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의 정치학
아브람 노엄 촘스키 & 에드워드 S. 허먼 & 데이비드 페터슨 지음, 박종일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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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범벅 된 20세기를 지났기에 21세기는 뭔가 다를 거라는 ‘기대’를 걸었지만, 그 희망을 어김없이 작살내는 일들로 지구동네가 범벅입니다.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전쟁과 학살, 보도는커녕 다른 이들의 눈과 귀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묻히는 수많은 범죄들, 그리고 알려지더라도 사실과 달리 그릇되게 써먹히는 수두룩한 사건들, 그리고 그 뒤에서 이 모든 것을 쥐락펴락하며 이득을 보는 배불뚝이들.

 

『학살의 정치학』은 이런 그늘을 파고들어갑니다. 학살은 저 멀리 나쁜 놈들이 불쌍한 인간들을 죽이는 끔찍한 일이 아니라 우리 편이 자신의 권력과 이윤을 위해서 저 놈들을 이용하고 죽이는 일이라는 것을 까발리죠. 그렇지만 언론은 이런 현실을 보도하지 않거나 치우치게 기사를 쓰곤 합니다. 오늘날 벌어진 학살들의 뒷모습을 조곤조곤 풀어낸 이 책을 읽다보면 엉터리 언론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의식은 삐뚤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이 책의 지은이들은 누군가를 무더기로 죽여도 ‘우리’가 한 일이라면 얼마든지 괜찮지만 우리의 이익에 눈곱만큼이라도 줄일 만한 너희가 잘못을 저지르면 어마어마하게 뻥튀기한다는 것을 숱한 보기들을 통해 조목조목 밝혀냅니다. 서구 언론이 쓰면 그것을 받아쓰는 한국이었기에 이 책을 읽으면 그동안 알고 있던 ‘진실’이 온통 ‘거짓’이었다는 사실에 잠깐 휘청거릴지도 모릅니다.

 

여러 예가 있지만 그 가운데 르완다에서 일어난 ‘대학살’은 무척 충격입니다. 이 사건은 후투족이 후투족 출신인 대통령을 죽이면서까지 민중들의 분노를 일으켜 투치족을 학살하게 만든 사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화 <호텔 르완다>도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고요. 수잔 손택도 후투족이 투치족을 칼로 내려치는 사진을 두고 글을 쓸 정도였죠. 하지만 사정은 딴판이더군요.

 

대통령이 암살당하자마자 투치족 학살을 막는다면서 르완다애국전선은 들고 일어났고, 그렇게 100일 만에 국가권력을 쥐었습니다. 후투족이 투치족을 죽이기도 했지만 훨씬 많은 후투족이 학살을 당했는데, 이 사실은 다들 쉬쉬했습니다. 르완다애국전선의 뒤엔 미국이 있었고, 미국의 돈과 무기에 힘입은 투치족은 오랫동안 이 사건을 준비하였으니까요. 그렇게 학살자는 연립정권을 무너뜨리고 독재하면서 추켜세움을 받습니다. 수백만의 죽음을 뒤로한 채!

 

르완다에 관한 엄청난 거짓말은 이제 제도화되었고 서방세계의 공통된 이해(사실은 오해)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진실은 르완다의 폴 카가메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학살자란 것이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훌륭한 신화구조 덕분에 후견인 워싱턴의 보호 하에서 커다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대학살자의 이미지는 서방세계의 강력한 지지를 받을 자격이 있는 존경스러운 이미지로 둔갑했다. 129쪽

 

코소보 사태도 세르비아가 얼마나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알바니아 사람들을 죽이는지 서구 언론들은 호들갑을 떨면서 보도를 해댔고, 한국에서도 그렇게만 전해졌죠. 하지만 세르비아가 오히려 ‘인종청소’를 당할 만큼 끔찍한 범죄가 저질러졌지만 이에 서구언론은 눈을 감은 채 세르비아만 ‘무시무시한 악당’으로 만드는데 힘을 쏟았더군요.

 

이런 일들은 차고 넘칩니다. 중남미 지도자들의 암살부터 동티모르 학살까지, 베트남 전쟁부터 이라크 침공까지 등등등. 그러나 실상과는 다르게 퍼져나가곤 하죠. 마치 이스라엘이 행짜를 부리지만 생뚱맞게도 아랍권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이런 ‘왜곡’ 속에서 세계지배는 이뤄지는 것이죠. 그래서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에겐 누구나 침을 뱉지만 크메르 루즈가 권력을 쥘 수 있는 배경이었던 미국의 섬뜩한 폭격에 대해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대량살상무기를 없애겠다면서 ‘대량살상’을 저질렀지만 조금도 처벌을 받지 않는 미국과 이 ‘학살’을 지지한 국가들만 생각하더라도 세상은 뭔가 탈이 났고 이상합니다. 한국에서는 이라크보다 미국이 더 가깝기에 후세인이나 빈 라덴은 ‘악마’라는 느낌이 강하지만 오히려 미국이 ‘그 악마들을 키워냈다 잡아먹은 괴물’이라면 어떨까요? 힘 센 이가 지금도 학살을 하고 있다는 것, 이에 짝짜꿍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21세기 인류의 모습이고, 바로 이것이 학살의 정치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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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와 자본 - 인지, 주체-화, 자율성, 장치의 측면에서 본 생명과 자본 아우또노미아총서 32
조정환 외 3인 지음 / 갈무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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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는 ‘생명’으로서 살지만 정작 생명이 무엇인지는 별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들 어떤 식으로든 세상을 ‘인지’하고 있지만 정작 이 인지가 무엇인지는 묻지 않습니다. 얼핏 너무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까면 깔수록 아리송하고 놀라운 생명과 인지를 네 사람이 뜨겁게 파 들어갔네요. 그렇게 빚어진 사유가『인지와 자본』으로 엮어졌습니다.

 

이 책은 서로 다른 분야에서 생명과 인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다룹니다. 내로라하는 수많은 학자들이 불려나오고, 그들을 통해 정치학, 생명철학, 과학사 뒤얽히며 생각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도록 머릿속을 간질입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이, 사회학자들과 공학자들 사이는 데면데면함이 흐르기 십상인데, 철학과 과학이 만나 어우러질 때 얼마나 사유가 힘차고 탄탄해지는지 이 책은 보여주네요.

 

네 사람이 저마다 글을 풀어나가는 책이기에 하나로 아우르기는 좀 뭐한 지점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네 사람을 가로지르는 주제가 있는데, 바로 사회와 사람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명은 무엇이고 어떻게 인간은 살아야 하는지 이들은 고민하며 글을 써내려 갔고, 글을 읽어나갈수록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됩니다. 문체가 딱히 까다롭고 어렵지는 않지만 내용이 묵직하니까요.

 

황수영은 베르그송을 꼼꼼하게 다루면서 생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이 진화해나갈 때 지성이 얼마나 중요하였는지를 드러냅니다. 유인원이었던 인간이 허리를 곧추 세운 것, 손을 쓰기 시작한 것, 언어가 생긴 것, 뇌가 발달한 것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운 지점인데, 이 과정에서 도구를 만들어내고 지성을 높아지면서 오늘날의 인간으로 변한 것이죠. 주어진 대로, 정해진 대로 살지 않고 무언가 창조와 변화를 만드는 것이 생명 진화엔 언제나 있었으며, 그래야만 생명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과학사를 훑으면서 이야기를 이끌어간 이정우는 생명현상들에 대한 설명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개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갈무리합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이것-되기로서의 주체-화를 얘기하며 존재론과 윤리론을 기똥차게 겹쳐냅니다. 그는 우리 안의 생명/기(氣)는 끊임없이 “당신의 사건을 살아라”고 속삭인다면서 무엇으로도 딱히 되돌려질 수 없는 이-것으로의 주체, 창조성으로 넘실대는 특이존재로서 자신의 사건을 살아내어야 한다고 주장하네요.

 

여기에서 ‘창조적’이란 존재론적으로 새롭고 윤리적으로 좋음을 뜻한다. 그리고 윤리적으로 좋음이란 생체권력, 기호체제, 자본주의와의 투쟁을 통해 생명, 주체, 노동을 귀환시키는 행위임을 뜻한다. 이런 주체-‘화’야말로 바로 자신의 사건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90쪽

 

인지생물학자 마뚜라나를 설명하면서도 따끔하게 비판까지 해낸 최호영은 홀츠캄프의 비판심리학을 끌어들여옵니다. 인간이 그저 주어진 조건 안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실험하면서 인간을 보잘것없게 만드는 지배자들의 심리학과 다르게 홀츠캄프는 사회관계에 결정되어있지 않고, 움직이면서 사회 판 자체를 변화시키는 주체로서의 행위능력에 눈길을 보냅니다. 어떻게 해야 자율성을 갖춘 주체로서 살 수 있을지 상상하게 이바지하네요.

 

마지막으로 조정환은 오늘날 자본주의가 어떻게 변했으며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속속들이 파헤칩니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고용/착취하여 상품을 만들어 잉여가치를 얻는 자본주의 개념이 더 이상 잘 먹히지 않는 요즘 시대에 장치라는 개념을 통해서 새롭게 자본주의를 설명해냅니다. 푸코가 말한 생명권력은 사실상 생물권력이며 훈육권력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차근차근 따진 대목은 무척 번뜩이네요.

 

자신의 인지는 곧장 자신의 삶이 되며, 자신의 인지에 따라 삶도 달라집니다. 사회환경에 따라 생명들의 움직임은 달라지지만 생명들의 욕망과 활동에 따라 세계는 바뀌죠. 이렇게 생명과 인지, 삶과 세상은 따로 놓을 것이 아니며 맞물려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 안에서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기에, 그리고 이왕이면 보다 싱싱하고 튼튼한 삶을 바라기에, 이런 책을 읽으며 자극받아 산뜻한 생각을 하고 쌈박한 행동을 해야 하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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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번과 마녀 - 여성, 신체 그리고 시초축적 아우또노미아총서 31
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김민철 옮김 / 갈무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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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지 좀 이상한 느낌을 받는 학자들은 왜 자본주의 시대가 생겨났는지 궁금해 하며 역사를 뒤지고 들쑤십니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생겨나던 때의 수많은 자료들을 모아 자본주의 흐름이 어떻게 불거지게 되었고 사람들의 몸놀림과 욕망, 생활과 관계가 어떻게 변하는지 찬찬히 담아내죠.

 

그렇지만 아무리 꼼꼼한 책이라 하더라도 늘 아쉬움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역사책들엔 남자들이 농촌에서 쫓겨나 노동자가 되는 과정만 그려져 있지 그때 ‘여자들’은 무얼 하고 있었는지 잘 다루지 않기 때문이죠. 자본이 더 커지기 위해 기존의 사회를 뒤흔들 때 여자들은 무엇을 겪으며 어떠했는지 묻혀 있었습니다.

 

여성차별을 바탕으로 이뤄진 ‘시초축적’

 

『캘리번과 마녀』는 바로 이 지점을 찬찬히 파헤칩니다. 그리고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밝혀내죠. 자본주의 사회의 여성에 대한 차별은 예전의 형태로 쭉 있었던 게 아니라 자본주의가 돌아갈 수 있도록 그에 맞게 만들어졌다는 걸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자본주의가 생겨나면서 가부장제가 새로이 바뀌었고 여성차별을 바탕으로 ‘시초축적’이 이뤄진 것이죠. 자본주의가 노동력을 착취할 때, 여성이 돈을 받지 않고 하는 노동은 바로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밑천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노동을 빼앗아가는 권력에 고분고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역사엔 ‘폭력’이 늘 도사리는 것이죠. 생산력이 그렇게 높지 않았고 날마다 빡세게 일해야 한다는 강박도 없었던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에서 미친 듯이 노동을 하면서도 이렇게 살아가게끔 믿으려면 이에 거스르는 여성들을 짓밟고 깔아뭉개야 했죠. 그것이 바로 ‘마녀사냥’의 이유입니다.

 

이 책이 다루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질문은 근대 초입에 일어난 수십만 “마녀들”의 처형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자본주의가 여성을 상대로 한 전쟁과 함께 시작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이다. 여성주의 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마녀사냥은 재생산 기능에 대한 여성들의 통제력을 파괴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좀 더 억압적인 가부장적 체제가 성장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합의가 형성되었다. 33~34쪽

 

여성의 일을 하찮게 여기며 자연스럽게 노동력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자본주의 전까지는 여성과 남성의 일이 딱히 나뉘지 않았으며 나뉘었다 해도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는 여성의 일은 하찮은 것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여자 일에 대한 ‘보상’은 안 하는 걸 당연하게 믿습니다. 노동을 위아래를 구조화시키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일은 너무 자연스러워진 것이죠.

 

이런 일이 그저 쉽게 이뤄지지 않죠. 여성의 신체에 대한 공격이 이뤄졌고 여성들은 자신의 몸을 둘러싼, 특히 재생산에 대한 권리를 빼앗깁니다. 이것을 가장 도드라지게 보여주는 것이 마녀사냥이죠.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갈 때, 자본주의가 시작되는 길목에서 많은 마녀사냥이 벌어져 애꿎은 여성들을 불에 태워졌고, 여자들은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신체’를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전까지의 몸과는 다른 몸이 된 것이죠.

 

마치 인클로저가 농민들로부터 공유지를 박탈한 것처럼 마녀사냥은 여성들로부터 신체를 박탈했다. 따라서 신체는 노동의 생산을 위한 기계로 전락하지 않게 막아 주던 모든 예방 장치에서 ‘해방되었다.’ 화형대의 광경은 공유지에서 둘러쳐진 담장보다 더 무시무시한 장벽을 여성의 신체 주변에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272쪽

 

새로운 사회로 넘어가려면

 

여자가 당하는 억압은 경제권이 없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에 여자들이 ‘남자들처럼’ 바깥에서 일하면 ‘여성해방’이 이뤄진다고 맑스주의자들은 믿었습니다. 이런 흐름이 20세기에 세차게 일었고 시몬 드 보부아르는『제 2의 성』에서 일을 하여 경제독립을 해야 여성이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죠. 하지만 현실은 집 밖으로 나가 일 한다고 해서 여성들의 해방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성노동자들은 집안과 집밖에서 이중으로 착취를 당하며 고생하기 일쑤죠.

 

실비아 페데리치가 30년 동안 묵직하게 파고든 연구라서 그런지 이 책을 읽으면 생각의 걸음을 새로이 옮기게 됩니다. 바깥에서 돈 벌어오는 것만을 치켜세우지만 사실 이렇게 임금노동이 돌아갈 수 있는 바탕엔 집안에서 돈 한 푼 받지 않은 채 일하는 여성들이 있기 때문이죠. 자본주의가 돌아가려면 임금을 주지 않지만 그렇다고 없으면 자본주의가 무너져 내리는 노동이 있는데, 그것을 여성들이 여태껏 해왔던 것이죠.

 

따라서 집안일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하며, 어떤 노동은 업신여기고 어떤 노동엔 억수로 돈을 떠안기는 노동의 위계가 무너져야만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겠죠. 물론 쉽지 않겠죠. ‘마녀사냥’ 식으로 우리 몸에는 ‘자본주의의 훈육’에 오랫동안 깊이 스며들었으니까요. 그래서 새로운 사회를 꾸리려면 그동안의 자본주의의에 길들여진 자신의 신체와 동선을 뒤집으면서 새로운 ‘신체’와 ‘새로운 관계망’을 꾸려가야 한다는 ‘몫’이 주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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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비타 악티바 : 개념사 20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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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이상하지 않나요? 요즘 사회체제를 모두 다 ‘자본주의’라고 알고 있지만 자본주의라는 말을 쓰기는 좀 꺼려할뿐더러 정작 자본주의가 뭐냐고 물으면 다들 어안이 벙벙하거나 얼버무리기 일쑤니까요. 봉건시대 왕이 지배하던 시대랑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때도 ‘고려’라거나 ‘조선’이라고 알고 있었겠지만 왕의 이름을 입에 잘 담지 않을뿐더러 정작 왜 이렇게 사회가 짜여있고 이렇게 굴러가느냐고 물으면 어리둥절해하거나 공자 왈 맹자 가라사대를 종알거리며 그럴싸하게 얼렁뚱땅 넘길 테니까요.

 

마치 자본주의는 억압된 무의식 같죠. 옛날 사람들이 왕과 양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지만 평소엔 이 질서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듯 우리 또한 자본주의 안에서 살아가지만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질 못하니까요. 그러나 짓눌린 것들은 되돌아온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처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까지는 아니더라도 궁금증은 이어질 수밖에 없죠.『자본주의』는 바로 이 자본주의를 개념 짓고자 합니다.

 

지은이는 처음부터 ‘자본주의’란 말이 얼마나 아리송한지 보여줍니다. 세계 많은 경제학도들의 손에 쥐어진 800쪽 짜리 맨큐의 경제학엔 자본주의라는 말이 한 번밖에 나오지 않으며 이에 맞선다는 스티글리츠의 교재에서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을 정도죠. 그만큼 자본주의라는 말 자체에 어떤 ‘나쁜 평가’가 덧칠되어 있기 때문에 에둘러 다른 말로 설명하거나 딱 부러지게 개념화하기 어려운 것이죠.

 

하지만 자본주의를 두고 경제학자들끼리 골머리를 싸면서 아옹다옹 티격태격하지만 생활인으로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자본주의가 뭔지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돈이 이 시대의 신이자 아이돌이고, 신앙이자 권력이라는 걸! 그래서 자본주의인 것이죠. 자본주의는 뜻 그대로 돈(資)이 가장 중요한(本) 사회를 일컬으니까요. 지은이도 자본주의를 이렇게 적습니다.

 

한마디로 ‘자본주의’란 ‘돈벌이’를 말하며, ‘자본주의 사회’란 이 돈벌이의 고려 앞에 인간 세상의 온갖 복잡한 고려와 고민들—윤리적, 미학적, 철학적,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감정적……—이 모조리 무시되는 사회를 말한다. 요컨대 ‘돈이면 다 되는 세태’를 일컫는 것이다. 철이 든 사람치고 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일상 대화에서는 이렇게 쉽고 명확한 말이 어째서 개념 규정으로 가면 그렇게 맥을 못 추고 오리무중으로 헤매는 것일까? 13쪽

 

돈으로 모든 게 셈되고 돈의 회오리에 모든 게 빨려 들어가는 세계가 자본주의인 것이죠. 그러나 인간 세상이 본디 이렇지는 않았죠. 이런 사회는 ‘근대’에 이르러 벌어졌습니다. 예전에도 상인이 있었고 돈이 중요해지만 오늘날처럼 모든 걸 돈이라는 자막대기로 재고 후려치면서 돌아가진 않았죠. 아마 불과 100년 전 한반도에서 살았던 사람과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이 만나면 서로의 사고방식과 일상에 어이가 없을 겁니다. 현대인들은 전근대인들과 달리 합리성은 나아졌을지 몰라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덤부터 요람까지 ‘장삿속’에 찌들어있으니까요.

 

이렇게 살아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수많은 움직임들이 터져 나왔고 지금도 이곳저곳에서 불거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쉽게 무너지지 않고 끈질기게 자신을 ‘혁신’하면서 버텨가고 있죠. 자본주의는 망한다면서 다른 사회와 체제를 들먹이며 ‘변혁’을 얘기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무너질 거라는 ‘예언들’을 우습게 만들며 자본주의는 거푸 살아났으니까요.

 

그러므로 그저 자본주의를 미워하거나 자본주의는 끝날 수밖에 없다며 비웃음 짓기보다 자본주의가 뭔지 아는 게 먼저겠죠. 이 책 지은이 홍기빈은 자본과 자본주의를 ‘권력과 화폐와 생산의 결합체’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앞서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를 이 세 가지를 통해 얘기했지만 그 가운데 어느 하나에 더 무게를 두었다면 지은이는 이 셋을 다 중요하게 헤아려야 자본과 자본주의를 가늠할 수 있다고 하네요.

 

오늘날 살면서 조금만 자신을 더듬고 살피면 나의 삶은 자본주의로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수준을 넘어 지금 나의 욕망과 내 꼴마저 거의 판가름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 오싹합니다. 정말 자본주의는 ‘나’라는 의식을 지배하는 무의식인 셈이죠. 나 스스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행동한다고 믿을지라도 자본주의라는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일 따름이죠.

 

따라서 나의 앞날이 궁금한 사람은 별자리 운을 보거나 점집을 찾기보다 자본주의를 생각하고 묻고 따지며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구마을 전체를 휘감으며 돌아가는 자본주의 안에서 태어났고 살아가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변화에 따라 우리 삶도 바뀔 테니까요. 자본주의야, 앞으로 어떻게 될 거니? 물론 이 물음의 답은 이 책이 아닌 우리네 삶에서 나타나겠죠.

 

21세기의 시점에서 사람들이 ‘자본주의’라는 말로 지칭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렇게 우리 전 지구 인류의 앞날이 지구적 규모의 자본 축적이라는 것과 불가분으로 엮여들어 있다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자각이다. 더욱이 2008년에 본격적으로 나타난 지구적 규모의 금융 위기와 재정 위기는 이렇게 자본 축적과 지구 문명의 미래가 칭칭 엮여 있다는 우리의 예감을 더욱 실감나게 하고 있으며, 그 미래가 어떻게 될지를 더욱 절실한 질문으로 제기하고 있다. 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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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과 제국 아우또노미아총서 30
안토니오 네그리 지음, 정남영.박서현 옮김 / 갈무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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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느껴지는 감각들을 내팽개치지 않고 신문과 책을 통해서 세상 돌아가는 흐름을 놓치고 있지 않는 사람이라면 요새 갸웃거리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이것저것을 돌아보고 이모저모를 둘러볼 듯싶습니다. 왜냐하면 뭔가 달라지고 있다는 걸 느낄 수밖에 없는 시대니까요. 시대는 늘 변해왔고 그때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왔는데, 지금 또 커다란 변화의 흐름을 타고 있습니다.

 

끝날 줄 모르고 쭉 갈 거 같던 막무가내 금융경제가 뒷방으로 밀려가고 있습니다. 2008년에 한국에서 나타난 촛불,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세계 곳곳에서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자연재해들, 그리고 지구의 눈길을 받고 있는 월가시위에서 나타나듯 예전과 똑같은 체제는 먹힐 분위기가 아니죠. 무슨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론 어떻게 될까요? 눈 감고 귀 막고 살지만 않는다면 저절로 궁금함이 생길 수밖에 없죠. 이 모든 걸 설명해내는 단 하나의 풀이는 아닐지라도『다중과 제국』은 솔깃한 설명을 해주는 하나의 풀이는 되어줄 듯싶습니다.

 

이 책은 안토니오 네그리의 강의와 그 강의에서 미처 얘기하지 못했거나 같이 읽으면 좋을 글을 엮은 책입니다.『제국』과『다중』으로 지구의 지식인으로 떠오른 네그리는 차분하면서도 날카롭게 지구인들의 달라짐과 자본주의의 변화를 짚어냅니다. 네그리의 책을 읽기 전에 마키아벨리, 스피노자, 맑스, 푸코, 들뢰즈를 두루 안다면 훨씬 잘 읽히겠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네그리를 통해 그 친구들도 ‘더불어’ 만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요. 한 지성과 접속하면 잇따라 세계역사의 지성들과 만나게 되는 것이죠.

 

네그리는『다중』에서 ‘전쟁’에 대한 글로 시작하는데, 이 책 또한 전쟁에 대한 여러 성찰들을 들려줍니다. 생각해보면 지난날처럼 나라와 나라가 자신들의 총력을 기울여 대결하는 전쟁은 이제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미국의 최첨단 폭력에 맞선 테러가 있거나 두 나라 사이의 치고받음이 아닌 으르렁거림만 있거나 한 나라 안에서 지배 세력과 피지배 세력 사이의 갈등만 있는 것이죠. 이런 상태를 나름의 평화라고 할 수도 있지만 도리어 나름의 전쟁이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은 전쟁과 평화가 섞여버린 채 인간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만약 평화가 더 이상 전쟁과 구분되지 않는다면, 이는 전쟁과 평화가 융합하여 삶정치라는 하나의 단일한 모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탈근대적 전쟁은 근대적 전쟁보다는 덜한 어떤 것이지만, 그것은 또 근대적 치안보다도 더한 어떤 것입니다. 탈근대적 전쟁은 - 괴물과도 같이 - 일종의 사회적인 것을 생산하는 기계가 되었습니다. 197쪽

 

탈근대시대의 전쟁은 ‘내전’의 성격을 띠는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그런지 어느 때보다 치안이 중요해졌습니다. 여느 사람들에겐 군인의 군홧발보다 경찰의 물대포와 방패찍기가 더 무섭고, 정보국들의 뒷조사가 더 으슬으슬한 사회로 변해갔습니다. 전쟁은 ‘우리 나라’와 ‘너희 나라’ 사이에서 벌어지는 게 아니라 삶 자체가 전쟁입니다. 요즘 시민들은 너를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다는 전쟁의 법칙을 따르는 병사들처럼 되어버렸죠. 이 전쟁을 통해 사람들이 움직이고 사회가 굴러갑니다.

 

기성세대가 잘 살아보자면서 땀 뻘뻘 흘리며 청춘을 바쳐 만든 21세기는 자유롭고 행복한 공동체가 아니라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조리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를 안절부절못하며 보내는 전쟁터입니다. 소름 끼치고 끔찍한 일이지만 시나브로 이렇게 살아가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은 ‘각개전투’를 치르고 있죠. 옛날엔 신라와 고구려 같은 나라들이 전쟁을 벌여 사람들이 죽어나갔다면 오늘날엔 너와 내가 싸우면서 날마다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전쟁 같은 세상은 사람들의 생활마저도 확 바꿔버렸죠. 산업화된 공장노동이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던 근대와 달리 오늘날엔 사회가 공장이고 노동시간은 삶시간과 겹쳐지고 있습니다. 일터와 삶터는 딱 나뉘지 않고 어느새 모든 게 노동이 되어갑니다. 우리들은 자신도 모르게 ‘경쟁력’이라는 이름으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나의 하루 전체를 노동화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을 네그리는 근대의 물질노동에 견줘 탈근대의 비물질노동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이 비물질노동은 자본이 공장에서 노동의 착취만이 아니라 삶 자체를 착취하는 결과이죠. 하지만 이와 함께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놀라운 잠재성은 드러나며 그에 따라 세상이 바뀐다고 분석합니다. 정보혁명이라 불리는 기술의 발달로 SNS나 여러 매체들을 통해 내 삶과 사회가 달라지는 걸 느낀 사람이라면 네그리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습니다. 이젠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공통의 그물망’을 사유할 수밖에 없는 시대로 접어들었고, 여기가 다시 뛰어야 할 ‘로도스 섬’이 되었으니까요.

 

이제 비물질노동은 명령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네트워크 형태로 이루어지는 지성의 확산은 그것이 직면한 장애의 총체에 대하여 잠재적으로 초과로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비물질노동의 다중은 초과, 엑서더스를 통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비물질노동 및 엑서더스의 장치(즉 관계 그리고/또는 연쇄적 연관)에 대한 우리의 주장에 두 번째 정의가 추가됩니다. 이 정의는 오늘날 노동이 창조적이기 위해서는 ‘공통적’이어야만 한다는 사실, 즉 협동의 네트워크에 의해 생산되어야만 한다는 사실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158~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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