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행은 더 이상 눈이 휘둥그레지는 일이 아닙니다. 웬만한 곳에 가지 않으면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말이 들리는 세상이니까요. 교통수단도 발달하여 한나절 만에 지구 반대편에 갈 수 있습니다. 새벽녘에 나간다면 오늘 밤에 몽마르뜨 언덕에서 산책할 수 있으며 적어도 내일 낮엔 스핑크스를 바라보며 인생이란 수수께끼를 풀어볼 수 있게 되었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면!

 

이것저것 얽힌 게 너무 많은 현대인들은 어제의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늘 저기를 꿈꾸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죠. 오늘을 새롭게 산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똑같은 업무와 삐끄덕거리는 사람관계, 어깨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피로와 혼자 난리치는 아침종까지 일상은 되풀이되기 일쑤입니다. 사람들은 스트레스에 쩐 나머지 일탈을 바랍니다.

 

이에 맞춰 여행책 봇물이 터집니다. 이제 어디를 가는 게 목적이 아니라 여기를 떠나는 게 목적이니까요. 여행은 호기심으로 발을 동동 구르는 모험이 아니라 자유와 쉼의 상징으로 탈바꿈하였네요. 차마 여행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책을 보면서 지친 오늘을 위로받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꼭, 이란 희망을 가슴에 간직하면서!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나를 잃어본 사람만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어!

 

수많은 여행책 가운데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문학동네. 2009]는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이름을 날린 최영미 시인의 산문집이죠. 그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겪은 이야기와 만난 사람들, 맛난 먹거리와 잠을 잔 건물, 그림과 영화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생각을 담아낸 책이네요. 어디 여행지를 가서 무언가를 알려주려고 하기보다 자신의 느낌과 경험에 몰두하여 글로 썼네요.

 

그런 맥락에서 책 제목은 여러 모로 짚어볼만 하죠. 어디를 가서 사진을 찍고 유명한 먹거리를 먹어야 여행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겐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란 말이 황당할 수 있죠. 그러나 기념사진 몇 장을 얻고자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되돌아보고자 떠났다면, 길을 잃어야 합니다. 갖춰진 인생은 하나도 없듯 제 아무리 꼼꼼하게 준비를 했다 해도 여행을 떠나는 순간, 자신을 길에 맡겨야 하니까요.

 

인생은 여행이란 말처럼 무척이나 닮은 두 행위에 목적은 처음부터 없습니다. 1970년대 ‘민족중흥’이란 목적을 갖고 태어났다고 을러댄 치들이 있었지만 어느 누가 목적을 갖고 태어나나요? 머릿속에서 다 만들어진 거죠.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이렇게 살고 있고, 걷고 있으니 여행을 하는 거죠. 보통 사람들이 붙들고 있는 목적이란 걸 따져보면, 자신의 삶을 방어하거나 꾸미기 위한 장신구일 때가 많죠. 목적이 있을 거라는 망상이 현대인들을 헤매게 만듭니다.

 

굳이 목적으로 꼽으라면 ‘잘’ 사는 것이고, 목적은 없지만 과정은 있습니다. 삶은 짐작하지 못했던 마주침 안에서 끝없는 사건들로 이루어집니다. 계획은 언제나 종이 위에서만 유효하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확하게 그려진 지도가 아니라 가볍게 걸을 수 있는 신발이고, 득실을 빠르게 재는 주판이 아니라 마음을 싣는 편지입니다. 삶은 이미 벌어졌고, 가볍게 웃으면서 한바탕 신나게 즐기면 됩니다.

 

방황을 걱정하지 말라고 지은이는 등을 두드리네요. 두리번거림을 즐긴다면 방황은 재미난 거니까요. 길눈이 밝았다면 둘레를 살피지 않을 테고, 그랬다면 길섶마다 숨어있는 보물들을 만나지 못하겠죠. 이게 나야, 라고 믿고 있던 테두리 바깥에서 ‘또 다른 나’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를 잃어본 사람만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어요. 지금이 지루하다면 떠나야 하듯이 인생이 재미없을 땐 자신을 비워야 해요. 그때 비로소 제대로 살 수 있으니까요.

 

최영미 시인은 꽤나 순수한 사람이고 제대로 살고 싶어서 끝없이 방황합니다. 예술 같은 삶이 아니라 삶이 예술임을 알아차린 지은이는 기꺼이 삶이란 여행으로 뛰어듭니다. 숨김없이 자신의 못난 점들을 드러내고, 울고 웃었던 이야기들을 풀어내네요. 용기를 내어 ‘자신의 생얼’을 마주보고자 하는 거죠. 시인은 멀리 여행을 간 게 아니라 자기 안으로 여행을 떠난 셈이죠. 길을 잃고자 애를 쓰는 시인의 모습이 참 예쁘네요.

 

이리 치이고 저리 다투는 세상살이, ‘관계 장애’를 겪는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세상살이가 힘든 까닭은 일이 힘들어서가 아닙니다. 사람관계가 어려워서죠. 날마다 이리 부딪히고 저리 깨어진 뒤 빨갛게 긁힌 마음을 부여잡으며 밤을 맞는 현대인들. 두 눈 뜨고 마주보기 힘든 현실 대신에 사람들은 도피처를 찾죠. 그런 흐름을 따라 여행은 도시인들의 고단 삶을 잠깐 누그러뜨리는 진통제가 되어버렸는지 모릅니다. 여행하는 사람들 얼굴엔 일상에서 보지 못했던 발그레한 기운이 피어나네요.

 

문제는 끝이 있다는 것! 여행은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겁니다. 현실을 잠시 잊으려고 여행을 가도 돌아갈 자리는 그대로입니다. 또 다시 날카로운 손톱을 들이대는 상사부터 아픈 곳만 찔러대는 동료까지 자신의 사람관계는 변하지 않죠. 월요일은 어김없이 돌아오듯 덮어두었던 문제는 반드시 터지게 마련입니다. 여행이 그저 물질 풍요에 따른 배부름이나 애달픈 현실을 안 보이게 하는 가림막이 아니라 자신을 뒤흔드는 반성문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낯선 풍경 속에 자기를 갖다 놓아보고 그에 따라 미처 몰랐던 자신을 찾아서 현실로 데려오는 거죠.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사람 관계도, 생활도 확 바뀝니다. 아문 상처 위로 새로운 삶이 펼쳐집니다. 지은이도 인생에서 단지 몇 시간을 공유했을 뿐인 사람들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위로를 얻은 뒤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어느새 아팠던 지난날은 오늘을 위한 밑거름이 된 것이죠. 결국, 여행은 현실을 더 잘 살고자 할 때 가야합니다.

 

지은이는 ‘관계 장애’라고 털어놓을 정도로 사람관계가 서투르다고 고백합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곳을 사랑할 정도로 외로운 사람이죠. 평소 몸이 약하다고 생각했지만 나이 마흔다섯에 혼자 짐가방을 끌고, 단 하루도 미리 잘 곳을 정해놓지 않고 낯선 땅을 헤매는 자신을 돌아보며 결코 약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시인은 가루비누도 없이 빤 옷을 걸쳐 입으며 짜증 부리는 대신 그냥 웃네요.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나’를 만났으니까요.

 

이렇게 여행은 ‘어처구니없는 놀라움’이고 삶은 그마저도 끌어안는 과정이죠. 시대, 부모, 나라, 인종, 성별, 겉모습 등등 어느 하나 고른 게 없건만 이렇게 태어나 살고 있습니다. 이것에 불만을 갖고 계속 딴죽을 걸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게 더 슬기로울지 모릅니다. 스스로 만든 가시는 남을 찌르기에 앞서 언제나 자신에게 먼저 아픔을 주니까요.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품을 수 있습니다.

 

여행은 할퀴고 깔아뭉갰던 사람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해주며 새삼 소중한 사람들을 그리워하게 만듭니다. 미적거렸던 관계를 떨칠 수 있도록 힘을 북돋워주며 보고픈 사람들을 가슴에 새기게 합니다. 얼굴을 맞대고 있을 땐 몰랐으나 떨어졌을 때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 눈물에서 웃음을 길었으면 하네요. 멋진 인생일수록 상처투성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시인의 시를 싣습니다.

 

선운사에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