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 2 1 "무릎 위에 큰 가방을 올려놓은 채 울면서 어두워져 가는 거리를 지나 역으로 향했다"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를 읽은 독자들은, 그렇게 모스크바에서 베를린으로 돌아온 벤야민의 이후의 삶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궁금해 할 지도 모른다. 근 석달간의 일기를 통해 모스크바에서의 벤야민의 하루 하루를 쫓고, 그의 생각과 감정과 생활을 들여다 볼 수 있었던 우리들에게, 저 2월 1일 이후 벤야민의 삶은, 여전히 저 모든 숫자와 사실과 연표 속에서 추상적이고, 어두우며, 지리한 익명적 기간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선, 시간과 능력이 허락한다면 다음 글에서도, 나는 모스크바에서 보낸 석달 이후의 벤야민의 삶을 저 어둡고 지리한 숫자와 연표들로부터 발굴해내어, 그를 우리의 하루 하루의 삶처럼, 그리고 <모스크바 일기>에서의 그것처럼, 살아있고, 느끼며, 생각하는 인간의 삶으로 만들어 보려고 시도하려 한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벤야민이 한동안 독감에 걸려 앓았어야 했다는 것을, <모스크바 일기>를 읽은 독자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건, 벤야민이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모스크바를 떠나기 전날 추위에 떨며 구경했던 수도원에서 얻은 것이었다.  그 사이에 그는 베를린에 도착한,  모스크바에서 떠나기 전 부쳤던 짐을 받았을 것이다. 거기엔 그가 모스크바 시내를, 떠듬 떠듬, 실수와 추위와 슬픔에 차서 돌아다니다가 구입했던 장난감, 우편엽서, 그리고 검은 칠을 한 상자,  그리고 어쩌면 아샤의 친구, 벤야민이 호의적으로 보았던 그녀 - 이름이 뭐였더라? - 에게 받았던 작은 칼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이 모두가 저 먼 러시아 대륙을 거쳐 다 제대로 도착했을까. 어쨋든 수집가 벤야민은, 소포로 도착한 저 물건들을 하나 하나 열어보며, 다시 그 물건들과 결합되어 있었을 모스크바에서의 추억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두 달 정도의 기간을 쉬면서, 독감에서 어느정도 몸을 회복한 벤야민은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부터 시작하고 있었던 프르스트 번역 작업을 계속 진행해야 했다. 그를 위해 그는 4월 1일 파리로 떠난다.  파리시  Avenue du Parc Montsouris 4 번지에 있는 호텔 Hotel du Midi에서 벤야민은 '창가 방'에 장기 투숙하면서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부터 번역 작업을 해왔고, 이제 글쓰는 작업을 위해 늘 '장소와 도구들'을 까다롭게 가리는 벤야민은 이전에 자신이 작업을 해왔던 바로 그 방을 고집한다.  그리고 그 방에서 그는 그해 10월 20일까지 투숙하며 번역일을 계속했다.  

 

물론, 그 사이 저 "여행 중독자" 벤야민이 계속 파리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그해 6월 5일은 프랑스 투롱 근처에 있는 Pardigon을, 같은 달 15일엔 Nizza를, 그리고 저 '행운의 도시' 니짜에서 룰렛 게임을 통해 딴 돈으로 6월 21일엔 비행기를 타고 코르시카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이해 12월 18일 벤야민은, 첫번째 하시시 프로토콜을 쓴다.  이미 이전부터 프로이드의 무의식 이론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스스로 하시시를 투약하고 나서 그를통해 저 초자아의 억압으로 부터 풀려난 무의식이 어떤 언어를 말하는지를 기록하는, 약물 실험을 시작한 것이다. 벤야민의 이하시시 프로토콜은 이로부터 1934년 5월까지 계속 이어진다.  1940년 스페인 국경에서 벤야민이 극약을 먹고 자살하는 방법을 택한 것도 이런 계속적인 하시시 프로토콜을 통해 익숙해진 약물 복용과도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는 이미 몇년 전부터 자살을 위한 약물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1928년은 벤야민에겐 사실상 아주 생산적인 해였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그는 이해에 저 유명한 <파사지 베르크>의 계획을 세우고 그에 "파리의 파사지"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리고 이 해 1월엔 또한 벤야민의 대표적인 두 저서 <독일 비가극의 기원>과 <일방 통행로>가 출간되기도 했다.  (모스크바에서 벤야민은 아샤에게 아직 출간되지 않았던 '일방 통행로'의 구절들을 읽어주고, 그 표지 그림을 아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는 걸 우린 <모스크바 일기>를 통해 알고있다. )

  

알려져있다시피, 거의 동시에 출판된 책은, 표지와 내용, 문체와 작업 방식에 있어서 크게 상반된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단 한가지 점에선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두 책 모두 벤야민이 사랑하던 여인들에게 헌정되었다는 것이다. 첫번째 책은 자신의 부인이자, 이후 이혼하게 되는 도라 벤야민에게, 두번째 책, 일방통행로는 <모스크바 일기>의 또 다른 주인공 아샤에게다.  이 책을 출판하는 것과 동시에 벤야민은 자신이 계획한 <파리의 파사지> <일방 통행로> 후속편이 것을 예고한다.

 

이해 2 17 벤야민은 앙드레 지드와의 두 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하고 이를 <문학세계> 싣는다. 그는 이후에도 앙드레 지드와의 이 인터뷰를 스스로 자랑스러워했었다. 이해 3월엔 베를린의 서점 Potsdamer Bruecke에서 벤야민이 출판한 책들을 주제로 전시회가 개최되는데, 바로 여기에 벤야민의 친구 여동생이었던 조각가 Jula Cohn 벤야민의 두상을 제작해 선물한다. 그녀는 도라 벤야민, 아샤 라시스와 더불어 벤야민의 삶에 영향을 미쳤던 세번째 여인이기도 했다.

 

5 31일, 결국은 거절당하고 말았던 자신의 교수 자격취득 논문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던 삼촌 Arthur Schoenflies가 사망했다. 그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크프르트를 방문한 벤야민은 6 2 그곳에서 아도르노를 만난다. 이후 아도르노와의 오랜, 복잡하고도 긴 관계가 바로 이날 시작한다. 벤야민은 아도르노에게 자신이 번역한 <Tableaux Parisiens> 헌정했다. 프랑크프르트에서 베를린까지는 독일에서 제일 빠른 고속전차  ICE로도 근 8시간이 걸린다. 당연히 당시에는 이보다 더 걸렸을 것이다. 벤야민은 저 먼 여행을 한꺼번에 기차안에서 보내기 보다는 오는 길, 베를린에서 가까운 다른 도시를 방문하는데 본낸다. 이때 방문했던 바이마르에 대해 그는 자신의 <도시의 상들>에서 기록하고 있다. 

 

9 20 벤야민은  저 조각가 여인 Jula Cohn을 만나기 위해 Lugano 여행을 떠나고, 거기서 다시 Genua Marseille를 방문한다.  모스크바에서 도시에 대한 글들에서 이후의 작업의 가능성을 발견한 그는 이 두 도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인상을 기록한 글을 남긴다. 9월 29일 마르세이유에서 벤야민은 하시시 복용실험을 계속한다.

 

10 7 벤야민은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달, 모스크바에서 약속한대로 아샤가 베를린을 방문한다.  <모스크바 일기>를 읽었던 독자는, 베를린을 방문한 아샤에 대해 벤야민이 느꼈을 저 복잡한 감정 상태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벤야민은 그녀를 원하고 있었지만, 또 한편으론 그녀의 공격성과 히스테리적 짜증, 혁명적 낭만주의 뒤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던 속물성을 감지하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혁명활동'을 하면서도, 유럽 사회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했던 그녀는, 이제 벤야민이 있는 베를린을 방문했고, 그리하여 모스크바에서 헤어진 이 두 사람은 근 1년 반 후에 베를린에서 다시 만난다.

 

모스크바에서 약속했던 것처럼, 벤야민은 그녀를 위해 새로 방을 얻는다.  이들이 11중순 부터 다음해 1월말까지 함께 살았던 곳은 베를린 Duesseldorf 거리 42번지다. 이곳은 벤야민이 이전에 살고있었던 곳과도 그렇게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 베를린 출신의 벤야민이 태어났던곳, 그리고 몇 차례의 이사를 통해 옮겨 살았던 곳들은 모두 한 구역 Chrarlottenburg 에 속해있었다. 

 

 

 

 

 

 

 

 

 

 

 

 벤야민과 아샤가 석달 동안 함께 살았던 이 집은 여전히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이들이 함께 살았던 방은 이 건물 3층, 한국식으로는 4층에 있었다. 아래 사진에서 발콘 창가에 꽃들을 가져다 놓은 곳이 그곳이다.


 이곳에서 이들의 삶은 행복했을까.  유감스럽게도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이 집의 위치에서부터 예상할 수 있다. 산책을 좋아하는 벤야민에게 아샤와 함께 살았던 이 곳은 그렇게 쾌적한 곳은 아니었다. 뒤셀도르프 거리 42번지는 그 자체로도,  베를린의 다른 거리들에 비하면 무척이나 긴 거리였고, 그가 살던 집에서 나와 왼쪽으로 약 30미터 정도만 나가면 그보다 더 큰 자동차 도로가 나온다. 그곳을 지나다니던 차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은, 그렇지 않아도 예민한 벤야민과 아샤의 베를린 생활을 그리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벤야민이 살았던 젤렌도르프의 빌라에서와는 달리 여기선, 산책을 즐길만한 숲이나 공원이 그렇게 가까이 있지도 않다.

모스크바에서 벌어졌던 이 두 명의 복잡한 연인 이의 긴장감은 이들이 이 곳에서 함께 사는 동안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고, 이는 이들 재회한 연인들이 이 곳에서 그렇게 다감하고 아기자기하게만 살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걸 짐작케 한다.  이 시기 벤야민은 숄렘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린 여기서 개와 고양이처럼 살고있다" 고 전한다.  그렇지 않아도 이 둘의 관계를 못마땅해하던 숄렘이 <모스크바 일기>에서 이들의 관계에 대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불평하는 것도 이유가 없지 않았다. 

이곳 42번가 건물의 출입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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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8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김남시 2006-02-09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렇습니다. 위 글은 독자들에 대한 일종의 '애프터 써비스'인 셈이지요^^
 

벨이 울린 수화기를 받아들면서 우린 여보세요라고 말한다. 마치 상대를 향해있는 것 같은 이 모호한 언어행위는, 그러나 사실 아직 상대와의 어떤 관계도 맺고있지 않은, 수취인 불명의 발화다. 이 말은 다만 수화기를 들은 내가 지금, 여기현존하고 있다는 것만을 지시하는, 전적으로 주관적인 시그널이다. ‘여보세요라는 을 통해 나는 나의 현존을 지시하며, 내가 말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을 뿐이다. 전적으로 나에게만 속하는 그 말은, 내게 전화를 건 모든 가능한 존재자들에게 다만 나의 현존만을 알리는 순수한 주관적 언어다.

 

여보세요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주관적 성격은 그 말을 하는 순간의 내게, 전화기 저쪽의 보이지 않는 상대가 전혀 규정되지 않은 상태라는 데서도 드러난다. 내가 여보세요라는 말을 통해 나의 현존과 나의 « 말할수 있음 »을 알리는, 그러나  아직 나의 여보세요에 응답하지 않는 저 전화기 바깥의 상대는, ‘지금, 거기에 현존하고 있지 않을 수도, 혹은 말을 하지 못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 그는 어쩌면 자동 기계일지도, 외계인 혹은 유령일지도 모른다. 그가 설사, 나처럼 말할 수 있는 한 명의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가 나의 여보세요에 아직 반응하지 않는 한 그는 어떤 육체적 지표를 통해서도 신원확인 되지않는 익명의 대상이다. 그는 여보세요라는 말을 통해 전달되는 나의 현존만을 확인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릴수도, 침묵해 버릴수도, 아니면 버럭 소리를 지를 수도 있다. 이 모든 상대의 반응을 여보세요를 말하는 순간의 나는 결코 예상하지 못한다. 나는 여보세요라고 말하고는, 무력하게 그저 상대의 반응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아직 반응하기 전의 저 상대는 내게 절대적 타자. 그와 나와의 커뮤니케이션 가능성은 전적으로 그에게 달려있다.

 

상대가 나의 여보세요에 언어적으로 반응하는 순간에 비로소, 나의 여보세요는 구체적인 수취인을 얻는다. 처음엔 전적으로 나의 현존과 말할 수 있음만을 지시하던 주관적 시그널은, 그를통해, 말하는 두 주체 사이의 대화를 선도했던 최초의 호출행위가 된다. 그 반응을 통해 비로소 나는, 상대가 나와같은 말할 수 있는 존재로 전화기 저 편에 현존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나아가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지인인지 낯선이인지, 내게 호의적인지 공격적인지 등, 그와의 구체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진입하기 위한 나의 모드를 결정한다.     

 

전화는 이처럼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에 무규정적 공백의 순간을 만들어내었다. 상대와의 대면적 커뮤니케이션이 그의 육체적 현존을 전제하고 따라서, 그의 육체적 지표 성별, 나이, 인종, 친소 여부 등 를 통해 알려지는 커뮤니케이션 지평의 선 규정성을 제공해주었다면, 전화는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이전의 선이해의 가능성을 차단시켰다. 그로인해 전화는 마치 준비되지 않은 채 불쑥 맞이해야 하는 낯선 침입과 같은 효과를 갖는다. 우린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채 걸려오는 전화를,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늘 받아야만한다. 장난 및 음란전화, 전화를 통한 무차별 광고 등은 전화 커뮤니케이션이 만들어 놓은 저 공백의 순간을 악용하는 사회적 결과물이다.

 

걸려오는 상대의 전화번호가 찍히는 핸드폰과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화상 전화 등은 이를 극복하려는 기술적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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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Frage der Laienanalyse (1926)[1] 내가 읽었던 프로이드의  가장 흥미로운 글이다. 무엇보다 여기서 프로이드는 자신의 이론 체계를 그에 문외한인 일반인 대화 상대자를 향해 알기쉬운 대화체로 전달하고 있으며, 그를통해 그의 다른 글들에서는 모호하고 분명하지 않았던 입장들이 여기선 뚜렷하게 가시화되어 등장한다. 프로이드 자신과 가상적인 상대방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 글은 다른 어느 글보다 작가로서의 프로이드의 능력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데, 그건 명의 대화를 어떤 실제대담보다 긴장감있고 생생하게 전개시키고 있는 프로이드의 문필력에서 기인한다.

여기 등장하는 프로이드의 대화 상대자는, 플라톤 대화편의 생기없는 대화 상대자들 처럼 그저 복잡한 이론을 한마디씩 나누어 이야기하는 화자의 말에 추임새만 넣어주다 결국 입장에 통합되어 버리고 마는 Jasager 아니다. 중립적 입장의 대화 상대자“ Unparteiischer 시간이 지나갈수록 오히려 점점 자신의 뚜렷한 개성과 입장을 드러내면서, 대화상대인 프로이드를 도발하고 그가 자신의 질문을 피해가려는 기색이 보이면 즉시 교정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이들 사이의 긴장관계는 결국 날카로운 감정적 갈등 상황으로까지 발전하는데, 이는 상대의 도발적 추궁에 지친 텍스트 속의 프로이드가 당신은 중립적 상대자로서의 의무를 지키지 않고있다 항변하자, „ 정도로 나에대한 신뢰가 흔들린다면, 도대체 나를 대화 상대자로 선택했는가.“라는 상대자의 당당한 답변 속에서 절정에 달한다.  

무엇보다 우릴 즐겁게 하는건, 우리가 진작 프로이드에게 따져묻고 싶었으나 감히 하지 못했던 질문들을 겁없는 문외한이 정신분석의 창시자에게 던져대는 통쾌한 모습을 보는 것이다. 정신분석자는 도대체 환자를 데리고 무얼하는 것이냐라는 첫번째 질문에서 출발한 그는, 분석적 치료가 결국 환자와의 대화에 다름아니라면 카톨릭의 고해성사나 일반상담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느냐, 그게 어떤 치유효과를 갖는다는 것인가, 정신병을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가 있는데 도대체 분석가는 필요한 것이냐, 별다른 의학적 지식도 필요없는 분석은 결국 아무나 있는 아니냐, 분석 치료 기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는 이유는 뭐냐, 분석자와 환자사이에서 은밀한 성적 대담이 오고 간다던데 그건 어떻게 일이냐, 환자의 다양한 증상의 해석’Deutung이라는게 결국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걸면 귀걸이가 아닌가, 분석 치료라는게 객관적 지식과 방법보다는 결국 분석자의 개인적 영향력에 좌우되는 아니냐, 노이로제 환자가 의사에게 사랑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는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거냐, 당신의 이론을 위해5살짜리 꼬마 („한스!“) 데리고 실험했다던데 그래도 되는거냐 등의 그야말로 주옥같은질문들을 던지고, 그에 대한 프로이드의 답변을 이끌어낸다.

나아가 멋진 대화 상대자는 구체적으로, 정신분석 기법은 어디서 배울 있는지 (이에대해 프로이드는 베를린과 비인의 정신 분석연합 Psychoanalytishe Vereinigung E. Jones 박사에 의해 설립된 런던의 교육기관을 소개한다.), 교육기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 2!) 같은 실천적 질문을 던지는 것도 잊지 않는다. 훌륭한 질문자에 힙입어 프로이드는 정신분석 전문대학 psychoanalytische Hochschule 수립하려는 자신의 – „아직 환상적으로 들릴지는 모르지만“ -  야망과 자신이 생각하는 교과 과정을 소개하기도 한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 전문대학에선 학생들은 심층 심리학’ Tiefenpsychologie 과목으로, 생물학 입문, 성생활 일반론, 정신병 일반론 아니라, 문화사, 신화학, 종교 심리학과 문학을 배워야 한다.

글은 또한 프로이드를 둘러싼, 궁금했던 다른 인물들의 현황과 동정도 전해준다. 프로이드는 20년전 자신의 유명한 아동 정신분석 이론의 실험 대상이었던 5살짜리 아이가 – „꼬마 한스“ (1909) ! – 건강하고 능력있는 젊은이가 되었고, 심각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갖긴 했어도 문제없이 klaglos사춘기를 통과했다 전하고,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몇몇 예전의 자기 제자들이 인간 사회를 섹슈얼리티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요구에 부응해, 명은 성적인 것을 추상적이고, 신비로운 Mystisches, 다른 명은 성생활을 권력과 지배에 대한 요구가 펼쳐지는 장으로 설명함으로써 매우 호응을 얻었다 전한다. 우리는 제자들이 1927 <오르가즘의 기능> 출판했던 빌헬름 라이히이와 융이라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있다.

 이글엔 무엇보다 전쟁과 관련된 메타포들이 많이 등장한다. 전선과 후방의 메타포를 통해 – „결정적인 것은 물론 적이 얼마나 가까이 있느냐 하는 것인데, 정신적 삶에 있어서 그것은 외부세계가 얼마나 가까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 외부세계와 접하는 Ich 후방으로서의 Es 상호관계를 설명하거나, 분석적 치료를 오래 걸리게 하는 환자의 심리적 저항, 적의 치열한 저항과 맞닥뜨린 군대에 비유하는  – „적의 저항이 펼쳐지는 곳에선 평시라면 전차로 몇시간만에 통과할 있는 구역을 군대는 동안이나 지체해 있을수도 있다. „ – 대목들이 그것이다. 1 대전이 지난지 얼마 안된 시기에 쓰여진 글에서 우리는 전쟁의 체험이 위대한 메타포리커 Metaphoriker 프로이드를 통해 정신분석 이론의 서술 속으로까지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1926년의 프로이드는 글에서 자신의 정신분석 이론이 단지 정신의학  교과서의 장으로 삼켜져 버리는’ verschluckt werden것을 우려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심층 심리학은 이보다는 나은 운명을 맞이해야 하며 바라건데 그렇게 것이다. 심층 심리학, 정신적 무의식의 이론 Lehre vom seelischen Unbewussten 인간 문화와 예술, 종교 그리고 사회 질서와 같은 인간의 위대한 제도들의 발생사를 다루는 모든 학문들에 필요 불가결한 것이 있을 것이다....분석을 노이로제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하는 다만 하나의 적용일 뿐이다. 추측컨데 미래엔 이것이 제일 중요한 적용 분야가 아니라는 밝혀질 것이다...다양한 인문학 대변자들이 정신분석의 방법과 관점들을 그들의 대상에 적용하기 위해 정신분석을 배워야 한다면, 그건 정신분석 문헌들에 나와있는 결과들에 매달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에게 열려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분석을 이해하는 배워야만 하는데, 이건 그들이 스스로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이루어진다.“ 

2006년의 우리는 프로이드의 모든 추측과 희망들이 마지막 한가지만 놓고는 -  거의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고있다.



[1] Sigmund Freud : Darstellungen der Psychoanlyse, Fischer Taschenbuch Verlag, 1982. S.139-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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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 2 1 "무릎 위에 큰 가방을 올려놓은 채 울면서 어두워져 가는 거리를 지나 역으로 향했다"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를 읽은 독자들은, 그렇게 모스크바에서 베를린으로 돌아온 벤야민의 이후의 삶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궁금해 할 지도 모른다. 근 석달간의 일기를 통해 모스크바에서의 벤야민의 하루 하루를 쫓고, 그의 생각과 감정과 생활을 들여다 볼 수 있었던 우리들에게, 저 2월 1일 이후 벤야민의 삶은, 여전히 저 모든 숫자와 사실과 연표 속에서 추상적이고, 어두우며, 지리한 익명적 기간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선, 시간과 능력이 허락한다면 다음 글에서도, 나는 모스크바에서 보낸 석달 이후의 벤야민의 삶을 저 어둡고 지리한 숫자와 연표들로부터 발굴해내어, 그를 우리의 하루 하루의 삶처럼, 그리고 <모스크바 일기>에서의 그것처럼, 살아있고, 느끼며, 생각하는 인간의 삶으로 만들어 보려고 시도하려 한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벤야민이 한동안 독감에 걸려 앓았어야 했다는 것을, <모스크바 일기>를 읽은 독자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건, 벤야민이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모스크바를 떠나기 전날 추위에 떨며 구경했던 수도원에서 얻은 것이었다.  그 사이에 그는 베를린에 도착한,  모스크바에서 떠나기 전 부쳤던 짐을 받았을 것이다. 거기엔 그가 모스크바 시내를, 떠듬 떠듬, 실수와 추위와 슬픔에 차서 돌아다니다가 구입했던 장난감, 우편엽서, 그리고 검은 칠을 한 상자,  그리고 어쩌면 아샤의 친구, 벤야민이 호의적으로 보았던 그녀 - 이름이 뭐였더라? - 에게 받았던 작은 칼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이 모두가 저 먼 러시아 대륙을 거쳐 다 제대로 도착했을까. 어쨋든 수집가 벤야민은, 소포로 도착한 저 물건들을 하나 하나 열어보며, 다시 그 물건들과 결합되어 있었을 모스크바에서의 추억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두 달 정도의 기간을 쉬면서, 독감에서 어느정도 몸을 회복한 벤야민은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부터 시작하고 있었던 프르스트 번역 작업을 계속 진행해야 했다. 그를 위해 그는 4월 1일 파리로 떠난다.  파리시  Avenue du Parc Montsouris 4 번지에 있는 호텔 Hotel du Midi에서 벤야민은 '창가 방'에 장기 투숙하면서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부터 번역 작업을 해왔고, 이제 글쓰는 작업을 위해 늘 '장소와 도구들'을 까다롭게 가리는 벤야민은 이전에 자신이 작업을 해왔던 바로 그 방을 고집한다.  그리고 그 방에서 그는 그해 10월 20일까지 투숙하며 번역일을 계속했다.  

 

물론, 그 사이 저 "여행 중독자" 벤야민이 계속 파리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그해 6월 5일은 프랑스 투롱 근처에 있는 Pardigon을, 같은 달 15일엔 Nizza를, 그리고 저 '행운의 도시' 니짜에서 룰렛 게임을 통해 딴 돈으로 6월 21일엔 비행기를 타고 코르시카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이해 12월 18일 벤야민은, 첫번째 하시시 프로토콜을 쓴다.  이미 이전부터 프로이드의 무의식 이론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스스로 하시시를 투약하고 나서 그를통해 저 초자아의 억압으로 부터 풀려난 무의식이 어떤 언어를 말하는지를 기록하는, 약물 실험을 시작한 것이다. 벤야민의 이하시시 프로토콜은 이로부터 1934년 5월까지 계속 이어진다.  1940년 스페인 국경에서 벤야민이 극약을 먹고 자살하는 방법을 택한 것도 이런 계속적인 하시시 프로토콜을 통해 익숙해진 약물 복용과도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는 이미 몇년 전부터 자살을 위한 약물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1928년은 벤야민에겐 사실상 아주 생산적인 해였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그는 이해에 저 유명한 <파사지 베르크>의 계획을 세우고 그에 "파리의 파사지"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리고 이 해 1월엔 또한 벤야민의 대표적인 두 저서 <독일 비가극의 기원>과 <일방 통행로>가 출간되기도 했다.  (모스크바에서 벤야민은 아샤에게 아직 출간되지 않았던 '일방 통행로'의 구절들을 읽어주고, 그 표지 그림을 아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는 걸 우린 <모스크바 일기>를 통해 알고있다. )

  

알려져있다시피, 거의 동시에 출판된 책은, 표지와 내용, 문체와 작업 방식에 있어서 크게 상반된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단 한가지 점에선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두 책 모두 벤야민이 사랑하던 여인들에게 헌정되었다는 것이다. 첫번째 책은 자신의 부인이자, 이후 이혼하게 되는 도라 벤야민에게, 두번째 책, 일방통행로는 <모스크바 일기>의 또 다른 주인공 아샤에게다.  이 책을 출판하는 것과 동시에 벤야민은 자신이 계획한 <파리의 파사지> <일방 통행로> 후속편이 것을 예고한다.

 

이해 2 17 벤야민은 앙드레 지드와의 두 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하고 이를 <문학세계> 싣는다. 그는 이후에도 앙드레 지드와의 이 인터뷰를 스스로 자랑스러워했었다. 이해 3월엔 베를린의 서점 Potsdamer Bruecke에서 벤야민이 출판한 책들을 주제로 전시회가 개최되는데, 바로 여기에 벤야민의 친구 여동생이었던 조각가 Jula Cohn 벤야민의 두상을 제작해 선물한다. 그녀는 도라 벤야민, 아샤 라시스와 더불어 벤야민의 삶에 영향을 미쳤던 세번째 여인이기도 했다.

 

5 31일, 결국은 거절당하고 말았던 자신의 교수 자격취득 논문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던 삼촌 Arthur Schoenflies가 사망했다. 그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크프르트를 방문한 벤야민은 6 2 그곳에서 아도르노를 만난다. 이후 아도르노와의 오랜, 복잡하고도 긴 관계가 바로 이날 시작한다. 벤야민은 아도르노에게 자신이 번역한 <Tableaux Parisiens> 헌정했다. 프랑크프르트에서 베를린까지는 독일에서 제일 빠른 고속전차  ICE로도 근 8시간이 걸린다. 당연히 당시에는 이보다 더 걸렸을 것이다. 벤야민은 저 먼 여행을 한꺼번에 기차안에서 보내기 보다는 오는 길, 베를린에서 가까운 다른 도시를 방문하는데 본낸다. 이때 방문했던 바이마르에 대해 그는 자신의 <도시의 상들>에서 기록하고 있다. 

 

9 20 벤야민은  저 조각가 여인 Jula Cohn을 만나기 위해 Lugano 여행을 떠나고, 거기서 다시 Genua Marseille를 방문한다.  모스크바에서 도시에 대한 글들에서 이후의 작업의 가능성을 발견한 그는 이 두 도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인상을 기록한 글을 남긴다. 9월 29일 마르세이유에서 벤야민은 하시시 복용실험을 계속한다.

 

10 7 벤야민은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달, 모스크바에서 약속한대로 아샤가 베를린을 방문한다.  <모스크바 일기>를 읽었던 독자는, 베를린을 방문한 아샤에 대해 벤야민이 느꼈을 저 복잡한 감정 상태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벤야민은 그녀를 원하고 있었지만, 또 한편으론 그녀의 공격성과 히스테리적 짜증, 혁명적 낭만주의 뒤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던 속물성을 감지하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혁명활동'을 하면서도, 유럽 사회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했던 그녀는, 이제 벤야민이 있는 베를린을 방문했고, 그리하여 모스크바에서 헤어진 이 두 사람은 근 1년 반 후에 베를린에서 다시 만난다.

 

모스크바에서 약속했던 것처럼, 벤야민은 그녀를 위해 새로 방을 얻는다.  이들이 11중순 부터 다음해 1월말까지 함께 살았던 곳은 베를린 Duesseldorf 거리 42번지다. 이곳은 벤야민이 이전에 살고있었던 곳과도 그렇게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 베를린 출신의 벤야민이 태어났던곳, 그리고 몇 차례의 이사를 통해 옮겨 살았던 곳들은 모두 한 구역 Chrarlottenburg 에 속해있었다. 

 

 

 

 

 

 

 

 

 

 

 

 벤야민과 아샤가 석달 동안 함께 살았던 이 집은 여전히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이들이 함께 살았던 방은 이 건물 3층, 한국식으로는 4층에 있었다. 아래 사진에서 발콘 창가에 꽃들을 가져다 놓은 곳이 그곳이다.


 이곳에서 이들의 삶은 행복했을까.  유감스럽게도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이 집의 위치에서부터 예상할 수 있다. 산책을 좋아하는 벤야민에게 아샤와 함께 살았던 이 곳은 그렇게 쾌적한 곳은 아니었다. 뒤셀도르프 거리 42번지는 그 자체로도,  베를린의 다른 거리들에 비하면 무척이나 긴 거리였고, 그가 살던 집에서 나와 왼쪽으로 약 30미터 정도만 나가면 그보다 더 큰 자동차 도로가 나온다. 그곳을 지나다니던 차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은, 그렇지 않아도 예민한 벤야민과 아샤의 베를린 생활을 그리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벤야민이 살았던 젤렌도르프의 빌라에서와는 달리 여기선, 산책을 즐길만한 숲이나 공원이 그렇게 가까이 있지도 않다.

모스크바에서 벌어졌던 이 두 명의 복잡한 연인 이의 긴장감은 이들이 이 곳에서 함께 사는 동안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고, 이는 이들 재회한 연인들이 이 곳에서 그렇게 다감하고 아기자기하게만 살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걸 짐작케 한다.  이 시기 벤야민은 숄렘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린 여기서 개와 고양이처럼 살고있다" 고 전한다.  그렇지 않아도 이 둘의 관계를 못마땅해하던 숄렘이 <모스크바 일기>에서 이들의 관계에 대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불평하는 것도 이유가 없지 않았다. 

이곳 42번가 건물의 출입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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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02-05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반가운 글이군요. 퍼갑니다. 고맙습니다. (__)

로드무비 2006-02-06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김남시 2006-02-07 0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Urblue 님, 로드무비님. 감사합니다. 이상하게도 책이 있는 곳에 이 페이퍼가 연결되어 뜨지 않아서 다시 올렸습니다.
 

박물관은 물건들의 대도시다. 거기엔 자신이 원래 속해있던 장소와 시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물건들이, 마치 태어나 살던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몰려든 실향민들처럼 모여있다. 자신이 있던 장소를 떠나 여기, 인위적이고 제도적인 장소 박물관에 모인 저 물건들은, 다만 명찰처럼 붙어있는 안내판을 통해서만 자신이 떠난 장소와 시간을 이야기한다. 태어나고, 속해있던 장소를 통해 특징지워져야 할 저 물건들의 정체성은 여기선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의 컨셉에 따른 새로운 사물의 질서 속에 재배치되어, 그 속에서 자신의 역할과 임무를 부여받는다.

도시에 살고있는 ‘장소를 잃은’ 사람들이 그래도 사투리를 통해 육체에 남겨진 자신의 장소의 흔적을 드러낸다면, 문외한인 우리에게 저 물건들의 육체는 그들 장소의 어떤 흔적도 말해주지 않는다. 박물관에 모인 저 물건들의 무장소성 Ortslosigkeit은 또한 그 물건들의 무시간성을 결합되어 있다. 원래의 장소에서라면 시간 속에서 변하고, 퇴색하고, 허물어지며 사라져갈 저 물건들은 여기 박물관에선 방습기와 전문적 처리를 통해 시간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 보존되어 있다. 서로 다른 시간, 나아가 서로 다른 시대의 수많은 물건들이 ‘지금과 여기’의 한 장소에 모여있음으로써 박물관은 저 무시간성의 특성을 배가시킨다.

박물관은 수십년, 아니 수백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을 지니고 있는 저 많은 물건들을 단 몇시간 동안에 일별할 수 있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과거의 시간들을 응축된 형태로 체험할 수 있게 해 준다. 며칠, 아니 몇십년에 걸쳐 일어난 이야기를 단 두시간 반에 응축해 보여주는 영화적 지각에 익숙해있는 우리에게 박물관은 저 장소를 잃은 다양한 시대의 물건들이 번갈아 가며 출연하는 무성영화관 같다.

 박물관의 물건들은 자신의 아우라를 박물관이라는 장소의 권위로부터 얻는다. 원래의 장소와 시간과 결부되어 있던 저 물건들의 아우라는 이제, 이 물건이 진품임을 보증해주는 박물관의 제도적 권위에 의해 생겨난다. 복제기술의 발달이 물건들을 자신의 원래의 장소와 시간으로부터 해방시켰고 그를통해 그와 결합되어 있던 아우라를 상실케 했다면, 이제 사람들은 그 복제품들과 구별되는 (혹은 구별되어야 할) ‘오리지널’을 박물관이라는 장소에 갖다 놓음으로써 물건들의 잃어버린 아우라를 박물관의 아우라를 통해 상쇄하려 했다. 박물관들은 그곳에 유명한 물건들의 ‘오리지널’이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통해 자신들의 권위와 아우라를 만들어내었고, 또 이렇게 생겨난 박물관의 권위와 아우라는 역으로 그곳에 소장되어 있는 물건들의 ‘진품성’을 강화시켜 주는 제도적 바탕이 된다. 런던의 대영 박물관, 파리의 루브르,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들은 그들이 소장하고 있는 ‘오리지널’을 통해 자신들의 권위와 아우라를 얻었고, 또 그를통해 그곳에 전시되고 있는 물건들의 진품성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킨다. 자신의 원래의 장소를 잃어버린 물건들은 이렇게, 박물관이라는 장소의 제도적 아우라를 통해 자신의 상실했던 아우라를 보상받는다.

사진과 화보, 인터넷 등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구경할 수 있는 물건들을 굳이 저 ‘유명한’ 박물관들에 가서 보고 싶어하는 우리들은, 우리처럼 자신의 장소와 시간을 잃어버린 물건들이 보여주는 커리어의 변신을 동경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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