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행성에서 너와 내가 사계절 1318 문고 123
김민경 지음 / 사계절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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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모비 딕』이 눈에 들어온다. 읽을 때가 된 걸까. 스쳐본 포털에서 작가정신에서 낸 『모비 딕』의 표지가 자주 보았다. 아몬드 모양의 새까만 눈동자가 커다랗게 박혀있는 책. 아름다운 문장과 헤아릴 수 없이 넓은 지식, 인간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 마리아 포포바의 『진리의 발견』을 읽는 동안 멜빌과 그의 고래를 또 만났다. 전에 어떤 글에서 『모비 딕』은 소설이 아니라 고래백과사전이라는 말을 읽었었다. 서사가 부족한 책을 읽기 어려워하는 나의 도서 특성상 이 책은 어렵겠다고 판단했었다. 포포바가 소개하는 『모비 딕』은 내가 알고 있던 책과 달랐다. 작가가 고래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가지게 된 배경과 책을 쓴 시기 등을 읽으면서 호기심이 동했다. 그리고 이 책 『지구 행성에서 너와 내가』를 읽게 됐다. 책을 매개로 한 소년과 한 소녀가 만난다. 청소년기의 독서에 대한 묘사가 궁금했고 책을 통해 그들이 어떤 것들을 나눌 수 있을 지 알고 싶었다. 주인공 소년과 소녀가 함께 나눈 책이 『모비 딕』이었음은 물론이다. 


소설은 소년의 시점과 소녀의 일기가 교차로 병행되는 구성이다. 마음에 드는 소녀를 만난 소년은 그녀와 어떻게든 교차점을 만들고 싶었다. 그런 그에게 소녀가 요구한 것은 『모비 딕』 읽기다. 둘은 고등학교 1학년이다. 입시 전쟁을 코앞에 두고 두툼한 소설을 읽는 일은 '보통'의 고교생에겐 어려운 선택이다. 만화도 아니고 가벼운 소설도 아닌 고전소설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소녀에 대한 호감은 소년을 움직인다. 781쪽자리 책을 다 읽으면 소녀가 제주도로 전학가기 전까지 매일 만날 수 있다. 빨리 읽으면 읽을 수록 소녀와 함께 할 시간이 길어진다. 소년의 마음이 급해졌다. 대체 이렇게 두껍고 난데 없는 고래를 다룬 책이 어떤 의미가 있길래 두 번씩이나 읽었다는 건지 알고 싶었던 거다. 소녀를 만나려면 책을 완독하는 수 밖에. 소년은 하루에 읽을 분량을 나누고 책를 시작했다.


소년이 책을 읽으며 변화해가는 모습이 나에겐 독서사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모조리 보여주는 것 같았다. 책의 문장이 생활 속으로 들어오고 소설 속에 몰입되어 내가 이야기 속에 들어간 기분이 되고 자신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에서 자신도 몰랐던 스스로의 편견을 깨는 일까지. 소년은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모든 경험을 『모비 딕』이라는 소설 한 권안에서 얻는다. 그야말로 책읽기의 정석이다.


책의 첫 부분을 읽은 소년의 감상은 이렇다.


무슨 책이 이따위야. p.9


어원과 기나긴 발췌록으로 시작하는 대목에서 소년은 지레 질려버린다. 하지만 이야기가 시작되는 첫 문장에 매혹되고 만다. 많은 독서가들이 경험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첫문장에 홀리는 일 말이다. 오죽하면 『소설의 첫 문장』(김정선, 유유), 『내가 사랑한 첫 문장』(윤성근, MY)같은 책이 나왔을까. 유명한 『모비 딕』의 첫 문장과 소년의 단상이다.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 두자.

『모비 딕』의 진짜 첫 문장이다. 나는 첫 문장을 뚫어져라 보았다. … 얼마나 자신 있기에 이런 식으로 첫 문장을 쓰나. 작가의 자신감과 거만함이 느껴졌지만, 솔직히 말해 내가 읽은 책의 첫 문장 중 최고였다. 첫 문장에서 마음이 이렇게 확 끌리는 건 처음이다. pp.15-16


소년의 독서는 순풍에 돛을 단다. 『모비 딕』에는 멜빌 자신의 목소리가 직접 담긴 장면이 있었다. 소년은 이 문장을 읽고 포경업에 대해 작가가 가졌던 애정에 공감한다. 작가의 목소리와 직접 대면하는 경험은 서사 집중력을 높이고 주인공을 따라 나서는 모험이 시작된다.


그러다가 그 장 끝에서 유언이나 다름 없는 무장이 나와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이건 이슈메일의 목소리가 아니라 작가의 직접적인 목소리였다.

… 내가 죽을 때, 내 유언 집행인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 빚쟁이들이 내 책상 속에서 귀중한 원고를 발견하단다면, 나는 모든 명예와 영광을 포경업에 돌린다고 여기서 미리 밝혀 두겠다. 포경선은 나의 예일대학이며 하버드대학이기 때문이다. pp.39-40


『모비 딕』의 문장은 소년의 경험과 겹쳐진다. 책 속에서 이규메일과 퀴퀘그는 함께 책을 보며 "대화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 간다. 그리고 "마음의 밀월"을 나눈다. 소년은 이 대목에서 소녀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린다. 책이 내 경험을 고스란히 대신 말해주는 것 같은 순간과 맞닥뜨린 것이다. 이런 순간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울렁이게 한다. 소년은 책으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번역해내고 있었다.


사람은 영혼을 감출 수 없다.

나는 이 문장을 뚫어져라 보았다. 새봄이를 처음 본 날이 떠올랐다.…처음 본 아이였는데 그런 느낌이 들어서 나 스스로도 놀랐다. 한 학기를 돌이켜 봤을 때 새봄이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이 맞았다. 그래, 사람은 영혼을 감출 수 없다. 아름답고도 무서운 말이다. pp.22


소설의 문장이 독자의 경험으로 변환되는 일을 잘 묘사한 대목이 있다. 한낮의 도서관에서 나온 소년은 책 속의 문장을 떠올린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피쿼드호가 지나갔던 열대 해역을 떠올리고 육지는 구경도 못한 채 몇 년씩 바다에서 보내는 삶을 상상한다. 대리 체험의 단계로 진입이다. 소년은 피쿼드호에 승선해 숨가쁜 고래잡이를 경험한다.


한낮의 태양 아래를 걸으니 낮은 그렇게 매력적이고 밤은 그렇게 유혹적이어서, 잠을 언제 자는 게 좋을지 선택하기가 어려웠다는 문장이 떠올랐다. pp.42-43


거의 스무 장을 몇 시간만에 읽었다. 나도 피쿼드호의 선원이 되어 그들과 함께 고래를 잡아 죽이고 해체하고 장례를 치른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텅 빈 듯하고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책을 읽는 게 이렇게나 힘들다니……. pp.69-70


오래된 소설책이지만 『모비 딕』은 소년에게 사회를 만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포경선 내의 위계를 보면서 자본주의가 사회적 계층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고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숙고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사회의 구조와 그 사회 속에서 사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보는 일, 소년의 독서는 생각의 확장을 이끌어 낸다. 앞으로의 인생을 성찰하고 잊지 말아야할 미래를 위한 질문까지 떠올린다.


포경선 또한 하나의 사회였다.… 미국이 그걸 인정할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해 보면, 자본주의에서는 좀 더 힘 센 놈과 좀 더 약한 놈이 늘 있어 왔다. 그 기준은 '돈'이다.

아직 나는 직접 돈을 벌어 먹고살지는 않는다. 그래서 모르는 걸까. 솔직히 나는 많이 가지면 무엇을 더 누릴 수 있는 건지 궁금하다.… 나이가 들고 직업을 가지면 알게 될까.… 언젠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 궁금증을 잊지 않는 한 말이다. 내가 이걸 궁금해한다는 걸 잊지 말자. p.41


"책은 얼어붙은 정신과 감수성을 깨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고래를 묘사는 멜빌의 문장에서 소년은 자신의 편견을 깨닫는다. 소년의 감수성이 놀라울 따름이다. 현실 고1의 독서가 이럴 수만 있다면 아니 성인이 독서에서 이런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다른 세상을 살고 있지 않을까. 제대로 된 책읽기는 "날마다 뒤통수 엊어맞"기다. 기분 나쁘지 않은 뒤통수 엊어맞기.


나는 인간 말고는 어떤 살아 있는 동물도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문득, 그동안 내가 너무나 편협하게도 '아름다움'을 예쁘다는 뜻으로만 생각했으며, 이 지구상에 오직 인간만이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 착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작가가 이 책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고래뿐만이 아니라 인간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이 이 책을 읽은 지 나흘째인데 날마다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언젠가부터 세상을 거의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모르는 세상이 아직도 많고 무한하다는 걸 깨달았다. pp.85-86


소설의 나머지 반은 소녀가 죽음의 손길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다. 소녀는 2016년 4월 16일 이후로 4년간 칩거했다. 사회와 떨어져 자신만의 세계에서 죽음과 벌인 싸움의 기간이었다. 소녀는 살기를 선택했고 다시 학교에 나왔다. 4.16은 우리 사회와 소녀에게 서로 다른 의미로 '상전이'를 가져온 날이다. '상전이'는 물질이 일정한 외적조건에 따라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뀌는 현사을 말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특성이 생겨난다. 우리는 그리고 소녀는 어떻게 해도 4.16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가지고 있던 특성이 변했기 때문이다. 변화의 필연성을 인식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향해야 한다. 도서실에서 우연히 만난 『모비 딕』의 문장은 삶과 죽음에 대한 소녀의 생각을 바꾼다. 소녀를 『모비 딕』으로 이끈 문장은 작은 포스트잇에 씌여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포경 밧줄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모든 인간은 목에 밧줄을 두른 채 태어났다 하지만 인간들이 조용하고 포착하기 힘들지만 늘 존재하는 삶의 위험들을 깨닫는 것은 삶이 갑자기 죽음으로 급선회할 때뿐이다. - 『모비 딕』 pp.76


포스트잇의 문장은 인간 삶에 편재한 죽음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책을 다른 의미로 읽는다. "진정 『모비 딕』을 아는 사람은 죽음을 배척하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소녀에게 『모비 딕』은 "살아 있는 것, 살아 있음에 대한 이야기"였다. 소녀는 소년을 만나면서 자신이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여전히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책은 그 만남의 매개가 된다. 소녀는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꿈꾼다. 소녀가 책을 두 번 완독하고 적은 남긴 문장이다.


진정한 힘은 결코 아름다움이나 조화를 손상시키지 않고, 오히려 아름다움과 조화를 가져다 준다. 당당한 아름다움을 지닌 모든 것이 발휘하는 불가사의한 매력은 힘과 깊은 관계가 있다. p.134


소년이 『모비 딕』을 읽는데 걸린 시간은 단 엿새가 걸렸다. 엿새 간의 폭풍같은 읽기와 생각하기 그리고 엿새 간 이어진 소녀와의 토론. 두 사람은 때로는 책 이야기를 때로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마음의 밀월"을 나눈다. 책이 끝날 즈음 둘의 이야기가 영원히 계속됐으면 좋겠다 싶었다. 올리버 색스의 『고맙습니다』가 등장한 책의 마무리는 그 이상 좋을 수 없었다. 소년과 소녀의 대화는 책을 읽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바로 그 자체'였다. 그런 이야기 나눌 여유, 그리고 누군가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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