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적 소유의 기원
„아득한 옛날에 한편에는 부지런한 엘리트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게으른 룸펜이 있었다. 전자는 부를 축적하였고 후자는 결국 자기 가죽말고는 아무 것도 팔 것이 없게 되었다. 이 원죄로부터 다수 대중의 빈곤이 시작되었는바, 그들은 노동을 계속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자신말고도 아무 것도 팔 것을 가지지 못하고, 소수자들의 부는 그들이 이미 오래전에 일하기를 그만두었음에도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맑스가 „설화 Anekdote“ 혹은 „어린애 같은 이야기Kinderei“ 라고 지칭하며 ‚비판’하는 – 하지만 결국 ‚극복’하지는 못하는 - 이 시나리오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사적 소유의 근원에 대한 존 록크로의 철학에서 출발한다. 1689년 존 록크는 Two Treatises of Government. : An Essay Concerning the True Origin, Extent, and End of Civil Government 에서 애초에 신에 의해 인간 모두에게 공통으로 주어진 자연의 사물들로부터 어떻게 사적소유가 생겨나게 되었을까라는 물음을 던지고 이것이 „노동“에 근원을 갖는다고 말한다. 모든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던 땅을 경작해 수확물을 거두어 들이고, 야생 동물들을 길들이며, 흙, 나무, 돌 등의 자연물들을 가지고 인간이 살 수있는 주거공간을 만드는 등의 ‚노동labour’ 을 통해 인간은 그 노동의 산물을 „다른 사람 모두에게 속하지 않는 did not belong in common to others“ „자신만의 것 his own“으로 삼을 권리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From all which it is evident, that though the things of nature are given in common, yet man, by being master of himself, and proprietor of his own person, and the actions or labour of it, had still in himself the great foundation of property; and that, which made up the great part of what he applied to the support or comfort of his being, when invention and arts had improved the conveniencies of life, was perfectly his own, and did not belong in common to others.“
애덤 스미스나 데이비드 리카도의 정치 경제학이 사적 소유의 근원을 노동에서 찾는 로크의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나아가 이것이 생산물들의 가치를 그를 생산하는데 투여된 ‚노동의 양’에서 찾는 노동 가치설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철학사적 상식에 속한다. 노동을 사적 소유와 가치의 근원으로보는 이러한 철학적 입장이 정치경제학의 „시초축적“에 관한, 맑스가 전하는 시나리오의 근거를 이루고 있다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곧, „시초에 부지런히 노동했던 자들이 재산과 부를 축적해 더 이상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자본가가 되었고, 그때 게으름을 피며 노동하지 않던 자들은 결국 자기 몸뚱아리 밖에는 아무 것도 내다 팔게 없는 노동자가 되었다“ 는 것이다.
<자본론> 24장 „소위 시초 축적에 대하여“에서 정치 경제학의 이러한 시초축적 이론이 갖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성경의 ‚원죄 설화’와 비교하며 비판하는 맑스는 사적 소유에 대해 이와는 다른 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맑스는 여기서 사적 소유의 근원이 ‚노동’에 있다고 보는 정치경제학자들에 반해, 사적 소유 자체가 노동이 아니라, 정복, 노예화, 강탈, 살인과 같은 ‚폭력’에서 기인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바로 그로부터 맑스는 저 폭력적 근원을 갖는 부당한 사적 소유 일반을 철폐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사적소유와 시초축적
사적소유에 관한 맑스와 정치경제학의 입장 사이의 차이 혹은 동일성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부분을 우리는 25장 <근대적 식민이론> 첫문장에서 찾을 수 있다. „정치경제학은 자신의 노동에 근거하는 사적소유와 그것의 제거 Vernichtung에 기인하고, 거기에 극단적으로 diametral 대립되어있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를 편안하게 혼동Verwechselung하고 있으며 원리적으로 그 혼동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여기서 맑스가 ‚자본주의적 사적소유 das kapitalistische Eigentum’ 에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자신의 노동에 근거하는 사적소유 das auf eigener Arbeit beruhende Privateigentum“의 특징은 그것이 „고립되고 독립적인 노동 개인들이 자신의 노동 조건들과의 밀접한 관계 Verwachsung“속에서 행한 노동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곧, 이것은 노동하는 개인들이 자신의 노동조건, 가장 주요하게는 자신의 생산수단을 직접 소유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이며, 그 결과 이 노동의 산물은 그 노동을 한 개인들의 사적인 것으로 된다. 그러한 점에서 맑스가 말하는 ‚자신의 노동에 근거하는 사적소유’는 로크가 말했던 개인들의 노동에 의해 그 정당성이 확보되는 사적 소유 (편의상 이를 ‚본원적 사적소유’라고 부른다)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맑스가 자신의 노동에 근거한 이러한 본원적 사적 소유를 원리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가 그러한 본원적 사적소유에 대한 폭력적 착취를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근본적 특징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맑스에 의하면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는 이러한 본원적 사적소유의 ‚부정’이자 ‚억압’의 결과다.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는„개인적이고 자신의 노동에 근거하고 있는 사적소유의…부정 Negation이다.“ „고립되고 독립적인 노동개인들과 자신의 노동조건들과의 밀접한 관계 Verwachsung에 근거하고 있는 사적소유는, 형식상으로는 자유로운 타인의 노동에 대한 착취 Exploitation에 기인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에 의해 억압 verdranegt 된다.:
이러한 본원적 사적소유와 그것의 부정과 억압에 의해 이루어진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를 구분하지 않는 – 혹은 의도적으로 혼동시키는 - 정치경제학은 그를통해 자본주의적 사적소유가 마치 본원적 사적 소유의 역사적 계승자인 것처럼 이야기함으로써 그를 정당화시킨다. 정치경제학이 내세우는 „소위 시초축적“의 시나리오는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를 저 본원적 사적소유와 매끄럽게, 단절없이 연결시키기 위한 담론적 장치다. 그 목적은 그를통해 끊임없이 부를 축적하는 자본가와 자신의 노동력 말고는 팔 것이 없는 노동자라는 현재의 상태가 저 본원적 사적소유의 „현실적 귀결“인 것처럼 이해되기 위함이다.
맑스와 시초축적
따라서 맑스의 ‚시초축적’에 대한 비판은 두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저 소위 ‚시초축적’이라는 사고방식 자체가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를 탄생시켜 자본주의적 양식을 출발시키게 했던 실제적 역사과정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초축적’ 시나리오에 의해 은폐되고 있는 자본과 자본주의 양식의 전사를 구체적이고 실증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시초축적의 비밀> 절의 첫 구절은 위에서 언급했던 첫번째 과제, 곧 „소위 sogenannte“ 시초축적이라는 시나리오가 하나의 허위적 ‚가상’ 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돈이 자본으로 전환되는지, 자본을 통해 어떻게 잉여여가치가 생겨나고 잉여가치로부터 어떻게 더 많은 자본이 만들어지는지를 보았다. 여기에서 자본의 축적은 잉여가치를 전제하고, 잉여가치는 자본주의적 생산을 전제하며, 자본주의적 생산은 상품생산자들의 수중에 상당한 양의 자본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따라서 이 모든 과정은 자본주의적 축적에 선행하는 ‚시초’ 축적 (아담 스미스에게서의 이전의 축적)을 전제하고 있는 듯 scheint하다. 곧,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결과가 아니라 그 출발점을 이루는 축적말이다.„ 맑스는 여기서 분명하게 자본주의적 축적에 선행한다는 ‚시초축적’이란 다만 그렇게 드러나 보이는 scheint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 때문에 맑스는 시초축적 앞에 „소위 sogenannte’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 실지로 정치경제학자들에게 시초축적이라고 현상하는 것은 사실상은 „생산자와 생산 수단사이의 역사적인 분리 과정“, 곧 „한편으로는 사회적인 생활과 생산수단을 자본으로 전환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적 생산자들을 임금노동자로 전환시키는 과정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자본주의적 사적소유가 본원적 사적소유를 축출하는 과정이기도 한 이러한 역사적 과정이 „시초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erscheint것은 그 과정이 자본과 그에 상응하는 생산양식의 전사 Vorgeschichte를 이루기 때문이다.“
자본의 순환과 축적을 완결된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부에만 갇혀 바라보고,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를 본원적 사적소유와 의도적으로 혼동하고 있는 정치경제학자들에게 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전사 Vorgeschichte는 초월적이고 탈역사적인 근원 Ursprung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정치경제학자들의 소위 시초축적 시나리오에 대해 맑스는 2절부터 자본과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전사를 이루었던 구체적인 역사적 과정 – 농만으로부터 토지수탈, 피수탈자에 대한 피의 입법 등 - 을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증거들을 통해 제기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정치경제학자들의 ‚시초축적’ 이론에 대한 맑스의 ‚시초축적’이론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치경제학자들에게는 „시초축적’으로 ‚현상하는’ 자본과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전사를 서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역사적 과정은 „자신의 노동에 근거해있는 사적 소유가 해소 Auflösung“되고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로 전환되는 과정이며, 그와 동시에 „자본의 역사적 생성 Genesis“의 과정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와 폭력
맑스가 <소위 시초축적> 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본원적 사적소유“가 생겨나게 되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자본주의적 사적소유“가 생겨나게 되었는가이다. 부지런한 개인의 노동에서 기원한 본원적 사적소유를 인간의 자연적 권리 Naturrecht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맑스는 정치 경제학자들과 입장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와 관련해 맑스는 이들 정치경제학자들과 단호히 결별한다. 정치경제학자들이 소위 „시초축적“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자본주의적 사적소유가 본원적 사적 소유의 정당한 역사적 계승물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를 정당화시키려 하는데 반해, 맑스는 전자와 후자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과 불연속, 단절을 강조함으로써 이 주장을 반박한다.
맑스에게 있어 본원적 사적소유와 자본주의적 사적소유 사이의 단절과 불연속은 무엇보다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행 과정이 지니고 있는 폭력성에서 드러난다. 맑스에 의하면, 개인적 노동에 근거하고 있는 본원적 사적소유가 해소되고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로 이행되는 과정엔 „약탈, 종속, 강탈 살해 등 한 마디로 폭력이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한 폭력의 구체적 사례로 맑스는 15세기 말 이후 영국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들을 제시한다. 곧 어떻게 농민들이 무자비한 폭력과 약탈, 파괴를 통해 자신들의 토지로부터 축출되었는지, 또 그렇게 쫓겨나 걸인이 된 이들이 어떤 무시무시한 법령과 고문을 통해 임금 노동자로 규율화되었는지 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역사 과정들이 보여주는 ‚폭력성’은 맑스의 이론 전개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사적소유가, 정치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인간의 자연적 권리인 본원적 사적 소유와는 아무런 동질적 연속성도 가지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의 폭력적 억압, 축출, 파괴, 부정을 통해서 생겨난 것이라는 걸 말하기 위한 것이다. 본원적 사적소유에서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로의 이행이 이러한 폭력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나아가, 이 이행과정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연적 필연성에 반하는 „인위적 개입과 조작“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걸 드러낸다. 개인의 노동에 의거한 본원적 사적소유가 인간에게 주어진 중요한 자연적 권리로써 그 자체로 정당성을 지니고 있는 데 반해, 본원적 사적소유가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로 이행하는 과정은 그와 같은 자연적 권리를 폭력적으로 약탈하고 억압함으로써 이루어진 „반 자연적“ 과정이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가 그 자체로 ‚자연적’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에서 맑스가 자연권이라는 오래된 형이상학적 관점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이러한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의 부정Negation을 통한 새로운 (사회주의적) 소유에로의 이행을 ‚자연과정의 필연성’에 의거해 정당화하려고 한다는 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맑스에 의하면 „자본주의적 생산과 전유과정, 따라서 자본주의적 사적소유 (das kapitalistische Privateigentum)는 개인적이고 자신의 노동에 근거하고 있는 사적소유 (des individuellen, auf eigene Arbeit gegründeten Privateigentums)의 첫번째 부정 Negation 이다. (이제) 이 자본주의적 생산은 그 스스로 자연과정의 필연성을 통해 mit der Notwendigkeit eines Naturprozesses자기 자신의 부정을 생산해낸다. 이것이 부정의 부정 Negation der Negation이다. 이 부정의 부정은 개인적인 소유 das individuelle Eigentum를 다시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자본주의 시대의 성과 – 협업 및 자유로운 노동자들의 협동 그리고 토지와 노동 자체를 통해 생산된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의 근거 위에서이다.“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가 자신의 내적 필연성에 의해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 생겨나게 될 새로운 소유관계 – 자본주의의 성과를 바탕으로,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에 근거한 개인적 소유! - 는 ‚자연과정의 필연성’을 통해 일어날 것이며, 따라서 이는 본원적 사적소유에 대한 폭력적 억압에 기초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와는 달리 스스로 완전한 정당성을 갖는 소유형태다. 본원적 사적 소유의 폭력적, 인위적 부정(첫번째 부정)으로 생겨난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는, 자연 과정의 필연성을 통해 일어나는 두번째 부정의 변증법을 통해 자신의 잘못된 출생의 오점을 지양하고 역사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폭력과 노동
맑스의 이러한 논의는 많은 이론적, 실천적 물음들을 제기한다. 자본주의적 사적소유가 새로운 ‚사회적’ 사적소유로 스스로를 부정하는 과정이 자연 과정의 필연성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라면 여기엔 아무런 ‚폭력’도 동반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때 요구되는 저 혁명적 폭력은 본원적 사적소유가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로 이행할 때 요구되었던 폭력과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전자의 폭력이 ‚자연과정의 필연성’을 이루기 위한 일종의 ‚자연적, 따라서 정당한 폭력’이라면, 후자의 폭력은 ‚자연과정의 필연성’을 훼손시키는 ‚인위적이고 정당하지 못한 폭력’이라는 점에서? 하지만 누가, 그리고 어떻게 그 두 폭력의 ‚눈에 보이지 않는’ 질적 차이를 구분하고 판가름할 것인가?발터 벤야민의 폭력론을 관통하고 있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 잠시 보류해두고, 우리는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를 지양하고 도달된다는 새로운 소유형태를 지니는 사회가 어떤 모습의 사회일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자.
자신의 노동에서 기인하는 본원적 사적소유가 맑스에게서도 인간의 자연적 권리로 인정되고 있는 한, 그리고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에 근거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이러한 인간의 자연적 권리에 대한 폭력적 억압과 부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 한, 그런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지양하려는 움직임들은 저 훼손당한 본원적 사적소유를 회복하기 위한, 그리하여 폭력적으로 강탈당한 인간의 자연적 권리를 되찾아 오기 위한 해방운동으로 이해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통해 도달되는 사회는 자본주의가 폭압적 방식으로 초래해 낸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분리“를 극복하고 „개인들이 자신의 생산 조건들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노동하는 사회일 것이다. 거기에서 비로소 노동하는 자들은 자신의 행한 노동의 대가를 잉여가치의 형태로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에게 빼앗기는 대신, 온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향유할 수 있는 자연적 권리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행복한 유토피아의 전제로 자리잡고 있는 무엇인가가 우릴 꺼림찍하게 한다. 그건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도래할 저 새로운 삶에 필요 불가결한 근본 조건으로 놓여있는 „노동“이다.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온전하게 정당한 자신의 소유로 향수할 것을 약속하는, 저 자본주의를 극복한 삶의 첫번째 전제 조건은 그가 ‚노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 새로운 사회가 ‚노동하지 않는 자본가’와 ‚노동하는 노동자’의 대립 위에서 건설된 사회이기에 더 중요시된다. 누군가가 ‚노동’하지 않으면 그는 그 노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자연적 권리를 얻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 노동의 대가를 향수할 자격도 갖지 못한다. 그가 그 세계가 제공하는 물질적 혜택을 얻을 수 있으려면, 아니 최소한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그는 노동해야만 한다! 모두가 노동해야만 먹고 살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사회. 우리는 노동을 삶의 근본적 전제조건으로 삼는 이러한 태도가 „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만 빵을 먹게 될 것이다“(창세기 3장 19절)라며, 노동을 원죄를 저지른 인간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길 요구하던 창세기 신화의 세속적 현실화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나아가 우리는, 노동을 먹고 살기 위해 행해야 하는 도덕적, 사회적 의무로 내세우는 이 (유대/기독교적 기원을 갖는) 태도가 우리가 한 때 목청껏 외쳐부르던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 자본가야 처먹지 마라!“라는 구호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도 깨닫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섬뜩한 것은 이것이 오늘날 신자유주의에 의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실업자나 구조조정으로 실직당한 해고자들을 향해 날아가는 칼날이 되고 있음을 목격하는 것이다. „일하지 않고(못하고) 있는 너희들이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고, 자식들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하며, 제대로 먹지 못하는 건 당연한 거다! 먹고 살고 싶으면 무슨 일이든 해라!“ 라고.
노동에 근거한 본원적 사적소유를 인간의 자연적 권리로 받아들이고 이를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에 대립시키는 맑스는 저 오랜 역사를 갖는 노동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정치경제학의 ‚시초축적’ 이데올로기가 저 뿌리깊은 노동 중심주의에 근거해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를 정당화시키고 있다면, 맑스는 바로 그 동일한 노동 중심주의에 입각해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를 비판한다. 그것이 ‚정직한 노동’의 댓가가 아니라 ‚폭력과 강탈’에 기인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끊임없이 논란을 제기하며 해결되기 힘든 많은 질문들을 남겨주었다. 그렇다면 ‚폭력’이 아니라 ‚정직한 노동’을 통해 밑바닥에서부터 자수 성가한 자본가의 소유는 정당한 것일까? 축적한 재산만 믿고 더 이상 일하지 않기는 커녕 세계화라는 경쟁조건 속에서 그 누구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오늘날 자본가들의 노동은 그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그들이 자본가라는 이유로 이들의 모든 노동은 결국 타인의 노동에 대한 착취에 다름아닌 것일까? 그건 21세기의 자본가에게 ‚자본주의 전사’시절에 이루어진 선조 자본가들의 폭력을 원죄처럼 들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Marx : Kapital, 24 Kapitel : Die so genannte ursprüngliche Akkumulation, Ullstein, S.659.
John Locke : Two Treatises of Government. : An Essay Concerning the True Origin, Extent, and End of Civil Government, Of Property, 44.
이 글에서 참조하는 <자본론>은 맑스가 살아있던 시절 스스로 검토하고 수정해 출간했던 독일어 두번째 판 본 (1872년)을 기준으로 한다. 1883년 출간된 <자본론> 3판과 1890년의 4판은 맑스의 사후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해 수정, 보완된 것이다. 김수행의 번역이 근거한 영어본(Penguin Books Limited, Progress Publischers)은 이 판본들과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 맑스가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환>의 하위 절로 다루고있는 ‚자본의 일반공식’, ‚자본의 일반공식의 모순’,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를 김수행 번역본은 독립된 장으로 다루고 있으며, 독일어 2판본에선 <자본의 축적과정> 편의 하위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소위 시초축적’ 도 김수행 본에선 독립된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치경제학의 시초축적이론을 ‚원죄설화’와 비교하는 부분은 1883년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해 보완 출판된 <자본론> 3판 부터 추가된 것이다. 바로 이 구절로 인해 성경에 등장하는 원죄의 댓가로서의 ‚노동’과 맑스주의가 근거하고 있는 노동 중심주의와의 긴장된 친화성이 더 아이러니컬하게 부각되게 된다.
Marx : Kapital, S.706.
Marx : Kapital, S.704.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자본론 3판에 추가시킨 문장을 통해 이를 분명히 한다.
Marx : Kapital, 24 Kapitel : Die so genannte ursprüngliche Akkumulation, Ullstein, S.706.
Marx : Kapital, 24 Kapitel : Die so genannte ursprüngliche Akkumulation, Ullstein, S.704.
Marx : Kapital, 24 Kapitel : Die so genannte ursprüngliche Akkumulation, Ullstein, S.660. 여기서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이 부분에 대한 김수행의 번역이다. 그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이 모든 운동은 끝없는 순환 속에서 빙빙 돌고있는 것 같이 보이는데, 여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본주의적 축적에 선행하는 시초축적…,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결과가 아니라 그의 출발점인 축적을 상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김수행, 979쪽) 이 번역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축적에 선행하는 ‚시초축적’을 상정하는 것이 맑스자신의 요구에 의한 것처럼 되어있는데, 이는 해당 원문의 의미 scheint 를 제대로 옮기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이후의 문맥과의 관계에서 보더라도 명백하게 잘못된 번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