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e Frage der Laienanalyse (1926)[1] 내가 읽었던 프로이드의  가장 흥미로운 글이다. 무엇보다 여기서 프로이드는 자신의 이론 체계를 그에 문외한인 일반인 대화 상대자를 향해 알기쉬운 대화체로 전달하고 있으며, 그를통해 그의 다른 글들에서는 모호하고 분명하지 않았던 입장들이 여기선 뚜렷하게 가시화되어 등장한다. 프로이드 자신과 가상적인 상대방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 글은 다른 어느 글보다 작가로서의 프로이드의 능력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데, 그건 명의 대화를 어떤 실제대담보다 긴장감있고 생생하게 전개시키고 있는 프로이드의 문필력에서 기인한다.

여기 등장하는 프로이드의 대화 상대자는, 플라톤 대화편의 생기없는 대화 상대자들 처럼 그저 복잡한 이론을 한마디씩 나누어 이야기하는 화자의 말에 추임새만 넣어주다 결국 입장에 통합되어 버리고 마는 Jasager 아니다. 중립적 입장의 대화 상대자“ Unparteiischer 시간이 지나갈수록 오히려 점점 자신의 뚜렷한 개성과 입장을 드러내면서, 대화상대인 프로이드를 도발하고 그가 자신의 질문을 피해가려는 기색이 보이면 즉시 교정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이들 사이의 긴장관계는 결국 날카로운 감정적 갈등 상황으로까지 발전하는데, 이는 상대의 도발적 추궁에 지친 텍스트 속의 프로이드가 당신은 중립적 상대자로서의 의무를 지키지 않고있다 항변하자, „ 정도로 나에대한 신뢰가 흔들린다면, 도대체 나를 대화 상대자로 선택했는가.“라는 상대자의 당당한 답변 속에서 절정에 달한다.  

무엇보다 우릴 즐겁게 하는건, 우리가 진작 프로이드에게 따져묻고 싶었으나 감히 하지 못했던 질문들을 겁없는 문외한이 정신분석의 창시자에게 던져대는 통쾌한 모습을 보는 것이다. 정신분석자는 도대체 환자를 데리고 무얼하는 것이냐라는 첫번째 질문에서 출발한 그는, 분석적 치료가 결국 환자와의 대화에 다름아니라면 카톨릭의 고해성사나 일반상담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느냐, 그게 어떤 치유효과를 갖는다는 것인가, 정신병을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가 있는데 도대체 분석가는 필요한 것이냐, 별다른 의학적 지식도 필요없는 분석은 결국 아무나 있는 아니냐, 분석 치료 기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는 이유는 뭐냐, 분석자와 환자사이에서 은밀한 성적 대담이 오고 간다던데 그건 어떻게 일이냐, 환자의 다양한 증상의 해석’Deutung이라는게 결국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걸면 귀걸이가 아닌가, 분석 치료라는게 객관적 지식과 방법보다는 결국 분석자의 개인적 영향력에 좌우되는 아니냐, 노이로제 환자가 의사에게 사랑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는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거냐, 당신의 이론을 위해5살짜리 꼬마 („한스!“) 데리고 실험했다던데 그래도 되는거냐 등의 그야말로 주옥같은질문들을 던지고, 그에 대한 프로이드의 답변을 이끌어낸다.

나아가 멋진 대화 상대자는 구체적으로, 정신분석 기법은 어디서 배울 있는지 (이에대해 프로이드는 베를린과 비인의 정신 분석연합 Psychoanalytishe Vereinigung E. Jones 박사에 의해 설립된 런던의 교육기관을 소개한다.), 교육기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 2!) 같은 실천적 질문을 던지는 것도 잊지 않는다. 훌륭한 질문자에 힙입어 프로이드는 정신분석 전문대학 psychoanalytische Hochschule 수립하려는 자신의 – „아직 환상적으로 들릴지는 모르지만“ -  야망과 자신이 생각하는 교과 과정을 소개하기도 한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 전문대학에선 학생들은 심층 심리학’ Tiefenpsychologie 과목으로, 생물학 입문, 성생활 일반론, 정신병 일반론 아니라, 문화사, 신화학, 종교 심리학과 문학을 배워야 한다.

글은 또한 프로이드를 둘러싼, 궁금했던 다른 인물들의 현황과 동정도 전해준다. 프로이드는 20년전 자신의 유명한 아동 정신분석 이론의 실험 대상이었던 5살짜리 아이가 – „꼬마 한스“ (1909) ! – 건강하고 능력있는 젊은이가 되었고, 심각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갖긴 했어도 문제없이 klaglos사춘기를 통과했다 전하고,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몇몇 예전의 자기 제자들이 인간 사회를 섹슈얼리티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요구에 부응해, 명은 성적인 것을 추상적이고, 신비로운 Mystisches, 다른 명은 성생활을 권력과 지배에 대한 요구가 펼쳐지는 장으로 설명함으로써 매우 호응을 얻었다 전한다. 우리는 제자들이 1927 <오르가즘의 기능> 출판했던 빌헬름 라이히이와 융이라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있다.

 이글엔 무엇보다 전쟁과 관련된 메타포들이 많이 등장한다. 전선과 후방의 메타포를 통해 – „결정적인 것은 물론 적이 얼마나 가까이 있느냐 하는 것인데, 정신적 삶에 있어서 그것은 외부세계가 얼마나 가까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 외부세계와 접하는 Ich 후방으로서의 Es 상호관계를 설명하거나, 분석적 치료를 오래 걸리게 하는 환자의 심리적 저항, 적의 치열한 저항과 맞닥뜨린 군대에 비유하는  – „적의 저항이 펼쳐지는 곳에선 평시라면 전차로 몇시간만에 통과할 있는 구역을 군대는 동안이나 지체해 있을수도 있다. „ – 대목들이 그것이다. 1 대전이 지난지 얼마 안된 시기에 쓰여진 글에서 우리는 전쟁의 체험이 위대한 메타포리커 Metaphoriker 프로이드를 통해 정신분석 이론의 서술 속으로까지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1926년의 프로이드는 글에서 자신의 정신분석 이론이 단지 정신의학  교과서의 장으로 삼켜져 버리는’ verschluckt werden것을 우려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심층 심리학은 이보다는 나은 운명을 맞이해야 하며 바라건데 그렇게 것이다. 심층 심리학, 정신적 무의식의 이론 Lehre vom seelischen Unbewussten 인간 문화와 예술, 종교 그리고 사회 질서와 같은 인간의 위대한 제도들의 발생사를 다루는 모든 학문들에 필요 불가결한 것이 있을 것이다....분석을 노이로제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하는 다만 하나의 적용일 뿐이다. 추측컨데 미래엔 이것이 제일 중요한 적용 분야가 아니라는 밝혀질 것이다...다양한 인문학 대변자들이 정신분석의 방법과 관점들을 그들의 대상에 적용하기 위해 정신분석을 배워야 한다면, 그건 정신분석 문헌들에 나와있는 결과들에 매달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에게 열려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분석을 이해하는 배워야만 하는데, 이건 그들이 스스로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이루어진다.“ 

2006년의 우리는 프로이드의 모든 추측과 희망들이 마지막 한가지만 놓고는 -  거의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고있다.



[1] Sigmund Freud : Darstellungen der Psychoanlyse, Fischer Taschenbuch Verlag, 1982. S.139-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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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 2 1 "무릎 위에 큰 가방을 올려놓은 채 울면서 어두워져 가는 거리를 지나 역으로 향했다"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를 읽은 독자들은, 그렇게 모스크바에서 베를린으로 돌아온 벤야민의 이후의 삶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궁금해 할 지도 모른다. 근 석달간의 일기를 통해 모스크바에서의 벤야민의 하루 하루를 쫓고, 그의 생각과 감정과 생활을 들여다 볼 수 있었던 우리들에게, 저 2월 1일 이후 벤야민의 삶은, 여전히 저 모든 숫자와 사실과 연표 속에서 추상적이고, 어두우며, 지리한 익명적 기간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선, 시간과 능력이 허락한다면 다음 글에서도, 나는 모스크바에서 보낸 석달 이후의 벤야민의 삶을 저 어둡고 지리한 숫자와 연표들로부터 발굴해내어, 그를 우리의 하루 하루의 삶처럼, 그리고 <모스크바 일기>에서의 그것처럼, 살아있고, 느끼며, 생각하는 인간의 삶으로 만들어 보려고 시도하려 한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벤야민이 한동안 독감에 걸려 앓았어야 했다는 것을, <모스크바 일기>를 읽은 독자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건, 벤야민이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모스크바를 떠나기 전날 추위에 떨며 구경했던 수도원에서 얻은 것이었다.  그 사이에 그는 베를린에 도착한,  모스크바에서 떠나기 전 부쳤던 짐을 받았을 것이다. 거기엔 그가 모스크바 시내를, 떠듬 떠듬, 실수와 추위와 슬픔에 차서 돌아다니다가 구입했던 장난감, 우편엽서, 그리고 검은 칠을 한 상자,  그리고 어쩌면 아샤의 친구, 벤야민이 호의적으로 보았던 그녀 - 이름이 뭐였더라? - 에게 받았던 작은 칼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이 모두가 저 먼 러시아 대륙을 거쳐 다 제대로 도착했을까. 어쨋든 수집가 벤야민은, 소포로 도착한 저 물건들을 하나 하나 열어보며, 다시 그 물건들과 결합되어 있었을 모스크바에서의 추억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두 달 정도의 기간을 쉬면서, 독감에서 어느정도 몸을 회복한 벤야민은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부터 시작하고 있었던 프르스트 번역 작업을 계속 진행해야 했다. 그를 위해 그는 4월 1일 파리로 떠난다.  파리시  Avenue du Parc Montsouris 4 번지에 있는 호텔 Hotel du Midi에서 벤야민은 '창가 방'에 장기 투숙하면서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부터 번역 작업을 해왔고, 이제 글쓰는 작업을 위해 늘 '장소와 도구들'을 까다롭게 가리는 벤야민은 이전에 자신이 작업을 해왔던 바로 그 방을 고집한다.  그리고 그 방에서 그는 그해 10월 20일까지 투숙하며 번역일을 계속했다.  

 

물론, 그 사이 저 "여행 중독자" 벤야민이 계속 파리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그해 6월 5일은 프랑스 투롱 근처에 있는 Pardigon을, 같은 달 15일엔 Nizza를, 그리고 저 '행운의 도시' 니짜에서 룰렛 게임을 통해 딴 돈으로 6월 21일엔 비행기를 타고 코르시카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이해 12월 18일 벤야민은, 첫번째 하시시 프로토콜을 쓴다.  이미 이전부터 프로이드의 무의식 이론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스스로 하시시를 투약하고 나서 그를통해 저 초자아의 억압으로 부터 풀려난 무의식이 어떤 언어를 말하는지를 기록하는, 약물 실험을 시작한 것이다. 벤야민의 이하시시 프로토콜은 이로부터 1934년 5월까지 계속 이어진다.  1940년 스페인 국경에서 벤야민이 극약을 먹고 자살하는 방법을 택한 것도 이런 계속적인 하시시 프로토콜을 통해 익숙해진 약물 복용과도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는 이미 몇년 전부터 자살을 위한 약물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1928년은 벤야민에겐 사실상 아주 생산적인 해였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그는 이해에 저 유명한 <파사지 베르크>의 계획을 세우고 그에 "파리의 파사지"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리고 이 해 1월엔 또한 벤야민의 대표적인 두 저서 <독일 비가극의 기원>과 <일방 통행로>가 출간되기도 했다.  (모스크바에서 벤야민은 아샤에게 아직 출간되지 않았던 '일방 통행로'의 구절들을 읽어주고, 그 표지 그림을 아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는 걸 우린 <모스크바 일기>를 통해 알고있다. )

  

알려져있다시피, 거의 동시에 출판된 책은, 표지와 내용, 문체와 작업 방식에 있어서 크게 상반된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단 한가지 점에선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두 책 모두 벤야민이 사랑하던 여인들에게 헌정되었다는 것이다. 첫번째 책은 자신의 부인이자, 이후 이혼하게 되는 도라 벤야민에게, 두번째 책, 일방통행로는 <모스크바 일기>의 또 다른 주인공 아샤에게다.  이 책을 출판하는 것과 동시에 벤야민은 자신이 계획한 <파리의 파사지> <일방 통행로> 후속편이 것을 예고한다.

 

이해 2 17 벤야민은 앙드레 지드와의 두 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하고 이를 <문학세계> 싣는다. 그는 이후에도 앙드레 지드와의 이 인터뷰를 스스로 자랑스러워했었다. 이해 3월엔 베를린의 서점 Potsdamer Bruecke에서 벤야민이 출판한 책들을 주제로 전시회가 개최되는데, 바로 여기에 벤야민의 친구 여동생이었던 조각가 Jula Cohn 벤야민의 두상을 제작해 선물한다. 그녀는 도라 벤야민, 아샤 라시스와 더불어 벤야민의 삶에 영향을 미쳤던 세번째 여인이기도 했다.

 

5 31일, 결국은 거절당하고 말았던 자신의 교수 자격취득 논문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던 삼촌 Arthur Schoenflies가 사망했다. 그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크프르트를 방문한 벤야민은 6 2 그곳에서 아도르노를 만난다. 이후 아도르노와의 오랜, 복잡하고도 긴 관계가 바로 이날 시작한다. 벤야민은 아도르노에게 자신이 번역한 <Tableaux Parisiens> 헌정했다. 프랑크프르트에서 베를린까지는 독일에서 제일 빠른 고속전차  ICE로도 근 8시간이 걸린다. 당연히 당시에는 이보다 더 걸렸을 것이다. 벤야민은 저 먼 여행을 한꺼번에 기차안에서 보내기 보다는 오는 길, 베를린에서 가까운 다른 도시를 방문하는데 본낸다. 이때 방문했던 바이마르에 대해 그는 자신의 <도시의 상들>에서 기록하고 있다. 

 

9 20 벤야민은  저 조각가 여인 Jula Cohn을 만나기 위해 Lugano 여행을 떠나고, 거기서 다시 Genua Marseille를 방문한다.  모스크바에서 도시에 대한 글들에서 이후의 작업의 가능성을 발견한 그는 이 두 도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인상을 기록한 글을 남긴다. 9월 29일 마르세이유에서 벤야민은 하시시 복용실험을 계속한다.

 

10 7 벤야민은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달, 모스크바에서 약속한대로 아샤가 베를린을 방문한다.  <모스크바 일기>를 읽었던 독자는, 베를린을 방문한 아샤에 대해 벤야민이 느꼈을 저 복잡한 감정 상태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벤야민은 그녀를 원하고 있었지만, 또 한편으론 그녀의 공격성과 히스테리적 짜증, 혁명적 낭만주의 뒤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던 속물성을 감지하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혁명활동'을 하면서도, 유럽 사회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했던 그녀는, 이제 벤야민이 있는 베를린을 방문했고, 그리하여 모스크바에서 헤어진 이 두 사람은 근 1년 반 후에 베를린에서 다시 만난다.

 

모스크바에서 약속했던 것처럼, 벤야민은 그녀를 위해 새로 방을 얻는다.  이들이 11중순 부터 다음해 1월말까지 함께 살았던 곳은 베를린 Duesseldorf 거리 42번지다. 이곳은 벤야민이 이전에 살고있었던 곳과도 그렇게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 베를린 출신의 벤야민이 태어났던곳, 그리고 몇 차례의 이사를 통해 옮겨 살았던 곳들은 모두 한 구역 Chrarlottenburg 에 속해있었다. 

 

 

 

 

 

 

 

 

 

 

 

 벤야민과 아샤가 석달 동안 함께 살았던 이 집은 여전히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이들이 함께 살았던 방은 이 건물 3층, 한국식으로는 4층에 있었다. 아래 사진에서 발콘 창가에 꽃들을 가져다 놓은 곳이 그곳이다.


 이곳에서 이들의 삶은 행복했을까.  유감스럽게도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이 집의 위치에서부터 예상할 수 있다. 산책을 좋아하는 벤야민에게 아샤와 함께 살았던 이 곳은 그렇게 쾌적한 곳은 아니었다. 뒤셀도르프 거리 42번지는 그 자체로도,  베를린의 다른 거리들에 비하면 무척이나 긴 거리였고, 그가 살던 집에서 나와 왼쪽으로 약 30미터 정도만 나가면 그보다 더 큰 자동차 도로가 나온다. 그곳을 지나다니던 차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은, 그렇지 않아도 예민한 벤야민과 아샤의 베를린 생활을 그리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벤야민이 살았던 젤렌도르프의 빌라에서와는 달리 여기선, 산책을 즐길만한 숲이나 공원이 그렇게 가까이 있지도 않다.

모스크바에서 벌어졌던 이 두 명의 복잡한 연인 이의 긴장감은 이들이 이 곳에서 함께 사는 동안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고, 이는 이들 재회한 연인들이 이 곳에서 그렇게 다감하고 아기자기하게만 살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걸 짐작케 한다.  이 시기 벤야민은 숄렘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린 여기서 개와 고양이처럼 살고있다" 고 전한다.  그렇지 않아도 이 둘의 관계를 못마땅해하던 숄렘이 <모스크바 일기>에서 이들의 관계에 대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불평하는 것도 이유가 없지 않았다. 

이곳 42번가 건물의 출입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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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02-05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반가운 글이군요. 퍼갑니다. 고맙습니다. (__)

로드무비 2006-02-06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김남시 2006-02-07 0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Urblue 님, 로드무비님. 감사합니다. 이상하게도 책이 있는 곳에 이 페이퍼가 연결되어 뜨지 않아서 다시 올렸습니다.
 

박물관은 물건들의 대도시다. 거기엔 자신이 원래 속해있던 장소와 시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물건들이, 마치 태어나 살던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몰려든 실향민들처럼 모여있다. 자신이 있던 장소를 떠나 여기, 인위적이고 제도적인 장소 박물관에 모인 저 물건들은, 다만 명찰처럼 붙어있는 안내판을 통해서만 자신이 떠난 장소와 시간을 이야기한다. 태어나고, 속해있던 장소를 통해 특징지워져야 할 저 물건들의 정체성은 여기선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의 컨셉에 따른 새로운 사물의 질서 속에 재배치되어, 그 속에서 자신의 역할과 임무를 부여받는다.

도시에 살고있는 ‘장소를 잃은’ 사람들이 그래도 사투리를 통해 육체에 남겨진 자신의 장소의 흔적을 드러낸다면, 문외한인 우리에게 저 물건들의 육체는 그들 장소의 어떤 흔적도 말해주지 않는다. 박물관에 모인 저 물건들의 무장소성 Ortslosigkeit은 또한 그 물건들의 무시간성을 결합되어 있다. 원래의 장소에서라면 시간 속에서 변하고, 퇴색하고, 허물어지며 사라져갈 저 물건들은 여기 박물관에선 방습기와 전문적 처리를 통해 시간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 보존되어 있다. 서로 다른 시간, 나아가 서로 다른 시대의 수많은 물건들이 ‘지금과 여기’의 한 장소에 모여있음으로써 박물관은 저 무시간성의 특성을 배가시킨다.

박물관은 수십년, 아니 수백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을 지니고 있는 저 많은 물건들을 단 몇시간 동안에 일별할 수 있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과거의 시간들을 응축된 형태로 체험할 수 있게 해 준다. 며칠, 아니 몇십년에 걸쳐 일어난 이야기를 단 두시간 반에 응축해 보여주는 영화적 지각에 익숙해있는 우리에게 박물관은 저 장소를 잃은 다양한 시대의 물건들이 번갈아 가며 출연하는 무성영화관 같다.

 박물관의 물건들은 자신의 아우라를 박물관이라는 장소의 권위로부터 얻는다. 원래의 장소와 시간과 결부되어 있던 저 물건들의 아우라는 이제, 이 물건이 진품임을 보증해주는 박물관의 제도적 권위에 의해 생겨난다. 복제기술의 발달이 물건들을 자신의 원래의 장소와 시간으로부터 해방시켰고 그를통해 그와 결합되어 있던 아우라를 상실케 했다면, 이제 사람들은 그 복제품들과 구별되는 (혹은 구별되어야 할) ‘오리지널’을 박물관이라는 장소에 갖다 놓음으로써 물건들의 잃어버린 아우라를 박물관의 아우라를 통해 상쇄하려 했다. 박물관들은 그곳에 유명한 물건들의 ‘오리지널’이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통해 자신들의 권위와 아우라를 만들어내었고, 또 이렇게 생겨난 박물관의 권위와 아우라는 역으로 그곳에 소장되어 있는 물건들의 ‘진품성’을 강화시켜 주는 제도적 바탕이 된다. 런던의 대영 박물관, 파리의 루브르,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들은 그들이 소장하고 있는 ‘오리지널’을 통해 자신들의 권위와 아우라를 얻었고, 또 그를통해 그곳에 전시되고 있는 물건들의 진품성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킨다. 자신의 원래의 장소를 잃어버린 물건들은 이렇게, 박물관이라는 장소의 제도적 아우라를 통해 자신의 상실했던 아우라를 보상받는다.

사진과 화보, 인터넷 등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구경할 수 있는 물건들을 굳이 저 ‘유명한’ 박물관들에 가서 보고 싶어하는 우리들은, 우리처럼 자신의 장소와 시간을 잃어버린 물건들이 보여주는 커리어의 변신을 동경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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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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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글에는 두려움이 없다. 거기엔 자신의 욕망이, 자신의 열정이, 그리고 열정을 부끄러워하는 수줍은 억압이 동시에 존재한다. 누군가에게 보여질 없다는, 아니 누군가에게 사실은 보여지기를 바라는 속엔 그래서, 풋기어린 솔직함이 있다, 혁명과 사랑과 열망이 있다.

 

나이가 들면서 글은 팽팽한 욕망과 감춤의 긴장감을 잃는다. 글은 누군가에게 보여질 있으며, 아니 누군가에게 보여져야만 한다. 그래서, 거기엔 삶의 과정을 통해 나에게 들쒸워진, 나의 위치와 나의 지위와, 나의 입장에 걸맞는 적절한 규제가 작용한다. 글은 다듬어지고, 감추어지며, 의도에 따라 가공된다.

 

그러나, 자기와의 대면으로서의 글은 가슴 깊은 곳에 눌러붙은 수치와 욕망을 완전히 감추어둘 수는 없다. 말과 , 문장과 문장 사이를 비집고 부끄러운 열망과 수줍었던 과거는 그래서, 얼핏 얼핏 꿈틀대는 자신의 몸통을 드러내고 만다. 그렇게 드러난 속살은 그래서, 사실은 모두가, 우리 모두가 알고있는 삶의 깊은 비애의 흔적이다. 그런 글을 읽는 것은 애처러움으로 인해 고통스럽다.

 

황지우의 글이 주는 불편함은 여기서 기인한다. 이상 그를 자극할 아무 욕망이 남아있지 않음으로 인해 이상 자신의 삶의 욕망을 목청껏 외쳐보지도, 그를 고문하던 세상 속에 자리잡고 살아감으로 인해 이상 세상을 향해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게 되어버린 중년의 삶은, 우리 삶의 괘적이 갖는 비애로움의 전형을 이룬다. 그러나, 그가, 그의 글이 살아남은 자로서의 수치스런 부끄러움을, 그가 몸담고 있는 세상의 화평스러운 안위를 견디지 못해 갸날픈 한숨 조각을 내쉴 , 우린 긴장한다. 사회인으로서의 그와 시인으로서의 그가 벌이는 한바탕의 숨죽인 싸움이, 가려놓은 칸막이 사이로 흘끗 들여다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시인인지라 이렇게 드러난 부끄러운 싸움을 굳이 다시 감추려 들지 않는다.

 

김훈은 결코 부끄러운 속살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글엔 삶의 비애와 사라져가는 것들의 회환, 자연질서가 갖는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는 있지만, 정작 인간 김훈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입을 통해, 그의 가슴을 통해 말해진 같은 문장들은 사실은 그의 것이 아니다. 그가 자신을 드러내었던 경우는 가난한 산골의 아이들이 번쩍거리는 그의 비싼 미제 산악 자전거를 부러워할 그가 느꼈다는무안함정도일 것이다.

 

그의 글은 유려하다. 그의 글엔 우릴 불편하게 하는 부끄러운 욕망과 현실의 싸움이 비잡고 나올 틈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글은 깊은 울림을 갖는다. 그러나, 울림은 우리 자신의 부끄러움을 상기시킴으로써 생겨나는 불편함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세상에 대해 아무 것도 욕망할 것도 없는, 그래서 안전한 위치에 있는 우리가 양주를 마시듯 즐길 있는 편안한 울림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에 대해 모를 열정을 가질만큼 젊지도 않으며, 까닭모를 반항과 피해의식으로 세상을 향해 공격을 퍼부어 만큼 가난하지도, 못배우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여행하면서 바라보는 삶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은 그가 그 삶속에 배여있는 고통들에 직접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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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2-06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황지우와 김훈의 글에 대한 님의 생각, 입을 벌리고 갑니다.^^
 



베를린에 놀러온 사촌동생이 가져다 준 한국 담배갑에는
건강을 해치는 담배 그래도 피우시겠습니까?“라는 점잖은 경고문이 써있다. 담배갑마다 적혀있는 저 경고문이 흡연자의 건강을 염려하는 담배회사의 친절한 배려의 소산이 아니라는 걸 고려하더라도 어쩔수 없지 않느냐는 듯조그맣게 붙어있는 경고문은 그 강도나 구체성면에서 무척이나 소극적이다. 유럽 연합의 결정에 따라 작년부터 유럽에서 판매되는 모든 담배갑에는 담배갑 절반 크기의 두터운 글씨로 흡연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흡연은 정자생산 기능을 손상시켜 임신률을 감소시킴니다“, „흡연은 혈관들을 막히게 해 심장발작과 졸도를 일으킵니다“, „흡연은 당신과 당신 주변의 사람들에게 심대한 피해를 입힙니다.“ 등의 무시무시하고 자극적인 문구들이 담배갑마다 다양하게 쓰여져있다. 한국 담배갑의 그것이 가족 시간대에 방영되는 일일연속극 같다면, 유럽의 그것은 하드코어 포르노라고나 할까. 이것도 모자라 유럽연합은 글자 대신 흡연으로 손상된 폐나 간, 후두부의 컬러사진을 담배갑에 부착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이처럼 그 강도나 자극성의 수준에서 다양하긴 하지만 흡연의 육체적, 사회적 해악들을 지시하는 경고문을 통해 흡연률을 억제하겠다는 발상엔 인간에 대한 특정한 철학적 입장이 전제되어 있다. , 인간은 이성적 판단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규제할 수 있는 존재라는 입장이 그것이다. 과연 인간의 의지는 이성적 판단을 통해 제어될 수 있을까.

1637 <방법서설>에서의 데카르트는 그에대해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성이 의지에 우선한다는 소크라테스적 전통에서 데카르트는 우리의 의지voltonté는 본성적으로 우리의 이성 entendement lui 어떤 식으로든 가능한 것으로 제시하는 것들만을 욕구할 있다. notre voltonté ne se portant naturellement à désirer que les choses que notre entendement lui représente en quelque façon comme possibles“[1] 말한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얻을 없는 외부세상의 무엇인가에 대한 집착으로 괴로와 하지말고 자신이 최선을 다해 도달한 것에 만족하라는 그의 임시적인 도덕 une morale par provision 세번째 격률을 가능케 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세상의 무엇인가가 자신의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는 확실히 인식한다면 그에대해 이상 욕구하지 않을 있는 이성적 존재다. ‚저것은 내가 얻을 없는 이라는 확실한 이성적 인식이 있다면 우리의 의지는 그를 더이상 욕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이성은 이처럼 자신에게 불가능한 것을 단념하고 세계의 질서가 아니라 나의 욕구를 바꾸게 à changer mes désires que l’ordre du monde“[2] 하는 체념적 방식으로만 의지에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인간의 의지, 욕구능력은 대상에 대한 이성적 판단에 온전히 종속되어 있다. 의지는 이성이 좋다고 판단하는 것만을 욕구하며, 이성이 싫다고 판단하는 것은 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의 이성이 좋거나 나쁜 것으로 제시하는 한에 있어서만 그를 따르거나 회피할 있기 때문에, 올바르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올바르게 판단하는 만으로도 충분하며, 최선으로 행동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모든 덕과 나아가 인간이 얻을 있는 모든 다른 가치들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최선으로 판단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d’autant que, notre volonté ne se portant à suivre ni à fuir aucune chose, que selon notre entendement la lui représente bonne ou mauvais, il suffit de bien juger, pour bien faire, et de juger le mieux qu’on puisse, pour faire aussi tout son mieux, c’est-à-dire pour acquérir toutes les vertus, et ensemble tous les autres biens, qu’on puisse acquérir“[3].

바로 지점에서 데카르트는 담배갑에 경고문을 부착함으로써 흡연을 줄일 있다고 믿는 이성주의자들의 철학적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만일 우리의 이성이 흡연의 해악에 대해 올바르게 판단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의지는 그를 피하려 것이다. 마치 맛없을 것이라 판단한 음식을 사먹지 않고 흥미롭지 않으리라 판단한 책을 구입하지 않듯 말이다. 그 누가 자신에게 나쁘고 위해하다고 판단되는 걸 욕구하며, 좋고 유익하다고 여겨지는 걸 일부러 거부하겠는가.

그러나, 사실 데카르트의 주장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있다. 그는 우리의 의지가 본성적으로 이성이 가능하다고 제시하는 것 만을 욕구할 수 있으며 ne se portant naturellement à désirer[4], „이성이 좋거나 나쁘다고 제시하는 만을 따르거나 피할 있다 ne se portant à suivre ni à fuir“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만일 우리의 이성이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을 통해 세상의 모든 선함과 옳음, 악함과 나쁨을 올바르게 구분하고 판단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의지는 그에 의해 나쁘고, 악하며 옳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 것들을 아예 욕구하지도 못한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데카르트에겐 올바르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며, 최선으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최선으로 판단하는 것만으로 충분하게 되는 것이다. [5]

거꾸로 이는 누군가의 올바르지 못하고, 비도덕적인 행동은 그가 세계와 사물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된다. 저 위대한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의 세계엔 살인자도, 유괴범도, 테러리스트도, 독재자도 천성적으로 악한사람들이 아니라, 다만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한, 말하자면 이성적 판단능력이 결여된인간들일 뿐이다. 그리고 그건 개선될 수 있다!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능력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주의와 노력을 통해 개선될 수 있으며[6], 나아가 모든 인간에게는 동등하게 본성적으로 올바르게 판단하며, 진리와 허위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기[7] 때문이다. 부적절하고 비도덕적 행위를 한 사람들을 죽이거나 사회로부터 추방시키는 대신, 이후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교화시키고 교육시키는 사회적 장치들이 등장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철학적 배경에서다.  

우리의 담배갑 경고문으로 다시 돌아가자. 흡연이 자신의 육체에 해로울 뿐 아니라, 나아가 주변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큰 피해를 끼치는지를 알려주는 저 경고문은 흡연의 해악에 대한 이성적 판단을 촉발함으로써 담배를 피고싶은 욕구가 생겨나지 않게하는 목표를 갖는다. 사람들이 저토록 해악한 담배를 피고 있는 것은 그들이 담배의 유해함에 대해 명석하고 판명하게 clairement et distinctement 판단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며, 이제 저 경고문은 그 판단을 도와 흡연에의 의지를 변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저 경고문이 사실상 흡연자의 의지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는 걸 우리는 하루에도 수차례 경고문들을 들여다보면서도 담배를 펴대는 흡연자들을 보면서 확인한다. 어째서일까? 혹시 저 경고문이 의지를 변화시킬 만큼 명석하고 판명한 판단을 전달해주지 못해서는 아닐까.  Principia Philosophiae에서 데카르트가 정의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무엇인가가 바라보고 있는 눈에 현전하면서 눈을 충분히 강하고 분명하게 자극하여 우리가 그를 확실히 보고 있다라고 말할 때처럼, 어떤 인식이 주목하고 있는 정신에 현전하면서 명백할 때 이를 명석하다고 부르며, 한 인식이 그 명석함을 전제로 그 속에 자신의 특징들외엔 다른 어떤 것도 지니지 않을 만큼 다른 것들과는 분명하게 분리되고 구분될 때 이를 판명하다고 부른다. Klar nenne ich die Erkenntnis, welche dem aufmerkenden Geiste gegenwärtig und offenkundig ist, wie man das klar sehen nennt, was dem schauenden Auge gegenwärtig ist und dasselbe hinreichend kräftig und offenkundig erregt. Deutlich nenne ich aber die Erkenntnis, welche, bei Voraussetzung der Klarheit, von allem Übrigen so getrennt und unterschieden ist, dass sie gar keine anderen als klare Merkmale in sich enthält.“[8]

말하자면 머리 속에 어떤 대상이 마치 우리가 그를 눈으로 관찰하듯 분명하고도 확실한 그림으로 떠오르면서도 동시에 그를 그와 유사한 다른 대상들로부터 명백하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한 상을 가지고 있다면 우린 그러한 인식을 명석하고도 판명한 인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준에서 보자면 건강을 해치는 담배, 그래도 피우시겠습니까?“라는 경고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인식은 흡연은 혈관들을 막히게 하여 심장발작과 졸도를 일으킵니다.“라는 유럽 담배갑의 그것에 비해 무척이나 불명료하고 혼연스럽다. 저 문장은 우리에게 담배의 위해함에 대한 어떤 확실하고 분명한 그림도 제공하지 않으면서도, 시커먼 배기가스를 뿜어대는 자동차 뒷면에 붙어있는 환경보호 슬로건같다.        



[1] René Descartes : Discours de la Méthode, Troisiéme Partie AT 24, 25.

[2] René Descartes : Discours de la Méthode, Troisiéme Partie AT 24, 25.

[3] René Descartes : Discours de la Méthode, Troisiéme Partie, 4.

[4]  René Descartes : Discours de la Méthode, Troisiéme Partie, 4.

[5] 이러한 점에서 이성적 판단의 기준을 세우고자 하는 데카르트의 철학적 기획은 단지 인식론적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윤리적이기도 하다.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을 통해 올바른 이성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동시에 데카르트에겐 윤리적 정언명법이었다는 것이다. 그에겐 모든 사람이 올바른 이성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면 범죄나 비 윤리적 행위들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6] René Descartes : Discours de la Méthode, Troisiéme Partie, 2.

[7] René Descartes : Discours de la Méthode, Premiere Partie. 1.

[8] René Descartes : Principia Philosophiae, I, 45.

[9] René Descartes : Discours de la Méthode, S.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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