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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음에서 함으로 - 베른하르트 푀크르젠과의 대담, 인지생물학의 거장 움베르또 마뚜라나가 선언하는 인지 패러다임의 새로운 전환, 다알로고스총서 3
베른하르트 푀르크젠 외 지음, 서창현 옮김 / 갈무리 / 2006년 4월
평점 :
우연을 견딜 수 있을까.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고 신의 모습을 닮았으며 지구는 자신을 꼭짓점 삼아 돌아간다고 믿고 있는, 믿고 싶은, 믿으려고 바동거리는 이들에게 다윈은 처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지만 금세 받아들여졌습니다. 비록 사람이 진화해왔지만 생명진화의 끝이 사람이고 사람은 모든 생명들보다 앞서있으니까요. 여전히 사람은 숨탄것들의 꼭대기에 올라설 수 있었기 때문에 진화는 ‘인간중심주의’를 더 단단해 해주었지요.
그러나 생명들이 하나의 줄을 따라 ‘진보’한 게 아니라 수많은 우연 끝에 오늘날에 이르렀다면? 사람들의 믿음을 바닥부터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마뚜라나는 자신의 동무이자 제자인 바렐라와 함께 쓴『앎의 나무』에서 “진화란 자기 생성과 적응이 보존되는 가운데 일어나는 자연표류”라면서 가슴팍을 휘젓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진화란 오히려 방랑하는 한 예술가와 비슷하다. 그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여기저기에서 실 한 가닥, 깡통 한 개, 나무 한 토막을 주어 그것들의 구조와 주위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그것들을 합친다. 그가 그렇게 합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저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가 떠돌아다니면서 서로 어울리게 연결해 놓은 부분들이나 형태들로부터 온갖 복잡한 형태들이 생겨난다. 여기에는 어떤 계획도 없으며 그저 자연스럽게 표류하는 가운데 생겨났을 뿐이다. 우리 모두도 이와 같이 생겨났다. 우리가 생겨나는 데에는 정체와 번식력의 보존이라는 법칙 이외의 어떤 다른 법칙도 필요하지 않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를 포함한 모든 생명들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장미이든 가재든 칠레 산티아고의 경영자이든……. 135~136쪽
생물학자들이나 인지신경학자, 그리고 인공두뇌학자들 사이에서 이름이 오르내렸던 마뚜라나의 놀라운 개념들은 그저 신경생물학과나 실험실에 머무르지 않고 경제경영학이나 사회학, 정신요법, 교육학에까지 미치며 ‘신경생리학의 에디트 피아프’라 불리었습니다. 한 시대를 뒤흔든 과학자이지만 아직 한국에 낯선 그의 사상과 연구들을 찬찬히 되짚는 책이『있음에서 함으로』입니다. 함부르크 대학에서 저널리즘과 소통을 가르치는 푀르크젠이 마뚜라나를 찾아가 오랜 시간 공들여 이야기 나눈 걸 갈무리하여 내놓았네요.
관찰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흔히들 ‘객관성’이 있다고 여깁니다. 객관은 주체와 동떨어져 있으며 누구나 객관을 받아들이고 고개 숙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저기에’ 객관성이 있고 보편타당한 ‘실재’가 있으니 그걸 알아내는 것이 과학이고 연구라는 말들이 넘쳐나고, 이런 말들 앞에 움츠러듭니다. 뭔가 저들의 말처럼 하지 않으면 안 될 거 같고, 그들이 떠드는 현실과 다르게 느껴지는, 내가 바라보는 현실은 그릇된 거 같아서 지레 주눅이 들기도 하지요.
하지만 마뚜라나는 어떠한 하나의 객관성이란 없으며 “말해지는 모든 것은 관찰자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다”라고 얘기합니다. 절대성을 지닌 옳음이란 없으며 사람들이 떠받드는 진리에는 관찰자가 쏙 빠진 채 보편성만 되뇌어지지만. 거기엔 이미 언제나 ‘특정한 관찰자’가 들어가 있다고 딱 부러지게 말합니다. 그 무엇이든 누군가 보고 자신의 언어에 따라 그렇게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있는 것이죠.
관찰자는 모든 것의 원천입니다. 관찰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관찰자는 모든 지식의 기초입니다. 인간 자신, 세계 그리고 우주와 관계되어 있는 모든 주장의 기초인 것입니다. 관찰자의 소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종말과 소멸을 의미할 것입니다. 지각하고, 말하고, 기술하고, 설명하는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43~44쪽
마뚜라나의 관찰자라는 개념은 관찰자와 따로 존재하는 ‘객관성’을 허물어뜨립니다. 무엇이든 관찰자와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관찰자 개념은 하나의 우주가 있고 거기 안에서 그 우주의 법칙을 깨치려고 애쓰면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세상은 여러 개의 우주(64쪽)이며 “내가 가는 곳이 모두 우주이다”(45쪽)이며 나와 너는 기대어 존재하며 살아간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이해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낳는다
칸트는 절대 실재, 물자체와 겉으로 드러난 것들의 세계를 나누면서 사람은 물자체를 알 수 없으며 겉으로 나오는 현상들만 알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칸트에 따르면, 물자체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저마다 ‘구성한 현실’만을 알 수 있지요. 푸른 안경을 쓰고 태어난 이에게는 세계가 푸르게 비칠 수밖에 없고 노란 안경을 쓴 이에게는 세상이 노랗게 보이기에 ‘세계 그 자체’는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게 칸트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칸트에게서는 ‘객관성’이 있는데, 사람들이 이미(a priori) 갖고 태어나는 감성과 오성이라는 정신의 틀(innate forms)을 통해 세계는 구성되어 ‘질서 잡힌 합리성의 체계’로 나타날 수 있지요.
하지만 마뚜라나는 어떻게 절대 실재가 있다고 얘기하는지, 그와 함께 물자체를 알 수 없다고 잘라 말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이냐며 오히려 되묻습니다. 자기 바깥에 실재가 있냐 없냐, 있다면 인식할 수 있냐 없냐를 두고 철학자들이 옥신각신할 때, 마뚜라나는 관찰자와 떨어진 준거점은 없으며 관찰자가 연구의 대상이자 연구의 수단이라면서, 생각의 흐름 자체를 아예 옮겨버립니다. 이제 ‘관찰자’를 모든 생각의 출발점으로서 다시 생각해야만 하지요.
이러한 마뚜라나의 주장은 자칫하면 ‘모든 건 내 마음대로’ 라는 유아론(唯我論)으로 비칠 수 있으나, 그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평등한 실재들을 믿는다는 의미에서 때때로 자신을 “슈퍼 실재론자”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생각은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그저 상대주의가 아니라 어떠한 신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의 진리에 목숨을 걸지 않으며 그러한 믿음들이 내가 관찰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돌아보게 해줍니다. 자신을 성찰하면서 깨달음을 얻게 되어 새로운 책임감을 불러일으키는 셈이지요.
우리가 관찰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래서 구분을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깨닫는 것. 우리는 새로운 체험 영역에 도달한 것입니다. 우리의 깨달음을 깨닫는 것 그리고 우리의 이해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낳을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구분 작동들을 통해 우리가 창조하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낳을 수 있습니다. 57쪽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으로써 살아가는 세상을 내어 놓는다
푀르크젠에 따르면, 마뚜라나는 신경해부학을 뒤따라 생물인식론을 지나 생물윤리학,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물인류학에 다다릅니다.(307쪽) 그저 시각세포가 어떻게 반응하고 생명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실험하고 연구하는 학자를 넘어 절대 진리가 있을 수 없으며 이러한 믿음이 남을 짓누르는 폭력을 낳음을 일러주는 사상가가 됩니다. 자신의 개념을 잘못 쓰고 있다는 마뚜라나의 얘기에도 불구하고 그의 꿰뚫어봄들이 널리 퍼진 까닭은 여태 알고 있던 생각과 전혀 다른 생각들을 던져주며 자신의 ‘생겨먹은 꼴’을 돌아보게 해주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사랑이 없다면 사회현상들이 있을 수 없다며 마뚜라나는 ‘사랑의 생물학’을 얘기합니다. 우리는 흔히 사회관계가 중요하다며 사람사이에 특별한 감정을 지닙니다. 이러한 감정의 밑절미를 알아챈다면, 사회관계라 부르는 모든 관계들에 사랑이 자리 잡고 있으며, 감정들이 이끄는 대로 사람은 움직인다는 걸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몸짓이나 한 일들이 어떠한 결과를 낳는지 성찰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감정이라는 것이죠. 이렇게 사랑이 윤리를 낳습니다.
세상이 자신에게 쳐놓은 도덕이라는 그물과 하지 않으면 처벌을 하겠다는 사슬에 걸려 어떠한 바깥의 규칙을 따르는 게 아니라 내가 벌인 일들이 어떠한 결과를 낳는지 돌아봄으로써 자신의 윤리를 이룰 수 있지요. 사랑에 바탕을 둔 윤리학이 피어날 수 있습니다. 정해진 계율에 붙들려서 그대로 하기보다는 남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중요하게 여기며 그들의 반응과 행복을 살피면서 자신의 삶을 꾸려갈 테니까요. 내가 살아감으로서 삶이 만들어지니, 살고 싶은 삶을 살라고 마뚜라나는 힘주어 말합니다.
우리가 직접 체험하고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을 타자들에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기회주의일 뿐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으로써 살아가는 세상을 내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바로 그것을 해야 합니다. 3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