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2월 1일 "무릎 위에 큰 가방을 올려놓은 채 울면서 어두워져 가는 거리를 지나 역으로 향했다"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를 읽은 독자들은, 그렇게 모스크바에서 베를린으로 돌아온 벤야민의 이후의 삶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궁금해 할 지도 모른다. 근 석달간의 일기를 통해 모스크바에서의 벤야민의 하루 하루를 쫓고, 그의 생각과 감정과 생활을 들여다 볼 수 있었던 우리들에게, 저 2월 1일 이후 벤야민의 삶은, 여전히 저 모든 숫자와 사실과 연표 속에서 추상적이고, 어두우며, 지리한 익명적 기간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선, 시간과 능력이 허락한다면 다음 글에서도, 나는 모스크바에서 보낸 석달 이후의 벤야민의 삶을 저 어둡고 지리한 숫자와 연표들로부터 발굴해내어, 그를 우리의 하루 하루의 삶처럼, 그리고 <모스크바 일기>에서의 그것처럼, 살아있고, 느끼며, 생각하는 인간의 삶으로 만들어 보려고 시도하려 한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벤야민이 한동안 독감에 걸려 앓았어야 했다는 것을, <모스크바 일기>를 읽은 독자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건, 벤야민이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모스크바를 떠나기 전날 추위에 떨며 구경했던 수도원에서 얻은 것이었다. 그 사이에 그는 베를린에 도착한, 모스크바에서 떠나기 전 부쳤던 짐을 받았을 것이다. 거기엔 그가 모스크바 시내를, 떠듬 떠듬, 실수와 추위와 슬픔에 차서 돌아다니다가 구입했던 장난감, 우편엽서, 그리고 검은 칠을 한 상자, 그리고 어쩌면 아샤의 친구, 벤야민이 호의적으로 보았던 그녀 - 이름이 뭐였더라? - 에게 받았던 작은 칼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이 모두가 저 먼 러시아 대륙을 거쳐 다 제대로 도착했을까. 어쨋든 수집가 벤야민은, 소포로 도착한 저 물건들을 하나 하나 열어보며, 다시 그 물건들과 결합되어 있었을 모스크바에서의 추억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두 달 정도의 기간을 쉬면서, 독감에서 어느정도 몸을 회복한 벤야민은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부터 시작하고 있었던 프르스트 번역 작업을 계속 진행해야 했다. 그를 위해 그는 4월 1일 파리로 떠난다. 파리시 Avenue du Parc Montsouris 4 번지에 있는 호텔 Hotel du Midi에서 벤야민은 '창가 방'에 장기 투숙하면서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부터 번역 작업을 해왔고, 이제 글쓰는 작업을 위해 늘 '장소와 도구들'을 까다롭게 가리는 벤야민은 이전에 자신이 작업을 해왔던 바로 그 방을 고집한다. 그리고 그 방에서 그는 그해 10월 20일까지 투숙하며 번역일을 계속했다.
물론, 그 사이 저 "여행 중독자" 벤야민이 계속 파리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그해 6월 5일은 프랑스 투롱 근처에 있는 Pardigon을, 같은 달 15일엔 Nizza를, 그리고 저 '행운의 도시' 니짜에서 룰렛 게임을 통해 딴 돈으로 6월 21일엔 비행기를 타고 코르시카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이해 12월 18일 벤야민은, 첫번째 하시시 프로토콜을 쓴다. 이미 이전부터 프로이드의 무의식 이론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스스로 하시시를 투약하고 나서 그를통해 저 초자아의 억압으로 부터 풀려난 무의식이 어떤 언어를 말하는지를 기록하는, 약물 실험을 시작한 것이다. 벤야민의 이하시시 프로토콜은 이로부터 1934년 5월까지 계속 이어진다. 1940년 스페인 국경에서 벤야민이 극약을 먹고 자살하는 방법을 택한 것도 이런 계속적인 하시시 프로토콜을 통해 익숙해진 약물 복용과도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는 이미 몇년 전부터 자살을 위한 약물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1928년은 벤야민에겐 사실상 아주 생산적인 해였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그는 이해에 저 유명한 <파사지 베르크>의 계획을 세우고 그에 "파리의 파사지"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리고 이 해 1월엔 또한 벤야민의 대표적인 두 저서 <독일 비가극의 기원>과 <일방 통행로>가 출간되기도 했다. (모스크바에서 벤야민은 아샤에게 아직 출간되지 않았던 '일방 통행로'의 구절들을 읽어주고, 그 표지 그림을 아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는 걸 우린 <모스크바 일기>를 통해 알고있다. )
잘 알려져있다시피, 거의 동시에 출판된 이 두 책은, 그 표지와 내용, 문체와 작업 방식에 있어서 크게 상반된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단 한가지 점에선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두 책 모두 벤야민이 사랑하던 여인들에게 헌정되었다는 것이다. 첫번째 책은 자신의 부인이자, 이후 이혼하게 되는 도라 벤야민에게, 두번째 책, 일방통행로는 <모스크바 일기>의 또 다른 주인공 아샤에게다. 이 책을 출판하는 것과 동시에 벤야민은 자신이 계획한 <파리의 파사지>가 <일방 통행로>의 후속편이 될 것을 예고한다.
이해 2월 17일 벤야민은 앙드레 지드와의 두 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하고 이를 <문학세계>에 싣는다. 그는 이후에도 앙드레 지드와의 이 인터뷰를 스스로 자랑스러워했었다. 이해 3월엔 베를린의 서점 Potsdamer Bruecke에서 벤야민이 출판한 책들을 주제로 한 전시회가 개최되는데, 바로 여기에 벤야민의 친구의 여동생이었던 조각가 Jula Cohn이 벤야민의 두상을 제작해 선물한다. 그녀는 도라 벤야민, 아샤 라시스와 더불어 벤야민의 삶에 영향을 미쳤던 세번째 여인이기도 했다.
5월 31일, 결국은 거절당하고 말았던 자신의 교수 자격취득 논문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던 삼촌 Arthur Schoenflies가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크프르트를 방문한 벤야민은 6월 2일 그곳에서 아도르노를 만난다. 이후 아도르노와의 오랜, 복잡하고도 긴 관계가 바로 이날 시작한다. 벤야민은 아도르노에게 자신이 번역한 <Tableaux Parisiens>를 헌정했다. 프랑크프르트에서 베를린까지는 독일에서 제일 빠른 고속전차 ICE로도 근 8시간이 걸린다. 당연히 당시에는 이보다 더 걸렸을 것이다. 벤야민은 저 먼 여행을 한꺼번에 기차안에서 보내기 보다는 오는 길, 베를린에서 가까운 다른 도시를 방문하는데 본낸다. 이때 방문했던 바이마르에 대해 그는 자신의 <도시의 상들>에서 기록하고 있다.
9월 20일 벤야민은 저 조각가 여인 Jula Cohn을 만나기 위해 Lugano로 여행을 떠나고, 거기서 다시 Genua와 Marseille를 방문한다. 모스크바에서 도시에 대한 글들에서 이후의 작업의 가능성을 발견한 그는 이 두 도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인상을 기록한 글을 남긴다. 9월 29일 마르세이유에서 벤야민은 하시시 복용실험을 계속한다.
10월 7일 벤야민은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달, 모스크바에서 약속한대로 아샤가 베를린을 방문한다. <모스크바 일기>를 읽었던 독자는, 베를린을 방문한 아샤에 대해 벤야민이 느꼈을 저 복잡한 감정 상태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벤야민은 그녀를 원하고 있었지만, 또 한편으론 그녀의 공격성과 히스테리적 짜증, 혁명적 낭만주의 뒤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던 속물성을 감지하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혁명활동'을 하면서도, 유럽 사회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했던 그녀는, 이제 벤야민이 있는 베를린을 방문했고, 그리하여 모스크바에서 헤어진 이 두 사람은 근 1년 반 후에 베를린에서 다시 만난다.
모스크바에서 약속했던 것처럼, 벤야민은 그녀를 위해 새로 방을 얻는다. 이들이 11중순 부터 다음해 1월말까지 함께 살았던 곳은 베를린 Duesseldorf 거리 42번지다. 이곳은 벤야민이 이전에 살고있었던 곳과도 그렇게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 베를린 출신의 벤야민이 태어났던곳, 그리고 몇 차례의 이사를 통해 옮겨 살았던 곳들은 모두 한 구역 Chrarlottenburg 에 속해있었다.

벤야민과 아샤가 석달 동안 함께 살았던 이 집은 여전히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이들이 함께 살았던 방은 이 건물 3층, 한국식으로는 4층에 있었다. 아래 사진에서 발콘 창가에 꽃들을 가져다 놓은 곳이 그곳이다.

이곳에서 이들의 삶은 행복했을까. 유감스럽게도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이 집의 위치에서부터 예상할 수 있다. 산책을 좋아하는 벤야민에게 아샤와 함께 살았던 이 곳은 그렇게 쾌적한 곳은 아니었다. 뒤셀도르프 거리 42번지는 그 자체로도, 베를린의 다른 거리들에 비하면 무척이나 긴 거리였고, 그가 살던 집에서 나와 왼쪽으로 약 30미터 정도만 나가면 그보다 더 큰 자동차 도로가 나온다. 그곳을 지나다니던 차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은, 그렇지 않아도 예민한 벤야민과 아샤의 베를린 생활을 그리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벤야민이 살았던 젤렌도르프의 빌라에서와는 달리 여기선, 산책을 즐길만한 숲이나 공원이 그렇게 가까이 있지도 않다.
모스크바에서 벌어졌던 이 두 명의 복잡한 연인 이의 긴장감은 이들이 이 곳에서 함께 사는 동안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고, 이는 이들 재회한 연인들이 이 곳에서 그렇게 다감하고 아기자기하게만 살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걸 짐작케 한다. 이 시기 벤야민은 숄렘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린 여기서 개와 고양이처럼 살고있다" 고 전한다. 그렇지 않아도 이 둘의 관계를 못마땅해하던 숄렘이 <모스크바 일기>에서 이들의 관계에 대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불평하는 것도 이유가 없지 않았다.
이곳 42번가 건물의 출입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