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세계에 대한 우리 지각의 흔적이다. 살아가는 동안 어쩔수 없이 세계를 지각하고 체험해야만 한다면, 기억은 우리의 삶이 우리의 육체 속에 남겨놓은 세계의 흔적들이기도 하다. 때로 우리는 기억을 위해, 기억만을 위해 지각하기도 한다. 헤어져야 하는 친구를, 사별하는 부모를, 먼길을 떠나는 자식을 우리의 기억속에 남겨놓기 위해 우린 그들의 손을 잡거나 오랫동안 그의 모습을 바라보거나, 그와 함께 기억에 남을만한 이벤트를 기획하기도 한다.

 

때로 기억을 위한 지각 기억에 대한 강박으로 발전되는 경우도 있다. 짧은 시간에, 얼마 안되는 돈으로 가능한 많은 곳을 돌아 다녀야 하는 배낭여행이 예다. 거기에서 우리의 지각과 체험은 다만 기억을 위해 조직화되고, 빠른 시간에 되도록 많은 곳과 많은 것들을 체험하고 그를 기억 속에 쑤셔넣어야 한다는 강박이 우리를 쫓는다. 기억을 위한 숨가쁜 여정이 피곤한 육체에 더이상 기억의 공간을 남겨두지 않을 때를 대비, 우린 대표적인 비육체적 보조 기억장치인 카메라를 활용한다. 카메라는 성급한 체험과 지각의 과잉을 수용하길 거부하는 육체를 대신해 우리의 지각과 체험을 기억하는 과제를 떠맡는다. 우린 에펠탑과 개선문 앞에서, 뽕삐두와 오페라 하우스 거리에서 유명한건물과 거리들에 대한 지각과 체험을 카메라에게 일임시킨다. 낯선 도시에 대한 우리의 체험과 지각은 그들을 찍는 렌즈 화면과 셧터를 누르는 손가락으로 대체되고, 우린 카메라가 대신 모든 체험과 지각들을 고스란히 기억해 주기를 바라며 다음 예정지로 서둘러 발길을 돌린다.

 

이렇게 사물화된 지각과 체험은 그러나, 인화되어 나온 사진들 속에서 우릴 배반한다. 에펠탑과 뽕삐두 앞에서 찍은 사진들은, 피곤한 여행에서 돌아와 그들을 들여다 보는 우리에게 그가 정작 기억하고 있었어야 우리의 체험과 지각에 대해선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내가 곳에 있었다라는 사실을 사무적으로 기록해 놓은 증빙서류들로써 사진들은, 실상 어떤 체험과 지각도 없이 그곳에 부재하고 있었던 역설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사진은 우리의 육체적 지각과 체험이 함께 동반되었을 때만 기억으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그를 찍었던 시간과 장소에 대한 체험과 지각이 결핍된 사진들은 그저 사진의 고전적 기능 하나였던 기록과 도큐멘트로서의 의미[1]만을 지닌다. 세계 도처의 유명한 건물, 탑과 성당, 작품들과 도시들의 사진을 언제든지 구해 있는 오늘날, 사진을 찍는 혹은 사진에 찍히는 주체와의 주관적 관련이 없는 사진들은 어떤 기억의 가치도 지니지 못한다.  

 

이러한 사정은 우리 자신을 사진들 속에 끼워넣는방법을 통해서도 그리 크게 변하지 않는다. 우린 우리가 방문했었던 건물, 거리, 장소들 속에 자신의 모습을 함께 찍어 넣음으로써 시간과 장소에서의 나의 현존 증거하려 한다. 그러나, 그를통해 드러나는 것은 나의 체험하지 못하는 육체가, 육체에 의해 체험되지 못한 장소들 속에 물건처럼 놓여 있었다 메시지일 뿐이다. 기억에 대한 강박을 통해 사진 속에 함께 찍힌 나의 모습은 속에 있는 모든 시간과 장소들 내에서의 나의 강박적 현존의 흔적일 뿐이다. 나의 모습을 포함하고 있는 사진 속의 사물들은 나에 의해 체험되지 못한 관광엽서의 그림들처럼 거기 그냥 그렇게 있다. 

 

핸드폰 카메라는 사진이 주는 기록과 기억에의 강박을 더욱 강화시켰다. 일상 속에서 좀처럼 체험하기 힘든 사건이나 장면들을 순발력있게 기록할 있게 주는 핸드폰 카메라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이 맞닦뜨린 사건과 장면들을 기억과 기록에의 강박없이 지각하고 체험하기 힘들어졌다. 사건과 엽기적 장면, 뉴스꺼리가 만한 일상의 순간들은 놓치고 사라지기 전에 사진으로 찍혀, 사진을 찍은 내가 시간과 장소에 있었다라는 자기 현존의 메시지로 활용되어야 한다.

 

이전 시대의 세계가 우리에게 그에 대한 지각과 체험을, 그를통해 자신에 대한 기억을 요구하던 정열적인 여인이었다면, 오늘날의 세계는 우리에게 그의 모든 순간과 장소에 우리가 다만 금욕적으로 현존하기만을 요구하는 성처녀다.       



[1] 사진이 오늘날처럼 자신의 사적인 일상사를 기록하는 기호품이  되기 사진은 공간적, 혹은 시간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대상들을 기록하는 도큐멘트로서의 역할을 했다. 유럽 근대 인간학Anthropologie 인류학과 나아가 사회학의 발생엔 20세기 사진을 통한 비유럽 문화들의 기록이 커다란 역할을 했었다. 사진들은 유럽 식민주의의 시선을 통해 비유럽이라는 타자 구성해내는 시각적 도큐멘트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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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 책을 보면서

-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육체에 대해 아는것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육체에 대해 가지고 있는 표상들에 다름 아니다. 해부학 도판에 그려져 있는 저 익명의, 열려  속이 까발겨진 육체는 지금까지의 인류의 인간 육체에 대한 지식들의 소산이다. 우린 우리 스스로가 들여다보지 못하는 우리 육체 속의 모습을, 해부학자들에 의해 열려 들여다 보여진 수많은 이전의 육체들이 제공한 지식에 의거해 확인한다. 내가 몸이 아파 병원에 가거나, 때에 따라 수술을 받아야 할 경우에 나의 육체는 이전 시대의 저 죽은 육체들이 제공한, 또 그를 바라보던 특정한 에피스테메적 시각들에 의해 구성된 육체에 대한 지식들에 의해 관찰되고, 절개되거나 봉합될 것이다.

-                            내 뱃속에 들어있을 아니 들어 있어야할 ! – , , 창자, 쓸개, 허파, 심장, 방광 들을 나는, 마치 사용 설명서에 나와있는 부품목록을 통해 조립식 프라모델의 모든 부품들이 다 있는지를 확인하듯, 해부학 도판을 보며 확인한다. 한 개의 프라모델을 완성하기 위해선 그에 필요한 모든 부품들이 다 있어야 하듯, „라는 육체가 온전하게 정상적으로 존속하기 위해선 그 속의 모든 기관들이 다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나, 문제는 내 육체 속에 존재해야할 기관들을 내가 플라모델의 부품들처럼 하나 하나 직접 찾아 만져보며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 몸 속에 저 모든 복잡한 부품들이 빠짐없이 다 들어있을 것이라는 걸 우린 그리하여 연역적 가설을 통해 확인할 수 밖에 없다. 가설 : 내 몸에 필요한 기관들이 다 존재해야만 내 몸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것이다. 관찰 : 내 몸은 현재 그럭저럭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결론 : 따라서, 내 몸 속엔 필요한 기관들이 다 존재할 것이다! 

-                            우리 몸 속의 보이지 않는 기관들의 존재를 저 불만족스러운 연역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이미 육체의 타자화 Entfremdung’ 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구입한 노트북과 테레비젼의 부품들이 제대로 다 있으리라는 걸 스스로 확인 할수 없듯 우린 우리가 죽을 때까지 채워 들고 다니는 내 몸 속 기관들의 존재를 우리 스스로 확인할 수 없다! 나아가 그것들은 전적으로 나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수리보수를 타인에게 맡겨야만 하는, „내 속에 있으나 내가 장악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런 점에서 내 몸 속의 심장, 허파, , 대장, 방광 등은 누군가에 의해 내 몸속에 투입되어 그 속에서 기생하고 있는 기생충들과도 같다. 아니, 어쩌면 가 저 기관들에 빌붙어 생존하고 있는 기생충인가. 

-                            우리 몸 속의 보이지 않는 기관들의 존재는 내 육체의 기능으로부터 연역되어야만 한다. 내 육체가 큰 이상없이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나는 내 육체 속의 모든 기관들이, 이 해부도판에 나와 있듯, 전부다, 제대로 된 형태로, 적절한 위치에 놓여져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는 전기 청소기가 제대로 먼지들을 빨아들이는 한, 그 속에 모든 부품들이 제대로 다 달려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과 같다. 내 육체가 어딘가 조금이라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우리 몸 속에서 우릴 생존하게 하는 저 낯선 기관들의 포로가 된다. 혹시 내 간에 염증이 생긴 것이 아닐까, 내 뇌 속에 종양이 자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방광에 결석들이 자리잡고 있을까... 근대 이후 보급된 육체에 대한 수많은 지식들 건강상식, 조기징후, 병인 등 엔 그리하여 우리 육체 속에서 우릴 지배하고 있는 저 낯설은 기관들에 대한 두려움들이 배어있다. 우린 나의 간이, 위가, 대장이나 허파가 불러내는 조그만 목소리에도 늘 귀를 기울이며 그들의 동태를 살펴야 하는 허약하고 늙은 전제 군주다.  

-                            내 육체 속에서 호시 탐탐 반란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저 기관들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육체의 정상적인 기능과 작동을 위한 맹목적 건강의 신앙들을 갖게한다. 우리는 수많은 영양제와 건강 식품들을 먹고, 마시며, 헬스와 등산, 조깅과 수영 등으로 우리 육체를 혹사시키며 내 육체가 여전히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작동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한다.

-                             자신의 육체에 대한 저 두려움과 감시, 관찰은 현대의 에피스테메가 규정해 놓은 육체의 정상성이라는 그림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오늘날의 의학과 의학적 지식의 담론들이 규정해 놓은 정상성의 시각을 통해 우리 육체의 모든 증상과 징후들을 정상비정상으로 구분하고, 저 우리의 육체를 저 정상적 육체로 수렴시키기 위해 영양제나 영양 식품을 먹고 운동을 하고 수술을 받기도 한다. 우린 우리의 육체를 저 정상적 육체와 비교하고, 관찰하며 때론 불안해하거나 안심하기도 한다.

-                            해부학 도판은, 그림이라는 무척이나 의심스러운 매체로, 정상적 육체를 절개해, 그것의 평소엔 보이지 않는 내부를 객관화시켜 보여준다. 이렇게 그려져 있는 기관들과 내 육체 속의 내겐 보이지 않는기관들을 비교하면서, 우린 현대 세계가 마련해 놓은 정상적 육체에 대한 그림을 내면화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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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내게 보내 이메일에 추신 달려있다. „추신혹은 덧붙임 통해 쓰여진 것은, 이미 완결된 본문 속에는 통합되지 못한, 잊혀졌던 , 탈락되거나 결핍된 것들이다. 이렇게 잊혀지고, 탈락된 것들은, 그들 때문에 이미 완결적으로 쓰여진 본문을 다시 쓰거나 재구성해야 만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은, 다만 부록처럼, 물건을 사면 끼워주는 사은품처럼 그렇게 부착되어 있다.

 

-          누군가와 대화를 , 우리는 이미 우리가 내뱉은 속에서 말해지지 못하고 잊혀지거나, 빠진 것들을 나중에 추가시킨다. 그렇게 밖에 없는 이유는 말이 시간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뱉은 말에게로 돌아가 가운데를 비집어, 잊혀지거나, 빠진 말을 공간적으로 첨가시킬 없다. 그리하여 대화에 있어서의 추신은 구술적 대화가 갖는 시간성의 어쩔수 없는 결과다.  , 그런데 말이지...

 

-          아직 상대방에게 보내지지 않은 글에선 말이 가지고 있는 시간성의 제약은, 글쓰기의 매체가 지닌 공간적 조건들로 대체된다. 내가 이미 썼던 문장 속에 빠진 단어나, 내가 이미 써버렸던 편지 속에 들어가야 했으나 빠진 내용은, 이미 쓰여진 문장의 공간 속에선 이상 자신의 자리를 갖지 못한다. 속에서 빠지거나, 탈락되거나, 잊혀진 것들을 이미 쓰여진 속으로 통합하기 위해선,  이미 만들어진 문자의 공간적 질서가 재배치되어야 한다.

 

-          글과 문자의 공간적 질서를 재배치하는 일의 난이도는, 글을 썼던 매체의 특성에 따라 다르다. 내가 연필로 글을 쓰고 있었다면, 지우개로 이미 쓰여진 글의 공간을 비우고, 빠졌던 것들을 메꾸어 넣을 있다.  내가 만년필이나 볼펜, 아니면 타자기로 쓰고 있었다면, 글자들이 이미 차지해 버린 공간을 비우기 위해 과격한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글자들은 화이트로 생매장되거나, 그것이 박혀있는 지면으로 부터 뽑혀(긁어)져야 한다. 그도 아니라면 이미 쓰여진 종이를 찢어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글을 써야만 한다.      

 

-          추신이라는 글쓰기의 형식은 텍스트적 질서의 변용을 통해 문자적 공간의 재배치를 이루려는 시도다. 이미 쓰여진 문자들은 내버려 ,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어야 글자들을 이미 쓰여진 텍스트로 부터 형식상 독립시킨다. 이미 쓰여진 글자들과, 속에 들어갔어야 , 그러나 잊혀지거나 탈락된, 빠진 것들은 지면의 서로 다른 공간으로 배치되고, 이를통해 이미 쓰여진 글과 쓰여졌어야 하는, 그러나 탈락된 것들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이 이루어진다. 

 

-          글쓰기의 새로운 매체 컴퓨터는 이미 쓰여진 글이 갖는 불가역성의 무게를 탈물질화시켰다. 컴퓨터를 통해 우린 언제든지, 쓰여진 글을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어려움 없이, 제거해 버릴 있다. 쓰여진 ( 입력된!) 글자들 속에 잊혀지거나 탈락된 것들은, 다만 동일한 손가락 운동만을 통해 화면에 어떤 흉터도 남기지 않은채, 수도없이 통합될 있다. 이를통해 컴퓨터를 통한 글쓰기에선 사실상 추신이라는 독립된 글자들의 형식은 불필요해졌다.  

 

-          이메일의 끄트머리에 쓰여진 추신, 그래서, 디지털 글쓰기 시대에 남아있는 이전 시대 글쓰기의 흔적이다. 흔적은 마치 컴퓨터로 쓰여진 글이, 만년필이나 타자기로 쓰여지던 글처럼 공간적 불가역성에 종속되어 있다는, 다시말해 자판으로 입력된 글자들이 언제든지 똑같은 모습으로 생겨나고 지워질 있는 픽셀들이 아니라, 마치 지워지지 않는 잉크로 지면 위에 박힌 물질인 듯한 인상을 준다. 누군가에게 보내는 이메일에 추신 다는 사람은, 모니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면서 손으로 글자의 육체적 일회성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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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원해“. 니클라스 루만이 말하는 현대 사랑의 의미론의 정식이다. 어느 시대나 사랑이 있었다고 해서 어느 시대나 다 동일한 방식으로 사랑을 했었던 것은 아니다. 인간의 다양한 소통의 한 형태로서의 사랑은 그 시대가 가지고 있던 소통방식에 따라 늘 서로 다른 의미론을 지니고 있었다. 그 의미론은 상대의 어떤 행동이나 말을 나를 향한 사랑의 기호로 받아들일 것인지를 규정해 줄 뿐만 아니라, 저 복잡하고도 독특한 사랑이라는 소통관계가 각자의 삶 속에서 어떤 의미와 역할을 할 것인지까지도 규정해왔다. 서로 다른 시대의 사람들은 그 시대를 지배하는 사랑의 의미론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고백해왔고, 그 사랑이라는 관계를 둘러싼 사태들을 다른 방식으로 대하고 받아들여 왔다. 이러한 서로 다른 사랑의 의미론들은 그 사랑이라는 소통에 참여하는 당사자들이 그 속에서 느끼는 감정과 그에대한 반응까지도 다르게 규정해왔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유부녀에 대한 사랑을 자살이라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밖에 없었던 젊은 베르테르는 오늘날과는 다른 사랑의 의미론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방의 사회적, 정치적 지위, 계급과 재산을 초월한 사랑이라는 저 열정과 낭만적 사랑의 의미론은, 루만에 의하면, 18세기 이후 커뮤니케이션의 개인화가 진행되면서 비로소 출현한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개인의 사회적, 계급적 지위 등 눈에 보이는 사회적 기호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사회에선 사람들 사이의 소통은 복잡하고도 위계적인 질서와 규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그 시대엔 기사가 백작 부인을, 농노가 영주의 딸을, 평민이 귀족들을 대할 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떤 말과 행동은 허용되고 어떤 건 금지되어 있는지, 어떤 제스쳐와 말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등이 사회의 모든 계급과 계층들 사이의 소통규칙으로 정식화되어 있었고, 이를통해 이들 사이의 원활한 소통- 하버마스가 말하는 이상적 소통이 아닌! - 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 속에서 만일 계급과 계층을 초월한 사랑이 발생한다면 그건 전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저  소통규칙을 일순간에 위기에 빠뜨릴 것이며, 따라서 이는 이 시대엔 좀처럼 생겨날 수 없는 것이었다.            

 

            18세기 말 이후 타인에 의해 인정받을 수 있는,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계급적, 사회적 지위 대신 개인들의 내적인 세계, 그의 교육과 교양수준, 내면의 깊이 등이 더 중요한 가치로 부상되기 시작하자, 이전의 소통적 규칙들만으로는 사람들 사이의 원활한 소통이 점점 힘들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이제 누군가에게 호감을 사려는 사람은 그 상대의 개인적 취향과 선호, 그의 세계관 및 가치, 윤리기준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소통의 개인화와 그를통한 소통 방식의 변화가, 루만에 의하면, 소위 사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의 의미론을 낳게했던 사회적 원인이었다. 객관적으로 관찰수 있는 상대의 사회적 지위와 관련된 정보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그의 체험의 차원을 고려해야 함에 따라 이제 소통은 상대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외적 관찰이 아니라, 그의 내면과 개인적 체험에 대한 추측과 배려에 의존하게 된다. 이러한 개인화된 소통의 조건 속에서 이제 서로가 자신의 사적 체험의 세계에 상대가 함께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근대적 사랑의 의미론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나의 연인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상태에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의 체험의 세계, 곧 나의 감정과 느낌을 배려하지 않고 행동한다면 이기적이며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 우리는 사랑의 상대의 체험의 세계에 끊임없이 주위를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가 생일 선물로 무엇을 좋아할지, 어떤 영화를 보고 싶을지, 특정한 사건이나 대상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등 저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의 내면은 내가 그와의 관계를 지속하고자 하는 한 늘 추측하고 탐색해야할 판도라의 상자다.

 

루만에 따르면, 이러한 근대적 사랑의 의미론은 이전 시대의 소통의 비 개연성 (Unwahrscheinlichkeit)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하기는 했지만 그 자체로 또한 해결하기 힘든 딜레마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현대의 사랑을 힘들고 모순적으로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첫째, 근대에 등장한 이 사랑의 소통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의 내적 체험의 세계에 기초하고 있다. 구체적인 삶의 상황들에 요구되는 소통 규칙들이 상대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분명하게 정식화되어 있던 이전시대와는 달리, 이제 서로의 내적 체험의 세계를 공유하고자 하는 두 명의 개인들은 다만 상대의 주관적 내면에 대한 추측에 기초해 자신의 행동방식을 결정해야만 한다.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내가 어떤 행동이나 말을 해야 할지가 전적으로 그 순간 상대의 내면상태가 어떠할 것인지에 대한 나의 추측과 판단에 달려있다. 만일 내가 상대의 체험세계를 잘못 추측했다면 나의 어떤 행동이나 말은 도리어 그를 화나게 하거나 기분 나쁘게 만들 수도 있다. 

 

  둘째,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의 체험세계를 잘못 판단함으로써 생기는 소통의 위험성은 그러나, 그 상대의 체험 세계 자체를 소통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시도를 통해서 감소되지 않는다. „너가 원하는 것이 무언지 말해봐라고 말하는 상대는 그를통해 그가 그만큼 상대의 내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그리하여 저 사랑의 의미론에 의하면, 상대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고 있었음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 된다. 

 

세째,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기를 요구받은 사람 역시 모순적 상황에 빠져들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아무 생각없이 말함으로써 자신이 상대의 선호나 감정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 인간으로 보여지기를 원치 않는다. 상대가 싫어하는 SF영화를 내가 보고 싶다고 해서 함께 보자고 한다면 난 상대의 체험의 세계를 배려하지 않는 나쁜 사랑 소통의 상대자가 되는 것이다. 저 근대적 사랑의 의미론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그리하여,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원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 상대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향해 열어둠으로써 두 명의 파트너는 결과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도 상대가 원하는 것도 아닌 모두에게 불만족스런 제 삼의 결정을 하게되기 쉽다.  

 

 네째, 이러한 현대 사랑의 딜레마는 사랑 관계에 있어서의 관찰자와 행위자라는 역할 수행을 통해 더욱 심화된다. 오늘날의 사랑관계 속에서 우리는 상대방에게 그의 주관적 세계, 그 만의 내적 체험특수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을 관찰가능한 행위를 통해 보여주어야 한다. 이때 그 상대방은 자신의 내적 세계가 나에 의해 받아들여졌는지를 관찰하고 판정하는 관찰자가 된다. 사랑 관계 속에서 연인들은 서로 관찰가능한 행위를 통해 상대에게 서로의 내적 세계를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또 상대의 행위를 보고 그를 판단하는 행위자이자 관찰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게 된다. 그런데, 루만에 의하면  행위와 관찰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 그것은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를 주로 상황의 조건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보는 반면 관찰자는 그를 행위자 개인의 특성으로 귀속시키기 때문이다. 루만은 자동차 운전의 상황을 예로든다. 를 운전하고 있는 자는 운전하고 있는 상황의 조건들에 따라 움직이고 그 속에서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차에 함께 타고있는 파트너는 그의 불만스러운 운전방식상황의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자신의 특수성 너무 빨리 혹은 천천히 가면 멀미를 한다거나 하는 - 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하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이를통해 행위자의 입장에선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행했던 행위들이 관찰자 파트너에 의해선 그의 무관심과 배려없음,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음의 징표인 것으로 비난받게 되는 것이다

 

열정적인 사랑 말고는 그 아무 것도 필요없다라고 말하는 근대적 사랑의 의미론이, 일견 모순적으로 보이는, 이다지도 많은 사랑에 관한 지침서와 충고들, 소위 남자 혹은 여자의 본심에 관한 수 많은 보고서들, 나아가 연애 혹은 파트너 관계 전문 상담사들을 필요로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P.S : 이전에 올렸던 니클라스 루만 <열정으로서의 사랑>을 다시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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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전통에서 부부는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성스러운 대상이었다. 부부의 관계를 예수와 교회와의 관계와 비교하기도 했던 신약성서의 우화가 그를 보여준다. 부부의 평생가약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때까지라는 결혼예식의 전형구를 통해 정의되었고 그러한 부부의 본래적 목적은 다만 아이를 낳는 것에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칸트가 1797년 출간한 도덕 형이상학„Die Metaphysik der Sitten“에서 전개하고 있는 부부에 대한 그의 생각이 얼마나 과격하고도 센세이셔널한 것이었는가가 분명해진다.  칸트는 이 책에서 부부에 대한 전통 기독교적 가르침을 명백하게 거부하고, 새로운, 당시의 관점에서 보자면 거의 혁명적인 부부관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칸트는 이미 오래전부터 종교적으로 확립되어왔던 부부 관계의 목적에 의문을 제기한다. 부부란 정말 다만 아이를 낳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인가? 이에대해 칸트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은 항상 자연의 목적일 수 있을지는 모른다...그러나 부부관계를 맺는 인간이 이 목적을 전제해야만 한다는 것은 이러한 인간의 관계 맺음의 정당성을 위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더 이상 아이를 낳지않게 된다면 부부관계는 곧바로 스스로 해체될 것이기 때문이다.“   "Kinder zu erzeugen und zu erzielen mag immer ein Zweck der Natur sein...aber dass der Mensch, der sich verehelicht, diesen Zweck sich vorsetzen müsse, wird zur Rechtmäßigkeit dieser seiner Verbindung nicht erfordert ; denn sonst würde, wenn das Kinderzeugen aufhört, die Ehe sich zugleich von sich selbst auflösen."[1]

 

기독교가 부부의 존립 목적을 아이의 산출로 국한시킨 이유는 분명하다. 바로 성이 갖고 있는 저 복잡한 문제들 때문이다. 충실한 기독교인이라면 비록 그들이 부부, 곧 서로 다른 성사이의 관계를 맺고 있다 하더라도 결코 육체적 쾌락에 빠져들어서는 안된다. 부부사이의 성교는 다만 후대를 잇기 위해서만 허용될 뿐이며, 오직 그것만이 부부의 목적이어야 했다. 

 

정언명법의 철학자인 칸트에게 이러한 종교적 가르침이 너무나 위선적으로 느껴졌던 것일까.  칸트는 부부를 성적인 것에 그 목적을 갖는 공동체의 하나로 본다.  성 공동체   Geschlechtsgemeinschaft (commercium sexuale)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성기관과Geschlechtsorgane 성적 능력들을 상호적으로 사용„wechselseitigen Gebrauch, den ein Mensch von eines anderen Geschlechtsorgane und Vermögen macht."[2]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동체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인간들은 다른 인간의 성기를 사용하는가? 말할 것도 없이 그건 성적 쾌락과 향유를 위해서다. „한 성이 다른 성의 성기를 사용하는 자연적인 성기의 사용은 곧 향유이다.“ „der natürliche Gebrauch, den ein Geschlecht von den Geschlechtsorganen des anderen macht, ist ein Genuss“[3].

 

무척이나 흥미로운 사실은 칸트가 이러한 성 공동체에 서로 다른 성, 곧 이성관계 뿐 아니라, 동성관계, 나아가 인간과 동물과의 성적관계까지도 포함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에게 이 후자, 즉 동성 관계와 수간은 비자연스러운것으로 여겨지긴 하지만 말이다. „성 공동체에는...자연적인 (그를통해 자신과 동일한 존재를 산출해낼수 있는) 성기의 사용과  비 자연적 사용이 있다.  동일한 성을 가진 사람에 대한 성기의 사용이나 인간-종과는 다른 동물에 대한 성기의 사용은 비 자연적 성기의 사용이다.“ „Geschlechtsgemeinschaft ist ...entweder ein natürlicher (wodurch seines Gleichen erzeugt werden kann), oder unnatürlicher Gebrauch, und dieser entweder an einer Person eben desselben Geschlechts, oder einem Tiere von einer anderen als der Menschen-Gattungen“[4].이를 통해 우리는 이미 당시 칸트가  이미  동성적 성관계 뿐만 아니라 인간과 동물과의 성적관계도 알고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동성관계와 동물과의 성관계를 비 자연적 성기 사용이라고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칸트는 부부 관계라는 것이 다름아닌 성적 공동체임을,  말하자면 성적 향유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관계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를통해 부부는 칸트에 의해 서로 다른 성을 가진 두 사람 사이에, 그들의 성적 특성들을 평생동안 상호적으로  소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맺어진 관계  "die Verbindung zweier Personen verschiedenen Geschlechts zum lebenswierigen wechselseitigen Besitz ihrer Geschlechtseigenschaften."[5] 로 정의된다.  

 

물론 칸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관계는 종교적으로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적인 책임을 갖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쾌락을 위한 목적으로 서로의 성적 특성들을 상호적으로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부부간의 계약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성의 법칙에 의해 필연적인 계약이다. 다시말해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성적 특성에 따라 상호적으로 즐기려고 한다면 그들은 반드시 부부관계를 맺어야 하며, 이는 순수 이성의 정당한 법칙에 따라 필연적인 것이다.“ "Es ist nämlich, auch unter Voraussetzung der Lust zum wechselseitigen Gebrauch ihrer Geschlechtseigenschaften, der Ehevertrag kein beliebiger, sondern durchs Gesetz der Menschheit notwendiger Vertrag, d.i. wenn Mann und Weib einander ihren Geschlechteigenschaften nach wechselseitig genießen wollen, so müssen sie sich notwendig verehlichen, und dieses ist nach Rechtsgesetz der reinen Vernunft notwendig."[6]

부부가 더이상 신에 의해 맺어진, 그리하여 인간의 손으로는 해체되지 못할 그런 관계가 아니라 다만 성적 향유를 위해 만들어진 공동체라고 한다면,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는 인간성의 법칙에 따라 필연적인 계약의 관계가 되어야 할까? 혹 칸트는 이 지점에서 다시 기독교적인 부부윤리에도 후퇴하는 것은 아닌가.

 

부부 계약에 관한 칸트의 요구는 그러나 신에 의해 맺어진 부부의 불가침성이라는 종교적 가르침에 기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침해해선 안될 인간의 개체성이라는 칸트의 이념으로 부터 도출되어 나온 결론이며, 바로 이것이 칸트의 부부에 대한 생각을 종교적 윤리와 구별시켜 주는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다른 이의 성기를 사용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사물화가 일어나는데, 이는 상호적인 사용과 소유를 보장하는 계약을 통해서만 상쇄될 수 있는 것이다. 칸트는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조금은 패티시즘적으로 들리는 논증을 통해 펼쳐나간다. 

 

칸트는 우리에게 성적 쾌락을 가져다 주는 대상이 사실상 한 명의 완전한 개인이 아니라 다만 그가 가지고 있는 성기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이는 위의 성공동체에 대한 정의에서도 드러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적인 향유를 목적으로 하는 성 행위시에 우리는 성 행위 파트너의 성기만을 사용하는 것이다. 거꾸로 보자면 여기서 파트너의 성적 쾌락을 위해 자신의 성기를 제공하는 개인은 이를통해 자신 육체의 한부분으로 환원되어 사물화되는 것이다. „한 성이 다른 성의 성기를 사용하는 자연적인 성기의 사용은 곧 향유이다.  이때 한 명은 다른 이에게 자신 육체의 한 부분을 제공한다. 이 행위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사물로 만들게 되는데, 이는 자신의 개인에 대한 인간성의 권리와 모순을 일으킨다. „ „Der natürliche Gebrauch, den ein Geschlecht von den Geschlechtsorganen des anderen macht, ist ein Genuss, zu dem sich ein Teil dem anderen hingibt. In diesem Akt macht sich ein Mensch selbst zur Sache, welches dem Rechte der Menschheit an seiner eigenen Person widerstreitet.“[7]  

 

칸트에 의하면 성행위에 있어서의 이러한 인간의 사물화, 그를통해 일어나는 개체성의 훼손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통해서만 보상되고 상쇄될 수 있다. ,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 의해서 사물처럼 소유되고, 바로 이 개인이 다시금 그 상대를 소유함을 통해. 이렇게 함으로써만 개인은 다시 자기 자신을 되찾고 그의 개체성은 회복되게 된다.“  "dass, indem die eine Person von der anderen, gleich als Sache, erworben wird, diese gegenseitig wiederum jene erwerbe ; denn so gewinnt sie wiederum sich selbst und stellt ihre Persönlichkeit wieder her."[8]  

 

성적 향유를 위한 성 행위란 자신 육체의 일부를 상대에게 제공하고, 자신은 또한 상대의 그것을 제공받는 상호적인 성기 소유의 과정이다. 바로 이러한 상호적이고 평등한 소유만이 성행위 시 발생하는 인간의 패티시즘적인 사물화를 극복하고 그를통해 손상된 인간성과 개인의 개체성을 회복하게 하는 가장 결정적 조건인 것이다. 부부계약은 바로 이러한 상호성과 평등성을 사회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상대의 향유를 위해 한 성이 자신을 제공하고 제공받는 행위는 부부라고 하는 조건하에서만 유일하게 허용될 수 있는 것이며, 나아가 바로 이 조건하에서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folglich ist die Hingebung und Annehmung eines Geschlechts zum Genuss des andern nicht allein unter der Bedingung der Ehe zulässig, sondern auch allein unter derselben möglich.“[9]    

 

 

 



[1] I. Kant : Die Metaphysik der Sitte, § 24.

[2] I. Kant : Die Metaphysik der Sitte, § 24.

[3]  I. Kant : Die Metaphysik der Sitte, § 25.

[4] I. Kant : Die Metaphysik der Sitte, § 24.

[5] I. Kant : Die Metaphysik der Sitte, § 24.

[6]  I. Kant : Die Metaphysik der Sitte, § 24.

[7]  I. Kant : Die Metaphysik der Sitte, § 25.

[8]  I. Kant : Die Metaphysik der Sitte, § 25.

[9] I. Kant : Die Metaphysik der Sitte,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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