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자본주의 - 현대 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 아우또노미아총서 27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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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연구회’를 들쑤신 정부권력을 보면 오히려 ‘자신도 모르게’ 자본주의를 생각하게 됩니다. 왜 자본주의를 연구하지 못하게 막는지 궁금하니까요. 참말로 얄망궂게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를 연구하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 배우고 외운 ‘믿음’들에 어깃장을 놓거나 흠칫하지 않는 걸 보면 그것들은 자본주의가 ‘허락’한 것들이겠지요. 허락받지 않은 지식은 연구하면 안 되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사회입니다. 한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데 어찌 된 게 내 머릿속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왜 ‘자본’일까요?

 

자본주의란 말은 무의식처럼 눌려있습니다. 사람들은 제도권에서 길러지면서 자본주의를 생각할 겨를도 없고 생각할 이유도 잘 찾지 못합니다. 그동안 배워온 대로 아니면 너무 삶이 고달프기에, 자연스럽게 뻗어나가는 생각의 넝쿨을 애써 잘라내지요. 때론 울컥하면서 노여움이 치솟을지라도, 이 체제 안에서 살다보니 자본주의란 불길에 숱하게 ‘데었기’ 때문에 자신은 그러지 않으려고 하지만 고분고분한 몸가짐이 먼저 튀어나옵니다. 자본주의란 도깨비가 휘두르는 몽둥이에 ‘제발 나만은’ 맞지 않기를 바라며 우리 모두는 어련히 눈치를 보면서 입을 꾹 다뭅니다.

 

하지만 ‘살아남고자’ 그저 다소곳하게 하란 거만 빡세게 해서는 안 되는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아주 거세게 몰아치는 자본주의 물살이기에 가만히 있다가는 “낯설은 풍경들이 지나치는 오후의 버스에서 깨어 당황하는 아이 같은 우리”(브로콜리 너마저 - 졸업)가 될 따름이지요. “어디쯤 가야만 하는지 벌써 지나친 건 아닌지” 알 수 없어 불안한 시대, 손을 뻗어 ‘자본주의의 맨살’을 더듬어야 할 때입니다.

 

‘21세기의 자본론’이란 자리에 도전한 인지자본주의

 

『인지자본주의』는 수많은 자료들과 문헌들로 촘촘하게 잘 다루면서 변해가는 자본주의를 날카롭게 파헤치며 ‘21세기의 자본론’이란 자리에 도전합니다. 도대체 지구동네가 왜 이렇게 시끌벅적한지, 앞날은 어디로 나아갈지 궁금한 이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줄 터입니다. 이미 고샅고샅 생겨났지만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한 여러 변화들을 엮으며 이름을 붙입니다. 바로 상업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를 잇는 제3기 자본주의, 바야흐로 인지자본주의!

 

부와 가난의 양극화는 권력 대 무력無力의 양극극화로, 탐욕의 끝 모르는 질주 대 희망의 추락이라는 양극화로, 마천루 높은 곳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삶 대 뒷골목 쓰레기통을 뒤지는 삶의 양극화로 이어진다. 조산早産된 21세기는 1968년 혁명에서 시작하여 부채위기로 점철되었고 냉전을 제국적 내전들과 테러에 대한 전쟁으로 대체했으며 2008년의 금융위기로 조로早老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1968년 혁명으로 끝난 20세기에도 단기短期였지만(1917-1968), 21세기는 더 단기인 세기로 끝날지 모른다. 2011년 아랍 혁명이 그 임종의 징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조로하고 있는 21세기의 자본주의를 인지자본주의라는 말로 명명했다. 12~13쪽

 

인지자본주의는 사람들의 삶 구석구석을 주무르고 손발놀림 하나하나를 반죽하려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짜임새입니다. 자본주의는 지난날처럼 그저 사람들의 노동을 쥐어짜는 데 그치지 않고 어느덧 “우리의 생명, 지각, 지식, 감정, 마음, 소통, 욕망, 행동 등의 움직임을 조직하고 그것의 성과를 수탈하고 착취”(23쪽)하고 있으니까요. 자신의 욕망에 늘 허덕이고, 무언가 잘못된 거 같지만 그것이 뭔지 알 수 없어 두려운 요즘,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아니라 아프면 그 이유를 찾아서 고쳐야 아픔이 멈출 수 있기에 이 책은 고통 받는 이들에게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도록 생각의 힘을 북돋워줍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안다면, 거기서부터 새롭게 시작할 마음이 일 테니까요.

 

어떻게 사람들의 생명과 삶을 안전하게 보장할 것인가

 

많은 이들이 ‘고용의 안정성’에 목매고 그에 따라 목메는 일이 자주 벌어집니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이 될까봐 안절부절못하고 비정규직은 실업자가 될까봐 조마조마하고, 실업자들은 암만 애써도 일자리가 생기지 않자 푸념과 짜증에 울컥합니다. 이에 따라 자본가는 더 거들먹거리고, 사람들은 ‘완전고용’이라든지 ‘정규직화’를 요구하게 됩니다. 자본에 짜먹히다가 버려지는 사람들을 위한 안전망을 갖춰야 마땅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지은이는 새로운 흐름에 눈길을 줍니다. 이러한 불안정은 “노동자들이 자본관계와 고용관계에서 이탈하려는 욕구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337쪽)이기도 하니까요.

 

프리터는 현대 사회에서 독특한 삶에 대한 욕구가 표현되는 삶의 한 형태로 출현했다. 정규고용을 회피하면서 혹은 정규고용으로부터 배제되면서 ‘욕망하는 삶’을 살아보려고 하는 프리터들은 삶의 다른 형식을 실험하곤 했다. 프리터의 확산은 (그 자체가 새로운 삶으로 되지는 못했고 신자유주의가 이러한 실험들을 이미 포섭해버렸지만) 오늘날 새로운 삶의 잠재력이 무르익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임이 분명하다. 338쪽



몇 푼을 쥐어주면서 모지락스럽게 짜먹는 자본주의에 맞서서 생각 있는 예전사람들은 ‘노동조합’을 만들고 ‘정권’을 잡으려고 애썼다면, 요새 사람들은 아예 자본주의의 소용돌이로부터 벗어난 삶을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귀농하는 많은 사람들, 여기저기서 생겨나는 공동체, 돈을 많이 벌려고 아득바득하기보다 조금 벌더라도 즐겁게 살아가려는 젊은이들은 ‘새로운 시대’의 낌새들이죠. 저들에게 ‘고용’이 되어야 먹고 산다는 믿음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 몸을 놀리고 쓰는 일 모두가 ‘생산’이고, “소득은 그 자체로 직접적으로 생산적인 삶의 호흡이자 순환의 일부”(337쪽)가 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으니까요.

 

지배자들에게 삶을 넘기면서 매달리기보다 ‘우리 스스로’ 삶을 긍정하고 함께 자아낼 때, 우리의 삶은 안전할 수 있습니다. 끝없이 벌어지는 전쟁과 생태계파괴로 빚어지는 자연재해, 하루에도 수십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누구도 손쓰지 못하고 언제 잘릴지 몰라 날마다 흔들리며 쉴 새 없이 옆 사람을 밀쳐내며 일중독과 우울병으로 허우적거리는 사회에서 삶이 자유롭고 멀쩡할 리 없습니다. 이제는 자기 삶을 지키고자 자본주의 욕망에서 벗어나려 땀방울을 흘려야 하는 때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삶과 사회의 안녕을 지키는 진짜 ‘안보’겠고요.

 

오늘날의 노동이 이미 고용/비고용의 틀 너머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비고용의 사람들을 고용관계 속으로 진입시킬 것인가라는 문제가 허구적 문제임을 보여준다. 필요하고 또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람들의 생명과 삶을 안전하게 보장할 것인가라는 문제이며, 이를 위해, 오늘날 전 지구적 수준에서 사회화된 노동에 기초하여 재생산되고 있는 사회적 부를 어떻게 공통적으로 분배할 것이며 부의 공통적 생산을 어떻게 촉진시킬 것인가의 문제이다. 315쪽

 

삶의 혁신과 행복을 위한 인지혁명이 필요한 때

 

그렇기에 다시 정치성이 솟구쳐야 하는 때입니다. 정치성은 잘 알지도 못하는 대표자를 뽑는 일이 아니라 ‘시대의 방향을 가늠하며 우리의 삶을 만들어내는 모든 몸짓’이니까요. 자본주의에 자기 삶을 내맡기지 않고 ‘우리 모두’가 스스로 사회를 다스리고자 하는 바람이 정치성입니다. 이미 자본주의는 삐걱거리며 흐느적거립니다. “2008년 위기 이후 탈성장은 앞으로 성취해야 할 과제로 주어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지금 겪고 있는 현실이자 통증”(499쪽)으로 나타났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분석처럼, 자본주의는 더 많은 이윤을 찾아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키고 지구를 통째로 집어삼켰지만, 이제 그마저도 할 곳이 없습니다. 자본의 이빨에 물리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 소통, 감정, 욕망, 정서까지 쥐어짜먹으려는 ‘인지자본주의’가 생겨났고 거기서 이득을 얻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지자본주의는 사람들의 등골까지 뽑아먹는 그악스러움과 함께 새로움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 노릇을 합니다. 힘차게 뿜어지는 사람들의 인지능력과 그에 따라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사람들의 욕망, 이것이 ‘공통’으로 만나면서 변화라는 싹은 진작 돋아나고 있습니다.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봄바람은 불어옵니다.

 

인지의 자본주의적 사용이 궁지에 몰린 지금이야말로 인지력과 인지관계의 진정한 혁명이 필요하다. 축적을 위한 인지의 전용이 아니라 삶의 혁신과 행복을 위한 인지혁명이 필요한 때이다. 부를 구매력과 동일시하고, 쾌락을 소유와 동일시하며, 노동과 소득 사이에 엄격한 상관관계를 설정하고, 성장을 광적으로 추구하는 지금까지의 경제주의적 인지양식을 해체하고 부와 쾌, 그리고 행복에 대한 질적으로 다른 인지양식을 창출해야 할 때이다. 이것이 오늘날 경제적 침체depression와 심리적 우울depression의 중첩, 다시 말해 노동의 불안정과 같은 사회경제적 불안정과 사회에 만연된 심리적 불안감의 중첩이라는 병리적 현실에 대한 실제적 치유를 가능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5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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