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젊은 시절의 글에는 두려움이 없다. 거기엔 자신의 욕망이, 자신의 열정이, 그리고 열정을 부끄러워하는 수줍은 억압이 동시에 존재한다. 누군가에게 보여질 없다는, 아니 누군가에게 사실은 보여지기를 바라는 속엔 그래서, 풋기어린 솔직함이 있다, 혁명과 사랑과 열망이 있다.

 

나이가 들면서 글은 팽팽한 욕망과 감춤의 긴장감을 잃는다. 글은 누군가에게 보여질 있으며, 아니 누군가에게 보여져야만 한다. 그래서, 거기엔 삶의 과정을 통해 나에게 들쒸워진, 나의 위치와 나의 지위와, 나의 입장에 걸맞는 적절한 규제가 작용한다. 글은 다듬어지고, 감추어지며, 의도에 따라 가공된다.

 

그러나, 자기와의 대면으로서의 글은 가슴 깊은 곳에 눌러붙은 수치와 욕망을 완전히 감추어둘 수는 없다. 말과 , 문장과 문장 사이를 비집고 부끄러운 열망과 수줍었던 과거는 그래서, 얼핏 얼핏 꿈틀대는 자신의 몸통을 드러내고 만다. 그렇게 드러난 속살은 그래서, 사실은 모두가, 우리 모두가 알고있는 삶의 깊은 비애의 흔적이다. 그런 글을 읽는 것은 애처러움으로 인해 고통스럽다.

 

황지우의 글이 주는 불편함은 여기서 기인한다. 이상 그를 자극할 아무 욕망이 남아있지 않음으로 인해 이상 자신의 삶의 욕망을 목청껏 외쳐보지도, 그를 고문하던 세상 속에 자리잡고 살아감으로 인해 이상 세상을 향해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게 되어버린 중년의 삶은, 우리 삶의 괘적이 갖는 비애로움의 전형을 이룬다. 그러나, 그가, 그의 글이 살아남은 자로서의 수치스런 부끄러움을, 그가 몸담고 있는 세상의 화평스러운 안위를 견디지 못해 갸날픈 한숨 조각을 내쉴 , 우린 긴장한다. 사회인으로서의 그와 시인으로서의 그가 벌이는 한바탕의 숨죽인 싸움이, 가려놓은 칸막이 사이로 흘끗 들여다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시인인지라 이렇게 드러난 부끄러운 싸움을 굳이 다시 감추려 들지 않는다.

 

김훈은 결코 부끄러운 속살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글엔 삶의 비애와 사라져가는 것들의 회환, 자연질서가 갖는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는 있지만, 정작 인간 김훈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입을 통해, 그의 가슴을 통해 말해진 같은 문장들은 사실은 그의 것이 아니다. 그가 자신을 드러내었던 경우는 가난한 산골의 아이들이 번쩍거리는 그의 비싼 미제 산악 자전거를 부러워할 그가 느꼈다는무안함정도일 것이다.

 

그의 글은 유려하다. 그의 글엔 우릴 불편하게 하는 부끄러운 욕망과 현실의 싸움이 비잡고 나올 틈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글은 깊은 울림을 갖는다. 그러나, 울림은 우리 자신의 부끄러움을 상기시킴으로써 생겨나는 불편함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세상에 대해 아무 것도 욕망할 것도 없는, 그래서 안전한 위치에 있는 우리가 양주를 마시듯 즐길 있는 편안한 울림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에 대해 모를 열정을 가질만큼 젊지도 않으며, 까닭모를 반항과 피해의식으로 세상을 향해 공격을 퍼부어 만큼 가난하지도, 못배우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여행하면서 바라보는 삶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은 그가 그 삶속에 배여있는 고통들에 직접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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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2-06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황지우와 김훈의 글에 대한 님의 생각, 입을 벌리고 갑니다.^^
 



베를린에 놀러온 사촌동생이 가져다 준 한국 담배갑에는
건강을 해치는 담배 그래도 피우시겠습니까?“라는 점잖은 경고문이 써있다. 담배갑마다 적혀있는 저 경고문이 흡연자의 건강을 염려하는 담배회사의 친절한 배려의 소산이 아니라는 걸 고려하더라도 어쩔수 없지 않느냐는 듯조그맣게 붙어있는 경고문은 그 강도나 구체성면에서 무척이나 소극적이다. 유럽 연합의 결정에 따라 작년부터 유럽에서 판매되는 모든 담배갑에는 담배갑 절반 크기의 두터운 글씨로 흡연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흡연은 정자생산 기능을 손상시켜 임신률을 감소시킴니다“, „흡연은 혈관들을 막히게 해 심장발작과 졸도를 일으킵니다“, „흡연은 당신과 당신 주변의 사람들에게 심대한 피해를 입힙니다.“ 등의 무시무시하고 자극적인 문구들이 담배갑마다 다양하게 쓰여져있다. 한국 담배갑의 그것이 가족 시간대에 방영되는 일일연속극 같다면, 유럽의 그것은 하드코어 포르노라고나 할까. 이것도 모자라 유럽연합은 글자 대신 흡연으로 손상된 폐나 간, 후두부의 컬러사진을 담배갑에 부착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이처럼 그 강도나 자극성의 수준에서 다양하긴 하지만 흡연의 육체적, 사회적 해악들을 지시하는 경고문을 통해 흡연률을 억제하겠다는 발상엔 인간에 대한 특정한 철학적 입장이 전제되어 있다. , 인간은 이성적 판단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규제할 수 있는 존재라는 입장이 그것이다. 과연 인간의 의지는 이성적 판단을 통해 제어될 수 있을까.

1637 <방법서설>에서의 데카르트는 그에대해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성이 의지에 우선한다는 소크라테스적 전통에서 데카르트는 우리의 의지voltonté는 본성적으로 우리의 이성 entendement lui 어떤 식으로든 가능한 것으로 제시하는 것들만을 욕구할 있다. notre voltonté ne se portant naturellement à désirer que les choses que notre entendement lui représente en quelque façon comme possibles“[1] 말한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얻을 없는 외부세상의 무엇인가에 대한 집착으로 괴로와 하지말고 자신이 최선을 다해 도달한 것에 만족하라는 그의 임시적인 도덕 une morale par provision 세번째 격률을 가능케 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세상의 무엇인가가 자신의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는 확실히 인식한다면 그에대해 이상 욕구하지 않을 있는 이성적 존재다. ‚저것은 내가 얻을 없는 이라는 확실한 이성적 인식이 있다면 우리의 의지는 그를 더이상 욕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이성은 이처럼 자신에게 불가능한 것을 단념하고 세계의 질서가 아니라 나의 욕구를 바꾸게 à changer mes désires que l’ordre du monde“[2] 하는 체념적 방식으로만 의지에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인간의 의지, 욕구능력은 대상에 대한 이성적 판단에 온전히 종속되어 있다. 의지는 이성이 좋다고 판단하는 것만을 욕구하며, 이성이 싫다고 판단하는 것은 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의 이성이 좋거나 나쁜 것으로 제시하는 한에 있어서만 그를 따르거나 회피할 있기 때문에, 올바르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올바르게 판단하는 만으로도 충분하며, 최선으로 행동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모든 덕과 나아가 인간이 얻을 있는 모든 다른 가치들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최선으로 판단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d’autant que, notre volonté ne se portant à suivre ni à fuir aucune chose, que selon notre entendement la lui représente bonne ou mauvais, il suffit de bien juger, pour bien faire, et de juger le mieux qu’on puisse, pour faire aussi tout son mieux, c’est-à-dire pour acquérir toutes les vertus, et ensemble tous les autres biens, qu’on puisse acquérir“[3].

바로 지점에서 데카르트는 담배갑에 경고문을 부착함으로써 흡연을 줄일 있다고 믿는 이성주의자들의 철학적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만일 우리의 이성이 흡연의 해악에 대해 올바르게 판단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의지는 그를 피하려 것이다. 마치 맛없을 것이라 판단한 음식을 사먹지 않고 흥미롭지 않으리라 판단한 책을 구입하지 않듯 말이다. 그 누가 자신에게 나쁘고 위해하다고 판단되는 걸 욕구하며, 좋고 유익하다고 여겨지는 걸 일부러 거부하겠는가.

그러나, 사실 데카르트의 주장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있다. 그는 우리의 의지가 본성적으로 이성이 가능하다고 제시하는 것 만을 욕구할 수 있으며 ne se portant naturellement à désirer[4], „이성이 좋거나 나쁘다고 제시하는 만을 따르거나 피할 있다 ne se portant à suivre ni à fuir“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만일 우리의 이성이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을 통해 세상의 모든 선함과 옳음, 악함과 나쁨을 올바르게 구분하고 판단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의지는 그에 의해 나쁘고, 악하며 옳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 것들을 아예 욕구하지도 못한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데카르트에겐 올바르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며, 최선으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최선으로 판단하는 것만으로 충분하게 되는 것이다. [5]

거꾸로 이는 누군가의 올바르지 못하고, 비도덕적인 행동은 그가 세계와 사물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된다. 저 위대한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의 세계엔 살인자도, 유괴범도, 테러리스트도, 독재자도 천성적으로 악한사람들이 아니라, 다만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한, 말하자면 이성적 판단능력이 결여된인간들일 뿐이다. 그리고 그건 개선될 수 있다!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능력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주의와 노력을 통해 개선될 수 있으며[6], 나아가 모든 인간에게는 동등하게 본성적으로 올바르게 판단하며, 진리와 허위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기[7] 때문이다. 부적절하고 비도덕적 행위를 한 사람들을 죽이거나 사회로부터 추방시키는 대신, 이후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교화시키고 교육시키는 사회적 장치들이 등장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철학적 배경에서다.  

우리의 담배갑 경고문으로 다시 돌아가자. 흡연이 자신의 육체에 해로울 뿐 아니라, 나아가 주변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큰 피해를 끼치는지를 알려주는 저 경고문은 흡연의 해악에 대한 이성적 판단을 촉발함으로써 담배를 피고싶은 욕구가 생겨나지 않게하는 목표를 갖는다. 사람들이 저토록 해악한 담배를 피고 있는 것은 그들이 담배의 유해함에 대해 명석하고 판명하게 clairement et distinctement 판단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며, 이제 저 경고문은 그 판단을 도와 흡연에의 의지를 변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저 경고문이 사실상 흡연자의 의지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는 걸 우리는 하루에도 수차례 경고문들을 들여다보면서도 담배를 펴대는 흡연자들을 보면서 확인한다. 어째서일까? 혹시 저 경고문이 의지를 변화시킬 만큼 명석하고 판명한 판단을 전달해주지 못해서는 아닐까.  Principia Philosophiae에서 데카르트가 정의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무엇인가가 바라보고 있는 눈에 현전하면서 눈을 충분히 강하고 분명하게 자극하여 우리가 그를 확실히 보고 있다라고 말할 때처럼, 어떤 인식이 주목하고 있는 정신에 현전하면서 명백할 때 이를 명석하다고 부르며, 한 인식이 그 명석함을 전제로 그 속에 자신의 특징들외엔 다른 어떤 것도 지니지 않을 만큼 다른 것들과는 분명하게 분리되고 구분될 때 이를 판명하다고 부른다. Klar nenne ich die Erkenntnis, welche dem aufmerkenden Geiste gegenwärtig und offenkundig ist, wie man das klar sehen nennt, was dem schauenden Auge gegenwärtig ist und dasselbe hinreichend kräftig und offenkundig erregt. Deutlich nenne ich aber die Erkenntnis, welche, bei Voraussetzung der Klarheit, von allem Übrigen so getrennt und unterschieden ist, dass sie gar keine anderen als klare Merkmale in sich enthält.“[8]

말하자면 머리 속에 어떤 대상이 마치 우리가 그를 눈으로 관찰하듯 분명하고도 확실한 그림으로 떠오르면서도 동시에 그를 그와 유사한 다른 대상들로부터 명백하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한 상을 가지고 있다면 우린 그러한 인식을 명석하고도 판명한 인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준에서 보자면 건강을 해치는 담배, 그래도 피우시겠습니까?“라는 경고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인식은 흡연은 혈관들을 막히게 하여 심장발작과 졸도를 일으킵니다.“라는 유럽 담배갑의 그것에 비해 무척이나 불명료하고 혼연스럽다. 저 문장은 우리에게 담배의 위해함에 대한 어떤 확실하고 분명한 그림도 제공하지 않으면서도, 시커먼 배기가스를 뿜어대는 자동차 뒷면에 붙어있는 환경보호 슬로건같다.        



[1] René Descartes : Discours de la Méthode, Troisiéme Partie AT 24, 25.

[2] René Descartes : Discours de la Méthode, Troisiéme Partie AT 24, 25.

[3] René Descartes : Discours de la Méthode, Troisiéme Partie, 4.

[4]  René Descartes : Discours de la Méthode, Troisiéme Partie, 4.

[5] 이러한 점에서 이성적 판단의 기준을 세우고자 하는 데카르트의 철학적 기획은 단지 인식론적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윤리적이기도 하다.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을 통해 올바른 이성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동시에 데카르트에겐 윤리적 정언명법이었다는 것이다. 그에겐 모든 사람이 올바른 이성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면 범죄나 비 윤리적 행위들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6] René Descartes : Discours de la Méthode, Troisiéme Partie, 2.

[7] René Descartes : Discours de la Méthode, Premiere Partie. 1.

[8] René Descartes : Principia Philosophiae, I, 45.

[9] René Descartes : Discours de la Méthode, S.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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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세계에 대한 우리 지각의 흔적이다. 살아가는 동안 어쩔수 없이 세계를 지각하고 체험해야만 한다면, 기억은 우리의 삶이 우리의 육체 속에 남겨놓은 세계의 흔적들이기도 하다. 때로 우리는 기억을 위해, 기억만을 위해 지각하기도 한다. 헤어져야 하는 친구를, 사별하는 부모를, 먼길을 떠나는 자식을 우리의 기억속에 남겨놓기 위해 우린 그들의 손을 잡거나 오랫동안 그의 모습을 바라보거나, 그와 함께 기억에 남을만한 이벤트를 기획하기도 한다.

 

때로 기억을 위한 지각 기억에 대한 강박으로 발전되는 경우도 있다. 짧은 시간에, 얼마 안되는 돈으로 가능한 많은 곳을 돌아 다녀야 하는 배낭여행이 예다. 거기에서 우리의 지각과 체험은 다만 기억을 위해 조직화되고, 빠른 시간에 되도록 많은 곳과 많은 것들을 체험하고 그를 기억 속에 쑤셔넣어야 한다는 강박이 우리를 쫓는다. 기억을 위한 숨가쁜 여정이 피곤한 육체에 더이상 기억의 공간을 남겨두지 않을 때를 대비, 우린 대표적인 비육체적 보조 기억장치인 카메라를 활용한다. 카메라는 성급한 체험과 지각의 과잉을 수용하길 거부하는 육체를 대신해 우리의 지각과 체험을 기억하는 과제를 떠맡는다. 우린 에펠탑과 개선문 앞에서, 뽕삐두와 오페라 하우스 거리에서 유명한건물과 거리들에 대한 지각과 체험을 카메라에게 일임시킨다. 낯선 도시에 대한 우리의 체험과 지각은 그들을 찍는 렌즈 화면과 셧터를 누르는 손가락으로 대체되고, 우린 카메라가 대신 모든 체험과 지각들을 고스란히 기억해 주기를 바라며 다음 예정지로 서둘러 발길을 돌린다.

 

이렇게 사물화된 지각과 체험은 그러나, 인화되어 나온 사진들 속에서 우릴 배반한다. 에펠탑과 뽕삐두 앞에서 찍은 사진들은, 피곤한 여행에서 돌아와 그들을 들여다 보는 우리에게 그가 정작 기억하고 있었어야 우리의 체험과 지각에 대해선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내가 곳에 있었다라는 사실을 사무적으로 기록해 놓은 증빙서류들로써 사진들은, 실상 어떤 체험과 지각도 없이 그곳에 부재하고 있었던 역설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사진은 우리의 육체적 지각과 체험이 함께 동반되었을 때만 기억으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그를 찍었던 시간과 장소에 대한 체험과 지각이 결핍된 사진들은 그저 사진의 고전적 기능 하나였던 기록과 도큐멘트로서의 의미[1]만을 지닌다. 세계 도처의 유명한 건물, 탑과 성당, 작품들과 도시들의 사진을 언제든지 구해 있는 오늘날, 사진을 찍는 혹은 사진에 찍히는 주체와의 주관적 관련이 없는 사진들은 어떤 기억의 가치도 지니지 못한다.  

 

이러한 사정은 우리 자신을 사진들 속에 끼워넣는방법을 통해서도 그리 크게 변하지 않는다. 우린 우리가 방문했었던 건물, 거리, 장소들 속에 자신의 모습을 함께 찍어 넣음으로써 시간과 장소에서의 나의 현존 증거하려 한다. 그러나, 그를통해 드러나는 것은 나의 체험하지 못하는 육체가, 육체에 의해 체험되지 못한 장소들 속에 물건처럼 놓여 있었다 메시지일 뿐이다. 기억에 대한 강박을 통해 사진 속에 함께 찍힌 나의 모습은 속에 있는 모든 시간과 장소들 내에서의 나의 강박적 현존의 흔적일 뿐이다. 나의 모습을 포함하고 있는 사진 속의 사물들은 나에 의해 체험되지 못한 관광엽서의 그림들처럼 거기 그냥 그렇게 있다. 

 

핸드폰 카메라는 사진이 주는 기록과 기억에의 강박을 더욱 강화시켰다. 일상 속에서 좀처럼 체험하기 힘든 사건이나 장면들을 순발력있게 기록할 있게 주는 핸드폰 카메라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이 맞닦뜨린 사건과 장면들을 기억과 기록에의 강박없이 지각하고 체험하기 힘들어졌다. 사건과 엽기적 장면, 뉴스꺼리가 만한 일상의 순간들은 놓치고 사라지기 전에 사진으로 찍혀, 사진을 찍은 내가 시간과 장소에 있었다라는 자기 현존의 메시지로 활용되어야 한다.

 

이전 시대의 세계가 우리에게 그에 대한 지각과 체험을, 그를통해 자신에 대한 기억을 요구하던 정열적인 여인이었다면, 오늘날의 세계는 우리에게 그의 모든 순간과 장소에 우리가 다만 금욕적으로 현존하기만을 요구하는 성처녀다.       



[1] 사진이 오늘날처럼 자신의 사적인 일상사를 기록하는 기호품이  되기 사진은 공간적, 혹은 시간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대상들을 기록하는 도큐멘트로서의 역할을 했다. 유럽 근대 인간학Anthropologie 인류학과 나아가 사회학의 발생엔 20세기 사진을 통한 비유럽 문화들의 기록이 커다란 역할을 했었다. 사진들은 유럽 식민주의의 시선을 통해 비유럽이라는 타자 구성해내는 시각적 도큐멘트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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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 책을 보면서

-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육체에 대해 아는것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육체에 대해 가지고 있는 표상들에 다름 아니다. 해부학 도판에 그려져 있는 저 익명의, 열려  속이 까발겨진 육체는 지금까지의 인류의 인간 육체에 대한 지식들의 소산이다. 우린 우리 스스로가 들여다보지 못하는 우리 육체 속의 모습을, 해부학자들에 의해 열려 들여다 보여진 수많은 이전의 육체들이 제공한 지식에 의거해 확인한다. 내가 몸이 아파 병원에 가거나, 때에 따라 수술을 받아야 할 경우에 나의 육체는 이전 시대의 저 죽은 육체들이 제공한, 또 그를 바라보던 특정한 에피스테메적 시각들에 의해 구성된 육체에 대한 지식들에 의해 관찰되고, 절개되거나 봉합될 것이다.

-                            내 뱃속에 들어있을 아니 들어 있어야할 ! – , , 창자, 쓸개, 허파, 심장, 방광 들을 나는, 마치 사용 설명서에 나와있는 부품목록을 통해 조립식 프라모델의 모든 부품들이 다 있는지를 확인하듯, 해부학 도판을 보며 확인한다. 한 개의 프라모델을 완성하기 위해선 그에 필요한 모든 부품들이 다 있어야 하듯, „라는 육체가 온전하게 정상적으로 존속하기 위해선 그 속의 모든 기관들이 다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나, 문제는 내 육체 속에 존재해야할 기관들을 내가 플라모델의 부품들처럼 하나 하나 직접 찾아 만져보며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 몸 속에 저 모든 복잡한 부품들이 빠짐없이 다 들어있을 것이라는 걸 우린 그리하여 연역적 가설을 통해 확인할 수 밖에 없다. 가설 : 내 몸에 필요한 기관들이 다 존재해야만 내 몸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것이다. 관찰 : 내 몸은 현재 그럭저럭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결론 : 따라서, 내 몸 속엔 필요한 기관들이 다 존재할 것이다! 

-                            우리 몸 속의 보이지 않는 기관들의 존재를 저 불만족스러운 연역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이미 육체의 타자화 Entfremdung’ 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구입한 노트북과 테레비젼의 부품들이 제대로 다 있으리라는 걸 스스로 확인 할수 없듯 우린 우리가 죽을 때까지 채워 들고 다니는 내 몸 속 기관들의 존재를 우리 스스로 확인할 수 없다! 나아가 그것들은 전적으로 나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수리보수를 타인에게 맡겨야만 하는, „내 속에 있으나 내가 장악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런 점에서 내 몸 속의 심장, 허파, , 대장, 방광 등은 누군가에 의해 내 몸속에 투입되어 그 속에서 기생하고 있는 기생충들과도 같다. 아니, 어쩌면 가 저 기관들에 빌붙어 생존하고 있는 기생충인가. 

-                            우리 몸 속의 보이지 않는 기관들의 존재는 내 육체의 기능으로부터 연역되어야만 한다. 내 육체가 큰 이상없이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나는 내 육체 속의 모든 기관들이, 이 해부도판에 나와 있듯, 전부다, 제대로 된 형태로, 적절한 위치에 놓여져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는 전기 청소기가 제대로 먼지들을 빨아들이는 한, 그 속에 모든 부품들이 제대로 다 달려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과 같다. 내 육체가 어딘가 조금이라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우리 몸 속에서 우릴 생존하게 하는 저 낯선 기관들의 포로가 된다. 혹시 내 간에 염증이 생긴 것이 아닐까, 내 뇌 속에 종양이 자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방광에 결석들이 자리잡고 있을까... 근대 이후 보급된 육체에 대한 수많은 지식들 건강상식, 조기징후, 병인 등 엔 그리하여 우리 육체 속에서 우릴 지배하고 있는 저 낯설은 기관들에 대한 두려움들이 배어있다. 우린 나의 간이, 위가, 대장이나 허파가 불러내는 조그만 목소리에도 늘 귀를 기울이며 그들의 동태를 살펴야 하는 허약하고 늙은 전제 군주다.  

-                            내 육체 속에서 호시 탐탐 반란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저 기관들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육체의 정상적인 기능과 작동을 위한 맹목적 건강의 신앙들을 갖게한다. 우리는 수많은 영양제와 건강 식품들을 먹고, 마시며, 헬스와 등산, 조깅과 수영 등으로 우리 육체를 혹사시키며 내 육체가 여전히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작동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한다.

-                             자신의 육체에 대한 저 두려움과 감시, 관찰은 현대의 에피스테메가 규정해 놓은 육체의 정상성이라는 그림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오늘날의 의학과 의학적 지식의 담론들이 규정해 놓은 정상성의 시각을 통해 우리 육체의 모든 증상과 징후들을 정상비정상으로 구분하고, 저 우리의 육체를 저 정상적 육체로 수렴시키기 위해 영양제나 영양 식품을 먹고 운동을 하고 수술을 받기도 한다. 우린 우리의 육체를 저 정상적 육체와 비교하고, 관찰하며 때론 불안해하거나 안심하기도 한다.

-                            해부학 도판은, 그림이라는 무척이나 의심스러운 매체로, 정상적 육체를 절개해, 그것의 평소엔 보이지 않는 내부를 객관화시켜 보여준다. 이렇게 그려져 있는 기관들과 내 육체 속의 내겐 보이지 않는기관들을 비교하면서, 우린 현대 세계가 마련해 놓은 정상적 육체에 대한 그림을 내면화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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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내게 보내 이메일에 추신 달려있다. „추신혹은 덧붙임 통해 쓰여진 것은, 이미 완결된 본문 속에는 통합되지 못한, 잊혀졌던 , 탈락되거나 결핍된 것들이다. 이렇게 잊혀지고, 탈락된 것들은, 그들 때문에 이미 완결적으로 쓰여진 본문을 다시 쓰거나 재구성해야 만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은, 다만 부록처럼, 물건을 사면 끼워주는 사은품처럼 그렇게 부착되어 있다.

 

-          누군가와 대화를 , 우리는 이미 우리가 내뱉은 속에서 말해지지 못하고 잊혀지거나, 빠진 것들을 나중에 추가시킨다. 그렇게 밖에 없는 이유는 말이 시간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뱉은 말에게로 돌아가 가운데를 비집어, 잊혀지거나, 빠진 말을 공간적으로 첨가시킬 없다. 그리하여 대화에 있어서의 추신은 구술적 대화가 갖는 시간성의 어쩔수 없는 결과다.  , 그런데 말이지...

 

-          아직 상대방에게 보내지지 않은 글에선 말이 가지고 있는 시간성의 제약은, 글쓰기의 매체가 지닌 공간적 조건들로 대체된다. 내가 이미 썼던 문장 속에 빠진 단어나, 내가 이미 써버렸던 편지 속에 들어가야 했으나 빠진 내용은, 이미 쓰여진 문장의 공간 속에선 이상 자신의 자리를 갖지 못한다. 속에서 빠지거나, 탈락되거나, 잊혀진 것들을 이미 쓰여진 속으로 통합하기 위해선,  이미 만들어진 문자의 공간적 질서가 재배치되어야 한다.

 

-          글과 문자의 공간적 질서를 재배치하는 일의 난이도는, 글을 썼던 매체의 특성에 따라 다르다. 내가 연필로 글을 쓰고 있었다면, 지우개로 이미 쓰여진 글의 공간을 비우고, 빠졌던 것들을 메꾸어 넣을 있다.  내가 만년필이나 볼펜, 아니면 타자기로 쓰고 있었다면, 글자들이 이미 차지해 버린 공간을 비우기 위해 과격한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글자들은 화이트로 생매장되거나, 그것이 박혀있는 지면으로 부터 뽑혀(긁어)져야 한다. 그도 아니라면 이미 쓰여진 종이를 찢어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글을 써야만 한다.      

 

-          추신이라는 글쓰기의 형식은 텍스트적 질서의 변용을 통해 문자적 공간의 재배치를 이루려는 시도다. 이미 쓰여진 문자들은 내버려 ,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어야 글자들을 이미 쓰여진 텍스트로 부터 형식상 독립시킨다. 이미 쓰여진 글자들과, 속에 들어갔어야 , 그러나 잊혀지거나 탈락된, 빠진 것들은 지면의 서로 다른 공간으로 배치되고, 이를통해 이미 쓰여진 글과 쓰여졌어야 하는, 그러나 탈락된 것들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이 이루어진다. 

 

-          글쓰기의 새로운 매체 컴퓨터는 이미 쓰여진 글이 갖는 불가역성의 무게를 탈물질화시켰다. 컴퓨터를 통해 우린 언제든지, 쓰여진 글을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어려움 없이, 제거해 버릴 있다. 쓰여진 ( 입력된!) 글자들 속에 잊혀지거나 탈락된 것들은, 다만 동일한 손가락 운동만을 통해 화면에 어떤 흉터도 남기지 않은채, 수도없이 통합될 있다. 이를통해 컴퓨터를 통한 글쓰기에선 사실상 추신이라는 독립된 글자들의 형식은 불필요해졌다.  

 

-          이메일의 끄트머리에 쓰여진 추신, 그래서, 디지털 글쓰기 시대에 남아있는 이전 시대 글쓰기의 흔적이다. 흔적은 마치 컴퓨터로 쓰여진 글이, 만년필이나 타자기로 쓰여지던 글처럼 공간적 불가역성에 종속되어 있다는, 다시말해 자판으로 입력된 글자들이 언제든지 똑같은 모습으로 생겨나고 지워질 있는 픽셀들이 아니라, 마치 지워지지 않는 잉크로 지면 위에 박힌 물질인 듯한 인상을 준다. 누군가에게 보내는 이메일에 추신 다는 사람은, 모니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면서 손으로 글자의 육체적 일회성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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