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세계와 파국 - 대중 유토피아의 소멸
수잔 벅 모스 지음, 윤일성.김주영 옮김 / 경성대학교출판부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끔찍한, 번역이다. 매 문장마다 말도 안되는 오역이 넘쳐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많은 사람들의 비판과 많은 나라들의 분노와 자제 요청에도 불구하고 계속 팔레스타인을 공격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 이스라엘은 전쟁에 있어서 어떤 도덕적 명분도, 휴머니즘적 고려도, 국제 관계에서의 고립이나 그로인한 경제적 불이익 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전적으로 슈미트가 말했던 적과 동지 구분이라는 정치적인 논리를 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시 정권조차도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명분을, 허위로 조작해서라도, 내세웠어야 했던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이슬라엘은 오늘날 어떤 나라보다도 충실하게  슈미트의 정치 이론을 현실 정치 속에서 대변하고 있는 하다.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이 나찌의 철학자였던 슈미트의 정치사상을 실천하고 있다고 하는 일견 모순적으로만 느껴지는 가설의 근거를 우리는 그러나, 유대인 철학자로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과 베를린 자유대학의 교수이기도 했던 야콥 타우베스 Jacob Taubes 전해주는 이야기에서 발견할 있다.


야콥 타우베스에 의하면 슈미트의 정치사상은 1941/1942 뉴욕의 유대인 신학 세미나 Jewish Theological Seminar 주최한 컨퍼런스에서도, 특히 Albert Salomon 등을 통해서 미국의 보수적 유대인 학자들과 유대주의에 결정적인 흔적을 남기게 되었을 뿐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건국되던 시기 이스라엘의 헌법과 법률에 직접 영향을 끼쳤다. 야콥 타우베스는 이를 그가 1949 바부르크 장학금을 받고 히브리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겪었던 일화를 통해 전하고 있다. 개념에 관한 역사적, 철학적 논의들을 강의하기 위해 당시 그에 대해 유일하게 다루고 있었던 슈미트의 헌법론 Verfassungslehre’ 도서관에서 대출하려던 타우베스는, 당시 이스라엘 헌법 초안 작업을 하던 법무장관 Pinchas Rosen 책을 빌려보고 있었다는 알게된다. 이스라엘 국가의 헌법은 슈미트의 <헌법론> 기초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Jacob Taubes : Ad Carl Schmitt. Gegenstrebige Fügung, 1987 Berlin, S.19, Jacob Taubes : Die politische Theologie des Paulus, 1993 München, S.134.)

 

슈미트의 <헌법론>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이스라엘 헌법에 반영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이스라엘이 자신의 정치적 들을 대하는 태도와 정책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는지는 당연하게도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과제다. 하지만 오늘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이 어떤 식으로든 정말 슈미트의 주권자 정치적인 논리를 따르고 있다면, 거기에 대한 우리의, 대부분 휴머니즘적, 윤리적 관점에서의 비판은 실질적인 영향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정치를 도덕적 요구들로부터 자율화시키고, 주권자적 결정과 의지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영역으로 독립시키려는 것은 슈미트 정치 사상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책은 미켈란젤로의 모세 상에서 부터 시작한다. 신의 계율을 받아온 모세는 형제와 자식들이 황금 송아지를 경배하는 걸 바라보고 있다. 프로이드가 분석했듯, 금방이라도 그의 손에서 떨어질 듯 한 계율이 담긴 석판과 거칠게 수염을 감싸쥔 다른 손은 긴장감으로 가득차있다. 이 순간의 모세에겐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그는 망설이고 zaudern 있다. 망설임은 햄릿과 같은 인물을 비극적 운명에 빠뜨리는, 결단과 의지의 결핍이라고, 행동을 향한 용기와 에너지의 부족이라고 이야기되어왔다. 역사를 이루어왔던 건 망설임을 극복한 결정과 결단에 있다고, 그래서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다른 모든 이들이 망설이고 있을 때 내린 레닌의 결단력 덕분이었다고, 남들이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야말로 진정한 주권적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은 결정과 결단이 점점 더 소리높여 칭송되고 있는 오늘날 지금까지 부정적으로만 평가되어온 망설임을 재 평가하려고 한다. 여기서 망설임은 이전까지 진행되어오던 사건의 흐름을 중단시키고 우리의 예측을 벗어나는 "사건"의 생성을 향한 잠재력으로, 그 속에서 "행동과 장애, 행위와 근거, 법과 실행 사이의 비판적이고 위기적 관계가 응축되는"(25), "결정과 비 결정 사이에서의 능동적 머무름"(110)의 순간으로 파악된다. 그를통해 그 망설임이, 바틀비 Bartleby의 유명한 공식 "I would prefer not to..." 에서 처럼 어떻게 오히려 지배적 권력관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거기에 균열을 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Joseph Vogl :  Über das Zaudern. Diaphanes Verlag.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자살은 삶에의 의지가 결핍되고 고갈됨으로써 생겨난, 살아감의 피로, 절망으로 인한 자기파괴적 행동이라고 여겨진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가 본능적으로, 본성상 가지고 있는 자기보존 충동 거스리는 본성적인 반자연적인 파괴행위이며,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어려움이 있건 살아가야 한다는 삶에의 정언명령을 거스르는 반인륜적, 나아가 비도덕적 행위라고 비난된다. 절망, 파괴 등의 단어들과 결합되어 있는 자살이, 자살을 종교적 죄악으로 여기는 기독교 문화 속에서는 물론 이제 삶을,시민들을 살아가게 함으로써 그들의 권력을 유지시키는 생체 권력이 지배하는 오늘날까지 이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던 것은 이런 점에서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와는 다르게 생각할 수는 없을까? 오히려 자살은 스피노자가 „Conatus 통해, 니체가 권력에의 의지 통해 이야기했던, 나아가 들뢰즈가 욕망기계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했던 인간에게 존재하는 근원적인, 긍정적인 충동의 표현으로, 죽음이라는 삶의 마지막 경계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적극적 의지의 소산이라고 이해할 수는 없을까?

 

아메리의 <자신에게 손을 얹기. 자유사에 대한 디스쿠어스 Hand an sich legen. Diskurs über den Freitod, 1976> 이런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는 자살을 무엇인가의 결핍, 고갈에 의한 어쩔 없는 수동적, 패배적 귀결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순간에야 비로소 인간의 실존이 자신의 진정성과 강도 획득하는 적극적, 능동적 삶의 표현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한 점에서 아메리는 자기 자신을 살해한다 의미의 자살 Selbst-Mord“이라는 단어를 자유로운 죽음이라는 의미의 „Frei-Tod“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삶이나 혹은 사람을 죽이지 말라 절대적 정언명령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어기고 위반한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자살 아니라, „죽음을 향해 사는 Zum-Tode-hin-Leben“ 으로서의 자유사 Freitod  (24)이다.

 

자유사는 천연두처럼 우리가 그로부터 치유되어야 하는 어떤 병이 아니다.“ (40) 자유로운 죽음은 오히려, 인간이 생각할 없는 , 존재의 의미가 앞에서 완전히 무기력해지는 -의미 Un-Sinn’, ‚존재하지 않음 Nichtsein“이라는, 인간 존재에 근본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모순을, 자신의 행위를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끌어 안으려는, 인간에게만 가능한 실존적 결단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자살을 결심하게 되는 동기가 무엇인가가 아니다.  사랑을 얻지못한 젊은 가정부이건, 사업에 실패한 기업가이건,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믿는 장교이건, 오랫동안 우울증을 겪어왔던 지식인이건 자신의 삶을 끝내기 위한 최종적인 행위 - „뛰어 내리기 직전의 순간 Moment vor dem Absprung“ 죽음에 대한 (그와 동시에 삶에 대한) 태도에 있어 그들 모두를 절대적으로 동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살론을 위해 아메리는 소위 자연적 죽음과 비자연적 죽음이라는 일반적인 구분에 문제를 제기한다. 인간에게 있어 도대체 자연적죽음이라는건 무엇인가? 사고나 다른 불운을 통해서, 치유할 없는 때문에, 혹은 자살이 아니라 자신의 수명을 다할 때까지 살다가 죽는 것은 도대체 어떤 점에서 자연스럽다 것인가? 정말 그렇게 죽은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에 대해 습관적으로 이야기하듯, 어떤 편안한 휴식 맞이하게 것일까? 자신에게는 갑작스러울 밖에 없는, 그가 기다리고 있던 죽음이 정말 그에겐 그렇게 자연스럽게느껴졌을까? 자연적 죽음과 비자연적 죽음을 구분하고 자연적 죽음을 칭송하는 우리의 문화는 그를통해 죽음이라는 삶의 패러독스로부터 우리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아메리는, 그의 다른 책들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를 읽는 독자들을 몹시도 불편하게 만든다. 불편함은 그가, 우리가 생각하지 않으려고, 잊고 있으려고 노력하는 질문들을 의도적으로, 노골적으로 제기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다른 <늙음에 대하여Über das Altern. Revolte und Resignation, 1968>에서도 마찬가진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모두가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어도, 그에대해 실컫 이야기하고 나서는 그래도 힘냅시다라는 습관적 언사를 던져주는 것이 미덕으로 되어버린, 오늘날의 글쓰기와는 달리, 아메리는 현대 사회에서 늙는다는 것이 가져다 주는 처절한 패배, 자기소외 그리고 그것의 실존적 비극에 대해 아무 위로도 주지않는다. 오히려 그는 독자가 책을 덮어 버리고 담배를 피워물게 만들 정도로 가차없이, 늙음이, 현대 사회에서 늙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벌거벗은 상처를 서슴없이 이야기한다. 어느날 불현듯 늙음이 가져다 어떤 불편함을 감지해, 그를 위로받기 위해 그의 책을 읽는 독자는 오히려 그때까지 깨닫지 못했던, 늙는다는 것이 갖는 깊고도 어두운, 헤어나기 힘든 서늘한 깨달음에 빠진다. 늙어가는 사람에겐 시간이 살았던 시간과 살고있는/살아갈 시간 사이의 대칭으로 기울어 간다는 것을, 늙는다는 것은 자신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점점 낯설어져 가며, 타인들의 시선 속에서도 사라져간다는 것을, 점점 이해하기 힘들어지는 세계로부터 이탈해 가면서 결국엔 죽어감 Sterben 함께 살아감을 배워야 한다는 깨달음에.

 

그리고 거기엔 아무 희망도, 아무 위로도 없다. 늙음을 자신의 문제로 의식해가는 독자는 그의 책을 읽는 동안, 아니 그의 책을 읽고 나서 늙어가는 자신과 그것의 사회적, 실존적 결과와 아무 방패막 없이 고독하게 대면한다. 그의 언어는, 세상으로부터의 거리감을 만들어내고 그를통해 세상의 차가운 냉혹함으로부터 우릴 보호해주는 방어막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눈꺼풀을 벗기고 처절한 진실을 직시하게 하는 폭로의 무기이다. 아메리는 그의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자신의 대리인인 A 하여금 마지막 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한다. „A 사람들의 평온을 깨뜨리고, 타협을 폭로하고, 풍속화를 파괴시키고, 그를통해 자기 위안을 쫓아버리는 무엇인가를 행하였는가? 그는 그러기를 바란다. 살아갈 들은 하루 하루 쭈그러들어 말라져 간다. 그는 이제는 정말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욕망을 가졌다.“ (149)

독자들의 평온을 깨뜨리고, 어떤 위로도, 어떤 도피처도, ‚그래도…’ 라는 공허한 수사도 제공하지 않는, 한마디로 책을 읽는 사람들의 편안한 요구들과 타협하지 않는 그의 글은 그의 개인적인 삶의 여정에서 나온다. 1912 비인에서 태어난 유대인 아메리는 나찌가 권력을 잡기 시작하던 시기 사회주의 운동을 벌이다 체포된다. 동료 조직원들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게슈타포가 그에게 행했던 고문 체험을 그는 1964 출판한 <죄와 속죄의 저편. 위압당한 자의 극복 시도들.Jenseits von Schuld und Sühne. Bewältigungsversuche eines Überwältigten>에서 묘사하고 있다. 책에서 아메리가 시도하고 있는 고문에 대한 현상학적 기술 처음 얻어맞는 순간 어떻게 세상에 대한 실존적 신뢰가 붕괴는지, 물고문을 받던 그에게 숨을 내쉴 있는 자유 Atemfreiheit 대한 본능적 욕구가 어떻게 그가 가지고 있던 사회적 자유에 대한 요구를, 동료들을 배반하게 하는지 그를 읽는 사람을 함께 고문을 당하는 현장으로 끌고간다. 그가 고문실에서 느꼈던, „세상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기대할 없는 처절한 단절감 이후 유대인 수용소에서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삶과 죽음의 진실을 외면함으로써 우리가 얻는 편안함이 얼마나 헛되고 얄팍한 것인가를 처절하게 깨닫게 것이다. 자살에 대한 그의 사유는 이러한 깨달음에 근거하고 있다.  

 

자살, 아니 자유사를 긍정하는 책을 출판함으로써 아메리는, 좀처럼 빠져 나오기 힘든 어떤 길로 자신을 이끌고 갔다. 자유로운 죽음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에의 의지로 포괄하고자 했던 아메리는 자신의 말이 갖는 수행적 차원을 의식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책을 통해 자신의 자유사를 공표했던 것이다. 1978 10 17 아메리는 잘쯔부르크의 호텔에서 자유로운 죽음을 실행한다. 그의 책상에는 그의 자살을 통해 호텔에 끼치게될 불편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편지와 그때까지의 그의 숙박료가 놓여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자크 랑시에르의 (Das Unvernehmen. Politik und Philosophie, Shurkamp) 읽었다. 랑시에르는 예상보다 훨씬 급진적이다. 그가 내세우는 정치적 요구는, 예를들어 데리다가 환대라는 개념을 통해 말하는 것처럼, 언제, 어떻게, 어디에서 도래할 모르는 타자/손님들을 언제든지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소극적인 윤리적 요구를 훨씬 넘어선다. 랑시에르에게 있어 정치, 현존하는 치안적 질서에 따른 사회적, 정치적, 나아가 감각적인 것의 분배 구조에는 근본적으로 낯선’, 질서 속에선 아무 자기 몫도 배당받지 못한 자들이 주체화를 통해 자신들의 몫을 요구하고 나설 비로소 시작된다. 그가 말하는 정치 현존하는 사회의 치안적 질서, 그것이 마련해 놓은 분배/분할의 구조 속에서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자 Anteilose’들이 자신의 몫을 요구하고 나서기를, 그를통해 기존의 치안적 질서의 재편을, 자리바꿈을 요구한다. „정치적 활동이란 육체에게 부여되어 있던 장소로부터 그를 떼어놓거나 장소의 규정을 변화시키는 활동“ (41)이며, 그를통해 기존 질서의 절대적인 우연성을 폭로하고, 기존 질서의 변화와 자리바꿈“(이재원, 쟈크 랑시에르와 68혁명이 유산을 생각한다. <자음과 모음> 2008 겨울호) 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정치적 요구는 예를들어 임금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악덕 사업주에 대해 투쟁하거나, 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시민적 권리를 얻기 위해 싸우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정치, 사회 운동의 요구를 넘어선다. 랑시에르에게 있어 현재의 사회, 정치적 질서가 구획하고, 속에서 각자에게 배당해 놓은 자기 몫을 찾기위한이러한 정치적 운동은 그런 점에서 오히려 현존하는 사회, 정치적 질서와 구획, 그것의 나눔의 구조를, 치안적 질서를 강화시키는데 기여할 있다. 현존하는 분배/분할의 질서가 자신에게 배당해 놓은 몫을 요구하는, 그래서 결국엔 자기 몫을 가지고 있는 Anteilhabende’ 자신의 몫을 요구하는 노동운동이나 시민 운동이 어떤 지점에서, 현존하는 분배/분할의 질서에 의해 아무 자리도, 아무 몫도 배당받지 못하고 있는, 예를들어 외국인 노동자, 난민, 불법 체류자들  같은 자기 몫을 갖지 못하는 자들 Anteilosen’ 대립하는 것도 바로 때문이다.

 기존 질서에는 아예 소속되어 있지도 않으며, 속에서 아무 장소도, 위치도, 몫도 분배받지 못하던 존재들, 그리하여 질서에는 근본적으로 낯선자들이 그럼에도 자신의 몫을 요구할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예를들어 나라의 시민권도 가지고 있지 못하고, 그로인해 법으로 보장된 어떤 사회적 권리도 갖고 있지 못한 난민, 불법 체류자, 혹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몫을, 자신의 권리를 요구할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랑시에르에게 있어 그것은 모든 말하는 존재가 다른 말하는 존재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동등함/평등 Gleichheit(42) 있다. 그리고 평등/동등함 랑시에르에게는 어떤 활동이 정치적 성격을 갖기 위해선 반드시 의거해야 하는 근본 원리이다. „정치는 자체에 고유한 대상이나 질문들을 갖지 않는다. 정치의 유일한 근본 원리인 평등/동등함은 정치에 고유한 것이지도 않으며 자체로 정치적인 것도 아니다. 정치가 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구체적 사안이라는 형태로 평등/동등함의 현재성을 부여하는 것이며, 투쟁이라는 형태로 치안적 질서의 심장 속에로 평등/동등함을 기입/등록해 넣는 것이다. 하나의 활동의 정치적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활동의 대상이나, 그것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투쟁,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데 평등/동등함의 확인을 기입/등록해 넣는 그것의 형태이다.“(43) 다시말해 랑시에르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정치적 활동이란 그것이 무엇을 대상으로 하건, 어떤 문제를 이슈로 삼건 상관없이, 그를통해 기존의 치안적 질서 내에선 보이지 않고 있던평등/동등함에의 요구를 제기함으로써 기존의 분배/할당 구조의 자리바꿈을 요구하는 활동이다.

 홉스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공식을 통해 암시했던 말하는 존재들 사이의 이런 근원적 평등은, 랑시에르에 의하면 명령하는 자와 그에 복종하는 자의 관계를 통해 유지되는 질서의 가능 근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서는 명령을 이해할 있어야 하며, 또한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를 행하기 위해서는 이전에 복종하는 자와 명령하는 자가 이미 동등해야만“(29) 하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권력관계, 명령하고 복종하는 질서 자체를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이전의 근원적 동등함/평등에 의거해 이야기하고 있는 랑시에르는 점에서 모든 권력 관계와 질서가 이미 출발에서부터 폭력적 억압에 기인하고 있으며, 따라서 모든 지배와 질서를 거부하는 아나키스트들과는 구분된다. 랑시에르는 아무런 권력 관계와 질서도 존재하지 않는 상상적 정치적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특정한 권력 관계와 질서가 유지될 있게 하는 근거로서의 근원적 평등 권력관계와 질서의 개혁과 변화를 가능케 하는 규범적 근거로 삼으려고 한다. 존재하는 권력의 힘과 질서를 다만 그를 행사하는 권력자의 일방적인 폭력이 아니라, 최초의 동등함/평등 상태에서 스스로를 권력에 종속시키고 복종하는 자들의 자유에 의거한 자발성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내가 보기에 랑시에르는 라클라우/무페가 전개시키는 헤게모니 이론과도, 지배 이데올로기가 힘을 갖고 영향을 발휘하는 이유가 본질적으로는 비어있는 어떤 질서와 법에 우리 스스로가 부여한 어떤 초월적 힘과 의미 때문이라고 말하는 지젝의 논의와도 통해 있다. 나아가 우리는 이를 자발적 동의에 기초해 있는 권력 폭력으로부터 구별하는 한나 아렌트의 권력 이론과도 연결시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과 랑시에르 사이의 근본적 차이점이 있다면, 랑시에르는 하나의 권력과 질서가 비로소 가능하게 하는, 권력과 질서에 복종하는 자들의 근원적 동등함/평등에 대한 요구를 일국적 차원을 넘어서까지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서 동등함/평등에 대한 요구는, 처음부터 그런 동등함/평등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는 국가 내의 시민들이 아니라, 그런 법적, 정치적, 사회적 질서로부터 아무 자리도 배당 받고 있지 못한 자들에게로까지 확장된다. 국가의 시민으로서 앞에서의 평등함이 아니라, 말하는 존재로서의 평등함/동등함에 대한 요구. 국가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질서 내에 어떤 자리도 갖고 있지 않은 자들이라도 요구할 있고, 요구해야 하는 평등함. 오늘날 유럽 사회에서 랑시에르의 이러한 정치적 요구가 가장 분명하게 적용될 있는 대상은 유럽에 체류하고 있는 난민이나 불법 이주자 아니라, 하루에도 수십명 수백명씩 마로코, 튜네지아, 알제리, 소말리아에서 부터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횡단해 꿈꾸던 나라 유럽대륙으로 몰려오고 있는 보트 피풀들이다. 현존하는 일국적 체제에 의해, 다만 유럽적 차원으로 확장된 배타적 일국체제 유럽 연합이라는 정치단위에 의해서는 아무 자리도, 아무 몫도 할당받고 있지 않은, 아니 오히려 유럽의 안정과 복지, 번영을 위협하는 존재로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아야 ’, 그래서 끊임없이 추방되고 되돌려보내지는 이들이야말로 현재 유럽 사회의 질서 속에서 배제되어 있는 자기 몫을 가지고 있지 못한 자들 Anteilose’이기 때문이다.

 유럽사회에서 이들은 지금까지, 목숨을 항해와 갈증과 허기와 조난으로 죽어간 희생자들의 모습으로, 죽음 직전까지 탈진해 유럽해안에 도달해 해변에서 관광을 즐기던 유럽인들의 보살핌을 받는 불쌍하고 고통받는 희생자 모습으로 재현되어 왔다. 그리고 고통받는 희생자들에게 유럽의 시민 사회는 적지않은 휴머니즘적 원조와 자선을 베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랑시에르에 따르면 우리와 같은 인간 고통에 대한 동감과 선한 의지 근거하고 있는, 소위 휴머니즘 논리에 의거해 이루어지는 이러한 자선 활동은 전혀 정치적 활동이라고 여겨질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휴머니즘적 자선활동은 그들이 스스로를 정치적 존재로 주체화할 있게 하는, 바로 거기에 위에서 말한 근원적 평등/동등함이 근거하고 있는 말할 있는 능력 가진 존재로 인정하기 보다는, 다만 그들을 자신의 벌거벗은 고통을 드러내는 목소리 가진 존재로 제한시키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34-135) 정당함과 부당함, 좋음과 나쁨을 구별하고 말할 있게 하는 말하는 능력 Logos’ 박탈하고, 그들을 다만 고통을 느끼고 표현하는 목소리만을 가진, 그래서 도와주워야 희생자로만 만듦으로써 이러한 활동은 그들에게서 정치적 존재로서의 자격을 빼앗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유럽 아니라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사회에서도 점점 수가 늘어나고있는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자들’, 예를들어 이주 노동자, 결혼 이민자, 혹은 불법 체류자들이 공장주에게 구타당하고, 남편에게 폭행받고, 심각한 인종차별을 받는 희생자 등장하는 , 우리는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들이 받은 피해에 함께 분노하며 그들을 기꺼이 도와주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이 스스로를 주체화하여 한국사회가 그들에게 분배/할당하지 않았던, 그래서 전혀 예상하지도 못하고 있던 어떤 Anteil 요구해 온다면? 말하는 존재로서의 근원적 평등/동등함에 근거해 정치적으로 주체화된 이들이, 한국 사회의 분배/할당 구조 내에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몫을 배당받고 있는 Anteilhabende’ 우리에게까지 몫을 재분배하고, 자리바꿈을 요구해 온다면? 우린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들과 연대할 있을까? 우리가 우리의 위치를, 위치를 보장해주던 질서와 나눔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려 하는 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오히려 이들의 뻔뻔스러움을, 나아가 배은망덕을 이야기하면서, 애초에 우리가, 치안적 질서가 그들에게 마련해 놓았던 규정 ,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 Anteilose’ 정체성을 그들에게 상기시키려 것이다.

 랑시에르가 말하듯, 모든 정치적 주체화는 이처럼 지금까지의 우리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을 재조직하고, 나눔/할당의 구조를 분배하고, „지금까지 헤아려지지 않던 것을 헤아리고, 몫의 부재와 몫을 서로 관계시키는 정체화 Ent-Identifizierung „(48 ) 요구한다. 지금까지의 정치/사회 운동이 우리에게 할당되어 있는 요구해왔다면,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는 우리가 자신의 몫을 가지지 못한 자들 정치적 주체화에 대해 우리 자신의, 결코 쉽지않을  정체화를 통해 응답하기를 요구한다. 우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