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민의 <카페림보 연극일지>를 보다. 김한민은 이 책 앞에서 <카페림보>에 대한 다섯 개의 창작물 – 책(그림소설), 전시, 연극, 일지, 영상 – 을 다음과 같은 순서로 보기를 권한다. 책 --> (전시-->연극) --> 일지 --> 영상. 그리고 나는, 작가가 권하고 있는 바로 그 순서대로 <카페림보>를 보았던, 그리 많지 않을 독자 중 하나다. 그렇게 보고 나니 테이크 아웃 드로잉에서 연극을 볼 때는 잘 이해되지 않던 장면들 – 그것은 여러 조건 때문에 생겨났다. 어떤 장면들에서는 배우들의 대사가 잘 전달되지 않았고, 어떤 소품, 예를들어 박새 같은 경우는 너무 작아, 현장에서는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 이, 연극일 지를 보면서 확실해졌다. 그래서 이 ‘일지’는, <카페림보> 연극의 내용 자체를 이해하게 하는 지침서이면서도, 동시에 <카페림보> 연극 자체에서는 보여지지 않는, 그 연극의 발생적 상황들에 대한 극적 기록이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이 책이 그야말로 건조한 ‘일지’일 것이라고 짐작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이미 독립적으로도 하나의 ‘작품’ - 저자 김한민은 이 단어를 좋아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 이다. 그건 무엇보다 이 일지 속에서 작가 김한민이 차지하고 있는 기묘한 위치로 부터 나온다. 이 일지는, ‘카페림보’의 원작자이자, 연극 카페림보의 기획자이자 그 연극이 만들어질 때까지의 1차적 관찰자이자 연루자인 김한민의 1인칭 시점으로 쓰여(그려)지지 않았다. 이 책에서 김한민은 다른 인물들 – 연극에 출연한 배우들, 연출자, 미술 담당자 – 과 마찬가지로 한 명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다. 이 일지를 쓰는(그리는) 김한민은, 그자신 제작자이자 각색자로 참여한 연극을 준비하는 김한민을, 내부에서 동시에 외부에서 그리고 있다. 그를 통해 김한민은 복수화된다. 그로부터 자기 지시적인, autopoetic 한 구조가 생겨난다. 그것이 이 책의 독자를 빨아들이는 기막힌 미적효과를 발휘한다. 그런데, 사실 이런 미적 전략은 이 책 곳곳에 숨겨져 있다. 대표적인 것만 꼽자면 미술담당 “검기의 요청에 의해 삭제된 페이지”와 “연극일지 도난사건”이다. 이 일지를 읽는 독자는 이 일지가 다층적인 실재의 층위에 동시에 속해있음을 깨닫는다.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 속에 김한민이 그리던 일지와 그가 ‘도난당했다’고 믿었던 일지, 그리고 다시 찾은 일지, 나아가 워크룸프레스에 의해 출판되어 우리 손에 도달한 일지는, 실재론적으로 보자면 서로 다른 층위에 있지만, 그를 읽는 독자에게 하나로 겹쳐진다. 이를 현실과 가상의 구분을 의도적으로 혼란시키는 어떤 종류의 문학적 전략이라고, 개념어를 써가며 분석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것이 이 책을 읽는데 혹은 보는데 엄청난 미적 즐거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는 것은 밝혀두어야 하겠다.
이런 점에서 김한민은 천상, 예술가다. 이 괴물같은 예술가는 현실에 대해 말하면서, 그 현실로부터 마술적인 거리를 취한다. 그로부터 그의 ‘작품’이 갖는, 기묘한 매력이, 독자를 현실의 여러 층위를 이동하게 한다. 이 일지의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진행을 맡은 김한민이 바퀴벌레로 분장하고 연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관객들을 향해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은, 고릴락상상스튜디오가 제작한 ‘전시연극 카페림보’의 첫 장면과 이어져 있다. 이 일지를 보고, 인터넷에 올려있는 카페림보 전시연극 영상을 보면 그 순간 우리는 또 한번, 김한민이 의도한, 하지만 김한민 만이 의도하지 않은, “카페림보 연극일지”와 “전시연극 카페림보” 사이의 어떤 이행을 경험한다. 그리고는, ‘전시연극 카페림보’를 더 잘, 더 많이 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해서 <카페림보>에 대한 다섯 개의 창작물 – 책(그림소설), 전시, 연극, 일지, 영상 – 은, 하나의 완결적인 구조를 갖고 서로 얽힌다. 김한민이, 괴물같은 예술가임을 보여주는 증거다.