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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자본주의 / 자본주의 문명 ㅣ 창비신서 119
이매뉴엘 월러스틴 지음 / 창비 / 1993년 4월
평점 :
‘파시즘’을 곱씹으며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흐름입니다. 자본주의는 덜컹거리며 삐걱거리고, 그 안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울분과 부아가 부글부글 끓고 있어 언제 터질지 몰라 조마조마한 형편입니다. 시대의 권력을 쥐고 있는 자본가들은 파시즘을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파시즘을 풀어낼 방법을 차마 쓰지 못합니다. 그러려면 자신의 뱃살을 줄여야 하니까요. 그래서 뭇사람들의 노여움을 자신들이 아닌 대중문화로 돌리도록 애쓸 뿐이지요. 요새 걸핏하면 ‘희생양’을 찾아나서는 ‘눈 시뻘건 대중들의 모습’은 불평등한 삶의 괴로움을 어르고자 애쓰는 안타까운 푸닥거리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달래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파시즘은 전쟁을 뜻한다. (…) 자본주의 경제가 붕괴하고, 노동자 계급이 권력을 향해 전진할 때, 자본가들은 파시즘에서 탈출구를 찾는다. 그러나 파시즘은 자본가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근본적인 것은 파시즘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와 마찬가지로 파시스트 경제에서도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이윤 동기가 기본이다.『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347쪽
이제 자본가조차도 자본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끔찍한 사건들이 곳곳에서 쉴 새 없이 터져 나오기 때문에 금세 잊어버리고 새삼 놀라기를 되풀이하는 시대, 인류문명이 나아졌다는 믿음에 물음표가 생깁니다. 여러 허물과 말썽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물질이 넘쳐나고 잘 살게 되지 않았느냐고 되술래잡는 이들도 있겠으나,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역사는 진보하지 않았다고, 적어도 차갑게 짚어야 한다고, 잘라 말합니다. 인류는 ‘진보’한다고 불어대는 자본주의란 풍선을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에서 그는 날카로운 바늘을 콕 하고 갖다 댑니다.
역사적 자본주의가 가져다준 혜택은 과연 얼마나 진정한 것이었는가? 삶의 질이라는 면에서 일어난 변화는 과연 얼마나 컸는가? 이런 물음에 대해서 간단하게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이 이제 분명해졌을 것이다. ‘누구에게?’라고 우리는 물어야만 한다. 역사적 자본주의는 물질적 재화의 창출이란 면에서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지만, 또한 엄청난, 보수의 양극화를 가져왔다.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혜택을 입었지만,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실질적인 총소득과 삶의 질에서 실질적인 저하를 겪었다. 77쪽
월러스틴은 여러 자료들을 보여주면서 이래도 나아졌는지 따집니다. 그러니까 그냥저냥 ‘좋아졌어’라고 말하지 말고 “누구에게?”라고 물어야 하지요. 치솟은 건물들 밑에서 쓰러져있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노숙인들, 돈을 마구잡이로 긁어가는 한 줌의 부자들이 다니지 않는 뒷골목에서 폐지를 줍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일 하지 않으면서 땅과 건물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배를 불리는 늙다리들과 일자리가 없어 ‘4,000원’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젊은이들, 산더미처럼 버려지는 먹거리들과 지금 이 순간에도 굶주림에 죽어가는 세계의 아이들…….
이미 우리의 눈과 귀에는 ‘특정한 계급’의 모습과 목소리만 아른거리고 얼쩡거립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라고 자신도 모르게 생각하게 되지요. 그래서 눈 비비고 살피면, 좋아지고 있다는 말을 쉽사리 꺼내는 이들은 하나같이 얼굴에 기름기가 번들번들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게 됩니다. 한국이라는 작은 땅덩어리를 놓고 생각하면, 세상은 ‘진보’한 듯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한국이라는 ‘특권’을 지닌 곳에서 살아가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지구마을로 눈을 넓혀서 바라보면, 물질문명의 혜택을 받는 이들은 언제나 한 움큼도 안 됩니다.
세계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이 집단은 모르긴 해도 세계인구의 1/7을 넘어본 적이 결코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 ‘중간계층들’의 다수는 특정한 지리적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따라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핵심부국가들에서는 이들이 시민층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중간계층들이 한 국가의 정치적 경계 내에 고도로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핵심부지역을 규정하는 특징의 하나다. 129쪽
인류사를 놓고 보면, 자본주의 역사는 길게 잡아야 500년이 좀 넘을 뿐이고 공업화를 통한 자본주의의 빠른 몸놀림은 250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자본주의 또한 역사라는 커다란 흐름 앞에서 한 굽이일 따름이란 뜻이죠. 벌써 갈팡질팡하며 허물어지는 자본주의 체제를 바라보면서 ‘자본화된 인간’으로 살고자 아득바득하기보다 새로운 흐름을 읽어내어야 하지 않을까요? ‘진보’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고 ‘우리 모두’가 온 몸으로 기어갈 때, 간신히 얻어낼 수 있을 테니까 말이지요.
2050년이나 2100년에 자본주의 문명을 되돌아본다면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우리는 상당히 불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체제에 대하여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막 지나온 체제, 즉 자본주의 문명의 체제를 깎아내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본주의 문명의 악들을 강조할 것이며, 그것이 성취한 것이면 무조건 무시하게 될 것이다. 3000년경에 이르면 그것은 인류사의 흥미진진한 실천으로, 다시 말해 예외적이고도 상궤를 벗어난 시기이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좀 더 평등한 세계로 가는 아주 긴 이행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것은 본래 인간 착취의 불안정한 형태였으며, 그 후의 세계는 그보다 훨씬 더 안정된 형태의 체제들로 복귀했다고 기억될지도 모른다. 영광이란 이렇게 덧없는 것! 1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