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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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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이 참 곱게 생기셨다. 표지 책 날개에 실린 옆모습이 단아하기도 하다. 2018년 창비신인소설상을 받으며 등단한 신인 작가의 얼굴이다. ‘장류진’이란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했다.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책이 좋다는 소문을 듣고 읽으려고 목차를 봤을 때 우리가 구면인 걸 알았다. 「새벽의 방문자들」? 혹시? 작년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동명의 테마소설집에서 작가를 만났었다. 단편집 『아내들의 학교』를 읽었던 터라 박민정 작가만 눈에 들어왔었다. 표제작의 작가라면 응당 그만한 작품을 썼을 텐데 그땐 눈여겨두지 못했었다.


장류진 작가는 데뷔 이후 만 2년이 못 되는 시간에 단편집을 묶어냈다. 부지런하다. 발표지면에 표기된 날찌를 보니 근 2~3개월에 한 작품을 발표했다. 짧은 분량이니 쉽겠거니 생각할 수 있겠지만 쓰는 사람으로서의 고민을 토로하는 여러 작가들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작가는 직장생활도 병행했다. 직장인의 로망인 완벽한 투잡을 이뤘었다.(지금은 퇴사해 전업작가란다.)


IT회사에서 일하며 회사 생활을 녹인 등단작 「일의 기쁨과 슬픔」은 창비 홈페이지에서 40만 조회수를 기록하는 전설을 남겼다. 읽고 보니 내가 직장인이라도 꼬박 챙겨봤을 이야기였다. 장류진 작가의 글은 젊었다. 흰 벽에 칸막이가 총총 들어앉은 회사 한 층을 똑 떼어다 글 속에 심어놓은 듯하다. 집단 속에서 이뤄지는 대화, 은근히 오가는 눈치, 뒷담화, 알 수없는 케미의 순간들이 담겨있다.


책을 읽으면서 소설사 김중혁이 팟캐스트에서 말한 단편 소설의 정의가 계속 떠올랐다.


단편은 사건을 겪은 인간의 이야기고 장편은 인간이 겪은 사건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단편은 거대한 사건보다는 한 인간이나 가까운 사람, 관계를 조망한 작품이 많아요. … 우리가 옆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듯이 혹은 누군가를 관찰 하듯이 단편을 보면 사소한 관찰로 굉장히 큰 것을 얻을 수 있어요. … 단편의 경우는 인간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죠.

<이동진의 빨간책방> 117회 대성당 1부 中


장류진의 단편들은 정확히 ‘사건을 겪은 인간의 이야기’다. 단편들에 등장하는 사건이 크던 작던 그 배경이 어디건 눈길이 가는 건 사람이다. 어이없고, 황당한 일에 부딪친 사람, 그들의 심리와 반응들이 모이고 엮인다.


청첩장을 달라며 밥을 얻어먹고는 결혼식에 나타나지도 않은 회사 동기 언니가 청첩장을 두고 갔다. 주인공은 오고 간 밥값을 정확히 계산해 차액만큼의 선물을 건넨다. 웬만하면 기분 상한 상대의 마음을 알아챌 만도 한 상황인데 언니는 그저 고맙다고 눈물까지 보인다. 주인공이 보기에 언니의 행동은 무례하고 의도가 있는 것처럼만 보였다. 그런데 소설이 마지막으로 갈수록 정말 그럴까 싶다. 동기 언니는 그저 아무 생각 없는 아이 같은 사람이었던 건 아닐까 싶어진다. 세상의 원리를 가르쳐주겠다던 마음은 그저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바뀐다. 「잘 살겠습니다」의 이야기다.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아직도 모르나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

p.28


빛나 언니는 잘 살 수 있을까. 부디 잘 살 수 있으면 좋겠는데.

p.33


표제작 「일의 기쁨과 슬픔」에는 월급을 카드 포인트로 받는 사태가 등장한다. 사장에게 찍혔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직원의 월급 전체가 포인트로 지급된다. 말도 안되는 이런 일이 소설 속에만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작가는 재미있지만 등골이 서늘한 지점을 짚어냈다. 우리 사회는 이런 일들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곳이다. 그래도 회사는 다녀야하고 포인트는 어떻게든 돈으로 만들면 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 같은 일반 회사원들과 사고구조가 아예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논리나 행동에 의문을 갖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안 해야 돼요. 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머리가 이상해져요.”

p.50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의 주인공 남자는 썸을 타던 여자를 만나러 후쿠오카에 간다. 본인은 둘 사이에 특별한 감정이 흘렀다고 확신하고 있다. 다시 만난 여자 쪽의 반응도 기대했던 그대로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다. 마지막 순간 직전까지만. 어쩜 이렇게 자신만만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서로의 수를 훤히 꿴 고수들의 밀당전쟁이다. 남자의 마지막 행동에서 여자에 대해 추측했던 모든 생각이 혼자만의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말도 안 돼. 종이컵 안에는 커피가 들어 있었다. 거지가 아니라 그저 커피를 마시고 있는 할머니였을 뿐이라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p.98


「다소 낮음」에서는 우연히 유튜브에 올린 영상이 인기를 얻으며 부침을 겪는 인디밴드 멤버의 이야기다. 그는 왜 다른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효율성’에 근거한 선택을 전혀 하지 못하는 걸까. 그런 선택이 편한 사람이 있는 걸까. 작가는 그런 선택도 존재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까.


「도움의 손길」에 등장한 도우미 아주머니와 주인공의 심리전도 흥미로웠다. 아이는 그랜드 피아노와 같아서 작은 평수의 집에는 감당할 수 없다는 주인공의 논리부터 새로웠다. 그런 식의 해석이 가능할 수 있구나 싶었다. 화자는 부부끼리 사는 대신 완벽한 인테리어를 하고 그에 걸맞게 가사 도우미를 고용하고 싶어 한다. 너무 깔끔 떠는 집주인이다 싶다가도 점점 태만해지는 도우미의 행동이 밉살스럽지도 하다. 둘의 행동이 어느 한 편으로 기울지 않게 아이러니함으로 가득하다.


「탐페레 공항」은 소설집에 실린 단편 중 가장 아름다웠다. 육년 전 핀란드 탐페레 공항을 경유하면서 만난 노인을 회상하는 이야기다. 희망했던 대로가 아닌 직장, 노력과 다르게 풀리는 인생, 쌓여가는 후회들. 회복 불가능할 것 같은 후회 하나를 기적처럼 되돌리는 이야기다. 용기를 내고 미뤄뒀던 일, 천천히 서랍을 여는 일부터 시작하면 된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후회하는 몇가지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애써 다 털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내 안 어딘가에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고, 떼어내도 끈적이며 남아 있는, 날 불편하게 만드는 그것. 내가 그것을 다시 꺼내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꺼내서 마주하게 되더라도 차마 똑바로 바라보기는 힘들 거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p.209


장류진 작가의 소설집은 ‘사소한 관찰’에서 ‘굉장히 큰 것’을 느끼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사소한 일들의 나열같지만 소설 한편 한편의 전체를 볼 때 굉장히 촘촘한 의미의 그물이 펼쳐져 있었다. 쉽게 읽히면서도 자꾸 곱씹게 했다. 어느 한 쪽 편을 들 수 없는 사람들이 자꾸 생각난다.


주물공장 노동자였던 김동식 작가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자 한 대학 문예창작과 교수가 이런 우스갯 소리를 했다고 한다. 우리도 주물기계를 들여놔야 하는 거 아닐까. 장류진 작가의 경우 회사 생활 1년이 지나고부터 한겨레 문화센터에 다니며 처음 소설을 쓰게 됐다고 한다. 앞으로의 작가지망생들은 대학보다 문화센터 소설 창작교실에서 더 많은 배움을 기대하게 되진 않을지. (단, 장류진 작가는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긴 했다.)


단편「연수」로 장류진 작가는 2020년 젊은 작가상을 수상했다. 앞으로 작가가 보여줄 세계가 자못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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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반하는 글쓰기
강창래 지음 / 북바이북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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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재능과 창의성 그리고 책의 정신'이라는 주제의 시민강좌에서 강창래 저자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책의 정신』으로 워낙 유명해진 분의 강연은 어떨지 궁금해했던 기억이 있다. 글 솜씨와 말솜씨가 비례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번 경우는 좀 달랐다. 책 속의 진지한 목소리를 상상하고 만난 저자가 정말 소탈하고 편안한 태도로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강연을 정말 많이 한 분이구나, 듣는 사람에 대해 아주 잘 이해하는 분이구나'하는 느낌을 받았었다. 저자의 책을 다 읽어보고 싶어진지 오래다. 새로 나온 책 『위반하는 글쓰기』로 시작해볼까.


저자는 오랜 시간 출판 편집기획자로 일했다. 책을 기획하고 편집, 교정/교열하는 과정에서 고스트 라이터, 윤문 전문가로도 활동했다. 『위반하는 글쓰기』는 글쓰기의 방법에 대한 책인 동시에 저자만의 쓰기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책이었다. 저자는 수많은 글쓰기 책이 나오는 와중에 이 책을 내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지난날의 원칙에 얽매여 있다면 글을 잘 쓰기는 어렵다. 삶의 환경이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에 맞추어 글쓰기 원칙 역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p.9


책은 1부 바로잡기, 2부 쓰기, 3부 고치기로 구성돼 있다. 글쓰기에 대해 잘 알려져 있는 '원칙'을 검토해보는 것이 1부의 내용이다. 2부에서는 글쓰기의 방법을, 3부에서는 쓰기보다 중요하다는 글 고치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책의 전반에는 널리 알려진 기존의 글쓰기 원칙을 막연히 쫓지 말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1. (저마다) 자기가 잘 쓸 수 있는 글을 잘 쓴다.

2. 집중하되 전문가의 피드백을 통해서 잘못된 부분을 고쳐 나가야 한다.

3. 정독과 다독의 경험이 필요하다.

4. 필사는 정독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5. 글쓰기란 말을 글로 받아 적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글로 번역하는 것이다.

6. 인간의 언어는 있는 것을 묘사하고 설명하기보다는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데 훨씬 특화된 마법의 도구다.

7. 한국인의 정체성이 과연 고유어에 담겨 있는것일까? 그런 의문을 진지하게 짚어 보자.

8. 한자어는 대개 추상적이고 객관적인 용법으로 쓰이기 때문에 감정을 느기기 어렵다. 대신 의미가 좀 더 분명하다.

9. 언어는 라이프 스타일과 사고방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10. 순수한 일본제 한자어 같은 것은 없다.

11. 생각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이 생각을 쓰는 것이다.

12. 언제라도 꺼낼 수 있는 절실한 이야기로 가슴속을 채워 두어야 한다.

- 1부 바로잡기 中


잘쓰는 작가라고 모든 글을 잘 쓰는 것이 아니며 많이 쓴다고 잘 쓰게 되는 것도 아니다. 다독과 필사도 필요에 따라 해야 하고 말하는 것처럼 써서는 좋은 글이 될 수 없다. 한국인만의 고유어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봐야 하고 생각한 대로 풀어낸 것이 좋은 글이 되지도 않는다. 기술적인 수련보다 중요한 건 좋아하는 것이다. 무엇을? 글쓰기를.


그게 무엇이든 의식적으로 '열심히' 하는 것은 꼭 좋은 게 아니다. 자연스럽지 않은 '열심'은 글에도 묻어난다. 부담스러울 뿐이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되니 잘하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작위적인 느낌 때문에 공감을 끌어내기 어렵고 설득력도 떨어진다. '열심히' 하지 말고 몰입할 수 있어야 한다.

p.101


2부 쓰기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은 대목은 글쓰고 싶은 마음 채우기에 대한 부분이었다. 쓰기에 집중하기 보다는 좋아하라는 맥락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글을 잘 써보겠다고 애쓰지 말고 "글쓰기를 살이 있음의 기쁨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보라는 말이다. 그러면 즐겁게 오래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제 생각으로는 '어떻게든 날마다 쓰겠다'는 결심보다 '글로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생각을 만드는게' 더 중요하지 않을 까 싶습니다.

p.109


글은 주제에 대한 합리적인 생각을 펼쳐놓는 것이 다가 아니다. 주제와 연결된 수많은 자료를 수집 정리하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맥락을 찾아내야 한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느껴보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어떤 주제를 다룰 때 그것에 대해 잘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며 "그것에 대한 분명한 느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느껴 보는 것'은 어떤 사안을 판단하는 데 무척 중요하다. 느낌이 없다면 판단도, 선택도 없다.

p.135


그 선택은 '감정의 몫'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제가 펼쳐지는 상황에 들어가 당사자의 입장이 되어 보아야 한다. 바로 그 '대상'이 되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느껴 보아야 하는 것이다.

p.143


선택과 집중을 거쳐 무엇을 쓸지 또는 쓰지 않을지를 결정하기 위해선 주제에 깊이 몰입하고 느껴야 한다. 그래야 만족스러운 글을 쓸 수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글쓰기의 기술, 글 고치기의 실제를 읽다보니 저절로 나의 글쓰기에 두려움이 생겼다. 정말 이렇게 되는 대로 써도 되는 걸까. 저자는 자신이 이 책을 통해 글쓰기의 시작과 끝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쓰기 시작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책을 읽고나니 겁이 났다. 글 고치기 부분에 나온 모든 고칠 문장들이 나의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문장들은 그렇게 이상했다. 그러나 저자의 또다른 말에 힘을 얻어보려 한다. 저자의 원칙은 뼈아픈 깨달음을 주었다. 다 실천할 엄두를 낼 수 없을 지경이다. 이제 그만 잊고 다시 써보자. 내 속에 생채기를 냈던 원칙들이 얼마간 조화를 부려 조금 더 생각하고 조금더 고치는 글쓰기가 되길 기대할 밖에.


특히 문장 고치는 기술은 따로 깊이 공부해야 한다. 기계적으로 외워서는 절대 안 된다. 원칙은 언제나 알고 나서 잊어야 한다. 깊이 깨달아야 한다.

원칙은 암기의 대상이 아니라 깨달음과 망각의 대상이어야 한다.

pp.200-202


좋은 글은 지극히 걱정하고 사랑한 결과물이다. 글쓰기라는 두근거림 앞에서 이제 당신은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내야 할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쓰기 시작하자.

p.271


책도 책이지만 저자의 살아온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다. 그가 낸 책들의 목록만으로도 성실한 삶의 족적을 알 수 있었다. 삼성출판사에서 출판 경력을 시작했고 90년대에는 컴퓨터 관련 실용서를 여럿 냈다. 한겨레 노동교육연구소에서 출판 편집 강의를 하고 이후에는 인문학 강연과 여러 기관의 자문 역할을 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지 실용서 외에 처음 낸 책들은 인물을 탐구한 책들이다. 하긴 그가 이전에 냈던 컴퓨터 관련 서적들도 남달랐다고 한다. 기술 사용법을 설명하면서 그 기원과 이유 등까지 상세히 서술했다고 한다. 무언가 깊이 파고드는 태도는 90년대 후반 언어학을 연구했다는 대목에서 더 확실해진다. 아마도 직업상 오래 만져온 '언어'라는 대상을 잘 알고 싶었기 때문에 시작한 공부가 아니었을까. 『위반하는 글쓰기』에 얼핏얼핏 등장하는 언어학적 분석들을 보면 그 공부가 상당히 깊었음을 알 수 있다. 뇌과학에도 관심을 가졌었다. 올리버 색스의 『편두통』을 번역할 정도다. 색스는 흥미로운 서사 중심의 병례사로 유명하다. 그러나 『편두통』은 의학 전문서에 가깝다. 전문용어와 임상 병리적 서술로 채워져 있다. 그저 관심이 좀 있다고, 영어 좀 한다고 번역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최근 저자가 깊이 연구한 분야는 요리다. 아내의 병수발 기간 동안 음식을 도맡아 하면서 그리됐다. (꽤 알려져 있고 앞으로 (영화 덕분에) 더 잘 알려질 사연이다.)


저자의 글쓰기는 '성실한 글쓰기'다. 서평 하나를 쓰기 위해 "7권의 책과 10편의 비디오"를 봐야 하는 작업이다. 이런 방식이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한 과정을 거칠 때 그렇고 그런 소모적인 글이 아닌 "나를 성장 시"키는 글이 된다는 말이다. '글쓰기의 즐거움'을 아는 '글쟁이'가 된 저자 자신이 그가 한 모든 말에 대한 증명이다.


'제가 믿는 진실을 써내기 위해 싸운 겁니다. 글쓰기의 즐거움을 위해서는 싸울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여기에서 이긴다면 언제까지나 이길 수 있겠지요.' 쓰기를 위한 '읽기'에서도.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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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행성에서 너와 내가 사계절 1318 문고 123
김민경 지음 / 사계절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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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모비 딕』이 눈에 들어온다. 읽을 때가 된 걸까. 스쳐본 포털에서 작가정신에서 낸 『모비 딕』의 표지가 자주 보았다. 아몬드 모양의 새까만 눈동자가 커다랗게 박혀있는 책. 아름다운 문장과 헤아릴 수 없이 넓은 지식, 인간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 마리아 포포바의 『진리의 발견』을 읽는 동안 멜빌과 그의 고래를 또 만났다. 전에 어떤 글에서 『모비 딕』은 소설이 아니라 고래백과사전이라는 말을 읽었었다. 서사가 부족한 책을 읽기 어려워하는 나의 도서 특성상 이 책은 어렵겠다고 판단했었다. 포포바가 소개하는 『모비 딕』은 내가 알고 있던 책과 달랐다. 작가가 고래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가지게 된 배경과 책을 쓴 시기 등을 읽으면서 호기심이 동했다. 그리고 이 책 『지구 행성에서 너와 내가』를 읽게 됐다. 책을 매개로 한 소년과 한 소녀가 만난다. 청소년기의 독서에 대한 묘사가 궁금했고 책을 통해 그들이 어떤 것들을 나눌 수 있을 지 알고 싶었다. 주인공 소년과 소녀가 함께 나눈 책이 『모비 딕』이었음은 물론이다. 


소설은 소년의 시점과 소녀의 일기가 교차로 병행되는 구성이다. 마음에 드는 소녀를 만난 소년은 그녀와 어떻게든 교차점을 만들고 싶었다. 그런 그에게 소녀가 요구한 것은 『모비 딕』 읽기다. 둘은 고등학교 1학년이다. 입시 전쟁을 코앞에 두고 두툼한 소설을 읽는 일은 '보통'의 고교생에겐 어려운 선택이다. 만화도 아니고 가벼운 소설도 아닌 고전소설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소녀에 대한 호감은 소년을 움직인다. 781쪽자리 책을 다 읽으면 소녀가 제주도로 전학가기 전까지 매일 만날 수 있다. 빨리 읽으면 읽을 수록 소녀와 함께 할 시간이 길어진다. 소년의 마음이 급해졌다. 대체 이렇게 두껍고 난데 없는 고래를 다룬 책이 어떤 의미가 있길래 두 번씩이나 읽었다는 건지 알고 싶었던 거다. 소녀를 만나려면 책을 완독하는 수 밖에. 소년은 하루에 읽을 분량을 나누고 책를 시작했다.


소년이 책을 읽으며 변화해가는 모습이 나에겐 독서사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모조리 보여주는 것 같았다. 책의 문장이 생활 속으로 들어오고 소설 속에 몰입되어 내가 이야기 속에 들어간 기분이 되고 자신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에서 자신도 몰랐던 스스로의 편견을 깨는 일까지. 소년은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모든 경험을 『모비 딕』이라는 소설 한 권안에서 얻는다. 그야말로 책읽기의 정석이다.


책의 첫 부분을 읽은 소년의 감상은 이렇다.


무슨 책이 이따위야. p.9


어원과 기나긴 발췌록으로 시작하는 대목에서 소년은 지레 질려버린다. 하지만 이야기가 시작되는 첫 문장에 매혹되고 만다. 많은 독서가들이 경험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첫문장에 홀리는 일 말이다. 오죽하면 『소설의 첫 문장』(김정선, 유유), 『내가 사랑한 첫 문장』(윤성근, MY)같은 책이 나왔을까. 유명한 『모비 딕』의 첫 문장과 소년의 단상이다.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 두자.

『모비 딕』의 진짜 첫 문장이다. 나는 첫 문장을 뚫어져라 보았다. … 얼마나 자신 있기에 이런 식으로 첫 문장을 쓰나. 작가의 자신감과 거만함이 느껴졌지만, 솔직히 말해 내가 읽은 책의 첫 문장 중 최고였다. 첫 문장에서 마음이 이렇게 확 끌리는 건 처음이다. pp.15-16


소년의 독서는 순풍에 돛을 단다. 『모비 딕』에는 멜빌 자신의 목소리가 직접 담긴 장면이 있었다. 소년은 이 문장을 읽고 포경업에 대해 작가가 가졌던 애정에 공감한다. 작가의 목소리와 직접 대면하는 경험은 서사 집중력을 높이고 주인공을 따라 나서는 모험이 시작된다.


그러다가 그 장 끝에서 유언이나 다름 없는 무장이 나와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이건 이슈메일의 목소리가 아니라 작가의 직접적인 목소리였다.

… 내가 죽을 때, 내 유언 집행인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 빚쟁이들이 내 책상 속에서 귀중한 원고를 발견하단다면, 나는 모든 명예와 영광을 포경업에 돌린다고 여기서 미리 밝혀 두겠다. 포경선은 나의 예일대학이며 하버드대학이기 때문이다. pp.39-40


『모비 딕』의 문장은 소년의 경험과 겹쳐진다. 책 속에서 이규메일과 퀴퀘그는 함께 책을 보며 "대화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 간다. 그리고 "마음의 밀월"을 나눈다. 소년은 이 대목에서 소녀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린다. 책이 내 경험을 고스란히 대신 말해주는 것 같은 순간과 맞닥뜨린 것이다. 이런 순간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울렁이게 한다. 소년은 책으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번역해내고 있었다.


사람은 영혼을 감출 수 없다.

나는 이 문장을 뚫어져라 보았다. 새봄이를 처음 본 날이 떠올랐다.…처음 본 아이였는데 그런 느낌이 들어서 나 스스로도 놀랐다. 한 학기를 돌이켜 봤을 때 새봄이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이 맞았다. 그래, 사람은 영혼을 감출 수 없다. 아름답고도 무서운 말이다. pp.22


소설의 문장이 독자의 경험으로 변환되는 일을 잘 묘사한 대목이 있다. 한낮의 도서관에서 나온 소년은 책 속의 문장을 떠올린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피쿼드호가 지나갔던 열대 해역을 떠올리고 육지는 구경도 못한 채 몇 년씩 바다에서 보내는 삶을 상상한다. 대리 체험의 단계로 진입이다. 소년은 피쿼드호에 승선해 숨가쁜 고래잡이를 경험한다.


한낮의 태양 아래를 걸으니 낮은 그렇게 매력적이고 밤은 그렇게 유혹적이어서, 잠을 언제 자는 게 좋을지 선택하기가 어려웠다는 문장이 떠올랐다. pp.42-43


거의 스무 장을 몇 시간만에 읽었다. 나도 피쿼드호의 선원이 되어 그들과 함께 고래를 잡아 죽이고 해체하고 장례를 치른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텅 빈 듯하고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책을 읽는 게 이렇게나 힘들다니……. pp.69-70


오래된 소설책이지만 『모비 딕』은 소년에게 사회를 만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포경선 내의 위계를 보면서 자본주의가 사회적 계층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고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숙고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사회의 구조와 그 사회 속에서 사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보는 일, 소년의 독서는 생각의 확장을 이끌어 낸다. 앞으로의 인생을 성찰하고 잊지 말아야할 미래를 위한 질문까지 떠올린다.


포경선 또한 하나의 사회였다.… 미국이 그걸 인정할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해 보면, 자본주의에서는 좀 더 힘 센 놈과 좀 더 약한 놈이 늘 있어 왔다. 그 기준은 '돈'이다.

아직 나는 직접 돈을 벌어 먹고살지는 않는다. 그래서 모르는 걸까. 솔직히 나는 많이 가지면 무엇을 더 누릴 수 있는 건지 궁금하다.… 나이가 들고 직업을 가지면 알게 될까.… 언젠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 궁금증을 잊지 않는 한 말이다. 내가 이걸 궁금해한다는 걸 잊지 말자. p.41


"책은 얼어붙은 정신과 감수성을 깨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고래를 묘사는 멜빌의 문장에서 소년은 자신의 편견을 깨닫는다. 소년의 감수성이 놀라울 따름이다. 현실 고1의 독서가 이럴 수만 있다면 아니 성인이 독서에서 이런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다른 세상을 살고 있지 않을까. 제대로 된 책읽기는 "날마다 뒤통수 엊어맞"기다. 기분 나쁘지 않은 뒤통수 엊어맞기.


나는 인간 말고는 어떤 살아 있는 동물도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문득, 그동안 내가 너무나 편협하게도 '아름다움'을 예쁘다는 뜻으로만 생각했으며, 이 지구상에 오직 인간만이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 착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작가가 이 책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고래뿐만이 아니라 인간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이 이 책을 읽은 지 나흘째인데 날마다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언젠가부터 세상을 거의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모르는 세상이 아직도 많고 무한하다는 걸 깨달았다. pp.85-86


소설의 나머지 반은 소녀가 죽음의 손길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다. 소녀는 2016년 4월 16일 이후로 4년간 칩거했다. 사회와 떨어져 자신만의 세계에서 죽음과 벌인 싸움의 기간이었다. 소녀는 살기를 선택했고 다시 학교에 나왔다. 4.16은 우리 사회와 소녀에게 서로 다른 의미로 '상전이'를 가져온 날이다. '상전이'는 물질이 일정한 외적조건에 따라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뀌는 현사을 말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특성이 생겨난다. 우리는 그리고 소녀는 어떻게 해도 4.16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가지고 있던 특성이 변했기 때문이다. 변화의 필연성을 인식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향해야 한다. 도서실에서 우연히 만난 『모비 딕』의 문장은 삶과 죽음에 대한 소녀의 생각을 바꾼다. 소녀를 『모비 딕』으로 이끈 문장은 작은 포스트잇에 씌여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포경 밧줄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모든 인간은 목에 밧줄을 두른 채 태어났다 하지만 인간들이 조용하고 포착하기 힘들지만 늘 존재하는 삶의 위험들을 깨닫는 것은 삶이 갑자기 죽음으로 급선회할 때뿐이다. - 『모비 딕』 pp.76


포스트잇의 문장은 인간 삶에 편재한 죽음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책을 다른 의미로 읽는다. "진정 『모비 딕』을 아는 사람은 죽음을 배척하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소녀에게 『모비 딕』은 "살아 있는 것, 살아 있음에 대한 이야기"였다. 소녀는 소년을 만나면서 자신이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여전히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책은 그 만남의 매개가 된다. 소녀는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꿈꾼다. 소녀가 책을 두 번 완독하고 적은 남긴 문장이다.


진정한 힘은 결코 아름다움이나 조화를 손상시키지 않고, 오히려 아름다움과 조화를 가져다 준다. 당당한 아름다움을 지닌 모든 것이 발휘하는 불가사의한 매력은 힘과 깊은 관계가 있다. p.134


소년이 『모비 딕』을 읽는데 걸린 시간은 단 엿새가 걸렸다. 엿새 간의 폭풍같은 읽기와 생각하기 그리고 엿새 간 이어진 소녀와의 토론. 두 사람은 때로는 책 이야기를 때로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마음의 밀월"을 나눈다. 책이 끝날 즈음 둘의 이야기가 영원히 계속됐으면 좋겠다 싶었다. 올리버 색스의 『고맙습니다』가 등장한 책의 마무리는 그 이상 좋을 수 없었다. 소년과 소녀의 대화는 책을 읽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바로 그 자체'였다. 그런 이야기 나눌 여유, 그리고 누군가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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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쉬운 패권 쟁탈의 세계사 - 육지, 바다, 하늘을 지배한 힘의 연대기
미야자키 마사카쓰 지음, 박연정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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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때의 공부가 아쉬울 때가 있다. 나의 경우엔 세계가를 접할 때마다 그런 마음이 든다. 고교시절 세계사와 지리가 선택과목이었다. 지리를 선택한 나는 우리 반이 세계사 수업을 할 때 지리 수업을 하는 반으로 옮겨가곤 했었다. 입시에 맞춰 특정 과목의 지식이 완전히 백지 상태로 남은 것이다. 지리에 열중하지 않았음에도 기본적인 지식의 밑그림이 머리에 들어와 있는 반면 세계사의 맥락에는 깜깜이다. 세계를 다룬 책을 접할 때면 시대 배경을 몰라 문맥을 못따라가고 매번 검색하느라 집중력을 놓치곤 한다. 세계사에 대한 체계적인 수업 과정을 흘려듣기라도 했다면 이렇게 갑갑하진 않지 싶을 때마다 그 시절의 교육과정에 눈을 흘기게 된다.


세계사를 간결하게 서술한 책을 몇 권 읽으면서 공부 부족을 메꿔보려 하고 있다. 지식 흡수력이 학생때만은 못하더라도 여러 권 읽다보면 대략의 흐름은 머리에 들어오겠지 싶어서다. 세세한 지역사 보다는 세계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책을 고르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패권 쟁탈의 세계사』(이하 『패권 쟁탈의 세계사』)는 이름에서 끌리는 책이다. 그냥 쉬운 것도 아니고 세상에서 가장 쉽다니 말이다. 읽다보니 '세상에서 가장 쉬운'이란 말은 누구를 기준으로 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겸손한 마음으로 이 정도의 난이도가 세계사의 '세계'에서는 '가장 쉬운' 단계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옮긴이 후기에서 말한 것처럼 "최근에는 특정한 소재를 중심으로 역사를 설명하는 유형"의 역사가 유행인 모양이다. 연대순으로 역사를 서술한 통사보다는 하나의 소재를 중심으로 한 세계사가 눈에 많이 띈다. 예를 들면 전쟁, 여성, 식물을 소재로 서술하거나 전염병, 약, 음식, 물건, 조세제도 등과 같은 것들이 세계사를 어떻게 바꿨는지를 알려주는 식이다. 이 책의 저자인 미야자키 마사카쓰도 『돈의 흐름으로 보는 세계사』, 『공간의 세계사』, 『바다의 세계사』, 『술의 세계사』 등을 저술했다.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어느 하나로 특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시대를 넓게 훑고 지나가는 통사를 읽으면서 생기는 구멍들을 작은 역사적 요소들에 집중한 책들로 메울 수 있다. 굵직한 통사의 골격에 미시사로 살을 붙여 나가는 격이다.


『패권 쟁탈의 세계사』은 '패권'의 이동에 집중하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패권의 정의부터 숙고할 필요가 있다.


패권은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해 다른 나라를 압도하는 나라의 지위라고 정의하지만, 그뿐 아니라 스스로 지배하는 구조의 체제를 형성·유지·주도할 책임을 가진 나라라는 의미도 더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육지, 바다, 하늘로 세계가 변화하는 가운데 각 세계의 형성을 주도하고 구조를 유지하고 질서의 중심축에 위치해 있는 나라가 패권 세력이다p.26


저자의 말에 따르면 패권은 그저 군사력에 의한 정복으로만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물리적 힘으로 지배권을 얻었다면 그 이후에는 지배력이 미치는 지역을 억합, 착취한 할 것이 아니라 그 체제가 잘 유지되도록 주도 해야 한다. 저자는 패권국이라면 "인류의 미래를 내다보고 기여하는 점"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패권을 장악한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다수에게 지지를 받고 전쟁을 막고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책임을 다하는 역할과 같다. 자국의 세력 강화, 또는 도전하는 자세만으로 패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p.239


책은 몽골 제국, 영 제국, 미국을 세계사 속에 패권을 잡은 나라로 지목하고 있다. 각각 육지의 패권, 바다의 패권, 하늘의 패권을 상징한다. 각 제국들이 힘을 모으던 시기에 비슷한 방향으로 갔던 나라들은 왜 패권을 잡지 못하고 이들 세 나라가 주도권을 잡게 된 것일까. 패권을 잡은 국가들이 스스로 만든 지배 체제가 잘 유지되도록 운영한 것이 과연 "인류에 기여"하기위해서 였을까. 자신들 국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선 피지배민을 말살에 가깝게 착취하기 보다는 살 길을 만들어 주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이런 저간의 의미를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 패권국의 "인류에 기여"일까. 질문이 만발하는 대목이었다.


역사 상 가장 오래 패권을 유지했던 육지의 패권은 지금의 세계에도 그 영향이 남아있다. 저자에 따르면 건조지대에서 습윤지대로 영역을 넓혀간 육지 패권을 만들었던 지도자의 성향이 현재의 각국 지도자에게서도 보인다. 터키, 소련, 중국, 러시아의 지도자들은 과연 그러한가. 이러한 일반화의 근거가 제시되지 않아 아쉽다. 앞으로 세계 정세 뉴스를 살피면 확인해 볼 수 있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건조지대에서는 권력이 군사력과 결합하기 때문에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체면이 무엇보다 중시되는 경향이 강하다.…


터키의 케말 아타튀르크,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마오쩌둥, 러시아의 푸틴, 중국의 시진핑 등 체면에 연연하는 지도자는 일일이 열거할 틈이 없다. 강대한 군사 지도자가 계속 지배해온 건조지대의 역사적 특징이다. pp.100-101


몽골의 쿠빌라이칸은 유럽과 동아시아를 육지와 해상으로 잇는 '원환 네트워크'를 구축하면서 패권을 유지했다. 육지의 시대에서 바다의 시대로 전환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바다 전체를 운항하는 증기선의 정기 항로가 개척되면서부터다. 미국은 공군력을 바탕으로 하늘의 패권을 점령하고 인터넷을 발판 삼아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다. 저자는 각 영역별 패권이 형성된 과정을 순서대로 서술한다. 책은 "유라시아의 오랜 '육지'의 역사, 대항해시대 이후 지구 표면의 70퍼센트를 차지하는 대양이 육지를 통합한 '바다'의 역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하늘(항공망과 인터넷)'이 세계를 연결하는 역사"를 담고 있다.


지난 5,000년 동안 세계사의 주요 무대는 육지→바다→하늘로 변화해왔다. 유라시아에서 오래 지속된 '육지'의 역사, 대양(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이 다섯 대륙을 연결한 '바다'의 역사, 항공망이 연결하는 '하늘'과 인터넷의 가상공간으로 이루어진 '하늘'의 역사 순으로 크게 바뀌어온 것이다. p.241


저자는 현재의 미국이 가진 패권에 강력한 도전자로 중국을 지목한다. 그 이유 중 하나로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 전략을 제시한다. 쿠빌라이 칸의 아시아 원환 네트워크에서 착안한 이 전략에 유럽을 포함시켜 육지 세계의 패권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 변화하기 어려운 구조개혁은 그대로 둔 채 정보통신 기술을 육성시켜 하늘의 패권까지 장악하려 한다는 말이다. 일본인 저자가 말하는 중국의 속셈, 우리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지적이다.


"세계사를 구조적으로 이해하는 매우 간단한 방법"을 제시하려 한 저자의 목적은 세계사 구조의 단순화로 어느 정도 성취됐다. '육지, 바다, 하늘'이라는 세 가지를 기본 틀로 나머지 역사 지식을 채워 넣으면 된다. 단 기본 틀이 아주 단순한 만큼 보충할 지식이 많다는 건 독자에게 남은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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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나온 암탉 (출간 20주년 기념판) - 아동용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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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수가 주인공이 죽었다. 암탉 잎싹은 족제비에게 순순히 자기 목을 내밀었다. 영화 <마당을 나온 암탉>의 엔딩이다. 권선징악 또는 '그들은 모두 행복하게 살았다'는 식의 결말이 아동물에서 볼 수 있는 결말이다. <마당을 나온 암탉>의 마지막은 익숙한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의 그것과는 지구와 안드로메다 사이만큼 거리가 멀었다.


황선미 작가의 책 『마당을 나온 암탉』을 알게 된 건 영화 제작 소식을 통해서였다. 영화 관련 회사에서 일했던 터라 제작 중 혹은 개봉예정인 영화 라인업을 조금 일찍 알 수 있었다. 주요 제작사에서 만드는 영화의 개봉일정은 특히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2000년대 중반쯤 한국영화제작사 명필름의 라인업에 『마당을 나온 암탉』이란 영화가 등장했다. 닭이 주인공인 영화? 한국영화계에서 나름 의미있는 작품들을 제작해 온 영화사에서 만들기로 한 애니메이션이 궁금했다. 원작이 어떻길래 명필름에서 제작을 결정했을까. 일반 영화 제작과 달리 애니메이션은 제작 기간이 무척 오래 걸렸다. 제작을 결정했다는 소식이 2005년 경, 제작에 돌입했다는 뉴스가 2006년에 나왔다. 그 후에는 개봉 라인업에 제목을 올린채 몇 년이 지나갔다. 제작 중에 엎어진 걸까? 라인업을 정리할 때마다 잠깐씩 궁금했다. 그러면서 또 몇 년이 지나고 그 사이 나는 영화 쪽 일을 그만뒀다.


잊고 있던 영화가 TV에서 나오고 있었다.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만난 영화는 마지막 장면만 남아있었다. 체념한 표정의 암탉이 순순히 족제비에게 잡히고 있었다. 사냥꾼 족제비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이들이 보는 영화에서 주인공이 죽는 장면이 나오는 것도 놀라웠다. 게다가 이른바 '악'으로 불릴만한 나쁜 놈의 표정은 이 작품이 기존의 아동물과 다른 지점에 있다는 걸 깨닫게 했다. 경험적으로 원작이 있는 영화는 영화보다 원작이 좋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경우는 선뜻 책을 찾아 읽기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결말을 미리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잎싹이가 아무리 알을 품는 꿈을 이룬다해도 족제비에게 목을 내놓는 순간을 다시 만나고 싶진 않았다. 또 시간이 흘러갔다.


『마당을 나온 암탉』이 출간된지 20주년이 됐다. 그동안 책은 세계 여러 나라로 수출됐고 영화로나 나름의 성공을 거뒀다. 스무 살 성인이 된 책은 양장본 기념판과 새로운 그림을 담은 특별판으로 거듭났다. 특별판의 그림은 윤예지 작가가 맡았다. 기존판의 김환영 작가의 그림이 좀 더 사실적이고 책의 내용을 잘 반영하는 것이었다면 윤예지 작가의 그림은 그래픽적 요소가 강하다. 성인 독자를 타겟으로 한 그림이라고 한다. 특별판 전체의 그림을 다 보진 못했지만 간결한 그림체에 해석의 요소가 더 많이 담겨있을 것 같다.


김환영 작가는 20주년 기념판에서 어린이책 그림이 화가의 독후감이라고 썼다. 그의 말대로라면 김환영 작가의 독후감이 어느 누구의 것보다 진지한 것일 게다. 문장을 읽으면서 생각한 양계장이 작가의 그림 덕에 한층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책에 맞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양계장을 직접 방문 취재했거나 사진으로라도 연구했음이 틀림없다. 작가의 그림에는 상상으로만 그릴 수 없는 사실성이 담겨 있다. 잎싹이 알을 낳던 양계장 첫 번째 풍경이 대표적이다. 층층이 계단식으로 쌓여있는 닭장, 천장에 늘어진 전선에 매달린 노란 전구, 바닥에 쌓여있는 달걀판, 깨져 뒹구는 달걀 껍데기, 반쯤 퍼낸 사료가 담겨진 외바퀴 수레, 각각의 표정으로 사료먹기에 정신이 없는 닭들. 이 그림 하나로 저 속에 갖힌 잎싹이 어떤 상황인지 느낄 수 있었고 아무렇지 않게 깨져 흩어진 알껍질에 잎싹이 슬픔을 알 수 있었다. 김환영 작가는 이 책을 처음으로 읽은 사람 중 가장 깊게 읽은 독자임에 틀림없다. 특별판에서는 이와는 결이 다른 또 다른 화가의 진지한 독후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책 그림은, 최초 독자의 한 사람인 한 화가가 솔직하게 써 내려간 독후감이기도 하거든요. 그림이 조금 서툴더라도 글이 품고 있는 철학과 세계관을 지지하고 몰입할 때 비로소 그림은 살아서 움직입니다. p.8


황선미 작가가 책에 담은 생각은 책 출간 후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중요해졌다. 우리안의 다양성이 감췄던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다름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전환이 절실한 이유다. 잎싹은 자신과 다른 종인 야생 청둥오리의 알을 품는다. 알에서 나온 새끼가 닭이 아닌 오리임을 알고도 자신의 자식으로 받아들이고 사랑을 다해 돌본다. 자신이 알을 품는 동안 주변을 지키고 깨어난 새끼와 잎싹이 저수지로 이동할 시간을 벌기 위해 몸을 바친 나그네 오리에 대한 의리도 있었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닭장을 나온 잎싹이 품고 있는 소망이었다. 알을 품어서 병아리의 탄생을 보는 것, 잎싹은 자신의 소망에 따라 태어난 새끼를 사랑할 뿐이다. 그것이 오리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른 존재를 완전히 납득하기는 어렵다는 것, 알고 나서 품으려 할 때는 때가 늦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일이 중요하다. 우선 이해하고 포용하려 노력하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는 다르게 생겨서 서로를 속속들이 이해할 수 없지만 사랑할 수는 있어. p.87


같은 족속이라고 모두 사랑하는 건 아니란다. 중요한 건 서로를 이해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야. p.163


잎싹과 족제비는 악연일까. 병든 닭이 되어 닭장을 나왔을 때부터 잎싹은 족제비에게 쫓겼다. 알을 품는 동안에도 초록머리가 자라는 동안에도 족제비는 잎싹 모자의 숨통을 조인다. 혹독한 겨울 끝 어느 은신처에서 잎싹은 눈도 못뜬 핏덩이 족제비 새끼를 발견한다. 무력한 새끼들을 보면서 잎싹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낳았던 알을 떠올린다. 미쳐 껍데기가 여물지도 못한 채 버려져서 흘러내린 알. 잎싹은 새끼를 볼모로 족제비를 위협한다. 나그네 오리를 죽였고 잎싹과 초록오리를 사냥하려했던 족제비는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자신은 단지 배가 고팠기 때문에 굶지않으려고 사냥했을 뿐이라고. 이것이 자연의 순리라면 잎싹과 족제비는 관계는 운명이다. 잎싹은 자신이 먹이 사슬의 연쇄 고리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리고 자신의 알처럼 다치기 쉬운 족제비 새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 '자연의 순리'는 예외가 없으며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어쩌면 잔혹한 이런 모습을 아이들이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생각한 탓인지 외국에서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을 편집해 상영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아름답고 행복한 결말만을 보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의 삶이 언제나 해피앤딩은 아니라는 사실이 숨겨야 하는 일일까. 『마당을 나온 암탉』의 가치는 자연의 순리를 그대로 보여준 데 있다. 닭은 족제비를 이길 수 없고 배부른 족제비가 재미로 닭을 사냥하지는 않는다.


잎싹에게는 알을 품는 것 외에 또 다른 소망이 있었다. 너무 뒤늦게 깨달은 소망, 초록머리가 떠나고 나서 깨달은 소망은 '나는 것'이었다. 잎싹이 어미로서의 소망 대신 날개 달린 존재로서의 소망을 먼저 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자식을 낳고 사랑하고 돌보는 삶이 아닌 자기만의 자아 실현을 목표로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책에서는 이 소망이 죽는 순간 이루어지는 것으로 표현된다. 잎싹은 모든 소망을 다 이룬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아쉬웠다. '알을 품는 소망'보다 '몸이 원하는 날고 싶은 소망'을 먼저 알아차렸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다른 이야기가 됐겠지만, 잎싹의 삶을 생각할 때마다 '그랬다면…'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 미처 몰랐어! 날고 싶은 것, 그건 또 다른 소망이었구나. 소망보다 더 간절하게 몸이 원하는 거였어. p.203


사랑을 다해 키운 초록머리가 자기 인생을 찾아 떠나고 홀로 남은 잎싹은 기억을 붙잡고 산다. 그녀는 많은 기억들이 있어 외롭지 않다고 말한다. 세상은 순리대로 돌아가고 주위의 많은 것들이 사라진다. 그것이 인생이고 그렇기때문에 현재를 즐기고 현재를 집중해야 한다. 잎싹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현재를 치열하게 느끼며 산다.


어쩌면 앞으로 이런 시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소중한 것들은 그리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앞싹은 모든 것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해야만 했다. 간직할 것이라고는 기억밖에 없으니까. p.171


책을 알게 된 후 읽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애초 우려했던 대로 눈물 천지가 된 독서였다. 잎싹과 초록머리가 헤어지는 장면에서, 잎싹의 목숨이 끊어지는 장면에서 순식간에 눈앞이 뿌예졌다. 눈물과 함께 솟아난 감정은 복잡했다. 슬프기도 했고 화도 났으며 부럽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했다. 아이들이 이 책을 읽고 느끼게 될 감정의 폭은 얼마나 넓을까. 이렇게 다양한 의미와 감동을 담은 책을 읽은 아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게 될까. 아이들에게만 추천하기엔 아까운 책, 『마당을 나온 암탉』은 나에게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같은 책이다. 안다고 생각해서 더 알아보려 하지 않은 담고 있는 가치가 보이는 것보다 훨씬 큰 친구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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