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조원의 육체산업 - AV 시장을 해부하다
이노우에 세쓰코 지음, 임경화 옮김 / 씨네21북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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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5월, 한국은 ‘파란 하늘’ 때문에 한바탕 떠들썩했죠. 바로 ‘아오이 소라’가 한국 드라마와 토크쇼에 나온다고 했기 때문이죠. 인터넷을 쓰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아오이 소라에 대해 들어봤을 정도로 그미는 Adult video의 스타죠. 한쪽에선 왜 포르노 배우를 TV에서 봐야 하느냐고 볼멘소리를 했고, 다른 쪽에선 이미 볼 거 다 봤으면서 뭘 그러냐고 박수치며 맞았죠.

 

한 사진동호회에서 연 모임에 아오이 소라가 나오자 많은 남자들이 15만원이란 돈도 마다하지 않았죠. 한 참가자는 “모니터로만 보며 자위행위를 하던 아오이 소라를 직접 촬영할 수 있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며 좋아하더군요. 이처럼 야동은 가상세계에만 있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도 큰 영향력을 갖고 있죠. 클릭 한 번이면 섹스 장면이 펼쳐지는 상황에서 야동을 보지 말라고만 하는 건 잘하는 일이 아니죠. 더구나 대중매체는 야동을 닮아가고 있죠.

 

15조원이나 되는 야동산업, 컴퓨터마다 야동이 한가득, 가장 많이 다운받는 것도 야동!

 

이런 맥락에서 <15조원의 육체산업>[2009. 시네21]은 여러 모로 곱씹을만한 내용들이 있네요. 성문화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성인 비디오(AV) 산업의 실태가 어떠한지, 성인 비디오를 어떻게 만들며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여자들이 괴로워하는 야동들이 왜 많은지, 샅샅이 조사를 하여 이렇게 책으로 내놓았네요. AV산업이 어떻게 돌아가고 어떠한 규제가 필요한지 생각하면서 한국의 성문화를 돌아볼 수 있네요.

 

먼저, 냉정하게 짚어보면, 많은 남자들이 야동을 보고 있습니다. 여자들도 보는 숫자가 늘어난다고 하지만 아직 비할 바가 아니고, 여자들을 대상화해서 찍은 영상에 흥분을 일으키는 여자는 드물죠. 오히려 불쾌하다며 이걸 왜 보는지 모르겠다고 손사래를 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남자들은 다르죠. 수많은 남자들이 자위를 하고 싶거나 스트레스를 풀 때, 야동을 봅니다. 컴퓨터마다 야동들이 한가득 쌓여있죠.

 

야동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는 AV는 돈 받고 파는 걸 목적으로 만들어진 섹스영상입니다. ‘야동 천국’ 일본에선 한 달에 1,000~1,500편이나 만들어지죠. 어림잡아 시장 규모가 1조 엔이나 된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산업이죠. 엔고를 고려해서 셈하면, 15조원이나 되는 시장이죠. AV가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고, 소비자들은 기꺼이 주머니를 연다는 얘기입니다.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죠.

 

예전에는 모텔이나 호텔에서 틀어주거나 청계천이나 세운상가에서 까만 봉지에 싸이던 야동들이 이젠 위성 방송, 휴대전화, 인터넷을 타고 누구나 쉽게 볼 있게 되었죠. 돈만 되면 모든지 다 사고파는 세태에서 섹시 동영상, 누드 화보란 이름으로 수많은 연예인들이 옷을 벗어 제칠 정도입니다. 성인물은 많은 남자들의 눈을 빨갛게 만들며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죠. 그늘에서 숨 죽여 있던 야동이 볕드는 곳에서 화려하게 기지개를 켭니다.

 

불법 복제를 하거나 공유하였던 사람들까지 헤아리면 야동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죠. 사람들이 P2P나 인터넷 사이트에서 가장 많이 다운받는 것이 야동입니다. 빛의 속도로 받고 있죠. 인터넷이 빠르게 성장하는데 음란동영상들이 이바지했다는 것을 알만 한 사람은 다 알죠. 한때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X양 비디오를 보고자 사람들은 컴퓨터 기능을 높일 정도였으니까요.

 

사회비판의식이 있던 포르노그라피에서 폭력성과 선정성만 강해진 AV로!

 

그런데 역사를 되짚어보면, 포르노그라피는 그저 야하기만 한 게 아니었습니다. 권위주의에 짓눌린 사람들의 숨통을 틔워주며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수단이기도 했죠. 헛기침만 내뱉으면서 마치 돌덩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사람들을 흔들며, 사회비판의식을 담아냈죠. 영화 속 섹스는 사람들의 편견을 깨부수는 망치 노릇을 했죠. 따라서 20세기 중반 포르노들엔 당대의 분위기가 배어있고,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깃들어 있죠.

 

포르노가 성인영화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교훈이나 주장은 더 이상 실리지 않습니다. 정말 있으나마나한 이야기 흐름에 발가벗은 몸만 나오죠. 성행위만 찍은 성인물은 어떻게든 드라마 요소를 넣더라도 허접하기 이를 데 없고, 성기에만 카메라를 들이댑니다. 포르노는 남자에게 성 흥분을 일으키기 위한 목적으로 여자의 벌거벗은 모습을 찍은 영상물로 변질하면서 덩달아 위상도 굴러 떨어졌네요.

 

문제는, 포르노에서 AV가 되면서 폭력성과 선정성이 강해졌다는 겁니다. 강간물이나 힘으로 여자를 정복하는 성인비디오가 인기를 끌고 있죠. 게다가 몰래카메라나 치한물, 변태물 같이 성범죄 행위들을 그린 야동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밖에 말도 못할 정도로 잔인하거나 심한 영상들이 인터넷 뒷골목을 떠돌고 있는 형편이죠. 사람들의 무의식이 야동에 찌들어 가는 거죠.

 

지은이는 남자 배우가 여배우의 얼굴에 정액을 뿌리는 ‘안면사정’에 중점을 잡고 문제 삼네요. 남자들은 별 생각 없겠지만, 이 장면을 좋게 받아들일 여자들은 거의 없죠. 한 여자는 “정액을 뿌려서 어쩌겠다는 건지. 남자라는 동물은 연어냐!”라고 경멸감을 나타내기도 하죠. 그저 돈을 벌고자 갈수록 일그러진 쾌락만 강조하는 야동들은 보는 사람의 정신건강에 좋을 리 없습니다.

 

더 생각해볼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여배우들입니다. 야동 속 남자와 그 야동을 보는 남자들의 쾌락도구로 쓰이는 여배우들은 몇 편의 AV를 찍고 폐품 취급을 받죠. 여배우의 수명은 길어야 2년이고, 대부분은 성매매업소나 유흥업소로 흘러듭니다. 또한 AV여배우들은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많다고 하며, 화면에 나오지는 않지만 AV를 찍으면서도 지독한 짓을 당한다고 하네요. 이러한 사실들을 알고 어찌 마음 편하게 야동을 볼 수 있을까요?

 

엄마에게서 제대로 정서가 독립하지 못한 남자들이 폭력성 짙은 야동을 본다!

 

성 본능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자연스러운 욕망으로 억누르면 다른 모습으로 튀어나올 뿐 절대 없어지지 않습니다. 관음증이나 노출증 역시 하나의 욕망일 수 있고, 성행위를 찍거나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죠. 그렇다면 여기서 물음 하나! 야한 동영상을 찍고 싶다면 아름답게 찍으면 될 텐데, 왜 굳이 여자를 힘으로 누르는 야동들이 큰 인기를 끄는 걸까요?

 

지은이는 여러 자료와 연구결과들을 바탕으로 ‘마더 콤플렉스’를 그 원인으로 꼽네요. 마더 콤플렉스는 엄마의 지나친 애정 아래 자란 남자의 자아가 엄마에게서 제대로 분리가 안 되면서 빚어지는 열등감입니다. 어머니에 대한 일체감이 속절없이 끝날 때 어머니에 대한 원망도 크기 마련이죠. 그에 따라 어머니에 대한 나쁜 인상이 남고, 그것이 여자에 대한 나쁜 인상으로 번지죠. 결국, 마더 콤플렉스는 여자에 대한 공포나 업신여김을 낳습니다.

 

연구 결과, 어머니의 정서에 얽매여있던 남자는 새로운 여자와 관계를 동등하게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하고, 성관계를 할 때, 어머니의 이미지가 끼어들면서 성 불능으로 만들죠. 남자들은 이것을 막고자 공격하듯 성관계를 하면서 어머니의 이미지를 뿌리치려고 합니다. 거친 섹스는 수컷의 야성을 뽐내는 게 아니라 상대방과 깊게 소통하지 못한다는 증거일 뿐이라는 거죠.

 

어머니의 치마 품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한 남자는 여자와 원만하게 관계를 맺지 못하고 야동을 통해서 섹스에 대한 환상을 채웁니다. 야동은 자기 몸과 상대의 몸이 맞대는 일이 아니라 가짜이니까요. 상대방의 정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아도 되고 오로지 자기만족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머니에게서 정서 독립이 안 된 남자들은 성인비디오를 통해 격한 성행위 장면을 찾는 거라고 하네요.

 

자녀를 한둘만 갖게 되면서 아이에게 너무 지나친 애정을 쏟고 보호만 하면서 키웠기에 일본에서는 ‘마더 콤플렉스’를 겪는 남자들이 사회문제가 되었다고 하네요. 한국의 남자들은 어떨까요? 그저 이웃 나라의 얘기로만 들리지 않네요. 일본 못지않게 야동에 푹 빠진 한국의 남자들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 그리고 둘레에서 만나는 여자들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을까요?

 

야동을 보면 여자의 존엄을 해치고 본인도 허무해져! 사회에서 새로운 성문화를 만들어야!

 

전쟁하면 안 된다, 남녀가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는 말은 다 맞는 말이지만 현실에선 큰 힘이 없듯 야동을 보면 안 된다고 당위에만 기대서 목소리 높여봤자 들을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왜 보면 안 좋은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하겠죠. 남자들을 짐승이라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손가락질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란 거죠. 청소년들이나 나이 많은 아저씨들이 야동을 보면서 섹스를 배우고, 성욕을 푸는 순기능도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야동은 여자의 존엄과 성평등을 해칩니다. 섹스나 에로스는 대등한 관계에서 이뤄지죠. 야동은 여자를 하찮게 그려내면서 거짓된 환상만 심어줍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는 거죠. 강간에 저항하다가 몇 분 뒤에 황홀함에 소리를 지르는 연출 같은 것들은 남자들을 착각하게 만듭니다. 화면 속 여자와 실제 여자를 아무리 구분한다고 해도 야동을 본 남자는 언제든지 현실에서 재생 버튼을 누를 수도 있고요.

 

실제 성관계는 야동처럼 성욕을 푼 뒤 그냥 끝나는 게 아니죠. 야동은 책임과 사랑에 대해선 입 다물고 오로지 쾌락만 얘기합니다. 자칫 섹스에 대해서 삐뚤어진 인식을 갖게 될 수 있죠. 섹스가 쾌락만을 위한 몸짓이 될 때, 본인도 허무해집니다. 성욕을 풀기 위한 도구로 여자를 여기게 되고, 자신의 삶 역시 스스로에게 소외되죠. 상대방을 성격, 품성, 가치관, 몸, 말, 시간을 통해 다차원으로 만나는 게 아니라 단지 성기로만 만나니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야동도 오늘날 사회의 반영일 뿐이죠. 여자를 낮잡아보고 힘으로 누르면 된다는 생각들이 야동으로서 드러나는 겁니다. 따라서 사회의식을 바꿔야 합니다. 법률로만 성 평등을 얘기하지 말고 삶에서 평등해져야 하죠. 남녀 사이에 소통이 잘 일어나고 성관계도 원활하다면 야동 볼 일도 없겠죠. 야동은 현실에서 충족되지 않은 성욕이 뒤틀린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니까요.

 

사실, 야동만 많았지 행복하게 성 생활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야동을 보는 건 그만큼 성만족도가 낮다는 얘기겠죠. 사람은 저마다 성욕 강도나 취향이 다릅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그대로 담아낸 새로운 성문화를 만들어야겠죠. 남근지상주의를 넘어서 모든 성이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에 대한 논의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네요. 그런 말들이 나올 수 있도록 보다 열린사회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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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20대, 자취의 달인 - 반지하와 옥탑방에서도 잘 살기
김귀현.이유하 지음 / 에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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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전부터 그러했지만 젊은이가 독립을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죠. 더구나 날로 팍팍해지는 사회에서 젊은이들이 도전할 영역은 줄어들고, 숨통은 막히고 있습니다. 부모가 빵빵하다면 결혼할 때 자기 집을 구해 독립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자식들은 결혼도 하기 힘든 형편입니다. 다 컸으면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게 자연의 이치건만 부모 품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는 현실, 젊은이들은 ‘캥거루족’이 되어버렸습니다.

 

밖에서 비를 맞느니 부모 우산 밑에서 편안하게 살겠다는 거죠. 젊은이들의 독립이 늦춰지는 건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빚어지는 현상이죠. 미국에서는 트윅스터(twixter), 이탈리아에서는 맘모네(mammone), 프랑스에서는 탕기(Tanguy), 영국에서는 키퍼스(kippers), 독일에서는 네스트호커(Nesthocker), 캐나다에서는 부메랑 키즈(boomerang kids)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88만원 세대’라 불리며, 대학 졸업 뒤에도 일자리를 갖지 못하거나 얻더라도 불안정한 비정규직에 얄팍한 봉투를 받으며 살고 있죠. 어른이 되었는데도 부모의 도움에 기댈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그런데도 집밖을 나와 독립을 한 20대들이 있지요. <대한민국 20대, 자취의 달인>[2009. 애쎄]은 고생이 뻔히 보이는 길을 간 남녀의 이야기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책이네요.

 

반지하의 제왕과 옥탑방 사투리, 자취의 달인들이 들려주는 자취생 생활백서

 

캥거루족이 사회문제라 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나와서 살고 있습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니까요. 그렇다면 돈 없는 20대는 어디에서 살까요? 땅 밑으로 들어가거나 꼭대기로 올라가야 하죠. 사실, 이런 곳이 사람 살기에 적당하진 않죠. 반지하는 방공호 목적으로 지어진 데고, 대부분의 옥탑방은 불법 옥외건축물입니다. 쭉 펴고 눕기도 힘든 고시원은 말할 것도 없고요. 젊은이들의 보금자리는 이런 곳입니다.

 

그렇다고 암울하기만 한 건 아니죠. 이들에겐 꿈이 있습니다. 비록 오늘을 힘들게 살아가지만 반짝거리는 내일이 있으니까요. 불 속에서 철이 단단해지듯 어려움 속에서 사람은 여물죠. 밑바닥에서 올라가는 일만 남은 셈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부모 돈 받아서 비싼 차 몰고 커다란 오피스텔에서 사는 젊은이가 더 불쌍하죠. 그들에겐 꿈이 없고, 오로지 써버림만 있으니까요.

 

이 책의 두 주인공은 반지하남과 옥탑녀입니다.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라는 얘기처럼 서울로 올라온 두 사람은 자취를 하기 시작합니다. 반지하방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 남자는 지상으로 올라가기를 기다리며 ‘반지하의 제왕’이 되고, 첫 직장생활에서 뜻하지 않은 구조조정을 당한 여자는 ‘더 이상 물러날 곳도, 겁날 것도 없다’는 마음으로 짐을 부친 뒤 서울로 올라와 ‘옥탑방 사투리’가 됩니다.

 

이 둘의 서울 생활은 맛깔나고 재미있네요. ‘억’ 소리 나는 집들은 쳐다보지도 못 하고 구석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주머니 형편부터 야심차게 준비한 카레 요리에 곰팡이가 슬어버린 사정까지, 혼자 살아봤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이야기가 담겨 있네요. 음식물 쓰레기봉투 값을 줄이려고 먹거리 찌꺼기를 갈아서 변기에 버린다는 생활의 지혜(?)들도 덧붙여져 있어, ‘자취생 입문서’이자 ‘자취생 생활백서’라 할 수 있어요.

 

이들의 생활은 짐작대로 밝지만은 않습니다. ‘반지하의 제왕’은 싸구려 먹거리만 먹다가 요로결석에 걸려 병원에 실려 가고 ‘옥탑방 사투리’는 얼어버린 보일러가 터지면서 보일러 뚜껑에 얻어맞아 입술이 터지고 시커멓게 멍이 듭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캔디처럼 꿋꿋하게 살아가네요. 햇볕이 들어오지 않아 눅눅한 반지하와 시베리아처럼 추운 옥탑방에서 탈출하는 날을 손꼽으며!

 

눈 뜨고 나면 치솟는 집값, 과연 이들은 반지하와 옥탑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쉽게 술술 익히는 글을 읽다보면 킬킬거리거나 씨익 웃게 되지만, 책을 덮고 나니 가슴에 뭔가 콱 얹힌 듯 하네요. 과연 이들은 반지하와 옥탑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갈수록 치솟기만 하는 집값 앞에서 집 장만을 위해 아끼고 모으겠다는 젊은이들의 다짐은 너무나 초라하기만 합니다. 1년 동안 힘들게 일해도 500만원 모으기 힘든 현실에서 눈 뜨고 나면 500만원씩 오르는 집값을 보면 젊은이들은 한숨밖에 내쉴 게 없습니다.

 

너무나 적은 돈을 받으면서 일하는 젊은이들에게 집 장만은 ‘반지의 제왕’에서나 할 수 있는 환상이거나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에서 나오는 허구죠. 그렇다 해도 허리띠를 졸라매는 젊은이들의 순수함이 끝내 그들을 평범한 가정집으로 이끌어내겠죠. 지금은 헉헉대지만 온 몸으로 부딪힌 젊은이들은 자기 몸 누울 곳을 만들어 냅니다. 문제는 그들이 빠져나간 그 자리로 또 다른 젊은이들이 들어간다는 거죠. 사회 판은 그대로입니다.

 

젊은이들이 어떻게 독립을 하고, 무슨 일을 하며 어디에서 살아가는지 사회는 도무지 관심이 없습니다. 집을 짓는다고 하지만 비싸도 너무 비쌉니다. 젊은이들이나 철거민,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집만 잔뜩 지어놓고, 건축업계는 집이 안 팔린다고 울상이죠. 정부는 부동산 거품이 빠질까봐 규제를 풀어주었고, 집을 가진 사람들만 또 사고 있습니다. 있는 사람은 자꾸만 배에 기름기가 끼고, 없는 사람은 점점 싸늘해집니다.

 

이런 사회에서 젊은이들은 패기를 갖기보다 로또 한 방을 바랄 뿐입니다. 뼈 빠지게 일해도 단칸방 마련하기도 쉽지 않은데, 물려받는 집값이 껑충 오르기만 하고 덩달아 목도 뻣뻣해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누가 성실하게 일할까요? 돈 많은 어버이 밑에서 다시 태어나길 바라거나 돈 벼락이 안 떨어지나 은행 둘레를 서성거리는 게 낫죠. 20대의 열정과 기운을 앗아놓은 뒤 시치미 떼면서 젊은이들을 나무라는 한국사회가 참말로 이상하네요.

 

젊은이들은 요상한 한국사회에서 씩씩하게 살고 있습니다. 청춘 하나 만을 믿고 희망의 연을 날리는 사람들, 천진난만하여 오히려 안쓰러운 그들이 결국 사회를 바꿉니다. 가만히 앉아있는 게 아니라 창을 낼 때, 반지하에도 볕이 들어오듯 젊은이들의 움직임에 따라 세상의 밝고 어둠이 나뉘겠죠. 20대들이 지금은 ‘자취의 달인들’이지만 나중엔 ‘행복의 달인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들의 앞날을 장밋빛으로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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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사회학
수디르 벤카테시 지음, 김영선 옮김 / 김영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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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분석은 중요합니다. 뒤르켐의 <자살론>에서 나오듯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판단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만 둘레를 돌아보면 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행동하고 있으니까요. 사회가 개인의 선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거죠. 그렇게 사회과학의 늦둥이로서 사회학은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구조주의 철학은 20세기에 용솟음칩니다. 바보야, 문제는 구조야!

 

그러나 한계가 드러납니다. 사회학은 나무 대신에 숲을 본다고 자랑스러워했지만 결정론이란 덫에 걸리기 쉬웠죠. 살아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피기보다는 큰 그림을 보려다보니 주체성을 무시하고 사회가 모든 걸 결정한다는 논리에 퐁당 빠졌죠. 사람들은 구조에 판가름나는 꼭두각시로 뭉뚱그려 취급됩니다. 숲을 볼 수 있는지 몰라도 나무들의 차이와 나무들의 결을 못 보게 되는 거죠. 그저 멀리서 숲이 어떻다며 평가 내리기만 합니다.

 

수디르 벤카테시는 안락한 의자를 박차고 나와 현실로 뛰어듭니다. 시카고 뒷골목으로 들어가 10년 동안 마약상, 코카인 중독자, 무단입주자, 성매매여성, 포주, 사회운동가, 경찰, 주민대표와 어울리며 도시의 어두운 구석구석을 누빕니다. 그 결과가 <괴짜사회학>[2009. 김영사]입니다. 숲만 보는 거에 만족하지 않고 나무까지 아울러서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이 도움 되겠네요.

 

법이 사라진 암흑가의 10년 기록, 도시의 어두운 구석구석을 누빈 괴짜사회학자

 

배트맨이 필요한 고담시의 배경이 될 정도로 시카고는 범죄가 많은 도시죠. 수많은 갱단이 으르렁거리고 마약이 들끓습니다. 얼굴이 까맣다는 것은 가난하다는 말과 다름없으며 빈민가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죽을 때까지 헉헉대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시카고에서 학자들과 위정자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죠. 복지를 어떻게 해야 한다, 공공정책이 어떻다, 도시재개발계획이 필요하다 등등. 그러나……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들은 빈민가에 가지 않습니다. 멀리서 몇 푼을 던져주거나 일을 안 하면 굶어도 할 수 없다고 을러대면서 마치 대단한 걸 한 것 마냥 뽐내기만 하죠. 지은이는 다릅니다. 도시재개발, 실업, 가난과 범죄가 벌어지는 현장에 몸을 던집니다. 전통 사회학에서 쓰는 통계학과 사회 연구 방법의 한계를 느끼며 몸으로 조사를 한 거죠. 법이 사라진 암흑가에서 벤카테시는 10년을 지냅니다. 감탄이 절로 나오네요.

 

지은이는 하루 종일 교실에 처박혀 공부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는 다른 일을 해보기로 결심하고 거리로 나섭니다. 접근 금지 지역이었던 흑인 거주 지역으로 들어가 인종과 지역사회 문제를 들추고 다니기 시작합니다. 운 좋게도 갱단 우두머리 제이티와 동무가 되어 그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 나누고 연구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알려지지 않은 ‘암흑가의 생얼’을 담아냅니다.

 

이곳으로는 경찰과 구급차가 오지 않습니다. 범죄무리가 치안을 맡고, 주민들은 그 안에서 나름대로 구실을 하며 살아가죠. 시카고의 한복판이 무법지대라는 겁니다. 지은이는 값싼 코카인으로 뒷골목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며, 갱단은 어떠한 일을 하고 권력은 어떠한지 낱낱이 밝힙니다. 어려운 말이나 이리저리 꼬인 표를 들이미는 게 아니라 지은이가 겪은 이야기 속에 갱단 정보가 녹아있네요. 빈민가 오줌 냄새까지 맡아질 정도로 꼼꼼하게 글을 썼네요.

 

갱단이 이렇게 설칠 수 있는 까닭은 경찰들과 지역 주민대표들이 짬짜미하면서 엉켜있기 때문이죠. 코카인 파는 갱단과 지역 유지들은 다 들러붙어 있습니다. 경찰은 갱단 뒤를 봐주기도 하고 때론 갱단을 뜯어먹기도 하죠. 주민들이 아무리 불러도 경찰은 오지 않습니다. 이곳 사람들 말을 빌리면, 경찰도 하나의 갱단이니까요. 이곳에 사는 사람은 갱단과 경찰에게 이중수탈을 당하고, 갱단의 관리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지역 대표들은 묘한 존재들이죠. 사회 안전망의 그늘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은 지역 대표를 바라볼 수밖에 없지만 대표들은 갱단과 이어져 있고, 주민들을 등치면서 득을 봅니다. 그러나 대표 노릇을 해야 영향력이 유지되기에 적당히 주민들 살림을 보태주면서 살아갑니다.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살아가는 현실이 얼마나 팍팍한지, 또한 그 어둠 속에서도 사람들이 얼마나 꿋꿋하게 살아가는지 생생하게 담았네요.

 

갱단의 우두머리가 된 괴짜 사회학자를 이야기를 읽으며 한국을 돌아보다

 

책 내용 가운데 한 가지 이야기를 따오면, 지은이는 비록 하루였지만 갱단 우두머리가 됩니다. 제이티에게 별로 하는 일이 없다고 농을 던지자 이 일을 한 번 해보라고 제이티가 입을 연 것이죠. 일생일대의 제안! 처음에는 헛기침이 나왔지만 지은이는 떨리는 마음으로 도전합니다. 하루 종일 제이티를 따라다니면서 의사결정을 대신 하는 거죠. 안건 처리를 하고, 상황을 헤아려서 누구에게 어떤 일을 시키고, 무슨 벌을 줄지 판단해야 했죠.

 

지은이는 되도록 폭력을 쓰지 않는 선에서 문제들을 마무리하려고 하네요. 벤카테시는 조마조마하면서 두목 역할을 해냅니다. 제이티에게 믿음을 얻은 지은이는 총알이 튀는 싸움판에서 제이티 친구를 구하기도 하면서 절친이 되네요. 벤카테시는 훗날 제이티가 최고위급으로 승진을 했을 때, 갱단 최고 회의에도 따라가기까지 하죠. 그는 최고위급들과 만나서 이것저것을 묻고 그들의 생각과 움직임들을 직접 보고 기록하네요.

 

사실, 책과 강의실에서 얻은 지식과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유명한 교수들의 주장이 너무나 쓸모없음에 화가 난 그는 학자들이 편안하게 상아탑에 머물 때, 현장으로 두 발을 내딛었네요. 가난한 사람들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들긴 하지만 정작 그들의 삶을 낫게 하지 못하는 사회학, 그건 죽은 학문과 다를 바 없으니까요. 그는 소외된 이들과 불평등에 무관심한 세상 사이에 다리를 놓고자 하고 스스로 무지개가 됩니다.

 

살아있는 사회학을 실천한 그를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듭니다. 한국 역시 가난한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죠. 비정규직, 저임금, 엉성한 사회복지, 청년실업, 자영업자들의 몰락… 서민들을 낭떠러지로 밀어버리는 한국사회에서 사회학자들의 어떠한 처방도 통하지 않고 있네요. 큰 목소리로 사회를 재고 따지는 사람은 많아도 서민들을 이롭게 하는 일에 뛰어드는 지식인은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지식인들은 권력 얻는 게 목적이니까요.

 

거리에서, 골목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와 공부를 하는 벤카테시는 얼굴 하얀 ‘지식 상인들’의 꾸지람과 걱정을 이겨내고 엄청난 결과들을 이뤄냅니다. 그 덕분에 시카고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무법지대에 대해 잘 알 수 있었고 미국 정부는 새로운 시각으로 정책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지식인이라면 어떠한 자세를 갖고 세상에 물음표를 던져야 할지 새삼 짚어보게 되네요.

 

스티븐 레빗의 <괴짜경제학>은 상식을 뒤집는 연구결과들에 무릎을 치게 했다면, 수디르 벤카테시의 <괴짜사회학>은 어떠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어떻게 움직여야할지 고민하게 하죠.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수많은 복지정책이 펼쳐지고 있고 재개발계획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미국에선 그러한 정책들이 누군가의 잇속만 채워주었죠. 한국에서는 어떨까요? 점점 더해가는 가난과 범죄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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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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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더 이상 눈이 휘둥그레지는 일이 아닙니다. 웬만한 곳에 가지 않으면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말이 들리는 세상이니까요. 교통수단도 발달하여 한나절 만에 지구 반대편에 갈 수 있습니다. 새벽녘에 나간다면 오늘 밤에 몽마르뜨 언덕에서 산책할 수 있으며 적어도 내일 낮엔 스핑크스를 바라보며 인생이란 수수께끼를 풀어볼 수 있게 되었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면!

 

이것저것 얽힌 게 너무 많은 현대인들은 어제의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늘 저기를 꿈꾸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죠. 오늘을 새롭게 산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똑같은 업무와 삐끄덕거리는 사람관계, 어깨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피로와 혼자 난리치는 아침종까지 일상은 되풀이되기 일쑤입니다. 사람들은 스트레스에 쩐 나머지 일탈을 바랍니다.

 

이에 맞춰 여행책 봇물이 터집니다. 이제 어디를 가는 게 목적이 아니라 여기를 떠나는 게 목적이니까요. 여행은 호기심으로 발을 동동 구르는 모험이 아니라 자유와 쉼의 상징으로 탈바꿈하였네요. 차마 여행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책을 보면서 지친 오늘을 위로받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꼭, 이란 희망을 가슴에 간직하면서!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나를 잃어본 사람만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어!

 

수많은 여행책 가운데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문학동네. 2009]는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이름을 날린 최영미 시인의 산문집이죠. 그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겪은 이야기와 만난 사람들, 맛난 먹거리와 잠을 잔 건물, 그림과 영화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생각을 담아낸 책이네요. 어디 여행지를 가서 무언가를 알려주려고 하기보다 자신의 느낌과 경험에 몰두하여 글로 썼네요.

 

그런 맥락에서 책 제목은 여러 모로 짚어볼만 하죠. 어디를 가서 사진을 찍고 유명한 먹거리를 먹어야 여행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겐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란 말이 황당할 수 있죠. 그러나 기념사진 몇 장을 얻고자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되돌아보고자 떠났다면, 길을 잃어야 합니다. 갖춰진 인생은 하나도 없듯 제 아무리 꼼꼼하게 준비를 했다 해도 여행을 떠나는 순간, 자신을 길에 맡겨야 하니까요.

 

인생은 여행이란 말처럼 무척이나 닮은 두 행위에 목적은 처음부터 없습니다. 1970년대 ‘민족중흥’이란 목적을 갖고 태어났다고 을러댄 치들이 있었지만 어느 누가 목적을 갖고 태어나나요? 머릿속에서 다 만들어진 거죠.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이렇게 살고 있고, 걷고 있으니 여행을 하는 거죠. 보통 사람들이 붙들고 있는 목적이란 걸 따져보면, 자신의 삶을 방어하거나 꾸미기 위한 장신구일 때가 많죠. 목적이 있을 거라는 망상이 현대인들을 헤매게 만듭니다.

 

굳이 목적으로 꼽으라면 ‘잘’ 사는 것이고, 목적은 없지만 과정은 있습니다. 삶은 짐작하지 못했던 마주침 안에서 끝없는 사건들로 이루어집니다. 계획은 언제나 종이 위에서만 유효하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확하게 그려진 지도가 아니라 가볍게 걸을 수 있는 신발이고, 득실을 빠르게 재는 주판이 아니라 마음을 싣는 편지입니다. 삶은 이미 벌어졌고, 가볍게 웃으면서 한바탕 신나게 즐기면 됩니다.

 

방황을 걱정하지 말라고 지은이는 등을 두드리네요. 두리번거림을 즐긴다면 방황은 재미난 거니까요. 길눈이 밝았다면 둘레를 살피지 않을 테고, 그랬다면 길섶마다 숨어있는 보물들을 만나지 못하겠죠. 이게 나야, 라고 믿고 있던 테두리 바깥에서 ‘또 다른 나’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를 잃어본 사람만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어요. 지금이 지루하다면 떠나야 하듯이 인생이 재미없을 땐 자신을 비워야 해요. 그때 비로소 제대로 살 수 있으니까요.

 

최영미 시인은 꽤나 순수한 사람이고 제대로 살고 싶어서 끝없이 방황합니다. 예술 같은 삶이 아니라 삶이 예술임을 알아차린 지은이는 기꺼이 삶이란 여행으로 뛰어듭니다. 숨김없이 자신의 못난 점들을 드러내고, 울고 웃었던 이야기들을 풀어내네요. 용기를 내어 ‘자신의 생얼’을 마주보고자 하는 거죠. 시인은 멀리 여행을 간 게 아니라 자기 안으로 여행을 떠난 셈이죠. 길을 잃고자 애를 쓰는 시인의 모습이 참 예쁘네요.

 

이리 치이고 저리 다투는 세상살이, ‘관계 장애’를 겪는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세상살이가 힘든 까닭은 일이 힘들어서가 아닙니다. 사람관계가 어려워서죠. 날마다 이리 부딪히고 저리 깨어진 뒤 빨갛게 긁힌 마음을 부여잡으며 밤을 맞는 현대인들. 두 눈 뜨고 마주보기 힘든 현실 대신에 사람들은 도피처를 찾죠. 그런 흐름을 따라 여행은 도시인들의 고단 삶을 잠깐 누그러뜨리는 진통제가 되어버렸는지 모릅니다. 여행하는 사람들 얼굴엔 일상에서 보지 못했던 발그레한 기운이 피어나네요.

 

문제는 끝이 있다는 것! 여행은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겁니다. 현실을 잠시 잊으려고 여행을 가도 돌아갈 자리는 그대로입니다. 또 다시 날카로운 손톱을 들이대는 상사부터 아픈 곳만 찔러대는 동료까지 자신의 사람관계는 변하지 않죠. 월요일은 어김없이 돌아오듯 덮어두었던 문제는 반드시 터지게 마련입니다. 여행이 그저 물질 풍요에 따른 배부름이나 애달픈 현실을 안 보이게 하는 가림막이 아니라 자신을 뒤흔드는 반성문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낯선 풍경 속에 자기를 갖다 놓아보고 그에 따라 미처 몰랐던 자신을 찾아서 현실로 데려오는 거죠.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사람 관계도, 생활도 확 바뀝니다. 아문 상처 위로 새로운 삶이 펼쳐집니다. 지은이도 인생에서 단지 몇 시간을 공유했을 뿐인 사람들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위로를 얻은 뒤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어느새 아팠던 지난날은 오늘을 위한 밑거름이 된 것이죠. 결국, 여행은 현실을 더 잘 살고자 할 때 가야합니다.

 

지은이는 ‘관계 장애’라고 털어놓을 정도로 사람관계가 서투르다고 고백합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곳을 사랑할 정도로 외로운 사람이죠. 평소 몸이 약하다고 생각했지만 나이 마흔다섯에 혼자 짐가방을 끌고, 단 하루도 미리 잘 곳을 정해놓지 않고 낯선 땅을 헤매는 자신을 돌아보며 결코 약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시인은 가루비누도 없이 빤 옷을 걸쳐 입으며 짜증 부리는 대신 그냥 웃네요.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나’를 만났으니까요.

 

이렇게 여행은 ‘어처구니없는 놀라움’이고 삶은 그마저도 끌어안는 과정이죠. 시대, 부모, 나라, 인종, 성별, 겉모습 등등 어느 하나 고른 게 없건만 이렇게 태어나 살고 있습니다. 이것에 불만을 갖고 계속 딴죽을 걸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게 더 슬기로울지 모릅니다. 스스로 만든 가시는 남을 찌르기에 앞서 언제나 자신에게 먼저 아픔을 주니까요.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품을 수 있습니다.

 

여행은 할퀴고 깔아뭉갰던 사람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해주며 새삼 소중한 사람들을 그리워하게 만듭니다. 미적거렸던 관계를 떨칠 수 있도록 힘을 북돋워주며 보고픈 사람들을 가슴에 새기게 합니다. 얼굴을 맞대고 있을 땐 몰랐으나 떨어졌을 때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 눈물에서 웃음을 길었으면 하네요. 멋진 인생일수록 상처투성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시인의 시를 싣습니다.

 

선운사에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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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의 생각 - 전통에 뿌리내리면서 새로움의 가지는 뻗는 일
한창기 지음, 윤구병.김형윤.설호정 엮음 / 휴머니스트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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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를 앞두고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죠. 강강술래, 남사당놀이, 영산재, 처용무, 제주칠머리당 영등굿이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미 올라간 종묘제례·종묘제례악, 판소리, 강릉단오제까지 더하면, 한국은 세계무형문화유산 8건을 간직한 나라가 되었네요.

 

여기서 잠깐, 강강술래와 강강수월래를 아직까지 헷갈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몇몇 언론에선 강강수월래로 적거나 강강술래와 강강수월래를 뒤섞어서 쓰고 있을 정도죠. 강강술래와 강강수월래, 어느 게 맞는 말일까요? 언어문화학자 한창기가 쓴 <뿌리 깊은 나무의 생각>을 보면, 토박이말과 전통문화에 대해 잘 알 수 있습니다.

 

한창기씨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모두가 업신여기던 전통문화를 높이 평가하면서 판소리를 되살렸고, 놋그릇과 백자 그릇의 가치를 어렵사리 알린 사람입니다. 서구의 문물이 거세게 쏟아지는 가운데 전통가치와 세계 문화 사이에 적절한 조화를 꾀하면서 한평생을 연구한 사람이죠. 그의 문화비평을 모은 이 책엔 근대화 과정에 있는 ‘한국의 생얼’이 고스란히 담겼네요.

 

강강술래? 강강수월래? 조선중기의 여인들은 뭐라고 노래 불렀을까

 

강강술래는 전라도 해안지방에서 부녀자들이 풍요를 바라는 민속놀이였다고 하네요. 음력 팔월 보름, 바로 ‘민족의 명절’ 한가위죠. 휘영청 밝은 보름달 아래서 호남 지방 여인들은 손을 잡고 동그라미를 이루어 돌기 시작하죠. 원을 그리며 춤을 추면서 누군가 매김소리를 하면, 다 같이 ‘강강술래’라는 소리를 되풀이하였죠. 그렇게 <강강술래>가 만들어집니다.

 

다른 이야기를 곁들이자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도 강강술래에 큰 흔적을 남겼다고 하네요. 이순신 장군은 조선 군대를 많아보이게 하면서 왜군의 기습을 감시하고자 부녀들로 하여금 수십 명씩 떼를 지어 ‘강강술래’를 하게 하였죠. 곳곳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강강술래를 하던 여인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때를 잊지 않고 강강술래를 하였고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퍼져나갔다고 하네요.

 

그러나 강강술래는 삼십년 전까지만 해도 ‘강강수월래(强羌水越來)’라고 적었습니다. ‘물을 건너 옴’이란 뜻의 ‘수월래’란 한자말을 쓴 것이죠. 억지로 끼워 맞춘 티가 나는데도 사전에는 강강수월래가 옳다고 하였죠. 조선중기, 대부분이 글자를 모르는 시대에 시골 아낙네들이 수월래란 한자말을 입으로 읊으면서 손을 잡고 돌았다는 상상은 참으로 터무니없건만 사대주의가 강했던 근대화의 지식인들은 강강술래가 그르다고 목소리 높였죠.

 

그러던 것이 한창기 같은 학자들이 더 연구를 한 결과, 강강술래가 맞다고 밝혀졌고 강강술래로 맞춤법을 고칩니다. 강강술래의 말을 따져 보면, ‘강강’의 ‘강’은 동그라미란 뜻의 전라도 사투리고, ‘술래’는 ‘경계하라’는 뜻을 지닌 ‘巡邏(순라)’란 한자에서 온 말로 짐작이 됩니다. 따라서 동그라미를 그리며 둘레를 경계하라는 구호로 임진왜란 때 쓰인 거죠.

 

어깨춤이 덩실거리는 강강술래는 소중한 세계유산, 다시 한 번 ‘한국 것’을 돌아봤으면

 

원래부터 있던 지역 놀이였든, 빙글빙글 도는 춤에 강강술래란 노랫말이 뒤에 붙은 것이든 강강술래는 신나는 민속놀이로 자리 잡았었죠. 처음에는 진양조장단의 느린 가락이 중모리, 중중모리로 바뀌다가 마지막에 가서 자진모리의 매우 빠른 장단으로 바뀌는 특징을 갖고 있죠. 덩달아 춤도 달라집니다. 처음엔 느릿느릿 걸으면서 돌다가 시간이 갈수록 뛰듯이 돌게 됩니다. 한마디로 신명이 나는 거죠.

 

손에 손을 마주 잡고 함께 노래를 부를 때 얼마나 즐거운지 경험해보신 분들은 알 겁니다. 하지만 이제 생활에서 강강술래는커녕 같이 노래 부르는 풍속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노래방만이 외롭게 그 기억을 더듬고 있죠. 강강술래는 사람들 머릿속에만 있거나 그마저도 가물가물한 지경이죠. 사라지는 민속문화가 안타까운 요즘, 강강술래가 소중히 간직해야 할 세계유산이 되었습니다. 뻔한 소리지만, 다시 한 번 ‘한국 것’을 돌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강강술래를 소리 나는 대로 적자면, 가앙가앙수울래입니다. 느긋하면서 여유 있는 농촌 인심이 느껴지네요. 그러다가 스타카토처럼 끊으면서 강,강,술,래, 빠르게 노래하는 대목에선 어깨가 절로 들썩이죠. 그 흥겨움이 그리워지는 가을입니다. 한가위를 맞아 민속문화와 토박이말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고, 잘 지켜갔으면 하는 소망이 생기네요. 저 달님에게 두 손 모아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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