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미켈란젤로의 모세 상에서 부터 시작한다. 신의 계율을 받아온 모세는 형제와 자식들이 황금 송아지를 경배하는 걸 바라보고 있다. 프로이드가 분석했듯, 금방이라도 그의 손에서 떨어질 듯 한 계율이 담긴 석판과 거칠게 수염을 감싸쥔 다른 손은 긴장감으로 가득차있다. 이 순간의 모세에겐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그는 망설이고 zaudern 있다. 망설임은 햄릿과 같은 인물을 비극적 운명에 빠뜨리는, 결단과 의지의 결핍이라고, 행동을 향한 용기와 에너지의 부족이라고 이야기되어왔다. 역사를 이루어왔던 건 망설임을 극복한 결정과 결단에 있다고, 그래서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다른 모든 이들이 망설이고 있을 때 내린 레닌의 결단력 덕분이었다고, 남들이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야말로 진정한 주권적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은 결정과 결단이 점점 더 소리높여 칭송되고 있는 오늘날 지금까지 부정적으로만 평가되어온 망설임을 재 평가하려고 한다. 여기서 망설임은 이전까지 진행되어오던 사건의 흐름을 중단시키고 우리의 예측을 벗어나는 "사건"의 생성을 향한 잠재력으로, 그 속에서 "행동과 장애, 행위와 근거, 법과 실행 사이의 비판적이고 위기적 관계가 응축되는"(25), "결정과 비 결정 사이에서의 능동적 머무름"(110)의 순간으로 파악된다. 그를통해 그 망설임이, 바틀비 Bartleby의 유명한 공식 "I would prefer not to..." 에서 처럼 어떻게 오히려 지배적 권력관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거기에 균열을 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Joseph Vogl :  Über das Zaudern. Diaphanes Verl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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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은 삶에의 의지가 결핍되고 고갈됨으로써 생겨난, 살아감의 피로, 절망으로 인한 자기파괴적 행동이라고 여겨진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가 본능적으로, 본성상 가지고 있는 자기보존 충동 거스리는 본성적인 반자연적인 파괴행위이며,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어려움이 있건 살아가야 한다는 삶에의 정언명령을 거스르는 반인륜적, 나아가 비도덕적 행위라고 비난된다. 절망, 파괴 등의 단어들과 결합되어 있는 자살이, 자살을 종교적 죄악으로 여기는 기독교 문화 속에서는 물론 이제 삶을,시민들을 살아가게 함으로써 그들의 권력을 유지시키는 생체 권력이 지배하는 오늘날까지 이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던 것은 이런 점에서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와는 다르게 생각할 수는 없을까? 오히려 자살은 스피노자가 „Conatus 통해, 니체가 권력에의 의지 통해 이야기했던, 나아가 들뢰즈가 욕망기계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했던 인간에게 존재하는 근원적인, 긍정적인 충동의 표현으로, 죽음이라는 삶의 마지막 경계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적극적 의지의 소산이라고 이해할 수는 없을까?

 

아메리의 <자신에게 손을 얹기. 자유사에 대한 디스쿠어스 Hand an sich legen. Diskurs über den Freitod, 1976> 이런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는 자살을 무엇인가의 결핍, 고갈에 의한 어쩔 없는 수동적, 패배적 귀결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순간에야 비로소 인간의 실존이 자신의 진정성과 강도 획득하는 적극적, 능동적 삶의 표현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한 점에서 아메리는 자기 자신을 살해한다 의미의 자살 Selbst-Mord“이라는 단어를 자유로운 죽음이라는 의미의 „Frei-Tod“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삶이나 혹은 사람을 죽이지 말라 절대적 정언명령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어기고 위반한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자살 아니라, „죽음을 향해 사는 Zum-Tode-hin-Leben“ 으로서의 자유사 Freitod  (24)이다.

 

자유사는 천연두처럼 우리가 그로부터 치유되어야 하는 어떤 병이 아니다.“ (40) 자유로운 죽음은 오히려, 인간이 생각할 없는 , 존재의 의미가 앞에서 완전히 무기력해지는 -의미 Un-Sinn’, ‚존재하지 않음 Nichtsein“이라는, 인간 존재에 근본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모순을, 자신의 행위를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끌어 안으려는, 인간에게만 가능한 실존적 결단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자살을 결심하게 되는 동기가 무엇인가가 아니다.  사랑을 얻지못한 젊은 가정부이건, 사업에 실패한 기업가이건,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믿는 장교이건, 오랫동안 우울증을 겪어왔던 지식인이건 자신의 삶을 끝내기 위한 최종적인 행위 - „뛰어 내리기 직전의 순간 Moment vor dem Absprung“ 죽음에 대한 (그와 동시에 삶에 대한) 태도에 있어 그들 모두를 절대적으로 동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살론을 위해 아메리는 소위 자연적 죽음과 비자연적 죽음이라는 일반적인 구분에 문제를 제기한다. 인간에게 있어 도대체 자연적죽음이라는건 무엇인가? 사고나 다른 불운을 통해서, 치유할 없는 때문에, 혹은 자살이 아니라 자신의 수명을 다할 때까지 살다가 죽는 것은 도대체 어떤 점에서 자연스럽다 것인가? 정말 그렇게 죽은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에 대해 습관적으로 이야기하듯, 어떤 편안한 휴식 맞이하게 것일까? 자신에게는 갑작스러울 밖에 없는, 그가 기다리고 있던 죽음이 정말 그에겐 그렇게 자연스럽게느껴졌을까? 자연적 죽음과 비자연적 죽음을 구분하고 자연적 죽음을 칭송하는 우리의 문화는 그를통해 죽음이라는 삶의 패러독스로부터 우리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아메리는, 그의 다른 책들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를 읽는 독자들을 몹시도 불편하게 만든다. 불편함은 그가, 우리가 생각하지 않으려고, 잊고 있으려고 노력하는 질문들을 의도적으로, 노골적으로 제기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다른 <늙음에 대하여Über das Altern. Revolte und Resignation, 1968>에서도 마찬가진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모두가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어도, 그에대해 실컫 이야기하고 나서는 그래도 힘냅시다라는 습관적 언사를 던져주는 것이 미덕으로 되어버린, 오늘날의 글쓰기와는 달리, 아메리는 현대 사회에서 늙는다는 것이 가져다 주는 처절한 패배, 자기소외 그리고 그것의 실존적 비극에 대해 아무 위로도 주지않는다. 오히려 그는 독자가 책을 덮어 버리고 담배를 피워물게 만들 정도로 가차없이, 늙음이, 현대 사회에서 늙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벌거벗은 상처를 서슴없이 이야기한다. 어느날 불현듯 늙음이 가져다 어떤 불편함을 감지해, 그를 위로받기 위해 그의 책을 읽는 독자는 오히려 그때까지 깨닫지 못했던, 늙는다는 것이 갖는 깊고도 어두운, 헤어나기 힘든 서늘한 깨달음에 빠진다. 늙어가는 사람에겐 시간이 살았던 시간과 살고있는/살아갈 시간 사이의 대칭으로 기울어 간다는 것을, 늙는다는 것은 자신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점점 낯설어져 가며, 타인들의 시선 속에서도 사라져간다는 것을, 점점 이해하기 힘들어지는 세계로부터 이탈해 가면서 결국엔 죽어감 Sterben 함께 살아감을 배워야 한다는 깨달음에.

 

그리고 거기엔 아무 희망도, 아무 위로도 없다. 늙음을 자신의 문제로 의식해가는 독자는 그의 책을 읽는 동안, 아니 그의 책을 읽고 나서 늙어가는 자신과 그것의 사회적, 실존적 결과와 아무 방패막 없이 고독하게 대면한다. 그의 언어는, 세상으로부터의 거리감을 만들어내고 그를통해 세상의 차가운 냉혹함으로부터 우릴 보호해주는 방어막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눈꺼풀을 벗기고 처절한 진실을 직시하게 하는 폭로의 무기이다. 아메리는 그의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자신의 대리인인 A 하여금 마지막 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한다. „A 사람들의 평온을 깨뜨리고, 타협을 폭로하고, 풍속화를 파괴시키고, 그를통해 자기 위안을 쫓아버리는 무엇인가를 행하였는가? 그는 그러기를 바란다. 살아갈 들은 하루 하루 쭈그러들어 말라져 간다. 그는 이제는 정말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욕망을 가졌다.“ (149)

독자들의 평온을 깨뜨리고, 어떤 위로도, 어떤 도피처도, ‚그래도…’ 라는 공허한 수사도 제공하지 않는, 한마디로 책을 읽는 사람들의 편안한 요구들과 타협하지 않는 그의 글은 그의 개인적인 삶의 여정에서 나온다. 1912 비인에서 태어난 유대인 아메리는 나찌가 권력을 잡기 시작하던 시기 사회주의 운동을 벌이다 체포된다. 동료 조직원들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게슈타포가 그에게 행했던 고문 체험을 그는 1964 출판한 <죄와 속죄의 저편. 위압당한 자의 극복 시도들.Jenseits von Schuld und Sühne. Bewältigungsversuche eines Überwältigten>에서 묘사하고 있다. 책에서 아메리가 시도하고 있는 고문에 대한 현상학적 기술 처음 얻어맞는 순간 어떻게 세상에 대한 실존적 신뢰가 붕괴는지, 물고문을 받던 그에게 숨을 내쉴 있는 자유 Atemfreiheit 대한 본능적 욕구가 어떻게 그가 가지고 있던 사회적 자유에 대한 요구를, 동료들을 배반하게 하는지 그를 읽는 사람을 함께 고문을 당하는 현장으로 끌고간다. 그가 고문실에서 느꼈던, „세상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기대할 없는 처절한 단절감 이후 유대인 수용소에서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삶과 죽음의 진실을 외면함으로써 우리가 얻는 편안함이 얼마나 헛되고 얄팍한 것인가를 처절하게 깨닫게 것이다. 자살에 대한 그의 사유는 이러한 깨달음에 근거하고 있다.  

 

자살, 아니 자유사를 긍정하는 책을 출판함으로써 아메리는, 좀처럼 빠져 나오기 힘든 어떤 길로 자신을 이끌고 갔다. 자유로운 죽음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에의 의지로 포괄하고자 했던 아메리는 자신의 말이 갖는 수행적 차원을 의식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책을 통해 자신의 자유사를 공표했던 것이다. 1978 10 17 아메리는 잘쯔부르크의 호텔에서 자유로운 죽음을 실행한다. 그의 책상에는 그의 자살을 통해 호텔에 끼치게될 불편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편지와 그때까지의 그의 숙박료가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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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랑시에르의 (Das Unvernehmen. Politik und Philosophie, Shurkamp) 읽었다. 랑시에르는 예상보다 훨씬 급진적이다. 그가 내세우는 정치적 요구는, 예를들어 데리다가 환대라는 개념을 통해 말하는 것처럼, 언제, 어떻게, 어디에서 도래할 모르는 타자/손님들을 언제든지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소극적인 윤리적 요구를 훨씬 넘어선다. 랑시에르에게 있어 정치, 현존하는 치안적 질서에 따른 사회적, 정치적, 나아가 감각적인 것의 분배 구조에는 근본적으로 낯선’, 질서 속에선 아무 자기 몫도 배당받지 못한 자들이 주체화를 통해 자신들의 몫을 요구하고 나설 비로소 시작된다. 그가 말하는 정치 현존하는 사회의 치안적 질서, 그것이 마련해 놓은 분배/분할의 구조 속에서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자 Anteilose’들이 자신의 몫을 요구하고 나서기를, 그를통해 기존의 치안적 질서의 재편을, 자리바꿈을 요구한다. „정치적 활동이란 육체에게 부여되어 있던 장소로부터 그를 떼어놓거나 장소의 규정을 변화시키는 활동“ (41)이며, 그를통해 기존 질서의 절대적인 우연성을 폭로하고, 기존 질서의 변화와 자리바꿈“(이재원, 쟈크 랑시에르와 68혁명이 유산을 생각한다. <자음과 모음> 2008 겨울호) 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정치적 요구는 예를들어 임금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악덕 사업주에 대해 투쟁하거나, 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시민적 권리를 얻기 위해 싸우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정치, 사회 운동의 요구를 넘어선다. 랑시에르에게 있어 현재의 사회, 정치적 질서가 구획하고, 속에서 각자에게 배당해 놓은 자기 몫을 찾기위한이러한 정치적 운동은 그런 점에서 오히려 현존하는 사회, 정치적 질서와 구획, 그것의 나눔의 구조를, 치안적 질서를 강화시키는데 기여할 있다. 현존하는 분배/분할의 질서가 자신에게 배당해 놓은 몫을 요구하는, 그래서 결국엔 자기 몫을 가지고 있는 Anteilhabende’ 자신의 몫을 요구하는 노동운동이나 시민 운동이 어떤 지점에서, 현존하는 분배/분할의 질서에 의해 아무 자리도, 아무 몫도 배당받지 못하고 있는, 예를들어 외국인 노동자, 난민, 불법 체류자들  같은 자기 몫을 갖지 못하는 자들 Anteilosen’ 대립하는 것도 바로 때문이다.

 기존 질서에는 아예 소속되어 있지도 않으며, 속에서 아무 장소도, 위치도, 몫도 분배받지 못하던 존재들, 그리하여 질서에는 근본적으로 낯선자들이 그럼에도 자신의 몫을 요구할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예를들어 나라의 시민권도 가지고 있지 못하고, 그로인해 법으로 보장된 어떤 사회적 권리도 갖고 있지 못한 난민, 불법 체류자, 혹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몫을, 자신의 권리를 요구할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랑시에르에게 있어 그것은 모든 말하는 존재가 다른 말하는 존재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동등함/평등 Gleichheit(42) 있다. 그리고 평등/동등함 랑시에르에게는 어떤 활동이 정치적 성격을 갖기 위해선 반드시 의거해야 하는 근본 원리이다. „정치는 자체에 고유한 대상이나 질문들을 갖지 않는다. 정치의 유일한 근본 원리인 평등/동등함은 정치에 고유한 것이지도 않으며 자체로 정치적인 것도 아니다. 정치가 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구체적 사안이라는 형태로 평등/동등함의 현재성을 부여하는 것이며, 투쟁이라는 형태로 치안적 질서의 심장 속에로 평등/동등함을 기입/등록해 넣는 것이다. 하나의 활동의 정치적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활동의 대상이나, 그것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투쟁,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데 평등/동등함의 확인을 기입/등록해 넣는 그것의 형태이다.“(43) 다시말해 랑시에르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정치적 활동이란 그것이 무엇을 대상으로 하건, 어떤 문제를 이슈로 삼건 상관없이, 그를통해 기존의 치안적 질서 내에선 보이지 않고 있던평등/동등함에의 요구를 제기함으로써 기존의 분배/할당 구조의 자리바꿈을 요구하는 활동이다.

 홉스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공식을 통해 암시했던 말하는 존재들 사이의 이런 근원적 평등은, 랑시에르에 의하면 명령하는 자와 그에 복종하는 자의 관계를 통해 유지되는 질서의 가능 근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서는 명령을 이해할 있어야 하며, 또한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를 행하기 위해서는 이전에 복종하는 자와 명령하는 자가 이미 동등해야만“(29) 하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권력관계, 명령하고 복종하는 질서 자체를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이전의 근원적 동등함/평등에 의거해 이야기하고 있는 랑시에르는 점에서 모든 권력 관계와 질서가 이미 출발에서부터 폭력적 억압에 기인하고 있으며, 따라서 모든 지배와 질서를 거부하는 아나키스트들과는 구분된다. 랑시에르는 아무런 권력 관계와 질서도 존재하지 않는 상상적 정치적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특정한 권력 관계와 질서가 유지될 있게 하는 근거로서의 근원적 평등 권력관계와 질서의 개혁과 변화를 가능케 하는 규범적 근거로 삼으려고 한다. 존재하는 권력의 힘과 질서를 다만 그를 행사하는 권력자의 일방적인 폭력이 아니라, 최초의 동등함/평등 상태에서 스스로를 권력에 종속시키고 복종하는 자들의 자유에 의거한 자발성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내가 보기에 랑시에르는 라클라우/무페가 전개시키는 헤게모니 이론과도, 지배 이데올로기가 힘을 갖고 영향을 발휘하는 이유가 본질적으로는 비어있는 어떤 질서와 법에 우리 스스로가 부여한 어떤 초월적 힘과 의미 때문이라고 말하는 지젝의 논의와도 통해 있다. 나아가 우리는 이를 자발적 동의에 기초해 있는 권력 폭력으로부터 구별하는 한나 아렌트의 권력 이론과도 연결시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과 랑시에르 사이의 근본적 차이점이 있다면, 랑시에르는 하나의 권력과 질서가 비로소 가능하게 하는, 권력과 질서에 복종하는 자들의 근원적 동등함/평등에 대한 요구를 일국적 차원을 넘어서까지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서 동등함/평등에 대한 요구는, 처음부터 그런 동등함/평등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는 국가 내의 시민들이 아니라, 그런 법적, 정치적, 사회적 질서로부터 아무 자리도 배당 받고 있지 못한 자들에게로까지 확장된다. 국가의 시민으로서 앞에서의 평등함이 아니라, 말하는 존재로서의 평등함/동등함에 대한 요구. 국가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질서 내에 어떤 자리도 갖고 있지 않은 자들이라도 요구할 있고, 요구해야 하는 평등함. 오늘날 유럽 사회에서 랑시에르의 이러한 정치적 요구가 가장 분명하게 적용될 있는 대상은 유럽에 체류하고 있는 난민이나 불법 이주자 아니라, 하루에도 수십명 수백명씩 마로코, 튜네지아, 알제리, 소말리아에서 부터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횡단해 꿈꾸던 나라 유럽대륙으로 몰려오고 있는 보트 피풀들이다. 현존하는 일국적 체제에 의해, 다만 유럽적 차원으로 확장된 배타적 일국체제 유럽 연합이라는 정치단위에 의해서는 아무 자리도, 아무 몫도 할당받고 있지 않은, 아니 오히려 유럽의 안정과 복지, 번영을 위협하는 존재로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아야 ’, 그래서 끊임없이 추방되고 되돌려보내지는 이들이야말로 현재 유럽 사회의 질서 속에서 배제되어 있는 자기 몫을 가지고 있지 못한 자들 Anteilose’이기 때문이다.

 유럽사회에서 이들은 지금까지, 목숨을 항해와 갈증과 허기와 조난으로 죽어간 희생자들의 모습으로, 죽음 직전까지 탈진해 유럽해안에 도달해 해변에서 관광을 즐기던 유럽인들의 보살핌을 받는 불쌍하고 고통받는 희생자 모습으로 재현되어 왔다. 그리고 고통받는 희생자들에게 유럽의 시민 사회는 적지않은 휴머니즘적 원조와 자선을 베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랑시에르에 따르면 우리와 같은 인간 고통에 대한 동감과 선한 의지 근거하고 있는, 소위 휴머니즘 논리에 의거해 이루어지는 이러한 자선 활동은 전혀 정치적 활동이라고 여겨질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휴머니즘적 자선활동은 그들이 스스로를 정치적 존재로 주체화할 있게 하는, 바로 거기에 위에서 말한 근원적 평등/동등함이 근거하고 있는 말할 있는 능력 가진 존재로 인정하기 보다는, 다만 그들을 자신의 벌거벗은 고통을 드러내는 목소리 가진 존재로 제한시키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34-135) 정당함과 부당함, 좋음과 나쁨을 구별하고 말할 있게 하는 말하는 능력 Logos’ 박탈하고, 그들을 다만 고통을 느끼고 표현하는 목소리만을 가진, 그래서 도와주워야 희생자로만 만듦으로써 이러한 활동은 그들에게서 정치적 존재로서의 자격을 빼앗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유럽 아니라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사회에서도 점점 수가 늘어나고있는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자들’, 예를들어 이주 노동자, 결혼 이민자, 혹은 불법 체류자들이 공장주에게 구타당하고, 남편에게 폭행받고, 심각한 인종차별을 받는 희생자 등장하는 , 우리는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들이 받은 피해에 함께 분노하며 그들을 기꺼이 도와주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이 스스로를 주체화하여 한국사회가 그들에게 분배/할당하지 않았던, 그래서 전혀 예상하지도 못하고 있던 어떤 Anteil 요구해 온다면? 말하는 존재로서의 근원적 평등/동등함에 근거해 정치적으로 주체화된 이들이, 한국 사회의 분배/할당 구조 내에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몫을 배당받고 있는 Anteilhabende’ 우리에게까지 몫을 재분배하고, 자리바꿈을 요구해 온다면? 우린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들과 연대할 있을까? 우리가 우리의 위치를, 위치를 보장해주던 질서와 나눔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려 하는 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오히려 이들의 뻔뻔스러움을, 나아가 배은망덕을 이야기하면서, 애초에 우리가, 치안적 질서가 그들에게 마련해 놓았던 규정 ,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 Anteilose’ 정체성을 그들에게 상기시키려 것이다.

 랑시에르가 말하듯, 모든 정치적 주체화는 이처럼 지금까지의 우리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을 재조직하고, 나눔/할당의 구조를 분배하고, „지금까지 헤아려지지 않던 것을 헤아리고, 몫의 부재와 몫을 서로 관계시키는 정체화 Ent-Identifizierung „(48 ) 요구한다. 지금까지의 정치/사회 운동이 우리에게 할당되어 있는 요구해왔다면,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는 우리가 자신의 몫을 가지지 못한 자들 정치적 주체화에 대해 우리 자신의, 결코 쉽지않을  정체화를 통해 응답하기를 요구한다. 우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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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쯔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읽었다. 폭력에 대하여 라는 제목을 1장에서 부터 파농은 식민지 지배자들과 피식민자들 사이의 관계가 화해할 없는, 평화적으로 협상될 없는, 타협되지 못하는 antagonistisch 관계라고 천명한다. 식민지 지배체제 청산 Dekoloniaisation 세계의 질서를 바꾸는 일이며, 절대적인 변혁의 프로그램이다. 그것은 어떤 평화적 협정이나, 마술적인 해결로 이루어질 없다. 거기엔 필연적으로 폭력적 대결이, 식민지 체제가 유지되기 위해 이미 일상적으로, 구조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폭력을 절단시키는 폭력적 대립이 요구된다.  피식민자들이 식민지 세계를 문제시한다는 것은 어떤 관점들의 합리적인 대립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보편적인 것에 대한 논문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정립되어 있는 자신만을 야만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Frantz Fanon. Die Verdammten dieser Erde, Shurkamp 1967, S.31) 파농에게는 이러한 절대적 대립에 맞서있는 존재들,자신의 땅에 식민지 지배자와 피식민자의 두개로 구분된 세계를 만들어내고, 피식민자들이 접근할 없던 쪽에서 살고있던 백인이자 외국인, 식민지 지배자들은 이런 의미에서의 타자“ (S.31) 다름 아니었다.




오늘날의 세계가 파농이 책을 썼던 1960년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왔는지, 그사이 얼마나 많은 것들이 변화했는지를 알기 위해선 단지 다음의 질문만을 던져보면 된다. 파농이 이야기하던 타자들은, 이들을 타자라고 지칭하던 이들은 오늘날 어디에 있는가? 백인 식민지 지배자들을 타자라고 부르며 그들과의 폭력을 불사한 타협할 없는 절대적 대립을 이야기하던 주체들은 오늘날엔, 동안 모은 돈을 브로커 비용으로 지불하면서. 정원이 훨씬 초과된 배에 목숨을 걸고 스페인 해안으로, 이탈리아의 섬으로, 유럽 연합의 국경으로 밀입국을 시도하는 난민들이 되었다. 그와 더불어 오늘날 타자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국경으로, 난민 수용소로, 자신들의 노동 시장으로 몰려드는 이들 과거 피식민지 자들을 바라보는 과거 식민지 지배자들의 후손유럽의 백인들이다.


파 농에게선 타협할 수 없는 폭력적 대결을 통해서 극복하고 해소시켜야 했던 자신과 타자의 관계는, 오늘날 레비나스에게서, 데리다에게서, 또 타자를 이야기하는 많은 유럽 지식인들에 의해선 해소될 수 없는, 아니 해소되어서는 안되는 자신 속의 '이질적인 것'으로 동일화의 폭력으로부터 우릴 견제해주는 하나의 윤리적 요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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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 7월 초 어느날 밤 다니엘 파울 슈레버는 믿기지 못할 만큼 강렬한 체험을 한다. 처음으로 후방의 신의 나라가 그 신(아리만, 오르무즈트)과 더불어 자신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눈을 부시게 할 만큼 압도적으로 화려한 빛이 하늘 전체를, 그의 증언에 의하면 6할에서 8할을 뒤덮고 있었고 이 현상은 며칠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그 다음날 오후 정기적으로 병원 정원을 산책할 때에도 슈레버는 하늘에서 품어져 나오는 이 압도적인 빛을 관찰할 수 있었다. 슈레버에 의하면 그 때 자기 옆에는 그를 담당하던 간병인 M만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하늘을 뒤덮고 있던 압도적인 빛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놀라움을 표현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왜 그랬을까? 하늘의 8할을 뒤덮고 며칠 동안이나 지속되었던 빛을 그가 다른 데 정신이 팔려있어 목격하지 못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간병인 M은 그에대해 왜 일언 반구의 놀라움도 표현하지 않았을까?


         슈레버의 이 의문은 지극히 정당한 것이다. 그건 자신의 했던 지각의 객관성에 대한 질문이며, 이는 이와 다른 방식으로는 제기될 수 없다. 우리 자신도 예를들어 어떤 보기드문 것을 보거나 듣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자기 주변의 다른 누군가도 그를 지각했는지를 확인할 것이다. 누군가가 내 곁에 있었고, 또 그 역시 나와 동일한 지각을 했다고 한다면 나의 지각은 최소한 객관성의 첫번째 지표를 확보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가 아무 것도 보거나 듣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혹시 그것이 나의 감각적 착각이었을까라고 의심해 볼 것이다. 하지만 감각적 착각은 나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옆에 있던 그가 다른 곳에 신경이 팔려 그를 지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우리는 다시 한번 자신이 했던 지각의 확실성에 대해  반성해 볼 수 있다. 이 재확인을 거치고 나서도 슈레버에게 있어 그가 했던 지각은 감각적 착각이나 환각이라고 의심할 수 없었다. 그건 그가 저 하늘의 빛을 꿈 속에서가 아니라 깨어있는 상태에서 목격했으며“, 그것도 밤이 아니라 정원에 있던 낮 동안에“, 심지어 며칠 동안이나 계속보았기 때문이다. 한 때 데카르트도 겪은 바 있던, 내가 보고 있다고 믿는 것이 꿈 속의 표상은 아닐까라는 의심을 자신이 깨어있는 상태였다는 자기의식을 통해 떨쳐버린 슈레버에겐 그 지각 체험의 강렬함과 지속성은 그것의 확실성, 나아가 객관성을 의심할 수 없게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단 하나, 정상적인 경우라면 분명히 목격했음에 틀림없는이 하늘의 빛에 대해 아무런 놀라움도 표현하지 않는 간병인 M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슈레버는 이미 전부터도 간병인 M이 잠시 기적을 통해 살아있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영혼이라고 의심 할 만한 많은 사례들을 접해왔었고, 이제 이 하늘의 빛 사건은 슈레버의 이런 믿음을 더 확증시켜 주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슈레버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하겠다.


나는 당시의 그가 실제 인간이 아니라 다만 일시적으로 응결된 인간이었다고 가정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간병인 M도 분명히 목격했음에 틀림없는, 거의 하늘의  6할에서 8할을 차지하는 그 빛에 의해 크게 눈이 부셨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놀라움을 표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장에서:

 

당시 나는 M 그를 감지하지 못한 것에 대해 별로 놀라지 않았다. 왜냐면 나는 그가 다만 속의 Traumleben 살고있는, 따라서 사고하는 인간이라면 관심을 가질 밖에 없는 인상들에 대해 이해할 없는 일시적으로 응결된 인간이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극히 논리적 판단 과정을 거쳐 도달한 슈레버의 결론이 우리 정상인들의 판단과 어딘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슈레버에게서 가능한 세계의 범위가 우리의 것보다 훨씬 더 넓다는 것 뿐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일상적 판단이 의거하고 있는 가능세계에선 기적을 통해 사람의 모습으로 일시적으로 응결된 영혼 따위의 가능성이 제외되어 있는데 반해, 슈레버의 세계에선 소위 사실성이라는 논리에 의해 마련된 이러한 제한들이 없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을 빌어 이야기하자면 슈레버는 우리 정상인들의 일상적인 생활이 따르고 있는 언어 게임의 규칙과는 다른, 그보다 훨씬 유연하고도 넓은 가능성을 제공하는 규칙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슈레버는 그의 강렬하고 의심할 바 없는 체험에 근거해 당시 그가 머물던 라이프찌히 정신병원이 지구가 아닌 다른 천체에 홀로 떨어져 있고(원래 병원 옆에 있어야 할 기차역에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피아노를 칠 때마다 영혼들이 그를 방해하고 있으며 (망치로 건반을 내려쳐도 끊어질리 없는 쇠로된 피아노 줄이 여러 번 끊겼기 때문에), 몇 밀리미터 크기의 작은 남자들이 그의 눈꺼풀을 임의로 끌어내리고 있다(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심지어 다른 사람들과 대화 중에도 눈이 감기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슈레버의 이러한 판단들은 우리가 그에게 어떤 다른 증거혹은 경험들을 지시함으로써 금방 교정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그의 가능세계 속에서 그의 지각과 지각에 의해 지탱되는 판단 혹은 믿음들이 서로 하나의 체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들의 체계 -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지식의 덩어리 ­Wissenskörper“라고 부른다 - 구조상 동일하다.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믿음을 지지해주는 다른 믿음들에 의해 지탱된다. 믿음을 지탱해주는 다른 지식 혹은 지식에 대한 믿음이 많으면 많을수록, 또한 믿음을 의심케 하는 근거가 적으면 적을수록 믿음에 대한 나의 확신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것이 과학적 사실이건, 종교적 혹은 음모 이론적 믿음이건, 아니면 남편 혹은 아내의 부정에 대한 의심이건 모든 의심 혹은 믿음의 구조는 특정한 믿음(혹은 의심) 믿음(혹은 의심) 지탱해주는 다른 믿음(혹은 의심) 체계들로 이루어져 있다. 남편 혹은 아내의 부정에 대한 의심은 그를통해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사소한 대상, 사건, 소문 등을 우리의 의심을 확증해주는 근거이자 증거로 해석하게 한다. 그러한 근거와 자료, 흔적과 소문, 자취들이 많으면 많을 수록 우리의 의심은 점점 강화될 것이며, 모든 근거들에 의해 강화되고 지탱된 우리의 의심은 좀처럼 사라지기 힘들 것이다. 이제 최초의 의심과 지각이 서로 서로를 강화하고 지탱해 주는 악마적 순환관계 Teufelskreis 생겨난 것이다.


슈레버가 <주목할 만한 정신병자의 기록>에서 진지하게 묘사하고 있는 그의 우주론적 망상체제는 이러한 점에서 외부를 향해 있는 창문 가지고 있지 않다. 물론 그는 책의 후기에서 이전에 자신이 내렸던 결론들이 감각적 착각이나 환각에 의거한 것일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하지만, 동안의 체험을 통해 구축해 놓았던 그의 우주론적 믿음은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을 편집증 환자라고, 그의 믿음을 병적 환상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옹호하고 설득시키려는  거기엔 금치산 판정에 불복하는 법정 소송을 위해 그가 작성한 소송문 (우리는 슈레버가 판사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포함된다. 그리고 그는 재판에서 이긴다!  - 슈레버의 시도는, 픽션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편의 진귀한 드라마를 제공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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