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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의 마지막 횡단 - 발터 벤야민 전기소설
제이 파리니 지음, 전혜림 옮김 / 솔출판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제이 피라니라는 미국 작가가 쓴 발터 벤야민 전기소설 <벤야민의 마지막 횡단>을 읽었다. 다른 글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던 벤야민 개인의 삶의 구체성이 소설가의 상상력을 통해 흥미롭게 구현되어 있다. 저자가 이 "소설‘을 위해 참고했던 벤야민의 글은 "베를린 유년시절‘, "모스크바 일기‘ 등 이며, 거기에 "일방통행로‘의 몇 꼭지, 벤야민의 편지,무엇보다 벤야민 일행을 데리고 피레네 산맥을 넘었던 리사 피트코 Lisa Fittko 가 1985년에 출간한 회고록“피레네를 넘어서”(Mein Weg ueber die Pyrenaen, 1985), 그리고 이 소설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기도 하는 헨니 구를란트의 인터뷰 등이다. 이러한 전거들에 의거해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벤야민의 삶을 나름대로 충실하게 재구성하고는 있지만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 책이 어디까지나 픽션이라는 것이다. 이 책이 벤야민의 생애 마지막을 추적한 레포타쥬가 아니라 소설이라는 사실은 의도된 것인건, 아니면 오해에서였건 우리에게 알려진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여러 장면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 몇가지만 예를 들자면, 벤야민이 산을 넘어 도착한 스페인 호텔의 주인은 이 책에서와는 달리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으며, 거기서 만난 그 여관집 주인의 딸 이야기는 소설적 허구다.
<1900년경 베를린 유년시절>에 등장하는“루이제 폰 란다우”는 벤야민이 어린 시절 다녔던 학교 - 부르조아 계급 아이들로 구성된 - 에 유일한‘귀족의 딸’이었는데 어린 시절 사망하였다. 벤야민이 그녀의 이름‘루이제 폰 란다우’를 역시 젊은 나이에 죽은‘루이제’왕후와 관련시켜 회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그녀는“베를린의 부유한 집안 딸”로서,“그들이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했던”인물로 등장한다.“그 학교에서는 정력적인 젊은 여선생님인 푸팔 선생님이 부르주아 계급의 아이들로 구성된 작은 서클을 하나 조직했는데, 치열한 주도권 쟁탈전에서 항상 푸팔 선생님이 루이제에게, 그 불굴의 루이제에게 굴복했다."(375) 역시‘베를린 유년시절’에 등장하는, 멋진 글씨체를 가진, 학생들에게 지각하지 말 것, 성실할 것을 강조한 푸팔 선생님을 루이제와 대결시켜 패하게 하는 이 대목이나, 벤야민의 외할머니와 루이제를 서로 가상적으로 뒤섞어 만들어진 대목 - ”친한 친구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루이제가 여름 방학마다 타바르츠, 브린디시, 마돈나 디 캄필리오와 같은 이국적인 장소에서 그에게 엽서를 보냈다”(376) - 은 이런 맥락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리 매력적인 소설적 상상력은 아니다.
능력있는 작가라면, 실제의 삶을 픽션으로 재구성해 냄으로써 오히려 실제의 삶보다 더 많은 것들을 사유하게 만들수 있다. 그런데, 제이 파리니가 픽션화시키는 벤야민의 삶은, 벤야민 자신이 남긴 기록의 의미를 키취적으로 속류화시킨다. 그 대표적인 것이‘공작새 섬’에 대한 이야기다.
"호수 한 가운데는 공작새 섬이라고 불리는, 소나무가 군생하고 있는 섬이 있었는데, 이 섬은 벤야민에게 그의 삶에서의 첫 번째 크나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는 간절하게 공작새를 보고 싶어했고, 그의 아버지는 나룻배를 빌려 아이들을 섬으로 데리고 갔다....그들은 그 유명한 새를 잠깐이라도 보기 위해 섬을 샅샅이 뒤졌지만, 단 한 마리의 공작새도 볼 수 없었고 단 하나의 깃털도 찾을 수 없었다. 벤야민이 이에 대해 불평을 터뜨렸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를 나무랐다. "기대를 하면 안 돼! 기대는 불행을 낳을 뿐이다!‘ .그는 그날 이후로 기대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379)
‘공작새섬’은 베를린에서 지하철을 타고 다시 배로 갈아타고 가야 하는 곳이다. 베를린에 있을 때 아이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가본적이 있다. 자전거를 바지선에 싣고 건너간 아름다운 그 섬 위에 꽤 많은 공작들이,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활보하고 있어, 당시 네 살이던 작은 아이를 무섭게했다. <베를린 유년시절>의‘공작새섬’이라는 글에서 벤야민은 어린시절 이 곳에 놀러갔던 이야기를 한다. 그는 공작의 깃털을 찾아보라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섬 구석 구석을 열심히 찾는다. 아이에게 그런 진귀한 습득물은 그 유래한 장소 전체에 대한 승리의 전리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린 벤야민은 섬 여기저기를 유유히 활보하는 공작들을 눈 앞에 바라보면서도 그들이 어딘가 떨어뜨릴 법한 깃털은 하나도 발견하지 못한다. 습득한 물건을 통해 그 공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던 이 좌절의 경험은, 이후 자전거를 배워 더 넓은 영역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게 됨으로써 상쇄된다. 그런데, 제이 파리니는 이 공작새 섬의 경험으로부터 벤야민에게, 무슨 삼류 유행가 가사에나 등장할 법한 속물화된 지혜,“기대는 불행을 낳을 뿐”이기에 무언가를“기대하지 않는 법”을 배우게 한다.
어차피 "소설“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들어가는 저자에게 이 정도의 픽션화는 허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다음 부분들은, 저자의 착각이나 편견, 그도 아니라면 무지의 지나친 개입이라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저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브레히트를 너무도 싫어한다. 그는 소설 속 화자를 통해 브레히트를 거의 인간말종에 다다른 인물로 묘사한다. (저자는 벤야민에 대한 브레히트의 영향력을 부정적으로 여겼던 아도르노 숭배자였을까? 아니면 소비에트로부터도, 동독 정부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던 브레히트의‘공산주의’적 이념의 적대자였을까?)
“브레히트는 모든 사람을 끔찍하게 대했다. 단, 그에게 돈, 섹스, 명성을 선사할 것을 약속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그는 불온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정말 어린애 같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아첨과 희열이 전부였다. 그는 공산주의자인 양 행동했고, 사회적 양심을 가장한 채 스탈린에 의해 후원되는 전 세계의 모든 문학 학회에 참석했다. 하지만 벤야민은 브레히트가 여러 가지 면에서 가짜라고, 대단히 총명한 가짜라고 느꼈다. 그것은 그의 천재성의 이면이었다."(195)
“브레히트는 그의 친구들을 학대했으며, 그의 적들을 이용했다. 그는 여성들에게 무정했고 늘 자신의 애정을 거짓으로 치장했다. 어느 누구도 그 남자보다 더 애인에게 불성실할 수는 없었음에도, 그는 성실을 가장했다. 그는 엘리자베트 하우프만을 거의 폐인으로 만들었고, 그녀는 브레히트의 애정을 얻는 대가로 <서푼짜리 오페라>의 일부를 썼다....브레히트가 편집자나 공동 집필자로서 그의 삶에 출현한 여성들에게 의지하고 또 이용했다는 면에서 벤야민은 그를 천재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 공헌했다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고, 그는 그들의 언어를 모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변형시켰다."(202)
둘째, 이 책에서 벤야민은 지적 편집증 만큼이나 성적욕구를 주체할 수 없는, 그의 천재성이 강렬한 성적 욕구에 뿌리내리고 있는, 그런‘키치적 천재’로 그려진다.
“진정으로 그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섹스였다. 그는 평생에 걸쳐 매음굴에 드나들었는데, 화대를 지불할 때 섹스가 주는 흥분이 사라진다고 불평을 하곤 했다....유감스럽게도 그의 삶에서 우정은 책과 섹스 다음에 오는, 세번째로 중요한 것이었다."(128-129)
벤야민의 생애에 등장한 여자들과의 관계는, 무엇보다 벤야민의 넘쳐흐르는 성적 욕구에 의해 규정된다.
“벤야민에 말에 따르면, 청혼이 불러온 즉각적인 결과는 그날 밤 그레테가 그를 그녀의 침대로 들어오도록 허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첫경험‘이었다. "나는 성욕에 들떠있었고, 사흘을 내리 연달아 그녀와 사랑을 나눴어. 우리는 그러느라 식사도 걸렀고, 휴가 마지막 날이 되자 그녀는 잘 걷지도 못했지‘. 그는 계속해서 평상시처럼 무딘 말투로, 성교 중 그들이 취한 다양한 체위와 그녀의 동물적 반응에 대해 자세히 말했다...그는 성행위의 묘사에 있어서 극도로 객관적이고 분석적이었으며, 화가 날 정도로 솔직했다."(137)
모스크바에서는 번번히 실패하기만 했던 (<모스크바 일기>) 아샤 라치스에 대한 대쉬도, 성적 에너지로 충만해 있는 이 소설 속 벤야민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좌절하기만 했던 라치스에 대한 벤야민의 구애 노력이 안쓰러웠던지 저자는 아치스 자신의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게 한다.
“그는 자신의 몸으로 내 몸을 눌렀고, 마침내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향해 움직였다. 비록 내게는 그에게 키스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지만, 그가 내게 키스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나는 수동적이었고, 그는 내 안으로 침입했다. 나는 그의 손이 내 손을 내 아랫배를 누르고 있던 단단해진 그의 성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다. 그는 바지의 단추를 끌렀고, 바지는 그의 무릅까지 흘러내렸다. 나는 손에 쥐여진 뜨거운 살의 단단함이 좋았다. 그는 몇 초 만에 사정했고, 내게 말했다. "당신을 사랑해, 아샤, 사랑해‘. 혼란스러운 순간이었다."(236)
별로 내켜하지 않는 여자들을 밀어붙여 성적욕구를 충족시키는 발터 벤야민. 이는 벤야민의 젊은 시절 또 다른 연인이었던 율라 콘, 벤야민의 두상을 제작하기도 했던 이 여성 조각가에 대해서는, 거의 강제추행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율라가 옷을 벗고 그에게 등을 돌린 채 거울 앞 작은 의자에 앉아있는 것을 보자 마치 나비가 뱃속에 들어간 듯하던 그의 내부는 말벌이 꿀단지 속에 들어간 것처럼 거세게 울렁대기 시작했다....벤야민의 축축한 옷이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완전히 벌거벗은 그는 발기한 채 푸른색 타일을 밞아 차가워진 발로 방을 가로질러 갔다. 그는 자신의 성기를 그녀 등의 움푹 팬 곳에 밀어붙였다. "지금 당신과 사랑을 나눌 수 없어‘, 그녀는 딱 잘라 말했다. "당신을 사랑해, 율라‘ 그는 말했다. "우리 관계는 뭔가 잘못됐어‘, 그녀는 우기듯이 말했다. '내사랑 율라"...그는 그녀를 더 세게 내리눌렀고, 그의 성기는 격렬한 고통을 느낄 정도로 부풀어있었다. "제발 발터, 이러지마‘ 그녀의 검은 머리는 얼굴 앞에 검은 커튼처럼 매달려 있었고, 목 뒤의 뼈는 상아색 사슬처럼 반짝였다. "난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멈추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그는 자신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율라는 움직이지 않고 그가 사정하기를 기다렸다. '정말 미안해, 내 사랑, 나 자신이 부끄러워" 벤야민은 흰색 타월로 그녀의 등을 닦아주며 말했다."(296)
발터 벤야민이라는, 1900년대를 살았던 독일 유산 시민계급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에조차 가끔씩 이런 성애 장면들을 넣어주어야 하는 것이, 미국 대중 소설의 중요한 성공 전략의 하나일 것이라는 점은 이해가 갈 법도 하다. 그런데, 20세기 초 독일 시민계급 벤야민을, 성적 욕구를 위해 사회적, 계급적 규범 따위는 훌쩍 벗어버린, 리버럴리스트로 변신시키는 이러한 연출법은 벤야민의 아내이자, 독일 대학 영문과 교수의 딸이었던 도라에게 까지 적용되었다. 그녀는 이 소설에서, 벤야민이 방에 들어가 있는 사이 그의 친구 게르하르트 숄렘을 유혹하는 요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는 취했어요. 이성을 잃었고요,‘ 나는 도라에게 말했다.
그녀는 다소 유혹적으로 두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행동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요. 그는 어디서 극단에라도 들어갔어야 했는데 말이에요.‘ 그녀는 말하며 손가락으로 내 셔츠 소매를 잡았다. 나는 이러한 친밀감의 제스쳐를 아주 싫어했다.
"나랑 한잔 더해요‘
마지못해 나는 브랜디 한 잔을 받았다....
갑자기 도라가 내 뒤쪽으로 슬쩍 다가오더니 내 어깨를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긴장 풀어요‘ 그녀는 말했다.
"왜 이렇게 뻣뻣하죠?‘
나는 긴장을 풀려고 노력했지만, 그녀가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나는 몇 차례 심호흡을 했다.
"당신은 화낼 때 무척 섹시해요‘ 그녀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여자랑 자 본적이 있어요, 게르하르트?‘
"네, 물론이죠‘
"못 믿겠는데요‘
...그녀의 두 손이 내 머리카락 사이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금세 내 성기는 딱딱하게 발기되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벤야민이 그녀를 불렀다. "도라!‘, "나 지금 침대에 있어, 다 벗고 있다고‘, 그는 소리 질렀다. "짐승같은 남자라니까요‘ 그녀는 말했다. "이럴땐 칸트도 헤겔도 없어요‘“(145-146)
벤야민과 동시대를 살았던 토마스 만, 로베르트 무질, 혹은 마르셀 프루스트 등의 소설을 읽어본다면 당시 유럽 시민계급의 남녀교제가, 이렇듯 싸구려 헐리우드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성적욕구의 직접적 표출이나 충족을 억제하게 하는 남녀관계의 복합적 의미론이, 그들의 연애를 예민하고도 깊이있는 사유의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회적, 계급적으로 규정된 사랑의 의미론이, 얼마나 많은 철학적, 문학적 사유를 낳게 하였는가. - 예를들어 나는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니클라스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 벤야민의 <괴테의 친화성> 등을 떠올린다. - 이 미국 대중소설 작가는 당대 유럽 시민계급이 자신들의 문화적, 지적 우월성을 유지하였던 이러한 중요한 심리적 필터를 제거해버리고, 그들을 “칸트도 헤겔도 없는”“짐승”으로 연출해 낸다. 부디 독자들은, 미국식 리버럴리즘의 시선으로 가공된 발터 벤야민의 모습을 읽고, 인간 벤야민을, 나아가 그의 사유를 판단내리는 일이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