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반하는 글쓰기
강창래 지음 / 북바이북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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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재능과 창의성 그리고 책의 정신'이라는 주제의 시민강좌에서 강창래 저자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책의 정신』으로 워낙 유명해진 분의 강연은 어떨지 궁금해했던 기억이 있다. 글 솜씨와 말솜씨가 비례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번 경우는 좀 달랐다. 책 속의 진지한 목소리를 상상하고 만난 저자가 정말 소탈하고 편안한 태도로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강연을 정말 많이 한 분이구나, 듣는 사람에 대해 아주 잘 이해하는 분이구나'하는 느낌을 받았었다. 저자의 책을 다 읽어보고 싶어진지 오래다. 새로 나온 책 『위반하는 글쓰기』로 시작해볼까.


저자는 오랜 시간 출판 편집기획자로 일했다. 책을 기획하고 편집, 교정/교열하는 과정에서 고스트 라이터, 윤문 전문가로도 활동했다. 『위반하는 글쓰기』는 글쓰기의 방법에 대한 책인 동시에 저자만의 쓰기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책이었다. 저자는 수많은 글쓰기 책이 나오는 와중에 이 책을 내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지난날의 원칙에 얽매여 있다면 글을 잘 쓰기는 어렵다. 삶의 환경이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에 맞추어 글쓰기 원칙 역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p.9


책은 1부 바로잡기, 2부 쓰기, 3부 고치기로 구성돼 있다. 글쓰기에 대해 잘 알려져 있는 '원칙'을 검토해보는 것이 1부의 내용이다. 2부에서는 글쓰기의 방법을, 3부에서는 쓰기보다 중요하다는 글 고치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책의 전반에는 널리 알려진 기존의 글쓰기 원칙을 막연히 쫓지 말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1. (저마다) 자기가 잘 쓸 수 있는 글을 잘 쓴다.

2. 집중하되 전문가의 피드백을 통해서 잘못된 부분을 고쳐 나가야 한다.

3. 정독과 다독의 경험이 필요하다.

4. 필사는 정독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5. 글쓰기란 말을 글로 받아 적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글로 번역하는 것이다.

6. 인간의 언어는 있는 것을 묘사하고 설명하기보다는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데 훨씬 특화된 마법의 도구다.

7. 한국인의 정체성이 과연 고유어에 담겨 있는것일까? 그런 의문을 진지하게 짚어 보자.

8. 한자어는 대개 추상적이고 객관적인 용법으로 쓰이기 때문에 감정을 느기기 어렵다. 대신 의미가 좀 더 분명하다.

9. 언어는 라이프 스타일과 사고방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10. 순수한 일본제 한자어 같은 것은 없다.

11. 생각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이 생각을 쓰는 것이다.

12. 언제라도 꺼낼 수 있는 절실한 이야기로 가슴속을 채워 두어야 한다.

- 1부 바로잡기 中


잘쓰는 작가라고 모든 글을 잘 쓰는 것이 아니며 많이 쓴다고 잘 쓰게 되는 것도 아니다. 다독과 필사도 필요에 따라 해야 하고 말하는 것처럼 써서는 좋은 글이 될 수 없다. 한국인만의 고유어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봐야 하고 생각한 대로 풀어낸 것이 좋은 글이 되지도 않는다. 기술적인 수련보다 중요한 건 좋아하는 것이다. 무엇을? 글쓰기를.


그게 무엇이든 의식적으로 '열심히' 하는 것은 꼭 좋은 게 아니다. 자연스럽지 않은 '열심'은 글에도 묻어난다. 부담스러울 뿐이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되니 잘하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작위적인 느낌 때문에 공감을 끌어내기 어렵고 설득력도 떨어진다. '열심히' 하지 말고 몰입할 수 있어야 한다.

p.101


2부 쓰기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은 대목은 글쓰고 싶은 마음 채우기에 대한 부분이었다. 쓰기에 집중하기 보다는 좋아하라는 맥락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글을 잘 써보겠다고 애쓰지 말고 "글쓰기를 살이 있음의 기쁨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보라는 말이다. 그러면 즐겁게 오래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제 생각으로는 '어떻게든 날마다 쓰겠다'는 결심보다 '글로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생각을 만드는게' 더 중요하지 않을 까 싶습니다.

p.109


글은 주제에 대한 합리적인 생각을 펼쳐놓는 것이 다가 아니다. 주제와 연결된 수많은 자료를 수집 정리하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맥락을 찾아내야 한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느껴보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어떤 주제를 다룰 때 그것에 대해 잘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며 "그것에 대한 분명한 느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느껴 보는 것'은 어떤 사안을 판단하는 데 무척 중요하다. 느낌이 없다면 판단도, 선택도 없다.

p.135


그 선택은 '감정의 몫'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제가 펼쳐지는 상황에 들어가 당사자의 입장이 되어 보아야 한다. 바로 그 '대상'이 되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느껴 보아야 하는 것이다.

p.143


선택과 집중을 거쳐 무엇을 쓸지 또는 쓰지 않을지를 결정하기 위해선 주제에 깊이 몰입하고 느껴야 한다. 그래야 만족스러운 글을 쓸 수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글쓰기의 기술, 글 고치기의 실제를 읽다보니 저절로 나의 글쓰기에 두려움이 생겼다. 정말 이렇게 되는 대로 써도 되는 걸까. 저자는 자신이 이 책을 통해 글쓰기의 시작과 끝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쓰기 시작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책을 읽고나니 겁이 났다. 글 고치기 부분에 나온 모든 고칠 문장들이 나의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문장들은 그렇게 이상했다. 그러나 저자의 또다른 말에 힘을 얻어보려 한다. 저자의 원칙은 뼈아픈 깨달음을 주었다. 다 실천할 엄두를 낼 수 없을 지경이다. 이제 그만 잊고 다시 써보자. 내 속에 생채기를 냈던 원칙들이 얼마간 조화를 부려 조금 더 생각하고 조금더 고치는 글쓰기가 되길 기대할 밖에.


특히 문장 고치는 기술은 따로 깊이 공부해야 한다. 기계적으로 외워서는 절대 안 된다. 원칙은 언제나 알고 나서 잊어야 한다. 깊이 깨달아야 한다.

원칙은 암기의 대상이 아니라 깨달음과 망각의 대상이어야 한다.

pp.200-202


좋은 글은 지극히 걱정하고 사랑한 결과물이다. 글쓰기라는 두근거림 앞에서 이제 당신은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내야 할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쓰기 시작하자.

p.271


책도 책이지만 저자의 살아온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다. 그가 낸 책들의 목록만으로도 성실한 삶의 족적을 알 수 있었다. 삼성출판사에서 출판 경력을 시작했고 90년대에는 컴퓨터 관련 실용서를 여럿 냈다. 한겨레 노동교육연구소에서 출판 편집 강의를 하고 이후에는 인문학 강연과 여러 기관의 자문 역할을 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지 실용서 외에 처음 낸 책들은 인물을 탐구한 책들이다. 하긴 그가 이전에 냈던 컴퓨터 관련 서적들도 남달랐다고 한다. 기술 사용법을 설명하면서 그 기원과 이유 등까지 상세히 서술했다고 한다. 무언가 깊이 파고드는 태도는 90년대 후반 언어학을 연구했다는 대목에서 더 확실해진다. 아마도 직업상 오래 만져온 '언어'라는 대상을 잘 알고 싶었기 때문에 시작한 공부가 아니었을까. 『위반하는 글쓰기』에 얼핏얼핏 등장하는 언어학적 분석들을 보면 그 공부가 상당히 깊었음을 알 수 있다. 뇌과학에도 관심을 가졌었다. 올리버 색스의 『편두통』을 번역할 정도다. 색스는 흥미로운 서사 중심의 병례사로 유명하다. 그러나 『편두통』은 의학 전문서에 가깝다. 전문용어와 임상 병리적 서술로 채워져 있다. 그저 관심이 좀 있다고, 영어 좀 한다고 번역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최근 저자가 깊이 연구한 분야는 요리다. 아내의 병수발 기간 동안 음식을 도맡아 하면서 그리됐다. (꽤 알려져 있고 앞으로 (영화 덕분에) 더 잘 알려질 사연이다.)


저자의 글쓰기는 '성실한 글쓰기'다. 서평 하나를 쓰기 위해 "7권의 책과 10편의 비디오"를 봐야 하는 작업이다. 이런 방식이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한 과정을 거칠 때 그렇고 그런 소모적인 글이 아닌 "나를 성장 시"키는 글이 된다는 말이다. '글쓰기의 즐거움'을 아는 '글쟁이'가 된 저자 자신이 그가 한 모든 말에 대한 증명이다.


'제가 믿는 진실을 써내기 위해 싸운 겁니다. 글쓰기의 즐거움을 위해서는 싸울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여기에서 이긴다면 언제까지나 이길 수 있겠지요.' 쓰기를 위한 '읽기'에서도.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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