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귀야행 욜로욜로 시리즈
송경아 지음 / 사계절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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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렁총각이라니우렁각시가 아니고아무도 없는 틈을 타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 집안 살림을 돕는 존재가 각시가 아니고 총각이라니설정만으로도 흥미롭다송경아 작가의 『백귀야행』이 읽고 싶었던 이유다책에 실린 6개의 단편 중 첫 번째 「나의 우렁총각 이야기」의 앞부분을 사전 연재로 읽고 뒷이야기가 궁금했다해피앤딩일까 새드앤딩일까답은 책 표지에서 확인됐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생활의 패잔병이 되어 구질구질한" "생활의 구덩이"에 빠지기 보단 "깔끔한 방광자"로서의 삶을 선택한 나에게 사촌 언니의 선물이 도착한다제품의 이름은 '우렁총각'. 수조에 든 "주먹만 한 커다란 우렁이"는 집이 비어있을 때마다 사람으로 변해 가사도우미 노릇을 한다청소빨래설겆이는 물론이고 식사 준비까지 완벽하다단 하나의 금기는 우렁총각이 사람이 됐을 때 마주치지 않는 것이다물론 이야기는 그런 금기가 깨졌을 때부터 재미있어진다.

 

결혼에 부과되는 여러 가지 책임도 부담스럽고 자신의 삶을 독자적으로 꾸려가는 것도 아닌 ''의 삶은 개인으로 독립하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부모의 경제력에 기대 살면서 물리적 심리적으로 힘든 상황은 모두 피하려 한다이런 딸에게 어머니는 결혼을 재촉한다.


"넌 니가 지금 굉장히 똑똑한 것 같지이 헛똑똑아나중에 늦게 결혼해서 애 낳고 힘들어 낑낑거리는 건 니 쪽일 거다아이 다 키우고 나면 그 아이큐가 이자 쳐서 생활의 지혜로 돌아오니까지영이 바보 되는 거 걱정 말고 너 결혼할 걱정이나 해."

p.11

 

결혼하지 않으려는 주인공 나의 삶도 완전해보이지 않지만 결혼해 아이를 키우고 있는 사촌 언니의 삶도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다커리어는 초기화시키며 가정과 아이에게 올인하지만 돌아온 건 남편의 바람이다정답은 없는 건가.

 

지금까지 모든 책임의 굴레를 잘 빠져나온 나였다이제 와서 우렁이 따위에게 포획될 수야 없지시댁도 없고 부담도 없지만 사회에서 아무런 지위도 가질 수 없는 우렁이그런 주제에 나에게 애정을 품었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관계의 부담을 나에게 지우려는 우렁이.

p.34

 

부담없이 일상의 무게를 우렁총각에게 미루려했던 ''는 자신의 삶에서 발생하는 책임을 스스로 감당해보려 한다. "내가 먹고 자고 싸면서 나오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내가 어떻게든 책임져보겠다"고 마음먹는다.

 

"생활이라는 구덩이"는 생각처럼 구질구질한 면만 있는게 아니다나의 일상을 내 손으로 꾸려가면서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자립의 느낌이랄까 나 자신이 굳건해지는 기분이랄까그게 무엇인지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다하지만 아무런 바람없는 무풍지대에 서서 외풍을 겁내고 있기 보다는 생활의 혼돈 속에 발을 담고 있는 쪽이 더 용기있는 삶이다. ''가 바꿔보려는 '세상과의 관계'도 이것과 비슷한 것이 아닐지.

 

「나의 우렁총각 이야기」의 ''가 추구하던 외부와 관계를 거부한 일상은 「하나를 위한 하루」에서 '지옥'으로 묘사된다. '고통'일지라도 누군가와 주고받는 것이 삶이라 생각하는 ''는 사고로 아내를 잃고 나자 세계 또한 의미를 잃는다그런 나를 다시 붙들어 이 세계에 발붙이게 한 것은 딸 '하나'.

 

지옥이라는 것이 있다며 아마 그런 곳이리라누군가와 누군가가 활기차게 고통을 주거나 받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것이모든 것이모든 것이 의미도 움직임도 없이 멈춰 있는 세계.

p.152

 

아내 없이 기른 딸 하나를 아버지의 치매 치료를 위해 희생시킬 수 있을까아이의 생명을 장담할 수 없지만 아버지의 완쾌 확률이 높다면 그 길을 선택해야 할까자식은 또 가질 수 있지만 부모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어려운 문제가 누가 어떤 선택을 한다 해도 다른 이가 뭐라 할 수 없는 문제다이 시대우리는 어떤 선택을 더 많이 하게 될까질문이 한가득 떠오르는 단편이었다.

 

가족이란 그런 거다벗어버리고 싶어도 벗을 수 없는 옷잠겨버리고 싶어도 나를 밀어내는 물부정하고 싶어도 결국 돌아오게 되는 뿌리그렇지만 뛰어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우리잘라버리고 싶은 사지내가 한 이야기가 고릿적 이야기라고그럴지도 모르지하지만 결국 현재보다 더 생생하게 돌아오는 건 오래된 것들이야.

pp.162-163

 

송경아 작가는 『백귀야행』에 실린 6개의 이야기는 제각각의 소재를 펼쳐놓고 있지만 그 안에는 크게 또는 작게 가족의 이미지가 담겨있다「나의 우렁총각 이야기」에는 가족 관계의 시작이라 여겨지는 '결혼'「백귀야행」에는 못마땅해도 떨어질 수 없는 부모자식의 끈이「히로시마의 아이들」에는 유전으로 내려오는 피할 수 없는 고통과 가족 안에서 은폐된 가해의 문제가 있다「열다섯서른다섯」에는 당연시되는 가족 내부의 희생과 배제에 대해「하나를 위한 하루」에는 부모인 동시에 자식된 입장에서 오는 딜레마가「고통의 역사」에는 구성원들에게 제각각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가족의 아픔이 담겨있다. "20대 말에서 30대 중반까지의 시간을 겪은 여성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은 모두 '가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알록달록한 표지와 옛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제목과 다르게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질문으로 끝을 맺었다어떤 질문은 답이 그려지기도 했고 또 어떤 질문은 작가가 내미는 정답이 보이는 듯도 했다완전히 열린과연 한쪽으로 결론 내릴 수 있는 질문일까 싶은 것도 있었다질문과 질문 사이에서 내닫는 사이 책은 끝나고 작가가 여전히 품고 있다고 말한 고민들이 마음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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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전사 소은하 창비아동문고 312
전수경 지음, 센개 그림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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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주에서 지구에만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엄청난 공간의 낭비다ㅡ 칼 세이건

고도로 발달한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ㅡ 아서 C.클라크


우주복을 입고 서늘한 눈초리로 먼 은하 저편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가 있다소녀가 주인공인 우주 어드벤처를 예상했다『케플러 62』같은 SF일까다행히(?)도 우리의 주인공 은하는 지구를 떠나지 않는다그렇다고 우주적 스케일이 빠지는 건 아니다끝없는 우주그 안의 지구그 한 편의 대한민국 작은 도시땅콩건물 토리 빌딩에 거주하는 소녀 소은하가 무려 외계인이기 때문이다.


친구들에게 '외계인'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6학년 은하는 '평화 PC사장님 아빠와 '세리 마사지 숍'을 운여하는 엄마와 함께 토리 빌딩 2층에 산다친구들 사이에선 약간 눈치 없는 사차원으로 통하지만 단짝 친구 소령이 있어 외롭지 않다별똥별이 떨어질 때 무심결에 '우주 평화'를 소원으로 빌던 예사롭지 않은 소녀는 엄마에게서 자신의 정체성을 듣게 된다. 500만 광년 너머의 행성 헥시나에서 온 외계인과 지구인의 혼혈이라는 걸엄마는 지구를 해하려는 무리를 막기 위해 파견된 외계인 특수부대 대장이었다지구의 인류 문명을 절멸시키려는 악당은 어디있는 걸까은하와 엄마의 힘으로 지구를 지킬 수 있는 걸까.


광대한 이야기다지구를 탐내는 외계인 악당이 있고 그에 맞서기 위해 한 무리의 외계인이 이미 지구인과 섞여 살고 있다는 설정이 말이다나쁜 외계인은 어떻게 지구에 침투할까다름아닌 '게임'을 매개로 한다그는 게임에서 일어나는 일이 현실에서 똑같이 나타나게 만든다게임의 주된 대상은 초등학생이다게임을 좋아하는 은하와 친구 소령기범은 게임을 통해 적을 막을 기회를 만든다.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가 있을까어른조차도 일단 시작하면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 게임의 속성이다중독성있는 설정을 만드는 것이 게임 제작사의 목표이기도 할 것이고책은 이러한 게임에 대해 좀 다른 생각을 하게 했다게임머들에 대한 서술은 그들이 게임을 하는 나름의 이유와 장점을 떠오르게 했다.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사람들'이고 '무관심으로 상대를 배려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 주는 것이 때로는 위로가 된다.

게이머들은 대개 현실 세계보다 가상 세계가 편한 사람들이다게임을 통해서 소통하고 에너지를 얻는다그래서 성숙한 게이머는 현실에서 무관심으로 상대를 배려할 줄 안다. ()

()

"누구에게나 아무 방해 없이 숨을 시간과 공간이 필요해조용히 숨어서 기운을 충전하고 싶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PC방이야."

p.125


한편으론 게임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일에 대한 경계 또한 제시한다절제하는 능력이 필요하고 현실과 게임의 비중을 적절히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이런 태도를 가지고 게임을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그러나 이미 중독성을 탑재한 게임이 존재한다자제력이 충분히 발달되지 않은 아이들을 믿고 게임환경에 노출시키기엔 불안한 것이 현실이다게임에 대한 은하의 생각과 태도를 아이들뿐 아니라 게임 산업계에서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나는 게임이 마라톤과 같다고 생각한다너무 무리하면 리듬이 깨진다나는 절대 하루에 두 시간 이상 게임을 하지 않는다보통 한 시간이면 족하다.

()

나는 한 번도 게임을 심심풀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현실 세계만이 전부가 아니다가상 세계 역시 내 인생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그래서 나는 게임에서도 언제나 매너를 지키고 룰을 따른다그 안에서 누구보다 당당하고 진지하게 경쟁한다.

p.61


은하는 악당이 개발해 지구 정복에 이용한 게임의 속성을 간파한다게임 속에 심어져 있는 파괴적인 세계관은 강자만을 위한 것이었다헌데 현실의 대부분의 게임은 이런 방식을 기본으로 하지 않나게임 세계를 전혀 모르는 입장이다만일 그렇지 않다면강자와 약자가 조화로운 공존을 추구하는 것이 요즘 게임의 세계관이라면 내가 가진 편견을 수정할 필요가 있겠다.


생각해 보면 유니콘피아는 우월주의파의 세계관을 은연중에 우리에게 심어 주고 있었다유니콘피아에서 우리는 행성 탐험을 이유로 원래 그 행성에 거주하던 종족을 몰아냈고더 높은 레벨의 인류로 승급하기 위해 행성 소유권을 무작정 늘려 나갔다.

p.130


책 속의 아이들은 친구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학교에서 인기있는 아이들에게 따돌림 당하는 은하에게 친구 기범이 말한다. '지구인'이든 '외계인'이든 상관없다고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건 친구가 아니라는 진실은 어쩌면 아이들이 더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은하야애들 말에 신경 쓰지마난 네가 지구인이든 외계인이든 상관없어너는 너니까나한테는 똑같은 소은하야."

마음에 쏙 드는 말이었다.

"음……나도 네가 지구인이든 외계인이든 상관없어심지어 귀신이라도 괜찮아."

p.114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된 은하는 누가 뭐래도 상처받지 않을 마음의 힘이 생긴다은하와 친구들은 '실수'가 큰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걸 체험하고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인간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또한 자신의 존재가 우주의 극히 일부라는 사실과 그 우주의 평화가 저절로 지켜진 것이 아니며 이름 모를 이들의 헌신으로 지켜져왔다는 것도 알게 된다.


요즘도 우리 반 아이들은 나를 외계인이라 부른다화장실에서 나에 대해 수군거리는 아이들도 있다하지만 이제 그런 것 때문에 속상하지 않다그들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지만나는 내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랑스러운 지구인이자 외계인우주 평화를 위해 싸우는 별빛 전사 소은하다.

p.157


은하와 친구들이 알게 된 진실은 외계인을 만나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은 아니다지구 밖 존재들과 만났을 때 갖춰야 할 공존의 윤리는 우리 자신들 속에서 선행되어야 할 것들이다. '함께'가 아니면 존속은 불가능하다다수의 삶이 조화롭기 위해선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한다그렇다고 개별 존재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도 안된다이런 여러 조건들이 충족될 때 먼 우주를 지나 우리에게 외계의 존재들이 왔을 때 그들과도 조우도 평화로울 수 있지 않을까별빛 전사 소은하와 그 친구들이 그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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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의 궤적
리베카 로언호스 지음, 황소연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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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적인 힘을 가졌지만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소녀, 의도치 않은 역경을 이겨내며 진정한 자아와 사랑을 찾는 이야기. 책에서 영화에서 (아주) 많이 접해본 설정이다. 그런데 이 책, 리베카 로언호스의 『천둥의 궤적』은 뭔가 달랐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면서도 갈 수록 빠져들었다. 작가가 그려낸 소설의 어느 부분에 사람을 끄는 매력이 담긴 걸까. 대재앙 이후의 척박한 지구 환경을 배경으로 다룬 것이 어제오늘의 이야기도 아니고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들이 혈통에 따라오는 초능력을 가진 설정이 처음도 아니다. 좀비를 연상시키는 괴물, 불멸의 신적 존재들도 마찬가지. 성장 소설과 판타지가 조합된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책에 이렇게 마음이 간 이유가 뭘까.


책은 "큰 물이 닥치기 몇 년 전, 시한부 신세였던 미국 정부가 남쪽 국경에 건설"하려했던 것과 닮은 장벽으로 둘러싸인 나바호 자치국을 배경으로 한다. 장벽은 신비롭게도 스스로 자라났고 그 안의 디네(나바호족)들에겐 이전 세상에서는 "꿈과 환상, 전설과 노래" 속에 살던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디인 디네(신성한 사람들), 비케아예이(가장 신성하고 가장 두려운 존재) 그리고 괴물들. 주인공 매기는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초능력 클랜 파워를 무기 삼아 괴물 사냥꾼으로 살아간다.


소설은 배경에서 드러나듯이 나바호 인디언 문화를 기초로 씌여졌다. 그들의 신화, 언어를 차용한 그들의 세계관을 토대로 미래를 그려냈다. 작가의 상상 속에서 완전히 창조된 세계가 아닌 유럽인 침략자들에게 쫓기고 미 연방정부에게 핍박받은 인디언의 역사를 보여준다. 아메리카 토착 거주민이었던 인디언들이 자신들의 살던 터전을 빼앗겼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몰랐다. 작가는 미래의 서사를 구성하면서 과거의 사실들을 밝힌다. "미 연방정부가 한겨울에 나바호 족 거주지를 불태우고 뉴멕시코로 걸어서 이동하도록 한 사건", "어린 원주민들을 부족 사회와 격리해 기숙사에 수용하여 서구 문화와 생활 방식을 가르쳤"던 "기숙학교", "부족의 전통적 토지 소유 개념 및 조직 체제의 와해"를 가속시킨 "인디언 토지 할당법", 19세기 중반에 이루어졌지만 2009년에야 처음 법정에서 인정되었던 백인이 저지른 손해에 대한 배상 조약 등. 역사적 사실이 이 소설의 판타지를 현재의 미국 사회를 보는 창에 묶어두었다. 이 책이 흥미로웠던 첫 번째 지점이다.


작가 리베카 로언호스는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의 어머니와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백인 가정에 입양되어 자랐다. 백인이 대다수인 주거지에서 살면서 작가가 느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감각은 남달랐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혈통을 긍정하고 관심을 기울였고 그 결과가 그녀의 소설에 드러난다. 그런 애정어린 마음이 소설에 그대로 드러난다. 소설은 나바호 인디언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나바호 신화 속에서 인류의 시조는 옥수수에서 비롯했으며 니흐치의 숨결은 그들에게 생명을 주었다. 하시치시지니는 다섯손가락(인류)에게 불을 주었다. 세상은 다섯 번 홍수로 멸망하고 지금은 여섯 번째 세상이다. 나바호 족을 창조한 '변하는 여인'은 태양과 결합해 불멸의 네이즈가니를 낳았고 그는 소설의 주인공 메기를 거뒀다. 낯설고 이채로운 신화들이 이야기 곳곳에 박혀 서사를 굴린다. 이 소설이 빛나는 또 하나의 지점이다.


모계에서 빠른 속도를 부계에서 강인한 전투력의 혈통을 물려받은 메기는 그 능력이 자신을 괴물로 만들까 두려워 한다.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괴물을 처치하면서도 피를 탐하는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하는 순간이 올까 겁을 낸다. 메기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움직이려 한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괴물"이 되기 보다는 "괴물 사냥꾼"으로 남기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경계한다.


네이즈가니는 그런 악의 일부가 내게 있다고 했다. 그가 나를 발견한 밤에 벌어진 일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라고. (…) 하지만 내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그것이 커지지 않도록, 필요 이상으로 자라나지 않도록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내 운명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기에. 나는 괴물 사냥꾼이 될 수도 있고 괴물이 될 수도 있다.

p.28


메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또한 이중적이다. 도움을 청할 대상인 동시에 해를 끼칠 때상으로 보는 것이다. 메기는 초인들의 세상에도 일반인들의 세상에도 끼지 못한 채인 외톨이다. 다른 존재를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묘사된 부분이다. 소설에서처럼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경우까진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만나는 나와 다른 존재를 우리는 손쉽게 '괴물'로 치부하지는 건 아닌지.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통제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버리지는 않는지. 작가는 다름을 거부하는 다수의 시선이 누군가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해 말한다.


까딱하면 사람들의 불신을 사고, 병에 걸린 사람 아니면 또 다른 괴물로 취급받기 십상인데. 스승은 혐오감에 등을 돌리고, 피를 향한 내 갈망이 너무나 거세서 무적의 전사인 그조차도 무엇이 나를 몰아치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타흐는 그런 걸 축복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p.93



카이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든 (…) 칭송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게 어떤 건지는 속속들이 알고 있다. 회오리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마을을 통째로 날려 버릴 수도 있다. 위험천만하다. 위험한 사람들은 통제되어야 한다. 통제하지 못할 거면 차라리 쓰러뜨리는 게 상책이다. 그러니 당사자는 그걸 비밀로 간직하는 게 당연하다.

p.278


믿고 의지했던 불멸자 네이즈가니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던 메기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진실을 찾아간다. 네이즈가니가 자신을 떠난 이유를 알게 되고 그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봐왔다는 것도 깨닫는다. 불멸자는 메기를 언제라도 '괴물'이 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했다. 메기의 능력은 질병과 같은 악의 일부라고 말이다. 그러나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네이즈가니는 악(惡)은 질병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얼룩처럼 그것을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다고 했다. 빌라가나들은 악을 영적 개념이나 악인의 소행으로 취급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악은 염연히 실재하는 것이며 신체와 관련된 전염병에 더 가깝다고 했다. 악한 것이 몸에 침투하면 악에 감염될 수 있다. 그리고 일단 몸에 침투한 악은 나를 장악할 수 있다. (…) 그렇게 또 다른 괴물이 될 위험에 처한다.

p.28


할아버지가 내게 가르쳐준 첫 번째 교훈이 그거였어. 클랜 파워는 재능이지, 저주가 아니라고. 왜 그것이 우리 중 일부에게만 찾아오는지, 그 능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우리는 이해 못 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것이 어두운 시절, 다가올 괴물들을 이겨 내는 도구라고 확신했어. 여느 도구들처럼 선하게도, 악하게도 쓰일 수 있다고.

pp.348-349


치유자 타흐와 그의 손자 카이는 특별한 능력을 옳은 일에 사용하려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메기는 네이즈가니가 말해준 세상을 깨고 스스로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죽음으로 향하는 세상이 아닌 삶으로 이어지는 세상.


"나도 모르겠어." 나는 중얼거린다. "하지만 당신 말이 맞았어. 당신과 키스했을 때, 내가 맛본 건 죽음뿐이었으니까. 난 그것으로 만족 못해, 네이즈가니. 그리고 삶을 원해. 사랑도. 나를 죽이려 들지 않는 사랑."

p.420


책에서 치유자 타흐는 나바호 족 삶의 방식을 "연대"라고 말한다. 그들이 자신을 소개하는 방식은 모계와 부계와 조부모의 혈통을 밝히는 것이다. 자신의 주변을 밝히는 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이다. 혼자만의 테두리 속에 갖혀있던 메기는 '타흐'와 '카이'라는 사람들 만나고 그 "연대" 속에서 삶을 새롭게 받아들이다. 비록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다수에게는 여전히 불청객으로 남을 수밖에 상황이지만.


"(…) 디네의 삶은 관계를 찾는 거야. 너 자신과 네 친척들의 관계, 너 자신과 세상의 관계. 디네가 살아가는 방식의 케흐, 즉 연대야, 이렇게."

p.52


세계의 대부분이 물에 잠긴 이후 상상 속 존재들이 현실에 출몰하는 이 판타지 소설이 소외된 존재들을 들여다보는 이야기의 변주로 들렸다. 주인공 메기의 할머니는 세상에 닥친 재앙의 원인에 대해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뭔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작가가 화려한 판타지의 이면에 숨겨둔 "뭔가"가 더 있을 것만 같다. 이어질 '여섯 번째 세상' 시리즈에 대해 자꾸 생각하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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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코트를 입은 남자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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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그림 하나와 낯선 그림 하나두 그림의 주인공은 하나같이 매끈한 외모를 지녔다꽤 날카로운 인상의 앉아 있는 남자를 그린 그림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보려 애쓰던 중에 눈에 익혔었다프루스트 소설 속 인물의 모델이 됐다는 사람이었다그때는 익숙해지지 않았던 그의 이름은 로베르 드 몽테스키우-페젠사크 백작이다그리고 제목에 등장하는 '빨간 코트'의 주인공이 있다꽤나 극적인 자세로 선명한 빨간 색 옷을 온몸에 두르고 역시 붉은 배경을 등진채 서있다작품 제목은 <집에 있는 닥터 포치>. 이런 의상을 입고 있는 곳이 집이었고 이런 외모를 지닌 사람의 직업이 또 의사였다책은 이 두사람과 또 한사람의 여행으로 시작한다.




소설가가 쓴 실제 인물의 일대기이니 얼마나 극적일까 싶은 기대도 있었다하지만 전작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에서 느낀 바가 지나친 기대를 접는데 도움이 됐다빨간 코트를 입은 그 남자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한 책이겠건만 이야기는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진행되지 않는다저자는 그리 만만하게 서사를 풀어가는 사람이 아니다일정한 줄거리가 있는 소설도 퍼즐을 맞추듯 쓰지 않는가전 생애가 낱낱히 밝혀져 있는 사람도 아니고 불분명한 여러 자료를 모아 한 사람의 일대기를 추적한 글이 한 줄의 맥락으로 이어졌을리 없다저자는 자신이 구성해낸 한 사람의 일생이 실제 그 사람의 삶과 완벽히 일치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우리는 알 수 없다." 아껴서 사용하면이 말은 전기 작가의 언어에서 가장 강력한 표현 가운데 하나가 된다이것은 우리가 읽고 있는 점잖은 한ㅡ삶의ㅡ연구가 그 모든 세부와 길이와 주석에도 불구하고그 모든 사실적 확실성과 자신만만한 가설에도 불구하고하나의 공적 삶의 공적 판본이자 하나의 사적 삶의 부분적 판본일 수밖에 없음을 일깨워준다.

p.149.

 

 

때문에 저자는 인물이 살았던 시대를 세밀히 묘사하고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을 펼쳐 보인다. 상반되는 설들에 둘러싸인 닥터 포치에 대한 저자 자신의 판단의 근거를 확보하고 인물에 대한 여러 정황들을 제시함으로써 책의 객관성을 세우기 위해서였을 게다.

붉은 코트를 입은 의사 포치의 시대는 이른바 '벨 에포크'라 불리는 시대다이름의 의미만 보자면 '좋은 시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이 시점에 이런 서정적인 이름이 붙은 이유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다.

 

'즐거운 영국', '황금시대', '벨 에포크'. 이런 빛나는 상표명은 늘 회고적으로 만들어진다. 1895년이나 1900년에 파리에 살던 누구도 서로 "우리는 '벨 에포크'를 살고 있으니 한껏 즐기는 게 좋아"하고 말한 적이 없다. 1870~1871년 프랑스의 파국적 패배와 1914~1918년 프랑스의 파국적 승리 사이 평화의 시기를 묘사하는 이 말은 1940~1941프랑스가 다시 한번 패배하고 나서야 언어에 등장했다.

(…)

실제로 당시 그 '아름다운 시절'은 정치적 불안정과 위기와 추문으로 가득한 신경증적인, 심지어 히스테리에 사로잡힌 국가적 불안의 시기였다ㅡ그리고 그렇게 느껴졌다.

p.42

 

그러니까 '벨 에포크' 시대의 이면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는 말이다. 책은 아름다운 불안의 시기와 그 시간을 살아간 유럽 유명인사들의 삶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어디에나 포치가 있다. 유행을 선도하는 (거의) 댄디의 한 사람이었고(완벽한 댄디가 되기엔 출신 계급이 낮았다.) 시대를 풍미한 배우 베르나르의 연인이었으며 드레퓌스의 의사로 에밀 졸라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화가 존 싱어 사전트와 막역히 지내며 붉은 코트 초상화의 모델이 됐고 화가와의 인연으로 유명한 <X 부인>의 모델인 고트로 부인과 친분을 쌓았다. 또 프루스트 가족의 오랜 친구였다.


그 시대의 '댄디'들은 서로가 서로를 모방했다. 작가 프루스트의 모습은 몽테스키우 백작에게서 비롯하고 백작의 원본은 화가 휘슬러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취향을 좌우하는 존재' '댄디' '유미주의자'들이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의 아이러니함이다.

 

몽테스키우는 런던 방문 동안 휘슬러를 만났을 때부터 이 화가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수염, 복장, 몸짓, 목소리, 재치, 취향을 복제했다. 프루스트는 몽테스키우를 만났을 때 편지와 몸짓에서, 발로 바닥을 두드리는 방식에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백작을 복제하기 시작했다. 프루스트는 심지어 웃음을 터뜨릴 때 손으로 입을 가져가기 시작했다.ㅡ 몽테스키우는 자신의 볼썽사나운 치아를 가리기 위해 그랬던 것일 뿐이지만.

pp.132-133

 

세간의 입소문은 포치에 대해 '구제불능의 유혹자'라고 단순한 '사교계 의사'라고 말하지만 많은 자료를 섭렵한 저자는 그의 다른 면을 본다. 포치는 "프랑스 부인과학을 일반 의학의 한낱 하부 단위에서 독자적인 분과로" 바꾼 전문의다. 그가 쓴 『부인과학 논문』은 여성 환자를 배려하는 인도적인 면이 포함되어 있다. 효과적인 수술을 위해 소독과 병원의 위생 상태를 개선하고 병원에 도서관을 설치하고 병동을 장식해 정서적 측면을 보완했다.

 

"살균과 소독 절차의 도입에 따른 열광적인 흥분의 분위기 속에서 치료를 위한 부인과학은 어쩌면 너무나 배타적이고 급진적인 개입주의로 돌아선 것인지도 모릅니다."

(…)

"같은 인간의 생사를 좌우하는 힘을 가진 우리 각자에게는 양심의 문제가 있습니다ㅡ양심은 의사, 특히 칼을 휘두르는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이 되어야 합니다."

(…)

"나는 이 병원에서 훈련을 받을 젊은 의사들에게 겁을 주지 않고 병자를 진찰하는 방법, 환자의 정숙함에 불필요하게 상처를 주지 않고 진찰하는 방법, 경우에 따라서는 관대할 필요도 있고 엄할 필요도 있는 말로 병자와 이야기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pp.205-206

 

포치는 "사교계의 의사, 책 수집가, 전반적인 교양을 갖추었고 대화에 능한 사람"이었지만 현재는 '사교계 의사'의 이미지만 남은 사람이다. 그러나 자료들은 그가 "정신과 육체의 고통을 덜어주고 편안함을 주고, 혁신과 기술로 여자들의 생명을 구하고, 환자 수로 볼 때 부자보다 빈자를 많이 도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만한 여성의 불평은 단 하나도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았고 그의 이름에 스캔들이 붙은 적"도 거의 없다. 포치의 진실은 어디에 있는 걸까. 저자는 지금까지 알려진 이미지와 다른 포치를 정의한다. "매우 지적이고, 결단이 빠르고, 과학적인 합리주의자"이며 "역사의 옳은 편에" 있는 사람으로.

 

그래서 나는 호색가 포치에 관심을 잃고걱정하는 가족적 남자 포치늘 호기심을 잃지 않는 의사 포치여행자 포치도회풍 인물 포치(속물 포치?), 국제주의자합리주의자다윈주의자과학자모더니스트 포치에게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절대 친구를 잃지 않는 남자 포치(반드레퓌스파만 아니라면). 미친 시대에 제정신을 잃지 않은 사람 포치.

p.219

 

이 책의 주요 인물은 작게든 크게든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등장인물과 연결된다에드몽 드 폴리냐크 왕자는 본명으로 등장하고포치는 닥터 코타르라는 인물에 녹아 있다몽테스키우 백작은 사를 뤼 남작의 "그림자 자아"프루스트는 "백작의 버릇을 복제하고귀족 생활에 관한 그의 이야기를 빨아들" "비열한 괴물로 변형"시켰다저자는 프루스트의 의도적인 서술이 아니라며 작가를 감싸려 한다. 소설 속 인물이 실제 인물의 완전한 복제가 아니고 그 반대 또한 실현되기 어렵다고 말이다저자는 프루스트에 대한 변명으로 현실의 이야기가 소설이 되는 과정에 대해 서술한다독자로서는 이 대목이 줄리언 반스의 소설쓰기의 과정을 듣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그런 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런 식으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공을 들여 다듬은 다른 누군가의 일화보다 쓸모없는 것은 없다(…). 또 소설가는 복사해서 소설에 붙이려는 어떤 계획적 의도를 갖고 실존하는 사람을 '연구'하지도 않는다전체 과정은 보통 그보다 훨씬 수동적이고스펀지 같고우연적이다독자의 동기ㅡ문학적 창조의 과정을 이해하고 싶다는ㅡ는 물론 정당하지만동시에 궁극적으로 무익하다아무리 자의식이 강한 소설가라도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또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p.295

 

줄리언 반스는 닥터 포치의 이미지를 재구성해내기 위해 무척이나 많은 자료를 섭렵한 듯하다남아있는 각 인물들의 자서전적 글과 전기주고 받은 편지메모 등을 씨줄 날줄 삼아 '벨 에포크시대를 직조해냈다그림과 작품의 제목으로만 알고 있던 화가와 작가들이 삶을 엿볼 수 있는 것도 독서의 소득이었다오스카 와일드플로베르모파상알퐁스 도데이디스 워튼헨리 제임스 누구보다 마르셀 프루스트를 읽고 싶은 동기가 되고 귀스타브 모로제임스 맥닐 휘슬러존 싱어 사전트오딜롱 르동을 친근하게 느끼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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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얄밉지만 돈카츠는 맛있어 반갑다 사회야 25
김해창 지음, 나인완 그림 / 사계절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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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과 일본이 정치, 경제적으로는 조금씩 더 금이 가고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서로를 받아들이면 조금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일본을 미워하기보다는 잘 알아보는 게 먼저이지 않을까요?

p.6


얄밉지만 어떤 부분은 인정하고 호감도 가는 '애증의 관계', 이것이 한국과 일본 사이를 설명하는 말이라고 하면 지나친 호의일까. 신경쓰지 않고 살고 싶지만 옮기거나 바꿀수도 없는 지리적 이유때문에 관심을 끌수도 없는 나라. 사계절의 '반갑다 사회야' 시리즈 중 『일본은 얄밉지만 돈카츠는 맛있어』(이하 『일본은 얄밉지만』)의 표지를 보면서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초밥은 좋아하지만 돈카츠는 좋아하지 않고 스모가 인기있는 이유는 납득 불가하다. 일본의 전통 건축과 기모노에 호기심이 가다가도 그들의 정치적 행태를 보면 그런 관심조차 불경하게 느껴져 생각을 접곤한다. 서로 영향관계를 주고 받을 수 밖에 없는 인접국에 대해 이렇게 무관심 일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일터. 무턱대고 회피하기 보단 일단 "잘 알아보는게 먼저"다.


『일본은 얄밉지만』은 일본에 대한 객관적 자료를 소개하는 책이었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에세이 분위기는 막상 책 내용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책은 일본에 대한 종합적인 정보들을 소개하는 '일본은 어떤 곳일까?'로 시작해 '한국과 일본,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일본의 정치와 법을 살펴보자!', '일본과 이웃 나라의 관계를 살펴보자!', '일본의 생활·문화·교육을 살펴보자!'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의 전반적 정보에 대한 소개부분에서는 다양한 인포그래픽을 제시해 한국과의 비교, 세계에서 일본의 위치 등을 한 눈에 볼 있었다. 다음으로 통신사를 보냈때부터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 시대부터 근대 이후의 양국의 역사를 서술해 일본과 한국의 관계가 현재에 이른 이유를 설명한다. 다음으로 일본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과정을 정치와 법의 변화과정을 통해 서술한다. 텐노라 불리는 일왕은 메이지 유신 이전엔 상징적 존재였다고 한다. 직접 통치권을 행사하게 된 텐노는 자국을 근대화시킨 한편 대륙 침략,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전범 일왕은 미국의 필요에 의해 처벌받지 않았고 우리가 아는대로 일본은 제대로 된 반성이 없는 나라로 남게 됐다. 이러한 과정을 책에서는 정치구조와 함께 서술하고 있다.


일본과 주변국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장에서는 러시아, 중국, 한국 그리고 미국과 주고받은 영향을 소개한다. 글로만 서술했다면 복잡할 수도 있는 부분을 만화로 처리해 이해의 속도를 높였다. 일본은 전범 위패가 모셔신 신사참배와 다오위다오 영유권 문제로 중국과 분쟁 중인 가운데 경제 분야의 고려 때문에 타이완과 척을 지면서까지 중국 편을 들고 있다. 북한과는 전쟁 배상, 사과와 북송 일본인 송환 문제로 대립하고 있다. 미국과는 오키나와 지역 문제를 안고 있는데 미국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지역 주민을 희생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책에 나온 오키나와의 현황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에서 강상중 교수가 말한 것처럼 일본 정부는 자국 영토를 식민화해 착취한다는 말을 이해하게 해줬다.


친구가 조근조근 이야기해주듯 입말체로 쓰인 글을 따라가다 보니 일본에 대한 상식을 다양하게 배울 수 있었다. 이해하기 쉬운 그림과 만화뿐 아니라 역사적 상황을 그린 일본 전토의 목판화인 우키요에 그림이 다수 들어있어 일본 문화를 한층 가까이 느껴볼 수 있었다.


알고 싶지 않지만 배제할 수도 없는 나라 일본, 그 나라에 대해 모르면서 싫어하는 것과 알고도 외면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무시할 수 없는 영향관계를 주고 받는 나라를 막연히 무시하기 보다는 알고서 접어두기를 택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그들의 변화가 미치는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사이좋게 지낼 수'는 없더라도 몰라서 당하지는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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