중동인”이라는 단일한 집단적 총체로 만들어버렸다. 이로써 중동인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의심, 비방, 박해를 용이하게 진행할 수 있는 “우범자”usual suspect가 되었다. 137쪽

공포정치에 맞서지 않으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이런 일들이 미국에서만 나타나는 일은 아니지요. 조금만 고개를 돌려 한국을 살피면 얼마나 많은 ‘타자화’가 일어나는지 그리고 수많은 희생양들이 만들어지고 씹히다 버려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어떤 이를 먹이삼아 줄기차게 어중이떠중이들이 달려들어 이빨을 꽂는 모습은 많은 이들을 오슬오슬하게 만들지요. 왜냐하면 누구든지 먹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짢음과 짜증이 번지도록 돌아다니며 악성댓글을 다는 알바들부터 나름 ‘정의’라는 깃발을 펄럭이며 몰려다니면서 조리돌림을 하는 뭇따래기들까지 한국 대중들도 자꾸만 ‘희생양’을 욕망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짓밟고 헐뜯을 때 잠깐이나마 쾌락을 느끼니까요. 한국사회에서 덧씌우는 격한 스트레스와 옴팡진 괴로움을 생뚱맞게도 애먼 누군가를 조지면서 풀어내는 것이죠. 희생양들이 자꾸 생겨나는 이유입니다.

희생양 만들기는 정당치 못한 비방행위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표현적 기능을 수행한다. 희생양 만들기는 이를 통해 적당한 대상을 공격하는 방식을 이용함으로써 [대중의] 좌절감을 정화한다. 80쪽

책의 지은이는 미국시민들이 공포정치에 맞서야 한다고 목소리 높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까운 미래에 수많은 희생양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죠. 저항하지 않으면 자유와 평등은커녕 희생양이 되지 않을까 마음 졸이다가 피의 축제가 벌어지면 시뻘건 눈으로 뛰어드는 세상이 될 테니까요. 이런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다면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정치구조와 사람들의 병든 마음에 대해 뼈저리게 고민해야 할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고요.

인권, 시민권, 그리고 법치주의를 지켜 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테러와의 전쟁은 미국 국경 안에서 시민권을 유린했습니다. 특히 미국 행정부는 <애국자법>울 통해 헌법에 명시된 행정부 권한을 넘어, 수많은 월권행위를 펼쳤습니다.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은 미국 국경 너머에서 더 많은 전쟁을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시민들은 미국 행정부의 공포정치에 저항해야 합니다. 이 공포정치가 미국 안팎의 민족적, 종교적 소수자들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민사회의 저항은 필수적입니다. 33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問 라이브러리 5
강수돌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사람들은 미국인이 공격적으로 사업을 벌이며, 기꺼이 경쟁에 뛰어든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이러한 고정관념의 이면에는 이와 정반대로 아주 수동적인 심리상태가 자리한다.

지난 10년간 내가 만난 미국인 중산층은 구조적인 변화를 꾀하는 것을 체념한 채 그냥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였다. 일자리의 안정성이 훼손되고 학교가 민간기업처럼 경영되는 것을 불가피한 일로 여겨지는 분위기다.『뉴캐피탈리즘』13쪽

 

지구마을이 미국화라는 황사로 덮이면서 동네방네 콜록거림이 터져 나오고 여기저기서 숨막힘에 쓰러지는 사람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메케함을 걷어내면서 메슥거림을 없애지 않고 ‘어쩔 수 없다’면서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습니다. 쪼그만 미국이 되고자 그동안 죽을힘을 쓴 한국은 미국처럼 하루에 수십 명이 죽어나가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울병에 시달리는 미국인들처럼 한국인들도 꿀꿀한 얼굴을 한 채 ‘그냥 이대로’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다음에 죽을 사람은 부디 ‘내’가 아니길 바라며!

 

카이스트에서 잇달아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한국사회는 눈을 똥그랗게 떴지만, 그렇다고 딱히 새로운 바뀜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마구 죽어나가는 걸 ‘현실의 규칙’으로 삼았으니까요. 카이스트 장례식장에 걸린 현수막의 글자가 얼마나 섬뜩하게 다가오는지요. “먼저가신” 이라는 말을 쉽사리 넘길 수 없습니다. 삶을 살다가 그저 먼저 갔다는 뜻으로 읽히지 않고 당신들이 ‘조금 먼저 갔을 뿐’ 우리도 곧 따라갈 거라는 뜻으로 읽히지 않는지요? 이렇게 살다간 머잖아 우리 모두는 죽을 거라고 카이스트는 일러줍니다.

 

어쩌다 사회가 경쟁으로만 치닫는 으스스한 쑥대밭이 되었는지 강수돌은『경쟁은 어떻게 내면화 되는가』에서 짚어냅니다. 왜 지금 행복하게 살려고 하기보다 지금은 경쟁을 통해 저 녀석을 쓰러뜨린 뒤 나중에 행복해질 거라는 ‘끔찍한 환상’을 사람들이 품고 사는지, 이러한 ‘반죽된 머릿속’을 어떻게 걸러내고 닦아내야 하는지, 지은이는 소담하면서도 뜨겁게 글을 적어갑니다.

 

옆 사람을 팔꿈치로 치면서 사회에서 파놓은 홈 따라 아득바득 달음박질쳐야 하는 사회를 ‘팔꿈치사회’라고 합니다. 산뜻하고 싱그러운 오늘을 꿈꾸며 삶의 하루하루를 긍정하며 살아가기보다 불행하게 살더라도 옆 사람이 더 불행하기를 바라는 ‘경쟁사회’를 일컫죠. 한국은 팔꿈치사회와 다른 사회를 상상하면서 이름을 붙이자면 ‘어깨동무사회’, ‘강강술래사회’를 이룩하려고 애쓰지 않고 더 날카롭고 딱딱한 팔꿈치를 저마다 키우기로 ‘합의’가 된 듯합니다. 그래서 모든 이들은 모든 이들을 상대로 치고받으며 서로를 물어뜯고 할퀴며 악다구니를 벌입니다. 곧장은 다투지 않더라도 머잖아 드잡이를 위해 주먹을 불에 달궈야 합니다. 모두가 숨을 몰아쉬면서도 정작 마음 놓고 쉬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예컨대 ‘팔꿈치사회’에서 심각한 문제는, 한 번 일등 한다고 영원히 일등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무수히 많은 새로운 경쟁자들이 호시탐탐 그 자리를 노린다. 시간이 갈수록 경쟁은 치열하다. 그것을 버텨내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지경이다. 36쪽

 

이러한 팔꿈치사회에서는 누군가의 옆구리를 자신도 치지만 자신 또한 누군가의 팔꿈치에 얻어맞을 수밖에 없기에 겉으론 멀쩡해도 속은 곯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하루 안절부절못하고 힘겨운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지요. 끝내 목숨까지 꺾입니다. 카이스트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팔꿈치사회의 결과를 고스란히 보여줬을 뿐, 매우 소스라칠 일이 아닙니다. 카이스트 사람들처럼 ‘빛을 받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날마다 사라지고 부서집니다.

 

카이스트는 팔꿈치로 옆 사람 때리기를 가장 빡세게 서로 하라는 전쟁터였지요. 오늘날 학교는 삶을 나누는 배움터가 아니라 암기를 날리는 싸움터로 변한 지 오래입니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10대들이 학교 밖으로 쏟아지고 있고, 그 안에서 참고 있는 10대들은 잿빛 얼굴로 책상 위에 쓰러져 자고 있지요. 아이들이 죽어나가도, 학교를 떠나도, 그러거나 말거나 경쟁이라는 채찍질은 더욱 호되게 아이들 등짝을 내려치고 아이들은 시험을 보는 순간 말짱 잊어버릴 먹물들을 머릿속에 들이 붓고 있습니다. 이렇게 제도권 학교에서 ‘정신의 삽질’을 당하며 닦달된 사람들은 시멘트인간이 되어 사회로 나옵니다.

 

한마디로. ‘죽임’의 교육인 것이다. 아이들을 점수에 주눅 들게 하고 새벽부터 밤까지 점수경쟁이라는 감옥에 가둔다. 즉 ‘너 죽고 나 살자!’라는 식이다. 주기적으로 시험이 있을 때마다 아이들은 시험에 대한 ‘공포’로 삶의 감각이 마비된다. 희로애락을 있는 그대로 느끼지 못한다. 57쪽

 

앞에 낭떠러지와 수렁이 있는데 도대체 왜 그리로만 뜀박질하여야 하는지 잠깐이나마 멈춘 뒤 차갑게 따져 물어야 하건만, ‘딴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어릴 때부터 길들여진 사람들은 그대로 허둥지둥 헐레벌떡 허겁지겁 휩쓸려갑니다. 이렇게 경쟁을 하면 ‘실력’도 생기고 ‘행복’해질 거라는 헛소리가 아직도 메아리치고 있고, 비록 행복하지 못할 지라도 나보다 너가 더 불행하기를 바라는 ‘딱한 영혼들’이 죽음의 달리기를 벌입니다. 얼마나 더 죽어야 벼랑으로 몸 던지는 일이 그칠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적 자본주의 / 자본주의 문명 창비신서 119
이매뉴엘 월러스틴 지음 / 창비 / 199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파시즘’을 곱씹으며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흐름입니다. 자본주의는 덜컹거리며 삐걱거리고, 그 안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울분과 부아가 부글부글 끓고 있어 언제 터질지 몰라 조마조마한 형편입니다. 시대의 권력을 쥐고 있는 자본가들은 파시즘을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파시즘을 풀어낼 방법을 차마 쓰지 못합니다. 그러려면 자신의 뱃살을 줄여야 하니까요. 그래서 뭇사람들의 노여움을 자신들이 아닌 대중문화로 돌리도록 애쓸 뿐이지요. 요새 걸핏하면 ‘희생양’을 찾아나서는 ‘눈 시뻘건 대중들의 모습’은 불평등한 삶의 괴로움을 어르고자 애쓰는 안타까운 푸닥거리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달래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파시즘은 전쟁을 뜻한다. (…) 자본주의 경제가 붕괴하고, 노동자 계급이 권력을 향해 전진할 때, 자본가들은 파시즘에서 탈출구를 찾는다. 그러나 파시즘은 자본가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근본적인 것은 파시즘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와 마찬가지로 파시스트 경제에서도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이윤 동기가 기본이다.『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347쪽

 

이제 자본가조차도 자본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끔찍한 사건들이 곳곳에서 쉴 새 없이 터져 나오기 때문에 금세 잊어버리고 새삼 놀라기를 되풀이하는 시대, 인류문명이 나아졌다는 믿음에 물음표가 생깁니다. 여러 허물과 말썽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물질이 넘쳐나고 잘 살게 되지 않았느냐고 되술래잡는 이들도 있겠으나,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역사는 진보하지 않았다고, 적어도 차갑게 짚어야 한다고, 잘라 말합니다. 인류는 ‘진보’한다고 불어대는 자본주의란 풍선을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에서 그는 날카로운 바늘을 콕 하고 갖다 댑니다.

 

역사적 자본주의가 가져다준 혜택은 과연 얼마나 진정한 것이었는가? 삶의 질이라는 면에서 일어난 변화는 과연 얼마나 컸는가? 이런 물음에 대해서 간단하게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이 이제 분명해졌을 것이다. ‘누구에게?’라고 우리는 물어야만 한다. 역사적 자본주의는 물질적 재화의 창출이란 면에서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지만, 또한 엄청난, 보수의 양극화를 가져왔다.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혜택을 입었지만,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실질적인 총소득과 삶의 질에서 실질적인 저하를 겪었다. 77쪽

 

월러스틴은 여러 자료들을 보여주면서 이래도 나아졌는지 따집니다. 그러니까 그냥저냥 ‘좋아졌어’라고 말하지 말고 “누구에게?”라고 물어야 하지요. 치솟은 건물들 밑에서 쓰러져있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노숙인들, 돈을 마구잡이로 긁어가는 한 줌의 부자들이 다니지 않는 뒷골목에서 폐지를 줍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일 하지 않으면서 땅과 건물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배를 불리는 늙다리들과 일자리가 없어 ‘4,000원’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젊은이들, 산더미처럼 버려지는 먹거리들과 지금 이 순간에도 굶주림에 죽어가는 세계의 아이들…….

 

이미 우리의 눈과 귀에는 ‘특정한 계급’의 모습과 목소리만 아른거리고 얼쩡거립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라고 자신도 모르게 생각하게 되지요. 그래서 눈 비비고 살피면, 좋아지고 있다는 말을 쉽사리 꺼내는 이들은 하나같이 얼굴에 기름기가 번들번들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게 됩니다. 한국이라는 작은 땅덩어리를 놓고 생각하면, 세상은 ‘진보’한 듯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한국이라는 ‘특권’을 지닌 곳에서 살아가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지구마을로 눈을 넓혀서 바라보면, 물질문명의 혜택을 받는 이들은 언제나 한 움큼도 안 됩니다.

 

세계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이 집단은 모르긴 해도 세계인구의 1/7을 넘어본 적이 결코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 ‘중간계층들’의 다수는 특정한 지리적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따라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핵심부국가들에서는 이들이 시민층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중간계층들이 한 국가의 정치적 경계 내에 고도로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핵심부지역을 규정하는 특징의 하나다. 129쪽

 

인류사를 놓고 보면, 자본주의 역사는 길게 잡아야 500년이 좀 넘을 뿐이고 공업화를 통한 자본주의의 빠른 몸놀림은 250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자본주의 또한 역사라는 커다란 흐름 앞에서 한 굽이일 따름이란 뜻이죠. 벌써 갈팡질팡하며 허물어지는 자본주의 체제를 바라보면서 ‘자본화된 인간’으로 살고자 아득바득하기보다 새로운 흐름을 읽어내어야 하지 않을까요? ‘진보’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고 ‘우리 모두’가 온 몸으로 기어갈 때, 간신히 얻어낼 수 있을 테니까 말이지요.

 

2050년이나 2100년에 자본주의 문명을 되돌아본다면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우리는 상당히 불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체제에 대하여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막 지나온 체제, 즉 자본주의 문명의 체제를 깎아내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본주의 문명의 악들을 강조할 것이며, 그것이 성취한 것이면 무조건 무시하게 될 것이다. 3000년경에 이르면 그것은 인류사의 흥미진진한 실천으로, 다시 말해 예외적이고도 상궤를 벗어난 시기이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좀 더 평등한 세계로 가는 아주 긴 이행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것은 본래 인간 착취의 불안정한 형태였으며, 그 후의 세계는 그보다 훨씬 더 안정된 형태의 체제들로 복귀했다고 기억될지도 모른다. 영광이란 이렇게 덧없는 것! 17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지자본주의 - 현대 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 아우또노미아총서 27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본주의 연구회’를 들쑤신 정부권력을 보면 오히려 ‘자신도 모르게’ 자본주의를 생각하게 됩니다. 왜 자본주의를 연구하지 못하게 막는지 궁금하니까요. 참말로 얄망궂게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를 연구하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 배우고 외운 ‘믿음’들에 어깃장을 놓거나 흠칫하지 않는 걸 보면 그것들은 자본주의가 ‘허락’한 것들이겠지요. 허락받지 않은 지식은 연구하면 안 되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사회입니다. 한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데 어찌 된 게 내 머릿속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왜 ‘자본’일까요?

 

자본주의란 말은 무의식처럼 눌려있습니다. 사람들은 제도권에서 길러지면서 자본주의를 생각할 겨를도 없고 생각할 이유도 잘 찾지 못합니다. 그동안 배워온 대로 아니면 너무 삶이 고달프기에, 자연스럽게 뻗어나가는 생각의 넝쿨을 애써 잘라내지요. 때론 울컥하면서 노여움이 치솟을지라도, 이 체제 안에서 살다보니 자본주의란 불길에 숱하게 ‘데었기’ 때문에 자신은 그러지 않으려고 하지만 고분고분한 몸가짐이 먼저 튀어나옵니다. 자본주의란 도깨비가 휘두르는 몽둥이에 ‘제발 나만은’ 맞지 않기를 바라며 우리 모두는 어련히 눈치를 보면서 입을 꾹 다뭅니다.

 

하지만 ‘살아남고자’ 그저 다소곳하게 하란 거만 빡세게 해서는 안 되는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아주 거세게 몰아치는 자본주의 물살이기에 가만히 있다가는 “낯설은 풍경들이 지나치는 오후의 버스에서 깨어 당황하는 아이 같은 우리”(브로콜리 너마저 - 졸업)가 될 따름이지요. “어디쯤 가야만 하는지 벌써 지나친 건 아닌지” 알 수 없어 불안한 시대, 손을 뻗어 ‘자본주의의 맨살’을 더듬어야 할 때입니다.

 

‘21세기의 자본론’이란 자리에 도전한 인지자본주의

 

『인지자본주의』는 수많은 자료들과 문헌들로 촘촘하게 잘 다루면서 변해가는 자본주의를 날카롭게 파헤치며 ‘21세기의 자본론’이란 자리에 도전합니다. 도대체 지구동네가 왜 이렇게 시끌벅적한지, 앞날은 어디로 나아갈지 궁금한 이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줄 터입니다. 이미 고샅고샅 생겨났지만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한 여러 변화들을 엮으며 이름을 붙입니다. 바로 상업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를 잇는 제3기 자본주의, 바야흐로 인지자본주의!

 

부와 가난의 양극화는 권력 대 무력無力의 양극극화로, 탐욕의 끝 모르는 질주 대 희망의 추락이라는 양극화로, 마천루 높은 곳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삶 대 뒷골목 쓰레기통을 뒤지는 삶의 양극화로 이어진다. 조산早産된 21세기는 1968년 혁명에서 시작하여 부채위기로 점철되었고 냉전을 제국적 내전들과 테러에 대한 전쟁으로 대체했으며 2008년의 금융위기로 조로早老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1968년 혁명으로 끝난 20세기에도 단기短期였지만(1917-1968), 21세기는 더 단기인 세기로 끝날지 모른다. 2011년 아랍 혁명이 그 임종의 징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조로하고 있는 21세기의 자본주의를 인지자본주의라는 말로 명명했다. 12~13쪽

 

인지자본주의는 사람들의 삶 구석구석을 주무르고 손발놀림 하나하나를 반죽하려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짜임새입니다. 자본주의는 지난날처럼 그저 사람들의 노동을 쥐어짜는 데 그치지 않고 어느덧 “우리의 생명, 지각, 지식, 감정, 마음, 소통, 욕망, 행동 등의 움직임을 조직하고 그것의 성과를 수탈하고 착취”(23쪽)하고 있으니까요. 자신의 욕망에 늘 허덕이고, 무언가 잘못된 거 같지만 그것이 뭔지 알 수 없어 두려운 요즘,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아니라 아프면 그 이유를 찾아서 고쳐야 아픔이 멈출 수 있기에 이 책은 고통 받는 이들에게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도록 생각의 힘을 북돋워줍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안다면, 거기서부터 새롭게 시작할 마음이 일 테니까요.

 

어떻게 사람들의 생명과 삶을 안전하게 보장할 것인가

 

많은 이들이 ‘고용의 안정성’에 목매고 그에 따라 목메는 일이 자주 벌어집니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이 될까봐 안절부절못하고 비정규직은 실업자가 될까봐 조마조마하고, 실업자들은 암만 애써도 일자리가 생기지 않자 푸념과 짜증에 울컥합니다. 이에 따라 자본가는 더 거들먹거리고, 사람들은 ‘완전고용’이라든지 ‘정규직화’를 요구하게 됩니다. 자본에 짜먹히다가 버려지는 사람들을 위한 안전망을 갖춰야 마땅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지은이는 새로운 흐름에 눈길을 줍니다. 이러한 불안정은 “노동자들이 자본관계와 고용관계에서 이탈하려는 욕구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337쪽)이기도 하니까요.

 

프리터는 현대 사회에서 독특한 삶에 대한 욕구가 표현되는 삶의 한 형태로 출현했다. 정규고용을 회피하면서 혹은 정규고용으로부터 배제되면서 ‘욕망하는 삶’을 살아보려고 하는 프리터들은 삶의 다른 형식을 실험하곤 했다. 프리터의 확산은 (그 자체가 새로운 삶으로 되지는 못했고 신자유주의가 이러한 실험들을 이미 포섭해버렸지만) 오늘날 새로운 삶의 잠재력이 무르익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임이 분명하다. 338쪽



몇 푼을 쥐어주면서 모지락스럽게 짜먹는 자본주의에 맞서서 생각 있는 예전사람들은 ‘노동조합’을 만들고 ‘정권’을 잡으려고 애썼다면, 요새 사람들은 아예 자본주의의 소용돌이로부터 벗어난 삶을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귀농하는 많은 사람들, 여기저기서 생겨나는 공동체, 돈을 많이 벌려고 아득바득하기보다 조금 벌더라도 즐겁게 살아가려는 젊은이들은 ‘새로운 시대’의 낌새들이죠. 저들에게 ‘고용’이 되어야 먹고 산다는 믿음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 몸을 놀리고 쓰는 일 모두가 ‘생산’이고, “소득은 그 자체로 직접적으로 생산적인 삶의 호흡이자 순환의 일부”(337쪽)가 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으니까요.

 

지배자들에게 삶을 넘기면서 매달리기보다 ‘우리 스스로’ 삶을 긍정하고 함께 자아낼 때, 우리의 삶은 안전할 수 있습니다. 끝없이 벌어지는 전쟁과 생태계파괴로 빚어지는 자연재해, 하루에도 수십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누구도 손쓰지 못하고 언제 잘릴지 몰라 날마다 흔들리며 쉴 새 없이 옆 사람을 밀쳐내며 일중독과 우울병으로 허우적거리는 사회에서 삶이 자유롭고 멀쩡할 리 없습니다. 이제는 자기 삶을 지키고자 자본주의 욕망에서 벗어나려 땀방울을 흘려야 하는 때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삶과 사회의 안녕을 지키는 진짜 ‘안보’겠고요.

 

오늘날의 노동이 이미 고용/비고용의 틀 너머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비고용의 사람들을 고용관계 속으로 진입시킬 것인가라는 문제가 허구적 문제임을 보여준다. 필요하고 또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람들의 생명과 삶을 안전하게 보장할 것인가라는 문제이며, 이를 위해, 오늘날 전 지구적 수준에서 사회화된 노동에 기초하여 재생산되고 있는 사회적 부를 어떻게 공통적으로 분배할 것이며 부의 공통적 생산을 어떻게 촉진시킬 것인가의 문제이다. 315쪽

 

삶의 혁신과 행복을 위한 인지혁명이 필요한 때

 

그렇기에 다시 정치성이 솟구쳐야 하는 때입니다. 정치성은 잘 알지도 못하는 대표자를 뽑는 일이 아니라 ‘시대의 방향을 가늠하며 우리의 삶을 만들어내는 모든 몸짓’이니까요. 자본주의에 자기 삶을 내맡기지 않고 ‘우리 모두’가 스스로 사회를 다스리고자 하는 바람이 정치성입니다. 이미 자본주의는 삐걱거리며 흐느적거립니다. “2008년 위기 이후 탈성장은 앞으로 성취해야 할 과제로 주어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지금 겪고 있는 현실이자 통증”(499쪽)으로 나타났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분석처럼, 자본주의는 더 많은 이윤을 찾아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키고 지구를 통째로 집어삼켰지만, 이제 그마저도 할 곳이 없습니다. 자본의 이빨에 물리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 소통, 감정, 욕망, 정서까지 쥐어짜먹으려는 ‘인지자본주의’가 생겨났고 거기서 이득을 얻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지자본주의는 사람들의 등골까지 뽑아먹는 그악스러움과 함께 새로움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 노릇을 합니다. 힘차게 뿜어지는 사람들의 인지능력과 그에 따라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사람들의 욕망, 이것이 ‘공통’으로 만나면서 변화라는 싹은 진작 돋아나고 있습니다.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봄바람은 불어옵니다.

 

인지의 자본주의적 사용이 궁지에 몰린 지금이야말로 인지력과 인지관계의 진정한 혁명이 필요하다. 축적을 위한 인지의 전용이 아니라 삶의 혁신과 행복을 위한 인지혁명이 필요한 때이다. 부를 구매력과 동일시하고, 쾌락을 소유와 동일시하며, 노동과 소득 사이에 엄격한 상관관계를 설정하고, 성장을 광적으로 추구하는 지금까지의 경제주의적 인지양식을 해체하고 부와 쾌, 그리고 행복에 대한 질적으로 다른 인지양식을 창출해야 할 때이다. 이것이 오늘날 경제적 침체depression와 심리적 우울depression의 중첩, 다시 말해 노동의 불안정과 같은 사회경제적 불안정과 사회에 만연된 심리적 불안감의 중첩이라는 병리적 현실에 대한 실제적 치유를 가능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50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있음에서 함으로 - 베른하르트 푀크르젠과의 대담, 인지생물학의 거장 움베르또 마뚜라나가 선언하는 인지 패러다임의 새로운 전환, 다알로고스총서 3
베른하르트 푀르크젠 외 지음, 서창현 옮김 / 갈무리 / 200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연을 견딜 수 있을까.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고 신의 모습을 닮았으며 지구는 자신을 꼭짓점 삼아 돌아간다고 믿고 있는, 믿고 싶은, 믿으려고 바동거리는 이들에게 다윈은 처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지만 금세 받아들여졌습니다. 비록 사람이 진화해왔지만 생명진화의 끝이 사람이고 사람은 모든 생명들보다 앞서있으니까요. 여전히 사람은 숨탄것들의 꼭대기에 올라설 수 있었기 때문에 진화는 ‘인간중심주의’를 더 단단해 해주었지요.

 

그러나 생명들이 하나의 줄을 따라 ‘진보’한 게 아니라 수많은 우연 끝에 오늘날에 이르렀다면? 사람들의 믿음을 바닥부터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마뚜라나는 자신의 동무이자 제자인 바렐라와 함께 쓴『앎의 나무』에서 “진화란 자기 생성과 적응이 보존되는 가운데 일어나는 자연표류”라면서 가슴팍을 휘젓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진화란 오히려 방랑하는 한 예술가와 비슷하다. 그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여기저기에서 실 한 가닥, 깡통 한 개, 나무 한 토막을 주어 그것들의 구조와 주위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그것들을 합친다. 그가 그렇게 합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저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가 떠돌아다니면서 서로 어울리게 연결해 놓은 부분들이나 형태들로부터 온갖 복잡한 형태들이 생겨난다. 여기에는 어떤 계획도 없으며 그저 자연스럽게 표류하는 가운데 생겨났을 뿐이다. 우리 모두도 이와 같이 생겨났다. 우리가 생겨나는 데에는 정체와 번식력의 보존이라는 법칙 이외의 어떤 다른 법칙도 필요하지 않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를 포함한 모든 생명들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장미이든 가재든 칠레 산티아고의 경영자이든……. 135~136쪽

 

생물학자들이나 인지신경학자, 그리고 인공두뇌학자들 사이에서 이름이 오르내렸던 마뚜라나의 놀라운 개념들은 그저 신경생물학과나 실험실에 머무르지 않고 경제경영학이나 사회학, 정신요법, 교육학에까지 미치며 ‘신경생리학의 에디트 피아프’라 불리었습니다. 한 시대를 뒤흔든 과학자이지만 아직 한국에 낯선 그의 사상과 연구들을 찬찬히 되짚는 책이『있음에서 함으로』입니다. 함부르크 대학에서 저널리즘과 소통을 가르치는 푀르크젠이 마뚜라나를 찾아가 오랜 시간 공들여 이야기 나눈 걸 갈무리하여 내놓았네요.

 

관찰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흔히들 ‘객관성’이 있다고 여깁니다. 객관은 주체와 동떨어져 있으며 누구나 객관을 받아들이고 고개 숙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저기에’ 객관성이 있고 보편타당한 ‘실재’가 있으니 그걸 알아내는 것이 과학이고 연구라는 말들이 넘쳐나고, 이런 말들 앞에 움츠러듭니다. 뭔가 저들의 말처럼 하지 않으면 안 될 거 같고, 그들이 떠드는 현실과 다르게 느껴지는, 내가 바라보는 현실은 그릇된 거 같아서 지레 주눅이 들기도 하지요.

 

하지만 마뚜라나는 어떠한 하나의 객관성이란 없으며 “말해지는 모든 것은 관찰자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다”라고 얘기합니다. 절대성을 지닌 옳음이란 없으며 사람들이 떠받드는 진리에는 관찰자가 쏙 빠진 채 보편성만 되뇌어지지만. 거기엔 이미 언제나 ‘특정한 관찰자’가 들어가 있다고 딱 부러지게 말합니다. 그 무엇이든 누군가 보고 자신의 언어에 따라 그렇게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있는 것이죠.

 

관찰자는 모든 것의 원천입니다. 관찰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관찰자는 모든 지식의 기초입니다. 인간 자신, 세계 그리고 우주와 관계되어 있는 모든 주장의 기초인 것입니다. 관찰자의 소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종말과 소멸을 의미할 것입니다. 지각하고, 말하고, 기술하고, 설명하는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43~44쪽

 

마뚜라나의 관찰자라는 개념은 관찰자와 따로 존재하는 ‘객관성’을 허물어뜨립니다. 무엇이든 관찰자와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관찰자 개념은 하나의 우주가 있고 거기 안에서 그 우주의 법칙을 깨치려고 애쓰면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세상은 여러 개의 우주(64쪽)이며 “내가 가는 곳이 모두 우주이다”(45쪽)이며 나와 너는 기대어 존재하며 살아간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이해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낳는다

 

칸트는 절대 실재, 물자체와 겉으로 드러난 것들의 세계를 나누면서 사람은 물자체를 알 수 없으며 겉으로 나오는 현상들만 알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칸트에 따르면, 물자체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저마다 ‘구성한 현실’만을 알 수 있지요. 푸른 안경을 쓰고 태어난 이에게는 세계가 푸르게 비칠 수밖에 없고 노란 안경을 쓴 이에게는 세상이 노랗게 보이기에 ‘세계 그 자체’는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게 칸트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칸트에게서는 ‘객관성’이 있는데, 사람들이 이미(a priori) 갖고 태어나는 감성과 오성이라는 정신의 틀(innate forms)을 통해 세계는 구성되어 ‘질서 잡힌 합리성의 체계’로 나타날 수 있지요.

 

하지만 마뚜라나는 어떻게 절대 실재가 있다고 얘기하는지, 그와 함께 물자체를 알 수 없다고 잘라 말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이냐며 오히려 되묻습니다. 자기 바깥에 실재가 있냐 없냐, 있다면 인식할 수 있냐 없냐를 두고 철학자들이 옥신각신할 때, 마뚜라나는 관찰자와 떨어진 준거점은 없으며 관찰자가 연구의 대상이자 연구의 수단이라면서, 생각의 흐름 자체를 아예 옮겨버립니다. 이제 ‘관찰자’를 모든 생각의 출발점으로서 다시 생각해야만 하지요.

 

이러한 마뚜라나의 주장은 자칫하면 ‘모든 건 내 마음대로’ 라는 유아론(唯我論)으로 비칠 수 있으나, 그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평등한 실재들을 믿는다는 의미에서 때때로 자신을 “슈퍼 실재론자”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생각은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그저 상대주의가 아니라 어떠한 신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의 진리에 목숨을 걸지 않으며 그러한 믿음들이 내가 관찰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돌아보게 해줍니다. 자신을 성찰하면서 깨달음을 얻게 되어 새로운 책임감을 불러일으키는 셈이지요.

 

우리가 관찰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래서 구분을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깨닫는 것. 우리는 새로운 체험 영역에 도달한 것입니다. 우리의 깨달음을 깨닫는 것 그리고 우리의 이해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낳을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구분 작동들을 통해 우리가 창조하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낳을 수 있습니다. 57쪽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으로써 살아가는 세상을 내어 놓는다

 

푀르크젠에 따르면, 마뚜라나는 신경해부학을 뒤따라 생물인식론을 지나 생물윤리학,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물인류학에 다다릅니다.(307쪽) 그저 시각세포가 어떻게 반응하고 생명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실험하고 연구하는 학자를 넘어 절대 진리가 있을 수 없으며 이러한 믿음이 남을 짓누르는 폭력을 낳음을 일러주는 사상가가 됩니다. 자신의 개념을 잘못 쓰고 있다는 마뚜라나의 얘기에도 불구하고 그의 꿰뚫어봄들이 널리 퍼진 까닭은 여태 알고 있던 생각과 전혀 다른 생각들을 던져주며 자신의 ‘생겨먹은 꼴’을 돌아보게 해주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사랑이 없다면 사회현상들이 있을 수 없다며 마뚜라나는 ‘사랑의 생물학’을 얘기합니다. 우리는 흔히 사회관계가 중요하다며 사람사이에 특별한 감정을 지닙니다. 이러한 감정의 밑절미를 알아챈다면, 사회관계라 부르는 모든 관계들에 사랑이 자리 잡고 있으며, 감정들이 이끄는 대로 사람은 움직인다는 걸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몸짓이나 한 일들이 어떠한 결과를 낳는지 성찰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감정이라는 것이죠. 이렇게 사랑이 윤리를 낳습니다.

 

세상이 자신에게 쳐놓은 도덕이라는 그물과 하지 않으면 처벌을 하겠다는 사슬에 걸려 어떠한 바깥의 규칙을 따르는 게 아니라 내가 벌인 일들이 어떠한 결과를 낳는지 돌아봄으로써 자신의 윤리를 이룰 수 있지요. 사랑에 바탕을 둔 윤리학이 피어날 수 있습니다. 정해진 계율에 붙들려서 그대로 하기보다는 남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중요하게 여기며 그들의 반응과 행복을 살피면서 자신의 삶을 꾸려갈 테니까요. 내가 살아감으로서 삶이 만들어지니, 살고 싶은 삶을 살라고 마뚜라나는 힘주어 말합니다.

 

우리가 직접 체험하고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을 타자들에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기회주의일 뿐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으로써 살아가는 세상을 내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바로 그것을 해야 합니다. 33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